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과같이 해서는 남 이상 될 수 없다.’
“제가 가장 좋아하는 말이예요. 예전이나 지금이나 저 뜻에 따라 살려고 노력하고 있고요.”
“제가 가장 좋아하는 말이예요. 예전이나 지금이나 저 뜻에 따라 살려고 노력하고 있고요.”
남 이상이 된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더욱이 남과 다르게 살아간다는 것 또한 쉽게 생각할 일은 아닌듯 하다. 하지만 그에게 있어 ‘최연소 국가대표’라는 황금기, 후보선수라는 침체기, 다시 득점왕이라는 전성기, 갑작스런 은퇴, 사업 실패 등 많은 삶의 기복들이 그를 지금 더욱 단단하게 만들었을 것이다. 소위, ‘남다른 삶’을 통해 남의 이상이 되려 자신을 채찍질해온 포항스틸러스의 원년 스타 조긍연(현 선문대 축구감독)을 이번 ‘K-리그의 전설’에서 만나보았다.
포항의 어느 한적한 주택가. 그는 현재 선문대학교 축구감독으로써 올해 초 자신의 팀을 대학정상( 대학춘계연맹전 1, 2학년 경기)에 올려놓으면서 새로운 지도자로써의 방아쇠를 당겼다. 그런 조긍연의 현재가 있기까지, 축구인생에 있어 큰 장면들을 그의 이야기와 더불어 풀어 나가보고자 한다.
개구리의 힘
초등학교 4학년때부터 축구를 하기 시작한 조긍연은 축구를 시작하게 된 계기에 대해 묻는 질문에 ‘좋아서요.’ 라며 짧지만 단숨에 공감이 가는 대답을 들려주었다.
“그냥 축구가 좋았어요. 주변에는 권유로 축구를 시작한다거나 하는 경우도 많았지만 저는 순수하게 축구가 좋아서 시작하게 되었어요. 물론 어려서 운동선수를 한다는 것은 집안사정에서도 쉽지않은 결정이었겠지만 저희 아버지께서는 저에게 많은 힘이 주셨죠. 당시에는 학부모들이 축구하는 자녀들 따라 다니며 이것저것 챙겨주는 것이 흔하지 않았는데 저희 아버지께서는 항상 곁에 다니시면서 뒷바라지 해주시고 경기도 봐주셨어요. 정말 아버지께 감사합니다.”
그는 축구를 위해서 초등학교를 전학할 정도로 축구에 대한 열정이 남달랐고, 또 5남매를 돌보시는 아버지께서 직접 그를 따라다니며 적극적으로 지원해주었다고 한다. 그런 아버지의 사랑과 조긍연의 열정이 K-리그 한 시절을 황금기로 만든 원동력은 아니었을까. 우리 나라를 대표하는 각 스포츠계의 선수들의 가장 큰 힘은 선수들보다 더 고생하는 부모들이라는 점이 다시한번 머릿속에 새겨지는 순간이었다.
“개구리 많이 먹었었죠.”
갑자기 뜬금없이 그는 개구리 이야기를 꺼냈다.
“제가 자라날 때는 먹을것이 없어서 그랬던것도 있겠지만 개구리를 정말 많이 먹었어요. 저만큼 개구리 많이 먹어본 사람도 없을 걸요.(웃음) 개구리를 잡는다는 것이 지금은 불법이지만 당시에는 큰 문제가 없었거든요. 그렇게 먹게 된 것이 중학교 3학년때까지 계속되었으니 제 유년시절 축구의 힘은 개구리에서 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죠. 개구리 많이 있는 철에는 세끼식사 전부를 개구리탕으로 먹었으니 말이죠.”
폭발적인 스피드와 강력한 슛팅의 기본이 되는 그의 다리가 ‘개구리의 영양’으로 발달되었다는 이야기부터 시작해서 자세한 조리법까지 설명하는 그의 얼굴에서 80년대 후반 카리스마의 온상 ‘털보’의 이미지는 어느덧 오래 알아온 동네 아저씨 같은 편안함으로 바뀌어져 있었다.
단한장의 졸업장 그리고 상경기.
“ 저는 전라북도 옥구가 고향입니다. 그곳에서 태어나 발산초등학교 3학년때부터 축구를 시작했어요. 그 다음에 옥구중학교로 진학을 했다가 군산제일중학교로 전학을 가면서 본격적으로 축구선수 생활에 몸을 담은 것이죠. 그렇게 해서 고등학교로 진학하기 바로 직전까지 살았었어요. 그 다음 이야기부터는 서울생활인데 가족이 이사를 한 것이 아니라 제가 서울 영등포공업고등학교로 스카웃되면서 저의 서울 생활은 시작 되었죠.
중학교 졸업식이었어요. 당시 영등포공고 감독님과 이상용감독(현 K-리그 주심)님께서 오셔서 트렁크 하나를 여시더니 짐을 싸서 오라는 거예요. 얼떨결에 짐을 싸서 트렁크에 넣으니 서울로 가자고 그러시더군요. 기분이 어떠했을까요. 고속버스를 타고 서울로 가는데 엄청 기대가 되다라고요. 서울로 간다는데, 게다가 이름만 들어봤던 영등포로 간다던데.. 물론 도착해서는 기대만큼 실망도 컸지만요. 제 머릿속에 있던 서울의 이미지와는 달랐어요. 학교도 무슨 큰 공장같았다고 할까요? 작은 학교만 보다가 큰 학교를 보게 되어서 그랬던 것도 있겠죠.”
그렇게 졸업식날 졸업장도 받지 못한채 상경한 조긍연은 1학년으로 입학하자마자 주전 공격수로 기용된다.
“영등포공고에 축구선수가 60명이었어요. 1진, 2진, 3진까지 있을 정도였으니 얼마나 많았는지 아시겠죠? 그런데 신입생이 입학하자마자 1진으로 뛴다고 해봐요. 그 모습을 보는 선배들이 어떻겠어요? 얄미워서 그런것도 있겠지만 당시에는 운동선수라고 함은 선배들로부터의 체벌이 생활이었어요. 체벌이 조금 약한 팀 경우에는 일주일에 두세번 정도. 심한 팀은 매일 맞았었는데 우스갯소리로 안맞으면 잠이 안오더라고요. 뭐랄까. 저녁에 운동 끝나고 안 맞으면 계속 불안했었거든요. 반대로 운동이 끝난 뒤 딱 맞고 나면 ‘아. 오늘도 하루 마감하는구나.’ 라는 생각과 동시에 개운하더라고요. 잠도 잘오고. 장담하건데 당시에 안 맞고 운동한 사람은 없을겁니다.”
그것이 지금 한국축구 정신력의 바탕이라고 말하는 그는 선배들과 끈끈한 정을 이어가던 그때를 잠시 그리워하는듯 했다.
“무조건 나쁘다고 할 수는 없어요. 요즘에는 그런 체벌이 거의 없어졌다고 생각해요. 다행이라고 생각할수도 있지만, 그만큼 선수들의 정신력도 다소 가벼워진게 사실이고요. 지금 선수들 지도하면서 느끼는 건데 어린선수들이 너무 약하다고 생각해요. 체력은 물론이고 특히 정신력이요. 환경적인 측면에서는 아주 좋아요. 자신들이 정신만 바로잡고 노력만 한다면 얼마든지 크게 성장할 수 있는데도 그렇게 하지 않는 선수들이 너무나도 많다는 것이죠. 조금만 힘들어도 회피한다거나 말이예요. 그중에 정말 열심히 하는 ‘노력파’ 선수들이 박지성같은 스타가 될 수 있는 것이고요. 축구에만 매진할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되어있는데도, 많이 아쉽죠.”
서울 영등포공고 입학을 하면서 본격적인 선수생활을 시작했다고 말하는 도중 그는 자신이 ‘국졸(초등학교 졸업)’이라며 운을 띄우는 것이었다.
“졸업장이 초등학교 졸업장 밖에 없어요. 항상 졸업을 하는 순간에는 졸업식장에 없었거든요. 중학교 졸업식때는 갑자기 찾아온 고등학교 감독님 등살에 급하게 짐을 싸서 서울로 와야했고요. 고등학교 졸업식때는 국가대표선수로 선발되어서 졸업식에 참석 못했고. 대학교 졸업식때에도 또 다른 이유에서 참석 못했었어요. 그러니 정말 졸업장이 하나밖에 없죠.(웃음)”
자신의 졸업장이 하나밖에 없다며 겸손함을 비춘 그였지만 사실은 뛰어난 기량으로 갖추어진 그를 여러곳에서 급하게 데려가려던 것에서 비롯된 사건들이었다. 여기서 고등학교 졸업식에 참석하지 못한 이유가 국가대표 발탁때문이었다는 말에 귀가 솔깃했다.
고교생 국가대표와 시련.
1980년 춘계전국고교축구연맹전. 조긍연이 속한 영등포공고는 다름아닌 전년도(79년) 우승팀 이리고등학교와 결승전에서 만나게 된다. 비록 그가 결승전까지 올라오며 뽑은 골은 3골이었지만 빠른 스피드와 강력한 슛팅으로 레프트윙을 말끔히 소화해 내던 그였다. 그런 모습은 당시 한국 국가대표 축구팀의 김정남 코치의 눈에 들게 되면서 최연소 국가대표에 발탁되게 된다.
“많은 선배들에게 정말 미안한 마음이었어요. 당시 저보다 더 뛰어나고 기량있는 선수들도 많았는데 운이 좋았는지 제가 발탁이 되었어요. 비록 선발된 후에 많은 시련을 겪었지만요.”
그 당시 최연소 국가대표선수로 알려져 있던 선수는 차범근(선발나이 18년 11개월)이었다. 하지만 포철의 최순호(18년 4개월)가 그 최연소기록을 갱신하게 되고, 이어 조긍연은 비록 최순호와 같은 시점이지만 최순호는 이미 청주상고를 졸업. 고려대에 입학한 뒤였기에 고교생으로는 조긍연이 첫 국가대표였던 셈이다.
그런 화려한 신고식을 치른 뒤 합류하게 된 국가대표팀. 평균 7~8세 연장자인 선배들과 부딪히며 훈련하기란 어린나이에 쉽지가 않았다고 한다. 그렇게 지내온 대표생활 1년동안 많은 시련을 겪으며 결국 대표팀 밖으로 힘겹게 걸어나오게 되었고, 그러한 슬럼프 과정은 고려대 재학시절 4년동안 그를 꾸준히 힘들게 했다고 한다.
하지만 흐린 날이 있으면 갠 날도 있는 법. 그는 고려대학교를 졸업하고 85년. 포항제철로 입단을 하면서 그동안 움츠렸던 그의 날개를 다시 펴기 시작한다.
“ 85년에 포항제철로 처음 들어갔어요. 그곳에서 92년 울산현대 소속으로 1년 뛰기 전까지 계속 포철에 있었죠. 당시의 포철 멤버들이 지금 봐도 베스트 멤버였다고 생각해요. 3년 연속 포철에서 득점왕이 나올 정도였으니 말이죠.”
프로축구의 황금기, ‘축구선수 조긍연’의 황금기.
80년대 후반 프로축구 최고의 준족을 꼽으라면 단연 박경훈, 변병주를 꼽고는 한다. 하지만 당시 스포츠신문 일면을 장식하던 젊은 피의 준족 조긍연도 꼽지 않고서는 안 될 듯하다. 프로 데뷔후 100미터를 11초 5의 속도로 상대방 골문 앞을 누비던 그는 제 1의 전성기
인 고교시절의 11초 7보다 더 빨라진 속도를 자랑하며 제 2의 전성기의 시동을 걸었다. 조긍연은 85년부터 시작한 프로선수 생활에서 통산 153출장 38득점 7도움을 기록한다.
“세번의 해트트릭 기록을 세웠어요. 그중 두 개는 제가 득점왕을 받았던 89년이었고 나머지 하나는 그 지난해인 88년이었어요. ”
그러했던 80년대 후반 그의 전성기에서 그는 총 3번의 해트트릭을 따내며 ‘최고의 스트라이커’ ‘특급소방수’라는 별칭을 얻게 된다.
“89년에는 뭐랄까. 골을 넣겠다는 투지에 불탔었어요. 무조건 3골을 넣어야 하겠다는 집념으로 기회만 찾아냈던 것이죠. 축구에 있어서 슛은 자신이 골을 성공시키려는 의지가 있을때 할 수있는 거예요. 골을 꼭 뽑아내겠다는 의지 없이는 슛을 하지도 못하는 거예요. 안정환선수가 골을 잘 넣는다는 것은 누구나 인정하는 거죠. 그만큼 골을 넣을 자신이 있어서 슛할 기회만 노리는 거예요. 그것이 스트라이커니까요. 아무튼 저 역시도 89년 당시 출장만 하면 무조건 3골을 넣겠다고 이를 악물고 들어갔었어요. 그렇게 해서 39번 출장에 20골을 넣게 된거죠. 또 그러다 보니 해트트릭도 하게 되었고요.”
그렇다. 결국 전성기인 89년에 그는 일을 터트리고 만다. 39출장 20득점 117슛팅. 유럽리그 진출의 가능성까지 언론에 보도될 정도로 ‘특급소방수 조긍연’은 당시 축구계의 가장 큰 화제거리였다. 혹자의 말로는 한달동안 스포츠 신문에 ‘조긍연’이라는 이름이 하루도 빠짐없이 나온 적이 있다고 한다. 하지만 처음부터 그의 전성기는 아니었다. 데뷔첫해인 85년에 그는 89년 득점왕과는 비교될만하게 2골만을 기록한 채 한해를 마감해야했다. 연봉삭감과 질책. 아니 무엇보다 그를 자극했던 것은 가슴속의 또 다른 목표였을까. 86년이 시작하자 그는 화려하게 부활하기 시작했고 최고점인 89년에 드디어 ‘득점왕’에 등극하게 된다. 또 차범근 감독을 통한 분데스리가 진출 가능성이 연일 언론에 보도되는 등 크나큰 화제거리를 매일 쏟아냈다. 하지만 그 화려했던 시점을 기해서 그는 선수인생의 마지막을 향해 어느덧 내려가기 시작했다. 해외진출은 생각처럼 쉽게 이루어지지 않았으며 한해한해 지나며 어느덧 30대로 들어선 조긍연. 그를 기다리고 있던 것은 92년 프로축구선수생활 은퇴. 91년 친정팀 포철을 떠나 울산현대로 이적했지만 갑자기 찾아온 허리디스크에 그는 등번호를 떼어내고 그라운드를 떠나게 된 것이었다.
“생각하시는 만큼 저는 그렇게 대단한 선수는 아녜요. 그냥 한때 득점왕 한번 받은 것이지 모두가 알고 인정하는 그런 선수는 아니라고 생각해요.”
자신이 대단한 선수가 아니었다는 그의 말에는 겸손함이 묻어있었다.
내 인생 축구여. 잠시만 안녕.
축구를 은퇴한 조긍연. 긴 축구인생을 보면 잠깐의 휴식기였지만 당시를 회상하는 그는 조금 가라앉은 분위기였다.
“은퇴하고 나서 사업을 한번 해봐야겠다고 느꼈어요. 제가 프로선수생활을 하면서 부모님은 이제 생업에서 물러나시고, 동생들은 이제 시집, 장가갈 나이가 다되어가고. 어쩌겠어요. 제가 동생들 결혼을 시켜야 할 상황인데. 그것도 쉬운 일이 아니잖아요. 그래서 사업을 시작하게 된 것이죠. 축구할 때처럼 열심히만 한다면 안 될 일이 뭐있나.. 그런 생각으로 시작했었어요. 그런데 쉽지가 않더라고요. 고생, 정말 많이 했죠. 레스토랑 운영 할 때는 정말 2년 동안 하루도 안 쉬고 일만 해봤어요. 그런데 세상은 만만하지가 않았어요. 지금 생각해보면 그때 비싼 돈 쓰고 좋은 사회 경험한 것 같아요. 권리금도 모르고 사업을 시작했을 적이니 얼마나 고생했겠어요. 사람 잘못 만나서 속기도 하고 말이죠.
그렇게 6년을 축구에서 떨어져 살았어요. 그사이 찾아온 IMF 위기에 제 사업도 기울기 시작해서 그만 정리하고 말았죠. 그 힘든 시기를 1년정도 더 보내다가 당시 포항스틸러스 최순호 감독의 추천으로 포항팀 코치부터 지도자 생활을 시작하게 되었어요. 사실 지도자 경험도 없는 나를 코치로 기용해준 최순호 감독에게 정말 고마운 마음뿐이였어요. 또 그만큼 열심히 했었고요.“
결국 그는 축구로 돌아오게 된 것이다. 누구나 인생에 있어 크고 작은 외도는 있듯이 현재 축구 지도자의 길을 열심히 가고 있는 조긍연에게도 그것은 인생을 다시 보기위한 잠깐의 외도였나 보다. 어딜 갔다가 왔던지 초록색 그라운드에 다시 서있는 그에게 축구란, 삶의 전부이며 미래를 향한 희망이었을 것이다. 3년간 지속된 포항스틸러스의 코치생활. 그는 그에게 다가올 또 하나의 도전을 이미 알고 단단한 마음가짐을 하고 있었으리라.
더 큰 세상을 향해, 브라질 지도자과정 연수시절.
“2000년에 포항에서 코치로 들어갔다가 3년 지내고 나와서 그 다음해니 2003년이네요. 그해 초 AFC B급 지도자 자격증을 따고 바로 브라질로 축구지도자 연수를 떠났어요. 그곳에 브라질 1부리그 과라니라는 팀에서 선수들과 먹고, 자고 생활하면서 7개월을 살다가 왔죠. 일부러 교민들이 없는 곳을 찾아서 들어갔는데 당시에는 비장한 각오로 그랬겠죠. 연수차 간 여정이었지만 아무래도 언어의 장벽을 넘기가 정말 힘들더라고요. 축구는 말없이 해도 되지만 생활과 공부는 그렇지 않으니깐 말이죠. 통역을 해주는 학생이 일주일에 한번정도 구단에 찾아왔었는데 그 외의 시간에는 거의 혼자서 의사소통을 해결해야 했어요. 그래서 저는 팔뚝에다가 ‘밥먹는 시간 몇시입니까.’ 등의 회화를 적어놓고 그때그때 물어보곤 했어요. 또 갈 때 가져간 사전도 큰 몫을 했고요. 교민이 없어 일단 저와 이야기 할 수 있는 사람은 없으니 그렇게라도 대화를 했어야 했어요. 답답하잖아요. 그렇게 힘들게 지내다가 한달여쯤 지나서는 어느정도 의사소통도 되고 하니 나중엔 거의 코치, 감독처럼 선수들과 생활했어요. 아주 열심히 하는 모습을 보이니깐 그쪽에서도 인정을 해주더라고요. ”
그렇게 약 7개월간의 국외생활을 마친 조긍연은 고국으로 돌아와 인생 처음으로 감독직을 맡게 되는데, 그 팀이 2006년 춘계대학연맹전 1,2학년 경기에서 우승을 차지한 선문대학교 이다. 그는 브라질 축구유학시절 체득한 4-4-2 시스템을 첫 그의 팀인 선문대 축구부에 적용시키기 시작했고 그 효과는 취임 2년 5개월 뒤 춘계대학연맹전에서 빛을 발하게 된다.
왕년 득점왕 지도자.
아니, 그보다 현재에 충실한 생각하는 지도자.
“주는 공만 가지고 축구를 하는 선수는 필요가 없어요. 아무리 센터포워드라고 할지라도 똑같이 수비수인거죠. 인원이 11명인 팀이 실제로는 10명이 뛰는 팀일수도 있는것 처럼 협력수비를 저는 강조해요. 자기만 편하게 하려는 축구선수는 팀전체를 힘들게 하니까요.”
현재 선문대 축구감독을 맡고 있는 그는 감독이라는 자리만은 그에게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생각하고 공부하는, 또 배운 것을 적극적으로 시도하려는 지도자가 되기 위해 그는 끊임없이 노력하고 있었다.
“작년 KFA 1급, AFC A급 지도자 자격증을 취득했어요. 한달여간 합숙하면서 따낸 성과였죠. 그리고 현재는 스포츠 심리학에 대해 공부하고 있어요. 석사과정을 밟고 있기도 하고요. 스포츠에 있어서, 좁게는 축구에 있어서 선수들의 심리를 활용할 수 있다면 팀은 팀 자체 그이상의 능력을 발휘한다고 알고 있어요. 그런 것들을 실제 저희 팀에 적용해서 여러 가지 시도도 해보고 있어요. 그것이야 말로 살아있는 공부가 아닐까하네요.”
“많은 학원축구 관계자 분들께는 항상 죄송스럽지만..” 이라고 말을 꺼낸 그는 한국 축구의 학연과 지연을 벗어난 실력위주의 선수선발을 고집하고 있다고 했다.
“고등학교 선수들 스카웃 해오는 것이 제가 하는 일중에 가장 힘든일 같아요. 그 스트레스 때문에 실신해 쓰러진적도 있고 말이죠. 또 좋은 선수만을 선발한다고 해서 끝이 아니라 그 선수들을 조직력으로 엮는 작업 또한 저의 몫이예요. 그렇게 힘든 과정을 거치긴 하지만 그렇게 만들어 놓기만 한다면 그 다음부터는 굳이 감독이 필요가 없더라고요. 제가 할 일은 아마 거기까지 인가봐요. 이번 우승한 것도 몇 번의 고비만 제가 잘 넘겨주면 그다음부터는 선수들끼리 하나가 되어서 스스로 하더라고요. 마지막에는 우승까지 말이죠.”
이미 늦어버린 유럽진출의 꿈. 하지만..
“전성기 때 차범근 감독의 권유로 분데스리가 어느 팀의 입단 제의가 들어왔어요. 당시 실력으로는 주변에서도 ‘가능성있다.’ 라고 말하는 시기였으니 자신있게 새로운 시작을 위해 도전을 하게 되었던 것이였죠. 결국 서독으로 건너가 피지컬 테스트를 받았지만 결과는 아쉬움이었어요. 아무리 날고 긴다고 하더라도 높은 해외리그의 벽을 제가 넘지 못하더라고요. 물론 29살이라는 적지 않은 나이가 있어서 그런점도 조금은 영향이 있었겠지만 실력면에서도 너무나도 부족했었거든요.”
<자료제공 - 일간스포츠, 조긍연제공>
지금은 박지성, 이영표 등 여러 선수들이 활약하고 있는 유럽리그. 차범근, 허정무를 이어 드디어 세 번째 유럽진출이 성사된다는 팬들의 기대는 그저 아쉬움으로 남게 되었다. 조긍연은 축구를 시작할때부터 유럽리그만을 바라보며 뛰었다고 한다.
“조금 실력을 가지고 있다고 하면 국가대표는 한번씩 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하지만 해외 빅리그의 그 함성안에서 뛴다는 것은 나라를 대표하는 것 이상의 일이거든요. 얼마전 대학춘계연맹전 전에 포메이션 분석을 위해서 영국에 잠시 갔다 온 적이 있어요. (박)지성이가 있는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경기가 있는 날이었는데 직접 가서 봤죠. 가득 메워진 관중석, 녹색 그라운드, 하프라인에 꾸며놓은 문양들을 보니 제 옛날 꿈들이 새록새록 생각나더라고요. ‘아..내가 진정 뛰고 싶었던 곳은 저기였는데..’ 라면서요. 하지만 이제는 이미 지도자의 길을 왔으니 다른 목표를 향해 달려나가야죠. 다행히도 저는 K-리그 관중들의 함성안에서, K-리그 녹색 그라운드에서 아름다운 전성기를 만들었으니 그것만으로도 꿈 반쯤은 이룬 것 아닌가요.”
조긍연은 지금 제 3의 전성기를 위해 준비하고 있다. ‘유럽리그에서의 축구 지도자’ 어쩌면 많은 사람이 불가능하다며 혀를 찰지 모르지만 이미 그의 질주는 시작되었다.
1부 끝.
K-리그 명예기자 윤진식
(자료제공이 명시되지 않은 사진들은 조긍연 감독이 직접 제공 해주었음을 알려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