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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부 목회사역의 목양 임무
1장 목양 임무의 성격과 그 중요성
목양 임무란 강단 사역을 우리 교인들의 고유한 개체성에 개인적으로 적합하게 적용시키는 것을 말한다. 교인들을 개별적으로 보며, 우리의 관심과 돌봄에 대해 다른 사람과는 구별되는 요구를 가진 사람으로 보는 것이다. 그들 각자에게 촉구하여 가능한 한 영원에 관심을 가지도록 하며, 그들의 마음에 구원을 적절하게 나타내주고 또한 구원을 제시하여야 한다. 이 목적을 위해 우리는 그들의 상황과 습관, 성격, 마음 상태, 독특한 필요, 그리고 어려운 점들을 잘 알고 있어야 한다. 그래야 그들 각자에게 적당한 때에 필요한 양식을 나눠줄 수 있다.
목사는 자기 속에 파수꾼의 직임과 복음전도자의 직임을 같이 가지고 있다. 목사는 교인들의 다양한 모양새로 강단에서 온전히 다루기는 힘들다. 때문에 목사는 “영혼을 위하여 경성하기를 자신들이 청산할 자인 것 같이”(히13:17), 영혼들을 늘 살펴야 한다. 또한 “전도자의 일을”(딤후4:5) 하여야 한다. 우리 교인들을 끊임없이 감독하지 않으면, 그들은 소홀히 여김을 받아 결국은 잃어버리게 된다.
여기서 목양 임무의 완전한 방법을 제시하겠다는 생각은 없다. 계획은 교인들의 성격과 상황과 습성에 따라 세워져야 한다. 비록 이런 것들과 또 그 외에 다른 많은 고려사항들이 우리 목양 사역 체계를 바꾸어놓지는 않겠지만, 그럼에도 적용을 더 밀접하게 그리고 더 구체적으로 할 수 있도록 하는 데는 도움이 될 것이다.
목양 사역 방법의 중요성은 그 사역의 본질에서 분명하게 드러난다. 농부는 밭에 씨를 뿌려놓았을 때, 쉬지 않는다. 농부는 늘 불안해하며 그 성장을 지켜본다. 그리고 열매를 안전하게 거두어들일 때까지 임박한 위험으로부터 그 씨를 보존하기 위해 끊임없는 수고를 한다. 우리 교인들이 하나님의 밭이 아닌가? 우리는 썩지 않는 씨앗을 뿌려 추수를 거둬들이는 농부가 아닌가? 우리의 밭은 해를 끼치는 요인들로부터 좀 더 안전한가 아니면 끊임없이 걱정스런 감독을 해야 할 필요가 있지는 않은가? 우리 일에 대한 다른 생각도 동일한 요지를 예증하고 있다. 의사로서, 개인의 질병에 대한 지식이 없다면, 우리는 적절한 약을 어떻게 준비할 수 있겠는가? 젖먹이는 어머니로서, 만일 우리 교인들의 강점과 약점을 알고 그에 따라 조치하지 않는다면, 우리의 돌봄이 얼마나 비효과적이겠는가?
목양 사역은 그 순간의 유머나 편리에 맡겨두어서는 안 된다. 또는 세상의 방해를 받게 내버려 두어서는 아니 된다. 하루에 일정 시간들을 사역에 바쳐야 하는데, 이는 설교 준비와 똑같은 양심적인 결정을 요한다. 우리의 가르침은 견실하고 탐색적이며 활기가 있어야 한다. 목양은 담대하게 우리 교인들의 마음을 이끌어 내어야 하며, 잘못된 원칙들의 나쁜 영향을 지적해 주어야 하며, 거룩하고 능동적인 복음의 근본적인 진리들을 주입시켜 주어야 한다.
최고의 목회 권위자들이 이 방법을 매우 강경하게 가르쳐주고 있다. “양을 찾을 때까지 찾아 결국 발견해내는 일”은 목자장의 특징으로서, 목자장과 삯꾼들과의 차이를 보여준다. 주님의 사역은 이런 성격을 가졌다. 자기 제자들에 대한 목양은, 자기 양을 이름으로 부르며 그들을 인도해 내는 선한 목자의 사역이었다(요10:3). 사도 바울도, 3년 동안 밤낮으로 눈물로 경고하기를 그치지 않는 사역이었다. 초기 시대의 기록들은 목양이 주요한 한 부분이었음을 많이 증거하고 있다. 이그나시우스(Ignatius)는 자기 양떼 속에 있는 모든 성도의 개개인을 알고 있었다고 한다. 칼빈은 말하기를 목사와 장로들이 집집마다 돌아다니며 친밀하게 그리고 개인별로 사람들의 양심을 다루었을 때, 제네바에서 풍성한 추수를 거둬들였다고 한다. 키더민스터(Kidderminster)는 백스터에 대해서 이렇게 쓰고 있다.
그가 처음 그 곳(사역지)에 왔을 때는 그 장소에 예배하는 가정이 매우 드물었었다. 그가 그곳을 떠났을 때, 이런 식으로 매일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고 살아가는 가정은 별로 없게 되었다. 또한 그의 개인 교리 공부나 개인 상담에 순복하지 않으려는 가정도 별로 없었다. 육백 명의 성도들이 성찬식에 참여했다.
커튼 메이더도 강조하였다.
이 목양 임무를 그의 모든 사역의 그 어떤 일 만큼이나 수고로운 것으로 생각하였지만, 그럼에도 자신의 목양 심방에 큰 가치를 두었다. 그는 모든 종류의 사람들과 대화하는 일에서 유익한 일을 했었을 뿐 아니라, 유익을 거두기도 했다.
이 목양 제도를 우리 자신을 위해 사용하는 것도 중요하다. 이 사역은 그 다음 주일에 쓸 수 있는 가장 귀중한 자료들을 제공해주는 보고이기도 하다. 그래서 우리 교구서 직접 만들어진 설교는 서재에서 생각해낸 것들이나 수집된 것들과는 다르다. 설교가 덜 추상적일 때, 좀 더 요지가 분명해지고 또한 체험적인 설교가 된다.
또한 이 방법은 우리 교인들에게도 중요하다. 사적으로 적용해야 하거나 개인적으로 적용해야 하는 어떤 요점들은 강단에서 다루기에는 별로 적절하거나 마땅하지 않다. 가르침을 받아야 할 많은 사람들 또한 신체적인 연약함으로 공적 예배에 참석하기가 어렵다. 또 어떤 사람들은 도대체 말씀에 무관심하기 때문에, 그들의 문간까지 말씀을 가지고 가야 할 사람들도 많다. 그리고 우리 강단 설교가 얼마나 조금밖에 이해되고 있지 못한지, 얼마나 적게 적용되고 있는지, 따라서 말씀을 소량으로 나누어서, 그리고 아주 직접적인 적용 요점을 가지고 그들에게 가져가지 않으면, 그 의미가 마음에 굳게 자리 잡히지 못한 채, 소리만 들을 뿐이다. 그리고 이것은 우리 교인들을 여러 유혹으로부터 지키고, 또 여러 병폐를 예방하거나 치유할 수 있는 방법이다. 또 하나의 이점이 있는데, 자신감을 얻고 또 우리 교인들의 사랑도 얻는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알지도 못하고 사귀어보지도 못한 친구를 사랑할 수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들과 끊임없이 더 가까이 접촉하려 해야 하며, 더 가까운 관심을 가져야 한다. 그들의 영혼을 구원할 방편으로서 그들의 마음을 얻어야 한다. 깁슨 감독이 잘 말하였다.
이것은 목사들이 자기 교인들을 사랑하는 방법이며 모든 종류의 영적인 가르침을 위해 그들의 마음속으로 들어가는 길을 여는 방법이다.
이런 식으로 자기 목사를 사적으로 만나는데 익숙한 회중은 아버지의 가르침을 듣고 있는 한 가족과 같다. 우리의 대제사장의 본을 따라, 우리가 그들의 연약한 감정과 접촉하며 애정을 가지고 들어갈 때, 상호 교감이 촉발되는 것이다. 사람들의 담대함은 격려를 받게 되고, 그들은 좀 더 개인적으로 받은 조언과 위로를 쉽게 적용하게 된다. 그리고 그들은 자기들의 사정과 의심, 그리고 당황스런 일들을 우리에게로 가져오게 된다.
그러므로 이러한 목회 교제의 성격은, 화목하게 하며, 친밀하고, 사랑이 많은, 우리 교인들과의 영적인 접촉이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은 우리 직분의 위엄을 겸손과 자기를 낮추는 자세와 결합시킨 것이다. 우리 직분은, 만군의 주의 사자이며 또한 동시에 예수를 위해 그들의 종이 된 것이다(말2:7; 고후4:5). 우리는 우리의 위험을 추락시키지 않으면서도, 그 위엄을 친구라는 옷으로 입힌다. 여기서 그들의 비용 관리, 그들의 자녀들의 교육과 훈육, 가정 예배와 가르침, 그 밖에 그들의 작은 세계를 구성하는 것은 무엇이나, 사려 깊은 충고를 그 가정의 가장에게 해주어도 좋을 것이다. 기독교의 가르침을 이 구체적인 상황에 접목해도 좋은 것이다.
하지만, 교인들과의 모든 접촉점마다 우리는 자신이 목사라는 생각을 가져야 하고 그들은 우리를 목사로 생각하고 받아들여야 한다. 그러므로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다소간의 직접적인 메시지를 전하지 않고서는 교구 심방을 끝낼 수 없다. 심지어 흔한 일들을 언급하는 것도 영적인 목적과 연결이 되어야 한다(엡6:22). 우리 권면이 아무리 활력을 주고 감동적이라 할지라도, 복음 교리에 대한 생각들을 나누어주는 주요 목적을 잊어서는 아니 된다. 우리의 공적 사역 못지않게 우리의 친밀한 교제도 진리가 하나님의 힘의 유일한 매개체라는 원칙에서 진행되어야 한다.
설교하는 일은 큰 즐거움이 있는 반면, 목양은 그 즐거움이 적은 편이다. 목양은 인내심과 자기부인과 강도 높은 믿음의 행사를 요구하고 있기 때문이다. “내가 부득불 할 일임이라”(고전9:16). 그들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루기까지 다시”(갈4:19) 영혼을 위해 해산의 고통을 겪어야 한다. 신앙고백을 했던 그리스도인들로 인한 실망과 참 그리스도인들의 넘어짐으로 인해 울어야 한다. 매일 죄와 완고함과 회개하기 않음과 접촉을 하며, 그리고 마지막으로 어둠의 세력들과 싸워야 한다.
목사의 일에 대한 일반적인 이 고찰은, 즉시로 목양의 수고로움과 그 중요함을 보여줄 것이다. 우리 교인들이 다양하게 원하는 것들을 알아야 하며, 그들의 애정을 얻어야 하며, 적절한 경고와 격려, 가르침 또는 위로를 주어야 한다. 사랑의 연민으로 그리고 목사의 임무를 수행하면서 그들의 영적인 관심사가 무엇인지 알아내야 하며, 이 일에 일관성과 진지함과 그 일이 요구하는 뜨거운 에너지를 가지고 임해야 한다. 이 모든 일은 과연 근면과 인내와 자기부인이 있어야 할 수 있는 일이다. 그러나 “모든 일에 신중하여 고난을 받으며 전도자의 일을 하며 네 직무를 다하여라”(딤후4:5)는 명령에 즉각 순종하지 않고서야, 우리가 어떻게 우리 사역의 증거를 만들어낼 수 있겠는가?
2장 목양 사역에서 사례 다루기
1. 불신자들
아덴에서 사도 바울의 사역이 우리에게 가르쳐주기를, 모든 계층과 모든 성격의 불신자들에게 그리스도를 전하라고 한다(행17:22-34). 그리고 사실, 그리스도를 전하는 것이 모든 걱정거리에 가장 적합한 치료책이며, 또한 복음을 위한 가장 강력한 증언이기도 하다. 이 불신의 독이 퍼져 있기 때문에 우리는 모든 사람들에게, 특히 청소년에게, 기독교의 증거들에 대한 연구 결과를 가르쳐 주어야 한다. 그들이 “그들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 대답할 것을 항상 준비하게”(벧전3:15)하기 위함이다.
2. 무지하고 무관심한 사람들
무지하고 무관심한 사람들은 그 성격에 따라 다르게 다루어야 한다. 복음의 근본 진리를 거스르고 은혜로운 복음의 제안을 멸시하는, 모든 교만한 논거의 근원인, 불신 주의가 어떤 것인지를 그들 앞에 펼쳐 보여야 할 필요가 있다. 그래서 마침내 완고한 마음과 어리석음을 은혜의 수단 아래 복종시켜야 한다.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죄와 그들의 상태에 위험성이 있음을 이 부류의 사람들에게 엄중하게 말해주라. 특히 구주를 거부한 악한 죄가 있음을 그들에게 알려주라. 그리고 이들은 어린아이 같아서, 복음의 초보 진리들에 관한 가르침이 필요하다. 가장 완고한 사람은 매우 온유하게 다루어야 한다(딤후2:24-25). 그들의 상태에 대해 아주 동정어린 관심을 가지고 말해야 한다(렘4:19; 미1:7-8). “너희는 하나님과 화목하라”(고후5:20)라고 간청하는 태도로 말해야 한다.
3. 스스로 의롭다 하는 사람들
젊은 관원의 이야기는 우리 주님이 스스로 의롭다 하는 사람들을 어떻게 다루셨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마19:16-21). 스스로 의롭다 하는 자들에게 죄와 율법과 그리고 구주를 완전하게, 끊임없이, 그리고 연속해서 보여주라. 그 교만과 죄와 감사하지 아니함과 불신의 파멸한 모습을 그 사람의 양심에 충실하게 그리고 사랑으로 적용시켜라. 그리스도께 단순히 의지하는 대신에 어떤 형태의 의식이나 임무 등의 대체품은 생명 그 자체를 사망으로 바꾸며 율법을 방해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심지어 복음도 방해하는 것임을, 그래서 그 사람이 구원받지 못하게 하는 것임을, 그 사람에게 알려주라(마21:33-46; 행13:38-41).
4. 거짓 신앙고백자들
거짓 신앙 고백자들은 복음을 듣고 ‘설득을 당했지만’, 그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이다. 우리 주님은 이들을 어떻게 다루고 있는지 살펴보기로 하자. 자신의 가르침의 영적인 성격을 강조하고(요6:60-66), 자신의 요구조건의 범위를 정해 주시며(눅14:25-33), 마음과 행위를 연결시키고(마7:15-23), 하나님의 기준과 세상의 기준이 다르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는 것을(눅16:15) 양심에 적용시키심으로써, 이런 사람을 체로 걸러내셨다.
이들은 성결과 구주에게 순종하고자 하는 욕구는 결코 목표 안에 들어있지 않다. 진리는 진리를 사랑해서가 아니라, 사색적인 교리로 받아들여졌다. 진리를 느슨하게 붙잡고 있으므로, 진리의 적용은 별 효과를 보지 못하고 쉽게 상황에 굴복하고 만다. 이러한 사람들은 세상에게도 그렇지만, 아직 굳게 서지 못한 그리스도인들에게도 걸림돌이 된다. 이러한 사람들을 발견했을 때 우리는 매우 조심해야 하며, 그 인물에 대한 판단을 신중하게 내려야 한다. 동시에 진지한 사람들까지도 냉담과 의심으로 다루어서도 안 된다.
5. 육적 양심의 가책과 영적 죄의 각성이 혼합되어 있는 사람들
양심의 가책이 갖는 힘은 신약의 목양 사역에서 매우 강하게 그리고 다양하게 나타나고 있다. 그래서 양심의 가책을 안전하고 성공적으로 다루기 위해서는 그 성격이 어떤 것인지를 결정하여야 한다. 그 양심의 가책이 믿을 수 없는 것인지 또는 진실한 것인지, 그것이 일반적 인정에 근거한 것인지 또는 통회의 구체적인 실천을 나타내는 것인지, 죄의 비참함에 관계된 것인지 또는 죄의 더러움에 관계된 것인지, 진노에 대한 두려움에서 생긴 것인지 또는 하나님의 영광에 대한 존경에서 나온 것인지, 죄를 사랑하는 마음과 일관하는지 아니면 죄를 미워하고 죄로부터 분리하게 하는지, 그 영향력이 일시적인지 아니면 계속되는 것인지 등을 결정하여야 할 것이다.
진실성의 초기 단계에서는, 흔히 율법적인 요소와 복음적인 요소가 혼합되어 있다. 그리스도를 이해해서 양심의 가책을 받기보다는 죄의식으로부터 생기는 경우가 더 많다. 그리고 회개를 하기보다는 오히려 놀라서 그런 경우가 많다. 사랑 때문에 가책을 느끼기보다는 공포 때문에 그럴 경우가 더 많은 것이다.
구주를 영접하는 것은 양심의 가책 속에 영적 생명이 있다는 증거이다. 베드로의 청중도 스데반의 청중도 다 찔림을 받았던 것이다. 그러므로 어떤 느낌이 우리를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였든지, 진심으로 죄를 싫어하고, 자비를 갈구하며, 복음의 규칙들에 따라 행하기를 열망하는 것은, 양심의 힘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의 확신케 하는 힘이다.
그러나 ‘상한 갈대를 꺾지 않기 위해서는’ 정확하게 알아야 한다. 통회자의 통회를 더욱 깊게 만들고 그의 경계심을 풀지 않게 하며, 그의 믿음을 행사하게 하고 강화시켜야 한다. 만일 그가 진정으로 자기 죄에 대해 한탄하고, 구주의 용서와 사랑을 간절히 바라고 있다면, 그는 자기 영혼의 안식을 위한 그리스도의 약속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마11:28). 그의 부족함과 바라는 바 소원을 복음 앞으로 가지고 나올 때, 그는 “심판하여 이길 때까지” 벌어질 영적 싸움을 지탱해주기 위해 빛과 위로와 힘이 증가되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6. 믿다가 타락한 자들
믿다가 타락한 경우는 가장 애처롭다. 이 경우는 건전하지 못한 교리와 세상을 사랑함과 마음대로 죄를 짓거나 기도를 소홀히 한 것과 관련되어 있다.
자기 배교에 대해 확신을 가지고 타락한 자는 우리가 정말로 그 사람에 대해 가슴 아파하고 있는 것처럼 취급해야 한다. 인정을 봐주지 말고 그러나 동정하면서 그의 양심을 탐지해보아야 하되, 사랑하는 마음을 가지고 해야 한다. 그가 떠난 것의 깊은 의미를 지적해 주어야 하지만, “온유한 심령으로” 그를 바로 잡아 주어야 한다(갈6:1).
그를 권면하여 은혜의 수단을 부지런히 사용하고, 자기를 멀어지게 했던 방식을 단호하게 포기하게 하라. 마치 십자가 밑으로 가는 방법을 전혀 몰랐던 것처럼 새롭게 인도함을 받게 하라. 거기서 “자기가 찌른 그리스도를 바라보고 애통하게”(슥12:10)하라. 죄를 용서하는 그 동일한 사랑이 타락한 자들을 치유한다는 확신을 가지고 애통하게 하라. 베드로의 경우는, 즉시로 죄의 자각을 깊게 만들고 회복을 완성하는 사랑을 잘 보여주고 있다(눅22:61-62). 이 사랑의 힘이 후에는 죄를 더욱 깊이 증오하는 인격을 만들어 줄 것이다. 은혜의 수단에 항상 주목하고 구주를 더욱 높이 생각하면, 자기 죄를 회고할 때 더욱 통회하는 겸손이 생길 것이고, 자기 행위를 더욱 조심스럽게 살피게 될 것이다(사38:15; 겔16:63).
7. 믿음이 확립되지 않은 그리스도인들
믿음이 확립되지 않은 자들을 보면 첫 감동이 진리의 직접적인 힘 때문에 생겼다기보다는 오히려 그 신기함 때문에 생겼을 수도 있다. 그래서 확립된 옛 진리보다는 신기함이 주는 계속적인 흥분을 먹고 살려 하는 것이다. 아마 이 경우를 위한 가장 효과적인 훈련은 성경 전체에 대한 정확한 이해를 그리스도인의 완성에 도달하는 주요 수단으로 가르치는 일일 것이다(딤후3:16-17).
성경을 편식하기 때문에 이단도 나오고 불안정한 신앙고백자도 나오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이 그 위치에서 벗어났을 때, 말씀이 그 실천과의 연결에서 분리되었을 때, 하나님의 말씀은 그 힘을 잃는다. 그들을 분발시키고 죄를 깨닫도록 하기 위해서 복음의 특권들의 완전한 영광을 설명하는 것 또한 좋을 것이다. 그리고 더 광대하고 고무적인 하늘을 바라보도록 하기 위해, 면밀한 자기조사를 하도록 하고 성실한 기도 습관을 가지도록 하며 자기 자신을 깊이 알고 자신을 낮추게 하며 순종을 행동으로 나타내는 것을 늘리며, 높은 믿음의 기도처로 올라가게끔 더 강한 분발을 자극하는 노력을 해야 한다.
특별히, 좀 더 완전히 그분의 이미지에 순응하려는 하나의 수단으로 늘 그리스도를 묵상하며(고후3:18), 그분의 이름을 좀 더 안정되게 그리고 제대로 알고서 고백하도록 우리가 그들을 격려해주어서는 아니 되는가?(히3:1) 오!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 특권을 누릴 수 있거나 또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 자신감이 확보되는 것은 믿음과 근면을 끈기 있게 행사함으로써만 가능하다는 것을, 그들에게 또한 기억하게 하라(히3:6, 14).
3장 환자를 위한 심방
우리는 주님께서 주신 이 환자 심방 사역의 중요성에 대하여 부언할 필요가 없다(약4:14). 환자 심방은 어떤 경우에나 중요한 임무로, 주님의 백성을 위해서 목사가 할 수 있는 일이다. 그러므로 이 사역을 소홀히 하거나 잘못한다면 목회사역이 적절하지 못한 것이다. 이 사역은 영혼의 구원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는 것으로, 그 기회를 놓치거나 악화시키는 것은 의학적인 부주의나 의술을 잘못 사용하는 것보다 더욱 책임 있는 결과를 가져온다.
환자를 향한 접근은 다정한 친구의 모습이어야 한다. 목사의 정신과 태도 그리고 목소리조차 동정심을 보여주어야 한다. 나인성의 문에서 영구차를 세우실 때 그리고 나사로의 무덤에서 우셨을 때의 주님처럼 동정심을 보여주어야 한다. 사역의 옷을 “형제의 위급한 때를 위해서 입고 있는 것”(잠17:17)임을 보여줄 때보다 분명한 확신을 보여주는 것은 없다.
목사는 환자에 대한 적절한 지식을 획득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개인적 사례가 너무 다양하기 때문에 많은 어려움이 발생하고 있음을 알아야 한다. 우리가 일반적인 과정에서 환자를 위해 성경을 사용하도록 하는 것인데, 환자와 공감대를 이루기 위한 가장 간단한 언어는 시편이다. 그리고 환자를 위해 그와 함께 문제를 나누고 기도할 수 있다. 니고데모와 대화하신 주님의 말씀은, 알지도 못하고 관심도 주지 않는 사람들을 위해서 어떻게 교훈을 할 것인지에 대해 가장 중요한 참고가 될 것이다. 그리고 주님께서 이후 무리에게 말씀하셨던 내용들은 보편적으로 적용할 수 있다. 본문은 많거나 적거나 직접적으로 그리스도에 대하여 보여주고 있는 것들이어야 할 것이다.
환자 심방에 대하여 정확한 표준이 되는 것을 기술한 규범은 없지만, 만약 우리가 환자를 자주 방문하게 된다면 통상적으로 그 시간이 길어서는 안 된다. 때로는 규칙적인 심방이 바람직하지만 적당하지 않을 수도 있으며, 습관적인 방문은 보통 감동을 상실할 수 있다. 모든 상황에서 환자의 편의가 가장 중요한 문제가 되어야 한다. 진리를 제시할 때는 명확하고, 열심히, 충성스럽게 하는 것이 우리의 첫 번째 관심이 되어야 한다. 그리고 목사는 고통당하고 있는 환자를 사랑하고 있다는 점을 강조하는 것을 결코 잊지 말아야 한다.
생각을 깨우고 부드럽게 하기 위해 우리는 그들이 배웠던 다음과 같은 교훈들을 날마다 묵상하라고 권면할 수 있을 것이다(시119:67, 71, 75). 병중에서 고통받는 동안 받았던 성령의 가르침대로 살기 위해서 날마다 기도하는 것, 자신의 특별한 환난을 날마다 회상하는 것(애3:19-21), 환자들의 침상에서 맹세한 것들을 날마다 새롭게 하는 것(시103편, 116편), 그리고 육체로 있을 때에 자신들이 그러했던 것처럼 역경 가운데 있는 자들을 기억하며 날마다 기도하는 것(히13:3) 등이다.
4장 청소년 목회
5장 성례에 관한 교훈
성례의 시행은 우리 목회의 가장 중요한 부분 중 하나로 간주되어야 한다. 복음을 설교함으로 믿는 자들에게 차별 없이 제공되는 복음의 축복은 여기서 개별적인 분배에 의해 각 개인에게 날인된다. 그러므로 성만찬은 진실로 보이는 말씀이라고 말해질 것이다. 우리의 귀에 선포되었던 말씀이 보이는 표들로 우리의 눈에 제시된다. 그러므로 그것들은 하나님 말씀의 표로서 신앙의 견진에 가장 유용하다. 신앙의 집행을 통해서 그것의 외적 표를 소유한 우리는 확실히 그리스도와 언약의 모든 복의 참여자가 될 것이다.
6장 성도의 교제와 성직
7장 돕는 자들의 직임과 사용
8장 잡무
제6부 기독교 성직을 회고하다
1. 목사는 자신의 사역을 존중하는가?
2. 목사는 사역의 책임감을 느끼는가?
3. 목사는 사역에서 성공을 바라고 기대해야 할까?
4. 목사는 전력을 다해 사역을 감당하고 있는가?
5. 사랑의 성령께서 목사의 목회사역에 대해 말씀해 주시는가?
6. 목사의 양떼를 위해 기도하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