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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삼척 ]
강원도 三陟市는 북쪽은 동해시, 서쪽은 정선군, 태백시, 남쪽은 경북 봉화, 울진군에 접하며,
동쪽은 동해르 끼고 있다.
백두대간 분수령에 해당하는 백봉령, 청옥산(1404m), 두타산(1353m), 댓재, 덕항산(1078m) 등의
연봉이 남북으로 높게 솟아 삼척의 서쪽을 지탱하고 있다.
남서쪽은 낙동정맥 분수령의 백병산(1259m), 면산(1245m), 삿갓재(1119m) 연봉이, 남쪽은 삿갓재에서
갈라진 응봉산(999m)이 솟아 있다.
서쪽의 백두대간이 겨울의 북서풍을 막아주므로 같은 위도상의 서행안에 비해 1월 평균기온이
3.1도 나 높다.
강수량은 많은 편으로 가을에 비가 잦은 편이다.
겨울 강설량도 많다. 1월 평균 기온은 0도, 8월평균 기온은 24.1도, 연강수량은 1217mm다
청동기 에서 철기시대를 거치면서 삼척을 중심으로 활동한 '실직국'은 102년(신라 파시왕23)
신라에 합병됐다.
505년(지증왕6) 실직주라 하여 軍主를 두고 639년(진덕여왕8) 진주 도독부로 고쳤으며,
760년(경덕왕19) 삼척군이 됐다.
995년(고려 성종14) '척주단련사'를 두고, 1018년(현종9) 강등되어 삼척현이 되었다.
1393년(조선태조2년)삼척부로 승격됐다가 1404년(태종13) 삼척도호부가 되었고, 1895년(고종32)
삼척군이 됐다.
1980년 북평읍이 동해시로 편입됐고, 1981년 장성읍과 황지읍이 태백시로 분할 승격됐다.
1986년 삼척읍이 삼척시로 승격됐고, 1995년 1월 삼척시와 삼척군을 합쳐 '도농복합형'의 통합시가 됐다
도계읍, 원덕읍과 근덕면, 하장면, 노곡면, 미로면, 가곡면, 신기면, 남양동, 성내동, 교동,
정라동의 2읍 6면 4동으로 이루어져 있다.
해안에는 삼척항, 임원항, 덕산항, 장호항, 초곡항, 대진항 등 14개 항포구가 있으며, 연안은 수심이
깊고 계절에 따라 한,난교루가 교류해 어족이 풍부하다. 주요 수산물은 명태,꽁치,오징어,미역등이다.
1942년 건립된 전국 최대 공장으로 연간 1,100만톤의 시멘트를 생산하는 동양시멘트와 연간 104만톤의
석탄을 생산하고 있는 경동광업소, 강원도 석탄 생산량의 12%를 차지하는 도계 광업소가 있다.
*죽서루
성내동 오십천변에 자리한 竹西樓는 삼척의 유일한 보물 제 213호다.
창건자와 창건연대는 알려지지 않았으나 고려때인 1266년(원종7년)에 動安居士 李承休가 西樓에
올라 시를 남겨둔 것을 보아 그 이전에 이미 창건됐음을 짐작할수 있다.
조선 초기인 1403년(태종3)에 삼척부사 김효손이 오십천 층암절벽의 벼랑위 옛터에 중장 했는데,
당시는 정면5칸, 측면2칸 이었던 것을 후일 좌우 양단에 1칸씩을 늘려 현재는 정면 7칸으로
장방형을 이루고 있다.
최근까지 여퍼 차례 보수했고, 1982년 경내를 확장했다.
오십 굽이나 휘돌면서 흘러간다는 五十川이 깍아지른 듯한 절벽에 부딪혀 돌아가는 죽서루 누각에
서면 멀리 백두대간 산줄기가 병풍처럼 펼쳐져 있다.
관동팔경 중 하나로 꼽혀 시인묵객들의 발길이 잦았는데, 고려 명종 때는 김극기를 비롯, 이승휴,
안축 등이 흔적을 남겼고, 조선시대 에는 숙종과 정조의 어제시를 비롯해 하륜, 이이, 양사언, 정철 등
내노라하는 명인들이 이곳에 들러 남긴 시가 수백편에 이른다.
누각 동쪽 대나무 숲에 竹欌寺가 있어 죽서루라 이름했다 하고, 또한 누각 동쪽에 명기 竹竹仙女의
집이 있어 지은 이름이라고도 한다.
*환선굴
신기면 대이리 덕항산 자락의 석회암 동굴인 幻仙窟은 천연기념물 제 178호로 지정 되어있다.
대이리 동굴 지대에서 가장 규모가 큰 동굴로서 입구는 15m, 폭 20m에 이른다.
굴속에는 장님굴새우 등의 희귀동식물과 아름다운 석순과 종유석, 그리고 오래 전 수도승이 기거하던
온돌터와 아궁이가 남아 신비로움을 더한다.
지난 1998년 동굴 중 일부(총연장 6.5km 가운데 1.6km) 가 개방됐다.
*대이리 굴피집
굴피집이란 지붕에 굴참나무 껍질인 굴피를 덮은 집을 말한다.
대이리 골말에 있는 굴피집(중요민속자료 제223호)은 300여년 전 위쪽의 대이리 너와집에서 분가해서
건립된 것이라 한다.
이 굴피집은 처음엔 너와를 이었으나 1930년경 너와를 채취하는데 어려움이 많이 따르자 너와 대신
굴피로 지붕을 덮게 됐다.
이 집은 온돌방, 도장방(창고), 외양간, 봉당(마루앞 토방) 등이 한지붕 아래 외벽으로 감싸져 있어
겨울 추위를 덜게 하고 산짐승 피해를 방지할수 있도록 되어 있다.
집안에는 고쿨(벽난로), 화티(불씨를 모아 두는곳), 두둥불(호롱불을 설치하는곳) 들이 원형대로
잘 남아 있다.
골말엔 20여채의 굴피집이 남아 있었으나 근대화에 밀려 점차 감소, 지금은 이집과 통방앗간만 있다.
마당에 평상을 깔고 식당을 열었으며 민박을 치기도 한다.
*대이리 너와집
너와집이란 지붕에 기와나 이엉대신 얇은 나무판이나 돌판을 덮는 것인데, 이 집은 나무판을 덮었다.
나무 너와는 질이 좋은 소나무를 길이 60~70cm, 너비 30cm, 두께 3~5cm정도로 쪼개서 만든다.
목재라서 뒤틀리고 사이가 떠서 빗물이 샐것같지만, 목재가 습기를 받으면 차분하게 가라앉는
성질이 있어 빗물이 새지 않는다.
대이리 너와집(중요민속자료 제221호)은 지금의 집주인인 이종옥 씨의 11대 선조가 350여년 전
병자호란때 경기도 포천에서 이곳으로 피난해 와서 짓고 정착한 것이라 한다.
*대이리 통방아
대이리 골말에 자리한 통방아(중요민속자료 제222호)는 100여년전 대이리 마을의 방앗간으로
만들어진 것으로, 일명 물방아 또는 벼락방아라 한다.
이 통방아의 공이 위에는 원추형으로 굴피를 덮은 덧집을 만들어 놓았다.
곡식을 찧는 틀인 방아는 디딜방아, 물레방아, 연지방아, 물방아 등이 있는데, 대이리 골말의
통방아는 물방아라 물이 흐르는 개울옆에 설치한다.
물방아는 확(곡식을 넣는 돌통), 공이(찧는 틀), 수대로 구성된다.
물통에 물이 담기면 그 무게로 공이가 올라가고 그 물이 쏟아지면서 공이가 떨어져 방아를 찧게 된다.
사람이 발로 힘을 써서 디디는 디딜방아보다 힘도 세고 수월해 편리하지만, 육중한 몸체 때문에
무척 느린것이 흠이다. 하루에 벼 2가마를 찧을수 있다.
*신리 너와집
너와로 지붕을 올린 도계읍 신리의 너와집은 1975년 중요 민속자료 제 33호로 지정됐다.
현재 빈집으로 남아 있는 이 너와집에선 집안으로 들어가 화전민들의 전통가옥이라 할수 있는
너와집의 내부 구조를 자세히 살필수 있다.
*애바위 와 해신당
해신당에는 애틋한 전설이 전해져 내려온다.
옛날 이 마을은 엄씨 성을 가진 사람들의 집성촌 이었다.
어느 봄날 마을 처녀가 결혼을 약속한 총각과 함께 배를 타고 앞바다 바위섬으로 돌김을 따러 나갔다.
총각은 처녀를 해변에서 조금 떨어진 바위에 내려주고 다시 실으러 오겠다는 약속을 하고 해변으로
돌아와서 자기 일을 하였다.
그런데 그사이에 갑자기 폭풍이 불어 닥쳤다.
총각은 파도가 너무 높아 발만 동동구를수 밖에 없었다. 처녀는 작은 바위섬에서 살려달라고
애원하다가 결국 커다란 파도에 휩쓸려 죽고 말았다.
마을 사람들은 그 처녀의 애석한 죽음을 기려서 처녀가 애를 쓰다 죽은 그바위를 애바위라 불렀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사건이 일어난 이후 이 마을에는 씨가 마른듯 고기가 잡히지 않았고,
뱃일을 나갔던 젊은이 들이 자주 목숨을 잃었다.
모든게 처녀의 원혼 때문이라는 소문이 번지면서 인심이 흉흉해져만 갔다.
어느날 총각의 꿈에 죽은 처녀가 나타나 처녀의 몸으로 죽은것이 원통하니 자기의 넔을 서낭당에
모시고 위로해 달라고 했다.
마을 사람들은 향나무 신목으로 모시고 처녀의 넋을 위로하는 제사를 지냈으나 재앙은 멈추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날 고기를 잡지못한 어부 한명이 처녀에게 욕을 하며 신목에 대고 오줌을 누어 버렸다.
그런데 다음날 바다에 나가 그물을 던지니 건지는 그물마다 고기가 떼지어 잡혔다.
기쁜 마음에 돌아와 곰곰히 생각해 보니 엊저녁 서낭당 신목에 오줌을 갈긴것이 필시 효험을 본것이라
생각되어 다시 한번 오줌을 누고 뱃일을 나가니 또 만선이었다.
이일이 있고 난 후 먀을사람들은 처녀의 넋이 원하는 것이 뭔지를 깨닿고 나무로 남근을 깎아
제사를 올리니 모든것이 예전처럼 풍요러워졌다고 한다.
이렇게 유래한 신남의 해서낭제는 정월 대보름과 시월의 첫 午일에 지낸다.
서낭당은 본당인 해신당이 바닷가에 있다.
큰 당은 산속에 있는데 몇년전 산불에 소실되는 바람에 다시 지었다.
*척주동해비
정라동 육향산에 서 있는 척주동해비(지방유형문화재제38호)는 조선시대 삼척부사 許穆(1595-1682)
이 세운것이다.
퇴계 이황의 성리학을 이어받아 실학 발전에 가교적 역할을 한 허목은 효종의 초상에 대한 모후의
복상기간 논의 당시 서인 송시열 등의 기년설을 반대하며 남인 선두에서 삼년설을 주장하다가
삼척 부사로 좌천됐다.
당시 삼척은 풍랑의 피해가 심해 조수가 읍내까지 올라오고 홍수때는 오십천이 범람해 주민의
피해가 극심했다.
이를 안타깝게 여긴 허목이 1661년(현종2) 바다를 달래는 축문 형식의 '동해송'을 써서 정라진의
만도리에 비를 세우니 바다가 조용해졌다고 한다.
48년 뒤인 1708년 비가 파손되어 조수의 피해가 다시 일어나자 1710년(숙종36) 이를 모사해
비각을 짓고 옮겨 세웠다. 1969년에 현재의 위치로 옮겨 세웠다.
척주동해비 바로 아래의 대한평수토찬비문 역시 허목이 짓고 쓴 것이다.
*실직군왕릉
죽서루 인근의 성북동 갈야산에 있는 실직군왕릉은 삼척 김씨의 시조며 신라 경순왕의 손자인
김위옹의 능이다.
고려 태조 왕건은 신라 경순왕의 복속을 받아들여 김위옹을 실직군왕으로 책봉하여 대우 했다.
세월이 흐르면서 허물어졌던 것을 1838년(헌종4) 김학조, 김홍일이 삼척부사 이규헌에게 간청해
오십천 남쪽 사직동의 사직릉(실직군왕릉 왕비 밀양박씨의능) 과 갈야릉(실직군왕릉으로 갈야산
에 있어서 붙여진명칭)을 발굴해 확인했다
매년 음력 3월 15일이면 각처에서 후손들이 모여 제사를 올린다.
*준경묘, 영경묘
미로면 활기리 능곡에 있는 '준경묘'는 조선 태조 이성계의 5대조 양무 장군의 묘다.
삼척 산골에 숨어살던 이안사. 곧 '용비어천가'의 '목조'는 부친이 세상을 뜨자 묘자리를 찾는데
한 도승이 나타나 소백마리를 잡아 제사 지내고 금으로 관을 만들어 장사 지내면서 장차 왕이
날 자리 라고 했다.
이안사는 고심 끝에 처가의 흰 소 를 잡고 누런 귀리짚으로 관을 감아 장사지냈다.
이곳에 부친을 안장한 뒤 5대에 이르러 조선을 창업하게 되니 바로 '백우금관'의 전설이다.
1899년에 이곳에서 4km쯤 떨어진 미로면 하사전리의 '영경묘'(목조의 어머니 이씨의묘)와 같이
수축하면서 비각과 목조가 머물던 옛터에 비각을 세웠다.
이들은 남한에서 가장 오래된 '전주이씨' 실존 묘로서 매년 4월 20일 전주이씨대종 종악원 주관으로
제향을 올린다.
*숭례문 보수에 쓰이는 소나무를 여기에서 베어다 사용한다.
*공양왕릉
근덕면 궁촌 마을 고돌재 언덕의 '공양왕릉'은 고려의 마지막 임금인 공양왕(재위1389-1392) 의 능묘.
공양왕은 왕조의 몰락과 함께 폐위되어 왕자 석, 우 와 함께 원주와 간성을 거치면서 삼척으로
귀양지를 옮겼는데, 1394년(태조3)에 이곳에서 고려회복운동이 일어나자 한달후 세 부자를
교살했다고 한다.
이곳의 지명유래에 따르면 궁촌은 임금이 유배된 마을이라 하고, 마을 뒷길 고돌산에 공민왕이
살해됐다는 살해치가 있다.
또한 공양왕의 맏아들 왕석이 살았다는 궁터, 말을 매던 마리방 이라는 지명도 전한다.
지방민들은 이 망국의 외로운 혼령들에게 해마다 제사를 올렸으며, 1421년(세종3) 공민왕의 왕녀
(단양군 이성범의 처)가 상소해 공양왕릉으로 정했다고 한다.
왕릉은 1837년(현종3)에 삼척부사 이규헌이 개축했으며, 이후에도 여러 차례 보수 했다.
*천은사
백두대간 두타산 동쪽 기슭의 天恩寺는 신라 시대인 758년(경덕왕17) 인도에서 온 승려 3명인
頭陀 三仙 이 창건했다.
이중 한명은 金蓮을 가지고 와서 靈隱寺를 지었고 , 黑蓮을 지닌 다른 한명은 三和寺를
白蓮을 가지고 온 나머지 한명은 白蓮臺라는 이름으로 이절을 지었다고 한다.
839년(문성왕1) '梵日'이 중창했고, 고려시대인 1287년(충렬왕13) '이승휴' 가 용계에서 은거하며
우리 민족의 역사서인 동시에 대서사시를 읊은 <제왕운기>를 저술한 유서 깊은곳이다.
조선 말엽인 1899년에 준경묘와 영경묘를 수축할때, 이 절을 원당 사찰로 삼았으며,
당시 절 이름을 현재의 '천은사'로 바꾸었다. 6_25전쟁으로 소실되었다가 1976년 중창하여 오늘에
이른다.
*삼척별미
- 곰치국(경상남도 남부 지방에선 '물메기'라 부른다)
- 도루묵찜(은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