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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나 이 주제에 대해 의문을 가져보았을 것입니다.
이 주제에 대해 신학교수답게 논리적으로, 그리고 다양한 사례를 포괄한 일반론을
성경을 기초로 도출해 내였다고 판단됩니다.
한가지, 신학의 단점이 부각되는 부분,
즉, 일반화 될 수 없는 하나님과 개개인의 관계에 의한
실재성, 역동성에 대한 부분은 언제나 이러한 신학적인 일반화의 글이 갖게 되는 한계입니다.
아래 글의 저자도 마지막 코멘트로 이 부분을 인정하는 정직한 묵상을 보여주고 있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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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자도 배교할 수 있는가?" 김용복(침신대 교수)
1. 문제제기
잘 믿던 교인이 어느 날 갑자기 교회에 나오지 않겠다고 말한다면 목회자로서 얼마나 당혹스러운 일인가? 하지만 이런 일은 목회현장에서 보면 그다지 낯선 일이 아닌 것 같다. 아니 어쩌면 비일비재하게 일어난다고 말하는 것이 더 정확할 것이다. 그들이 교회에 나오지 않겠다는 이유는 다양하다. 목사로부터 소외당한 느낌을 받았거나, 같은 교인에 의해 마음의 상처를 입었거나, 아니면 자신의 종교생활이 성장하지 못하고 정체된다고 느꼈을 때, 혹은 교회보다 다른 종교단체에 더 큰 매력을 느꼈을 때, 그들은 심사숙고하다가 결국 교회 나가는 것을 포기하게 된다.
그럴 때 목회자는 어떤 반응을 보이게 되는가? 대개는 몇 번 권면하고 심방하고 종용하다가 점차 그를 찾는 횟수가 줄어들면서 결국은 그에 대한 관심의 끈을 놓고 만다. 목회자가 돌보아야 할 대상은 그 사람만이 아니기 때문에, 이런 결과는 어쩌면 자연스런 결말일지도 모른다. 이쯤 되면 목회자는 그 교인에 대해 일반적으로 두 가지 반응을 보인다. 하나는 그 교인의 신앙적 타락 혹은 방황을 일시적일 것이라고 믿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그 교인이 아예 처음부터 하나님의 택함을 받지 못한 사람이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첫 번째 경우는 그래도 일말의 가능성이 남아있다. 꾸준히 그를 위해 기도하면서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있으니 그나마 다행스런 일이다. 하지만 두 번째 경우는 어떤가? 그에 대한 목회자의 관심은 순식간에 사라지고 만다. 그래도 한 때는 자신이 돌보는 양(羊)이었는데 말이다. 이런 결말은 그 교인을 빠져 나올 수 없는 깊은 늪 속으로 내던지는 꼴이어서 양쪽 모두에게 여간 불행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목자에게 잊혀진 양이니 그 교인에게 불행한 일이요, 한 때 자신과 같은 공동체에서 생활하던 사람을 포기했으니 목회자에게도 가슴아픈 일이다.
그렇다면 과연 그 교인의 타락이 일시적 방황인가, 아니면 그 사람이 본래 구원받을 수 없는 운명을 타고난 것일까? 필자는 근본적으로 본래부터 죽을 운명을 가지고 태어난 사람은 아무도 없다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이번 문제제기는 다시 두 가지의 가정으로 재정리될 수 있다. 하나는 신자였던 교인이 타락하는 것은 일시적인 타락이기 때문에 언젠가는 다시 주님 앞으로 돌아오게 될 것이라는 가정이다. 또 하나는 비록 신자였다 하더라도 영원히 타락하여 배교하였기 때문에 다시 돌아오지 못하고 영원형벌을 받게 될 것이라는 가정이다. 첫 번째 가정은 사실 우리에게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어찌되었든 그는 우리의 최고의 관심사요 궁극적인 목표인 구원을 받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 경우라면 목회자는 이렇게 한 마디 던져주는 것으로 모든 문제가 해결될 것이다: "아무개 교인이여! 당신의 지금 방황은 일시적인 것입니다. 언젠가는 다시 주님 앞으로 나오게 될 것이니,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나중에 교회에 다시 나오고 싶은 마음이 생길 것입니다. 그 때 연락 주십시오. 즉시 달려가겠습니다. 우리는 언제든 당신을 환영합니다." 그리고 목회자는 손을 툭툭 털면서 편안한 마음으로 돌아갈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과연 우리 주변에서 어떤 목회자가 이렇게 할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이 문제의 핵심적인 질문은 "신자의 배교가 가능한가?"로 귀결될 수밖에 없다. 과연 신자도 배교할 수 있는가? 만일 신자의 배교를 인정한다면, 교회에 나오지 않겠다고 말하는 교인에게 목회자가 그렇게 태연하고도 아무렇지 않게 한 두번 권면하다가 그만 둘 수 있겠는가?
2. 배교의 의미
위에서 제기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우리는 "배교란 무엇인가?" 하는 질문부터 먼저 풀어야 할 것이다. 배교(背敎)는 한자말 그대로 "가르침을 배반한다"는 뜻이다. 이 말의 성경적 어원은 히브리서 3장 12절, "형제들아 너희가 삼가 혹 너희 중에 누가 믿지 아니하는 악심을 품고 살아계신 하나님에게서 떨어질까 염려할 것이요"에서 찾을 수 있다. 이 구절에서 하나님에게서 "떨어진다"는 표현은 헬라어로 아포스테나이( )인데, 이 아포스테나이의 명사형인 아포스타시아( )에서 영어 아포스타시(apostasy)가 나왔다. 이 단어의 사전적 정의는 배교, 배신, 변절, 탈당 등을 의미한다.
일반 사람들은 배교의 문제를 너무 단순하게 생각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믿음이야 가졌다가도 잃어버리고, 잃었다가도 다시 갖는 것이 아니냐고 생각할 수 있기 때문이다. 엔도 슈사꾸(遠藤周作)는 [침묵]이라는 소설에서 그 나름대로 배교의 문제를 깊이 다루고 있다. 이 소설의 대략적인 줄거리는 로드리꼬라는 신부가 박해 상황에서 다른 사람들이 자신의 신앙심(배교하지 않겠다는 신앙) 때문에 대신 고통을 받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난 뒤 고민하다가 마침내 다른 사람들의 고통을 덜어주기 위해 스스로 배교의 길을 걷는다는 이야기다. 여기서 우리는 저자가 인본주의 시각에서 배교라는 사건을 너무 미화시켰다고 비난할 수 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자신의 영광스런 순교를 위해서 아무 죄가 없는 사람들이 고문당하는 것을 외면하는 것이 참된 사랑이냐, 아니면 비록 자신은 배교자라는 낙인을 받게 되더라도 이웃의 고통을 외면하지 않고 스스로 영광스런 순교의 잔을 포기하는 것이 참된 사랑의 실천인가 하는 본질적인 질문을 던져준다는 점에서, 이 소설은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모으고 있는 듯하다.
그런데 지금 우리가 논의하고 있는 배교라는 주제는 단순히 인간 편에서 믿고 안 믿고, 순종하고 배신하고의 차원을 넘어선다는데 문제의 심각함이 있다. 다시 말해서 배교는 인간 편에서 하나님을 믿었다가 그 신앙을 저버리고 포기하는 것 이상의 의미를 담고 있다는 것이다. 배교는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에서 떨어져 나가는 것을 의미하고, 이미 얻었던 구원을 상실한다는 내용을 함축한다. 그러므로 이 문제는 구원의 확실성과 관련해서 대단히 민감한 주제가 아닐 수 없다. "한번 구원은 영원한 구원"(once saved, always saved!)이라는 믿음을 송두리째 포기하는 문제인 것이다.
3. 신자의 배교에 대한 전통적인 두 견해
신자가 배교할 수 있느냐, 아니면 하나님의 능력으로 끝까지 구원의 길에서 견인(堅忍)되는가 하는 문제를 푸는 열쇠는 하나님의 은혜를 어떻게 이해하느냐에 달려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전통적으로 이 문제와 관련해서 하나님의 은혜를 서로 다르게 해석했던 두 종류의 신학사조가 있다. 이 전통적인 두 견해를 우리는 칼빈주의와 알미니우스주의라고 부른다.
칼빈주의는 하나님의 은혜를 불가항력적 은혜로 이해한 반면, 알미니우스주의는 조건적 은혜로 파악했다. 불가항력적 은혜에 따르면, 하나님이 미리 구원하시기로 예정한 사람들은 하나님의 은혜를 거절할 수 없게 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택하신 백성들은 100% 구원을 받아야 하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바로 이 택한 사람들을 위해서 죽으셨고, 그 대속의 효력이 역시 100% 적용된다. 이런 견해는 하나님의 주권을 최대로 강조한 반면, 상대적으로 인간의 인격적인 반응과 책임성을 약화시키는 결과를 초래한다. 택한 자의 구원을 책임지고 있는 분이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그들의 최종적 구원은 100% 보장되는 것이다. 칼빈은 이렇게 말한 바 있다: "하나님은 우리 안에서 선한 일을 시작하신다.... 더욱이 하나님은 우리를 견인으로까지 확실하게 지킴으로써 그의 사역을 완성하신다.... 견인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사역이다. 결코 우리의 개인적인 행동으로 보상하거나 보완할 수 없다."
반대로 알미니우스주의의 조건적 은혜에 따르면, 신자의 구원 문제는 언제나 현재적일 뿐이다. 오늘의 구원이 언제나 미래의 구원을 보장해주지는 않는다. 이는 누구라도 하나님의 은혜로부터 떨어져 나갈 가능성이 있다는 말이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은혜는 조건적인 것이다. 이 조건은 인간에게 주어진 몫이다. 인간이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잃지 않는다는 조건 아래에서 하나님의 은혜는 구속의 은혜가 된다. 알미니우스주의자들은 성경 속에서 배교한 실제 인물들로 사울왕, 가룟 유다, 아나니아와 삽비라(행5:1-11), 후메내오와 알렉산더(딤전1:19-20), 후메내오와 빌레도(딤후2:16-18), 데마(딤후4:10), 거짓선지자들과 그들을 따르던 사람들(벧후2:1-2) 등을 들고 있다.
그런데 칼빈주의적 관점에서 이 문제에 접근하면, 신자들은 구원을 받기 위해 끝까지 노력해야 할 필요가 없는 것처럼 생각된다. 왜냐하면 구원은 하나님의 절대적인 능력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신자들은 사실상 배교하는 것조차 불가능하다. 하나님이 신자가 배교하도록 방치하지 않으시기 때문이다. 이 얼마나 안전한 보장인가. 그래서 "한번 구원은 영원한 구원"인 것이다. 하지만 이런 입장에 서면, 신자가 스스로 신앙을 지키고 성화를 위해서 노력하고자 하는 마음을 갖지 않게 될 지도 모른다는 문제점이 있다.
반대로 알미니우스의 조건적 은혜도 문제가 없는 것이 아니다. 이 견해는 하나님의 주권과 사랑을 충분하게 담아낼 수 없다. 인간이 선택하는 반응에 따라 하나님의 은혜가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조건적 은혜란 개념에서 보면, 인간의 견인과 배교는 으레 인간의 반응과 결정에 좌우될 수밖에 없기에, 하나님의 주권은 명목상의 주권일 수밖에 없다는 비판을 받게 되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침례교의 조직신학자 멀린스(E. Y. Mullins)가 알미니우스의 은혜론은 이신론(Deism)으로 빠질 위험이 있다고 지적한 것은 정당한 것이었다. 필자는 이런 견해가 본질적으로는 율법적인 구원관과 무관하지 않다는 판단을 한다. 하지만 여기서는 이 문제를 더 깊이 다룰 여유가 없으므로 다음 기회로 미루기로 하겠다.
4. 신자의 배교에 대한 성경적 견해
성경에는 신자들에게 현재의 삶을 아무렇게나 살아도 된다고 말하지 않는다. 구원의 표를 확보했으니 이제 모든 것이 다 끝났다고 말하지도 않는다. 그보다는 오히려 성경은 언제나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구원을 이루라고 충고한다. 그리고 구원을 잃지 않도록, 은혜에서 떨어져 나가지 않도록 조심하라고 경고한다: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나 있을 때 뿐 아니라 더욱 지금 나 없을 때에도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빌2:12). "사람의 미혹을 받지 않도록 주의하라"(마24:4).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마24:13),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 까 조심하라"(고전10:12). "그러므로 모든 들은 것을 우리가 더욱 간절히 삼갈지니 혹 흘러 떠내려 갈까 염려하노라"(히2:1). "우리가 시작할 때에 확실한 것을 끝까지 견고히 잡으면 그리스도와 함께 참예한 자가 되리라"(히3:14). "한번 비췸을 얻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예한바 되고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 타락한 자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케 할 수 없나니 이는 자기가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아 현저히 욕을 보임이라"(히6:4-6).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기가 도리어 버림이 될까 두려워함이로라"(고전9:27). "믿음과 착한 양심을 가지라 어떤 이들이 이 양심을 버렸고 그 믿음에 관하여는 파선하였느니라"(딤전1:19). 분명히 이 말씀들은 신자들이라도 구원의 길에서 떨어지고 믿음을 파선하게 될지도 모른다고 경고한다.
그러나 다른 한편에서는, 우리가 한번 하나님의 자녀가 되면 결코 그 신분을 상실하지 않을 것이라고 선언한다. 그 누구라도 하나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빼앗을 수 없다고 말한다: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니라"(롬8:38-39). "내가 저희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치 아니할 터이요 또 저희를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요10:28). 한번 거듭났는데 어떻게 다시 거듭나지 않은 처음의 상태로 돌아갈 수 있는가? 중생이라고 하는 것은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로 인(印)처지는 것인데, 어떻게 그것이 변질될 수 있겠는가? 신자의 배교를 인정할 수 없다는 성경의 목소리는 그 어느 것보다 큰 설득력을 가지고 있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분명히 성경은 견인과 배교의 문제에서 어느 하나의 단일한 결론을 내리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한 쪽에서는 신자라도 넘어질 수 있으니 조심하라고 경고하면서도, 다른 한 쪽에서는 하나님이 신자들을 결코 넘어지지 않도록 지켜주신다고 약속한다. 이런 성경의 다양성 때문에 사람들은 어느 하나를 확실하게 주장하기가 어렵게 되었다. 이 문제를 어떻게 풀어야 할 것인가? 어떤 것이 성경의 가르침인가?
복음은 강요된 구원의 길이 아니라, 설득하고 초청하는 인격적인 구원의 길이다. 이 복음은 하나님이 주신 은혜로서, 하나님에 대한 인간의 자발적인 반응을 요구한다. 하나님의 은혜는 결코 강제적인 것도 아니지만 그렇다고 해서 무력하거나 조건적인 것도 아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인격적이면서 동시에 강력한 것이다. 어떤 세력도 하나님을 대적할 수 없다.
우리는 하나님이 신자들을 구원으로 인도하실 것을 믿는다. 따라서 신자의 배교는 실제로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신자의 견인은 운명적이고 필연적으로 뒤따르는 논리적 결론은 아니다. 신자들은 믿음 안에 계속 거하기 위해 노력해야 할 것이고, 하나님은 그런 신자들을 안전하게 보호하신다. 하나님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신자들을 "강권적으로" 구원의 길로 인도하실 것이다. 멀린스는 하나님의 강권하시는 은혜를 위험한 절벽에서 놀고 있는 아이에 대한 부모의 교육에 비유하면서 다음과 같이 설명한 바 있다: 아이의 위험을 방지하는 방법은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위험을 제거하기 위해서 담을 쌓아두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아이의 의지와 자제력을 증진시켜 위험을 피하게 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강권적 은혜는 두 번째 방법과 같다.
멀린스는 바로 이런 강권적 은혜를 통해서 하나님이 믿는 자를 끝까지 보존하신다고 믿었다. 다시 말해서 성도의 견인은 "불가항력적 은혜"에 의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강권적 은혜"에 의한 것임을 확신했던 것이다. 멀린스는 이것을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하나님은 우리의 의지를 짓밟는 무엇인가를 통해 불가항력적 은혜로 우리를 보존하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의지를 협력케 하는 강권적 은혜로 보존하신다. 하나님은 범죄와 타락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보존하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죄와 타락에서 회개하고 돌아서서 새롭게 하심으로 보존하신다.
또 침례교 조직신학자인 에릭슨(Millard J. Erickson)도 다음과 같이 이 문제를 정리했다: 히브리서 6장은 참 신자도 타락할 수 있다고 지적하지만 요한복음 10장은 그들이 믿음에서 떨어지게 되지 않을 것이라고 가르친다. 배교라는 사실은 하나의 논리적인 가능성을 띠고 있으나 실제로는 신자에게 발생하는 현상이 아니다. 물론 그들이 자신들의 믿음을 저버리고 그래서 히브리서 6장에서 언급된 그 운명으로 떨어질 수는 있으나, 하나님의 은혜는 그들이 그렇게 타락하지 못하도록 보호해 주신다. 하나님께서는 보호하시되, 신자들이 타락하는 것이 불가능하도록 원천봉쇄하는 것은 아니다. 타락할 수는 있으나 타락하려고 하지 않을 것이라는 우리의 논리는 일견 비논리적인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것은 성경적인 관점이라고 생각한다. 신자들은 그들의 믿음을 포기할 수는 있다. 그러나 그들은 결코 포기하려고 하지 않을 것이다.
멀린스의 말을 인용한다면, 견인과 배교에 대한 성경의 결론은 다음과 같이 세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첫째, 신약성서의 저자들은 모든 신자들이 자신들을 방치한다면 실제로 [은혜에서] 떨어져 나갈 수 있다고 간곡한 권고와 경고를 통해서 말하고 있다; 둘째, 하나님은 사람들이 구원받도록 의도하고 보존하신다. 하지만 그것은 인간의 행동과 무관하게 일어나는 하나의 과정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운 사역에 대한 인간의 능동적인 반응을 포함하는 과정이다; 셋째, 한편으로 하나님의 목적과 은혜와 능력을 무시하거나, 혹은 다른 한 편으로 인간의 반응과 협동을 무시하는 것은 비성서적이며 잘못된 것이다. 물론 궁극적으로 결정적인 요소는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이지 인간의 약함이 아니다. 그 은혜와 능력을 통하여 인간은 약함을 극복할 수 있다.
5. 결론
지금까지 필자는 성도의 견인과 배교의 문제에 대해서 칼빈주의와 알미니우스 입장과 침례교 신학자들의 성경적인 견해를 정리했다. 주제의 난해함과 신학적인 접근으로 이해하는데 다소 어려움이 있었으리라 생각하지만, 이제 처음의 문제제기로 다시 돌아가야 할 것 같다. "신자들도 배교할 수 있는가?" 우리의 결론은 이렇다: 배교의 가능성은 언제나 열려 있지만, 하나님의 강권적 은혜로 신자가 실제로 배교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그렇지만 신자의 견인을 위해서 우리는 끊임없이 노력을 해야 할 것이다. 성화(聖化)에 실패한 견인은 없는 법이다. 그런 점에서 구원의 확신은 언제나 "진행형의 믿음"에서 나온다고 말할 수 있다. "신자들은 미래에 견인된다"는 말보다 "신자들은 미래에도 신앙을 포기하지 않는다"는 표현이 더 성경적일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신자가 언제나 견인된다고 말하면 무리가 없을 것으로 믿는다.
신자의 배교 문제를 지나치게 한 방향으로만 접근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또한 그것은 논리적인 차원에서만 접근될 문제도 아니다. 신자의 견인과 배교는 하나님과 인간이 함께 인격적이고 역동적으로 해결해야 할 문제다.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와 함께, 그리고 우리를 통해서 일하신다. 우리가 믿음으로 순종하지 않는다면 하나님의 은혜도 그 효력을 발휘할 수 없다. 이것은 우리가 마음의 문을 열고 주님을 받아들여야 주님이 우리 안에 들어오실 수 있는 것과 같은 이치다.
놀랍게도 많은 목회자들은 교회에 나가지 않겠다고 하는 교인에 대해서 실제로는 너무 쉽게 방치하는 것 같다. 신자의 배교 가능성을 경고하고 있는 성경 말씀을 기억해야 한다. 하나님이 끝까지 인도해 주실 것이라는 확신이 현실이 되기 위해서는 우리의 노력이 요구되는 것이다.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확신 속에서 목회자는 한 영혼이라도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관심을 가지고 돌보는 목양(牧羊)의 사명을 다해야 할 책임이 있다.
사족(蛇足) 한 마디: 한 사람의 신앙상태를 근본적으로 점검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어쩌면 그것이 불가능한 일일지도 모른다. 나 자신의 신앙상태에 대해서도 불확실할 때가 많은데, 나 아닌 다른 사람이야 오죽 하겠는가? 이 차원에서 본다면, 신자의 배교 문제는 본질적으로 신자의 입교 문제와 맞물려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처음부터 너무 쉽게 형식적인 신앙인이 되게 해놓고, 끝까지 돌보지 못하는 오늘날 목회자들의 안일한 목회태도, 이것이 어쩌면 더 근본적인 문제가 될 수 있을 것이다. 필자는 "신자도 배교할 수 있는가?" 하는 질문을 던지기 이전에, "우리는 정말 참된 신자인가?" 하는 근본적인 물음을 좀더 진지하게 자문해야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첫댓글 배교라는 말 자체가 배교전에는 도안에 있었다라는 것이니 신자의 배교를 말하는 것이라 생각됩니다.
신자의 배교는 회개치 아니하고 끝까지 자유의지에 의해 하나님을 거역하거나 우상숭배를 할때를 말하며 성경은 그 결말에대해 구약을 통해 명확한 경고를 하고 있다고 생각되어지네요.
신앙을 지킨다는 것,, 지속되는 주님의 은혜를 매일의 삶에서 체험하며,, 주님과 늘 함께 동행해야 됨을,,, 느낍니다.
또한 주변에 믿음 약한 동료들을 다시한번 돌아봐야 됨을 느낍니다.
몇가지 스치는 생각들:
1. 위의 글에서 히브리서 6장의 배교의 문제는 가상의 논리를 위한 수사학적 경고라고 여겨져서 밀라드 에릭슨의 견해와는 개인적으로는 달리생각합니다.
2. 이러한 문제와 관련하여 과연 네비게이토에서의 구원관은 어느쪽인지 좀더 생각해 봐야 겠습니다. (이후에 더 논의해보고 싶네요.)
3. 신학이 실존의 신앙의 삶에 대한 이해의 길을 제시하고 실존에서 오는 복잡함과 역동성이 신학에 더욱 도전을 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이 확장해서 말씀과 경험의 논쟁까지 연결시킬 수 있다면, 여전히 우리는 신학적인 실존을 해야 되지 않나 싶습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