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세상에서 인간이 즐기는 수많은 스포츠 중에서
골프만큼 많은 적을 가지고 있는 스포츠도 없다고 한다.
기스라도 나면 어쩌나 애지중지하며 한없는 사랑을 주어도 언제나 모자란 듯
필드만 나가면 골퍼를 배신하는 14개의 클럽.
그리고 바람, 나무, 물, 모래, 맘 속에 일렁이는 욕심과 함께하는 경쟁자들.
바둑이나 무술이 수많은 단계를 거쳐 결국 입신(入神)의 경지에 이르듯
골프도 수많은 단계를 거쳐서 완성된다.
골퍼에게 적용되는 14단계 등급, 소위 말하는 구골오작위(九骨五作慰)가 있다.
지금쯤 나는 어느 단계에 속할까?
골퍼라면 한 번 쯤은 자문해 볼 필요가 있다.
<1단계 : 골졸(骨卒)>
매너와 샷 모두 치졸함을 벗어나지 못한 왕 초보의 단계.
골프채를 든 것만으로 골퍼인 체 한다.
잘 맞지 않는 날에는 캐디를 탓하고,
벙커 샷 후에도 스스로 벙커 수리는 하지 않으며,
19홀에서 동반자에게 술에 취해 고성방가 하는 것으로 화풀이 한다.
연습도 소홀하게 하면서 좋은 결과만을 기대하고
연습하다가 어깨에 약간의 담이 결린 것을 갈비뼈가 나갔다고
주변사람에게 자랑스럽게 떠든다.
18홀에서 드라이버를 14번은 잡아야 골퍼라고 굳게 믿으며
섹스가 골프보다 우선한다고 생각한다.
라운드 중에도 캐디 언니에게 끊임없는 수작을 건다.
<2단계 : 골사(骨肆)>
자신이 골프에 엄청난 재능이 있다고 굳게 착각하는 단계.
100파를 하고 가끔씩 치는 90대 초반의 스코어와 내기에서 이기기라도 하면
골프에 대해 모르는 것이 없는 듯 기고만장 한다.
연습장에서 허풍이 세어지기 시작하며 비싼 값의 장비에 눈독을 들인다.
연습장에 열심히 나가고 고수에 대한 동경이 시작되지만
캐디에게 태클과 작업성 기술은 변함없이 계속 들어가는 단계다.
<3단계 : 골마(骨麻)>
밥상의 반찬이 홀 컵으로 보이기 시작하며 누워서 천장을 보면
그림 같은 페어웨이 속에 해저드가 보이는 초기 중독의 단계.
홍역을 앓듯 밤이나 낮이나 빨간 깃발이 눈앞에 어른거리고
필드에 못 가면 한 주 내내 끙끙 앓는다.
아내의 바가지도 불사, 친구, 친지의 결혼식 불사, 결근도 불사,
오직 골프가 아니면 나에게 죽음을………………
동네 연습장에 늘 살다시피 하면서
라이벌에게는 회사 일이 바빠서 연습은 거의 못한다고 너스레를 떤다.
80대 중반의 스코어를 가끔 기록하면서 스푼으로 티 샷을 하는 법을 배운다.
로브 웨지를 사서 한껏 멋을 부리지만 뒤 땅과 쪼루가 연속된다.
<4단계 : 골상(骨孀)>
드디어 아내는 주말 과부는 필수, 주중 과부는 선택이 되는 단계다.
직장생활이 제대로 될 수 없다.
집에 쌀이 있는지, 자식이 대학에 붙었는지, 아내가 이혼소송을 했는지도 모르고,
골프가 인생 최고의 목표이자 삶의 의미가 된다.
첫 싱글의 길목에서 수 없는 좌절을 겪는다.
비거리를 우선으로 클럽을 교환하는 우를 범하기도 하면서
클럽과 공의 중요성을 깨닫기 시작한다.
고수가 그린 보수를 하는 것을 곁눈질로 배우며 벙커 수리에 신경을 쓰고
주변에 있는 친한 사람 모두에게 골프를 적극적으로 권장하며
연습장에선 훈수와 참견에 여념이 없다.
동반자에게 훈수를 하면서 필드에서 입은 깊은 내상을 치료하려 노력하지만
집에 가는 길에서 운전대를 잡고 수없이 눈물을 흘리곤 한다.
<5단계 : 골포(骨怖)>
드라이버, 아이언, 어프로치, 전부 깔끔하게 잘 되었지만 퍼팅이 안되던가
다른 세 가지를 모두 잘했는데 드라이버 오비로 싱글을 하지 못하고
80타 주변을 오락가락 헤메는 고행의 단계.
인생 최초로 골프에 대한 진정한 고민과 함께 좌절을 하기 시작한다.
골프에 회의를 느끼고 골프가 인생을 망칠지도 모른다고 우려한다.
아내와 자식들은 '돌아온 아빠'를 기쁨 반, 우려 반으로 반기지만
TV의 골프중계를 보면서 절망은 어리석은 자의 선택이라며
싱글로 가는 굳은 각오를 다지며 다시 연습장으로 발길을 돌린다.
골프란 스포츠가 아니라 구도의 길이 아닐까 고민하면서…………
<6단계 : 골차(骨且)>
인생을 망칠지도 모른다는 공포의 골프채가 다시 동반자로 보이는 단계.
샷이나 매너가 한결 성숙해져 골프채는 기쁨을 위한 도구가 된다.
그린에서는 잔디의 방향을 이해하여 퍼팅을 시작하고
바람과 라이에 대한 개념과 트러블 샷에 대한 나름의 정의가 생긴다.
로브웨지의 용도와 거리감에 익숙해지면서 어느 날 싱글패를 받고 무차별 쏘지만,
그러나 골프의 심오한 세계를 알기에는 아직도 역부족이다.
<7단계 : 골궁(骨窮)>
구질을 알고 자신의 스윙을 분석하면서 드로우와 페이드를 연습하는 단계.
연습장에서 훈수하는 방법이 상당히 세련되어 진다.
이븐이나 언더파를 노려보지만 여덟 번은 80대 초반이고 두 번 정도는 70대 후반을 친다.
겸손한 골퍼인가 졸속 골퍼인가로 구분되기 시작하는 아주 중요한 단계다.
캐디에 대한 예의도 바르고 나쁜 스코어는 하수들과의 라운드 때문이라며
스스로 자위하는 등 아직도 하수의 때를 벗지 못한다.
<8단계 : 남작(藍作)>
인생을 담고 세월을 품는 넉넉한 기쁨이 페어웨이에 있다.
펼쳐진 그린 앞에 한없이 겸손함을 느끼며
버디를 기다리는 것이지 절대로 버디를 찾아 경거망동하지 않는다.
내기를 즐기되 결코 내기에 사로잡히지 않으며
동반자와 쉽게 친하되 경망스럽게 라운딩 중에는 참견이나 훈수를 하지 않는다.
연습장에서 초보자가 물어도 아주 겸손하게 상의하듯이 대답하고
라운드의 복장이나 매너에 굉장히 신경을 쓴다.
라운드의 대부분이 70대 스코어를 기록하는 고수의 길로 접어든다.
그 동안 당한 골프에서의 손실을 하수에서 찾으려 하는 卒 같은 싱글과
겸손하고 멋진 싱글 골퍼로 다시 한번 나누어지는 단계다.
<9단계 : 자작(慈作)>
마음에 자비의 싹이 트는 심오한 단계.
거짓없는 자연과 한 몸이 되면서
스코어보다는 대자연 속에서 좋은 친구들과 함께 할 수 있음에 감사한다.
골프를 치면서 자기 자신까지 잊을 수 있는 무심의 경지에 이르기도 한다.
내기 욕심이 완전히 사라지고 스코어와 샷에 대한 욕심도 절대로 내색하지 않는다.
한번의 스윙에서 샤프트를 타고 흐르는 샷의 의미를 전율처럼 느껴지기 시작한다.
내기에서도 자신이 잘 쳐서 이기려고 하지
절대로 동반자가 무너지기를 기대하지 않고 이븐 파와 언더 파의 주변에서 맴돈다.
<10단계 : 백작(百作)>
한 번의 라운드에도 백 번의 라운드를 경험한다.
그러나 아직도 참으로 배울 것이 많으니
골프의 지혜를 하나하나 깨우치는 기쁨에 세월의 흐름을 알지 못한다.
비로소 골프라는 심오한 운동에 대한 깊은 이해가 시작된다.
인간은 골프라는 위대한 존재 앞에 한없이 초라한 미물임을 깨닫는 날,
골프 인생에서 최초의 언더파를 기록한다.
<11단계 : 후작(厚作)>
마음 안에 두터운 믿음을 만드는 단계.
해탈을 위한 작은 노력이 시작되고 골프 도(道)의 깊이가 상당한 수준에 도달한다.
지혜와 샷은 심오한 내공으로 깊게 갈무리되어 범인들은 도저히 그 깊이를 알 수 없다.
연습장이나 필드에서 있는 듯 없는 듯 존재한다.
섣불리 골퍼임을 말하지도, 드러내지도 않으며,
행동 하나 하나에 연륜과 무게가 엿보인다.
내공은 경지에 도달하고 초식엔 화려함이 모두 사라지고 극도로 단순해진다.
골프 도(道)의 깊이를 가름할 수 없는 인간의 한계를 벗어나기 시작한 단계.
<12단계 :공작(空作)>
모든 것을 다 비우는 무아지경의 단계.
골프를 통해 삶의 진리를 모두 깨달았으며
우주의 신비 또한 이해되는 입신의 경지에 거의 도달한 상태다.
지나온 골프 인생을 무심한 미소로 돌아보며 조용하게 신선이 되는 때를 기다린다.
혼자 조용하게 해탈할 것인가 중생들 모두를 두루두루 함께
깨달음의 세상으로 인도할 것인가 가름되는 단계.
<13단계 : 골선(骨仙)>
수없이 많은 골프의 희노애락을 겪은 후에
드디어 입신의 경지에 이르는 깨달음의 세계.
도인이나 신선이 됨을 뜻하며
대자연의 윤회를 벗어나 대승적인 관점에서 해탈을 준비한다.
골프도 없고 골퍼도 없어지는 무상의 세상이 펼쳐진다.
<14단계 : 골성(骨聖)>
무아의 경지로 피안에 도달하는 마지막 단계.
중생의 슬픔을 외면 않고
어둠을 질러오는 한 세상의 아픔도 결코 외면하는 법이 없다.
드디어 신이 되어 선계로 오른다.
인생의 모든 부분에 스스로의 도가 튼 무아지경의 황홀을 경험한다.
<김흥구의 골프세계 - 골프의 14단계>에서 인용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