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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세계 사랑방
德溪 허세욱 선생님과의 대담
문심(文心)과 문정(文情)의 향기에 취하여
대담│홍억선 (본지 주간)
기록│강여울 (시인 본지 편집간사)
사진│노경애 (수필가 디카450 회원)
6월 8일 아침, 비가 오겠다는 일기예보와 달리 눈부신 햇살을 받으며 서울로 향했다. 소실점을 열어 가는 산천의 녹음은 마음에 날개를 달아 주었다. 마음처럼 길도 시원하게 뚫려 약속 시간보다 거의 한 시간 정도 일찍 서울 남부터미널 앞에 도착을 했다. 선생님은 예쁜 아가씨 한 분과 함께 나갈 것이라고 해서 궁금증이 일었다. 사방을 두리번거리는데 강여울과 노경애가 길 건너편을 향해 인사를 하고 손을 흔들었다. 회색 모자에 겨자색 바지, 줄무늬 잠바를 입은 선생님이 김시헌 선생님의 팔을 잡고 서 계셨다.
선생님의 안내를 받아 터미널에서 가까운 정갈하고 조용한 한식집에 들었다.
“선생님, 예쁜 아가씨와 나오신다 해서 몹시 궁금했었습니다.”
“기대했다가 실망이 컸지요?”
김시헌 선생님의 말씀에 일행은 약속이나 한 듯이 손을 저으며 한바탕 웃었다.
“오늘 탁구를 치기로 약속이 있었어요. 김 선생님한테 대구 후배가 오니 함께 만나면 얼마나 반갑겠어요하며 전화로 꼬셨어요.”
허세욱 선생님의 호방한 웃음과 유머에 우리 일행은 금방 따스한 정에 휩쓸렸다.
“오해는 마세요, 김 선생님과 비록 9년이라는 나이 차는 있지만 30년이 넘는 우정이다 보니 농담도 잘하고 그래요. 내가 다른 것은 다 이분한테 배웠지만 술만큼은 내가 가르쳤어요.”
선생님이 술잔을 들어 권하자 김시헌 선생님께서 “선생이 시원찮아 술을 잘못 배웠어.” 해서 또 한바탕 웃음이 터졌다.
“7, 8년 전 선생님은 안양에 사셨고, 난 수지에 살았거든. 그래 가까우니까 자주 만나 탁구도 치고 맥주를 한잔씩 하고 그랬어요.” 요즘도 젊은 사람들과 탁구를 치신다는 허세욱 선생님은 연세보다 훨씬 젊으셨다. 근황을 여쭤 보았다.
―지금도 정기적으로 나가는 강의가 있어요. 중국 대학에도 가고. 그래서 심심찮게 콩나물 값을 벌어 와요. 중국산천도 그 문학, 그 사상의 무대를 쏘다녔지요. 최근에는 한국문학, 한국사상의 배경지역도 다니면서 두나라를 비교도 하고, 몇 년 전에는 중국 무이산을 둘러보았는데 문득 퇴계가 얼마나 가 보고 싶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 절경은 말로 표현할 수가 없어요. 얼마 전에 내가 안동에 갔다 왔어요. 그런데 그쪽의 풍경이 무이산 계곡과 비슷하더라고. 규모야 비교가 안 되겠지만 굽이치는 모습이 비슷했어요. 하회를 산꼭대기에서 굽어봐야 한다 해서 정말 그렇게 굽어보고 왔어요. 화회마을도 살펴보고 이곳저곳 둘러보고 잠은 농암 이현보 별당에서 잤어요.
이 말을 듣고 김시헌 선생님이 “우리 동네만 빼놓고 다녀왔다길래 내가 유감이다 했어요.” 하셨다.
나이 한 살이 만든 인생의 전환점
선생님의 고향이 임실이지요? 지금도 그곳에 집이 있습니까?
―지금도 임실에 그대로 있어요. 5대를 산 집인데 부모님이 돌아가시고 비어 있어서 보수하는 데 돈이 좀 들어요.
―해방 직후에는 공업고등학교가 인기가 있었어요. 공업이 낙후해서 일제침략을 받았다는 인식이 깔려 있었던 거죠. 그래서 이리공업을 다녔는데 고1 때 6·25 전쟁이 일어났어요. 호적상 만 17세가 되면 국가에서 단기 훈련을 시켜서 전쟁터로 내보냈어요. 나는 한 살이 모자라 학병이 되지 않고 집으로 갔는데 그것이 인생의 전환점이 될 줄은 몰랐어요.
―할아버지는 만세사건으로 돌아가시고, 이조의 마지막 등과를 해 벼슬을 한 작은할아버지가 고향에 계셨어요. 성균관 박사였으니. 작은할아버지께서 아버지에게 나를 집안의 씨앗으로 키우라고 하셨던 거예요. 그래서 아버지는 집에 서당을 차려서 훈장을 모셔 놓고 한학 공부를 시켰어요. 그것이 내 인생의 전환점이 된 거예요. 한창 피 끓는 나이에 2년 동안 서당에 갇혀서 매일 공부만 했으니 얼마나 탈출하고 싶었겠어요. 나는 문학도 탈출, 그러니까 해방에 대한 욕망의 표출이라고 봐요. 아버지는 대농으로 내가 집안의 선비가 되어 동네 글줄이나 써 주며 살기를 바랐지요. 그러나 나는 벗어나고 싶었어요. 그래서 무작정 이리 남성(南星)고등학교를 찾아갔지요. 당시에는 공업고등학교에서 인문계 고등학교로 전학이 어려웠어요. 마침 이리공고 때 담임선생님이 남성고등학교에 계셨는데 교장 선생님이 허락하면 된다 했어요. 교장 선생님께서 이것저것 물어보시다 소동파의 적벽부를 아느냐며 한번 외워 보라고 해요. 나는 자신이 있었으니까 또박또박하게 외웠지요. 2년 동안 한 것이 그것이었으니까. 그랬더니 이분이 너무 좋아했어요. 그렇게 해서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까지 연결이 되었어요. 그때 교장 선생님이 그 유명한 윤제술 선생님, 뒷날 정계에 나가 국회부의장을 하셨어요.
―유학은 60년에 중국 대만으로 갔어요. 중국 교육부 장학생 선발 시험에 합격을 했지요. 그때는 유학이 무척 어려웠어요. 기자들이 사진을 찍어 신문 기사로 실을 정도였으니까요. 집안 형편이 어려운 것은 아니었지만 유학도 장학생으로 갔으니 큰 어려움 없이 공부를 할 수 있었지요.
중국에서의 등단
선생님께서는 등단을 중국에서 하셨지요? 그때 이야기를 좀 해 주세요. 중국에서 수필 장르를 따로 부르는 이름이 있습니까?
―중국에서도 우리와 같이 수필 또는 산문이라고 해요.
나는 시와 수필 모두 중국에서 등단을 했어요. 우리 문단에 나처럼 중국에서 등단을 한 문인은 없을 거예요.
대만에 간 지 나흘째 되는 날이었던가. 내가 한국에 있을 때부터 만나고 싶었던 시인이 있었어요. 시집 뒤에 있는 주소를 보고 무작정 그 시인의 집을 찾아갔지요. 내가 한국에서 유학을 온 학생이라며 인사를 했더니 아주 반가워했어요. 그때 마침 젊은 시인이 찾아 왔는데 내게 소개를 시켜 주더라고요. 그날부터 둘이 어울렸어요. 나는 중국 회화보다 문장에 익숙했어요. 그래서 말은 잘 되지 않지만 시나 문장으로 중국 친구와 잘 통했지요. 그 친구를 비롯 어울리는 사람들이 모두 문인들이었어요. 그러다 보니 하는 얘기가 다 시(詩) 얘기 문학 이야기였어요. 그러다 보니 나도 자연스럽게 그 물이 들어서 습작을 하게 된 거지요.
어느 날 대학원 친구가 숙사로 나를 찾아왔다가 내가 쓰고 있던 습작품을 보게 된 거예요. 습작품들을 읽어 보더니 좋다고 모두 가져갔어요. 그렇게 가져간 시를 대만 『現代文學』지에 보낸 거예요. ‘名字’와 ‘願’이라는 중문시 두 편이었는데 이게 추천되어 등단을 했지요.
수필 등단 사연도 특이했어요. 1961년 봄에 학부에서 수필 강좌 있는 것을 보고 방청을 했어요. 평소 중국 주자청의 수필에서 받은 감동 때문이었지요. 나중에 내가 번역한 주자청의 ‘뒷모습’이 교과서에 실리게도 되었지만…….(김시헌 선생님은 원문보다 선생님의 번역이 낫다고 하심.) 그때 교수가 사빙영(謝啣塋)이라는 교수였는데 낯선 학생이 뒤에 앉아 있으니까 가까이 오라고 불러요. 몇 가지 물어보고 하더니만 강의를 듣게 하고, 매주 한 편씩 수필을 써 오라고 해요. 내가 작품을 써 가면 일일이 다 퇴고 지도해 주셨어요. 그렇게 수필 강좌를 다 듣고 종강 후 몇 작품은 어디에 내놓아도 된다며 잡지에 추천을 해도 되겠냐고 묻는 거예요. 속으로 웬 떡이야! 했죠. (모두 웃음) 그래서 1961년 『作品』지에 ‘一對樹’와 ‘避難’이 추천되어 수필로도 정식 등단을 하게 됐어요.
―우리나라에 들어와서는 1969년에 『현대문학』에 시를 발표하면서 문단 활동을 시작했었어요. 이 때 김동리 선생님의 권유로 한국문협에도 가입을 했고요. 회원이 몇 백 명이던 때였어요. 피천득, 김태길, 김소운 선생들과 만났고, 미당 선생님과도 가까이 지냈어요. 내 시집의 서문을 미당 선생님이 쓰셨지요.
수필은 관동출판사 김승우 씨가 창간한 『수필문학』에 1972년 ‘움직이는 고향’을 발표하면서 본격적으로 활동을 시작했지요.
수필문우회와 『계간수필』
말씀을 하시는 도중 두 분 선생님이 주고받는 대화가 각별하여 처음 어떻게 만나셨는지 물으니 선생님은 “여기 김 선생님과 나는 서로 만나진 거예요.” 했다.
―무려 40여 년을 거슬러 올라가야 해요. 1970년대만 해도 수필잡지는 김승우 씨가 창간한 『수필문학』 하나뿐이었어요. 지금 나오는 『수필문학』이 아니라 관동출판사에서 나온 유일의 전국적인 수필지라 누구든 여기에 작품 싣는 것을 영광으로 생각했어요. 그러니 작품들이 아주 좋았어요. 이『수필문학』이 1979년에 여러 가지 이유로 출판이 정지되고 말았어요. 이 『수필문학』을 다시 살려 보자고 뜻을 모아 만든 조직이 ‘수필문학진흥회’예요. 결국 『수필문학』은 정간되고 수필문학진흥회가 그를 계승한 문예지로 『수필공원』을 냈습니다. 『수필공원』은 수필을 사랑하는 사람이면 누구나 다 참여할 수 있는 열린 공간이다 해서 ‘공원’이란 이름을 넣은 거예요. 이렇게 문호를 개방하니 규모가 커져요. 규모가 커지면 중심이 흐려지기 마련이지요. 어떤 조직이든지 새 조직이 생길 때에는 어떤 이유가 있기 마련이에요. ‘수필문학진흥회’의 주류 회원들이 따로 만든 단체가 바로 ‘수필문우회’입니다. 수필문학진흥회의 주류 멤버들이 수필문우회 회원이 된 셈이지.
수필문우회는 1981년도 가을에 수필을 사랑하는 중견이라고 추천된 사람들로 동인회를 구성했어요. 얼굴은 서로 모르지만 그동안 발표된 작품들을 다 읽고 그 중에서 서로 추천을 했던 거지요. 이렇게 해서 “수필 좋고, 사람 좋고”라는 구호 아래 추천된 사람 26명이 모여 창립한 것이 ‘수필문우회’야. 작품으로 먼저 만나고, 작품을 통한 인간 이해를 바탕으로 엮어졌으니 우리는 만나진 거지요? 그때부터 30여 년이 다 되는 지금까지 참 잘 지내 오고 있어요. 서로 존경하고, 예가 아닌 것은 안 하고 서로 존중하니까 좋은 관계가 계속 오래갈 수 있는 거예요.
창립 회원이었던 김우현을 비롯한 김사달, 박연구, 윤모촌, 정재은 정봉구, 공덕룡, 유경환 등의 회원은 아쉽게도 타계를 했어요. 지금 회원은 50여 명입니다.
입회는 임원진의 전원 찬성으로 결정되고, 합평회는 지금까지 매월 해 오고 있어요. 돌아가신 김우현 씨가 아주 혹독했어요. 어떤 이는 울고 돌아가고, 한 번 합평회를 하고 나오지 않는 이도 있었어요. 1995년에 기관지 『계간수필』이 창간되었지요.
『계간수필』은 편집위원이 6명인데 모든 것을 같이 해요. 청탁도 같이 하고, 신인 작품도 같이 읽고, 모든 것을 같이 해요. 예전에 김시헌 선생님과 윤모촌 선생님도 초창기 편집위원을 한 적이 있었는데, 이 때 재미있는 일화가 있어요. 제자가 신인상 응모를 하면 이분들이 일절 말을 안 하세요. 아예, 심사하는 자리에 나오지 않거나 나와도 아무 말도 않고 가만히 있는 거예요. 모든 결정이 끝나고 나서야 제자라고 한마디 하시곤 했어요. 그래서 전 두 선생님이야말로 이 시대의 마지막 선비구나 생각했어요. 선비의 양심이죠.
『계간수필』이 순수한 취지로 만들어져 상업화가 되진 못하고 있어요. 상업화도 하나의 진보라면 진보랄 수 있는데. 신인 등단제가 있지만 아주 엄격해요. 해 보니까 상업화로 가지 않고도 충분히 책을 만들 수 있더라고. 『수필세계』도 그렇지 않나요? 구독료에다 변해명 씨가 광고도 몇 건씩 받아 보태고, 사무실도 김태길 선생 사무실을 같이 쓰니 따로 돈 쓸 일 없고 해서 그런가 회비를 보태지 않고도 지금까지 잘해 오고 있어요.
좋으면 살아남기 마련이다
―수필지가 난립이 되기 시작한 것은 90년대 말, 2000년대에 접어들면서야. 지금 우후죽순으로 생겨난 수필잡지가 얼마나 많아요. 수필이 상업화가 되면 정치적 힘이 생겨요. 이건 또 하나의 자멸의 원인이 되기도 해요.
―『수필세계』도 그 중의 하나지만 걱정 말아요. 대밭에 가 보면 그렇게 많이 올라온 대순들이 끝까지 다 자라 대나무가 되는 것은 그리 많지 않아요. 살아남기 위해서 어떤 길을 선택하느냐? 여기서 고뇌가 생기죠. 투자하면서 명맥만 유지할 것이냐, 상업화로 나가 존재할 것이냐. 그러니 『수필세계』도 20~30년 앞을 보고 가면 돼요. 좋으면 살아남기 마련이거든. 좋은 것은 저 냇물의 사금과 같다고 봐요. 지금 보이지 않을 뿐 언젠가는 나타나게 마련이죠. 그러기 위해선 잡지마다 성격이 있어야 해요. 그러자면 먼저 수필의 품격 정립이 있어야겠지.
―인간을 감동시키는 것은 무엇보다 인간의 진실이에요. 예를 들어 내 작품 중 중국에서 수만 권 이상 팔리고 있는 게 『움직이는 고향』이야. 아마 정서가 우리와 크게 다르지 않기 때문일 거예요. 주자청의 글처럼 옛날이나 지금이나 본질적인 것은 변질이 없어요. 내 작품 ‘움직이는 고향’이나 ‘초승달’과 같은 것도 그렇지만 모든 문학의 출발은 기억의 유보가 아니겠어요? 역사성, 서사성, 서정성이 함께 묻어 있는.
―수필에 더러 허구를 얘기하는데 나는 반대해요. 허구 반대는 여기 이분(김시헌 선생님을 가리킴)이 명징해요, 나도 같은 생각이에요. 수필이란 체험의 문학이니 당연히 허구는 안 되지요. 그러니까 허구가 아닌 ‘허구적’이라는 표현을 쓰는데 구태여 그런 말을 할 필요가 있겠어요? 수필에 허구를 쓰면 안 된다는 것이지 수필가가 허구를 쓰면 안 된다는 것은 아니예요. 수필가도 허구를 쓰고 싶으면 허구의 문학인 시나 소설을 쓰라는 거죠. 수필가라고 꼭 수필만 고집할 필요가 있겠어요?
이것은 50여 년 전 사빙영 교수가 한 말인데 지금 나도 그렇게 말해요. 수필은 진실해야 한다. 감동이 있어야 한다. 따뜻해야 한다. 수필은 정(情) 사(事) 이(理)가 있어야 하는데 그 중에 정(情)이 바탕인 문학이야. 이 정이 감동을 주는 거잖아요. 중국에서는 수필이 ‘중년의 문학’이라는 말은 없어요. 수필은 나이와 아무 상관없는 문학이야. 나도 20대 청년에 수필을 썼잖아. 수필은 체험의 문학, 사실의 문학인 만큼 나이나, 허구로 본질을 흔드는 시험적인 얘기는 하지 말자.
수필은 원심(圓心)이요 로터리다. 어디로든 갈 수 있다. 그렇게 사통팔달한 곳에 중년과 늙은이만 모여서야 아니 될 말이다. 출발이요 완성이래도 무방하다. 왜 나이를 따지랴! 원숙한 글을 쓰기 위해 중년을 기다린다면 몰라도 그때라야 쓸 수 있다면 어불성설(語不成說)이다. 소년 소녀도 당연히 이 대열에 서야 한다.
―허세욱 ‘어록(語錄)으로 쓴 수필론’ 중에서
선생님의 이야기는 끝이 없었다. 식사가 끝나고 우리는 선생님 댁에 잠시 들르기로 했다. 역삼동에 30년을 사시다 이곳 서초동으로 이사를 온 지 5년째라 하셨다. 아파트 입구로 들어가는 대로에는 맞은편 대형 유리거울처럼 만들어 놓은 원형벽 분수대와 연결된 육교가 인상적이었다. 아파트 주민은 이 육교를 건너서 예술의 전당이나 우면산으로 산책을 많이 간다고 했다.
선생님 댁은 20층이라 우면산이 안고 있는 예술의 전당이 한눈에 다 들어왔다. 복잡한 길은 보이지 않고 녹음이 우거진 우면산이 눈의 피로를 덜어 주며 먼 풍경으로 고요하게 들어왔다.
선생님의 서재에 들어서니 오른쪽에 대형 중국 지형도가 걸려 있고, 옆에는 두 따님의 어릴 적 사진이 아닌가 착각할 정도로 섬세하게 십자수를 놓아 만든 액자가 걸려 있었다. 그 앞에는 선생님의 부모님 초상화가 있었다.
“이사 오기 전, 전문 서적 만여 권 정도는 모교에 기증을 했어요. 한글 서적은 고향으로 보냈고. 그리고 중국 현대문학관에 제 코너가 따로 마련되어 있어요. 그래서 학술 서적이나 나와 관련된 자료가 되는 모든 책들은 다 그 몇 군데로 보냈어요.”
지음(知音) 고사를 생각하다
선생님의 서재 베란다를 비롯한 집 안 곳곳에 그림이 많았다. 응접실 벽의 매화 수묵화에선 따뜻한 기운이 흐르고, 식탁 앞의 해돋이 그림은 웅대한 기운이 넘쳤다. 내실로 가는 벽에는 처마에 복(福)자가 거꾸로 매달린 그림도 있었는데 집들이 선물로 받은 것이라 했다. 그리고 걸지 못한 더 많은 그림이 있는데 모두 선생님의 50년 중국 지기(知己)인 화가 ‘초과(楚戈)’의 것이라 했다.
초과는 선생님께서 대만으로 유학 가서 나흘째 되는 날, 유명한 중국 시인의 댁에서 만난 바로 그 젊은 시인이라고 했다. 그는 중국의 고고학자에다 시인, 화가라고 했다.
―이 친구가 중국에서 유명한 시인이에요. 내가 중국을 가거나 친구가 한국에 오거나 하면 꼭 만나고, 저 액자도 이사를 했다니까 선물로 보내 준 거예요. 중국에서는 ‘복(福)’자를 저렇게 거꾸로 매달아 놓으면 복이 들어온다는 믿음이 있어요. 다른 그림들과 달리 아주 현대적인 그림이죠.
이 친구 덕분에 중국의 시인을 참 많이 알게 됐어요. 매일 시인들을 끌고 다녔으니까. 그러니 매번 하는 이야기가 시 이야기였고. 그들과 어울리다 보니 나도 자연스럽게 시에 물들게 되었어요.
처음 인사를 드릴 때 선생님은 김시헌 선생님과 글로 만난 것까지 합하면 근 40년인데 그 우정에 대해서 좀 쓰면 좋겠다고 하셨다. 그런 것처럼 국적도 다른 두 분이 반세기를 변함없이 이어 온 우정에 우리는 깊은 감명을 받았다. 이렇게 오래고 깊은 선생님의 인간관계는 선생님의 올곧은 인품을 대변하는 것이기도 했다.
노경애가 카메라 앵글을 잡을 때마다 자꾸만 뒤로 빠지려는 김시헌 선생님을 선생님은 선생님이 계셔 빛이 더 난다며 ‘증광(增光)’이라고 했다. 지음(知音) 고사를 생각하게 하는 선생님의 문심(文心)과 문정(文情)의 향기에 흠뻑 취하는 느낌이었다.
속열하일기
우전차와 예쁘게 자른 파인애플을 사람 숫자대로 내오시는 사모님은 자주보랏빛이 잘 어울리는 미인이셨다. 차를 권하며 선생님은 최근에 나온 수필선집 『서적굴 디딜방아』를 일행에게 나누어 주셨다.
―내가 중국의 고전들을 50년 넘게 연구하면 우리나라에는 그런 작가가 없을까 그런 생각을 늘 했었어요. 중국 친구들이 너희는 이백, 두보에 대적할 만한 작가가 있느냐 물으면 대답이 궁했었는데 지금은 자신 있게 연암 박지원을 말할 수 있게 됐어요. 내가 연암보다 더 오래 살았어요. 연암이 ‘열하일기’를 쓴 것이 마흔에서 마흔 셋까지예요. 내가 5∼6년 동안 ‘열하일기’에 빠져 세독하면서 현지답사만 세 번을 했어요. ‘열하일기’를 읽어 보면 참으로 대단해요. 시, 소설은 물론이고, 천문학, 음악, 교량, 건축까지 없는 게 없이 다 나와요. 어떻게 남의 나라에 처음 가서 그 많은 말들을 다 현지 사람들처럼 알아듣고 표현할 수 있었는지 정말 놀라워요. 내가 열하일기 현지답사를 하면서 ‘속열하일기’를 일 년 동안 『신동아』에 연재를 했어요. 그게 얼마 전에 책으로 나왔어요.
내가 왜 이 얘기를 하느냐 하면, ‘열하일기’가 연암의 기행문이잖아요. 그러나 이 책 속에 들어 있는 내용을 보면 연암을 숭배할 만해요. 소품이 될 만한 수필도 있지만 수필, 소설, 평론, 르포 등 자유자재로 호방하게 장르를 넘나들면서 천의무봉, 종횡무진하게 상상력이 차고 넘치는 것을 볼 수 있어요.
그래서 하는 말인데, 연암 박지원 같은 대가가 있으니 우리 수필가들이 졸지 말자! 그 얘기예요. 요즘 우리 현대 수필의 문제점이 자꾸만 소품화, 여성화, 서정화되고 있는 거예요. 연암의 수필과는 대조적이에요. 우리도 연암을 본받아 살아 있는 글을 쓰자. 그 얘기예요.
선생님의 이야기에 빠져 있는 동안 밖이 점점 어두워졌다. 오후에 천둥 번개를 동반한 비가 올 것이라는 일기예보가 적중되고 있었다. 우리는 천 리 갈 길이 걱정되어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났다. 밖에 나오니 바람은 거세게 불었다. 김시헌 선생님과 강여울이 육교를 건너 원형벽 분수대에 가 보자고 했다. 육교 건너편은 작은 무대처럼 꾸며져 있었다. 이제까지 겨우 참고 기다렸다는 듯, 참을 수 없는 울음을 터뜨리듯 빗방울이 후두둑 떨어지더니 순식간에 커졌다. 서둘러 육교를 내려와 차에 올랐다.
손을 흔드는 선생님의 모습이 백미러에서 사라지자 비는 아예 마구 퍼붓듯이 쏟아졌다. 먼 산에는 번개가 번쩍였다. 우리의 수필문학사에 내려치는 우레 같은 갈채를 꿈꾸며 젖은 길을 미끄러져 왔다.
허세욱(許世旭) 선생님 연보
1934. 7. 26 전북 임실군 삼계면 덕계리에서 출생. 호 德溪
1947. 3. 삼계초등학교 졸업
1947. 4. 이리공업중학교 기계과 입학
1950. 10. 6·25 전쟁으로 학교를 중단하고 서당에서 2년간 한문 수업
1954. 2. 이리남성고등학교 졸업
1959. 2. 한국외국어대학 중국어과 졸업
1960. 8. 中華民國 敎育部 장학생으로 선발
1963. 3. 國立臺灣師大 大學院(中國文學 專攻)에서 문학석사 학위 받음
1968. 12. 위 대학원에서 문학박사 학위 받음
1961. 4. 대만 『現代文學』지에 중문시 ‘名字’와 ‘願’ 2편이 추천됨
1961. 8. 대만 『作品』지에 중문수필 2편 ‘一對樹’와 ‘避難’이 추천됨
1964. 9. 대만 중국문화대학교 동방어문학과 강사
1969. 2. 한국문인협회 시분과와 PEN 한국본부에 입회
1969. 3. 한국외국어대학교 중국어과 조교수로 부임
1972. 1. 한국외국어대학교 중국연구소 소장으로 10년간 겸직
1974. 3. 한국외국어대학 중어과 부교수에서 교수로 승진
1977. 12. 위 대학 외국어학부장을 겸임
1978. 7. 위 대학 도서관장을 겸임
1980. 12. 한국중어중문학회 회장에 피선
1982. 12. 아시아지역 중국작가협회의 執行委員 및 編輯委員에 피선
1983. 8. 풀 브라이트 교수로 선발, Univ. of Iowa 방문
1984. 3. Univ. of California, Berkely의 중국연구소 招聘硏究員
1985. 6. 중국현대문학학회 회장으로 피선
1986. 7. 미국 Standford大 중문과 방문교수
1986. 12. 고려대학교 중문과 교수로 전임
1987. 12. 중화민국 중앙연구원 방문연구원.
1987. 1~2. 중앙연구원 역사언어연구소 방문연구원
1988. 7. 홍콩중문대학 중문과 방문교수
1988~1992 중국학연구회장
1990. 1. 중국 西南師大 大學院 中國新詩學科 客員敎授로 초빙되어 강의
1991~2001 수필문우회 부회장
1991~1993 中國語文硏究會長
1997~1999 中國語文硏究會長
1992. 11. 世界中語作家協會 執行委員에 피선
1992. 12. 중국 서북대학 중문과 客員敎授로 招聘되어 ‘中國詩專題硏究’를 강의
1993. 1. 대만 국립한학연구원에 초빙되어 연구하면서 淡江大學 中文科에서 ‘中國新舊詩比較’를 강의
1994~현재. 復旦大學 中文科 顧問敎授
1995~현재. 『계간수필』 편집인
1998. 1~2. 중앙연구원 文哲硏究所 訪問硏究員
1993. 3. 대만 淡江大學 中文科 석좌강의
1999. 9. 고려대학교 중문과에서 정년퇴직
2000. 9~현재. 외국어대학원 초빙교수
2001. 10~현재. 수필문우회 회장
2005~현재. 서울디지털대학교 중국학과 석좌교수
학술서
1. 『李 杜 比較硏究』(중문), 臺北 : 臺灣國立師大, 1962.12.
2. 『韓中詩話淵源考』(중문), 臺北 : 黎明文化, 1968. 8.
3. 『中國文化槪說』, 서울 : 法文社, 1974. 11.
4. 『中國隨筆小史』, 서울 : 乙酉文化社, 1981. 11.
5. 『中國現代文學論』, 서울 : 文學藝術社, 1982. 6.
6. 『中國古代文學史』, 서울 : 法文社, 1986. 3.
7. 『中國現代詩硏究』, 서울 : 명문당, 1992. 6.
8. 『대륙문학 다시 읽는다』(공저), 서울 : 대륙연구소, 1992. 8.
9. 『中國文學紀行』, 서울 : 중앙일보사, 1995. 1.
10. 『中國近代文學史』, 서울 : 법문사, 1996. 8.
11. 『중국인 중국문화』, 서울 : 대한교과서, 1998. 3.
12. 『中國新詩論』(중문), 臺北 : 三民書局, 1998.8.
13. 『中國現代文學史』, 서울 : 법문사, 1999. 1.
14. 『中國現實主義文學論』(공저), 서울 : 법문사, 1994.
15. 『許世旭의 中國文學論』, 서울 : 법문사, 1999. 8.
16. 『두 얼굴의 中國文化』, 서울 : 중앙일보사, 2003.
17. 『허세욱의 漢詩特講』, 서울 : 효형출판사, 2007. 2.
18. 『속열하일기』, 서울 : 동아일보사, 2008. 3.
譯書
1. 『韓國詩選』(중문), 臺北, 文星書店, 1964.
2. 『春香傳』(중문), 臺北, 商務印書館, 1967.
3. 『漢文通論』, 서울 : 대한교과서, 1971.
4. 『壯子』, 서울 : 微文出版社, 1974.
5. 『中國現代詩選』, 서울 : 을유문화사, 1976.
6. 『뒷모습』(朱自淸 수필선), 서울 : 범우사, 1976.
7. 『半下流社會·臺北人』(趙滋蕃 白先勇 小說), 서울 : 三省出版社, 1978.
8. 『阿Q正傳』(魯迅小說選), 서울: 범우사, 1978.
9. 『徐廷柱詩選』(중문), 臺北, 黎明文化, 1978.
10. 『中國現代代表詩選』(상·하), 서울 : 정예원, 1990.
11. 『李白詩選』, 서울 : 혜원출판사, 1987.
12. 『中國古代名詩選』, 서울 : 혜원출판사, 1987.
13.『中國現代名詩選』(상·하), 서울 : 혜원출판사, 1987.
14. 『韓國詩選』(중문), 北京, 三聯書店, 1994.
15. 『小峴集』(金貞植漢詩集), 광주: 빛고을기획, 1999.
16. 『배는 그만두고 뗏목을 타지』, 서울 : 학고재, 2001.
17. 『한 움큼 황허 물』, 서울 : 학고재, 2002.
18. 朴木月詩選 『過客』(중문), 天津, 百花出版社, 2004.
19. 鄭芝溶詩選 『鄕愁』(중문), 天津, 百花出版社, 2005.
창작집
1. 中文詩集, 『藏在衣櫃裡的』 臺北, 林白出版社, 1971.
2. 中文詩集, 『雪花賦』, 台北, 聯經出版社, 1985.
3. 中文詩集 『東方之戀』, 北京, 三聯書店, 1994.
4. 中文隨筆集 『城主與草葉』, 台北, 林白出版社, 1988.
5. 中文隨筆集 『許世旭散文選』, 天津, 百花出版社, 1991.
6. 시집 『靑幕』, 서울, 一志社, 1969.
7. 시집 『땅 밑으로 흐르는 강』, 서울, 文村, 1980.
8. 시집 『바람이 멎는 곳』, 서울, 文學世界社 1989.
9. 시집 『성냥긋기』, 서울, 세손, 2003.
10. 수필집 『움직이는 고향』, 서울, 汎友社, 1976.
11. 수필집 『太陽祭』,서울, 五車書, 1981.
12. 수필집 『달이 뜨면 꽃이 피고』, 서울, 汎友社, 1983.
13. 수필집 『인간 속의 흔적』, 서울, 普成社, 1990.
14. 수필집 『돌을 만나면 비켜 가는 물처럼』, 서울, 화동출판사, 1994.
15. 수필집 『임대 마차』, 서울, 세손, 2002.
16. 수필선집 『먼 산이 가까워질 때』, 전주, 신아출판사, 1996.
17. 수필선집 『지팡이 소리』, 서울, 선우미디어, 1998.
18. 수필선집 『서적굴 디딜방아』, 서울, 좋은수필사, 2007.
19. 중문수필집 『移動的 故鄕』, 天津 , 百花出版社, 2004.
20. 중문시집 『一盞燈』, 天津 , 百花出版社, 2005.
21. 르포 『실크로드 文明紀行』, 서울 :대한교과서, 1998.
22. 르포 『中國文學紀行』, 서울 : 학고재, 2003.
編 著
1. 『中韓辭典』, 서울 : 微文出版社, 1973.
2. 『東洋의 名言』, 서울 : 微文出版社, 1975.
3. 『中國歷代詩選』, 서울 : 新雅社, 1983.
4. 『中國文集選讀』, 서울 : 國史編纂委員會, 1991.
5. 『韓中辭典』, 서울 : 民衆書林, 근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