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모두의 잠재력 『눈이 보이지 않는 친구와 예술을 보러가다』
조선대학교 국어국문과 차승기 교수
2024년 6월 3일 조대신문에서
책을 한 권 소개하려 한다. 최근 일본의 논픽션 작가이자 다큐멘터리 감독이기도 한 가와우치 아리오의 책 『눈이 보이지 않는 친구와 예술을 보러가다』(김영현 옮김, 다다서재, 2023)를 읽었다. 사실, 이 저자가 제작한 같은 제목의 다큐멘터리를 우연한 기회에 보고는 깊은 흥미를 느껴 책까지 읽게 된 것이다. 책은 시라토리 젠지라는 시각장애인 친구와 미술관을 다니며 작품을 감상하는 활동, 그 과정에서 경험한 에피소드와 생각등을 제시해 놓은 것이었고, 다큐멘터리에 다 담지 못한 생각들이 비교적 명료하게 제시되어 있다.
눈이 보이지 않는 사람이 미술을 감상한다고 해서, 처음에는 다른 감각(이를테면 촉각)을 통해 접근할 수 있는 예술작품에 대해 다루는 것인가 생각했는데, 웬걸, 미술관에 동행한 친구들이 작품 앞에서 자신들이 보고 있는 이미지를 말로 설명해 주는 것이 전부였다. 이것을 ‘예술 경험’이라고 할 수 있을까, 회화나 조형물을 예술‘작품’으로 만들어 주는 것은 그 대체 불가능한 개별성과 물질성에 있지 않은가. 따라서 그것을 언어로 설명하는 순간 우리 앞에 있는 유일무일한 작품은 ‘일반적인 것’ 이 되어 버리고 말지 않는가. 예컨대 캔버스에 그려진 개별적인 모자의 이미지를 보고“모자”라고 설명하는 순간, 눈이 보이지 않는 친구는 추상적인 모자의 개념을 상상하거나 (사고 또는 후천적인 이유로 시각을 상실해 이미지에 대한 기억을 가지고 있는 경우에는) 자신이 아는 가장 일반적인 모자의 이미지를 떠올리게 되지 않을까.
그런데 눈이 보이지 않는 시라토리 씨는 친구들의 설명을 듣고 상상하는 것 자체가 예술 경험이 라고 주장한다. 그는 시각 ‘장애’가 있다는 이유로 다른 감각을 통한 예술 경험을 권하는 방식은 오히려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그는 여러 친구가 저마다 조금씩 다르게 설명하는 것을 들으며 그 차이를 즐긴다. 그래서 그는 추상화와 난해한 현대예술을 더욱 선호한다. 이러한 그의 예술감상 테도에 대해 (그리고 책의 저자가 이끌어 주는 방향으로) 곰곰이 생각하다 보면 어렴풋이 깨닫는 게 있다. 어쩌면 예술 경험의 핵심은 자신이 보거나 듣거나 느낀 것을 다름 코드로 옮기는 데 있는 것이 아닐까. 예술은 잘 감상할 줄 아는 사람은 그 유일무이한 작품을 다른 형식으로 잘 ‘번역’할 줄 아는 사람이 아닐까. 자신이 작품 앞에서 받은 말로 표현하기 힘든 느낌을 그렇게 표현하기 어려운 상태 그대로 고요히 간직할 때가 아니라, 언어로든 그림이로든 음악으로든 다른 방식으로 번역하려 시도할 때 그 예술적 경험도 그만큼 뚜렷하게 자신의 것이 되지 않을까. 그러고 보면 놀랍게도 시라토니 씨의 예술 경험 사이에 그리 큰 차이가 없는 것처럼 생각된다.
나아가, 눈이 보이는 사람은 정말 보고 있는 게 맞는가. 가와우치 씨와 친구들이 시라토리 씨에게 그림에 대해 설명한다 종종 놀랍게 발견하는 것이 있다. 예전에 봤던 그림, 명작으로 유명해 익숙한 그림을 설명하다 그동안 전혀 알아채지 못했던 부분들을 처음 발견하곤 하는 것이다. 눈이 보이는 사람은 보이기 때문에 어쩌면 많은 것들을 보지 못하고 놓치곤 하지 않는가. 모든 감각이 그렇듯이 시각 역시 종종 착각하고 망각하고 속는다. 하지만 눈이 보인다는 이유로 오히려 그 착각을 확신하는 오류를 범하지는 않는가. 눈이 보인다는 이유로 ‘본다’는 것이 자동적으로 주어지는 것처럼 여기지는 않는가. 눈이 보이는 사람이 “모자”라고 확신한 것이 코끼리를 삼킨 보아뱀이지 않았던가.
이 책은 ‘장애’를 가진 사람에게 장애를 극복하고 ‘정상인’의 능력을 쟁취하라고 권하는 책이 전혀 아니다. 그렇다고 ‘장애’를 가진 사람에게 어차피 ‘비장애인’도 오류와 한계를 가지고 있으니 당신의 지금의 상태에 만족하라고 권하는 책도 아니다. 그보다는 ‘장애’도 (‘비장애’와 마찬가지로)세계를 경험하는 통로의 하나라는 사실을 일깨워 주며, 겉으로 드러나는 ‘장애/비장애’의 차이를 넘어서 모두가 동등하게 지니고 있는 잠재력에 주목하도록 이끈다. 우리는 우리가 잘하는 것을 통해서 세계와 접속ㄷ하기도 하지만 우리가 못하는 것을 통해서도 세계와 접속한다. 그 점에서 우리 모두의 잠재력은 우열을 가릴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