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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좋은사람들교회 원문보기 글쓴이: 호도알
영성훈련
개혁교회 맥락에서의 영성 형성
엘리자벳 리버트(Sanfrancisco 신학대학원 영성생활 교수)
"영성 형성과 영성훈련"이라는 주제에 비추어 이 협의회의 핵심 의제, 곧 "영성과 정의"에 관한 생각을 정리하기 시작하면서 나는 내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을 기술하고(descriptive) 만들어 보는(constructive)것이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나는 지금까지 단지 직관적으로 파악한 것에 지나지 않는 단상을 포함하여, 영성형성에 관한 생각을 시론적으로라도 진술해야 할 의무를 부과 받았습니다. 여러분이 내 발제를 듣고 나면 20세기 개혁교회 맥락에서의 영성형성의 이론과 실제에 관한 통전적 관점을 서술한 내 발제가 부족하기 짝이 없는 것이라는 것을 아실 것입니다. 그러나 나는 여러분이 초대해 주신 덕분에 용기를 내어 내 생각을 심화시킬 수 있었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서면으로 드리는 내 발제문은 구두로 할 수 있는 것보다 훨씬 많은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여하튼 나는 무슨 얘기를 하든지, 장차 나타날, 영성형성에 관한 보다 완성된 체계의 토대를 놓는 심정으로 하려 합니다.
지금 영성형성에 관하여 내가 말하려는 내용은 일정한 맥락에서 나온 것입니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나는 산프란시스코 신학교 부설 기독교영성 프로그램에서 하워드 라이스(Howard Rice)를 포함한 여러 동료들과 함께 영성훈련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는데, 내 생각은 바로 여기서 얻은 경험과 관련이 있습니다. 기독교 영성 프로그램을 통해서 '우리가 하고 있는 일은 무엇인가', 그리고 '왜 우리는 이 일을 하고 있는가'라는 질문에 답변하려고 노력하는 과정에서 나는 지금 제가 말하고자 하는 방향으로 생각을 모아 가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이 발제는 우리들의 공동 프로젝트의 성격을 규명해 보려는 나 자신의 시도에 불과한 것임을 밝혀 둡니다. 모순되는 내용이나 미비한 점이 발견되면 어느 때라도 내 생각을 수정할 용의가 있습니다. 나는 이 협의회가 그러한 것들을 한데 모아 보는 계기가 되기를 바라면서, 그러한 기회를 제공해 준 여러분께 감사드립니다. 오늘 할 말을 정리하면서 나는 "전에는 전혀 그것을 알지 못하였다"고 느낀 적이 여러 번 있었습니다. 모쪼록, 나의 이 시론적인 발제가 계기가 되어서 여러분이 영성형성에 관해 새로운 방식으로 생각할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영성형성:오늘날의 상황
영성형성의 사례연구를 위하여 먼저 산프란시스코 신학교를 다루어 보고자 합니다. 내가 이 학교에서 영성생활 부교수이자 기독교 영성 프로그램 위원장직을 맡은 것은 1987년이었는데, 그때 나는 이 역사적 시점에서 한 미국 장로교 신학교의 영성형성이 어떤 식으로 진행되는지에 관하여 무엇인가를 듣고 배우려고 노력했습니다. 학장의 성원에 힘입어 나는 나의 생각들을 모아서 글로 출판하였는데, 그 첫머리는 루이스 머지(Lewis Mudge)학장의 다음과 같은 말로 시작됩니다:"우리 미국인들은, 우리도 그들 가운데 한 사람들이지만, 신앙에 관한 집중된 비전 혹은 이해가 없어서 멸망해 가고 있다." 그리고 그 다음에 다음과 같은 머리말이 나옵니다:
"모든 신앙 공동체는 각자 자기 나름대로 자신의 비전을 표현하는 언어와 적절한 상징을 찾아내야 하고, 그것을 전달하는 방식을 발견해 내야하며, 자신의 비전과 실천을 비판적으로 성찰해야 한다. 간단히 말해서, 중심적인 비전을 표현하기 위해서는 영성을 표현해야 한다. 신학교라는 공동체는 특정한 교파와 거기에 소속된 행정기관들에 일정한 책임을 지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기독교 교회의 공동유산에 충실한, 즉 에큐메니칼(ecumenical)하고,
개혁전통의 핵심적인 비전에 충실한, 즉 특수하며(particular),
오늘날의 문화적․종교적 상황, 특히 인종, 계급, 정치, 성 등의 이
유로 소외된 사람들의 문제에 예민한, 즉 예언자적인(prophetic) 영
성을 재발굴하고, 되살리며 부활시켜야 한다.
앞으로의 발제에서 나는 먼저 영성형성의 개념을 정의하고, 그 다음에 이 세 가지 특징들(ecumenical, particular, prophetic)에 관해 각각 간략히 살펴보려 합니다.
영성형성(Spiritual Formation)이란 무엇인가?
영성형성에 관한 다음의 정의는 이 논의의 밑바탕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영성형성은 기독교인들과 그들이 세운 단체들이 하나님의 말씀 아래서 그리스도의 영을 경험하고 그것이 순응하도록 하는 성찰과 실천의 과정이다."
그러므로 영성형성은 신앙 공동체가 기독교인들의 신앙과 생활을 심화하기 위하여 사용하는 모든 과정을 가리킨다, 위에서 인용한 영성형성의 정의는, 비록 개혁교회 기독교인들 위주의 신학적 언어로 되어 있긴 하지만, 다양한 기독교적 맥락에서 사용될 수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개혁교회 영성의 특징
"영성"(spirituality)이라는 단어는 개신교도들, 특히 개혁교회 기독교인들에게는 낯설게 들립니다. 신학적 논의에 흔히 등장하는 개념인 이 용어는 생겨난 지가 얼마 되지 않습니다. 우리의 목적을 위하여 산드라 슈나이더(Sandra Schneider)의 말을 원용할 필요가 있는데, 그는 기독교 영성을 "기독교인의 종교적 경험 그 자체"라고 정의하였습니다. 개혁교회의 맥락에서 그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산프란시스코 신학교의 동료 하워드 라이스는 형성을 "우리가 우리 안과 우리 주변에서 매우 실제적인 현존으로 임재하시는 하나님을 경험하고 그에 대해 응답하기 위하여 우리 삶을 영위하는 방식"이라고 설명합니다.
기독교적 삶을 살아가는 여타의 양식과 마찬가지로, 개혁교회 영성은 구체적인 상황 속에서 일어났고 형성되었습니다. 라이스는 개혁교회 영성의 특징을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A. 그것은 일정한 계급적 지향을 갖게 되었다. 미국에서 장로교는 상향 지향적인 중산계급의 종교가 되었습니다. 한국 개신교의 경우 초창기에 소외된 자들에 대해 강력한 연대의 입장을 보였으나, 최근에는 미국과 비슷하게 중산층과 상류층 쪽으로 방향을 바꾸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B. 개혁교회는 전형적으로 행위를 배척하고 거저 받은 은혜를 강조해 왔다. 개혁주의적 삶의 이러한 특징은 장로교인들이 경제적으로나 정치적으로 특권층이 되면서 긴장을 일으키고 있습니다.
C. 개혁교회 영성은 개인주의를 배척하고 집단적 경건을 강조해 왔다. 이러한 특징으로 인해 개혁교회는 유교문화권에서 공감을 얻을 수 있었으리라고 생각됩니다.
D. 개혁교회 경건을 감상주의를 배격하고 머리와 가슴의 균형을 강조하는 경향을 보여 왔다. 나는 이러한 긴장이 한국 기독교의 상황에서 어떻게 나타났는지는 확실히 알지 못하지만, 20세기 한국기독교가 보여 온 근본주의적 경향 뿐 아니라, 전통적으로 식자 계급을 존중한 것이라든지, 한국 개신교의 초창기에 권력에서 소외된 학자들이 하층계급 사람들과 결합된 것은 한국적인 방식으로 이러한 갈등을 야기하였으리라고 생각합니다.
E. 개혁교회 영성은 피안성(otherworldliness)을 의심하고, 창조의 선함과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이 세계에서 적극적으로 행동해야 할 필요성을 강조해 왔다. 이 후자의 특징은 최근 한국과 미국 개혁교회 교인들의 경건의 표현 속에서 약화된 것처럼 모이는데, 그 이유는 피안성, 근본주의, 그리고 "긍정적 사고"가 각각의 문화적 상황에 독특하게 뿌리박고 있기 때문입니다.
라이스 교수가 말하는 개혁교회의 영성의 두드러진 특징 가운데는 진정한 영성의 표현으로서의 세상 속에서의 정의를 위한 투신, 검소한 생활의 실천, 세상 재화의 적절하고도 즐거운 활용, 거룩 혹은 성화의 과정을 위한 헌신이 포함됩니다.
라이스 교수가 진정한 개혁교회 경건의 특징으로 꼽은 것을 좀 더 길게 인용할 필요가 있을 것입니다:
1. 집단적 헌신과 개인적 헌신의 균형을 추구함으로써 신앙 공동체가 개개인의 실천을 통하여 풍요로워지고 개개인의 사적 생활이 전체 교회의 증거에 의하여 시정되고 심화되도록 한다.
2. 감정과 이성의 균형을 추구함으로써 예민한 감수성을 소유하면서도 신실한 자세를 견지하도록 한다. 성서를 자신의 삶의 중심으로 삼을 뿐 아니라, 그것을 명상하고 연구함으로써 우리의 하나님이 과연 어떤 분인가에 관하여 정직한 자세를 유지한다. 그러나, 이때의 성서연구를 차가운 이성에만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영혼 안에 내주하시는 그리스도의 풍성함, 곧 신자와 그리스도의 신비적 일치를 경험하는 것이다.
3. 하나님의 선한 세계를 기쁨으로 받아들이되 신중한 청지기 정신으로 소유에 집착하는 우상숭배에 빠지지 않는다. 검소의 생활들을 실천함으로써 한편으로는 물질적 소유에 사로잡히지 않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하나님이 주신 좋은 선물을 거부하지 않는다.
4. 고요함을 유지하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유지하려고 노력하되, 그와 동시에 그리스도의 현존에 감동하여 이 세상 속에서 이웃을 위하여 봉사함으로써 우리의 신앙을 실천하려고 노력한다. 그것은 사적 차원과 공적 차원 모두를 통전하는 신앙이다."
개혁교회 영성에 관한 이러한 설명이 여러분들이 한국적 맥락에서 경험한 것과 얼마만큼 맞아떨어지는지에 대한 판단은 여러분들이 직접 하십시오, 그러나 어쨌든, 라이스 교수의 이러한 설명은 최근에 내가 개혁교회 영성의 핵심에 관해 이해한 것을 말해 주고 있으며, 여러분과 내가 영성형성과 영성훈련이라는 우리의 주제로 접근해 들어가는데 공통적인 기반이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영성형성의 현대 세계적인 컨텍스트
영성형성은 언제나 일정한 컨텍스트에서 일어납니다. 현대 세계의 상황은 독특한 영성형성을 요구합니다. 현대세계의 상황이 두드러진 특징으로 다음과 같은 것들을 들 수 있습니다.
세계의 "축소"와 그에 따른 세계 의식(global consciousness)의 증대
커뮤니케이션(이 발제원고가 팩시밀리로 왔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오)과 여행(5명의 산프란시스코 신학교 교수가 이곳에 왔습니다!)의 확대와 증가
구 소련과 동구권의 붕괴, 그리고 외세의 정치적․경제적 지배로부터 벗어나려는 한국민중의 열망에서 볼 수 있는 것 같은, "작은 아이덴티티"(small identities)의 추구
대규모 경제체제, 이제 자본주의는 자신의 약점을 견제하고 비판하는 다른 경쟁적 경제체제가 없는 유일한 체제가 되어 버렸습니다.
세계경제와 정치구조가 세계인민의 요구를 충족시켜 주고 세계 대다수 민중에게 평화와 안정을 가져다주는 데 실패했습니다
부익부 빈익빈 현상의 심화, 이것은 국지적 차원에서나 세계적 차원에서나 마찬가지입니다. 오늘날 남반부와 북반부의 경제적 격차는 갈수록 커져 가고 있지 않습니까?
"가난한 자들의 떨쳐 일어섬." 오늘날 빼앗기고 억압받는 민중들은 각성하여 스스로를 조직화하고 인간관계의 재편을 요구하는 운동을 전개하고 있습니다.
여성의 자각, 오늘날 여성들은 자신이 소외된(적어도 상대적으로)자들임을 각성하고 있고, 많은 여성해방운동가들이 학계와 교회생활에서 활동하고 있습니다.
세계의 환경위기가 돌이킬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이 위기는 석유화학제품과 핵연료를 지나치게 많이 사용하고, 세계적 규모의 군산복합체가 세계의 한정된 자원을 단기간에 소모할 수 있는 무기로 바꾸고, 결과적으로 이 세계의 장기적 생존능력을 희생시키는데서 비롯됩니다.
한국적 상황
나는 복합적인 한국 상황을 이해한다고 감히 말씀드릴 수는 없습니다. 나는 한국 상황 속에서 살아본 적도 없고 이에 관해 깊이 연구할 기회도 갖지 못했습니다. 여러분의 정치적․경제적․문화적․종교적 상황의 특징에 대해서는 여러분들이 저보다 더 잘 아실 것입니다. 한국이라는 묘판은 좋든 나쁘든지 간에 장차 기독교, 그 중에서도 개혁신앙의 증거자들이 나올 여러분들의 밭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미국의 서해안에 있는 장로교 신학교에서 영성을 가르치는 로마 가톨릭 수녀회의 일원으로, 나의 관점에서, 내가 여러분들의 상황에 대해 느낀 몇 가지 점들을 언급하고자 합니다.
1893년 미국 선교협의회가 채택한 선교전략들 중의 하나인 "네비우스 방식"을 간략히 살펴보는 가운데 나는 놀랍게도 이것이 내가 속한 수녀회가 1840년대에 프랑스어권 캐나다에서 활동할 때의 정신과 유사하다는 것을 발견하였습니다. 그중 가장 두드러진 것은 이것입니다:"양반 계급보다는 상민 계급을 전도하는 것이 더 효과적이다. 여성을 회심시키고 기독교인 소녀들을 교육하면 큰 효과를 얻을 것이다. 도회지의 초등학교를 육성하는 것도 기독교 교육의 발전에 크게 기여할 수 있을 것이다." 내가 속한 수녀회 역시 이러한 전략에 근거하여 활동하였습니다. 물론 프랑스어권 캐나다의 경우는 당시 이미 기독교 복음이 들어와 있었고, 적어도 명목상으로는 로마 가톨릭을 국교로 하고 있었기 때문에 개종을 목표로 하기보다는 기독교인과 사회 성원으로서의 인격적 성숙을 목표로 하였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긴 합니다. 어쨌든 지구를 반 바퀴나 가야 있는 곳에서 비슷한 전략이 사용되었다는 점을 알게 되면서 나는 그보다 100년이나 지난 지금의 한국적 상황에 주목하게 되었습니다.
나는 지난 20년간 미국에서 일어난 신학, 교회론, 심리학, 영성의 변화를 연구하면서 지금의 생각을 정리하게 되었습니다. 특별히 나는 한국을 방문하려고 준비하면서 민중 신학의 특징을 알아보려고 노력하였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영성형성이 이루어지고 있는 최근 북아메리카의 상황과 민중신학의 핵심 요소가 서로 비슷하다는 점입니다. 앞으로 여러분과 제가 이야기를 계속해 나가는 가운데 여러분 스스로가 이러한 유사성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민중신학과 관련된 여러 흐름이 북미에서 일어난 신학과 영성에 있어서의 강조점의 변화와 일치하는 만큼, 한국 기독교인들의 의식 속에는 이미 영성형성의 한국적 요소가 존재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내가 말하고 싶은 또 한가지는, 미국에서건 한국에서건 장로교인들이 "세상 안에 있으나 세상에 속하지는 않는"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하는 점입니다. 각자의 상황에서 어떻게 교회는 사회의 한복판에서 존재하면서 예언자적인 역할을 감당할 수 있을 것인가? 미국교회와 한국교회는 각각 얼마만큼 사회적 기형에 영향을 받는가? 추측컨대, 각자의 상황을 움직이는 힘과 그에 대한 미국장로교회와 한국장로교회의 반응은 대단히 다를 것입니다. 그러나 각 교회는 공적분야와 관련하여 자신의 역할을 분별할 필요가 있고, 그러기 위해서는 영성형성에 대한 새로운 이해가 필요할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개혁교회의 컨텍스트 속에서의 영성형성의 특징
이상에서 말한 영성형성의 개념, 개혁교회 영성에 관한 설명과 세계적․국지적 컨텍스트에 대한 요약으로부터 우리는 개혁교회의 컨텍스트 속에서의 영성형성의 특징들을 추출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영성형성을 위해서는 다음과 같은 내용의 적절한 프로그램이 갖추어져야 한다고 나는 생각합니다.
성서에 근거해야 한다. 다시 말해서 신중하게 해석되고 해석학적으로 정교한 성서적 증거에 바탕을 두고 있을 뿐 아니라, 또 그것에 의해 비판을 받는 것이어야 한다.
교회의 오랜 전통과 종교개혁자들의 통찰을 인식하는 것이어야 한다, 기독교인의 영성생활은 초대 기독교 공동체에서 시작되는 것으로, 그들의 풍성한 경험은 오늘 우리 시대에도 유용한 것이다.
신앙 공동체의 공동체적 예배가 출발점이자 목표점이 되어야 한다.
다양하게 표현된 영성의 역사적 유연성을 인정하고 다양한 문화적 컨텍스트를 반영하는 것이어야 한다. 모든 사람이 반드시 그렇게 살아야만 하는 유일한 기독교 생활방식이란 존재할 수 없다. 어떤 문화든지 전체 교회를 위하여 어떤 점은 공헌할 점이 있는가 하면 어떤 점은 맹목적이고 파괴적인 경향을 가지고 있다고 보는 편이 옳을 것이다.
신앙 실천과 관련하여 유기적인 입장을 견지함으로써, 여러 가지 형태의 성/속 이분법에 빠지지 말고 생의 모든 영역에 영향을 미치는 것이 되어야 한다.
경험적인 것과 비판적인 것, 내적인 깊이와 세상 생활에 관한 폭넓은 견문의 역동적 균형을 추구하는 것, 다시 말해서 머리와 가슴, 기도와 행동을 통일한 것이어야 한다.
실제적인 삶 속에서 지속적으로 영적인 생활을 할 수 있도록 하는 "도구"를 발전시킴으로써, 사람들이 일상적인 삶을 살아갈 때 스스로 분별력 있는 생활의 능력을 키워 주는 것이어야 한다.
목표 지향적이기보다는 과정 지향적인 것이어야 한다. 영성 형성을 위해서는 우리가 어떤 과정을 거치느냐가 정해진 목표에 도달한다는 사실 그 자체보다도 중요한 것이다.
영성형성의 과제는 특정한 기관신학교이든 특정교회 회중이든만의 책임이 아니라 전체 교회의 책임이라고 보아야 한다.
중간요약
영성형성은 컨텍스트 속에서 이루어져야 합니다. 영성형성을 위해서 우리는 세계적, 국가적, 교회적 컨텍스트에 대하여 앞에서 말한 내용을 염두에 두면서 우리가 살고 있는 개인의 내면적인(intrapersonal), 인간 상호간의(interpersonal), 구조적인(systematic), 그리고 환경적인(environmental) 컨텍스트를 연관시켜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는 현대 교회에 적합한 영성을 개발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영성형성에 관한 새로운 비전
영성형성에 관한 새로운 비전을 만들어 내기 위해서는 몇 가지 근본적인 경험과 해석학적인 도구를 필요로 합니다. 지금 여기서 그것을 자세하게 말씀드릴 수는 없지만, 그것이 없으면 새로운 방식의 영성형성이란 기대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중 나는 다음 네 가지를 제시하고 싶습니다.
A. 하나님/사람/세계에 관한 지적/비판적 감성적/경험적 인식. 우리는 인간이 어떻게 자신의 경험에 이르고 그것을 성찰하느냐 하는데 대한 이해뿐 아니라 경험을 영성의 원천으로 평가하는 해석학을 필요로 합니다. 새로운 양식의 영성형성은 하나님은 우리의 경험을 통하여 활동하시며, 질병(dis-ease), 기능장애(dis-function), 불연속(dis-continuity) 같은 불가피한 경험을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의 부름을 경험할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B. 성서적 문화와 세상의 문화거시적 관점에서든 미시적 관점에서든가 서로 대화하도록 하는 성서 해석 방법. 근대 유럽의 역사비평적 주석은 이 중요한 성서해석학이 없기 때문에 이 두 가지를 연결시켜 주지 못한다고 생각합니다.
C. 역사를 성례전으로 보는 사고. 다시 말해서 역사를 컨텍스트의 일이자 영성형성이 일어나는 현장으로 보는 태도. 그러한 역사관은 우리로 하여금 역사를 단순히 역사적인 관점에서만 보지 아니하고, 시민적․정치적 생활, 사업과 무역, 그리고 기타 사회구조 속에서 하나님의 행동을 발견하려고 노력하도록 해줍니다.
D. 신학적 성찰에 앞서서 종교적 경험을 존중하고, 현 시대에 불가피하게 존재하는 신학적 다원주의를 인정하며, 연역적으로보다는 귀납적으로 논리를 전개시키는 신학방법. 신학의 과제 속에는, 영성을 재배하는 방식으로가 아니라 영성과의 역동적인 관계에서 출발하여, 다양한 영성의 유용성을 선언하는 것이 포함되어야 한다고 봅니다.
성찰방법
이제 보다 실제적인 차원으로 넘어가 봅니다. 나는 우리의 경험을 영성형성에 끌어들이기 위해 바로 그 경험을 성찰하는 한가지 방법을 제안하고 싶습니다. 이 방법은 영성과 정의 센터(Center for Spirituality and Justice)의 아이너 쉐어(Einor Shea)와 존 모스틴(John Mostyn), 그리고 그밖에 다른 사람들의 연구에 근거를 두고 그것을 약간 발전시킨 것입니다. 이 성찰방법을 소개하기 위하여 나는 몇 가지 컨텍스트를 설정해야 할 것 같습니다.
A. 현대 기독교인들이 "영적이다"(spiritual)라는 단어를 사용할 때 그것은 불행한 결과를 가져올 수 있는 몇 가지 함의를 가지고 있습니다. "영적인"이라는 말은 저속한(mundane), 물질적인(material), 혹은 육체적인(embodied)의 반대말, 그리고 때로는 현세적인(temporary)의 반대말로 사용되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영적인"이라는 말은 흔히 하나님께 피안적인(otherworldly), 비물질적인(immaterial), 비육체적인 태도로 다가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신약성서에 나오는 "영적인"의 본래 의미는 이러한 함의들과는 전혀 다릅니다. "영적이다"라는 말은 하나님의 거룩한 영이 내주하는 사람으로 산다는 것을 의미합니다(고전 2:14-15). 그러므로, 기독교 역사의 초창기에, 줄잡아 12세게까지, "영적이다"라는 단어는 "성령에 다라 사는 삶, 그리고 그러한 삶의 결과"를 의미하는 말로 사용되었습니다. 이처럼 신약성서에 본래 어떻게 사용되었는가, 그리고 기독교 역사의 초기에 이 말을 어떻게 이해했는가를 살펴보는 작업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입니다. 내가 "영적이다"라는 말을 사용할 때 그것은 기독교 신앙의 관점에서 보아 성령의 능력 아래서 사는 것을 의미하는 가장 깊은 차원의 인간 삶 전반을 의미합니다.
B. 성령의 능력 아래 있는 인간의 깊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적어도 인간 삶의 네 가지 차원을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 네 가지 차원은 따로따로 독립된 차원으로 존재하지 않고 상호연관 되어 있는 방식으로 존재합니다. 네 가지 차원이란 개인의 내면적(intrapersonal) 차원, 인간 상호간의(interpersonal) 차원, 구조적인(systemic) 차원, 그리고 환경적인(environmental)차원을 말함이다. 모든 인간은 이 네 가지 차원 안에 동시에 존재하지만, 인간 의식이 본성 상 우리의 의식은 한 시점 한 차원에 묶여 있습니다. 인간의 삶 속에서 하시는 성령의 활동을 다른 차원은 제쳐 두고 한 가지 혹은 두 가지 차원에 초점을 맞추어 생각할 수는 있습니다.
"영적이다" 라는 말이 "비육체적", "비물질적"이라는 함의로 사용되었음을 생각할 때 우리는 성령이 인간의 삶 속에서 하시는 역할과 행동, 즉 영적이다라는 말의 의미를 개인의 내면적(intrapersonal) 차원 혹은 인간 삶 중에서 인간상호간의(interpersonal) 차원에만 초점을 맞추어 이해해 왔음을 알 수 있습니다. 영성형성이란 말도 자연히 "내적생활" 혹은, 기껏해야 기독교인 개개인의 상호관계 속에서만 이해하는 경향을 보여 왔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나는, 성령은 인간 삶의 다른 두 가지 차원, 즉 우리가 사는 구조와 모든 생명을 지탱하는 환경 안에서도 똑같이 활동하신다는 것을 말하고 싶습니다. 우리는 어떻게 이러한 차원들에서 이루어지는 성령의 활동을 분별할 수 있을까요? 어떻게 우리는 영성형성에 관한 우리의 이해의 폭은 넓혀 이 두 가지 차원을 끌어안을 수 있을까요?
C. 정의와 영성 센터에서 일하는 사람들을 로마 가톨릭 신자들이었습니다. 따라서 그들은 인간을 이해하는데 있어서도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 로마 가톨릭 교회의 조직신학자로서 가장 유명해진 칼 라너(Karl Rahner)의 신학적 입장을 따랐습니다. 라너는 "동시성의 원리"라는 것을 제안하였는데, 이것은 하나님 경험은 동시에 자아경험이며 이웃경험이라는 말입니다. 바꾸어 말하면, 어떤 사람이 자아의 가장 깊은 차원을 인식하게 되면 그는 그 과정에서 성령의 역사를 체험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웃을 인식할 때 성령은 바로 그 이웃과의 관계 속에서 마찬가지로 역사 하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인간 안에서와 인간 사이에서 동시에 현존하신다는 이러한 인식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인간 삶의 상호침투적 차원을 이해할 때 우리는 새로운 비판적 안목을 얻게 됩니다. 그 때 우리는 하나님의 성령은 구조("종교적"인 것과 그 밖의 것을 포함한 모든 종류의 조직)와 전체 환경(environment)에서 역사 하신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이러한 차원에서 이루어지는 성령의 역사는 대단히 은밀하고 신비스럽게 전개되지만, 우리는 그것을 분별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 때 영성형성은 두 가지 역할을 담당하게 됩니다:(1)성령은 어떻게, 어디에서 역사하여 모든 것을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시켜 가는가를 알 수 있는 신앙적 안목을 키워 준다. (2) 성령은 어떻게 우리를개인이든 공동체이든불러서 모든 피조세계를 하나님의 나라로 변혁하는 일에 참여하게 하시는가를 깨닫게 한다.
라너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갑니다. 그는 경험의 개념을 성찰하면서, 경험에 관한 우리의 의식은 명료성에 있어서 열 가지 차원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즉 일정한 주제가 없는(nonthematic)것에서부터 반성적(reflective)인 것, 해석적인(interpretive) 것에 이르기까지 다양합니다. 특정한 순간에 우리에게 일어나고 있는 사건에 관한 의식은 대단히 산만하고 불분명할 수 있습니다(다시 말해서 일정한 주제가 없습니다[nonthematic]). [깊은 경험을 할 수록 우리가 무슨 경험을 했는지 불분명하게 느껴지는 것도 사실이지만, 이러한 경우에 불분명하게 느껴지는 것은 우리의 인식능력이 제대로 발달이 되지 않았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의 경험이 역설적인 것으로 가득 차 있기 때문입니다. 영성형성에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이 바로 이 불분명한 것에 관한 이해입니다.] 우리의 경험에 관심을 기울이고 그것에 이름을 붙이고 반성(反省)해 보는 순간 우리는 새로운 차원의 의식(반성적 의식)에 도달합니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우리 삶의 의미와 관련된 모종의 결단을 내리고 적절한 행동을 취하게 됩니다(해석적 의식). 다시 한번 말하지만, 이러한 과정은 순차적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미리 정해진 순서 없이 서로 섞여서 이루어집니다. 어떤 순간에 우리의 의식은 반성적이지만 어떤 순간에는 일정한 주제가 없으며, 또 어떤 순간에는 해석학적입니다.
D. 반성적 과정의 발전에는 또 다른 단계가 있습니다. 흔히 우리가 신학적 반성과 영성형성에서 사용하는 도구는 구조적이고 환경적인 차원에서 "보는"방법을 알려주지 않았기 때문에, 우리는 구조와 환경에 관해 체계적으로 성찰할 수 있는 방법을 필요로 합니다. 영성과 정의 센터의 회원들은 홀랜드(Holland)와 헨리오트(Henriot)가 밝힌 "목회자 집단"에서 그러한 도구를 발견하였습니다. 신앙의 빛에 비추어 구조를 파악하는 방법을 알고 있기 때문에 <영성과 정의 센터>의 회원들은 우리가 앞에서 길게 살펴본 현실성 있는 성찰수단을 발전시킬 수 있었습니다. 여기서 "목회자 집단"(pastoral cycle)을 길게 설명할 수는 없고, 그 대신 이들이 수년간 성찰한 결과를 소개하는 방향으로 이야기를 전개할까 합니다.
E. 영성과 정의 센터의 활동은 인간 삶의 모든 네 차원에서 일어나는 성령의 활동에 관한 동시적 경험을 통해서 인간 경험의 비주제적 차원, 반성적 차원, 해석적인 차원을 구조적으로 파악할 수 있도록 한 데서 절정을 이루었습니다. 그들은 인간이 관심을 집중하면 어떤 때라도 성찰의 과정에 "들어갈" 수 있고 성령은 인간 생활의 모든 차원에서 동시에 역사한다고 생각합니다.
F. 성찰과정을 시각적 형태로 표현하면 그 글의 뒤에 첨부한 "경험도표"(Experience Circle)와 같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경험의 깊이이기 때문에 이 그림의 중심에 존재합니다. 영성형성의 목표는 우리가 성령(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생명)의 현존과 활동을 인식하고 그에 응답하도록 하는 데 있습니다. 동심원들은 성찰의 여러 차원들을 나타냅니다. 중심에 가장 가까운 원이 비주제적 차원, 그 다음 원이 해석적 차원, 그리고 가장 바깥 원이 의식적인 해석적 차원을 나타냅니다. 이 여러 차원은 서로에게서 흘러나오기도 하고 서로에게로 흘러 들어가기도 하는 상호침투적 성격을 가지고 있는데, 그림에서 각 원을 따로따로 그리지 않고 대시() 기호로 연결한 것은 바로 이 점을 상징합니다. 전체 원은 네 개의 4분원으로 나누어지는데, 각 사분원은 인간 경험의 서로 다른 차원을 나타냅니다. 네 가지 차원의 동시성을 도표로 표현하기는 어렵습니다만, 네 가지 4분원을 표현하기 위하여 사용된 시각적 장치 때문에 이 네 가지의 상호침투성을 놓치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어떻게 서로를 도와서 성찰하는데 이 "경험도표"를 활용할 수 있을까요? 어느 특정한 순간에 성령의 역사에 대한 우리의 인식이 얼마나 명료한가에 관심을 집중한다고 할 때, 가장 안 쪽의 원은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깊이 신음하고 있다"(롬 8:26)고 표현할 수밖에 없을 만큼 인간에게 절대적으로 중요한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해석의 두 번째 차원에서는 현실에 대한 보다 비직선적인 접근방법, 이를테면 예술적 창작을 통해서 표현된 형상이라든지 비유, 신화 등과 같은 것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가장 바깥에 자리잡은 해석의 차원에는 의식적, 객관적, 직선적, 개념적 토론 같은 것이 포함됩니다. 의식적, 직선적, "객관적" 차원은 , 비록 의사결정 과정에서는 중요하지만, 성령의 움직임을 파악하는데는 부분적인 기능밖에 하지 못한다는 것을 주목하십시오, 이러한 차원에서는 성령의 감동감화를 느끼는 경우가 별로 없습니다.
영적 인도자는 경험에 관한 이러한 심층적 견해를 설명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즉 그 혹은 그녀는 피인도자로 하여금 특정한 순간에, 그리고 생애의 특정한 분야에서 성령의 부르심에 관한 모호하고 분명한 가닥을 잡기 힘든(less focused and thematic)직관을 자각적으로 해석할 수 있도록 도와줍니다. 영적 인도자는 피인도자의 관심이 모아지는 곳이면 어디에서든지 출발하여 "동시성의 실을 따라서" 어느 한 차원에서 일어나는 성령의 역사가 다른 차원에서 일어나는 성령의 역사와 어떻게 연관되는지를 깨닫도록 도와줍니다. "경험도표"는 영적 인도자가 인간의 내면이나 인간 상호간에서만이 아니라 인간생활의 모든 차원에서 이루어지는 성령의 현존과 역사를 분별하는데 필요한 영성형성을 그림을 통해 압축적으로 표현해 주고 있습니다. 그것은 해석의 여러 차원들의 얽히고 섥힌 상호관계를 기억하도록 하고, 그리하여 우리가 훨씬 넓은 안목을 가지고 인간생활에 질문을 던질 수 있도록 도움을 주리라 생각합니다.
마음 같아서는 지금 여러분에게 여러 가지 차원의 의식과 인간경험의 네 가지 차원을 거친 운동을 설명해 주는 간결하고 분명한 예를 들고 싶습니다만, 시간과 공간의 제약 때문에 그러한 예를 들지 못하고, 다만 엘리나 쉐어(Elinor Shea)가 제시한 것을 언급하겠습니다. 간단히 말해서, 이전의 경험으로 보아 인간내면의 차원과 인간 상호간의 차원이 이해하기에 훨씬 쉽다는 점입니다. 구조적이고 환경적인 차원에서 성령의 부르심은 일정한 기간의 진지한 탐구 과정이 있은 뒤에야 비로소 감지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영성형성이 인생 전체에 걸쳐서 진행되는 과정이며, 충실하게 그것을 추구하는 사람들에게도 놀라운 충격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는 것을 포함한 일생 일대의 과정이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결론
영성형성을 이렇게 이해할 때 그것이 의미하는 바는 대단히 큽니다. 나는 그에 관해 생각을 정리하기 시작하면서 이러한 관점은 현대 세계에서 기독교인이 된다고 하는 것의 의미 자체에 도전을 하는 것임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영적 훈련에 관한 우리의 이해는 근본적으로 바뀌고 그 범위는 대단히 확장될 것입니다. 영적 훈련을 이렇게 이해할 때, 우리는 가령 이런 질문을 던질 것입니다. 우리는 어떻게 분별력을 가지고 내 직업, 내 가족, 정치적 질서와 관련된 나의 소명을 발견할 것인가? 만약 내가 정부가 구조적으로 시민들에게 거짓말을 하고, 법 준수를 회피하기 위하여 그럴듯한 명분으로 현실을 호도하는 것을 발견할 때 우리는 어떻게 할 것인가? 이러한 상황에서 신앙공동체는 어떻게 대응하여야 하는가? 상황을 분별한 다음 우리는 그에 따라 기도하고 행동해야 하는가? 영성형성에 대한 이러한 관점은 우리 교회에 도전이 될 수밖에 없으며 우리 교회는 이것을 감당하기 힘들지도 모릅니다. 우리가 부름 받은 바 소명을 그대로 삶으로 옮길 때 그것은 개인적인 차원에서나 공동체적인 차원에서나 비싼 대가를 치러야 할 지 모릅니다. 어떻게 우리는 서로 힘을 합쳐서 이 "먼 길"을 위해 준비하고 걸어갈 수 있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