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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화는 대체로 캔버스(천)에 유화 물감으로 그려진다. 두터운 종이에 수채로 그리는 그림도 있고 요즈음에는 아크릴 같은 특수 물감도 널리 쓰여지고 있다. 거기에 비하면 동양화로 알려져 있는 그림들은 주로 화선지(종이)에 먹(墨)으로 그려진다. 물론 천(麻)에다 채색(顔料)으로 그리는 그림도 있다. 엄격하게 말하면 서양화나 동양화에서 쓰여지는 재료에는 본질적으로 큰 차이가 있는 것은 아니다. 다만 서양화가 오랫동안 캔버스에다 끈적끈적한 유화 물감을 발라서 그림을 그렸고, 동양화가 화선지에다 먹을 쳐서 그림을 그려 왔기 때문에 이런 습관이 결국 서양화와 동양화의 특수성으로 굳어져 버린 것이 아닌가 여겨진다. 물론 동양화와 서양화의 구별이 단순히 재료에서 오는 것이 아니고 그림의 내용이나 형식에서 온다는 것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예컨대 수묵 산수라든가, 사군자(四君子), 화조(花鳥), 어개(魚介), 금수(禽獸), 기명절지(器皿折枝) 등 이런 내용물들은 서양화에서는 흔하게 볼 수 없는 것들이다. 또 동양화에서 병풍이라든가 족자(걸개 그림), 부채와 같은 특별한 형식의 그림도 있다. 이런 점은 뒤에서 더 자세히 거론할 것이다. 아무튼 우리는 동양화로 알고 있었던 이런 양식의 그림들을 `한국화`로 바꾸어 부르기 시작한 것은 1970년대 말에 들어서였다. 사실 동양화라는 것은 중국 사람들의 그림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중국적인 영향을 많이 받았던 그림이다. 역사적으로 거슬러 올라가면 중국, 한국, 일본, 몽고, 동남 아시아의 여러 나라들이 오랫동안 공동의 문화권에서 살았으므로 동양화는 서양화와 마찬가지로 하나의 문화권을 상징하는 그림 양식의 명칭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래서 그런 문화적인 공감대가 형성되어 있었을 때에는 그저 그림으로 통했지, 거기에다 중국화니 한국화니 일본화니 하는 명칭을 붙이지는 않았다. 그러나 근세에 이르면서 전반적으로 중국을 비롯한 아시아가 서방 세계의 침략을 받으면서 국수주의적인 기상이 대두되기에 이르렀다. 중국은 자신들의 그림을 먼저 중국화(中國畵)라고 부르기 시작했고, 일본은 19세기 말에 이르러 그들의 그림을 일본화(日本畵)라고 불렀다. 그러나 우리는 그 뒤에도 계속 동양화라는 이름을 고수해 왔다. 그러다가 1970년대에 들어서면서 일부 화가들이 `한국화`라는 용어를 쓰게 되고 1980년대 이후에 오면서 국전(國展) 같은 데서도 `동양화`라는 이름 대신 `한국화`라고 공식으로 부르게 되었다. 그러나 여기에 문제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아직도 한국화라는 명분 아래 그리는 그림 가운데에는 과거의 동양화, 이른바 중국적인 영향의 그림과 구분할 수 없는 그림들이 많다. 그런가 하면 과거의 양식에서 탈피하면서 의욕적으로 오늘의 한국화를 지향하고 있는 화가들의 그림 가운데에는 현대 서양화의 양식과 구별할 수 없는 그림들이 많은 것이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한국인이 그린 그림은 모두 `한국화`라고 서슴없이 말하기도 한다. 천에다 유화 물감으로 그리건 종이에다 먹으로 그림을 그리건, 그런 것은 단순한 수단에 불과하지 그 자체에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것이다. 사실 오늘의 화단을 둘러보면, 캔버스 그림 속에 동양적인 요소가 들어와 있는가 하면 화선지 그림 속에 서양적인 요소가 들어와 있기도 하고 그 양쪽이 서로 섞이어 뒤죽박죽이 되어 있기도 하다. 이렇게 그림의 재료 자체가 국제화되어 있는 현실에서 서양화를 찾고 한국화를 찾는 것은 우스꽝스러운 일이기도 하다. 그렇지만 `한국화`의 특수성이나 `주체성`을 강조하는 입장에 있는 사람들은 그런 주장에 쉽사리 동의하지 않는다. 예컨데 그림 그리는 재료가 단순히 그림을 그리기 위한 물질적인 수단일 수만은 없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캔버스와 화선지 또는 유화 물감과 먹은 서로 같은 값일 수가 없다는 생각이다. 캔버스나 유화 물감은 그림 그리기 위한 단순한 물질적인 수단일 수 있겠으나 화선지와 먹의 경우 그렇게만 볼 수 없다는 것이 그들의 입장이기도 하다. 화선지와 먹은 과거의 동양 문화권에서는 하나의 물질인 동시에 정신적인 어떤 것이었다. 말하자면 물질과 정신이 결합되어 있는 제 3의 어떤 것, 그것이 수묵 사상(水墨思想)이고 동양 사상이었다. 불과 물이 혼재되어 있는 것이 술이고 그것을 마실 때 취하듯이, 수묵도 그것에 익숙해 있는 사람들에게는 취하게 만드는 어떤 신비한 힘이 있다고 믿는 것이다. 수묵에 대한 이런 신념을 가진 사람들이 서양화와 자신들이 그린 그림을 동일한 범주 속에 넣으려 하지 않는다는 것은 당연하다. 하지만 이런 신념만으로 `한국화`의 독자성이 정당화될 수는 없다. 화선지와 먹으로 그리는 그림은 중국이나 일본은 물론 오늘의 동남아 여러 국가에서도 계승해 가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한국화`란 무엇인가. 한국화는 일차적으로 동양화의 범주 안에 있으면서 중국, 일본을 비롯한 다른 이웃나라의 그림과 같지 않는 어떤 것이라야 한다. 그러나 동양화가 먹으로만 그리는 것이 아니라, 비단과 같은 천에 채색으로 그림을 그리는 이른바 진채화가 있다는 점에 주목하면 결코 `한국화`의 정의가 간단하지 않음을 알 수 있다.
수묵 산수화(水墨 山水畵)양식이 정식으로 사대부 계층에 유행되기 시작한 것은 아무래도 과거 제도를 도입하기 시작했던 고려 중기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화선지와 먹이 과거 공부를 하는 문사들의 필기 도구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림의 역사를 수묵화에 국한시키는 것은 오늘의 우리 그림을 이해하는 데 여러 가지 장애 요인을 만드는 일이며 우리 미술의 자산을 너무 궁핍하게 만드는 결과가 되기도 한다. 우리는 이미 3∼4세기경에 축조된 고구려시대의 고분에 다양한 내용의 벽화가 나타난다는 사실에 유의해야 한다. 이 벽화는 솜씨있는 훌륭한 직업 화가의 손에 그려진 것으로 적어도7세기 중반에 이르기까지 우리나라의 그림을 주도하는 큰 세력이었다. 고대 세계의 특수한 생활상(종교적인 축제)을 그린 이 벽화에는 유명한 사신도(四神圖)를 비롯해서 인물화, 행차도, 춤, 씨름, 다도(茶道)의식, 사냥 등 다양한 주제의 그림들이 펼쳐져 있다. 이런 그림들은 그 뒤 불교 시대의 사찰 벽화로 이어지거나 또는 민간에서 그 명맥이 이어졌던 무당 무신도(巫神圖)로 계승되어진다. 조선조 후기에 들어 실학 사상이 대두되면서 유행하기 시작했던 민화(民畵), 부적(符籍)그림 또는 풍속화가 모두 이 고분 벽화의 맥락이다. 오늘의 현대 한국화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강렬한 채색의 경향도 역사적인 맥락에서 볼 때 바로 이 자산(資産) 위에 있다고 해야 옳다. 한편, 앞에서 거론했듯이 한국화의 독자성을 뒷받침하는 가장 강력한 미학적 근거가 되는 수묵은 역시 유교를 국교로 삼았던 조선 왕조의 출발과 함께 본격적으로 전개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유교의 바탕이 경학이고, 유생(儒生)들은 그 경학을 공부하여 출세하게 된다. 글씨는 쓰는 지필묵이 없이 그런 시대를 산다는 것은 글을 읽는 사대부로서는 상상도 못할 일이다. 역사보다는 미술사에서 글을 읽은 사대부로서 상상도 못할 일이다. 역사보다는 미술사에서 더 잘 알려져 있는 안평대군(安平大君)은 그림 수집가로 유명하다. 그는 중국 당대(當代), 송대(宋代)를 비롯한 중국 대가들의 수묵화를 많이 지니고 있었으며 그의 주변에는 시인(詩人), 묵객(墨客)들이 몰려들어 현학(哲學)을 논의하기도 했다. 그림을 그리는 화가들을 채용하는 이른바 관화원(官畵院)의 제도가 생긴 것도 이 무렵의 일이다. 아무튼 우명한 안견(眼見)의 `몽유도원도(夢遊桃園圖)`는 그런 분위기 속에서 그려졌다. 그림의 주제나 기법이 전적으로 중국의 영향이었다는 것은 두말할 여지가 없다. 대체로 조선시대 그림의 경향을 초기(약 1392∼1550년),중기(약 1550∼1700년),후기(약 1850∼1910년)로 나누는 것이 통례이다. 초기에는 안견, 강희안과 같은 화가들이 이미 고려시대부터 축적되어 왔던 중국 그림의 여러 기법을 토대로 괄목할 만한 작품들을 그려내고 있다. 이른바 중국 북송(北宋) 시대의 화파로 알려져 있는 이곽파(이성과 곽희)의 영향이나 남송(南宋)시대의 원체화풍(元體畵風)이 우리나라의 그림에 나타난 것이다. 중기의 회화는 임진왜란이나 병자호란과 같은 국란 시대였으면서도 많은 화가들이 배출되었던 시기였다. 특히 사색 당쟁(이기논쟁)을 배경으로 그림은 둔세적(遁世的)인 경향이 강하게 나타났다. 김제(金濟), 이경윤(李景崙), 이상좌(李相坐) 등이 대표적인 화가라고 하겠다. 후기는 영,정조(英鄭祖)가 통치하던 시대로 전반적으로 한국화의 특성이라고도 할 수 있는 그림의 특수성이나 주제성이 한껏 고양되던 시대이다. 이 점은 문화의 젖줄이었던 중국에서 중국에서 명(明)과 청(靑)이 뒤바뀌는 시기였고 또 서양 학문이 전해지면서 실학(實學)이 대두되었던 사정과는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이 시대의 대표적인 화가로는 윤두서, 김두량, 정선, 심사정, 이인문, 김흥도, 신윤복, 강세황 등 실로 기라성 같은 화가들을 들 수가 있다. 특히 정선의 금강산 그림이나 김흥도, 신윤복 등의 풍속을 그린 그림들은 문자 그대로 `한국화`라고 하기에 부족함이 없는 훌륭한 그림들이다. 말기는 추사 김정희, 허유, 전기, 김수철, 장승업 등이 활동한 시기로 이미 조선 왕조가 기울어지는 시기이다. 그러는 와중에서도 김정희의 활동은 수묵의 의미를 더 한층 실감케 하는 계기를 만들어 주었다. 현대 한국화는 장승업이나 김정희 시대가 물러가면서 등장한다고 해야 옳다. 사회적으로 왕조가 무너지면서 양반 사회가 붕괴되고 과거 제도가 폐지되며 문화적으로 일본을 통한 서구 문화의 유입을 들 수가 있다. 이른바 개화기라는 것이다. 조석진, 안중식과 같은 화가들의 활약도 바로 이런 시대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누가 보아도 이런 시기가 과도기(過渡期)라는 것은 분명하다. 여기서 필자는 이들이 활동했던 1910년대부터 1950년대까지를 1차 과도기 그리고 1950년대부터 1970년대까지를 2차 과도기로 보고자 한다. 1차 과도기가 서양 문화를 일본을 통해 받아들였던 시기로, 2차 과도기를 서양 문화를 직접 받아들였던 시기로 보았기 때문이다. 1차 과도기 시대의 화가들은 일본을 통해 서양화를 접하거나 또는 일본화의 영향을 받으면서 동양화로부터 무언가 `우리다운 그림`을 모색하였다. 2차 과도기의 화가들은 직접적으로 서양 문화를 경험하면서 `한국화`를 정립하려는 노력을 기울인다. 그러므로 현대 한국화는 이 두 단계의 과도기를 거치면서 나타나는 것이라고 해야 옳을 것이다.
그림은 사랑이다. 예술도 사랑이다. 인간과 자연을 사랑하는 것이 그림이다. 그것은 순수한 인간미와 순수한 자연미를 추구하는 것이 그림이기 때문이다. 한국화를 어떻게 그릴까. 이 작품을 그리는데 며칠이나 걸렸을까. 화가는 그림을 사랑한다. 그리고 그림의 주제와 소재인 인간과 자연을 사랑한다. 그 원시성과 순수성도 사랑한다. 그래서 우주만물의 근본이나 원리를 찾아 예술세계를 헤맨다. 사람이 동물과 다른 점은? 슬프면 울고 기쁘면 웃을 줄 안다. 그리고 미적 감각이 있다. 멋을 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표현하고 싶은 강한 욕구가 그림을 그리게 한다. 화가는 그 욕구가 강하다. 불타는 욕구. 그것은 화가의 생명이다. `바람에 휘날리는 소나무 숲`, `분노하는 솔밭` 그것을 그리고 싶다. 그러면 그것이 주제(主題)다. 소나무들은 소재(素材)가 된다. 이제 어떻게 그릴까? 먼저 솔밭을 찾아 나선다. 그것들을 스케치하고 사진도 찍고 바람 부는 날의 움직임도 살피고 시간에 따라 장소에 따라 변모하는 소재의 속성과 특징을 자세히 관찰한다. 단 한 번으로는 부족하다. 같은 곳을 아침, 낮, 언덕, 강변, 산 속, 해 비칠 때, 해 없을 때, 바람 세게 불 때, 안불 때 등으로 일정에 따라 달리 스케치한다. 솔숲 전체를 크게 보기도 하고 소나무 한 그루의 큰 줄기·가지·잎의 모양과 붙음 등 자연의 질서를 자세히 보고 느낌까지 스케치·메모한다. 그런 연후에 여러 작가나 고전의 소나무들을 살펴보고 이론적 배경도 살펴둔다. 이제 화판 앞에 선다. 그림을 어떻게 몰고 갈 것인가. 설계가 필요하다. 설계의 기본은 구도다. 그림의 크기와 재료가 결정되면 우선 화선지가 아닌 다른 종이에 구도를 그린다. 삼각형구도·편파구도·대각구도·원형구도 등 그림의 소재가 배치될 자리매김을 하는 것이다. 이때 시선이 흘러갈 방향과 그림의 소재가 흘러갈 방향도 정하고 명암도 정한다. 그런 연후 형상(刑賞)을 정한다. 형상은 상형(像型)이라고도 하는데 작가의 스타일을 결정하게 되며 개성을 나타내므로 생명선이라 할 수 있다. 여기서 형식(Form)·형상(刑賞)·의상(義傷·心象)등을 알아보자. 소나무를 스케치한다고 치자. 눈앞에 보이는 그대로의 모양을 스케치북에 그렸다면 그것은 실경(實景)을 스케치했다고 하며 소나무를 그리는 것을 실사(實辭)라고 한다. 이때 화가의 눈에 보이는 소나무의 모양은 어떠할까. 소나무 둥치는 물고기 비늘처럼 켜가 있고 아랫가지가 윗 가지보다 길고 가지는 손 벌리 듯 옆으로 휘었고 솔잎은 여러 개가 모여 작은 가지에 교호형으로 맞붙었다. 마치 바늘 모양의 솔잎이 큰 구름덩어리처럼 어둡게 하늘을 가로막았다. 위처럼 눈에 보이는 모양 그대로의 던져진 형태를 형식(形式·Form) 또는 형(形)이라고 한다. 실경(實景)은 형(形)을 주로 그린 것이다. 그리고 이런 형들이 모여 형성된 소재(素材)가 내용(內容)이 된다. 이때 형과 형의 소재 배치가 중요한데 그것은 상호관계에 의해 전혀 다른 느낌을 주기 때문이다. 그런 배치관계 즉 만남의 관계는 극적인 상황이 되어야 재미있다. 이 소나무와 저 소나무 또 다른 제3의 소나무를 배치할 때 서로 극적으로 재미있게 만나야 한다. 극적 상황이 아니고서는 멋진 만남이나 재미있는 사건이 그림에 보이지 않고 호소력이 약해진다. 그런데 실경(實景) 그 자체로는 그림이 되지 않는다. 진경(眞景)이라야 한다. 화가의 언어가, 화가의 색깔이, 화가의 개성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그러려면 화가의 눈으로 예리하게 관찰한 직관의 눈과 통찰력(Insight)에 의한 영감(Inspiration)과 창작의지가 무엇보다 그림에서 보여야 한다. 어떻게? 앞서 말한 형(形·Form)이 던져진 형태, 보이는 그대로의 사진같은 모양이라면 진경(眞景)의 그림이 말하는 상형(象形:형상)이란 `이루어진 형태`, `조형적 모양`을 말한다. 즉 작가의 눈으로 다시 만들어진 모양이 진경의 상(橡)이다. 그런 진경의 상형(象形)으로 바뀌어야 한다. 그것은 `조형적 모양`을 말한다. 같은 소나무라도 전체의 모양이 부채꼴 구도라면 그 안에서 소재가 놀아야 한다. 또, 내 눈으로 본 소나무 잎이 반차륜 모양(수레바퀴 절반 모양)이라면 그렇게, 또는 소나무 가지가 모두 V자 모양으로 휘었다면 그렇게, 큰 줄기는 내가 보았을 때 모두 하얀 기둥이라면 흰 기둥으로 바람에 날리는 모습이 여인의 머리칼처럼 보였다면 그렇게, 또는 소나무가 모두 빨갛다고 느꼈다면 그런 색으로 내가 만든 형상(刑賞)이 나와야 한다. 즉 `만들어진 모양`이 나와야 한다. 목탄이나 연필로 내가 만든 형상으로 소재를 배치하고 그 느낌을 주제와 결부시킨다. 이때 중요한 것은 주제를 강하게 어필시킬 수 있게 소나무를 크고 작게 조절하거나 어둡고 밝게 하거나 나뭇가지나 모양을 왜곡(Deformation)시켜야 한다. 그러면서 전체적으로 수많은 변화와 균형·통일의 조화가 나타나야 한다. 전체적인 조화가 생명이다. 조화는 곧 질서다. 색깔·명암·비례·강약 등의 순서를 잘 지켜가야 한다. 그리고 전체적인 모양은 유동적(流動的)인 살아있는 형식이어야 한다. 즉 정말 `분노하는 솔밭`의 느낌이 보여야 한다. 그러려면 기본기(基本技)가 잘 닦여 있어야 한다. 사진에 가깝게 그리는 것은 그림이 아니다. 화가의 개성과 형상(刑賞)이 곧 작품화 될 수 있는 요건이 되는 것이다. 또한 마음 속의 생각이나 뜻·감정 등을 그림으로 나타낼 때 그 모양을 의상(意橡), 또는 심상(心象)이라 한다. 의상이나 심상은 완전히 주관적 모양이다. 사람이 소나무를 생각할 때 그 모양이 빨간 동그라미라면 그것은 `심상의 소나무`다. 즉 상상이나 정신적 조형에 의해 만들어낸 모양이다. 의상(意橡)에 치우치면 관념화(觀念花)나 추상화(抽象化)가 된다. 신바람·황홀·우정같은 것을 상상해 보자. 그것을 형식화해 본다. 그런 그림이 주관적 형상이다. 형(形)·상형(象形)·의상(意橡)중 어느 것을 기호로 취하든 미적 형식의 기본은 조화(造化)다. 그리고 개성이란 진경(眞景)을 꾸미는 상형(象形)의 창조와 그것의 표현력에 있다. 이제 드디어 화선지에 그릴 차례다. 재료의 특성은 작품의 성패를 방향 짓는다. 화선지·붓·먹·색의 특성을 알고 속성을 미리 파악해 두어야 한다. 같은 종이라도 발색이 되는 정도가 모두 다르다. 운필(運筆)·채색 방법 등도 미리 계산해두고 작화(作話)에 임한다. 일반적으로 근경에서 시작하고 원경에서 끝낸다. 소재가 적절히 잘 구성되고 그림이 마무리되면 배접하여 미비점을 수정한다. 연한 먹이나 색을 우려 내기도 하고 덧칠도 한다. 주제! 처음 시도했던 주제에 60% 이상 접근했으면 일단 안심해도 좋다. 화가는 죽을 때까지 그려도 100% 자기 마음에 차는 그림이 없다고 한다. 배접된 작품은 화판에 붙여 이따금씩 보고 반성의 기회로 삼는다. 주제·구도·생명력·운필력과 느낌이 강하면서도 잘 조화되었는가. 어색한 점은 없는지 물어본다. 답변이 명쾌하면 낙관하고 슬라이드로 여러 장 찍어두고 떼어 낸다. 작품은 잘 말아 신문지 등으로 싸서 건조하고 어두운 곳에 보관한다. 또는 액자로 꾸미려면 배색과 그림이 잘 어울려야 그림이 살아난다. 작품은 수많은 경험과 노력의 결과다.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찾는 것이다. 천안(天眼)으로 느끼고 마음으로 자연을 감싸야 찾을 수 있다. 즉 돌맹이 하나라도 사랑해야 한다. 형(形)보다는 상형(象形)을 찾자. 내가 본 형상(刑賞)이 진경(眞景)이다. 내 눈으로 보면 내가 곧 겸재(謙齋)다. 단원(鍛園)이다.
"보기에 좋더라." 오늘날 연일 전시회가 끊이지 않는다. 화가도 많다. 미술관은 학교보다 나은 교육장소다. 어려운 단어를 외우지 않아도 된다. 갤러리나 미술관은 문화의 보고다. 감정과 정서의 의사소통 기관이다. 느낌을 느낄 수 있는 곳이다. 상상의 날개를 펴고 또 다른 세상을 날고 싶으면 미술관을 찾으라. 아직은 한국화 전문미술관이나 갤러리가 드물다. 전문 갤러리는 한국화와 서양화의 감성이 다르기 때문에 필요하다. 우선 그림은 마음으로 읽는다. 머리로 판단하거나 논리를 내세우지 않는다. 그냥 느껴보는 것이다. 그런데 그 언어가 어렵다. 상당히 어려운 그림이 많다. 어떻게 읽어야 하나. 요즘 신세대의 '개성'과 '해방'의 그림은 자유천국이다. 도무지 무엇을 그렸는지 무엇을 말하려 하는지 읽기 어렵다. 일종의 자유를 떠난 방종의 그림처럼 모든 어렵고 딱딱한 억압에서 해방하려는 그림들이 많다. 그것들을 개성이 강한 그림이라고 우기기도 한다. 또 다원화의 현대라고 칭한다. 또는 사고의 영역을 넓히라고 외친다. 여러 개의 외국 것을 모아다가 '모아 모아 짬뽕그림' 도 만들고 있다. 아무튼 모든 개성을 인정해주는 해방의 시대이다. 그런 그림들을 어떻게 풀어가야 하나, 어떻게 정서를 맞추어가야 하는가. 그냥 '그런 그림도 있다' 고 인정해두자. 왜냐하면 그림은 자기의 표현이고 자기실현의 수단이니까. 가는 길을 이쪽에 서 막지 못한다. 그런데 진실의 표현, 참 느낌, 자신에게 솔직함 등이 있는가는 보아야 한다. 내가 새가 된다면? 어디를 가고 싶나? 거기에 대한 답이 그림의 세계다. 내가 화가라면 무엇을 그리고 싶나? 화가는 새도 되고 천사도 되고 방랑자도 된다. 그러니까 새의 말도 하고 천사의 노래도 부르고 방랑자의 시도 읊는다. 그것은 관자에 따라 작가와 합일되기도 하고 더러는 따로 놀지만 기쁨도 얻는다. 그래서 작품은 기쁨을 주고 관자를 계몽도 하고 좋은 길로 이끌어 주는 교육매체도 된다. 따라서 그림이 의식의 향상과 바람직한 인간완성의 일익을 담당한다. 그게 기쁨이다. 그것이 그림을 보면서 즐거움을 갖는 이유다. 좋은 그림과 덜 좋은 그림은 상당히 주관적이기도 하다. 일단은 그런 판단을 배제하고 가치 부여도 금지한다. 그냥 이성을 보는 눈으로 읽고 첫인상(?)을 만끽하고 상태를 상상으로 느낀다. 그리고 그림이 보여주는 세계에 빠지려고 노력해 보라. 작가의 고충이나 의도를 상상해 보기도 한다. 재미있다고 생각되면 자기의 경험이나 상상과 결부시키지 말고 냉정하게 왜 내가 이 그림에 빠져있나 하고 물어본다. 그런 느낌이 없으면 '왜 내가 이 그림이 싫어지는가' 그 점을 생각해본다. 일단 내 마음에 딱 드는 그림이면 본인에게 좋은 그림이다. 모든 그림은 주장하는 바가 있다. 즉 주제가 있다. 그것이 강하면 빨리 직관으로 느낀다. 그러나 서서히 다가오는 그림이 있다. 어려운 그림일수록 느낌을 찾도록 애써야 한다. 찬란함. 시원함. 따뜻함. 사랑스러움. 밝아옴. 소박함 같은 감각어를 전달하는 경우가 많다. 특히 추상화에는 더욱 그렇다. 구체물의 경우 무엇을 그렸는지는 알아도 무엇을 나타내려 했는지는 잘 모르듯이 추상화는 둘 다 어렵다. 그러니까 우선 느껴야한다. 화가는 때로 관자에게 판단이나 느낌을 맡기기도 한다. 특히 현대미술의 경우 그렇다. 현대미술은 난해하다. 무척 어렵다. 그것은 화가 자신이 무엇을 말하려 했는지 모르는 수도 있다. 우연성. 즉물성. 현재성. 일회성 등 즉발적이고 우연적인 현상을 노리는 수가 많다. 따라서 우리가 확실히 믿고 있는 공리(公理) 조차도 믿지 않는다. 물은 위에서 아래로 흐른다든지 큰 것은 작은 것보다 공간을 많이 차지한다는 그런 고정관념은 깨진다. 즉, 현대미술을 확실히 단정지을 수 있는 한마디가 있다면 '불확실성' 이다. 그러니 자연스레 관자는 바보가 된다. 바보는 천재의 뜻이나 다른 바보를 알 필요가 없다. 그냥 바보로 생각하면서 바보로 느끼면 족하다. 현대미술을 가장 쉽게 접근하려면 바로 바보로 접근한다. 그렇게 감상하라. 유치부 어린이의 그림은 바보처럼 책상다리가 4개가 그려지고 하늘을 향해 뻗쳤다. 그림은 그렇게 그려진다. 그림이 쉽든 어렵든 객관적인 즉 보편성과 공통성도 갖는다. 그것은 일반적으로 기능과 화론(畵論)으로 해석된다. 즉 그림이 갖추어야 할 기본인 셈이다. 그러한 요소들은 작가의 의도인 주제. 창작성. 시대성. 기능중의 텃치. 화필의 운용. 화면 전개. 구도. 색상이나 먹의 운용. 이론적 배경. 작가가 추구하는 철학 등이다. 그런 것이 보통 말하는 '잘 그렸다' '못 그렸다'의 외적 요소도 되고 그것들의 융화와 총체가 내적인 '훌륭한 그림'의 요인이 된다. 결국 작품은 인생의 총체다. 아름다운 인간, 그 자체가 아름다운 그림이 되기 쉽다. 그것은 좋은 인격과 좋은 생각, 좋은 소재의 선택, 좋은 느낌 등이 명작(名作)을 낳는다는 뜻이다. 그림의 주제. 구도. 필치. 색채. 느낌. 창의력. 성실성. 화면 전개. 작가의 가능성 등을 조심스럽게 살핀 다음 내 마음과의 결합 등도 살핀다. 그런 다음 작가의 배경. 이론적 배경 등도 읽어 둔다. 그것이 재미있다면 일단 감상자가 된 셈이다.
유레카! 먹는 그림! 그림의 맛을 아는 사람, 그림을 먹고 살게 된다. 그 맛은 구도와 색상에 좌우된다. 무엇을 어떤 기법으로 어떻게 그릴 것인가? 화가가 그의 화상(畵像)을 화면에 옮기기 전 소재를 어떻게 배치할 것인가 생각하게 되는데 건축의 설계도나 인체의 골격처럼 중요한 것이 구도다. 한국화에서 복잡 다양한 자연 경물 중 원하는 것만을 취사선택하여 주제(主題)와 작의(作意)를 극대화하는 방법은 구도에 따라 다르다. 구도가 좋아야 화면을 지배할 수 있고 그만큼 호소력이 강해진다. 조선대(1392∼1910)의 그림의 구도는 단순한 구도에서 복잡한 구도로 점차 변모했음을 알 수 있다. 가장 단순한 구도는 `일자(一字)구도`다. 무용총의 `무용도`가 그 예이다.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선을 긋듯 그렸다. 가장 원시적 구도라 할 것이다. 뿐만 아니라 초상화처럼 화면의 한 중앙에 주제를 배치하는 중립구도도 단순한 구도다. 그러나 이 구도는 화면을 강하게 압도하는 면이 있다. 중국 북송대 범관(范寬)의 계산행여도(10세기), 팔대산인의 팔팔조도(八八鳥圖·1694), 조선중기(17세기) 이명욱의 어초문답도, 추사 김정희의 세한도(19세기) 등이 중립구도다. 모두다 힘차고 멋진 그림이다. 한국 회화사는 조선대 그림이 주를 이룬다. 조선대 산수화의 구도를 알면 그림의 시각(視角)이 변모했음을 알 수 있다. 단순한 구도에서 화면을 넓게 쓰는 방법으로 변했다. 즉 변·각·전체(邊·角·全體)의 순서로 점차 공백이 줄어들고 주제를 그리는 면적이 넓어진다. 그것은 중국회화의 구도와 흡사하다. 조선시대 산수화는 실(實)과 여백을 다같이 중시했다. 반분구도 또는 편파(偏頗)구도는 사각형 화선지의 좌우·상하 어느 한 쪽에 그림을 채우고 나머지는 여백으로 남겨 놓았다.(편파구도) 조선 초기(15세기) 안견의 산수도, 강희안의 고사관수도가 편파구도다. 조선 초기에 주로 사용하고 여백이 많아 시원한 느낌을 주었다. 조선 중기(17세기)에는 사각형의 각(角)과 각(角)을 잇는 맞모금의 어느 한편에 그리고 나머지는 생략하는 대각구도를 사용하였다. 이 대각구도는 이정의 산수도, 김명국의 설경산수도에서 찾아 볼 수 있다. 조선 중기에 주로 사용한 대각구도는 시각이 변에서 각으로 더 넓어졌음을 알 수 있다.(대각구도) 사각(四角)구도(?)나 전충구도(塡充구도:?)는 사각형의 화면을 가득 채운 구도다. 조선 후기(18세기)와 말기(19세기)에 주로 사용하였다. 시각이 넓어진 구도다. 또한 주제를 화면의 중앙에 끌어당겨 그리기도 하였다. 정수영의 청용담(19세기), 조정규의 산수도(19세기)등은 사각(四角)으로 그림을 나누어 4개의 화면이 하나가 되는 사각(사각)구도이다. 정선(鄭敾)의 박연폭포(18세기)나 인왕제색도, 김홍도의 사인암도(18세기) 등은 화면을 가득 채워 주제를 강화시킨 전충구도다. 정선과 김홍도는 진경산수와 한국적 화풍을 성립시킨 우리 그림의 선구자다. 둘 다 모두 전충구도를 즐겨 사용하였다. 조선시대 산수화는 변에서 각으로 구도가 바뀐다. 시각이 변하고 그림의 소재(素材)배치가 복잡성을 띤다는 얘기다. 조선 말기(19세기) 추사 김정희나 소치의 제자들은 남종화(南宗畵)를 그리는데 전경·중경·후경 삼단(三段)으로 나눈 삼단구도도 즐겨 사용한다. 남종화에서 즐겨 사용한 삼단구도는 원활한 대지와 자연을 포치하는 산수화의 구도로는 적격이었다. 조선말기에서 근현대에 이르는 동안에 구도도 한 두가지 방법을 병용하여 사용한다. 예를 들면 대각구도에 삼단구도를 병용하는 것이 그 보기이다. 엄격히 말하면 산수화에는 투시도법의 시점(視點)은 없다. 조선시대 산수화는 다시점(多視點)의 시각으로 관조(觀照)되어 왔다. 그래서 그려진 부분 부분을 떼어놓아도 하나의 그림으로 독립되어 보인다. 그러면서도 전체적으로는 하나로 합일(合一)되어 보인다. 그것이 산수화의 재미다. 조선후기 겸재 정선과 단원 김홍도의 진경산수화(眞景山水畵)는 실사(實寫)를 했다. 눈에 보이는 경물 중 주제를 강조하면서 소재는 클로즈업되었다. 말하자면 그리고 싶은 것만 강조하고 나머지는 생략하여 여백으로 두었다. 특히 정선의 금강산도나 김홍도의 씨름도 등은 독특한 원형구도를 갖는다. 독특한 한국적 구도라 할 것이다. 현대그림에서는 일정한 격식은 무시되고 있다. 그러면서도 어떤 지주나 뿌리가 없는 그림은 인정하려 들지 않는다. 한국화의 구도변천을 살펴 주체적인 전통 재창조의 시원으로 참고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래야 우리 것이 나온다. 그림 그리는 일. 그것은 소재와 구도 찾기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한국화의 여백도 그림 값에 계산되는가. 같은 10호짜리 그림이라도, 동양화보다는 서양화가 비싸게 보인다. 동양화는 그만큼 여백이 많기 때문이다. 거기에 고향집도 있고 안개와 구름 속에 냇물이 흐르고 저녁밥 짓는 당산나무 아랫마을엔 할머니의 추억이 담겨있다. 보는 자마다 다 달리 생각 할 수 있는 것이 여백이다. 그래서 동양화는 여백의 미술이라고 한다. 그 여백 때문에 그림이 시원하게 보인다. 끌린다. 신비스럽기까지 하다. 하늘색과 물색을 칠하지 않고 흰 종이 그대로 두어도 사람들은 하늘과 물인지 안다. 장미 한 송이 그려진 그림. 장미를 실(實)이라고 하고 여백을 허(虛)라고 하자. 허(虛)가 흰 종이로 안보이고 조형공간이 된다. 들쑥날쑥, 소소밀밀, 오밀조밀한 구성력을 가져다주는 것이 여백이다. 그래서 동양화가 재미있다. 한국화도 그런 여백을 즐거워한다. 여백은 그림에 생기와 재미를 불어넣는 공간이다. 수평으로 길게 검정 먹칠한 공간 위에 여치 한 마리 그려놓고 윗부분을 생략해 보자. 그 여백은 광활한 하늘이 되고 검정부분은 광야로 변한다. 일시에 고독감과 희망이 교차한다. 반대로 그려보자. 일시에 광명을 향한 희망과 중압감을 느끼게 된다. 마찬가지로 왼쪽을 어둡게 칠하고 오른쪽으로 날개짓을 하는 까치 한 마리를 그렸다면 행복을 실어 나르는 살아있는 까치로 변해버린다. 그만큼 여백은 실(實)못지 않게 중요하다. 그래서 당연히 여백도 홋수에 계산되고 그림 값에 계산된다. 그려진 밖의 부분 여백. 예부터 기(氣)의 표상으로 여겼다. 10세기 산수화가들은 '산수의 기상'을 그리기를 의도하였고 여백은 빛과 기의 뜻을 가졌다. 중국의 '고개지' 때는 하늘과 물을 청록색으로 처리했고 '오도자' 는 하늘은 공백으로 물은 옅은 묵으로 처리했다. 북송의 사대부들은 시·서·화(詩書畵)일치를 제창하고 그림 속의 여백은 시정(詩情)이나 여운을 자아내는 유효한 수단이 되었다. 특히 남송의 마원(馬遠)과 하규(厦珪)는 사각형의 모서리 부분인 변각에 그림을 그리고 그 밖을 여백으로 내어놓는 것이 정형화되었다. 변각으로 실(實)을 그릴수록 광대한 공간 표현이 가능해지고 또 여백을 암시하게 되기 때문이다. 송·원대의 선종(禪宗)화가들은 수묵화를 자신들의 종교 이념을 표명하는 도구로 간주하여 일획법(一?法)을 강조하였다. 그것은 감필(減匹)에 의한 표현 억제의 의의와 심상의 도(道)를 표현하는 중요한 방법이었다. 한국인의 여유는 문인화와 산수화의 여백에서 특히 돋보인다. 한국화의 장점이기 때문이다. 특히 수묵화에서의 여백에서 여백이란 실(實)못지 않게 중요하다. 화조화·사군자·문인화·인물화 등의 여백은 대상 배치에 따른 구도상의 역할을 담당한다. 현대회화에서 여백은 주제를 강력하게 살리는 조형적 효과를 부각시킨다. 한국의 미를 여유 있는 '여백의 미'라 하는 것도 과언이 아니다.
한국화는 선(線)의 예술이다. 서양화는 색(色)과 색(色), 면(面)과 면(面)이 만나는 접점이 선이지만 한국화는 선 그 자체가 면과 면을 구분짓는다. 한국화에서는 선이 굵어지면 면이 된다. 특히 산수화의 선은 산수화의 생명인 산이나 언덕의 준(?)을 만들기도 하고 문인화(文人畵)에서는 선 자체가 여백과 실(實)을 기르는 경계도 된다. 선은 실(實)과 허(虛)를 공존케하는 막인 것이다. 선을 긋는다는 것은 둘 사이의 확실한 경계를 짓는다는 것이다. 인간사(人間事), 엄격한 선을 긋는다는 것도 어렵고 또 어려운 일이다. 그림도 마찬가지이다. 먹선 한번 잘못 그으면 그림도 망친다. 선도 어떻게 긋는가에 따라 그림의 성질이 바뀐다. 그야말로 가지가지다. 진한 먹의 윤기나는 선, 촉촉한 선, 번질 듯 수줍은 선, 가는 선, 굵은 선, 긴 선, 짧은 선, 짙은 선, 옅은 선, 비백이 많은 갈필선, 먹이 잘 섞인 선, 철사처럼 딱딱한 선, 실처럼 부드러운 선, 기둥이 갈라진 듯한 파열 선, 도끼질한 듯한 부벽 선, 속도가 빠른 선, 더딘 선, 그칠 듯 이어지는 선, 까실까실한 선, 곧고 바른 선, 등등 용필(用筆) 용묵(用墨)에 따라 그리고 필속(筆速)에 따라 제각기 다른 선이 된다. 옛날 산수화(山水畵)는 이러한 선을 자연에 곧잘 비유해서 그렸다. 삼베 실꾸리를 푸는 듯한 피마준, 연잎의 수맥 같은 하엽준, 도끼질 한 듯한 부벽준 둥이 그것이다. 우리나라의 선은 독특한 아름다움도 많다. 버선 콧등의 선, 저고리의 소매자락의 선, 쥘부채의 부채꼴 선, 모두 유연한 감각의 선이다. 배흘림 기둥의 선, 팔작 지붕의 처마선, 초가지붕의 용머리선, 모두 약간 휘어진 듯한 유연함과 부드러움이 있다. 청자, 백자의 약간 뒤틀린 기형은 균형 속의 파격을 이루면서도 인체의 얼굴이나 몸매의 외곽선과 닮았다. 한국화의 먹선은 물체의 모양을 결정한다. 뿐만 아니라 운동감이나 속도감도 닺는다. 물체의 양감, 태깔, 질감도 더해준다. 먹의 농도에 따라 그 정도도 다르다. 한편 선을 긋지 않은 선도 있다. 즉 공선(空船)이다. 선이 없으면서도 있는 선이다. 즉 면과 면이 만나서 이루어지는 선이다. 공선은 명암이나 깊이를 느끼게 한다. 서양화에서 색깔로 경계가 되듯이 먹색으로 이루어지는 선이 공선이다. 예를 들어 진한 먹색의 윗 부분을 하얗게 남기고 그 윗 부분을 먹으로 칠하면 하얀 면은 흰 선이 되면서 경계도 되고 명암의 대비를 강조한다. 그러한 공선은 실선(實線)못지 않게 큰 몫을 한다. 형체를 그릴 때 한국화의 선은 결구(結構)가 중요하다. 즉 선의 길고 짧음, 두텁고 옅음, 많고 적음, 공간 구성방법에 따라 구도가 전혀 달라질 수 있다. 옛날 선화법(禪和法)에 일획법(一?法)이 있다. 그림의 시작이 일획이요, 끝이 일획이다. 한번 그어 그림을 완성하는 것. 즉 단순에 그림을 그려내는 것이다. 필력과 필법이 의중에서 완성되어야 어떤 형태를 이룰 수 있는 선을 보면 그 작가의 필력이나 실력을 가늠할 수 있다. 그만큼 선은 화가의 경력과 관계된다. 의재 허백련은 그칠 듯 이어지는 선에 먹을 아끼는 갈필선을 즐겨 사용했다. 운보 김기창은 옷 주름선, 즉 의습선에 그칠 듯 둥글다가 다시 이어지는 누에 똥선이나 철필같은 철필선을 즐겨 사용했다. 작가마다 전혀 다른 필선을 사용한다. 선은 곧 작품의 개성이 되기 때문이다. 화면에서 두 선이 나란한 평행선이나 서로 교차하는 X선은 피하는 것이 좋다. 그림의 소재와 조화가 안되기 때문이다. 듬성듬성하다가 빽빽한, 소소밀밀(疎疎密密)한 선, 그것은 변화있는 선이며 변화 속의 균형있는 조화를 뜻한다. 키 작은 두 그루 나무가 서 있다. 그 곁에 조금 떨어져 키 큰 나무 한 그루가 서 있으면 V자 형으로 두 그루가 서 있어야 한다. 그것이 더 조화롭기 때문이다. 그림을 그릴 때 외곽선을 가느다란 쌍선으로 먼저 그리면 백묘(白描), 그 가운데를 색이나 먹으로 채우는 법을 구륵법(鉤勒法)이라 하고 발묵으로 단번에 물체의 형태를 그리는 법을 몰골법(沒骨法)이라 한다. 구륵법이 가느다란 선을 썼다면 몰골법을 굵은 선을 쓴 셈이다. 즉 나무줄기를 단숨에 발묵하여 그리면 몰골법이요 나무줄기의 외곽선을 먼저 그리고 줄기 가운데를 색이나 먹으로 그렸다면 구륵법이 된다. 불교화는 대부분 구륵법으로 그려졌다. 대나무나 매화줄기는 주로 몰골법으로 그린다. 옛날 어떤 화가가 큰 붓으로 굵은 수직선 하나를 그어 놓고 붓과 함께 그 벽에 붙어 죽어 있더라 했다. 그런데 그 방에서 물 떨어지는 소리가 요란했다 한다. 생명을 다해 그린 한줄기 선(線)의 폭포다.
한국화를 그리는 방법 중 먹이나 붓으로 칠하거나 그리는 방법은 어떤 것이 있을까. 예로부터 내려오는 산수화와 화조화·문인화를 그리는 방법에는 크게 두 가지가 있다. 즉 구륵법(鉤勒法)과 몰골법(沒骨法)이 그것이다. 구륵법은 구륵진채법(鉤勒진채법)이라고도 한다. 형태의 윤곽을 선(線)으로 먼저 그리고 그 안을 먹이나 채색으로 메우는 기법이다. 이 방법은 옛날부터 사용되어온 전통적 동양화 화법이다. 특히 중국의 5대 이후의 화조화에서는 황전(黃筌)이 전형적으로 사용해온 기법으로 '황씨체'라고도 부른다. 황전은 촉의 화가로 화조화를 잘 그렸다. 그의 화조는 구륵법으로 그렸고 섬세하고 화려하였다. 국화를 그린다고 생각해 보자. 우선 국화잎과 국화꽃을 색이나 먹으로 그 외곽선을 그린다. 그리고 그 중앙의 횐 부분을 색으로 입힌다. 이렇게 그리는 국화기법을 '구륵선염법' 또는 '구륵점엽법'이라고 한다. 다시 말해서 구륵법이다. 이런 구륵법은 북송대의 문인화가들이 즐겨 사용한 방법이다. 구륵법은 산수화·매화·국화·인물화·불화 등에서 즐겨 사용하였다. 구륵법은 섬세하고 꼼꼼하게 물상의 외형을 묘사하여야 사실감이 난다. 특히 영모화(새 그림)는 운필이 세련되어야 하고 눈에 찍는 점정(點睛)은 살아있는 듯 해야 한다고 했다. 백묘법(白描法)은 선염이나 채색없이 선으로만 그린 인물이나 화조를 말한다. 진상(陳常)과 조맹부(趙孟採)가 즐겨 사용한 방법이다. 몰골화법(沒骨畵法)은 윤곽선으로 형태를 먼저 그리는 것이 아니라 바로 채색이나 먹으로 그린 그림이다. 외곽선이 없기 때문에 뼈 없는 그림이란 뜻에서 몰골법이라고 한다. 먹과 색의 농담만으로 그림을 그리는 방법이다. 수묵화가 바로 몰골법이다. 사군자·화조화·산수화 등에서 즐겨 사용하였다. 박묵법과 필력·운필법이 중시되었다. 옛날에는 산악도에 사용되어 양(梁)의 장승요(張僧繇·?∼510), 당의 양승(楊昇)등이 이 방법을 사용하였다. 5대 이후에 주로 화조화에 쓰이고 서희(徐熙)의 특색인 '서씨체(徐氏體)'가 몰골법이며 특히 '서숭사(徐崇嗣)'의 몰골화가 유명하다. 청초에 운수평(?壽平)이 사실적인 몰골화조풍을 재흥시켰다. 몰골법은 붓을 단숨에 내려 긋는다던가 또는 농담의 조절으로 형태의 외곽을 내부와 동시에 그려가는 방법이다. 따라서 운필력·필속(筆速)·필력(筆力)·발묵(潑墨)·발색(潑色) 모두 중요하다. 몰골법은 본래 서역의 승(僧)들이 불화에 많이 사용해온 방법이었다. 즉 화면 전체를 색채로 표현하며 묵선(墨線)을 사용치 않는 화법이다. 장승요(480?∼549)는 서역을 여러 차례 왕래하면서 전통적 중국화풍에 서역의 불화법(佛畵琺)을 배합하여 새로운 몰골법을 수립하여 중국화 발전에 공헌하였다. 그의 독창적인 청벽채색(靑碧彩色)의 몰골산수화법이 유명하다. 그는 최초로 서양화법을 동양에 소개한 사람이다. 중국의 양진(兩晉)시대에 인물화(人物畵)가 동양화의 주류를 차지한다. 그것은 전통적 중국인물화에 불화인물법이 가미된 새로운 인물화 형태가 나타났다. 그 방법은 모두 몰골법이었다. 서희는 수묵 또는 채색으로 직접 꽃의 형태를 그렸다. 그것이 몰골법인데 채색 없이 먹으로만 그린 문인화법을 특히 묵필점염법(墨筆點染法)이라 한다. 물론 먹의 농담이 좋아야 한다. 중국 청초에 활약한 명의 유랑민 화가 팔대산인(八大山人·1626∼1705)은 몰골법의 수묵화에 능한 사람이었다. 송석·연꽃 등을 거침없이 잘 그렸다. 구륵법과 몰골법 중 어느 것이 더 좋은가. 그것은 소재나 작가에 따라 다르다. 다만 표현되어진 작품의 느낌이 어느 것이 더 예술적이냐에 달려있다. 흔히 구륵법은 장식적이라고 말하고 몰골법은 활달한 필치라고 말한다. 그럴 수밖에 없다. 꼼꼼하게 매화가지를 외곽선만 그리고 색으로 입히는 것과 단숨에 내려긋는 매화가지의 맛은 사뭇 다르지 않겠는가. 그래서 몰골법이 더 현대화풍에 가깝다고나 할까.
산 많고 물 좋은 나라. 문 열면 정원인 금수강산 한국! 유럽은 집과 사람이 많다. 그래서 인물화가 흔하다. 산이 많은 나라 한국. 뭐니뭐니 해도 한국화는 산수화가 제일이다. 자연의 재설계, 즉 우주의 재창조가 산수화의 세계다. 그래서 옛날 중국에는 산수화(山水畵)를 천지(天地)의 도(道)라 했다. 그림에는 주제와 소재가 있다. 비둘기 무리를 그린 그림이 있다고 하자. 비둘기는 소재로서 실경(實境)이고 작가의 의경(意境)인 평화는 주제다. 작가의 사상이나 감정은 주제로 표현된다. 소재는 주제를 나타내기 위한 주변물이다. 우리는 어떤 그림에서 시원함, 현란함, 평화로움을 곧 잘 느낀다. 더러는 왜 이렇게 그렸을까 의심도 한다. 참새가 어찌 봉황의 뜻을 알까마는 작가는 화의(畵意)를 강하게 드러내려고 고심한다. 대자연 앞에서 작가는 하루살이다. 하루살이가 어찌 겨울을 말하랴만 작가는 눈앞의 진경(眞景)을 마음의 신운(神韻)으로 옮기는 자다. 그래서 작가는 불안하다. 그 속에서 하이덱거의 말처럼 자기 성찰자세가 된다. 산수화는 그런 대자연의 진경과 마음의 신운(神韻)을 산수의 형상을 통해 드러낸다. 그래서 그림중의 그림, 즉 최고의 경지로 보아왔다. 동방에서 산수화(山水畵)는 위진(魏晉)시대부터 시작됐다. 그 전에도 있었으나 남경지방의 산수를 배경으로 한 동양 특유의 풍경화는 그때부터다. 장자의 현학(玄學)과 자연과 인본(人本)의 친숙 관계로 부터다. 노자의 무위(無爲)는 자연은 순환하고 사람은 자연을 찾아든다고 했다. 산수화는 무궁무진한 자연을 그린 그림-자연을 잘 그리려면 자연 속에 숨어있는 신비한 이치와 진의(眞意)를 찾아야 한다. 그래서 문징명(文徵明)은 작가의 예술정신은 자연에 귀결되고 거기에서 산수(山水)의 신비가 드러난다고 한다. 당(唐)말 오도자(吳道子)와 왕유(王維)때 수묵산수와는 절정을 이룬다. 인격·장자철학·산수화가 동일시되었다. 최초의 산수화론은 고개지(顧愷之)의 화운대산기(畵雲臺山記)가 있는데 진짜 산수화론과는 무관한다. 당시 사대부들은 자연속에 은일(隱逸)하기를 좋아했는데…. 송(宋)의 종병(宗炳)은 산 애찬가였다. 그의 화산수서(畵山水敍)에 의하면 '성인은 신(神)으로서 도(道)를 발하지만 현자(賢者)는 산수(山水)를 통하여 형(形)으로서 도(道)를 아름답게 하니 인자(仁者)의 즐거움이 그렇지 않겠는가' 라고 하여 장자의 이론과 상통했다. 산수화는 형태의 질(質)을 찾는 것. 그것은 화도(畵道)의 자질을 기르는 것이라 했다. 그래서 마음이 청결해야 그 정(情)에 젖는다. 종병은 그의 산수화론에서 명산명천(名山名川)의 생활화를 부르짖었다. 산 속에 도(道)가 있으니 산에 살고 산수화 속에 신(神)이 있어야 한다고 했다. 즉 취흥과 감신(感神)은 장자의 무(無)와 같다고 했다. 원영법(遠映法)을 처음 제창했는데 화가겸 이론가였다. 왕징(王徵)은 종병보다 40세 연하다. 은일적(隱逸的)인 기질로 산수화를 좋아했다. 그의 「역대명화기(歷代名畵記)에서 산수화를 독립시키려 애썼다. 산수화는 인물화의 부소물이 아니며, 정신의 해방과 산수의 영과 자연의 무한성을 강조했다. 장언원(張諺遠)은「역대명화기를 저술했다. 합리적 산수화를 제창한 미술사학가였다. 깊은 이론은 없지만 산수화에서 사람이 산보다 커서는 안된다고 보았다. 당대의 왕유(王維)는 화학비결(畵學秘訣)에서 화도(畵道) 중에 수묵화가 최고라고 부르짖었다. 초년에 색채화가였고 이사훈의 영향을 받았다. 이사훈은 왕유보다 49세 선배다. 왕유는 후에 남종화에 큰 영향을 미친다. 당의 3대가는 이사훈·왕유·오도자다. 이사훈은 실경산수화를, 오도자는 사군자와 관념적 산수를, 왕유는 문인적 산수화를 잘 그렸다. 형호(荊浩)는 당말 화가인데 산수화를 정착시켰다. 북송 이후 천년을 끌어온 동양 산수화의 시조다. 오도자의 영향을 받았다. 형호의 필법기(筆法記)는 산수창작, 경험과 기법, 비평기준등 내용이 충실하다. 그의 화6요(畵六要)는 기·운·사·경·필·묵(氣韻思景筆墨)이다. 필법(筆法)으로 6요를 중요시했다. 그는 필의(筆意)를 중시하고 도교의 자연숭배사상을 그 근간으로 삼았다. 형호는 작품을 신·묘·기·교(神妙奇巧)의 4세(勢)도 중요시했다. 그것은 ①필이 끊이지 않는 것 ②기복(起伏)이 성실한 것 ③생사가 올바른 것 ④화적에 실패하지 않는 것이다. 그의 저서 화산수부(畵山水賦)는 산수화의 기본서이다. 회화의 본질은 진(眞), 즉 참이다. 산수의 상징성·은유성·비유성에서 자연과 우주와 인간의 삶의 지혜를 찾아보는 것이다. 그것이 산수화의 정신세계이다. 곽희(郭熙)는 북송대의 화가인 형호의 화론을 과학적 방법으로 연구하여 삼원법을 제창하였다. 그의 저서는「임천고치(林泉高致)이다. 「임천고치에 의하면 고원법(高遠法)은 아래에서 위로 쳐다보는 시각이고 심원법(深遠法)은 산의 전면에서 산의 후면을 넘겨다보는 시각이며 평원법(平遠法)은 가까운데서 먼 산을 바라보는 시각이다. 고원법의 색은 청명하게 해야하고 심원법의 색은 짙은 안개처럼 칠하고 평원법은 밝고 어두운 곳이 있어야 한다고 했다. 또 고원법의 산은 우뚝 솟아야 하고 심원법의 산은 중첩되어야 하고 평원법의 산은 까마득히 희미한 것 같아야 한다고 했다. 곽희는 마음의 정화(靜化)를 강조하고 정신적으로 해방되어야 좋은 작품(作品)을 얻는다고 보았다. 사람의 정신이 산수의 정신에 의존하면 초월적 창조를 얻게 된다. 멀리서 산을 볼 때는 세(勢)를 취하고 가까이서 볼 때는 질(質)을 취해야 한다. 산에는 무궁무진한 형상이 다 들어 있다. 그 형상에서 창조적 소재를 찾아야 한다. 그래서 산은 만인의 어머니다. 산수화에는 몰골법에 의한 수묵산수화와 구륵법에 의한 채색산수화가 있다. 그것을 남종산수화와 북종산수화라고도 한다. 겸재 정선과 단원 김홍도는 한국적 실경으로 생활 주변과 진경산수(眞景山水)를 그렸다. 반면에 추사·소치·고람·북산등은 정신적 문인기질로 절제와 일필의 정신세계를 그리려고 노력하였다. 그러다가 소림 조석진과 심전 안중식은 조선 말 산수화가로 청말 산수화의 형태를 답습하였다. 오늘날 한국화가들은 오밀조밀하고 아담한 한국의 소박미를 찾기에 노력하고 있다. 아파트가 있고 철교와 기차가 있고 버스가 다니는 도시풍경에 아름다움을 부여한다. 그런가 하면 삼면이 바다요, 줄줄이 섬이 많은 한국적 바닷가 풍경을 현대적 산수로 재창조하기도 한다. 오늘날 산수화는 현대의 복잡한 삶에 여유로운 정서미를 준다.
시 . 서 . 화(時書畵)를 즐기는 사람. 서권기(書券氣) 나 문자향(文字香)을 찾는 사람. 옛 중국의 교양인은 문인(文人)이었다. 원래 사대부(士大夫) 관료들이었다. 위진(魏晉) 시대, 자연과 벗하고 노장(老莊) 사상에 잠겨, 문인은 남조인(南朝人)의 이상이었다. 북송대(北宋代)에는 시.서.화 삼절(詩書畵 三絶)이 많았다. 남송대에는 문인(文人) 사이에도 직업화가들이 생겼다. 문인화(文人畵)는 문인의 여기적(餘技的)인 그림이다. 쉽게 말하면 돈 챙기지 않는 아마추어적 그림이다. 명말(明末) 동기창(董基昌)이 쓰기 시작했다. 그래서 남종화(南宗畵)와 상맥한다. 원대(元代)에는 그림쟁이를 행가(行家:전문화가)와 이가(利家:아마추어 화가)라 불렀다. 남송대 회화의 목적을 사의(寫意)라 하고 수묵화를 중시했다. 시 .서 .화 삼절(詩書畵 三絶 )이 사대부들의 이상이었다. 반면 화원(畵院) 화가는 형사(形似)나 장식적 그림을 주로 그렸다. 원말(元末)에 와서 사대가(四大家)들은 회화의 복고주의에 입각하여 문인화를 즐겼다. 특히 오파(吳派)인 심주(沈周), 문징명(文徵明)이 중심이 된다. 명말에 문인화가는 전문화가를 압도한다. 동기창은 문인화의 계보를 남종화로 직업화가의 계보를 북종화로 명하고 북종화를 배격하였다. 이런 남북 양종의 호칭은 남종선(南宗禪). 북종선(北宗禪)의 구별에서 온 것이다. 문인화를 예찬(倪璨)은 자오(自娛)를 위해 그리는 것이지 팔아서 돈 벌려고 그리는 게 아니라고 했다. 그래서 임관(任官)·재야지주(在野地主) 모두 즐겨 그렸다. 그런데 뭐니뭐니해도 머니(Money)라더니, 원대에 그림 파는 문인화가가 나타났고 그림쟁이는 농업이 쇠약하자 도시로 떠나게 된다. 청대(淸代:18세기) 양주팔괴(陽州八怪)는 그 전형으로 직업화가가 된다. 한국에는 고려 때 사대부 김부식(金富軾)·정홍진(丁鴻進)등이 화죽(畵竹)으로 이름을 떨친다. 그러나 문인화는 조선시대에 본격적으로 그려진다. 김제(金?)·조속(趙速) 등이 토속적인 화풍을 이룬다. 중기에 정조대왕은 파초(芭蕉)를 잘 그렸다. 모두 순수한 아마추어 그림쟁이다. 정선·심사정·조영석 등이 본격적인 프로화가다. 당상관으로 그림을 그린 이재·윤순 등이 나타나고, 김정희(金正喜)·전기(田琦)·민영익(閔泳翊)등 19세기 화가에 의해 문인화는 정점에 달한다. 송대 소동파(1036∼1101) 시정 미불(米揷)의 조카 정균(政筠)이 그린 화첩의 발문(跋文)중 탕구(湯垢:14세기 화론가)의 글을 보자. 문인화가의 정신을 읊어 놓았다. 숨김 없는 너의 마음을 보아라. 그러면 너의 붓은 영감(靈感)을 받을 것이다. 서(書)와 화(畵)는 하나로 통하는 것, 타고난 덕을 나타낸다. 여기 두 벗이 있나니 고목(故木)과 키 큰 대 거침없는 손길로 눈 깜짝할 사이에 완성되었다. 한 순간의 구현(具現)이 만대(萬代)의 보물이며 그리하여 그것을 펼치면, 친밀감을 느끼게 되고 이는 마치 그분의 풍모(風貌)를 보는 듯하구나. 여기(餘技)와 유?(遊戱)의 방식으로 그림에 임했던 문인화가들. 선종(禪宗)과 더불어 지적인 접근에서 직관적 접근으로 변한다.
여인네의 치맛자락 흔드는 바람-부채바람! 어찌 선풍기에 비하랴! 거기에 심금을 울리는 시 한 수와 시에 어울리는 그림 한 폭. 부채 흔들기가 아까워 고개를 좌우로 흔들만하다. 모시적삼에 쥘부채(傅埰) 쥐고 정자의 대나무 평상에 벌렁 눕는다. 거기다가 시조 읊으면 내가 곧 왕이요 부자다. 달밤에 별 하나 나 하나 세다가 모기 때려잡는 부채 어찌 에어컨이 큰소리치랴. 부채를 선물하자. 단오날에. 이 보다 값진 여름선물이 있을까? 부채에 그리는 그림이 선면화다. 그 값은 싸기도 하다. 보통 쥘부채는 6절 화선지 반값이면 족하다. 옛 습속에는 부채를 선물하는 일이 잦았다. 고대 중국의 순임금은 현명한 사람을 구하고자 오명선(五明扇)이란 부채를 만들었다 한다. 당에서도 훌륭한 인재를 추천하는 사람에게는 부채를 선물했다. A.D. 918년 후백제의 견휜왕이 고려 태조 왕건에게 즉위 축하로 공작선(孔爵扇)을 선물했다는 옛 기록도 있다. 옛날 그 덥던 여름에는 파초 잎이나 새의 깃이 부채였다. 박지원의「열하일기」에 파초엽이 나온다.「산림경제」에도 파초선과 학날개 부채가 나온다. 푸른 바람을 일으키는 천연부채다. 거기다가 알몸으로 계곡 물에 발을 담그는 풍욕은 솔바람을 잠재우기에 흡족했다. 부채는 크게 쥘부채(접는 부채)와 방구부채(둥근 부채)가 있다. 쥘부채는 합죽선·소선(素扇)·반죽선(斑竹船扇)·외각선(外角扇)·내각선(內角扇)·승두선(蠅頭扇) 등이 있다. 사모관대 쓰고 말 타고 장가갈 때는 반드시 얼굴을 가리는 차면선을 든다. 차면선(遮面扇)은 명주(銘酒)나 베(베)로 만드는데 청색이다. 상인(商人)이 외출시에도 포선(布扇)을 사용, 얼굴을 가렸다. 모선(毛扇)은 겨울에 얼굴을 가리는 부채인데 손잡이를 털로 만들어 따뜻하게 하였다. 오늘날 미니스커트에 빨간 립스틱 짙게 바르고 합죽선으로 가슴을 가리면 어떨까! 「동국세시기」에 의하면 단오날 단오선(端午扇)을 나누었다. 엄했던 윗사람이 아랫사람에게 선물하였다. 더불어 사는 멋진 공동체다. 부채! 살며시 감추고 서늘한 바람도 주고 햇빛도 막아준다. 먼지와 바람도 비껴가고 춤추고 노래할 때 손에 들고 멋부리고 모기와 귀신도 붸고 악당들 앞에서는 무기도 된다. 그야말로 멋진 호신용이다. 그래서 팔덕선(八德扇)이라 하였다. 궁중에서 왕비나 공주가 정원을 거닐 때 시녀들이 대륜선(大輪扇)을 들고 따랐다. 그것은 햇빛가리개요 선풍기였다. 그런가하면 진주선(眞珠扇)은 비단에 수놓고 금은 등으로 장식하였다. 양반들이 외출 시, 또는 신부가 혼인 전에 초례청에 나갈 때 얼굴을 살짝 가리는데 사용하였다. 수줍고 어설픈 여인네의 안식처였다. 부채는 일반적으로 여성용은 화려하고 작다. 남성용은 크고 소박하다. 또 부채자루(慈淚)에 선추를 달아 멋지게 장식했다. 보통 서민들은 콩기름이나 들기름을 먹인 방구부채를 사용했다. 선비들은 산수화나 문인화가 그려진 쥘부채나 합죽선을 사용했다. 상인(商人)은 백선(白扇)을 사용했다. 옛부터 쥘부채 한 자루 만들어 쌀 한 말과 바꾸었다. 현재 부채의 주산지는 전주·남원·담양·나주 등이다. 보통 합죽선은 아홉마디이며 열 마디 이상은 값이 더 비싸다. 부채에 그려진 그림을 선면화(扇面畵)라고 한다. 부채에는 사군자·문인화·화조화·영모화·인물화 등 서화(書畵) 어느 것이든 그릴 수 있다. 부채살에 붙여진 종이 위에 그림이나 글씨를 써서 운치를 더한다. 선면화는 시원해야 좋다. 부채에 그림을 받으려면 화가에게 부탁한다. 보통 합죽선은 6호 정도의 크기다. 그림은 단순하고 시원한 청량감이 돋보여야 운치가 있다. 부채 모양은 부채꼴이므로 거기에 어우러진 구도가 좋다. 부채는 오동나무 상자에 담아 시원한 곳에 보관한다. 상자는 부채구입시 함께 구입할 수 있다. 부채는 접어진 선 때문에 그림그리기가 까다로우나 그 접선 자체가 자연스런 맛을 준다. 선면화는 조선대에 유행하였고 소치가 그린 '선면산수도'가 유명하다. 선면화는 합죽선의 그 예술성과 함께 한국을 표현하는 미적 자료가 된다. 우리나라에는「한국선면예술협회」가 있어 해마다 1백여명의 회원들이 선면전을 열고 있다. 1995년에는 프랑스 파리에서 선면화의 예술성을 세계에 보여주었다. 유럽에도 망사 천에 수놓은 부채가 있고 중국에는 향나무부채도 있다. 그러나 소뿔과 대나무뿌리로 장식하고 인두로 무늬를 놓아 만든 한국 합죽선만큼 시원한 바람이 부는 부채는 없다. 그 상쾌함은 합죽선이 제일이다. 부채는 부쳐보아서 찰랑거리는 소리가 나지 않아야 좋다. 쥘부채의 손잡이는 여인네의 허리처럼 홀쭉하여 손에 꽉 잡힌다. 지압이 잘되어 건강에도 좋다. 올 여름엔 합죽선에 몸을 식히고 근심 걱정도 날려보내자.
부귀옥당(富貴玉堂)! 이보다 풍요로운 꿈이 있을까. 목단이나 화조그림에 의례 쓰는 화제다. 화려한 꽃과 새 그림은 다분히 장식적이어서 결혼·회갑연에 병풍이나 액자로 방안을 치장한다. 화조화(花鳥畵)는 화훼화(花鳥畵·花卉畵) 또는 영모화(瓔毛畵:彫花), 동물화, 절지(折枝) 등을 총칭한다. 꽃·새·풀·벌레·동물 등을 소재로 한 그림이다. 중국에서는 위진남북조시대 시작되어 당대에서 북송대에 이르는 동안 성행하였다. 대표적 작가는 오대의 서희(徐熙)·황전(黃氈), 북송의 서숭사(徐崇嗣)·황거채(黃居寀), 원의 전순거(轉瞬擧), 명의 변문진(邊文進)·려기(呂紀), 청의 황진(黃塵)·운수평(運數平)·양주팔괴(楊洲八怪) 등이 있다. 남당(南唐)의 서희(徐熙)는 누구에게도 사사 받지 않고 또 고화법에 얽매임 없이 스스로 독자적인 화법을 만들었다. 수묵위주의 야일체(野逸體)의 화조화풍인 서체(暑滯)를 만들었다. 반면에 황전(黃氈)은 서희와 대조적으로 화원화가이며 고법에 충실하고 색채 위주의 쌍구 진채법(雙鉤眞彩法)을 썼으며 주문에 의한 그림을 이루었다. 양자 모두 오대의 화조화의 양대화파로 황전부귀 서희야일(黃筌富貴 徐熙野逸)이라는 평을 받았다. 이 둘의 화풍은 청대 말까지 계속된다. 본래 화조화는 산수화와 함께 발전했으나 그보다는 소극적이었다. 청말(靑末) 신흥예술운동에 의해 화조화는 전성기를 이루었다. 구륵과 몰골 양법 모두를 사용하여 고아(高雅)하고 묵취(墨趣)가 풍정한 여백미 넘치는 그림을 그렸다. 송(宋)의 이공린(李公麟)은 마도(馬圖)에서 원의 조맹부는 화조에서 색채의 사용없이 붓을 빨리 움직여 고른 선만으로 그리는 백묘법(白描法)으로 그렸다. 서승사(緖崇嗣)는 선염(渲染)의 효과로 필선을 숨기며 형태를 나타낸 몰골법(沒骨法)의 화조화를 장식했다. 황전(黃筌)은 가늘고 고른 선으로 물체의 윤곽을 그리고 색을 칠하는 구륵법(鉤勒法)으로 그렸다. 우리 나라는 조선중기 이후의 그림들이 많이 남아있다. 이때의 그림들은 진경산수(眞景山水)나 풍속화(風俗畵)에서 보듯이 한국적인 정취가 강한 수작(秀作)이 많다. 대표적인 화가는 새 그림에 김정(金湞)·신세림(申世霖)·조지운(趙之耘)·심사정(沈師正)·김양기(金良驥)·홍세섭(洪世燮) 등이 있고 화훼와 초충도에는 심사임당·이우(李瑀)·남계우(南啓宇)가 있다. 남계우는 '남나비' 라 불릴 만큼 나비를 잘 그렸다. 견도(犬圖)에는 이암·김두량 등이, 고양이 그림은 변상벽(卞相壁)이 유명하다. '변고양이' 란 별명이 붙을 정도다. 변상벽은 닭도 잘 그렸다고 한다. 신윤복(申潤福)은 계도(鷄圖)를 잘 그렸다. 호랑이는 고운(高韻)과 김홍도(金弘道)가, 소그림은 김제(金醍)·김식(金植), 용그림은 석경(石敬)·심사정(沈師正)·김응환(金應煥)등이 그렸다. 포도도(葡萄圖)는 성삼문·신사임당·황집중·이계우·황수주·이인문·심정위·최석환 등이 잘 그렸다. 화법(畵法)에도 음양이론을 따르는 게 동양화 화법이다. 초화(草花)는 여성적, 목화(木花)는 남성적으로 그렸다. 모든 꽃은 종류에 따라 향취와 정취가 달라야 했다. 나무나 꽃은 모두 풍운(風雲)이 다르므로 형태·생태·속성 등을 잘 관찰하여 실사(實辭)와 화의(畵意)를 결합하였다. 옛법에 모란꽃(悉丹化)은 부려(富麗)해야 하고 해당화는 요요(妖妖)해야 한다 했다. 매화(梅花)는 맑고 청초해야, 향화(香花)는 번성해야, 도화는 빽빽해야, 매실꽃은 듬성듬성해야, 장미화는 한들거려야, 산중꽃(山中化)은 외로워야, 야화(野花)는 미풍이 있어야, 산다화(山茶化)는 향기로워야, 월계화(月桂化)와 목련화는 더욱 향이 짙어야, 양유(楊杻)와 오동은 청아(淸雅)해야, 송백(松柏)은 창윤(蒼潤:푸른윤기)해야 한다고 했다. 초화법(草花法)은 구염법(?染法)·몰골법(沒骨法)·묵필점염법(墨筆點染法)·백묘법(白描法) 등이 있다. 구염법은 황전이 쓰던 법으로 꽃송이는 구륵으로 잎은 점엽(點葉)으로 그리는 방법이다. 몰골법은 서희(徐熙)를 시작으로 수묵이나 색채로 직접 꽃의 형태를 표현하는 방법이다. 현대에도 즐겨 사용하는 방법이다. 묵필전염법은 먹의 농담으로 꽃송이나 줄기 등을 그리는 법으로 문인화가들이 즐겨 사용했다. 백묘법이란 선염(渲染)이나 채색을 사용치 않고 인물화처럼 붓을 유쾌하고 빠르게 놀려 꽃의 형태를 나타내는 화법으로 진상(陳狀), 조맹부 등이 즐겨 사용한 법이다. 어떤 화가가 병아리를 그려두었다. 맨 마지막에 눈의 점들을 찍기 시작했다. 그랬더니 병아리가 모두 살아서 도망가 버렸다한다. 영모화법(?毛畵法)에 점정(點睛)이란 눈동자에 점을 찍는 것을 말하는데 매우 조심스레 그려야 한다고 했다. 왜냐하면 정신은 눈에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며 맨 나중에 점을 찍는 게 일반적이었다. 가장 요긴한 부분을 끝내어 일을 완성시킨다는 말에 화룡점정(畵龍點睛)이란 말이 있다. 그림에서 점 하나는 생명을 좌우하는 것이다.
나는 나는 죽어서 파랑새가 되어 푸른푸른 들 날아가리라. 많이 내렸다. 봄비. 가고픈 곳 빗속 한 우산 속…. 동경과 그리움의 세계가 현실에는 없는가. 방안에 가두자, 부귀영화를. 조선대의 사대부들은 부귀영화와 장수를 상징하는 많은 그림들을 그렸다. 물론 감상과 장식용이었다. 서민층에서도 영·정조 이후 차츰 감상과 장식용의 그런 그림들을 즐겨 그리기 시작하였다. 우리도 마음으로라도 부자되고 귀인되자는 것이다. 십장생이란 열 개의 불사장수(不死長壽)의 상징물이다. 즉 해·구름·돌·솔·불로초·거북·학·사슴(日·雲·山·水·石·松·不老草·龜·鶴·鹿)을 말한다. 십장생도란 그것을 그림으로 그린 것을 말한다. 조선시대 유행한 길상(吉祥) 도안이다. 십장생도의 개념은 중국 도교와 관계가 있고 고구려벽화에 선례가 있다. 고려 말경부터 유행하였다. 선초(鮮初)에 동경(銅鏡)에도 나타나고 조선 중기에는 궁중의 벽화와 병풍을 비롯하여 민화, 자수·도자기·목공예 등에서도 자주 보인다. 십장생도는 조선대에 도화서원(圖畵署員)들이 장식용으로 즐겨 그렸다. 도화서원은 20명 정도의 화원(畵員)들인데 과거처럼 응시하여 뽑았다. 대나무를 잘 그리는 자로 선발되었다. 그들은 주로 장식과 감상용의 궁중그림과 평양감사 산유도처럼 계회도·의궤도(儀軌圖)같은 기록화를 그렸다. 마치 사진사처럼 말이다. 연초에는 세화(歲華)라하여 용·학·호랑이 등을 그렸다. 또 감상용 화첩을 그렸는데 사대부들은 심심할 때 눈요기로 화첩을 들춰보았다. 당시에는 사진이 없던 때라 초상화나 영정도 그렸다. 정신을 닮도록 전신(傳神)에 신경 썼다. 그리고 부귀와 장수의 상징으로 침소나 거실의 장식용으로 장생도를 그렸다. 임금이 앉은 뒷벽이나 방안에는 주로 병풍이나 걸개로 십장생을 그려 장식하였다. 배우지 못한 농민이나 서민들도 마치 양반들처럼 책을 많이 그려 붙여두었다. 그것을「책걸이」라 한다. 부귀옥당(富貴玉堂)을 상징하는 모란, 자식을 많이 낳으라고 잉어를, 잡귀 물러나라고 호랑이를 그려 붙였다. 사대부들을 본받아 서민들이 즐겨 그린 이런 그림들을 민화(民話)라고 한다. 민화는 기쁨과 소망, 안이의 감성과 신념, 신앙, 장수(長?)와 화복(和福), 악귀를 막는 벽사(抗邪)의 뜻을 담고 있다. 민화는 사실성이 상실되고 단순한 형태의 도안적 화풍과 해학적 화풍으로 의도된 형태를 강조하였다. 유종열(儒宗悅)은 한국 민예품의 소박미에 감동하여 민중그림을 민화라 칭하였다, 민화는 주로 걸게, 병풍, 화첩 등에 그렸다. 일본인이 민화를 좋아하게 되자 골동품으로 취급되더니 지역적 특성과 미감을 살린 민화들이 자취를 감추기 시작했다. 건축가 조자룡도 민화에 취미가 많았다. 십장생도는 그 목적상 색채가 화려하고 도식적이다. 하늘과 내가 같이 있으니 세월이 갈 리 없다. 따라서 장수한다. 진시황제의 불로초를 먹고 학처럼 천년을 살고 오래오래 건강하란다. 또 위급하면 십장생 병풍 뒤로 숨을 일이다. 민초의 정서를 넓혀 주었던 민화. 그중 십장생도는 대표적 민화이다.
사군자 (四君子)는 매.란.국.죽(梅蘭菊竹)을 지칭하며 군자에 비유한다. 절개 있고 품격 높은 신사로 어리석고 사소한 일에 신경 쓰지 않는 곧고 바른 군자. 사군자에는 진.선.미.정(眞善美貞)의 미(美)가 은은하게 숨어있다. 눈보라 치는 언덕 위, 이른 봄에 꽃망울을 터트리는 매화, 서리 내리는 가을에 고고한 꽃향기를 품는 들꽃중의 꽃 국화, 마디가 꺾일지언정 휘지 않는 대나무, 잡다한 들풀 중에 곧고 바르게 자라 그윽한 청향(淸香)의 자태를 뿜는 난초. 모두 그 상징성과 함께 시인묵객(詩人墨客)들의 사랑을 받던 식물들이다. 이들 중 국화를 제외하여 세한삼우(歲寒三友)라 칭하기도 하고 소나무를 포함시켜 오우(五友)라 부르기도 한다. 사군자는 문인화(文人畵)의 소재로 지식인들이 즐겨 그렸고 그들의 사랑을 받아왔다. 문인들은 시·서·화(詩書畵) 일치의 화격(畵格)을 중시하였다. 당대(當代) 3대가인 이사훈(李思訓)·오도자(吳道子)·왕유(王維)를 문인화와 수묵화의 시조로 본다. 이들은 사군자를 즐겨 쳤다. 중국에서 묵매(墨梅)는 11세기 말 선승(選僧) 중인(仲仁)에 의해 창시되어 이간(李?)·가구사(柯九思)·조맹부(趙孟採)등이 뛰어났다. 묵란(墨蘭)은 남송대의 정소남(鄭所南)이 난법을 창시하여 원대 관도승(管道昇)·양보지(陽補之), 명대 마수정(馬守貞) 및 여류화가들이 많이 그렸다. 국화는 송대(宋代) 범석호(范石湖)·유준호(劉俊湖)를 시조로 북송의 황전(黃箭)·서희(徐熙) 등이 유명했다. 묵죽(墨竹)은 사군자 중 가장 먼저 발전하였다. 당의 오도자(吳道子)나 소열(簫悅)로부터 시작됐다. 송의 서희·문동(文同) 소동파(蘇東坡), 원대의 고극공(高克恭)·이간·조맹부, 명대의 서위(徐渭)·주단(朱端), 청대의 석도(石禱)·정섭(鄭燮)·금농(金農)·이선(李禪) 등이 있다. 우리 나라는 국화의 경우 고려시대 도자기 문양에 많이 나타났다. 조선시대에 청화(靑華)·진사(辰砂)·철회(鐵繪)백자에 일찍이 그려졌으나 종이와 천(지·견=紙·絹)에는 사군자중 가장 나중에 그려져 청대(淸代) 화풍의 유입 이후 많이 나타난다. 정조(正祖)대왕을 위시한 강세황·김수철·유숙 등의 그림이 남아있다. 각 부분의 대표적 화가로 매(梅)는 어몽룡·신사임당·이부인·오달제·허목·조희룡·장승업·양기훈 등이, 죽(竹)은 이정·유덕장·임희지·신위·민영익·정학교(丁學敎) 등이, 난(蘭)은 김정희·조희룡·이욱응·신명횡·김응원·민영익 등이 뛰어났다. 남화의 대가 의재 허백련(毅齋 許百鍊)은 1939년 연진회(鍊眞會)를 창설하였다. 서화를 통한 인격도야의 목적을 둔 동호인 성격의 그룹이다. 발기문처럼 남화의 부흥을 위한 모임이다. 이들은 사군자와 문인화를 즐겨 그렸다. 허백련·구철우·정상호·정운면·김동곤·최한영·허행면·이범제·정소산·허정두 등이 정회원이었다. 오늘날에도 연진회는 그룹전, 의재 추모전 등으로 그 맥을 잇고 있다. 오늘날 문인화 하면 연진회를 뜻할 정도로 그 역사상이나 전통의 고리 잇기는 이어지고 있다. 광주 소태동의 연진미술원이 그 곳이다. 포마 노경상 선생님의 '한국화 백문백답'에서 발췌한 내용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