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까만 그을음에도 정갈스럽던 부엌 한쪽에 걸려있는 조리의 기억들 하루 두 세번은 필수적으로 사용해야 했던 우리 음식문화에서 빼놓을 수 없는 살림 도구의 하나인 조리.....
이 시대에는 벌써 저만치 밀려 사용하는 사람들을 촌스럽다고 까지 표현하고 있다.
하긴, 쌀을 물에 씻어 밥을 짓는 사람들조차 싸잡아 촌스럽다고 하는 게으른 주부들이 많은 세상이지만 그래도 아직도 복조리는 만들어지고 있었다.
흔히 복조리로 불리지만 과거에 이 지방에서는 조선조리라고 불렸다고 한다.
풍수상으로 옥녀직금형국(玉女織錦形局)이라는 입암산 아래에는 직조공장도 있지만, 복조리를 엮는 마을이 있었다.
입암산 북서방향 바로 산기슭에 있는 꽤나 큰 마을들 중 하나인 하부리일대 마을들,
하부리는 상부 원하부 가리대 만화동 평암 다섯 마을로 나뉘어 촌락을 이루고 있었다.
이 중 원하부 마을에서 오늘 아주 특별한 일이 벌어졌다.
온 마을 사람들이 마을회관에 모여 그 잘 쓰지도 않는 복조리를 만드는 날이기 때문이다.
지난 가을에 베어온 산죽을 다듬고 쪼개어 건조시키고 물에 불려 놓았다가 오늘 비로소 조리를 엮기 때문이다.
산죽은 요즘이야 입암산 방장산 일대에서 조금 베어다 만들지만 과거에는 이 마을 사람들은 조리의 원료인 산죽을 베기 위해 칠보 영원 고부 변산 순창 등지로 나가 온 마을 사람들이 산죽을 베었다고 한다. 며칠씩 숙소를 정해놓고 산죽을 베어 모아 화물차를 불러 옮겨왔다고 한다.
그것도 1년생 산죽을 골라야 한다.
산죽을 베는데도 아무때나 베어오는 것이 아니고, 처서가 지나고 추석 무렵에 베어 온 산죽이 가장 품질이 좋은 조리를 만들 수 있다고 한다.
산죽을 베어와 15일 정도를 건조와 더불어 각 과정을 거쳐야 조리를 만들 수 있다.
건조를 잘못하면 곰팡이가 생겨 조리를 만들 수가 없다. 건조과정이 제일 중요한 과정이다.
추석 전.후로 베어오고 가을 일 끝내고 또 산죽을 베어와 시간만 나면 산죽을 쪼개고 건조시키고 여러번 반복한다.
그 일은 겨울까지 계속된다. 주민들은 한가할 틈이 없었다.
지금부터 30여년전만 해도 이 마을의 주 소득원이 조리를 만들어 판매하는 것이었다.
겨울이 다가오면 온 주민들은 식구들과 둘러 앉아 그룹을 이루어 조리를 만들었는데 남자는 주로 베어온 산죽을 다듬어 반제품까지 만드는 일을 했고 중간 엮는 일은 아녀자들이 했으며 마무리는 또 남자가 했다.
한창 바쁠때면 7살먹은 아이들도 조리 만드는 일을 했다고 한다.
어린 나이지만 자연스레 그 일을 어깨 너머로 알아서 익혔다고 한다. 그렇기에 이 마을 사람들은 모두가 조리를 만들 줄 안다.
조리를 만드는 과정은 크게 나눠
산죽채취 - 크기에 맞게 잘라 쪼개고 - 햇볕에 건조시켜 - 작업 당일에 물에 불려 - 조리를 엮는다.
조리를 만드는 산죽의 원목은 볼펜보다 약간 가느다란 정도 굵기의 산죽 12개를 4조각으로 쪼개어 48개의 댓살을 만들어 조리를 만든다.
과거에는 지금의 조리보다 더 컸다. 가정용은 보통 5~7치 정도의 크기의 조리를 사용했고 11치 크기의 조리를 사용하는 집도 있었다.
시누대로 만들기도 하지만 시누대는 굵고 때깔이 좋지 않다고 했다.
산죽이 제일 품질이 좋다고 한다. 조리를 만드는 날은 3~4시간 정도 댓살을 물에 불리고 건조시켜야 복조리 만들기가 수월하다고 했다.
잘 만드는 집은 하루에 5질(50개 묶음이 1질)을 만들었다고 한다.
개인 작업이 아닌 온 식구의 공동작업이었다. 온 마을 사람들이 이 일을 해야 하는데 이것은 품앗이도 안되고 놉(삯일)도 살 수가 없었다고 한다.
다른 마을에는 그 조리를 만드는 사람이 없었다고 했다.
그런 사정이니 온 마을 사람들은 식구대로 일을 했다.
그렇게 조리를 만들어 어떤 집은 그 어려운 시대에 쌀 10가마값을 벌어들이기도 했다.
그때 쌀값을 지금에 비교하면 큰 오산이다.
한창 호황기에는 한해 겨울이면 이 마을에서만 60만개 정도가 만들어졌다.
트럭 10여대 분량의 조리가 서울 단골 상회로 팔려나갔다. 나머지는 설날이나 정월대보름에 판매했다고 한다.
복조리의 모양도 지역에 따라 약간씩 다른 모양이다
서울 조리는 조리 뒷쪽이 아가씨 뒷머리 처럼 세갈래로 엮어 볼록한 반면 이 마을 조리는 오목한 형태이고 담양쪽은 밋밋하다고 했다.
조리만들기는 백로(白露)때 부터 산죽채취로 일을 시작하여 이듬해 정월대보름날 수금하기까지 모든 과정을 끝내야 한다.
이런 힘든 과정이기에 지금의 인건비를 생각하면 도저히 만들 수가 없다.
그렇지만 손을 놓기에는 너무나 사연도 많고 아직은 미련도 많다. 손가락마다에는 굳은살과 찢어진 상처가 아직도 흉으로 남아있어 잊을 수도 없다.
정월 대보름이 지나면 수요는 끝이다. 복조리를 사는 사람들도 모두 정월대보름 이전에 장만한다.
가장 성수기는 설날과 정월대보름이다.
이때가 되면 이 마을 사람들은 복조리를 250~350여개를 짊어지고 각자 헤어져 판매에 나선다.
마을에서 멀리 장성 부안 신태인 지역도 가리지 않고 내키는 대로 마을에 들어가서 직접 판매하지 않고 담 너머로 반드시 조리 한짝(2개)을 던지고 지나간다.
집주인이 어떤 사람인지도 모르고, 그 담 너머 안주인의 사정을 알리가 없지만, 등에 지고 온 복조리를 이 마을 저 마을 집집마다 던져놓고 쉬었다가 해가 질 무렵이면 수금에 나서는데....
가격 흥정도 없이 허락도 없이 담 너머 던져 넣은 물건이기에, 오늘날이면 아마도 쓰레기 투척으로 고발 당할 일이겠지만 그 시대는 아무 말없이 돈이나 쌀을 건넸다.
자린고비들이 약간 에누리를 하려고도 하지만 거의 부르는 대로 돈을 건넸다고 한다.
또한 부담될 정도로 많은 가격을 달라고도 하지 않았다.
복조리를 파는 사람도 사는 사람도 福조리이기에, 또한 민속명절이기에 상부상조의 마음과 이 조리만드는 사람들의 어려운 과정을 알기에 흥정없는 장사를 했다. 참으로 멋진 거래였다. 물건을 파는 사람 맘이 아니라, 물건값을 주는 사람 맘이었다.
오늘날 같으면 가능했을까? 옛 사람들의 마음 씀씀이가 너그럽기만 하다.
설날과 정월대보름 두 날은 한해 일이 마무리되기에 설날은 제사도 모시지 못하고 이 일을 했다고 한다.
그렇지만 장사일에 비위가 없는 사람은 이런 장사를 하지도 못했다.
그 날들이 지나면 모든 것이 마무리된다.
그렇게 번 돈으로 자식을 가르쳐 도시로 보내고 혼사를 시켰다.
농사는 별 소득이 없었어도 복조리를 만드는 재주 하나로 살아왔다.
그러나 이제 이런 일에도 시대가 변해 어려움이 생겼다.
바로 산죽채취가 산림법에 저촉되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한번은 마을 노인들이 입암산 넘어 전남 경계로 들어가 산죽을 베다가 단속반원에 걸려 장성까지 실려가 조사받고 벌금 5만원을 물었다. 원래 50여만원이 넘는 벌금인데 노인들의 사정을 듣고 정상 참작하여 눈감아준 것이다.
나중에 행정을 통하여 그 내막을 전해 듣고 벌금을 되돌려 주려 찾아왔었다고 했다.
이 또한 인정이었다.
이날 복조리를 만드는 것도 관계부처의 협조를 얻어 산죽을 채취해야만 했다.
그렇지 않으면 산불감시원이나 국립공원관리소에 적발 당한다고 했다.
그렇지만 행위 자체가 위반이니 그 사람들 탓 할 수도 없단다.
산죽은 해마다 베어내도 그 자리에서 다시 나온다고 했다 . 조상 대대로 그렇게 살아왔다. 그 자리에서 베어낸 산죽에서 소득을 얻었고 다음해에도 소득을 주는 삶이 이어진 것이다.
입암산 산죽과 이 마을 사람들이 복조리 얽히듯 공존공생하고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그런 삶을 법과 새로운 문화가 가로막고 있었다.
이젠 주민들이 모두 연로하여 산죽 채취도 어렵고 수요도 없으니 이 마을의 복조리 만드는 일도 저 노인세대가 지나면 역사속으로 사라진다. 마을 젊은이 몇 분을 만나 조리를 만들 줄 아느냐고 물었더니 어릴 때 지겹게도 만들었다면서 고개를 절래 절래 한다.
돈도 안되는 이 일을 그 젊은이들이 맥을 잇기에는 이미 물건너 갔다.
10여년전만 해도 이렇게 살림에 보탬이 되는 복조리를 만들었지만 시대가 변해 이제는 소일꺼리에 불과하다. 오늘 이 행사도 모 부서에서 선물용으로 주문이 들어와 꺼리가 생겼을 뿐이다.
지금도 가끔씩 주문이 오지만 산죽 채취량이 적어 한계가 있단다.
미리 1주일 전에 연락을 주면 만들어진다고 했다.
여기에서 나온 수익금은 온 마을 사람들이 마을 기금으로 활용한다고 했다.
이날 마을회관에는 50여분의 마을 사람들이 모여 점심을 먹었는데, 겨울이면 날마다 이렇게 한데모여 점심을 먹는다고 했다.
조그만 농지가 마을 재산으로 되어있어 공동으로 농사지은 쌀을 여기에서 만든 복조리로 쌀의 뉘를 골라내어 밥을 지어 먹는다.
사라지는 전통문화가 너무도 아쉽지만 이 조리를 만들어 주민들이 공동체를 이루는 모습과 시골 마을의 정겨움에 복조리 가득 福을 담은 모습이 너무나 아름답기만 하다.
첫댓글 오랫만에 맛갈난 글과 사진이 반가워용
꼬불쳐놓았던 글 퍼다 옮길랍니다 ㅎㅎㅎ
재밌게 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