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화향교에서는 2009년도 인성교육의 일환으로 강화지역에서 4일간의 실내외교육을 마치고 서울에 있는 성균관을 봉심(奉審)(성균관을 방문하여 대성전에서 분향 및 참배하는 것) 겸 현장답사를 계획에 따라 실시하고 있다 대형 버-스 2대로 강화향교의 전교님을 위시해서 지도하신 선생님 그리고 학생 일부 학부모님까지 화기 애 애한 분위기속에 하루여행이 아쉬운 값진 나들이였다
오래전에 성균관대학에 가본 바는 있었으나 대성전과 명륜당은 보지도 못하고 왔기에 이번이 처음으로 자세히 살펴보려 했으나 단체행동에 따라 충분한 시간을 갖지 못한게 못내 아쉬웠다 봉심을 마치고 우리를 위해서 연로하신 황의욱 선생님께서 장시간 성균관의 역사와 기능 등 자상한 해설을 해주셔서 많은 것을 배우고 왔다
일반적으로 향교를 방문하게 되면 명륜당(明倫堂)을 지나서 대성전(大成殿)을 바라보게 되는데 대성전이 먼저고 뒤에 명륜당이 있는 것을 처음 보게 되었다 경사(傾斜)가 있는 곳에서는 전당 후묘(前堂後殿) 평지에는 전전후당(前殿後堂)이라고 배운바가 있었다 대성전 앞에 아주 오래된 측백나무가 좌우로 세 가지와 다섯 가지로 자라고 있었는데 그저 그렇게 자라나는 나무도 우리들에게 삼강오륜(三綱五倫)을 일깨워 주는 듯 했다 대성전 색깔이 불교 사찰의 오색이 찰란한 단청과는 달리 홍색과 청색 이두가지색만을 사용하게 된 설명이 계셨는데 미처 알아듣지 못해 아쉽다
대성전(大成殿)은 대성지성문선왕(大成至聖文宣王) 공자(孔子)님의 위패(位牌)를 모시는 전각(殿閣)을 말한다
가장 중앙에 오성위(五聖位) 즉 공자를 중앙에 모시고 안자(顔子). 증자(曾子). 자사(子思). 맹자(孟子).등 사성
(四聖)을 좌우에 배향(配享)하고 공자의 제자 십철(弟子十哲). 송조육현(宋朝六賢)의 위패. 그리고 우리나라 신라의 설총. 최치원.을 비롯하여 모두 십팔현(十八賢)을 종향(從享)하였다 대성전(大成殿) 현판은 조선 영조조(端宗朝)에 와서 대성전(大聖殿)이라 하다가 크게 이루었다는 측면을 강조하여 성인 성(聖)자를 이룰 성(成)자로 바꾸었다는 귀중한 말씀도 듣게 되었다 정면 현판은 조선중기의 명필 석봉. 한호.(石峯. 韓濩)의 글씨라 한다
대성전 좌우에는 동무. 서무(東廡 西廡)가 있는데 태조7년(1398)에 대성전과 동시에 창건하여 孔門弟子 69분의 위패를 포함하여 중국과 우리나라 성현 112분의 위패(位牌)를 동서로 봉안(奉安)하였다가 1949년전국유림대회(全國 儒林大會)의 결정으로 우리나라 18현의 위패는 대성전에 모시고 그 밖의 94현의 위패는매안(埋安)(위패를태워서땅에묻음)하여 지금은 비어 있다 이때의 위패(位牌) 매안사건(埋安事件)은 全國鄕校까지도 동시에 실행되었는바 꽤 많은 저항도 있었던 것 같다 강릉향교(江陵鄕校)에서는 매안을 하지 않았다고 자랑스러워했다는 풍문도 있었다고 한다
대성전 뒤에는 명륜당(明倫堂)이 있다 명륜당은 총18칸으로 左右에 협실(夾室)이 있고 중간에 당이 있는 구조이다성균관의 교육기능을 수행하던 강학장소(講學場所)로서 대성전과 마찬가지로 성균관을 비롯하여 지방의 각 향교에도 설치 되어있다 이곳은 進士나 生員 中에서 엄중 선발하여 .儒敎經典을 중심으로 정신과 인격을 연마하여 국가 발전을 위한 지도자의 덕목을 익혀가는 장소로 되었다
대체로 文科 小科에서 初試覆試를 거친 진사나 생원들이 대과를 준비하기위해 경향 각지에서 모여와 입관을 하게 되고 입관한 유생들은 재학 중 일종의 학칙인 학령(學令)의 적용을 받았다 성균관의 교육내용은 가장 기본적인 大學 논어(論語) 중용(中庸) 孟子의 四書와 예기(禮記) 春秋 시전(詩傳) 서전 (書傳) 주역(周易)의 五經을 비롯하여 근사록(近思錄) 성리대전(性理大典) 통감(統監) 좌전(左典) 송원절요(宋元節要) 경국대전(經國大典) 동국정운등(東國正韻等) 이였는데 과거 시험과목에 따라서 변동이 되기도 한다
이밖에 詩 賻 頌과 같은 글을 짓는 방법을 비롯하여 중국의 왕휘지와 조명부의 팔법도 익히게 하였다. 성균관 유생들에 대한 교육평가로는 학령에 명시되어 있는 학관일강과 순과를 비롯하여 예조월강(禮曹月講)이 있었는데 그 성적은 연말에 종합되어 식년시(式年試)와 천거에 참작되었다.
성균관 유생들에게는 구내식당에서 조석으로 식사를 하는데 하루식사를 하면 일점으로 일년에 300점을 얻어야 대과 응시 자격을 주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이는 영국의 명문인 옥스포-드나 켐브리지에서도 승려교육의 일환으로 넥타이를 매고 정장을 하고 엄격한 의식도 있었지만 그곳에도 식당의 식사점수를 엄격하게 계산했다고 하니 우리 성균관의 사대부 교육과 비슷 했던거 같다
한편 성균관유생들은 과거(科擧)에 있어서 여러 가지 특전을 부여받았는데, 관시(館試) · 알성시(謁聖試) · 춘추도회(春秋都會) 등이 그것이며, 그 밖에 천거(薦擧)의 특전을 받기도 하였다. 성균관은 문과 준비를 위한 과업교육(科業敎育)을 담당하는 기관이었기에, 입학규정은 엄격하면서도 일정한 재학기간이나 졸업일이 없었다. 과거에 합격하는 날이 바로 졸업일이었다고 할 수 있다.
유생들의 기숙사인 동·서재(東. 西.齊)에서는 약방과 학생의 대표인 장의방(掌儀房)이 따로 있었다고 한다 그간에도 유학을 전공하는 학생들이 기숙하며 전통의 맥을 잇고 있었으나 몇 년 전 부터 문화재 보호의 목적으로 퇴거되었다고 한다 생활은 규칙이 엄격하였고, 이 규칙은 유생들의 자치활동에 의하여 운영되었는데, 유생들의 자치기구(自治機構)로는 재회(齋會)가 있었다. 유생들은 자체의 내부적인 문제는 재회를 통해서 자치적으로 해결하였다. 그런데 유생들의 자치활동은 때로 대외적인 문제를 대상으로 이루어지기도 하였다. 즉 조정의 부당한 처사에 대한 시정 요구, 선대(先代)의 유신(儒臣)에 대한 문묘배향(文廟配享) 요구, 이단(異端)에 대한 배척 요구 등이 있을 때는 재회(齋會)를 열어 소두(疏頭)를 뽑고 유소(儒疏)를 올렸으며, 자신들의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을 경우에는 소행(疏行, 집단시위)이나 권당(捲堂), 수업거부(授業拒否),단식투쟁(斷食鬪爭) 또는 공관(空館, 同盟休學) 등의 실력행사(實力行使)로 맞섰다.
성균관은 대체로 인재양성(人材養成所)의 기능(機能)과 함께 선성(先聖)과 선현(先賢)에 대한 봉사(奉祀)의 기능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조선 초기에 있어서는 성균관이 주자학(朱子學)을 연구, 보급하는 학문의 전당으로서의 기능(機能)과 주자학을 연구, 보급하는 학문의 전당으로서의 기능과 주자학이념(朱子學理念)에 입각하여 관리를 양성하는 관리양성소(管理養成所)로서의 기능을 발휘함으로써, 조선왕조의 지배사상(支配思想)과 관료체제(官僚體制)를 재편성(再編成)하여 강화하는 데 기여하였다는 점에서 그 역사적 의의를 찾을 수 있다. 그러나 조선왕조가 안정되어감에 따라 공신(功臣) · 훈신(勳臣)의 자제들에 대한 각종의 교육 · 과거의 특전이 부여됨으로써 성균관(成均館)은 주자학에 대한 학문적 연구보다는 집권양반자제(執權兩班子弟)들의 立身出世의 도구로 이용되게 되어 성균관교육은 침체(沈滯)되어 버렸고, 그 대신 주자학의 학문적 연구를 바탕으로 하는 사학(私學)인 서원(書院)이 지방 양반자제들의 과거 준비 교육기관으로 발흥하게 되었다. 그러나 조선시대의 성균관은 관념적인 면에서 19세기말 신교육제도가 실시될 때까지 면면이 이어저왔다고 하는 성균관의 역사를 배우게 되었다
大成殿