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제1부 폭풍전야
제1장 유신과 저항
7.함평고구마 사건
조직적 생존권투쟁 '농민운동 새장'
기만적 수매정책에 생산농 분노 폭발
농협, 깡패들 동원 [입매확인서] 받아가
[가농] 중심 전국서 단식동참...끝내 농협굴북 보상
[농민의 피와 땀이 범벅된 고구마가 노변에서 눈비를 맞고 굴러 밟히는 것은 곧 농민이 짓밟히는 것과 다름없다.]
1976년 11월 23일 오전 10시. 함평극장앞 청하식당.
농협이 고구마를 전량수매해줄 것으로 철석같이 믿고 있다가 수매시기를 놓치고 애써 가꾼 고구마를 길거리에 내다 썩혀야만 했던 함평농민 들이 대책마련을 위해 하나둘씩 모여든다.
북풍에 진눈깨비가 몰이치는 영하의 초겨울 날씨를 마다않고 10개 마을 농민 17명이 난로불도 피워지지 않는 침침한 방에 모여 긴장된 마음을 달래기라도 하듯 연신 담배를 피워댄다.
농협이 약속한 고시가격 1천3백17원(1포. 15관들이)이 문제가 아니고 상인들에게 거저 헐값인 8백-9백원에 내다팔고 있다. 심한 곳은 2백원 3백원에, 그것도 애걸하다시피 해가며 팔아넘기고 있을정도로 심각하다는 얘기가 오간다.
일제에 일침을 가하고 토착지주들의 간담을 서늘케한 1920년대 암태도 소작쟁의이후 6.25를 거치면서 50-60년대에 단절상태에 놓인 농민운동의 새 장을 여는 함평고구마사건은 이렇게 시작된다.
가톨릭농민회 광주.전남지회를 결성, 함평에서 활동을 전개해온 서경원(전 평민당 국회의원.진주교도소복역중)과 노금노(함평신협감사. 당시 외대화분회장), 임정택 임재상 김양혁 등 5명은 이 모임을 열기 6일전인 11월 17일 처음으로 만나 고구마문제를 해결키 위한 함평군 농민대표자 맘을 이날 소집하기로 결정한다.
농민들이 겪고 있는 고충들이 적나라하게 터져나온이날 모임은 조직적으로 고구마 수매 주정 전말을 세상에 고발하는 단초가 될 줄은 아무도 알지 못한다.
노금노씨는 당시를 이렇게 당시를 떠올린다. [농협이 예년에 비해 20일정도 늦게 수매를 시작했다. 10월까지도 계속 수매한다고해서 거리에 고구마를 내놓았으나 수매가 되지 않음으로써 썩히기 일쑤였다.]
[농민들이 농협수매를 기대하기 어렵자 중간상인들에게 팔려고 하면 상인들은 이미 담아놓은 농협전용수매포대를 비우라고 요구한다. 일반포대로 바꾸면 4백 30포대이던 것이 70포대나 줄어드는 경우도 있었다.]
농민대표자들은 이같은 한스런 얘기를 집약한다. 그리고 이날 구성된 대책위가 각 농가별 피해상황등을 조사하고 농협군조합을 찾아가 보상투쟁을 주도할 것을 결의한다.
임정택이 위원장, 김양역이 조사집계원, 노금노가 교육조직을 맡고 서경원이 도단위와 전국단위의 대외교섭을 맡아 활동에 나선다.
농협측은 그러나 아직까지 수매가 안된 고구마가 없다고 둘러댄다.
그러다가 잔량이 있다면 수매하겠다고 속임수를 쓴다.
이에 농민들이 울분을 터뜨린다.
농협을 찾아가 거친 항의를 한다.
경찰이 개입, 농민탄압을 자행한다.
고구마 피해를 조사하는 농민들이 연행되고 활동을 계속할 경우 긴급조치로 집어넣겠다는 협박까지 해댄다.
서와 노는 커다란 의혹이 있을 거란 심증을 굳히고 더욱 조직적인 활동에 들어간다.
농협은 이때부터 썩어 길거리에 내팽개쳐 고구마더미를 차를 동원, 어디론가 실어 나른다.
고구마더미가 농민들의 울분을 더욱 부채질하고 자극한다는 상부의 지시에 따른 조치다.
이는 중대한 실수로 나타난다.
농협이 상인들을 끌어들여 농민들에게 대금을 농협이 지급한다고 설득, 고구마를 실어 갔으나 대금을 지불하지 못해 농민들의 거센반발을 불러 일으켰기 때문이다.
서와 노, 임정택은 경찰의 탄압과 농협의 악랄한 방해로 11월 30일까지 완료키로 한 피해조사를 12월 1일이 되어도 한건도 매듭짓지 못한다.
결국 20일간의 피나는 투쟁끝에 피해조사를 마친다.
피해액이 산출된 농가는 1읍 4개면 9개마을 1백 79농가중 1백 60가구로서 3년후 승리로 이끄는 결정적 단서가 된다.
그로부터 22일후, 77년 1월 11일 함평 천주교회 마당. 피해농가대표, 농민회임원들이 모여 그동안 조사결과 드러난 피해액을 농협측에 밝힌다.
빠른 시일내에 전액보상할 것과 그에 대한 회답이 18일까지 없을 경우 보상이 이뤄질 때까지 투쟁한다고 결의문을 채택한다.
가톨릭농민회 전국대의원회와 전남연합회 회원총회에 피해농민들의 뜨거운 의지가 전달되기에 이른다.
경찰은 이 결의내용을 긴급 조치 9호 위반으로 규정, 농민들을 연행한다.
탄압이 계속된다. 위협도 심하다.
농협은 이에 편승, 지정수매원인 이장들과 깡패를 앞세워 마을을 돌며 농민들로부터 반강요식으로 확인서를 받아간다.
내용은 이렇다. [본인의 영농형편상 상인에게 판매하였으므로 농협 등 기타기관에 대해서 하등의 이의가 없음을 확인합니다.]
이로 인해 농민들의 사기가 크게 떨어진다.
농민들이 축적한 힘이 수그러들고 분열모습도 보인다.
싸움은 그러나 끝나지 않고 전국적인 관심사로 떠오른다.
1월 31일. 카농대전본부, 광주연합회, 현장대책위 합동회의가 열려 연합회총회에 정식보고하고, 도단위 차원에서 대응키로한다.
광주에서 협상테이블이 마련된다. 하나 허사로 달아간다.
함평고구마피해보상대책위가 낸 [함평 고구마생산농가의 피해내막과 경과]를 토대로 전남지구연합회는 관계기관에 해결을 촉구하는 건의문을 채택한다.
전남도경측과 협상까지 벌인다. 소득은 얻어내지 못한다.
3월 7일. 농협은 오히려 고구마생산농가를 이 농협과 재배계약을 맺지도 않았고, 농협이 전량을 수매하겠다고 약속한 적이 없으니 책임이 없다는 해명뿐이다.
이에 대한 농민들의 분노는 하늘을 찌르는 기세다. 결국 연합회도 농락을 당한 셈이다.
3월말 월간지 [대화]에는 그동안의 사건경과와 대책위 입장이 자세히 보도된다.
4월 22일 오전 계림동천주교회.
해남 함평 무안 강진 신안 영광등에서 올라온 농민 5백여명과 투구를 쓰고 곤봉을 든 전투경찰 1백여명이 위기일발상태로 대치중이다.
함평고구마사건을 해결하기 위한 전국농민대회를 마친 농민들이 오후4시께 스크럼을 짜고 붉은 글씨로 [고구마피해 보상하라]고 쓴 띠를 머리에 동여맨 채 농협지도회로 향한다.
경찰의 강한 제지에 부딪혀 뿔뿔이 흩어졌다가 오후 6시 도지부 앞광장에 1백70여명이 모여 농성을 벌인다.
경찰은 무차별공격에 나서고 농민들은 곤봉과 군화발에 짓밟히고 끌려간다.
이튿날. 연합회대표 대책위원들은 천주교 지도부신부의 주선으로 도청을 방문, 고건지사를 만난다.
지사가 농수산부의 현지조사를 토대로 대책을 강구하겠다고 약속한다.
그리고 농수산부와 농협중앙회가 25일부터 5월 2일까지 현지실태조사에 나선다.
이때부터 농림수산부의 현지조사단 파견으로 공식개입을 선언한 정부는 말단행정기관을 동원, 조직적으로 농민들을 탄압한다. 이를 계기로 농민들의 싸움도 크게 성격이 바뀐다.
농민운동가들은 그 의미를 이렇게 평가한다. [지난 7개월동안은 정부의 시녀로 전락한 반농민적 농협에 의해 막대한 피해를 당한 농민들이 자신들의 정당한 보상을 위해 싸운 자발적이고 주체적인 싸움이었다. 이제는 농민소외를 기축으로 하는 농업정책에 대한, 보다 본질적으로는 유신독재체재에 대한 가톨릭농민회의 조직단체 싸움으로 바뀐다.]
이처럼 함평 고구마사건은 그 파장이 커져간다.
그해 (1977년) 6월 서울 동대문천주교기도회, 8월17일 전국기독교청년 부산대회, 11월22일 전국농민대회 대전집회 등으로 확산된다. 하지만 12월 노금노집등 초가집 5채 강제철거사건, 88년 2월 고구마사건을 둘러싼 감사원의 폭력감사등 탄압은 더욱 노골화된다.
사건발생 3년후. 78년 4월 24일. 광주북동천주교회. 경찰의 폭력에 맞서 7백여 농민들이 집단난투극을 벌이고 집단 단식투쟁이 시작된다.
지도신부인 장홍빈(전남) 이총창(전주) 신현봉(원주) 정규완(광주)을 비롯 함평의 서경원 노금노 임정택, 해남의 정광훈 윤기현, 강진의 김현장, 구예주의 이강 윤한봉 정태성 황광우 등 전남출신 44명이 단식투쟁을 본격화한다.
경북의 권종대, 충남의 이길재등 타지에서도 29명이 참여한다. 단식 3일째. 27일엔 윤공희 대주교가 단식현장을 방문, 위로기도를 올린다. 광주대교구산하 60여명의 신부도 적극 동참하게 된다.
문익환목사와 서울의 양심의 인사들도 찾아온다. 그리고 단식 5일째. 승리의 날을 맞는다.
마침내 농협중앙회가 무릎을 끓고만다.
78년 4월 29일 오후 4시 30분. 농협이 피해농민 1백 59농가에 3백 9만원을 보상한다는 제의를 한다.
단식농성자들이 수락한다.
이로써 함평고구마사건은 일단락된다.
그로부터 8일뒤. 5월 6일. 전국의 일간신문은 [농협 고구마수매자금 80억 유용][단군이래 최대의 부정사건][농협임직원 6백59명 무더기 징계]등으로 대서특필한다.
동아일보는 이렇게 보도하고 있다. [전남북.경남북 농협도지부산하 단위조합에서 지난 76년과 77년 2년동안 고구마수매를 위장 또는 조작, 농협자금 약 80억원(생고구마 24만6천t 상당)을 유용한 사실이 6일 밝혀졌다.
감사원 조사결과에 따르면 농가로부터 제때에 고구마를 직접 수매하여 주정회사에 공급해야할 일부 단위조합이 주정회사나 중간상인과 결탁하여 중간상으로부터 수매한 것처럼 꾸몄다.
또 현물을 수매하거나 인도한 사실이 없는데로 고구마를 수매하여 주정회사에 공급한 것처럼 농산물 가격안정기금의 일부가 들어 있는 거액의 농협자금을 회사측에 준것이다...]
<배승화기자>
첫댓글 감사합니다.
5.18민주화 운동에 관심이 많답니다.
하루 연재글 양을 늘려 줄수 없나요.
무리한 부탁 드려 죄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