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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뎀나무 아래의 엘리야
2007. 7. 1 주일 낮 왕하19:1-14
들어가는 말 - 우리는 8.15 광복절 기념일에 비명에 간 육영수 여사가 청와대에서 장례운구가 나갈 때 장례 차에 손을 얹고 손수건을 꺼내서 눈물을 훔치던 박정희 전 대통령을 목격한 적이 있습니다. 그때 국민들은 철의 독재자도 절망할 수 있는연약한 인간임을 깨닭았습니다.
사람은 완전한 강함을 가진 자는 없습니다. 아무리 강한 사람도 때로는 한없이 절망에 빠지는 나약한 인간에 불과한 것입니다. 성경에 수많은 강한 영웅들이 등장합니다. 그리고 영적인 거성들이 즐비합니다. 하지만 그들도 역시 나약한 인간에 지나지 않았음을 보여줍니다.
사실 하나님 자신도 절망하신 때가 있었습니다. 탄식하시며, 후회하시는 장면도 나옵니다. 예수님은 더욱 적나라하게 절망감을 보여주셨습니다. 그것은 십자가를 앞두고 나약한 인간적인 면과 싸우는 모습입니다. “아버지여 할 수 있거든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심히 고민하며 죽게 되었다”라고 하셨습니다.
성령님은 어떻습니까?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기도 하신다고 하시지 않으셨습니까?
오늘 본문에 나오는 엘리야는 가장 기억에 남는 능력자 중에 한 선지자였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선지자를 모두 잡아 가두고 죽이는 시대에 홀로 고군분투하며 목숨을 돌아보지 아니하고 믿음을 지켰으며, 악한 바알 선지자와 그 정권에 맞서서 싸운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죽음을 각오하고 우상숭배 정권에게 가뭄의 경고를 하였고, 또 숨어서 삼년 반 동안 기도로 믿음을 지켜 내었습니다.
그의 가장 클라이 막스 인생은 갈멜산에서의 바알과 아세라 섬기는 자들과의 목숨건 영적 전쟁이었습니다. 결국 그는 그 싸움에서 승리하였고 나라를 망하게 하였던 우상숭배자들을 모조리 처단하고 이제 이 민족이 자신의 손에서 바로 잡히는 줄 알았습니다. 하지만 오히려 그는 악한 이세벨의 위협으로 말미암아 민족적 영웅이 하루아침에 처량하게 도망가는 신세가 된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로뎀나무 아래에서 절망감에 일어나지도 못하는 처지가 되고 말았던 것입니다.
그는 이제 낙심한 것입니다. 절망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엘리야의 절망감의 원인은 무엇입니까?
1. 헛수고라는 절망감입니다.
그토록 오랫동안 민족이 바로 서기 위하여, 민족의 구원을 위해 기도하였고 , 목숨 건 투쟁을 하였건만, 결과인즉 그의 노력은 수포로 돌아가고 도망자 신세가 되었으니 허탈하고 공허한 그의 사역의 끝은 이제 모든 일에 자신감을 잃어버리고 절망감만 충만하게 된 것입니다.
우리는 온 전심을 다하는 노력에도 불구하고 일이 진전이 없을 때 헛된 수고라고 생각하고 절망감을 느낍니다.
모든 에너지를 사용하여 진액을 다 빼앗기고도 별다른 일의 진척이 없을 때는 절망감이 뚜렷이 찾아옵니다.
엘리야가 지금 그런 생각이 드는 것입니다. “여호와여 넉넉하오니 지금 내 생명을 취하시옵소서 나는 열조보다 낫지 못하니이다” 한 것입니다.
끊임없는 노력에도 불구하고 변하지 않는 환경이 절망감으로 떨어지게 만듭니다.
하지만 그의 헛수고 같은 사역을 하나님께서는 범죄한 이스라엘에게 심판의 불을 내리시는 하나님이심을 보여 주셨고, 하늘을 닫고, 여시는 하나님이심을 보여 주셨을 뿐 아니라 , 제 2, 3의 사역을 준비하고 계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주변의 왕을 세우는 것이요, 엘리사라는 후계자를 세우는 사역입니다. 그리고 엘리야의 사역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역을 계속 이어갈 사역자들을 다시 세우신 것입니다.
우리는 각자 맡은 것에 최선의 충성을 다하면 우리의 역할이 끝나게 되고, 다음은 역시 하나님께서 우리를 세우신 것처럼, 또 다른 사역자를 세워 당신의 일을 이어가실 것입니다. 우리는 맡은 작은 일에 충성을, 최선을 다하면 되는 것입니다.
2. 자신의 나약함에서 오는 절망감입니다.
자신의 능력이 뛰어난 줄 알았고, 못할 것이 없는 줄 알았는데, 현실에 벽에 부딪혀 보니 하찮은 자, 아무것도 이룰 수 없는 자, 나약한 한 인간임을 확인하니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자의 무능함을 돌아보며 절망한 것입니다.
“여호와여 넉넉하오니 지금 내 생명을 취하시옵소서 나는 열조보다 낫지 못하니이다” 이 말은 “ 주여 저도 역시 못난 인간에 불과합니다.” 하는 절규입니다.
생각했던 자신 보다 생활에서 현실에서의 무능함이 확인될 때 우리는 절망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최선을 다하여 수고하여도 절대도 변화 시킬 수 없는 문제나 환경이 자신을 더욱 초라하게 만들어 무능함을 느끼게 하고 절망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하지만 엘리야의 능력이 자기에게 있었던 것이 아니라 주께 있었던 것을 잊었던 것입니다. 돈도 하나님이 주셔야 있는 것이고, 건강도 주가 주셔야 유지 하는 것입니다. 모든 것이 주께로부터 말미암는 것이니 , 사실 엘리야가 이것을 깜빡 잊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원래 나약한 인간입니다. 주님이 힘주셔야 살 수 있는 존재입니다. 애초부터 그렇습니다.
3. 문제의 장벽이 너무 클 때 절망감을 느낍니다.
바알과 아세라의 일당을 처단하였다고는 하지만 그 일당의 원흉인 이세벨은 여전히 기세등등하여 꺾일 줄 모르니 아무리 보아도 그 기세를 이겨낼 자 없을 것 같았다. 그러니 이세벨이란 장벽이란 것이 하늘에서 하나님의 불이 내려오고, 삼년동안 비가 아니오고, 삼년 만에 비가 오는 기적 앞에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으니 그 견고한 문제의 성 앞에서 그 누가 절망감을 갖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모두 이러한 절망감에 빠진 적이 있을 것입니다. 사실 우리만 아니라 내노라하는 신앙의 선배 영웅들고 이 절망의 구렁텅이에 빠져 본 경험들이 있는 것입니다.
욥- “하나님이 나로 낙심케 하시며 전능자가 나로 두렵게 하시나니”(욥23:16)
렘애가 -“내 고초와 재난 곧 쑥과 담즙을 기억하소서 내 심령이 그것을 기억하고 낙심이 되오나” (3:1-20)
고라자손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망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하여 하는고 너는 하나님을 바라라 그 얼굴의 도우심을 인하여 네가 오히려 찬송하리로다”
다윗- “ 내 하나님이여 내 하나님이여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 어찌 나를 멀리하여 돕지 아니하옵시며 내 신음하는 소리를 듣지 아니하시나이까”
모세도 - “ 민11:14--15 책임이 심히 중하여 나 혼자는 이 모든 백성을 질 수 없나이다. 주께서 네게 이같이 행하실진대 구하옵나니 네게 은혜를 베푸사 즉시 나를 죽여 나로 나의 곤고함을 보지 않게 하옵소서”
4. 육신이 너무 지치면 절망감이 옵니다.
“로뎀나무 아래 누워 자더니 천사가 어루만지며 이르되 일어나서 먹으라 하는지라 본즉 머리맡에 숯불에 구운 떡과 한 병 물이 있더라 이에 먹고 마시고 다시 누웠더니...19:5” 그래서 주님은 우리에게 쉼을 가지라고 하신 것입니다.
우리의 육신을 치료하시고 새롭게 하시는 주님을 볼 수 있습니다. 떡과 물병은 말씀과 성령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말씀과, 성령이 아니면 진정한 육체의 쉼과 안식을 줄 수 없습니다.
5. 혼자라는 생각에 절망감에 빠집니다.
19:10, 14 “오직 나만 남았거늘 저희가 내 생명을 찾아 취하려 하나이다”
모세도 혼자라는 생각에 절망하였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오히려 엘리야 선지자 혼자가 아니라 아직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아니한 7천인을 남겨 두셨다고 하셨습니다. 언제나 나 혼자 일하는 것만은 아닙니다.
(19:18)
우리는 하나님의 일을 나혼자만 하는 줄 알고 성도들, 또는 서로를 하나님 앞에서 고발할 때가 있습니다. 그것은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다 돌고 도는 것입니다.
내가 열심일 때가 있고, 또 내가 못할 때 다른 이가 또 다 할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들이 혼자서 일한다는 절망감에 빠져드는 어리석은 자가 되어 하나님께 고발하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합니다.
(롬11:1-5)“주여 저희가 주의 선지자들을 죽였으며 주의 제단들을 헐어버렸고 나만 남았는데 내 목숨도 찾나이다 하니 저에게 하신 대답이 무엇이뇨 내가 나를 위하여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아니한 사람 7천을 남겨 두었다 하셨으니 그런즉 이와 같이 이제도 은혜로 택하심을 따라 남은 자가 있느니라”
6. 잡된 부정적 생각과 언어들이 절망감에 빠져들게 합니다.
민11:1-15 모세까지 낙심함.
“이스라엘 중에 섞여 사는 무리가(믿음없는 이방인들)탐욕을 품으매 이스라엘 자손도 다시 울며 가로되 누가 우리에게 고기를 주어 먹게 할꼬 ...11절 어찌하여 이종을 괴롭게 하시나이까 ... 내게 은혜를 베푸사 즉시 나를 죽여 나로 곤고함을 보지 않게 하옵소서” 이 말씀을 통하여 우리는 믿음없는 한사람 두 사람의 언어가 온 교회를 절망감에 빠지게 만들며, 결국에는 리더가 되는 모세까지 낙남하게 만들고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하게 만든 원인이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부정적 언어들이 교회에서 사라져야 합니다.
(참조 : 민13:30- 33, 14:1-12, 27-38,)
그러므로 성경은 "포도원을 허는 작은 여우를 잡으라" 하셨습니다.
민32:7-9 에 보면 “너희가 어찌하여 이스라엘 자손으로 낙심케 하여서 여호와께서 그들에게 주신 땅으로 건너갈 수 없게 하려느냐 너희 열조도 내가 가데스바네아에서 그 땅을 보라고 보내었을 때에 그리 하였었나니 그들이 에스골 골짜기에 올라가서 그 땅을 보고 이스라엘 자손으로 낙심케 하였여서 여호와께서 그들에게 주신 땅으로 갈 수 없게 하였었느니라” 하였고,
고전10:10에는 “저희 중에 어떤이들이 원망하다가 멸망시키는 자에게 멸망하였나니 너희는 저희와 같이 원망하지 말라” 하였습니다.
잠언에는,
“나무가 다하면 불이 꺼지고 말장이가 없어지면 다툼이 쉬느니라”(잠26:20)
그러므로,
‘우리 교회가 문제가 있다’라고 말하는 사람 바로 그 사람 때문에 문제가 있는 것이다. 그 사람이 문제의 근원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진정한 믿음이 사람은 문제를 긍정적으로 보고 하나님이 하시면 된다고 형제들을 안위하고 믿음을 세워주고 힘주는 사람입니다.
즉 여호수아 갈렙 같은 사람입니다.
하나님은 말을 바르게하는 온전한 사람을 복주시는 것입니다.
자꾸 문제가 어떻고 말하는 바로 그 사람이 문제의 원흉인 것은 확실한 것입니다.
우리 교회가 감사한 것은
지금까지 분쟁이 없이 불평불만이 없이 충성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큰 복이라서 반드시 지켜가야 할 전통입니다.
그러나 원망과 불평이 돌고 말들이 돈다면, 이스라엘이 그랬던 것처럼 우리는 함께 함께 망할 것입니다.
원망과 불평의 사단을 물리칩시다. 할렐루야!
결국 - 로뎀나무 아래의 엘리야는
문제로부터 도망가려는 도피처로서의 로뎀나무요!
지치고 상한 심령이 일어나지 못하는 절망의 로뎀나무요!
잘하는 줄만 알았던 자신을 다시 발견하는 로뎀나무요!
주님의 위로를 경험하는 위로의 나무요!
새로운 사역을 경험하는 신앙의 전환점으로서의 로뎀나무였습니다!
그러므로 때로는 절망에 빠지는 것도 우리에게는 오히려 유익이 되고 새로운 축복의 장소가 되는 로뎀나무였습니다.
절망이 그렇게 꼭 나쁜 것만은 아닙니다. 주님은 오히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하시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다시 주님의 말씀을 먹고, 다시 성령의 생수를 마시고 새롭게 일어섭시다. 할렐루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