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동! 천년이 살아 숨 쉬는 흔적
경상북도 안동은 천년의 세월이 살아 숨 쉬는 있는 문화재의 보고이다.
고려 오백년과 조선 오백년의 흔적이 현재의 사람과 더불어 살아가고 있는 곳이다. 경주가 신라 천년의 세월을 깨어진 기왓장이나 무덤에서 간직하고 있다고 하면 안동은 천년의 시간의 흔적을 누각이나 정자 서원 종갓집의 골기와 속에 선비들의 정신세계와 더불어 오늘까지 살아 숨 쉬고 있는 곳이다. 안동은 어느 마을에 가더라도 정자 하나쯤은 쉽게 만날 수 있고 퇴락되기는 했지만 종갓집과 고(古)기와의 자태를 쉽게 볼 수 있다. 전국 어디에서도 쉽게 만날 볼 수 없는 벽돌로 쌓아 올린 전탑을 어렵지 않게 만날 수 있고, 문화재를 원인으로 생겨 난 지명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이를테면 절과 탑이 있다고 탑리, 절골, 조탑동, 석탑리, 왕이나 왕자의 태를 묻었다고 태장, 당집이 있었다고 당골, 당고개, 서당이 있다고 서당골, 5형제 대과 등과집인 풍산김씨 집성촌인 오미동, 광산김씨 5부자(五父子) 등과와 칠 군자가 모여 있다고 오천 군자리(君子里), 큰 무덤인 능이 있다고 능골 등 문화재와 관련한 지명이 여러 곳 있다.
안동의 기행을 하면서 하회마을이나 봉정사 도산서원 등 이름난 명소 몇 곳을 돌아보았다고 안동 문화기행을 했다고 이야기 하면 큰 오산이다. 한마을 건너 종가집이요 그 종가에 따른 정자나 부속 풍류들은 책 수 십 권으로도 설명이 모자라는 곳이 안동이다. 종갓집 마다 내려오는 내력과 문화가 다르고 법식이 다르다. 제사 차리는 법, 차례 지내는 법, 음식문화와 법도가 다르다. 묘 쓰는 법도까지 다르다. 산과 강이 수려하여 한 언덕을 돌면 정자가 나타나고 절집과 서원이 어느 골에 가도 쉽게 접할 수 있다. 집안 마다 정자가 있고 사당이 있고 불천위 제사가 있다. 고가, 무덤, 정자 하나하나에도 거기에 걸 맞는 유래와 사연이 묻혀있다.
안동 문화기행 중 유난히 멋스럽고 빼 놓을 수 없는 곳이 정자이다. 정자는 용도가 다양하다. 지역의 유명한 선비들의 사색과 자기성찰의 공간이기도 하며 후학들을 가르치는 강학의 공간으로도 사용 되었다. 먼 곳에서 찾아오는 벗들과 풍광을 즐기며 시회나 연회를 베푸는 장소로도 이용되는 낭만과 정신세계의 흔적이 묻혀있는 곳이기도 하다. 옛 선비의 풍류와 체취를 엿볼 수 있어 좋고 시인 묵객들이 머무르며 풍광을 노래한 시판들이 그 면모를 자랑한다. 정자기 선 곳은 어느 곳이나 풍광이 수려하다. 낙강과 반변천이 합수되어 낙동강을 이루면서 안동은 명실 공히 산과 물이 조화롭게 어울리는 물의 고장이 되었다. 그 풍광은 처처에 누각과 정자를 서게 하였다. 안동에는 많은 정자들이 있지만 그래도 감탄사가 터져 나오며 오래 기억에 각인된 정자로 낙암정(洛巖亭)과 만휴정(晩休亭)을 꼽을 수 있다.
먼저 낙암정(洛巖亭)이다. 낙암정은 낙동강이 산굽이를 후려치면 만들어낸 단애 중간쯤에 제비집처럼 매달려 있는 정자이다. 안동의 서남쪽의 남후면 단호리 건지산 자락 절벽 중간쯤에 위치한 정자이다. 안동에서 대구방향 국도를 따라 6킬로미터 이동하다 보면 유리한방병원으로 내려가는 우측 출구가 나온다. 이 출구를 통하여 눈썹같이 이뿐 미천강(眉川江)을 좌측으로 두고 4킬로미터 정도 직진하면 비교적 너른 들이 나온다. 그 들길을 가로질러 강둑을 따라 2킬로미터 정도 진행하면 미천강과 낙동강이 합수되는 지점이 나타나고 너른 백사장을 형성한다. 일부는 늪 지역이 되어 수초와 철새들의 보금자리로 자리 잡았다. 이내 강줄기가 길을 막고 길은 산 중턱의 단애(斷崖)를 따라 오르고 있다. 낙암정으로 오르는 길이다. 낙암정(洛巖亭)은 1987년 경상북도 문화재자료로 지정된 정자로 흥해(興海)배씨(裵氏) 낙암(洛巖) 배환(裵桓, 1379-?)공의 정자로 정면3칸 측면2칸 팔작지붕 모양의 목조 와가이다. 배환공은 백중당(柏竹堂) 배상지 선생의 둘째아들이다. 벼슬은 황해도 관찰사, 공조참의, 전라도 관찰사를 역임하였다. 낙동강 건너편에서 절벽에 매달린 낙암정을 바라보는 풍광도 절경이지만, 낙암정 누마루에서 절벽 아래로 내려 다 보는 풍광이 더 일품이다. 멀리 휘돌아 나가는 낙동강의 강줄기와 아득하게 펼쳐진 엄실 들이 건너 내려 다 보인다. 측면으로 바라보이는 깎아 세운 듯 자주 빛 감도는 단애(斷崖)를 병풍처럼 둘러친 상락대(上洛臺)를 바라보는 것은 어디에도 비기지 못하는 즐거움이다. 상락대는 고려 말 상락군 김방경장군과 연관된 수 백길 절벽으로 푸른 낙동강물길을 아랫도리에 두르고 하얀 백사장을 내려 다 보면서 우뚝 서 있다. 또한 정자로 오르는 호젓한 산길을 걷는 것도 즐거움이다. 낙암정으로 가려면 단애를 깎아 드러난 산길의 작은 구비를 여럿 돌아 올라야 하는데 절벽 꼭대기로 오르면서 훤히 틔어진 낙동강의 구비치는 물줄기를 시원하게 내려 볼 수 있는 것도 또 다른 즐거움이다. 또한 절벽 중간 쯤 위치한 정자의 누마루에 앉아 조용히 풍광에 몰입해 보면서 옛사람들의 풍류를 상상해 보는 것도 호사로운 일이다. 귀암 김굉이 쓴 “낙암정중건기”의 내용을 빌어보면 그는 낙암정의 아름다움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 문을 열고 내다보면 왼쪽으로는 상락대 푸른 절벽인데 절벽이 강심(江心)에 병풍을 친듯하다. 오른쪽에는 짤막한 산록인데 정자 터를 팔을 굽혀 안은 듯하고 그 밑에 강물은 유유히 수리를 흘러 절벽 밑에 소(沼)를 이룬다. 바람이 고요하면 물결도 잔잔하여 상하의 하늘빛은 은하수가 비치듯 푸르른 절벽이 거꾸로 물속에 잠길 듯 완연한 크나큰 거울을 이룬다. 넓고 넓은 모래밭과 망망한 큰 들판에 갈매기 떼 울며날고 어부들의 피리소리를 집 밖에 나지 않아도 한눈에 보고들을 수 있다. 강 건너 봉정, 학가, 풍악(鳳停, 鶴駕, 豊嶽)의 모든 산들이 빙 둘러 앞으로 보이며 아침저녁으로 일어나는 운연(雲煙)이 천태만상을 이룬다.”라고 그 풍광을 노래하였다. 현재에도 푸르른 물결과 잿빛 날개를 접고 물고기를 집어 오리는 황새들의 모습을 간간히 볼 수 있어 좋다. 이 정자 터는 톳재비(도깨비)가 잡아주었다는 배환공의 꿈 이야기가 전해 내려오고 있다. 즉 배환공이 어느 날 술에 취해 강가에서 깜박 잠이 들었는데 톳재비들이 나타나서 “배감사 죽었다. 정자 터 잡아주자”하면서 가르치는 곳이 현재의 정자가 선 자리이다. 그리고 “묘 터 잡아주자”는 말에 화들짝 놀라 톳재비를 쫒고 잠에서 깨었다는 설화가 내려온다. 어째든 풍광과 내려오는 일화를 보아 예사명당이 아닌 듯하다.
또 다른 한 곳의 감춰진 비경을 소개 하면 ‘만휴정’(晩休亭)이다. 만휴정은 안동시 길안면 묵계리에 있는 정자인데 보통사람들은 이곳에 정자가 있다는 것을 잘 알지 못한다. 동네를 약간 비껴 난 산 속에 물소리와 함께 곱게 숨겨져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안으로 들어가 보면 비경에 탄성을 지를 수밖에 없다. 만휴정은 조선 초기 문신으로 청백리에 오른 보백당(寶白堂) 김계행(金係行)선생의 정자이다. 안동에서 동북방향으로 20킬로 정도가면 길안면이 나온다, 길안면에서 묵계리 방면으로 가다 보면 도로변 오른쪽에 만휴정이라는 폿말이 나온다. 우측으로 발길을 꺾기 전에 좌측 언덕 위를 처다 보면 보백당 종가와 묵계서원이 있다. 김계행 선생의 벼슬은 대사성, 대사간, 도승지 등 요직을 거쳤으며 강직하기로 유명하다. 선생은 연산군의 폭정을 피해 벼슬을 버리고 낙향하여 조용한 길안 묵계골에 들어와 조용한 만년을 보냈는데 이때 즐기시던 곳이 바로 만휴정이다. 강 건너 동네를 옆으로 비켜 두고 조그만 골자기로 들어서면 이런 곳에 어떻게 폭포가 있을 수 있을까 할 정도로 물과 바위와 소나무와 정자가 어울려 비경을 자아낸다. 요란한 폭포 물소리가 들리고 좁은 골 안이 점점 너르게 펼쳐지면서 새로운 세상을 넌지시 보여주게 된다. 물 부서지는 소리를 아래로 흘러 보내면서 그 폭포 고대기 바위 위에 조용히 정자가 앉아 있다. 소금강 같이 너른 너럭바위 위에 개울물을 앞으로 두르고 넌지시 건너다보는 듯 정자가 서 있다. 정자 앞 잠시 고여 있는 물에는 파란하늘과 하얀 구름이 빠져있고 정자 안으로 들어서면 나지막한 돌담장이 둘려 처진 너머로 옆쪽 큰 너럭바위를 넘쳐 흘러든 물 계류가 잠시 회오리치며 머무르다 아래 폭포로 떨어지기 위하여 방향을 바꾼다, 휘 늘어진 소나무 가자 사이로 건너 산길로 드러난 모습들이 언뜻언뜻 건너 다 보이며. 꼭 금강산의 만폭동을 걸어 들어가는 듯하다. 김계행 선생은 세조시절 풍수의 대가이며 국사인 학조대사의 숙부이기도 하다. 그와 관련된 일화로 선생이 성주향교의 교수로 있을 때였다. 조카인 학조대사가 볼 일로 성주로 내려왔다. 국사로 세조의 신임을 받는 학조대사를 배려하여 성주목사는 사람을 보내어 선생에게 학조대사를 찾아 볼 것을 권하였다. 그러나 선생은 직속상관의 권고에도 응하지 않았다. 어쩔 수 없이 학조대사가 숙부인 선생을 찾아뵙자 “너가 임금의 후광을 믿고 삼촌인 나를 오라 가라 하느냐”며 매질을 하여 피가 날 정도였다고 일화가 전해질 정도로 강직하였다. 또한 학조가 벼슬을 하고 싶으면 말씀하시면 임금께 고 하겠다 하니 내가 네 덕에 벼슬 할 마음은 없다고 물리쳤다고 한다. 정자 안에 들어서면 이런 현판이 걸려 있다. 오가유보물 보물유청백(吾家無寶物 寶物惟淸白). 즉 “우리집안에 보물이라고는 없다. 보물이라면 오직 청렴결백함이 있을 뿐이다”라고 하시며 몸소 강직과 첨렴을 실천 하셨다한다. 혼탁한 현실에서 어떻게 사느냐를 생각 해 볼 때 한번 쯤 마음에 새겨 보아야 할 구절이다.
그냥 수려한 경치만 구경하는 것이 여행이 아니다. 그 내면에 살아 전해오는 숨결을 느낄 때 진정한 여행의 묘미가 있는 것이다. 집만 보고 오면 무슨 의미가 있으리오. 살아 숨 쉬는 선인의 정신세계와 시인 묵객의 풍류를 냄새 맡을 수 있을 때 진정한 여행의 즐거움이 있는 것이다. 안동에는 그러한 역사의 흔적과 풍류가 현대와 더불어 숨 쉬고 있는 ‘정신문화의 수도’인 곳이다. 진정한 머무름의 즐거움과 느림의 미학을 실천하기 위하여 안동의 문화재 기행이야 말로 각박한 현대를 살아가면서 정신적 빈곤을 면할 수 있는 알찬 문화기행의 한 방안이라 할 수 있겠다. -끝-
첫댓글 '한마을 건너 종가집이요 그 종가에 따른 정자나 부속 풍류들은 책 수 십 권으로도 설명이 모자라는 곳이 안동이다. 종갓집 마다 내려오는 내력과 문화가 다르고 법식이 다르다. 제사 차리는 법, 차례 지내는 법, 음식문화와 법도가 다르다. 묘 쓰는 법도까지 다르다.' 와~ 그렇군요.
'그냥 수려한 경치만 구경하는 것이 여행이 아니다. 그 내면에 살아 전해오는 숨결을 느낄 때 진정한 여행의 묘미가 있는 것이다. 집만 보고 오면 무슨 의미가 있으리오. 살아 숨 쉬는 선인의 정신세계와 시인 묵객의 풍류를 냄새 맡을 수 있을 때 진정한 여행의 즐거움이 있는 것이다.' 다음부터는 여행갈 때 좀 더 새겨야겠습니다.
멋진 기행문을 읽은것 같네요.
저도 며칠전에 여행을 다녀왔는데 그 모습 그대로 자연이 펼쳐준 풍광을 보며
무엇을 보고 무엇을 느끼느냐가 여행이 가져다 주는 소중한 교훈임을 새삼 깨달았거든요.
물질의 풍요로움으로 대체할 수 없는 정신적 갈등과 빈곤을 봉합해줄 수 있는
무한대의 힘이 자연속에 있고, 여행의 노정속에 숨어있더라구요.
선생님의 글, 아주 잘 읽었답니다. ^^
안동 한바퀴 돌고 나온 느낌입니다. 좋은 기행문 읽을 수 있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