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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意義] 매우 청렴결백한 청백리(淸白吏)를 이르는 말.
[出典] 신평 송씨(新平 宋氏) 시조(始祖)의 유래(由來). |
[解義] |
고려시대에는 임기를 마친 부사(付使)가 다른 임지로 떠날때 위로의 뜻으로 말 7필을 주는 제도가 있었다.
충렬왕때 지금의 순천인 승평(昇平)지역 부사를 지낸 최석이란 이가 있었다.
그는 부사로 있으면서 지역사람들에게 선정을 베풀었고 임기가 끝나 돌아갈때는 모두가 아쉬워 했다.
떠날 무렵 그에게 말 7필이 주어졌으나 사양했는데 그중 한 마리가 새끼를 낳자 새끼를 포함해 말 8필을 고을 백성들에게 돌려 주었다 한다.
마을 사람들은 최석의 백성을 아끼는 마음을 기리기 위해 팔마비(八馬碑)를 세우게 되는데 그후 순천은 팔마의 고장 혹은 청백리의 고장으로 불리우게 됐다.
조선시대에도 유사한 사례들이 있다.
이 때에도 고을의 수령이 임기가 끝나 다른 곳으로 가게되면 고을에서 고마움의 뜻으로 좋은 말 8필을 줘 보내는 관습이 있었다.
11대 중종때 송흠은 한 고을의 수령으로 있다가 다른 곳으로 갈때는 꼭 말 3필만 받고 다녔다.
7마리를 고사하고 자신이 탈 말 1필과 아내와 어머니가 탈 말 2필등 단 세 마리의 말만 타고 검소하게 다녀 그에게 ‘삼마태수(三馬太守)'라는 별칭이 붙여졌고 이는 곧 청백리(淸白吏)의 표상으로 받아들여 지고 있다.
우리 선조들중 청렴한 지도자들은 비단 이들뿐만이 아니라 하겠다.
무지한 백성들을 위해 덕을 베풀고 평안하게 생업에 종사할수 있도록 헌신적으로 봉사한 청백리의 사례는 헤아릴수 없을 만큼 많다.
요즘에 돌아가는 우리의 세태와 비교해보면 어느 딴세상 이야기처럼 느껴진다.
물론 옛날이라고 해서 부정부패가 없었던 것은 아닐게다.
조선 후기 백성들에게 가혹한 세금을 물리고 온갖 폭정을 휘둘러 동학농민운동의 단초를 제공한 조병갑 고부군수처럼 헐벗은 백성의 피와 땀을 착취해 자기 배만 채우기에 급급했던 탐관오리들도 청백리 못지 않게 많았을 것이다.
다만 그 시대와 지금이 다른 것이 있다면 그때는 탐관오리 만큼이나 삼마태수같은 청백리가 많았던데 비해 지금은 탐관오리만 많고 주변으로부터 존경받는 청백리는 찾아보기 어렵다는 점일게다.
출처:제주일보 춘하추동.
[參考] 송흠(宋欽):(1459-1547)
조선 판중추부사. 자는 흠지(欽之). 호는 지지당(知止堂). 시호는 효헌(孝憲). 참봉 송가원의 아들.
송흠은 세조 5년(1459)에 나서 명종 2년(1547) 89세로 사망하였는데, 연산군때 퇴직하여 후진교육에 전심했고 중종반정후에는 복직하여 내외의 여러 요직을 거쳤다.
특히 담양부사, 전주부사, 광주·나주목사, 전라도관찰사 등 이 지방에서 외직을 맡았다.
이는 101세를 산 노모를 봉양하기 위해서였다.
효행으로 상을 받았고, 중종 33년(1538)에는 청백리에 녹선되기도 했다. 또한 효헌이란 시호를 받았다.
1492년(성종 23)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 승문원에 있다가 연산군의 폭정으로 퇴직하고 후진교육에 전심했다. 1516년(중종 11) 홍문관 정자로 복직된 후 저작 박사 수찬 정언 병조정랑 지평 등을 역임했다.
그 후 담양 장흥의 부사를 지내고, 노모를 봉양하기 위해 전주부윤으로 전임한 뒤 광주 나주의 목사, 담양 장흥의 부사를 지냈다.
1534년 전라도 관찰사가 되었으나 다시 노모를 위해 왕의 특허를 받고 집에 돌아갔으며, 101세를 산 모친을 봉양, 전후 7회에 걸쳐 효렴으로써 상을 받았다.
1538년 청백리에 녹선되고, 그 후 한성부 우윤, 이조 병조의 판서, 우참찬 등을 거쳐 1543년 판중추부사 겸 지경연사에 이르렀다. 장성의 수강사(壽岡祠)에 제향되었다.
조선 왕조 5백년을 통털어 몇 안되는 청백리 지지당 송흠.
‘모든 일에 그칠 줄 알아야 한다’는 호를 지어 부귀영화에 욕심이 없음을 공공연히 실천한 그는 어느 고을 군수로 있을 때 손님 접대에 비용이 들자 경비를 절감하는 방법으로 손수 술을 빚어 절약하기도 했다.
그가 벼슬에 들어선 것은 21세에 사마시에 합격하면서. 사간원 정언, 헌납, 전라도사, 여러 고을의 수령을 지내고 78세에 이조판서에 임명되었으나 늙은 몸을 핑계로 극구 거절했다.
50여년의 관직 생활 중에 두세번 고향에 돌아와 쉰 적이 있다.
강직한 성격으로 간세한 무리가 성인 군자를 모해하는 정치꼴을 볼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가화만사성이라. 그가 정치 이전에 사회개혁의 기초로 생각한 것은 가정의 윤리.
자식들에게 꼭 실천하게 한 가훈은 이렇다.
‘우리가 행동하는 모든 일의 근원은 충효 이외에 참을 수가 없으니 진실한 사람됨은 충효가 자기 몸에 베어야 한다. 따라서 일상생활을 하는데 윗사람을 섬기고 백성을 통치하는 자는 충효가 아니고는 행동할 수 없는 것이다. 화목하고 아름다운 풍속을 성실히 믿어 실천에 옮긴 것이 어찌 충효속에서 나오지 않을손가. 사람이 불효를 하면 사람이 아니고 사람이 충성을 하지 못한다면 또한 사람이 아니다. 효도를 하지 못하고 충성을 하지 못한다면 그 사람은 사람이 아닌 사람이 될 것이니 생각건대 나의 자손은 나를 공경하며 경계하여야 할 것이다.’
특히 그가 부모를 모실 때 지친 다섯 가지 금기사항과 생활지침은 오늘까지 전해온다.
그 다섯 가지는 부모가 집에 계실 때에는 공경하는 마음을 다하여 모셔야 하고, 봉양함에 있어서는 속으로 우러나오는 즐거운 정신으로 받들어 보셔야 하며, 병환에 걸리신 경우에는 진정 걱정하는 심정으로 치유해 드려야 한다는 것. 또 만약 돌아가시면 애통한 심정을 다 기울여 장례를 치러야 하고 제사를 모실 때에는 엄숙한 마음으로 모셔야 한다는 것이다. 이에 덧붙여 부모를 잘 섬기고 효도하기 위해서는 높은 자리에 있어도 교만하지 말아야 하며, 아랫자리에 있더라도 절대로 문란한 짓을 해서는 안되며, 여러 사람들 속에 있을 때에는 절대로 남과 다투지 말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실제로 그는 어머니 나이 99세가 되자 전라도 관찰사직을 사양하고 노모를 위해 집에 돌아와 어머니 곁을 떠나지 않고 좌우에서 부여잡고 받들었으며 추위와 더위에도 의관을 벗지 않고 예를 지켰으며 어머니 음식을 반드시 먼저 맛본 후 드렸다고 전해진다.
평생을 높은 관직에 있으면서도 청백한 생활로 가정은 굶주림만 겨우 면할 정도로 지낸 것은 ‘불의와 타협하지 않고 선비로서 지켜야 할 도리를 초지일관 변치않고 행한 강직한 품성’ 때문이었다.
충효를 바탕으로 한 청백정신은 오늘날 공무원 사회에 정말 값진 본보기를 보여주고 있다.
그는 저서 ‘지지당집’에 관리의 자세를 두 문장으로 표현하고 있다.
‘물의 근원이 맑으면 흐르는 물도 맑게 흐르며 표적이 바르고 정직하면 그림자 또한 반듯하다.’
‘윗사람이 좋으면 아랫사람은 반드시 더 좋을 것이다.’
그의 사상은 일관되게 ‘깨끗한 마음과 정’으로 흐르고 있다.
정이 없는 사람은 아버지도 어머니도 벗도 인간도 될 수 없고, 그 구실도 할 수 없다는 게 그의 지론이었다. ‘혈연에 의한 공경과 사랑’ '인간애를 봉사정신으로 연결하는 마음씨’를 가진 이 어른은 장성에 관수정(물결의 근원을 보고 물의 근원이 있는 줄을 알며 그 맑은 것을 보고 나쁜 마음을 씻는다는 뜻)을 짓고 양팽손·최경회·백광훈 등 수많은 제자들에게 청백리 정신을 심어주었다.
한 집안의 윤리는 부모의 자비와 자녀의 효가 서로 조화를 이루어야 하며, 이런 가족윤리가 사회윤리로 확대돼 이웃에 봉사할 수 있는 경지에 이를때 조선인의 정신이 바로 설 수 있다고 믿은 송흠의 맑음은 호남 선비정신의 백미가 아닐 수 없다.
호남사림의 튼튼한 맥을 잡아준 ‘사림의 아버지 송흠’이 가르켜준 교훈은 ‘관리의 바른 인간성’이었다.
子曰(자왈), 木從繩則直(목종승즉직)하고 人受諫則聖(인수간즉성)이니라. 공자가 말하기를, 나무는 먹줄을 따르면 곧아지고 사람은 다른 사람의 충고를 들으면 마음이 성스러워진다.
When a tree grows straight following a carpenter's Chinese inkline, it grows to become strong and upright and when a person listens to the good advice of others, his heart becomes noble.
옛날 연산군 때 최부와 송흠이라는 선비가 있었다.
벼슬은 최부가 높았지만 홍문관에서 함께 일하고 있었고 고향도 가까운 처지라 가깝게 지내는 터였다.
함께 고향으로 휴가를 간 뒤 송흠이 몇 리 떨어진 최부의 집을 찾아왔다.
점심 겸상을 물린 뒤 최부가 느닷없이 무슨 말을 타고 왔느냐고 물었다.
송흠은 역마를 타고 왔다고 말했다.
그러자 최부는 집에 올 때까지만 탈 수 있는 역마를 어찌 사사로운 일에 이용하느냐고 물었다.
생각지도 못한 힐책에 송흠은 몹시 부끄러워 돌아갈 때는 역마를 끌고 걸어갔다.
휴가가 끝나고 얼마 뒤 홍문관을 떠나게 된 송흠은 최부에게 정중히 사과했다.
최부는 “자네는 나이가 젊네. 후에는 더욱 조심해야 할 것일세”라며 타일렀다.
좋은 약은 입에 쓰다고 했다.
그것을 잘 알면서도 충고를 하고, 또 달게 받아들인 옛 선비들의 모습을 배워야 한다.
삼마태수- 청백리를 가리킴
한고을의 수령이 부임지로 나갈때나 또는 임기가 끝날때 감사의 표시로 보통 그 고을에서 가장 좋은 말 여덟마리를 바치는 것이 관례로 되어 있었다.
그런데 조선 중종때 송흠(宋欽)이라는 분은 새로 부임해 갈 때 세 마리의 말만 받았으니, 한 필은 본인이 탈 말, 어머니와 아내가 탈 말이 각각 한필 그래서 총3필을 받아 그 당시 사람들이 송흠을 삼마태수라 불렀으니 청백리를 가리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