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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현실인식과 역사를 껴안은 시
<踏靑> - 정희성
풀을 밟아라
들녘엔 매맞은 풀
맞을수록 시퍼런
봄이 온다
봄이 와도 우리가 이룰 수 없어
봄은 스스로 풀밭을 이루었다
이 나라의 어두운 아희들아
풀을 밟아라
밟으면 밟을수록 푸른
풀을 밟아라
『書經』에 ‘詩言志 歌咏言’이라는 말이 나와 있다. 그러니까 그 책이 나오기 전부터 시는 그러했다는 전제하에 그런 말이 나왔다고 해야 하리라. 그러므로 서경이 말하는 시의 정의는 수천 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고 앞으로도 계속 될 것이다. 현재에도 이 정의에 따라 시를 쓰고 시를 해석, 음미하는 사람들이 동서에 그득하다. 어쩌면 7-80년대 민중시들은 대개 여기에 포함된다고 하겠다. 하지만 詩言志, 말로 뜻을 세우는 게 시라고 정의했을 때 시에서 내용 혹은 주제와 논리가 압도적인 비중을 차지하는 경우가 많아 이게 문제가 된다.
대작『황무지』를 쓴 엘리엇은 시를 ‘잘 빚은 항아리’라고 했다. 그렇다면 결국 시의 형태를 생각지 않을 수 없는데 정희성의 이 시는 리듬이나 “맞을수록 시퍼런 봄이 온다” 라든가 “밟으면 밟을수록 푸른 풀을 밟아라” 라든가 하는 행에서 보여주는 비유는 핍진한 내용과 논리를 넘어서며 오히려 이를 미학적으로 끌어올리고 있다.
위의 엘리엇은 스물여섯이 넘어서도 시를 쓰려면 역사의식이 있어야 한다고 또한 말했다. 그런데 그가 밝힌 그의 역사의식은 자기의 시대가 불안의 시대라는 것이었다. 즉 기독교 신념이 무너진 시대라는 것이다. 20년대의 유럽 정신계를 그는 그렇게 보았다. 말하자면 역사를 내면적, 심리적으로 파악한 것이다.
우리도 80년대 민중시의 시대를 지나오며 많은 사람들이 이제 그 역사를 일상화, 내면화해야 한다는 말을 해왔다. 하지만 우리는 그 80년대적 화두를 청산하기에 급급해서 욕망, 섹스, 죽음, 상품 등으로 우루루 달려갔지 그것을 시 속에 내면화시킨 경우는 드물었다.
그런 점에서 다음 이정록의 시는 시사하는 바가 크리라.
<붉은 풍금새> - 이정록
누나 하고 부르면
내 가슴 속에
붉은 풍금새 한 마리
흐트러진 머리를 쓸어 올린다
풍금 뚜껑을 열자
건반이 하나도 없다
칠흑의 나무 궤짝에
나물 뜯던 부엌칼과
생솔 아궁이와 동화전자 주식회사
야근부에 찍던 목도장,
그 붉은 눈알이 떠있다
언 걸레를 비틀던
굽은 손가락이
무너진 건반으로 쌓여 있다
누나 하고 부르면
내 가슴 속, 사방공사를 마친 겨울산에서
붉은 새 한 마리
풍금을 이고 내려온다
누나! 하고 부르면 금방이라도 풍금소리를 낼 것 같은 누나에 대한 시다. 아마 누나는 풍금을 잘 쳤던 모양이다. 그러기에 누나 하고 부르면 내 가슴 속에 그 풍금이 붉은 풍금새가 되어 내려온다. 아니 마지막 행대로라면 붉은 새 한 마리가 풍금을 이고 내려온다. 한데 누나를 생각하면 어떤 슬픔 같은 것이 마음을 저며 온다. 그 풍금 뚜껑을 열자 아뿔사! 건반은 하나도 없고 그 칠흑의 나무 궤짝에 어리던 날 나물을 뜯던 부엌칼과 연기 꾸역꾸역 내며 생솔가지를 태우던 아궁이가 들어있다. 그리고 누나는 커서 ‘공순이’가 되어 동화전자 주식회사를 다닌 모양인데 그 야근부에 찍던 목도장이 졸음을 이기느라 충혈된 붉은 눈알처럼 되어 떠 있고, 더 아득한 것은 그때 흔히 난방도 제대로 못한 자취방 생활을 하느라 언 걸레를 곧잘 비틀곤 했던 그 굽은 손가락들이 무너진 건반으로 거기에 쌓여 있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누나 하고 부르면 내 가슴은 사방공사를 마친 겨울산처럼 단정하고 엄정해져 붉은 새 한 마리가 풍금을 이고 내려오는 것이다.
버드나무껍질에 세들고 싶고 제비꽃 여인숙을 차려 특실 한 칸을 영구 분양해주고 싶다던 이 시인의 상상력은 참으로 기발하면서도 아름답다. 어떻게 누나의 힘든 생의 기억을 지상에 있지도 않은 풍금새를 상상하고 빌려와 이렇게 눈물겹게 노래할 수 있다는 말인가. 그 상상력 까닭에 이 시는 자칫하면 내용의 무게에 짓눌릴 것을 미학적으로 승화시키는 데 성공하고 있는 것이다.
(4) 새로운 감수성의 언어를 지향한 시
<요리사와 단식가> - 장정일
1
301호에 사는 여자. 그녀는 요리사다. 아침마다 그녀의 주방은 슈퍼마켓에서 배달된 과 일과 채소 또는 육류와 생선으로 가득 찬다. 그녀는 그것들을 굶거나 삶는다. 그녀는 외롭 고, 포만한 위장만이 그녀의 외로움을 잠시 잊게 해준다. 하므로 그녀는 쉬지 않고 요리를 하거나 쉴새없이 먹어대는데, 보통은 그 두 가지를 한꺼번에
한다. 오늘은 무슨 요리를 해 먹을까? 그녀의 책장은 각종 요리사전으로 가득하고, 외로움은 늘 새로운 요리를 탐닉하 게 한다. 언제나 그녀의 주방은 뭉실뭉실 연기를 내뿜고, 그녀는 방금 자신이 실험한 요리 에다 멋진 이름을 지어 붙인다. 그리고 그것을 쟁반에 덜어 302호의 여자에게 끊임없이 갖다준다.
2
302호에 사는 여자. 그녀는 단식가다. 그녀는 방금 301호가 건네준 음식을 비닐봉지에 싸서 버리거나 냉장고 속에 딱딱하게 굳도록 버려 둔다. 그녀는 조금이라도 먹지 않기 위 해 노력한다. 그녀는 외롭고, 숨이 끊어질 듯한 허기만이 그녀의 외로움을 야간 상쇄시켜 주는 것 같다. 어떡하면 한 모금의 물마저 단식할 수 있을까? 그녀의 서가는 단식에 대한 연구서와 체험기로 가득하고, 그녀는 방바닥에 탈진한 채 드러누워 자신의 외로움에 대하 여 쓰기를 즐긴다. 흔히 그녀는 단식과 저술을 한꺼번에 하며, 한번도 채택되지 않을 원고 들을 끊임없이 문예지와 신문에 투고한다.
3
어느 날, 세상 요리를 모두 맛본 301호의 외로움은 인육에까지 미친다. 그래서 바싹 마 른 302호를 잡아 스플레를 해먹는다. 물론 외로움에 지친 302호는 쾌히 301호의 재료가 된다. 그래서 두 사람의 외로움이 모두 끝난 것일까? 아직도 301호는 외롭다. 그러므로 301호의 피와 살이 된 302호도 여전히 외롭다.
이 시는 현대 도시문명의 상징인 아파트의 단절된 공간성을 301호와 302호로 압축시켜 구도화하고, 이 속에 기생하는 인간의 원초적 단절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이러한 구도하에, 소통의 가능성이 철저히 차단된 아파트와 같은 현대 도시문명 속에서 인간이 겪는 단절과 외로움이 인육을 먹는 여자와 철저히 굶는 여자라는 충격적인 일화를 통해 담담히 서술되고 있다. 차분한 서술과 그 속에 담긴 충격적 내용의 대비는 이 시인의 능숙한 시적 기교를 드러내는 것으로서, 사실은 이 시적 기교와 장치 속에 시인의 전언이 폭풍 전의 고요처럼 잠재되어 있다. 시적 내용에 있어, 시적 언어의 마술에 가려지거나 신비화된 부분은 없다. 담담한 산문체는 내용을 직접적으로 서술한다. 이건 장정일 시의 특징이기도 하다.
새로운 감수성의 언어를 통하여 현대문명의 부정성에 집중하고, 또 거기에서 발생하고 극단화하기 마련인 인간의 이기와 소외와 외로움을 이처럼 아무 감정적 수사도 없이 담담하게 서술하고 있는 것이 놀라울 따름이다.
<정거장에서의 충고> - 기형도
미안하지만 나는 이제 희망을 노래하련다
마른나무에서 연거푸 물방울이 떨어지고
나는 천천히 노트를 덮는다
저녁의 정거장에 검은 구름은 멎는다
그러나 추억은 황량하다, 군데군데 쓰러져 있던
개들은 황혼이면 처량한 눈을 껌벅일 것이다.
물방울은 손등 위를 굴러다닌다, 나는 기우뚱
망각을 본다, 어쩌다가 집을 떠나왔던가
그곳으로 흘러가는 길은 이미 지상에 없으니
추억이 덜 깬 개들은 내 딱딱한 손을 깨물 것이다
구름은 나부낀다, 얼마나 느린 속도로 사람들이 죽어갔는지
얼마나 많은 나뭇잎들이 그 좁고 어두운 입구로 들이닥쳤는지
내 노트는 알지 못한다, 그동안 의심 많은 길들은
끝없이 갈라졌으니 혀는 흉기처럼 단단하다
물방울이여, 나그네의 말을 귀 담아선 안 된다
주저앉으면 그뿐, 어떤 구름이 비가 되는지 알게 되리
그렇다면 나는 저녁의 정거장을 마음속에 옮겨놓는다
내 희망을 감시해온 불안의 짐짝들에게 나는 쓴다
이 누추한 육체 속에 얼마든지 머물다 가시라고
모든 길들이 흘러온다, 나는 이미 늙은 것이다
이 시는 기형도 시인의 비극적 세계관을 선명하게 보여주는 작품이다. 시적 화자는 어쩌다가 집을 떠나와 정거장에서 서성거리나 이미 집으로 돌아갈 길이 이 지상에는 존재치 않고 추억은 황량한 상태에 놓여 있다. 그 정거장에 검은 구름은 몰려와 멎고 군데군데 쓰러져 있던 개들은 황혼 무렵이면 처량한 눈을 껌벅일 것이다. 그럼에도 시인은 1행에서 “미안하지만 나는 이제 희망을 노래하련다” 라고 쓰고 있다. 정말 희망의 길을 찾고자 해서 그렇게 다짐했던가. 하지만 시는 중반 너머 종반이 다 되도록 어떤 희망의 조짐도 표현하지 않는다. 되레 그 사이 사람들은 참으로 느린 속도로 죽어갔고, 많은 나뭇잎들은 좁고 어두운 입구로 들이닥쳤으며 그동안 의심 많은 길들은 끝없이 갈라졌으니 그 길을 묻던 혀는 흉기처럼 단단해진 상태다. 끝내는 지금까지 나의 희망을 감시해온 불안의 짐짝들에게 쓰는 것이다. “이 누추한 육체 속에 얼마든지 머물다 가시라고.” 한마디로 모든 길들은 흘러오고 나는 이미 늙은 것이니, 이제 더 이상 불안 따위에 시달릴 것이 없다. 그러니 어쩌면 그게 희망인지도 모른다.
결국 이 시는 인간의 실존적 불안에 시달려온 시적 화자가 그간 많은 길을 찾아 헤매었으나 황량한 추억과 고향상실감만을 안은 채 마음의 한 정거장에 당도하여 죽음 쪽으로 발길을 옮기려는 상태를 서술한 시다. 그러기에 마른나무에서 연거푸 떨어지는 물방울은 목숨을 다한 나무에서 이탈한 수액으로 시신에서 흘러내리는 죽은 피를 닮았고, 종반부 화자가 “나그네의 말을 들으면 안 된다, 주저앉으면 그뿐” 이라고 타이르는 물방울도 기력이 다해 움직이기를 그친 비가 되는 것이다. 아울러 노트는 시의 처음부터 천천히 덮이는데 사실 이 노트는 인간의 불안과 권태와 죽음을 캐고자 했고, 나뭇잎과 우주와 자연의 비밀을 캐려 했으며, 나아가선 삶의 참된 길을 찾고자 늘 의심을 품던 노트였으나 끝내 아무 것도 알지 못한 채 닫힌다. 그러니 희망, 물방울, 노트, 추억, 개, 길 등은 이제 죽음의 희망을 노래하려는 시적 화자의 심리를 추적케 하는 화려한 수사에 불과했던 것이다.
장정일과 기형도 80년대 민족, 민주, 민중이라는 거대담론의 광장 속에서도 새로운 감수성의 언어를 통하여 현대적 도시문명 속의 인간소외를 묘파해내거나 광장이라는 외면적 실존보다 거기에서 불안이나 허무라는 내부적 실존의식을 묘파해서 나름대로의 독창성을 확보해낸다. 하지만 이 시들에 그러면서도 도저한 문명비판이나 시 밑바탕에 깔린 현실정치비판이 건강하게 자리하고 있음은 참으로 다행한 일이 아닐 수 없다.
(5) 사물의 비밀과 존재 탐구에 주력한 시
<문의 마을에 가서> - 고은
겨울 문의에 가서 보았다
거기까지 닿은 길이
몇 갈래의 길과
가까스로 만나는 것을.
죽음은 죽음만큼 길이 적막하기를 바란다.
마른 소리로 한 번씩 귀를 닫고
길들은 저마다 추운 쪽으로 뻗는구나.
그러나 삶은 길에서 돌아가
잠든 마을에 재를 날리고
문득 팔짱 끼어서
먼 산이 너무 가깝구나.
눈이여 죽음을 덮고 또 무엇을 덮겠느냐.
겨울 문의에 가서 보았다.
죽음이 삶을 껴안은 채
한 죽음을 받는 것을
끝까지 사절하다가
죽음의 인기척을 듣고
저만큼 가서 뒤를 돌아다본다.
모든 것은 낮아서
이 세상에 눈이 내리고
아무리 돌을 던져도 죽음에 맞지 않는다.
겨울 문의여 눈이 죽음을 덮고 또 무엇을 덮겠느냐.
이 시는 작가가 동료시인인 신동문의 모친상을 접하여 충북 청원군에 있는 文義 마을에 가서 장례식을 주관한 사실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시인이 직접 호상이 되어 장례절차를 주관하였는데, 시인은 거기서 삶과 죽음에 대한 깊은 통찰을 얻었다. 흔히 죽음은 절망이나 공포, 비애 등의 격렬한 감정으로 나타나는 경우가 많지만 이 시에서는 죽음이 친근한 것이 되어 있고 그 친근성은 인간의 삶에 대한 경건함을 동반하고 있다.
1연에는 어느 해 겨울 문의마을에 가서 죽음을 보았다는 상황이 설정되어 있다. 즉 장례식이 있었다는 뜻이다. 문의마을까지 닿는 길은 몇 갈래의 길들이 하나로 합쳐져서 통해 있는데, 그 길이 적막한 것과 같이 죽음의 길도 적막하다. 그 길이 죽음의 길이기에 추운 쪽으로 뻗었다고 말한다. 그러나 죽음을 애도하는 살아 있는 사람들은 길에서 돌아가 죽은 사람의 유품을 태우는데, 그 태운 재들이 마치 잠든 것처럼 고요한 마을을 향해 흩날리고 있다. 그것을 바라보는 시적 화자는 문득 팔짱을 끼고 먼 산을 바라보는데, 그 산이 무척 가깝게 여겨진다. 즉 죽음과 삶의 거리가 그다지 멀지 않음을 깨달은 것이다. 그 장례식날 눈마저 날리어 죽음을 덮고 있다. 그 눈은 죽음뿐만 아니라 이 세계의 만물을 덮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사실을 깨닫는 것은 죽음을 통해 삶의 경건함을 역설적으로 드러내는 것이 된다. 그것이 2연에서는 “죽음이 삶을 껴안은 채/ 한 죽음을 받는 것”으로 표현된다. 망자가 죽음 받기를 끝까지 사절하다가 이 세상의 살아있는 것들의 인기척을 듣고는 마침내 죽음을 받아들이면서 죽음을 향해 저만큼 가서 뒤를 돌아다보는 것을 시적 화자는 마음의 눈으로 본 것이다. 엄숙한 장례의식을 통해 죽음과 삶의 관계와 그것들의 경건함을 깨달은 것이다. 세상의 모든 사물들은 죽음 앞에서 낮아지고, 곧 겸허해지는데, 그 위로 눈이 내리고 있다. 이는 바로 엄숙함이자 경건함이다. 이런 장례절차도 끝나 죽음은 이승을 향해 떠나서 “아무리 돌을 던져도 죽음에 맞지 않는다.” 눈이 내리는 겨울날 문의 마을에서는 장례식이 있었다. 눈은 내려 죽음을 덮고 마침내 이 세상마저 모두 덮어버리고 있는 광경을 그리고 있다.
이렇게 시적 상상력은 삶과 죽음, 곧 존재의 비밀을 살짝 엿보게도 하는 것이다.
<별빛들을 쓰다> - 오태환
필경사가 엄지와 검지에 힘을 모아 철필로 원지 위에 글씨를 쓰듯이 별빛들을 쓰는 것 임을 지금 알겠다.
별빛들은 이슬처럼 해쓱하도록 저무는 것도 아니고 별빛들은 墨蘭 잎새처럼 쳐 있는 것 도 또는 그 아린 냄새처럼 닥나무 닥지에 배어 있는 것도 아니고 별빛들은 어린 갈매빛 갈매빛의 계곡 물소리로 반짝반짝 흐르는 것도 아니고 도장처럼 붉게 찍혀 있는 것도 아 니고 더구나 별빛들은 반물모시 옷고름처럼 풀리는 것도 아니고
별빛들은 여리여리 눈부셔 잘 보이지 않는 수평선을 수평선 위에 든 흰 섬들을 바라보 듯이 쳐다봐지지도 않는 것임을
지금 알겠다 국민학교 때 연필을 깎아 榧子열매빛 재활용지가 찢어지도록 꼭꼭 눌러 빼뚤빼뚤 글씨를 쓰듯이 그냥 별빛들을 아프게 아프게 쓸 수밖에 없는 것임을 지금 알겠 다.
내가 늦은 소주에 푸르게 취해 그녀를 아프게 생각하는 것도 바로 저 綠靑기왓장 위 별 빛들을 쓰는 것과 하나도 다르지 않음을 지금 알겠다.
“별빛을 쓰다”니? 별이 그의 빛을 쓴다는 것인가? 아니다. 별의 빛을 쓰는 것은 시인 자신이다. 별빛을 쓰는 시인은 스스로 아름다운 별로 태어날 것 같다.
이 시는 아프고 아픈 한 편의 연시로도 읽힌다. 발에 밟힐 듯 긴 스란치맛자락 같은 다섯 행으로 이루어진 이 시의 끝부분에서 ‘그녀’를 만나기 전에, 시의 젖가슴께에 놓인 ‘반물모시 옷고름’에서 눈이 밝은 독자들은 어렴풋이 사랑스런 여인의 그림자를 만났을 것이기에.
그러나 이 아름다운 시는 한 여인에 대한 헌시로서의 빼어난 문학적 성취에 그치지 않고 시적 우주를 창조하게 된다. ‘그녀’의 고유명사 위에 크고 아픈 모성으로서의 시가 덧씌워지는 大變轉의 회오리를 이 여릿여릿한 시편은 감추고 있다.
시인이 사는 마을의 하늘에는 이슬과 묵란과 계곡 물소리와 반물빛 치마저고리와 함께 참으로 아름다운 별들이 살고 있다. 이렇듯 사물이 잘 어우러진 좋은 시를 읽는 기쁨은 새로운 우주에 동참하는 기분을 느끼게 한다.
이상 우리는 다섯 갈래의 주제에 합당한 시를 살펴보면서 그 주제의식과 상상력이 빚어내는 참으로 아름답고 슬프고 높고 깊은 시세계들을 볼 수 있었다. 시는 시적 경험의 소재에다 주제의식과 불가분의 관계인 상상력을 결합하여 새로운 세계로 우리를 안내한다. 그 세계는 슬픔과 한과 아름다움이 뒤범벅된 세계일 수도 있고, 맑고 착한 순수서정이 내면의 고요한 울림과 만나는 세계일 수도 있으며, 또 진실과 정의가 강물처럼 흐르는 세계일 수도 있고, 언어로 세운 존재의 집일도 있으며, 모든 사물들이 제 존재 그대로 빛을 던져 하나의 융융한 화엄을 이루는 세계일 수도 있는 것이다.
3. 시적 구조, 그리고 직관력
E. 뮤어의『소설의 구조』라는 책에는 소설의 구조를 두 가지로 나누고 있다. 그 하나는 극적 구조이고 다른 하나는 그렇지 않은 구조다. 극적 구조란 다르게 말하면 메인 스토리가 있는 구조다. 처음부터 끝까지 한 개의 주된 사건이 전개되면서 인물이 바뀌지 않는다. 나도향의「물레방아」같은 것이 그 전형적인 예가 된다. 이 소설은 애정의 삼각관계를 다루고 있다. 발단과 절정과 끝이 선명히 드러난다.
반면 극적이 아닌 구조란 메인 스토리가 없고 에피소드로 연결돼 있는 구조다. 등장인물이 에피소드가 바뀔 때마다 바뀐다. 김동인의「감자」같은 것이 그 전형적인 예가 된다. 복녀라는 한 농민의 딸이 가난 때문에 몸을 더럽히며 끝내는 파멸해가는 모습을 그린 소설이다. 이 소설에서는 에피소드 두 개가 연결돼 있을 뿐 메인 스토리는 없다. 인물이 바뀐다. 에피소드는 얼마든지 연결시켜 갈 수가 있다.
시에서도 이런 따위 구조의 유형이 있다. 가령 서정주의「국화 옆에서」와 같이 다음 조지훈의「僧舞」는 극적 구조를 가졌다고 할 수 있다. 이 시는 기승전결로 아주 동적 기계적으로 내용이 전개된다. 처음부터 끝까지 무희의 동작으로 채우는데 마침내 그녀의 동작이 절정을 거쳐 끝을 맺는다. 직접 시를 보자.
<僧舞> - 조지훈
얇은 紗 하이얀 고깔은
고이 접어서 나빌레라.
파르라니 깎은 머리
薄紗 고깔에 감추오고
두 볼에 흐르는 빛이
정작으로 고아서 서러워라 .
빈 臺에 黃燭불이 말없이 녹는 밤에
오동잎 잎새마다 달이 지는데
소매는 기어서 하늘은 넓고
돌아서서 날아갈 듯 사뿐히 접어 올린 외씨버선이여.
까만 눈동자 살포시 들어
먼 하늘 한 개 별빛에 모두우고
복사꽃 고운 뺨에 아롱질 듯 두 방울이야
세사에 시달려도 煩惱는 별빛이라
휘여져 감기우고 다시 접어 뻗는 손이
깊은 마음 속 거룩한 合掌이냥하고
이 밤사 귀또리도 지새는 三更인데
얇은 紗 하이얀 고깔은 고이 접어서 나빌레라.
이 시는 본래 2행이 1연이 되어 모두 9연 18행으로 된 시인데 내가 기승전결의 한시 형식이 어떻게 짜여져 있는가를 보여주기 위해 편의상 4연으로 배열했다. 처음 고깔과 고깔 속의 얼굴 묘사로 시작되어(기) 다음으로 배경과 춤동작의 찰나 포착(승), 그 다음 형이상학적 내면세계에 초점을 맞추고는(전) 마지막 시간의 경과 속에 지속되는 춤의 표현(결) 등이 너무도 확연한 기승전결 구조다.
특히 이 시는 제10행 “돌아설 듯 날아가며 사뿐히 접어 올린 외씨보선이여”와 제14행 “세사에 시달려도 煩惱는 별빛이라”라는 두 행에 핵심이 있다. 이 두 행은 모두 이 시의 중심축이 되는 승, 전의 터전을 마련하는 중요한 기능을 담당하고 있다. 이 시행들을 통해서 시적 화자는 춤으로서의 승무와 정신적 내면성을 지닌 인간의 고뇌를 시적으로 결합시켰다고 할 수 있을 것이며, 이 시가 단순한 소재 차원을 넘어설 수 있었던 것도 바로 여기에 근거한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시적 구조에 대한 얘기를 하려는 참이었으니 여기서 그 내용의 해석은 그만 두기로 하자. 시에서 구조가 요구되는 것은 시적 형상화의 성공을 위해서다. 그러기 위해서는 시의 짜임새가 설득력 있게 전개되어야 한다. 나는 동양시학의 기승전결 구조를 시 창작에 많이 사용하는데 이는 봄, 여름, 가을, 겨울이라는 계절의 자연적 구조와 일치하기도 하고 소년, 청년, 장년, 노년의 인생구조와도 부합되어서이다.
그런데 이런 극적 구조와 반대로 그렇지 않은 구조를 가진 시가 있다.
<鄕愁> - 정지용
넓은 벌 동쪽 끝으로
옛이야기 지즐대는 실개천이 휘돌아 나가고,
얼룩백이 황소가
해설피 금빛 게으른 울음을 우는 곳,
-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
질화로에 재가 식어지면
비인 밭에 밤바람 소리 말을 달리고,
엷은 졸음에 겨운 늙으신 아버지가
짚베개를 돋아 고이시는 곳,
-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
흙에서 자란 내 마음
파아란 하늘빛이 그리워
함부로 쏜 화살을 찾으러
풀섶 이슬에 함추름 휘적시던 곳,
-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
이 시는 정지용의「향수」일부분이다. 이 시는 아까「승무」와 다르게 연마다 다른 장면이 나온다. 앞연과 뒷연 사이에는 아무런 인과관계가 없다. 그러기에 이런 시는 극적 구조를 가지지 않은 시에 해당된다.
<선운사에서> - 최영미
꽃이
피는 건 힘들어도
지는 건 잠깐이더군
골고루 쳐다볼 틈 없이
님 한번 생각할 틈 없이
아주 잠깐이더군
그대가 처음
내 속에 피어날 때처럼
잊는 것 또한 그렇게
순간이면 좋겠네
멀리서 웃는 그대여
산 넘어 가는 그대여
꽃이
지는 건 쉬워도
잊는 건 한참이더군
영영 한참이더군
선운사에서 ‘동백’이 피고 지듯 시적 화자인 시인의 내부에서 ‘그대’로 지칭되는 한 사람이 피고 진다. 생성되고 소멸되어버렸으며 만나고 헤어졌다. 그러나 한 존재의 진정한 소멸 혹은 진정한 결별은 기억 속에서 지우는 것이다. 더 정확히 말하면 고통없이 기억하는 것이며 그리움에 허덕거리지 않고 낡은 사진첩을 넘기듯 담담하게 떠올릴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되지 않는다. ‘피고 짐’이나 ‘만나고 헤어짐’은 분명하나 동백꽃이 우리 속에서 꿈틀거리듯 그대 역시 잊혀지지 않고 내 안에서 쉼없이 고통을 자아내며 소용돌이치고 있는 것이다. 결코 닿을 수 없는 ‘멀리서’ 여전히 사랑을 담고 ‘웃는’ 그대는 산 넘어가지만, 잊는다는 것이 영영 한참일 수밖에 없는 이 괴로움을 어찌하는가.
짐짓 남의 일처럼 시의 종결어미를 ‘-이더군’ 이라고 쓰며 겉으로는 툭툭 말을 던지지만, 그 속엔 그대와 헤어지고 선운사에 여행을 가서 그 붉은 동백꽃의 피고 짐을 바라보며 그대에 대한 갈망과 탄식하는 것을 감추고 있다. 그럼에도 시적 장치인 기승전결의 안정적 구조와 대립과 병치를 반복하는 수평적 구조가 긴밀히 교직하여 상상력의 형식화에도 어느 정도 성공을 거두고 있다.
<강변 마을> - 노향림
찻집 ‘째즈’에 올라간다.
카펫 붉게 깔린 3층 계단 옆에서
제 몸짓보다 더 큰 트럼펫을 들고
흑인 가수 루이 암스트롱의 커다란 눈망울이
나를 노려본다.
브랜드 커피엔 하얀 각설탕을!
카푸치노? 아니, 아니
나는 블랙만 마실거야,
블랙홀보다 검은 커피 한 잔이
내 앞에 당도한다.
나는 강변이 내려다보이는 창가가 좋다.
오늘따라 바람이 센지 짱짱한 구름떼만
하늘에서 펄럭인다.
브레지어가 흘러내리고
흰 속치마가 절반쯤 뜯기고 찢겨나간
구름을 보는 것이 좋다.
아직 봄은 일러서 오지 않고
꽃샘바람에 눈꺼풀 닫은 채
종일 공중을 향해 팔을 벌리고
벌서듯 서 있는 나무들,
매캐한 매연 속에
푸른 잎을 틔울까 말까 생각 중이다.
그 슬픔을 하나의 보석으로 마음의
블랙홀에 켜 놓았다.
나트륨등이 반짝 켜진다.
밝은 미색 커튼 흔들리는 창가에서
블랙 커피나 한잔!
노향림의 이 시는 극적 구조가 없는 시다. 이 시에도 등장인물인 ‘나’가 등장하고 그가 처음과 끝에 나타나서 어떤 동작을 하고 있지만, 그것은 내면적이건 외면적이건 어떤 사건과 연결돼 있지 않다. 그냥 어느 날 강변 찻집에 들러 이 커피를 마실까 저 커피를 마실까 유희하듯 생각하고, 창밖에 헝클어진 구름 떼를 바라보고, 아직 봄이 일러 푸른 잎 틔울까 말까 망설이는 나무를 생각하며, 그렇게 가볍고 하찮아진 자신에게 슬픔을 느낀다. 하지만 그러한 존재가 우리 인간이라면 그 슬픔을 하나의 보석으로 바꾸어 마음의 블랙홀에 나트륨등처럼 반짝 켜고, 블랙홀보다 검은 커피 한잔을 마심으로 인생을 씹을 수도 있는 것!
한데 이렇듯 극적 구조를 가진 시와 그렇지 않은 구조를 가진 시를 살펴보다 보면 시에서 구조는 꼭 어떤 논리를 수반한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시가 시적 논리를 가져야 함에는 분명하지만 그래도 ‘詩三百이 思無邪’라는 말이나 시는 어떤 영감과 관계되어 있다는 말을 들을 때는 그런 논리적 구조 없이도 되어지는 시들이 있는 것 같다. 바로 이때 생각해볼 수 있는 것이 ‘직관력’이라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직관이라는 것은 진리나 실재는 사고나 판단 등에 의하지 않고 분별지 곧 이성을 넘어선 본질로의 순간적 육박에 의해서만 파악될 수 있다고 하는 것이다. 이를 철학화한 직관주의는 베르그송이 주창한 설이다. 직관력에 의한 자아와 세계의 동일화는 서정시의 원리이기도 하다. 그 원리에는 세계에의 동화와 투사가 있다. 하지만 그런 직관력에 의한 시나 순간성과 압축성을 생명으로 하는 짧은 시에도 구조는 존재한다는 것이 나의 믿음이다.
<전 설> - 서정춘
길고 긴 두 줄의 강철 詩를 남겼으랴
기차는, 고향역을 떠났습니다
하모니카 소리로 떠났습니다.
먼저 이 시를 해설해 보자. 기차가 고향역을 떠났다. 하모니카 소리로 떠났다. 물론 기차가 고향역을 떠났다는 것은 그 기차를 탄 어떤 사람이 떠났다는 것이다. 또 하모니카 소리로 떠났다는 것은 하모니카로 상징되는 우리 고향의 오륙십 년대를 떠났다는 것일 수도 있다. 어쨌든 기차가 떠난 뒤에 남는 것은 길고 긴 두 줄의 강철 레일뿐이다. 그런데 이 ‘레일’이 시인의 직관력에 의해 순식간에 ‘詩’로 바뀌어 첫 행으로 올려지니 평면적인 시가 지각 변동을 일으키며 겹무늬를 만들어낸다. 시를 남기고 떠난 사람, 그것도 길고 긴 두 줄의 강철 시를 남기고 떠난 사람은 어떤 이였을까. 어쩌면 우리 고향의 오륙십 년대에 만연했던 혹독한 가난과 못배움의 설움, 그것으로 인한 한 때문에 길고 긴 두 줄의 시를 남겼겠다. 또 가난과 못배움의 한을 딛고 기어이 성공해보겠다는 다짐이 있었기에 강철의 시를 남겼겠다. 그럼에도 이 사람은 그가 객지에서 성공을 했건
결코 고향으로 돌아 갈 수 없었던 사람이겠다. 왜냐하면 이 이야기가 이미 ‘전설’이 되어 있기 때문에.
사실 시인은 그의 첫 시집에서 대나무를 빌어 고향으로 돌아가는 일의 어려움을 앞서 피력했다. “여기서부터,― 멀다/ 칸칸마다 밤이 깊은/ 푸른 기차를 타고/ 대꽃이 피는 마을까지/ 백년이 걸린다”(「竹篇․1」)라고. 그런데 이 시가 ‘전설’이 된 이유의 또 하나는 사실 백년이 걸려서 찾아가 보아야 “대꽃이 피는 마을”로 상징되는 고향, 혹은 길고 긴 두 줄의 강철 詩를 남긴 고향은 이미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을 시인이 너무 잘 알고 있기 때문이겠다. 우리의 꿈과 다짐이 있던 순수의 고향은 그리하여 이제 마음 어느 한켠으로 거두어진다.
결국 <전설>이란 시는 주로 직관력에 의해 형상화된 시지만 바로 해설을 통해서 보듯 극적 구조를 가지고 있는 시가 아니고 무엇인가.
<사랑이 거리에서> - 채호기
내가 엎질러 버린 물
언 얼음 속에 네가 갇혀 있다
햇빛에게 떨어지며 네 몸은
보석의 파편처럼 반짝인다
얼음 풀리는 시내처럼
슬픔은 거리를 흐르고
시냇가에 핀 맑은 꽃처럼
너의 눈이 나를 바라본다
사랑에는 두 개의 극단이 있다. 불과 얼음. 사랑할 땐 불이지만 그 상처는 얼음이다. 사랑은 보석의 파편처럼 반짝이다가 때로는 슬픔으로 흐른다. 사랑은 잔인한 경험이다. 슬픔 앞에서는 누구도 이길 수 없다. 그래서 슬픔이나 고통은 누구도 대신해줄 수 없다고 말하는 것일까. 하지만 슬픔 뒤에 너의 눈은 시냇가의 맑은 꽃처럼 나를 바라본다고 한다.
이 짧은 시도 찬찬히 보면 2행 4연 구조를 갖추고 있다. 한 연이 다음 연에 對句하는 방식으로 쓰여진 시인데 영락없이 기승전결의 구조를 갖추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시에서 잘 짜여진 짜임새는 독자에게 시적 내용의 설득력을 갖게 된다. 그것이 외형적인 짜임새도 중요하지만 시에서도 갈등과 깨달음의 구조가 존재함으로 더욱 설득력을 가질 수 있다면 내용의 굴곡은 곧잘 필요하다고 할 수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