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을 떠난 지 한 시간 반. 눈이 시리게 푸른 김포 들녘을 지나 눈앞에 펼쳐진 강화도 앞바다는 오후 햇빛을 받아 온통 은은한 황금색 물결로 일렁이고 있다. 한가로운 해안도로를 따라 도착한 외포리. 이곳 외포리는 우리가 이미 알고 있듯 석모도와 교동을 오가는 여객선의 나들목이다. 들고 나는 배가 적지 않은 터라 지금 선착장은 타는 곳과 내리는 곳이 따로 마련돼 있다.
외포리에서 석모도 석포 선착장까지는 배로 10여 분 정도의 거리, 평소에는 30분에 한 척 꼴로 배가 다니지만, 사람들이 많이 몰리는 날이나 휴가철이면 자주 배가 다닌다.
보통 여름철 첫배는 아침 7시, 막배는 저녁 8시 30분이며, 계절에 따라 조금씩 차이가 있다. 강화도에서는 외포리뿐만 아니라 화도면 선수 포구에서도 석모도 가는 배를 탈 수 있는데, 외포리와 달리 선수 포구에서는 보문사에서 가까운 보문 선착장에 배를 댄다. 물론 가는 시간도 10여 분은 더 걸리는 편이다.
외포리의 갈매기는 사람을 전혀 무서워하지 않는다. 손가락 끝으로 과자를 잡고 허공에 올리고 있으면, 녀석들은 거리낌없이 다가와 과자를 낚아채 가곤 한다. 그런 모습이 마냥 재미있어 석모도를 여행하는 많은 사람들은 으레 "새우깡"을 챙겨오기도 한다.
강화 본 섬의 서쪽에 있는 석모도는 전에는 매음도, 금음복도, 매도, 석포도 들 해서 여러 이름으로 불려왔지만, 조선 숙종 때 〈강도지〉에서 "들모퉁이"란 뜻의 "석우"라는 이름으로, 영조 때 〈여지도서〉에 "돌모로"라는 뜻의 "석모로"란 이름이 붙은 뒤, 자연스럽게 석모도라는 이름으로 옮겨갔다. "돌모로", "돌모퉁이"라 함은 "돌의 모퉁이"란 뜻도 있지만, 돌투성이인 산자락의 모퉁이로 물이 돌아 흐른다고 하여 붙은 이름이기도 하다.
옛날(1706년 이전)에는 지금의 상리와 하리 평야가 자리한 땅이 바닷물이 통하는 갯골이었다고 하는데, 이곳의 물살이 유난히 빠르고 거세었다고 한다. 따라서 당시에는 지금의 상리와 하리 지역은 송가도, 그 아래 지역이 석모도였으며, 나중에 두 섬 사이의 갯골이 메워져 평야가 되면서 합쳐진 두 섬을 통틀어 석모도라 하였다. 특이한 것은 당시에도 지금과 같은 간척사업이 있어서 숙종32년(1706)에 오랫동안의 간척사업을 통해 지금의 "평야"가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그러고 보면 과거 석모도를 두고 금음북도니, 석포도니 해서 섬의 이름이 달랐던 것 또한 옛날에는 이 섬들이 각기 독립된 섬이었다가 간척사업을 통해 여러 개의 섬이 하나의 섬으로 탈바꿈한 것인지도 모르는 일이다.
석모도의 보물, 보문사와 마애석불 배에서 내리자 비릿하고 짭짜롬한 갯내가 먼저 손님맞이를 한다. 배에는 몇 대의 관광버스도 타고 있었는데, 모두들 보문사에 간다고 했다. 석모도 하면, 맨 먼저 떠오르는 것이 역시 보문사다. 보문사를 빼놓고는 석모도를 이야기할 수 없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보문사는 석포 선착장에서 남쪽 해안도로를 타고 매음리 지나 새가리 고개를 넘으면 들머리에 닿을 수 있는데, 석포항에서 차로 15분 남짓 거리다.
이 나한전 조성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도 전해온다. 옛날 절 아랫마을에 사는 어부가 고기잡이를 하던 터에 그물을 바닷속에 던졌더니 스물두 개의 돌덩이가 올라왔다고 한다. 그래서 그 어부는 돌덩이를 물에 던져버리고 그물을 다시 던졌다. 그런데 이번에도 스물두 개의 돌덩이가 그물에 걸려 올라왔다. 그날 밤 어부는 꿈에서 한 노승을 보았는데, 그이가 말하기를 "이것은 천축국에서 보내온 불상이니, 명산에 봉안해 달라"고 하였다. 이에 어부는 다음 날 스물두 개의 돌멩이를 건져 낙가산으로 옮겨 지금의 석굴에 봉안하였다고 한다. 이 석실은 여러 차례 보수를 거쳐 오늘에 이르고 있는데, 특이한 점은 얼마 전 석실에 봉안하고 있는 나한상을 조사해 보니, 재질이 우리나라 화강암이 아니라 인도에서 나오는 석재였음이 확인되었다고 한다.
석실 앞에는 언뜻 보아도 오래 됐을 향나무가 용틀임하듯 굽어져 있는데, 이 또한 심상치가 않다. 나이가 600살로 추정되는 이 향나무는 높이가 10미터에 둘레가 3미터 남짓한 고목으로, 지난 한국전쟁 때 말라죽다가 전쟁이 끝나자 다시 살아났다고 한다. 향나무 오른쪽에는 과거 절에서 사용했던 것으로 보이는 맷돌과 절구도 보관돼 있다. 이곳의 맷돌과 절구는 여염집에서 쓰는 맷돌과 절구의 두 배 정도가 되어 과거 가람의 규모를 짐작해 볼 수 있다. 맷돌과 절구를 돌아나가면 이제 꽃창살로 아름답게 치장한 대웅전의 육중한 모습을 만날 수 있는데, 이 대웅전은 과거 관음전이 있던 자리에 새롭게 세운 것이어서 옛 내음을 풍기지는 않는다.
이 대웅전을 지나쳐 밑으로 발길을 돌리면, 초가로 지붕을 이은 둥그런 모양의 특이한 건물을 한 채 만날 수 있는 데, 토담집을 한 이 건물은 선방으로 쓰는 토굴이라고 한다. 스님들이 참선을 하기 위해 들어가는 토굴이라는 것이다. 1950년쯤에 지은 이 토굴은 그때부터 보문사 선승들의 수도터 노릇을 해 오고 있다. 토굴로 내려가기에 앞서 대웅전 오른쪽을 보면 산을 오르는 계단이 구불구불 이어져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는데, 이 계단이 끝나는 곳에는 보문사의 보물이나 나름없는 마애석불좌상이 자리하고 있다. 대웅전에서 10분 넘게 가파른 계단을 올라가야 하는 거리다. 여름에는 땀깨나 흘려야 이 마애석불을 볼 수가 있지만, 석모도에 온 이상 이곳의 석불을 그냥 지나친다는 것은 석모도를 그냥 지나치는 것이나 다름없다.
마애석불이 처음 조성된 것은 지난 1928년. 그때 보문사 주지 스님과 금강산 표후사에 있던 이 화응 선사가 함께 새긴 불상이라고 한다. 70년이 조금 넘었지만, 이곳이 관음도량의 성지이고, 마애석불이 그것의 상징인 까닭에 오늘도 석불 앞에는 많은 신도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보문사는 남해 땅의 보리암. 낙산사의 홍련암과 더불어 우리나라 3대 관음 기도처로 손꼽히며, 우리에게 서해안의 하나뿐인 기도처로 알려져 있다. 또한 강화도 전체로 보면 전등사, 정수사와 함께 강화의 3대 고찰로 손꼽힌다. 본래 보문사는 신라시대 선덕여왕 때인 635년 금강산에서 온 회정대사가 창건했다고 하며, 그때 산 이름을 낙가산, 가람을 보문사로 했다고 전해온다.
여기서 낙가라는 말은 관음보살이 살고 있는 남해의 섬을 뜻하며, 보문이란 중생을 구제하기 위한 관음보살의 힘이 크고 넓다는 뜻이다. 보문사가 자리한 곳이 바다가 보이는 산 중턱에 자리한 것도 바로 이런 뜻에서 비롯한 것인데, 관음보살이 바다 한가운데 우뚝 솟은 보타낙가산에 머물고 있으므로, 관음보살이 거주하는 곳도 바로 이곳 보문사라는 것이다.
가람을 창건한 뒤 오랜 훗날, 절 뒤쪽 눈썹바위에 관음보살을 조각하여 모셔 놓은 것도 그 때문이다. 이 마애석불이 있는 곳에서 보면 서해 바다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데, 이곳에서 바라보는 낙조는 석모도의 경치 가운데서도 으뜸이라 할 만큼 아름답다. 예부터 강도십경이니, 강화팔경이니 하여 강화도의 명승지를 꼽을 때도 빠지지 않는 곳이 바로 눈썹바위의 마애석불과 마애석불에서 내려다보는 서해바다 풍경이다. 또한 새벽 동틀 무렵에 듣는 가람 앞바다의 파도소리도 흔히 꼽는 석모도의 버금 풍경이라 하였다.
노을이 아름다운 섬
영화 속에서 성현(이 정재)과 은주(전 지현)는 이곳 석모도를 배경으로 시간을 초월한 사랑을 나눈다. 하리 낚시터 가는 길의 둑방길과 갯벌, 바다가 바로 그이들 사랑의 배경이 되고 있다.
요즈음 석모도 하리가 〈시월애〉의 배경이 되었다는 것이 널리 알려지면서 하리 앞바다는 석모도를 여행하는 많은 젊은 남녀들에게는 필수 "데이트 코스"로 자리잡아 가고 있다. 이곳 하리에서 바라보는 해질녘 풍경은 그야말로 영화의 한 장면처럼 아름다운데, 특히 여름철에는 때마침 낙조가 하리 앞바다에 떠 있는 아름다운 미법도와 기장 섬 사이로 떨어져, 섬과 바다와 하늘은 물론 하리를 찾는 청춘 남녀들의 가슴을 온통 붉게 물들여 놓는다. 또한 하리 앞바다 모래밭에는 붉은색을 띠는 모래풀이 온통 뒤덮고 있어 해질녘 풍경을 더욱 돋보이게 한다.
노을이 아름답기로는 민머루 해수욕장도 그냥 지나칠 수가 없다. 해수욕장의 길이가 약 1킬로미터밖에는 안 되는 작은 해수욕장이지만, 이곳의 낙조는 보문사에서 바라보는 낙조와 더불어 강화 팔경으로 꼽는 으뜸 풍경이라 할 수 있다. 어류정항과 장구너머항 사이에 위치한 민머루 해수욕장은 석모도에서 하나뿐인 해수욕장으로 모래밭을 지나면 곧바로 갯벌이 펼쳐지므로 썰물 때 갯벌이 드러나면 직접 갯벌 체험을 할 수도 있어, 아이들과 함께 가족들이 머물기에 좋은 해수욕장이다. 또한 대학생들의 수련회 장소나 학생들의 생태체험장으로도 널리 활용되고 있다.
더욱이 이곳의 갯벌은 약 1킬로미터까지는 모래가 섞여 있어 발이 빠지지 않으므로 신발을 신은 채 갯벌을 드나들 수 있다. 갯벌에는 게와 고둥, 소라, 맛, 조개, 대합과 같은 여러 해양생물이 있으며, 모종삽이나 갈고리만 들고 나가면 이 모든 것들을 채취할 수 있다. 민머루에서 나오는 길에 해수욕장 양쪽에 자리한 어류정항과 장구너머항에 들러 한번 밴댕이와 꽃게 맛을 보는 것도 잊을 수 없는 추억이 될 것이다. 항구와 해수욕장을 벗어나면 길 옆으로 펼쳐진 염전에서 싼값으로 소금을 살 수도 있다.
보통 소금이 만들어 질 수 있는 온도는 25도. 일반적인 여름 날씨에서 이틀 정도만 가두면 정육면체(또는 역피라미드 모양)의 무색 투명한 결정제(결정이 커지면 점점 덩어리가 되어 가라앉는다)가 만들어진다. 햇빛과 바람이 좋을수록 결정체는 커지는데, 결정이 크게 된다고 다 좋은 것은 아니다. 결정체가 너무 크면 수분 함량이 많고 결정이 약해 잘 부서지게 마련이다. 이렇게 만들어진 소금은 고무래처럼 생긴 채렴 대패로 거두는데, 결정지에 한 번 가둔 물은 서너 번까지 소금을 거둔다고 한다. 만일 가족 나들이로 석모도에 가게 된다면 보문사와 더불어 어류정에서 갯벌 체험과 함께 염전 체험을 하는 것도 따라온 아이들에게 좋은 공부가 될 것이다.
석모도는 뭍에서 가까운 도서 관광지인 만큼 바닷가를 따라 수많은 민박집과 식당, 찻집이 자리하고 있다. 어느 정도 경치가 좋다 싶으면 영락없이 분위기 좋은 찻집과 콘도형 민박이 들어서 있다. 또한 석모도에는 섬인데도 민물 낚시꾼들이 적잖이 찾아오는데 어류정 저수지와 항포에 있는 삼산 저수지, 하리와 상리 사이에 있는 상하 저수지가 주로 낚시꾼들이 즐겨 찾는 낚시터이며, 갯바위 낚시를 즐기려는 사람들도 꽤 많이 찾아오는 편이다. 석모도에 온 이상 해안 일주도로를 한 바퀴 돌아보는 것도 석모도를 제대로 음미하는 좋은 방법이다. 특히 해질 무렵 해안도로를 따라 달리다 보면 마치 영화의 한 장면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듯한 느낌을 받게 될 것이다. 그럴 때는 그냥 모르는 척 영화 속의 주인공이 되어 보는 것도 좋을 듯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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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꿈꾸는 정원에서 원문보기 글쓴이: 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