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크로노스((chronos, Κρόνος)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티탄중의 하나로 아버지는 우라노스 (하늘)와 어머니는 가이아 (땅)로 이들 두 태초신들 사이에서 태어난 제1세대 티탄족 중의 막내이자 지도자였다. 로마 신화의 사투르누스와 동격이다.
그는 다른 형제 자매 티탄족들과 함께 아버지인 우라노스를 몰아내고 이른바 황금 시대를 다스렸으며 그 자신의 아들 제우스를 주축으로한 올림포스 신들이 반란을 일으켜 이들과 오랜 기간 동안 전쟁을 벌였는데 결국 패하고 제우스에 의해 타르타로스에 감금되었다.
우라노스와 가이아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자식들을 모두 타르타로스에 감금하였다.
크로노스는 레아와 결혼해서 헤스티아, 데메테르, 헤라, 하데스, 포세이돈, 제우스를 낳았다. 아내 레아와 함께 티탄족에 속한다.
하르페(반월도)로 아버지인 우라노스를 거세하여 몰아내었다. 잘라서 바다에 던진 고환에 거품이 일어 아프로디테가 태어났다고 하는데, 후에 보티첼리가 이를 '비너스의 탄생'으로 묘사하였다.
자식이 자신을 몰아낸다는 예언이 두려워 태어날 때마다 삼켰는데, 막내인 제우스는 이 운명을 면했다. 레아가 제우스를 빼돌리며 크로노스에겐 보자기를 싼 돌을 준 탓이다.
훗날 제우스는 크로노스를 몰아냈다. 제우스는 크로노스를 몰아내기 위해 그의 첫 번째 아내인 메티스의 지혜를 빌렸는데, 메티스는 제우스를 위해 토하는 약을 만들어 주었다. 그리고 제우스는 어머니 레아를 찾아가 크로노스에게 약을 전달해 달라 한다.
레아는 그것을 술에 타 크로노스에게 전해 주었는데, 크로노스는 그 술을 마시고 약의 효과에 의해 토해 버리고, 제우스는 형제(헤스티아, 데메테르, 헤라, 하데스, 포세이돈)들을 구해낼 수 있었다.
2.
2-1)크로노스( Χρόνος)
그리스 신화와 소크라테스 이전의 그리스 철학에서 시간을 의미하는 단어로 그 이름 자체가 '시간'이란 뜻이며 그리스 태초신 중에 하나이다. 티탄인 크로노스(Κρόνος)와는 다른 신이다.
크로노스는 보통 형태가 따로 없는 무형의 신으로 묘사되거나 형태가 있는 경우 긴 수염을 가진 늙은 현자의 모습으로 묘사된다. 영어의 '크라니컬(chronicle: 연대기)', '크러날러지(chronology: 연대학)' 등 시간과 관계 있는 단어들의 어원이 바로 이 크로노스에서 나왔다.
2-2)연대학 [年代學]
요약
과거에 일어난 사건의 시간적 배경을 밝히는 학문.
내용
프랑스어 chronologie의 번역어로 크로노스(chronos), 즉 ‘시간의 학문’을 뜻한다. 크로놀로지는 편년(編年)이라고도 번역되나, 이 경우에는 과거의 사상(事象)을 시간의 순서로 배열한 것을 가리킨다.
과거의 일을 연구하는 데에는 하나하나의 일을 아무리 상세히 안다 하더라도, 그 시간적 위치나 사건 상호간의 시간적 관계가 분명하지 않으면 지식을 체계화할 수 없고 또한 사건의 본질을 이해할 수 없다. 따라서 과거를 대상으로 하는 학문에 있어서 연대학은 연구의 기초로서 빼놓을 수 없다.
그러나 과거 사건의 정확한 시간적 배경을 확립하는 일은 지난(至難)한 일로서, 그 일이 학문의 발전을 저해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오래 된 사건은 절대연대로 표시하는 것이 이상적이지만 실재로는 이루어지지 않을 경우가 많아, 사건 상호간의 시간적 전후 관계를 나타내는 상대연대가 쓰여 왔다.
1940년대 후반부터 특히 원자물리학의 눈부신 발전에 수반하여 종래 어렵다고 해오던 절대연대의 측정법이 차례로 개발되어 오늘날 연대학의 국면은 일신되었다. 그 단서라고 할 수 있는 것에 47년 W.F.리비가 개발한 방사성탄소(14C) 연대측정법이있다.
이어서 개발된 일련의 유효한 연대측정방법은 방사성원소의 붕괴현상을 이용하는 것인데, 방법의 원리나 측정 기술은 엄밀한 물리화학적 기초 위에 있다. 그러나 이들 방법이 직접 적용되는 재료는 어느 것이나 오랜 시간의 경과에 견디어 오늘까지 남은 것이므로, 그 사이에 변질의 가능성이 있다. 따라서 어떤 가정 조건하에서 측정연대가 부여된다.
또한 서로 다른 방법에 의한 결과가 서로 부합되지 않는 경우도 많으며 그것들을 이용하려면 세심한 주의가 필요하다. 이것들은 또 종래 있던 지층이나 토층의 층서학(層序學)과 같이 원리는 단순하지만 확실한 상대연대 결정법에 비추어 검토된다.
3. 카이로스와 크로노스
아주 오래전 시계는 고가품의 하나로 시계를 차는 사람은 부유한 계층의 사람임을 보여주는 표가 되기도 했다. 그러나 요즈음은 누구나 시계를 차고 있다. 그렇지만 우리가 하루에 몇번이나 시간을 볼까 생각해보면 그리 많은 횟수는 아닌 것 같다. 그만큼 우리는 시간을 의식하지 않고 살고 있다는 것이다.
헬라어에는 시간(때)을 두가지로 표현한다,
'크로노스’(chronos)와 ‘카이로스’(kairos)가 그것이다.
‘크로노스’는 단순히 흘러가는 시간이요, 일련의 불연속적인 우연한 사건을 뜻하고, ‘카이로스’는 때가 꽉 찬 시간으로 구체적인 사건의 순간, 감정을 느끼는 순간, 구원의 기쁨을 누리는 의미있는 순간이다. 카이로스는 자신의 존재의미를 느끼는 절대적인 시간이다.
성경 속 969세를 산 므두셀라의 시간이 크로노스였다면 33년의 짧은 생애동안 위대한 삶을 산
예수 그리스도의 시간은 카이로스였다고 할 수 있다.
임신부가 임신한 후 열달동안 아이를 복중에 간직하고 있다가 이를 낳았다고 할 때 그 열 달은 흘러가는 시간으로서의 ‘크로노스’이고, 해산의 고통을 경험하면서 아이를 잉태하는 바로 그 순간, 즉 산모의 생명에 대한 기쁨과 다 이루었다는 안도의 평온함을 갖는 순간이 곧 ‘카이로스’이다.
얼마전 대선을 위한 후보문제가 화두가 되었던 때가 있었다. 야당이든 여당이든 오랜 시간을 지내오면서 저마다 자기들의 업적을 주장하고 자기들이 집권해야 나라가 잘된다고 말했다.
그러나 엄밀히 말해 그들은 자기들에게 주어진 시간을 정당하게 사용하지 않은 사람들이다.
즉 크로노스의 시간만을 보냈다는 것이다. 역사는 카이로스의 시간을 살아가는 자에게 의미가 있다.
그때 그 시절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는 교과서에서 다 알 수 있다. 그것은 크로노스적 시간이해이다.
카이로스의 시간속에 사는 사람은 비록 ‘그 때 그 일’을 경험하지 못하였다하여도‘살아있는 정신’을
가진 사람이다.
철새처럼 이리저리 양지를 좇아가는 사람은 카이로스의 시간을 모른다.
그들은 카이로스적인 살아있는 정신들이 소멸되고 크로노스적인 삶을 살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역사 속에서 부정과 불의, 투쟁과 타협, 전쟁과 싸움, 가난과 억압 등의 수많은 사건들을 경험한다. 크로노스의 시간을 사는 사람은 역사가 자신을 어떻게 판단할 지에 관심이 없다.
오직 현재만이 중요할 뿐이다. 그러나 카이로스의 시간을 사는 사람은 끊임없이 자신을 반추하며 사는 사람이다. 크로노스는 영어의 chronology와 관련되는 것으로 연대기란 뜻이다.
순차적인 역사를 말한다. 고려시대, 조선왕조, 대한제국, 일제강점기, 분단시대, 이렇게 연대기적으로 역사를 기록하고 이해하는 관점을 chronology라고 한다. 이 관점에서 보면 오늘은 21세기 초반이다. 그런데 그리스도인이 이해하는 카이로스 역사관은 질적으로 다르다.
카이로스는 하나님과의 관계성 안에 있는 시간이다.
그것은 또한 더불어 사는 삶의 연대성 안에 있는 시간이다.
따라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말씀은 카이로스의 시간을 살아가야 함을 지시한다고 하겠다.
크로노스의 시간은 끝이 없다.
그러나 카이로스의 시간에는 그 마지막이 있다.
즉 하나님의 정하신 때가 있다는 말이다.
그 때를 일컬어 파루시아라고 한다.
파루시아라는 단어는 헬라어 Para와 ousia가 결합된 말로서, Para는 "along side" 즉 '나란히' 라는 뜻이고 ousia는 "substance" 즉 '본질 혹은 실재'란 뜻이다.
이 두 단어를 결합한 뜻은 '본질과 나란히 온다'라는 뜻이다.
즉, 파루시아는 "실재로서 오시는 예수"의 재림을 의미한다.
예수께서는 우리가 예수의 영적 임재를 믿는 것처럼
그 날에 몸으로(bodily) 혹은 육체적으로(physical) 다시 오실 것이다.
이것은 실재적 사건이다. 우리 모두가 실제로 체험하게 될 재림을 의미하는 이 종말론적 단어는 예수께서 종말에 심판의 주로 다시 오신다는 것을 강하게 암시한다. 그리스도인은 누구나 파루시아의 도래 앞에 놓여있다. 아무도 그날의 심판 앞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파루시아는 하나님의 전적인 주권 안에서 우리를 향해 내려오기 때문이다.
초대 교회는 언제나 임박한 파루시아에 대한 기대로 충만해 있었다. 그렇기에 그들은 짐승의 이빨 앞에서도, 불타는 기둥에 묶여 죽어가면서도 믿음을 저버리지 않았다. 그들은 인간의 시간으로 잴 수 없는 파루시아의 때가 다가오고 있음을 보았다. 그러나 그것은 시간적인 개념만은 아니었다.
"심판의 주"로 오시는 예수를 바라보았기에 세상을 두려워하지 않았으며, 세상에서 얻는 즐거움을 과감히 벗어 던지고 무소유의 삶을 택할 수 있었던 것이다.
루터의 유명한 말 중에 꼬람 데오(Coram Deo)라는 말이 있다. 이 말은 "하나님 앞에서"라는 뜻이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 앞에 서 있는 사람"이다. 결코 "사람 앞에 서 있는 이"가 아니다.
하나님 앞에 서 있는 그리스도인은 오늘을 종말처럼 산다. 날마다 순간마다 파루시아를 느끼며 살기에 결코 주어진 시간을 탕진하거나 삶을 포기하지 않는다. 그 어떤 질곡에서도 파루시아에 대한 대망은 그를 "하나님 앞에 선 인간"으로 다잡아 놓으며, 일곱 번 넘어져도 여덟 번 다시 일어나게 한다.
여기에 그리스도인의 진정한 소망이 있다.
바울은 예수의 재림이 없으면 우리의 믿음이 헛되다고 말한 바 있다. 파루시아는 실재할 것이기에,
파루시아를 기다리는 우리 믿음의 길과 기다림이 세상의 눈으로는 미련하게 보인다할지라도 그리스도인으로 하여금 삶을 책임있게 살아가도록 하는 능력(power)이 되며 가장 지혜로운 선택이 되는 것이다.
카이로스의 시간이 끝나는 지점 즉 파루시아의 때를 알고 있는 사람은 크로노스의 시간을 카이로스의 시간으로 변화시킨다. 우리는 크로노스의 시간에 살지만 동시에 카이로스의 시간 안에 있다. 누구나 크로노스의 시간을 살지만 카이로스의 시간을 사는 사람에게는 역사와 하나님 앞에서의 책임을 감당해야 할 자기 몫의 시간이 있다.
그리스도인은 그 시간을 만들어 가는 사람이다.
그대가 오늘 카이로스적 시간을 보낼 것인지,
크로노스적 시간을 보낼지는 전적으로 그대의 몫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