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포/부동산 버블꺼진 일본(上)] 도쿄집값 9년 오른 후 … 일본 땅값 12년째 내리막 … 1000조엔 사라져 부동산 담보 잡은 금융기관 부실
노숙자 야마모토(山本·57)씨는 13년 전까지만 해도 연봉 1000만엔(약1억원)을 받는 유명 음반사의 부장이었다. 집값 거품이 절정으로 치닫던 지난 90년, 도쿄 후추(府中)시에 2억엔(약 20억원)짜리 단독주택을 구입했다. 일본은 83년부터 91년까지 9년 연속 집값이 치솟아 부동산은 황금알을 낳는 최고의 재테크 수단으로 통했다. 그는 30년 상환 조건으로 1억4000만엔(약14억원)을 은행에서 빌렸다.
그러나 야마모토씨가 ‘내집마련’의 단꿈을 맛본 시간은 고작 3년뿐. 거품경제가 꺼지면서 회사가 부도나 졸지에 실업자가 됐고 집은 경매로 넘어갔다. 개인파산을 신청한 그는, 현재 신주쿠(新宿) 공원을 전전하며 노숙자 생활을 하고 있다.
91년을 기점으로 땅값이 폭락한 일본은 아직도 ‘부동산 버블’의 후폭풍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개인은 물론, 부동산을 담보로 돈을 빌려준 금융기관도 부실의 늪에서 벗어나지 못해 일본 경제 장기 침체의 한 원인이 되고 있다.
◆도쿄 집값 하락폭 최고 50%=일본 땅값은 전국적으로 매년 5~6%씩 12년째 하락하고 있다. 이 때문에 지금까지 약 1000조엔 가량의 자산가치가 거품처럼 꺼졌다.
1000조엔은 지난해 우리나라 국내총생산(GDP·596조원)의 약 20배에 맞먹는 액수다. 도쿄 시내 집값은 지난 10년간 최고 50%까지 떨어졌다. 부동산정보업체 ‘도쿄칸테이’의 이데 다케시(井出武)씨는 “거품경제의 절정이던 88~92년에는 도쿄 시내 평당 분양가가 400만엔(약4000만원)을 훌쩍 넘겼지만 지금은 200만엔(약2000만원) 수준으로까지 떨어졌다”고 말했다.
일본 국토교통성이 해마다 발표하는 공시지가를 살펴보면, 집값 폭락 현상은 더욱 선명해진다. 도쿄 세타가야(世田谷)구 소시가야(祖師谷) 1-16-6번지 단독주택은 15년 전만 해도 평당 363만엔이었지만 지금은 154만엔으로, 무려 57.5%나 떨어졌다. 미쓰이부동산주식회사 기타하라(北原) 소장은 “10년 전 연 5~6% 금리로 융자를 끼고 집을 샀던 사람들은 대부분 집값이 대출금의 3분의 1도 안 되는 ‘깡통주택’에 살고 있다”고 말했다.
◆부동산 투자 열올린 기업 부도 속출=본업을 잊고 부동산 투자 ‘외도’에 나선 기업들은 엄청난 부채를 남기고 모두 도산했다. 알짜기업인 교와(共和), 아리토요카세이(有豊化成) 등 수십개 기업들이 부동산 투자 실패로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렸다.
삼성경제연구소에 따르면, 일본 기업들의 토지 순매입 규모는 80년대 전반 연 1조엔에 그쳤지만, 85~90년 사이에는 연 평균 6조7000만엔으로 6배 넘게 급증했다. 부동산값 급등으로 일시적인 자산가치가 2~3배씩 늘어나는 등 창업 이래 최대 호황을 맞은 기업도 등장했다. 그러나 지가 하락이 시작되면서 재테크에만 신경썼던 기업들의 자금 상황은 단번에 악화돼 버렸다.
끝없이 치솟을 것 같던 부동산값은 양도세율 인상 등 일본 정부의 부동산 안정 정책에다 경기 침체가 겹치면서 끝없는 나락으로 떨어진 것이다. 금융연구원 박종규 연구원은 “저금리로 인한 부동산 투기수요 등 우리와 일본의 부동산 시장은 너무나 유사하다”며 “우리도 부동산 가격이 더 치솟는다면 일본의 전철을 밟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없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