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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유 무술 일기 - 20매 (1597.8 - 1598.1)
◎ 난중일기(亂中日記) - 정유년 8월 (1597년 8월)
◉ 1597년 8월 초1일 [양력 9월 11일]<기유> 큰비가 와서 물이 넘쳤다.
저녁나절에 소촌찰방 이시경(李蓍慶)이 와서 봤다. 조신옥(趙信玉)·홍대방(洪大邦) 등이 와서 봤다.
◉ 1597년 8월 초2일 [양력 9월 12일]<경술> 잠시 개었다.
홀로 수루의 마루에 앉았으니 그리움을 어찌하랴! 비통할 따름이다. 이날 밤 꿈에 임금의 명령을 받을 징조가 있었다.
◉ 1597년 8월 3일 [양력 9월 13일]<신해> 맑다.
이른 아침에 선전관 양호(梁護)가 뜻밖에 교유서를 가지고 왔다. 명령은 곧 겸 삼도수군통제사의 임명이다. 숙배를 한 뒤에 다만 받들어 받았다는 글월을 써서 봉하고, 곧 떠나 두치(豆恥)로 가는 길로 곧 바로 갔다. 초저녁에 행보역(하동군 횡천면 여의리)에 이르러 말을 쉬고, 한밤 12시에 길을 떠나 두치에 이르니, 날이 새려했다. 남해현령 박대남(朴大男)은 길을 잘못 들어 강정(江亭: 하동읍 서해량 홍수통제소 서쪽 섬진강가)으로 들어갔다. 그래서 말에서 내려 기다렸다가 불러와서, 쌍계동에 이르니, 길에 돌이 어지러이 솟아있고, 비가 와 물이 넘쳐흘러 간신히 건넜다. 석주관(구례군 토지면 송정리)에 이르니, 이원춘(李元春)과 류해가 복병하여 지키다가 나를 보고 적을 토벌할 일을 많이 말했다. 저물어서 구례현에 이르니, 일대가 온통 쓸쓸하다. 성 북문(구례읍 북봉리) 밖에 전날의 주인집으로 가서 잤는데, 주인은 이미 산골로 피난 갔다고 했다. 손인필(孫仁弼)은 바로 와서 볼 겸하여 곡식까지 가져 왔다. 손응남(孫應男)은 올 감(早枾)을 바쳤다.
◉ 1597년 8월 4일 [양력 9월 14일]<임술> 맑다.
□□을 보내 왔다. 다시 들어와 관청을 보았다. 아침밥을 먹은 뒤에 압록 강원(곡성군 오곡면 압록리)에 이르러 점심밥을 짓고 말의 병을 고쳤다. 고산현감 최진강(崔鎭剛)이 군인을 교체 할 일로 와서 수군의 일을 많이 말했다. 낮에 곡성(곡성군 곡성읍 읍내리 713-2번지)에 이르니, 관청(곡성현감:崔忠儉)과 여염집이 한결같이 비어 있고, 사람 사는 기척이 끊어졌다. 이 일대에는 온통 비어있고 말먹일 풀도 구하기 어려웠다. 그 현청에서 잤다. 남해현령 박대남(朴大男)은 곧장 남원으로 갔다.
◉ 1597년 8월 5일 [양력 9월 15일]<계해> 맑다.
거느리고 온 군사를 인계할 곳이 없다고 하면서 이제 이원에 이르러 병마사가 경솔히 물러난 것을 원망하는 것이었다. 아침을 먹은 뒤에 옥과(곡성군 옥과읍)땅에 이르니, 피난민이 길에 가득 찼다. 남자와 여자가 부축하고 걸어가는 것이 차마 볼 수 없었다. 울면서 말하기를 `사또가 다시 오셨으니 우리들은 이제야 살았다'고 했다. 길가에 큰 홰나무 정자가 있기에 말에서 내려 타일렀다. 옥과현에 들어갈 때, 순천에서 이기남(李奇男)의 부자를 만나 함께 현에 이르니, 정사준(鄭思竣)·정사립(鄭思立)이 와서 마중 했다. 옥과 현감(홍요좌)은 병을 핑계 삼아 나오지 않았다. 잡아다 죄주려 하니 그제야 나와서 봤다.
◉ 1597년 8월 6일 [양력 9월 16일]<갑자> 맑다.
이 날은 옥과에서 머물렀다. 초저녁에 송대립(宋大立)이 적을 정탐하고 왔다.
◉ 1597년 8월 7일 [양력 9월 17일]<을축> 맑다.
일찍 길을 떠나 곧장 순천으로 갔다. 고을에서 십리쯤 되는 길에서 선전관 원집(元潗)을 만나 임금의 분부를 받았다. 길옆에 앉아서 읽어보니 병마사가 거느렸던 군사들이 모두 패하여 돌아가는 길이 줄을 이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말 세 필과 활과 살을 약간 빼앗아 왔다. 곡성현 석곡 강정(석곡면 능파2구 능암리 3490번지 일대)에서 잤다.
◉ 1597년 8월 8일 [양력 9월 18일]<병인>
곧바로 부유창으로 가다가 중도에서 이형립(李亨立)을 병마사에게로 보냈다. 새벽에 떠나 부유창(순천시 주암면 창촌리)에서 아침밥을 먹는데, 이곳은 병마사 이복남(李福男)이 이미 부하들에게 명령하여 불을 질렀다. 다만 타다 남은 재만 있어 보기에도 처참하였다. 광양현감 구덕령(具德齡)·나주판관 원종의(元宗義)·옥구 원(홍요좌) 등이 창고바닥에 숨어 있다가 내가 왔단 말을 듣고 배경남(裵慶男)과 함께 구치(鳩峙: 순천시 주암면 행정리 접치 마을)로 급히 달아났다. 내가 말에서 내려 곧 전령을 내렸더니, 한꺼번에 와서 절을 하였다. 나는 피해 돌아다니는 것을 들추어서 꾸짖었더니, 다들 그 죄를 병사 이복남(李福男)에게로 돌리었다. 곧 길을 떠나 순천에 이르니, 성 안팎에 사람 발자취가 하나도 없어 적막했다. 오직 절에 있는 중 혜희(慧熙)가 와서 알현하므로 의병장의 사령장을 주었다. 저물어서 순천에 이르니 관사와 곳간의 곡식 및 군기 등 물건은 옛날과 같다. 병마사가 처치하지 않은 채 달아났다. 참으로 놀랄 일이었다. 총통 같은 것은 옮겨 묻고, 장전(長箭)과 편전(片箭)은 군관들이 져 나르게 하고, 총통과 운반하기 어려운 것들은 깊이 묻고 표를 세웠다. 그대로 순천부사가 있는 방에서 머물러 잤다.
◉ 1597년 8월 9일 [양력 9월 19일]<정묘> 맑다.
일찍 떠나 낙안 군에 이르니, 오리까지나 사람들이 많이 나와 환영하였다. 백성들이 달아나고 흩어진 까닭을 물으니, 모두 하는 말이, "병마사가 적이 쳐들어온다고 퍼뜨리며 창고에 불을 지르고 달아났다. 그 때문에 이와 같이 백성들도 뿔뿔이 흩어졌다."고 했다. 관청에 들어가니 적막하여 사람의 소리가 없었다. 순천부사 우치적(禹致績)·김제군수 고봉상(高鳳翔) 등이 와서, 산골에서 내려와서, 병마사의 처사가 뒤죽박죽 이었다고 말하면서 하는 짓을 짐작했다고 하니, 패망한 것을 알만하다. 관청과 창고가 모두 다 타버리고 관리와 마을 사람들이 흐르는 눈물을 가누지 못하고서 말하였다. 점심을 먹은 뒤에 길을 떠나 십리쯤 오니, 길가에 동네 어른들이 늘어서서 술병을 다투어 바치는 데, 받지 않으면 울면서 억지로 권했다. 저녁에 보성군 조양창(조성면 조성리)에 이르니, 사람은 하나도 없고, 창고에는 곡식이 묶여진 채 그대로였다. 그래서 군관 네 명을 시켜 지키게 하고, 나는 김안도(金安道)의 집에서 잤다. 그 집 주인은 벌써 피난 나가 버렸다.
◉ 1597년 8월 10일 [양력 9월 20일]<무진> 맑다.
몸이 몹시 불편하여 그대로 김안도(金安道)의 집에 머물렀다. 동지 배흥립(裵興立)도 같이 머물렀다.
◉ 1597년 8월 11일 [양력 9월 21일]<기사> 맑다.
아침에 박곡(朴谷) 양상원(梁山沅)의 집으로 옮겼다. 이 집 주인도 벌써 바다로 피란 갔고 곡식은 가득 쌓여 있었다. 저녁나절에 송희립(宋希立)·최대성(崔大晟)이 와서 봤다.
◉ 1597년 8월 12일 [양력 9월 22일]<경오> 맑다.
아침에 장계를 초 잡고 그대로 머물렀다. 저녁나절에 거제현령(안위)·발포만호(소계남)가 들어와 명령을 들었다. 그들 편에 경상수사 배설(裵楔)의 겁내던 꼴을 들으니, 더욱 한탄스러움을 이길 길이 없다. 권세 있는 집안에 아첨이나 하여 감당해내지도 못할 지위에까지 올라 나랏일을 크게 그릇 치것 마는 조정에서 살피지 못하고 있으니 어찌하랴. 보성군수가 왔다.
◉ 1597년 8월 13일 [양력 9월 23일]<신미> 맑다.
거제현령 안위(安衛) 및 발포만호 소계남(蘇季男)이 와서 인사하고 돌아갔다. 수사(배설)와 여러 장수 및 피해 나온 사람들이 머무는 곳을 들었다. 우후 이몽구(李夢龜)가 전령을 받고 들어 왔는데, 본영의 군기를 하나도 옮겨 실어 오지 않은 죄로 곤장 여든 대를 쳐서 보냈다. 하동현감 신진(申진)이 와서, "초 3일에 내가 떠난 뒤에 진주 정개산성과 벽견산성도 풀어 흩어지니 병마사가 바깥 진(外陣)을 제 손으로 불을 질렀다."고 전하였다. 참으로 통탄할 일이다.
◉ 1597년 8월 14일 [양력 9월 24일]<임신>
아침에 각각으로 장계 일곱 통을 봉하여 윤선각(尹先覺)으로 하여금 지니고 가게 했다. 저녁에 어사 임몽정(任夢正)을 만나러 보성에 갔다가 열선루에서 잤다. 밤에 큰비가 쏟아지듯 내렸다.
◉ 1597년 8월 15일 [양력 9월 25일]<계유> 비 오다가 저녁나절에 맑게 개었다.
식사를 하고 난 뒤에 열선 루 위에 앉아 있으니, 선전관 박천봉(朴天鳳)이 임금의 분부를 가지고 왔는데, 그것은 8월 7일에 만들어진 공문이었다. 영의정은 경기 지방으로 나가 순시중이라고 했다. 곧 잘 받들어 받았다는 장계를 썼다. 보성의 군기를 검열하여 네 말에 나누어 실었다. 저녁에 밝은 달이 수루 위를 비추니 심회가 편치 않았다. 술을 너무 많이 마셔 잠을 자지 못했다.
◉ 1597년 8월 16일 [양력 9월 26일]<갑술> 맑다.
아침에 보성군수와 군관 등을 굴암으로 보내어 도피한 관리들을 찾아오게 했다. 선전관 박천봉(朴天鳳)이 돌아갔다. 그래서 나주 목사와 어사 임몽정에게 답장을 부쳤다. 박사명(朴士明)의 집에 심부름꾼을 보냈더니, 박사명의 집은 이미 비어 있었다고 한다. 오후에 활 장이 지이(智伊)와 태귀생(太貴生)·선의(先衣)·대남(大男) 등이 들어왔다. 김희방(金希方)·김붕만(金鵬萬)이 뒤따라 왔다.
◉ 1597년 8월 17일 [양력 9월 27일]<을해> 맑다.
아침식사를 하고 나서, 장흥땅 백사정(장흥읍 원도리)에 이르러 말을 먹였다. 점심을 먹은 뒤에 군영구미(장흥군 안양면 해창리)에 이르니, 일대가 모두 무인지경이 되어 버렸다. 수사 배설(裵楔)은 내가 탈 배를 보내지 않았다. 장흥의 군량감관과 색리가 군량을 맘대로 모조리 훔쳐 나누어 갈 적에 마침 그 때 이르러 잡아다가 호되게 곤장을 쳤다. 거기서 잤다. 배설(裵楔)의 약속을 어기는 것이 괘씸하다.
◉ 1597년 8월 18일 [양력 9월 28일]<병자> 맑다.
늦은 아침에 곧바로 회령포에 갔더니, 경상수사 배설(裵楔)이 멀미를 핑계를 대므로 보지 않았다. 다른 장수는 보았다. 회령포 관사에서 잤다.
◉ 1597년 8월 19일 [양력 9월 29일]<정축> 맑다.
여러 장수들이 교서에 숙배를 하는 데, 경상수사 배설(裵楔)은 받들어 숙배하지 않았다. 그 업신여기고 잘난 체 하는 꼴을 말로 다 나타낼 수 없다. 너무도 놀랍다. 이방(吏房)과 그 영리(營吏)에게 곤장 쳤다. 회령포 만호 민정붕(閔廷鵬)이 그 전선(戰船)에서 받은 물건을 사사로이 피란인 위덕의(魏德毅) 등에게 준 죄로 곤장 스무 대를 쳤다.
◉ 1597년 8월 20일 [양력 9월 30일]<무인> 맑다.
앞 포구가 몹시 좁아서 진을 이진(해남군 북평면 이진리)으로 옮겼다. 창고로 내려가니 몸이 몹시 불편하여 음식도 먹지 않고 앓았다.
◉ 1597년 8월 21일 [양력 10월 1일]<기묘> 맑다.
날이 채 새기 전에 도와리가 일어나 몹시 앓았다. 몸을 차게 해서 그런가 싶어 소주를 마셨더니 한참동안 인사불성이 되었다. 하마터면 깨어나지 못할 뻔했다. 토하기를 10여 차례나 하고 밤을 앉아서 새웠다.
◉ 1597년 8월 22일 [양력 10월 2일]<경진> 맑다.
도와리가 점점 심하여 일어나 움직일 수가 없었다.
◉ 1597년 8월 23일 [양력 10월 3일]<신사> 맑다.
병세가 무척 심해져서 정박하여 배에서 지내기가 불편하므로 배타는 것을 포기하고 바다에서 나와서(뭍에서) 잤다.
◉ 1597년 8월 24일 [양력 10월 4일]<임오> 맑다.
아침에 도괘땅(刀掛浦)에 이르러 아침밥을 먹었다. 낮에 어란 앞바다에 이르니, 가는 곳마다 텅텅 비었다. 바다 위에서 잤다.
◉ 1597년 8월 25일 [양력 10월 5일]<계미> 맑다.
그대로 어란포에서 머물렀다. 아침밥을 먹은 뒤에 당포의 보자기가 놓아둔 소를 훔쳐 끌고 가면서 "적이 쳐들어 왔다. 적이 쳐들어 왔다."고 헛소문을 내었다. 나는 이미 그것이 거짓말일줄 알고 헛소문을 낸 두 사람을 잡아다가 곧 목을 베어 효시하니, 군중 인심이 크게 안정되었다.
◉ 1597년 8월 26일 [양력 10월 6일]<갑신> 맑다.
그대로 어란 바다에 머물렀다. 저녁나절에 임준영(任俊英)이 말을 타고 와서 급히 보고하는데, "적선(賊船)이 이진(梨津)에 이르렀다"고 했다. 전라우수사가 왔다. 배의 격군과 기구를 갖추지 못했으니 그 꼬락서니가 놀랍다.
◉ 1597년 8월 27일 [양력 10월 7일]<을유> 맑다.
그대로 어란 바다 가운데 있었다. 경상우수사 배설(裵楔)이 와서 보는데, 많이 두려워하는 눈치다. 나는 불쑥 "수사는 어디로 피해 갔던 게 아니오!"라고 말하였다.
◉ 1597년 8월 28일 [양력 10월 8일]<병술> 맑다.
새벽 여섯시쯤에 적선 여덟 척이 뜻하지도 않았는데 들어왔다. 여러 배들이 두려워 겁을 먹고, 경상수사(배설)는 피하여 물러나려 하였다. 나는 꼼짝하지 않고 적선이 바짝 다가오자 호각을 불고 깃발을 휘두르며 따라 잡도록 명령하니, 적선이 물러갔다. 뒤쫓아 갈두(葛頭: 해남군 송지면 갈두리)까지 갔다가 돌아왔다. 적선이 멀리 도망하기에 더 뒤쫓지 않았다. 뒤따르는 배는 쉰 여 척이라고 했다. 저녁에 진을 장도(노루섬)로 옮겼다.
◉ 1597년 8월 29일 [양력 10월 9일]<정해> 맑다.
아침에 건너왔다. 벽파진(진도군 고군면 벽파리)에 대었다.
◉ 1597년 8월 30일 [양력 10월 10일]<무자> 맑다.
그대로 벽파진에서 머물렀다. 정탐꾼을 나누어 보냈다. 저녁나절에 배설(裵楔)은 적이 많이 올 것을 염려하여 달아나려고 했으나, 그 관할 아래의 장수들이 찾기도 하고, 나도 그 속뜻을 알고 있지만, 딱 드러나지 않은 것을 먼저 발설하는 것은 장수로서 할 도리가 아니므로 참고 있을 즈음에, 배설(裵楔)이 제 종을 시켜 솟장을 냈는데, 병세가 몹시 중하여 몸조리 좀 해야 하겠다고 하였다. 나는 뭍으로 내려 몸조리하고 오라고 공문을 써 보냈더니, 배설(裵楔)은 우수영에서 뭍으로 내렸다.
◎ 난중일기(亂中日記) - 정유년 9월 (1597년 9월)
◉ 1597년 9월 초1일 [양력 10월 11일]<기축> 맑다.
그대로 벽파진에 머물렀다. 나는 내려가 벽파정위에 앉았는데, 점세(占世)가 탐라에서 나와서 소 다섯 마리를 싣고 와서 바쳤다.
◉ 1597년 9월 2일 [양력 10월 12일]<경인> 맑다. 오늘 새벽에 경상수사 배설(裵楔)이 도망갔다.
◉ 1597년 9월 3일 [양력 10월 13일]<신묘> 아침에 맑았다가 저녁에 비가 뿌렸다.
밤에는 된바람이 불었다. 봉창아래에서 머리를 웅크리고 있으니 그 심사가 어떠하랴!
◉ 1597년 9월 4일 [양력 10월 14일]<임진> 맑은데, 된바람이 세게 불었다.
배가 가만히 있지 못해서 각 배들을 겨우 보전했다. 천행이다.
◉ 1597년 9월 5일 [양력 10월 15일]<계사> 된바람이 세게 불었다.
각 배를 서로 보전할 수가 없었다.
◉ 1597년 9월 6일 [양력 10월 16일]<갑오>
바람은 조금 자는 듯 했으나, 물결은 가라앉지 앉았다. 추위가 엄습하니 격군들 때문에 걱정이다.
◉ 1597년 9월 7일 [양력 10월 17일]<을미> 맑다. 바람이 비로소 그쳤다.
탐망군관 임중형(林仲亨)이 와서 보고하기를, "적선 쉰다섯 척 가운데 열세 척이 이미 어란 앞바다에 도착했다. 그 뜻이 우리 수군에 있는 것 같다."고 했다. 그래서 각 배들에게 엄중히 일러 경계하였다. 오후 네 시쯤에 적선 열세 척이 곧장 진치고 있는 곳으로 우리 배로 향해 왔다. 우리 배들도 닻을 올려 바다로 나가 맞서서 공격하여 급히 나아가니, 적들이 배를 돌려 달아나 버렸다. 뒤 쫓아 먼 바다에까지 갔지만, 바람과 조수가 모두 거슬러 흘러(逆流) 항해할 수가 없어 복병선이 있을 것을 염려하여 더 쫓아가지 않고 벽파진으로 돌아왔다. 이 날 밤에 여러 장수들을 불러 모아 약속하며 말하기를, 오늘 밤에는 반드시 아무래도 적의 야습이 있을 것 같아, 여러 장수 들은 미리 알아서 준비할 것이며, 조금이라도 명령을 어기는 일이 있으면 군법대로 시행할 것이라고 재삼 타일러 분명히 하고서 헤어졌다. 밤 열 시쯤에 적선이 포를 쏘며 기습으로 공격해 왔다. 우리의 여러 배들이 겁을 집어 먹는 것 같아 다시금 엄명을 내리고, 내가 탄 배가 곧장 적선 앞으로 가서 지자포를 쏘니 강산이 진동했다. 그랬더니 적의 무리는 당해 내지 못하고 네 번이나 나왔다 물러났다 하면서 포를 쏘아댔다. 밤 한시가 되니 아주 물러갔다. 이들은 전에 한산도에서 승리를 얻은 자들이다.
◉ 1597년 9월 8일 [양력 10월 18일]<병신> 맑다.
적선이 오지 않았다. 여러 장수들을 불러 대책을 논의했다. 우수사 김억추(金億秋)는 겨우 만호 깜이나 맞을까 대장으로 쓰일 재목은 못되는 데도 좌의정 김응남(金應南)이 서로 친밀한 사이라고 해서 억지로 임명하여 보냈다. 이러고서야 조정에 사람이 있다고 할 수 있는가! 다만 때를 못 만난 것을 한탄할 뿐이다.
◉ 1597년 9월 9일 [양력 10월 19일]<정유> 맑다.
오늘이 곧 9일(중양절)이다. 군대 전부에게도 좋은 명절이다. 나는 복재기(喪制)이지만 여러 장병들에게야 먹이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 제주에서 나온 소 다섯 마리를 녹도와 안골포 두 만호에게 주어서 장병들에게 음식을 먹이고 있는 데, 저녁나절에 적선 두 척이 어란포에서 바로 감보도(진도군 고군면)로 들어와 우리 배의 많은지 적은지를 정탐했다. 영등포 만호 조계종이 끝까지 따라 갔더니, 적들은 어리둥절하여 배에 실었던 물건을 몽땅 바다 가운데로 던져버리고 달아났다.
◉ 1597년 9월 10일 [양력 10월 20일]<무술> 맑다. 적선들이 멀리 달아났다.
◉ 1597년 9월 11일 [양력 10월 21일]<기해> 흐리고 비가 올 것 같다.
홀로 배 위에 앉았으니, 그리운 생각에 눈물이 흘렀다. 세상에 어찌 나 같은 사람이 있겠는가! 아들 회는 내 심정을 알고 심히 언짢아하였다.
◉ 1597년 9월 12일 [양력 10월 22일]<경자> 종일 비가 뿌렸다.
봉창 아래서 심회를 걷잡을 수가 없었다.
◉ 1597년 9월 13일 [양력 10월 23일]<신축> 맑은데 된바람이 세게 불었다.
배가 가만있지를 못했다. 꿈이 이상하다. 임진년에 대첩했을 때와 얼추 같다. 이 징조를 모르겠다.
◉ 1597년 9월 14일 [양력 10월 24일]<임인> 맑다.
벽파정 맞은편에서 연기가 오르기에 배를 보내어 싣고 오니 바로 임준영(任俊英)이 육지를 정탐하고 와서 말하기를, "적선 이백 여 척 가운데 쉰다섯 척이 이미 어란 앞바다에 들어왔다."고 하였다. 또 말하기를, "적에게 사로잡혔던 김중걸(金仲乞)이 전하는데, 이 달 6일에 달마산으로 피난 갔다가 왜놈에게 붙잡혀 묶여서는 왜선에 실렸습니다. 김해에 사는 이름 모르는 한 사람이 왜장에게 빌어서 묶인 것을 풀어 주었습니다. 그 날 밤에 김해 사람이 김중걸(金仲乞)의 귀에다 대고 말하기를, 왜놈들이 모여 의논하는 말이, `조선 수군 열 여 척이 왜선을 추격하여 사살하고 불태웠으므로 할 수 없이 보복해야 하겠다. 극히 통분하다. 각 처의 배를 불러 모아 조선 수군들을 모조리 죽인 뒤에 한강으로 올라가겠다.'고 하였습니다."는 것 이었다. 이 말은 비록 모두 믿기는 어려우나, 그럴 수도 없지 않으므로, 전령선을 우수영으로 보내어 피난민들을 타일러 곧 뭍으로 올라가라고 하였다.
◉ 1597년 9월 15일 [양력 10월 25일]<계묘> 맑다.
조수를 타고 여러 장수들을 거느리고 우수영 앞바다로 진을 옮겼다. 벽파정 뒤에는 울돌목이 있는데 수가 적은 수군으로써 명량을 등지고 진을 칠 수 없기 때문이다. 여러 장수들을 불러 모아 약속하면서 이르되,"병법에 '반드시 죽고자 하면 살고 살려고만 하면 죽는다.'고 했으며, 또 '한 사람이 길목을 지키면, 천 사람이라도 두렵게 한다.'고 했음은 지금 우리를 두고 한 말이다. 너희 여러 장수들이 살려는 생각은 하지 마라. 조금이라도 명령을 어기면 군법으로 다스릴 것이다. 조금이라도 너그럽게는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하고 재삼 엄중히 약속 했다. 이 날 밤 신인(神人)이 꿈에 나타나, "이렇게 하면 크게 이기고, 이렇게 하면 지게 된다."고 일러 주었다.
◉ 1597년 9월 16일 [양력 10월 26일]<갑진> 맑다.
아침에 별망군이 나와서 보고하는데, 적선이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이 울돌목을 거쳐 곧바로 진치고 있는 곳으로 곧장 온다고 했다. 곧 여러 배에 명령하여 닻을 올리고 바다로 나가니, 적선 백서른세 척이 우리의 여러 배를 에워쌌다. 대장선이 홀로 적진 속으로 들어가 포탄과 화살을 비바람같이 쏘아대건만 여러 배들은 관망만 하고 진군하지 않아 사태가 장차 헤아릴 수 없게 되었다. 여러 장수들이 적은 군사로써 많은 적을 맞아 싸우는 형세임을 알고 돌아서 피할 궁리만 했다. 우수사 김억추(金億秋)가 탄 배는 물러나 아득히 먼 곳에 있었다. 나는 노를 바삐 저어 앞으로 돌진하여 지자총통·현자총통 등 각 종 총통을 어지러이 쏘아대니, 마치 나가는 게 바람 같기도 하고 우레 같기도 하였다. 군관들이 배 위에 빽빽이 서서 빗발치듯이 쏘아대니, 적의 무리가 감히 대들지 못하고 나왔다 물러갔다 하곤 했다. 그러나 적에게 몇 겹으로 둘러 싸여 앞으로 어찌 될지 한 가진들 알 수가 없었다. 배마다의 사람들이 서로 돌아보며 얼굴빛을 잃었다. 나는 침착하게 타이르면서, "적이 비록 천척이라도 우리 배에게는 감히 곧바로 덤벼들지 못할 것이다. 일체 마음을 동요치 말고 힘을 다하여 적선에게 쏴라."고 하고서, 여러 장수들을 돌아보니, 물러나 먼 바다에 있었다. 나는 배를 돌려 군령을 내리자니 적들이 더 대어들것 같아 나아가지도 물러나지도 못할 형편이었다. 호각을 불어서 중군에게 명령하는 깃발을 내리고 또 초요기를 돛대에 올리니, 중군장미 조항첨사 김응함(金應 )의 배가 차차로 내 배에 가까이 오고, 거제현령 안위(安衛)의 배가 먼저 왔다. 나는 배위에 서서 몸소 안위(安衛)를 불러 이르되, "안위(安衛)야, 군법에 죽고 싶으냐? 네가 군법에 죽고 싶으냐? 도망간다고 해서 어디 가서 살 것 같으냐? 고 하니, 안위(安衛)가 황급히 적선 속으로 돌입했다. 또 김응함(金應 )을 불러 이르되, "너는 중군장으로써 멀리 피하고 대장을 구하지 않으니, 그 죄를 어찌 면할 것이냐? 당장 처형할 것이로되, 적세 또한 급하므로 우선 공을 세우게 한다." 고 하니, 두 배가 곧장 쳐들어가 싸우려할 때, 적장이 그 휘하의 배 두 척을 지휘하여 한꺼번에 개미 붙듯이 안위(安衛)의 배로 매달려 서로 먼저 올라가려고 다투었다. 안위(安衛)와 그 배에 탔던 사람들이 죽을 힘을 다하여 몽둥이로 치기도 하고, 긴 창으로 찌르기도 하고, 수마석 덩어리로 무수히 어지러이 싸우니 배 위의 사람들은 기진맥진하게 된데다 안위(安衛)의 격군 일여덟 명이 물에 뛰어들어 헤엄치는데 거의 구하지 못할 것 같았다. 나는 배를 돌려 곧장 쳐들어가 빗발치듯 어지러이 쏘아대니, 적선 세 척이 얼추 엎어지고 자빠지는데 녹도만호 송여종(宋汝悰)·평산포 대장 정응두(丁應斗)의 배가 줄이어 와서 합력하여 적을 쏘아 한 놈도 몸을 움직이지 못했다. 항복해온 왜놈 준사(俊沙)란 놈은 안골포의 적진에서 투항해온 자이다. 내 배위에서 내려다보며, "저 무늬 있는 붉은 비단옷을 입은 놈이 적장 `마다시'다"고 하였다. 나는 김돌손(金乭孫)으로 하여금 갈구리를 던져 이물로 끌어 올렸다. 그러니 준사는 펄쩍 뛰며, "이게 마다시다"고 하였다. 그래서 곧 명령하여 토막으로 자르게 하니, 적의 기운이 크게 꺾여 버렸다. 이 때 우리의 여러 배들은 적이 다시는 침범해오지 못할 것을 알고 일제히 북을 치며 나아가면서 지자총통·현자총통 등을 쏘고, 또 화살을 빗발처럼 쏘니, 그 소리가 바다와 산을 뒤흔들었다. 우리를 에워 싼 적선 서른 척을 쳐부수자, 적선들은 물러나 달아나 버리고 다시는 우리 수군에 감히 가까이 오지 못했다. 그곳에 머무르려 했으나 물살이 무척 험하고 형세도 또한 외롭고 위태로워 건너편 포구로 새벽에 진을 옮겼다가, 당사도(무안군 암태면)로 진을 옮기어 밤을 지냈다. 이 것은 참으로 천행이다.
◉ 1597년 9월 17일 [양력 10월 27일]<을사> 맑다.
어외도(於外島:무안군 지도면)에 이르니, 피난선이 무려 삼백 여 척이 먼저 와 있었다. 임치첨사는 배에 격군이 없어 나오지 못한다고 했다. 나주진사 림선(林선)·림환(林환)·림업(林업) 등이 와서 봤다. 우리 수군이 대첩한 것을 알고 서로 앞 다투어 치하하고, 또 많은 양식을 가져 와 군사들에게 주었다.
◉ 1597년 9월 18일 [양력 10월 28일]<병오> 맑다.
그대로 어외도에서 머물렀다. 임치첨사가 왔다. 내 배에서는 순천감목관 김탁과 본영의 종 계생(戒生)이 탄환에 맞아 죽고, 박영남(朴永男)과 봉학(奉鶴) 및 강진현감 이극신(李克新)도 탄환에 맞았으나, 중상에 이르지는 않았다.
◉ 1597년 9월 19일 [양력 10월 30일]<정미> 맑다.
일찍 떠나 출항했다. 바람도 순하고 물살도 순조를 타 무사히 칠산(七山: 영광군 낙월면) 바다를 건넜다. 저녁에 법성포(영광군 법성면) 선창에 이르니, 흉악한 적들이 육지로 해서 들어와 사람 사는 집과 창고에 불을 질렀다. 해질 무렵에 홍농(弘農: 영광군 홍농면) 앞에 이르러, 배를 정박시키고 잤다.
◉ 1597년 9월 20일 [양력 10월 30일]<무신> 맑고 바람도 순조로 왔다.
새벽에 출항하여 곧장 위도(蝟島: 영광군 위도면)에 이르니, 피난선이 많이 정박해 있었다. 황득중(黃得中)과 종 금이 (金伊) 등을 보내어 종 윤금(允金)을 찾아서 잡아오라고 했더니, 과연 위도 밖에 있었다. 그래서 묶어다가 배 안에 실었다. 이광축(李光軸)·이광보(光輔)가 와서 봤다. 이지화(李至和) 부자가 또 와서 봤다. 날이 저물어서 잤다.
◉ 1597년 9월 21일 [양력 10월 31일]<기유> 맑다.
일찍 떠나 고군산도(옥구군 미면 선유도)에 이르니, 호남순찰사가 내가 왔다는 말을 듣고 배를 타고 급히 옥구로 갔다고 하였다. 저녁나절에 광풍이 세게 불었다.
◉ 1597년 9월 22일 [양력 11월 1일]<경술> 맑은데, 된바람이 세게 불었다.
그대로 머물렀다. 나주목사 배응경(裵應 )·무장현감 이람(李覽)이 와서 봤다.
◉ 1597년 9월 23일 [양력 11월 2일]<신해> 맑다.
승첩한 장계의 초본을 수정했다. 정희열(丁希悅)이 와서 봤다.
◉ 1597년 9월 24일 [양력 11월 3일]<임자> 맑다.
몸이 불편하여 신음했다. 김홍원(金弘遠)이 와서 봤다.
◉ 1597년 9월 25일 [양력 11월 4일]<계축> 맑다.
이 날 밤에 몸이 몹시 불편하고, 식은땀이 온 몸을 적셨다.
◉ 1597년 9월 26일 [양력 11월 5일]<갑인> 맑다.
몸이 불편하여 종일 나가지 않았다. 이 날 밤에는 식은땀이 온몸을 적셨다.
◉ 1597년 9월 27일 [양력 11월 6일]<을묘> 맑다.
송한(宋漢)·김국(金國)·배세춘(裵世春) 등이 승첩장계를 가지고 뱃길로 올라갔다. 정제(鄭霽)는 충청수사에게 부찰사로 보낼 공문을 가지고 같이 같다. 몸이 몹시 불편하여 밤 내내 아팠다.
◉ 1597년 9월 28일 [양력 11월 7일]<병진> 맑다.
송한(宋漢)과 정제(鄭霽)가 바람에 막혀 되돌아 왔다.
◉ 1597년 9월 29일 [양력 11월 8일]<정사> 맑다.
송한(宋漢) 등 계본(啓本)·장달(狀達)(을 가진 사람) 및 판관정제(鄭霽)는 바람이 순조로워 도로 올라갔다.
◎ 난중일기(亂中日記) - 정유년 10월 (1597년 10월)
◉ 1597년 10월 초1일 [양력 11월 9일]<무오> 맑다.
아들 회(회)를 보내서 제 어미를 보고 여러 집안의 생사(生死)를 알아 오게 하였다. 심회가 몹시 안달 나서 편지를 쓸 수 없었다. 병조(兵曹)의 역군이 공문을 가지고 내려 왔는데, "아산 고향의 한 집안이 이미 적에게 불타 잿더미가 되어 남은게 없다."고한다.
◉ 1597년 10월 2일 [양력 11월 10일]<기미> 맑다.
아들 회가 집안사람들의 생사를 알아볼 일로 배를 타고 올라갔으나, 잘 갔는지 못 갔는지 알 수가 없다. 내 심정을 어찌 다 말하랴. 홀로 배 위에 앉았으니 심회가 만 갈래였다.
◉ 1597년 10월 3일 [양력 11월 11일]<경신> 맑다.
새벽에 출항하여 변산을 거쳐 곧바로 법성포로 되돌아가는데 바람은 부드러워 따뜻하기가 봄날 같았다. 저물어서 법성포 선창 앞에 이르렀다.
◉ 1597년 10월 4일 [양력 11월 12일]<신유> 맑다.
그대로 머물러 잤다. 림선(林선)·업 등이 사로잡혔다가 적에게 빌어 임치로 돌아와서 편지를 보내왔다.
◉ 1597년 10월 5일 [양력 11월 13일]<임술> 맑다.
그대로 머물면서 마을 집 아래로 내려가 잤다.
◉ 1597년 10월 6일 [양력 11월 14일]<계해> 흐렸다가 비가 뿌렸다. 눈비가 세차게 왔다.
◉ 1597년 10월 7일 [양력 11월 15일]<갑자> 바람이 고르지 않고 비가 오락가락한다.
소문에 호남 안팎에는 적선이 없다고 한다.
◉ 1597년 10월 8일 [양력 11월 16일]<을축> 맑으며, 바람이 살랑거렸다.
출항하여 어외도에 이르러 잤다.
◉ 1597년 10월 9일 [양력 11월 17일]<병인> 맑다.
일찍 출항하여 우수영에 이르니, 성 밖에는 집에 사람이 살지 않고, 인적(人跡)이 하나도 없다. 보이는 것은 참혹뿐이었다. 그러나 저녁에 "해남에서 흉악한 적들이 진치고 있다"는 소문을 들었다. 초저녁에 김종려(金宗麗)·정조(鄭詔)·백진남(白振南) 등이 와서 봤다.
◉ 1597년 10월 10일 [양력 11월 18일]<정묘> 비가 뿌리고 된바람이 세게 불었다.
항해할 수가 없어 그대로 머물렀다. 밤 열 시쯤(二更)에 중군장 김응함(金應함)이 와서 전하는데, “해남에 있던 적들이 많이 물러간 모양입니다. 이희급(李希伋)의 부친이 적에게 사로잡혔다가 빌어서 놓여 왔습니다.“고 했다. 고 한다. 마음이 언짢아서 앉았다 누웠다 하다가 새벽이 되었다. 우우후 이정충(李廷忠)이 왔는데, 배가 보이지 않은 것은 바깥 섬으로 달아나 있었기 때문이었다.
◉ 1597년 10월 11일 [양력 11월 19일]<무진> 맑다.
밤 두 시쯤에 바람이 자는 것 같았다. 그래서 닻을 올려 바다 가운데에 이르러, 정탐인 이순(李順)·박담동(朴淡同)·박수환(朴守還)·태귀생(太貴生)을 해남으로 보냈다. 해남에는 연기가 하늘을 찌른다고 한다. 이는 반드시 적의 무리들이 달아나면서 불을 지른 것이다. 오정에 안편·발음도(安便發音島= 안창도·팔금도)에 이르니, 바람도 좋고 날씨도 화창하다. 육상에 내려 산마루로 올라가서 배 감출 곳을 찾아보니, 동쪽에는 앞에 섬이 있어 멀리 바라볼 수는 없고, 북쪽으로는 나주와 영암 월출산으로 뚫렸으며, 서쪽에는 비금도로 통하여 눈앞이 툭 트였다. 잠깐 있으니, 중군장과 우치적(禹致績)이 올라오고, 조효남(趙孝南)·안위(安衛)·우수(禹壽)가 잇따라 왔다. 날이 저물어 산봉우리에서 내려와 언덕에 앉았으니, 조계종(趙繼宗)이 와서 왜적의 사실 형편을 말하고, 또 왜놈들이 우리 수군을 몹시 싫어한다고 했다. 이희급(李希伋)의 부친이 와서 알현하고 또 사로잡혔던 경위를 말하는데, 아픈 마음을 견딜 수가 없었다. 저녁에는 따뜻하기가 봄 같아 아지랑이가 하늘에 아른 거려 비올 징조가 많았다. 초저녁에 달빛이 비단결 같아 홀로 봉창에 앉았으니 심사가 만 갈래였다. 밤 열시쯤에 식은땀이 몸을 적셨다. 한밤에 비가 왔다. 이 날 우수사가 군량선에 있는 사람에게 장단지를 몹시 때렸다고 했다. 놀랄 일이다.
◉ 1597년 10월 12일 [양력 11월 20일]<기사> 비가 내렸다.
오후 한시에 맑게 개었다. 아침에 우수사가 와서 절하기에 하인의 장단지를 때린 죄를 용서했다. 가리포 첨사(이응표)·장흥부사(전봉) 등 여러 장수들이 와서 절하고 종일 이야기했다. 탐후선이 나흘이 지나도 오지 않으니 걱정이 된다. 아마 생각건대, 흉악한 적들이 멀리 도망가기에, 그 뒤를 쫓아가느라 돌아오지 않는 것이리라. 그대로 발음도에 머물렀다.
◉ 1597년 10월 13일 [양력 11월 21일]<경오> 맑다.
아침에 조방장 배흥립(裵興立)과 경상우후(이의득)가 와서 봤다. 조금 있으니, 탐망선이 임준영(任俊英)을 싣고 왔다. 그 편에 적의 소식을 들으니, "해남에 들어와 웅거해 있던 적들은 7일에 우리 수군이 내려오는 것을 보고, 11일에 몽땅 도망가 버렸는데, 해남의 향리 송언봉·신용 등이 적속으로 들어가 왜놈 들을 꾀어내어 선비들을 죽였다."고 했다. 통분함을 이길 길이 없다. 곧 순천부사 우치적(禹致績)·금갑도만호 이정표(李廷彪)·제포만호 주의수(朱義壽)·당포만호 안이명(安以命)·조라포만 호 정공청(鄭公淸) 및 군관 림계형(林季亨)·정상명(鄭翔溟)·봉좌(逢佐)·태귀생(太貴生)·박수환(朴壽還) 등을 해남으로 보냈다. 저녁나절에 내려가 언덕에 앉아 윗자리에서 조방장 배흥립(裵興立)·장흥부사 전봉(田鳳) 등과 함께 이야기했다. 이 날 우우후 이정충(李廷忠)이 뒤떨어진 죄를 다스렸다. 우수사의 군관 배영수(裵永壽)가 와서 아뢰기를, 수사의 부친이 외해에서 살아서 돌아왔다고 했다. 이 날 새벽꿈에 우의정을 만나 조용히 이야기했다. 낮에 선전관 네 명이 법성포에 이르러 내려왔다는 말을 들었다. 저녁에 김응함(金應함)에게서 섬 안에 알지 못하는 어떤 사람이 산골에 깊숙이 숨어서 소와 말을 잡는다는 말을 들었다. 그래서 황득중(黃得中)·오수(吳守) 등을 보내어 염탐케 하였다. 이 날 밤 달빛은 비단결 같고 잔잔한 바람도 일지 않았다. 홀로 뱃전에 앉았으니 마음을 걷잡을 수 없었다. 이리 뒤 척 저리 뒤 척 앉았다 누웠다 하면서 밤새도록 잠을 이루지 못하고 하늘을 우러러 탄식할 따름이다.
◉ 1597년 10월 14일 [양력 11월 22일]<신미> 맑다.
밤 두 시쯤 꿈에, 내가 말을 타고 언덕 위로 가는 데, 말이 발을 헛디디어 냇물 가운데로 떨어졌으나, 쓰러지지는 않고, 막내아들 면이 끌어안고 있는 것 같은 형상이었는데 깨었다. 이것은 무슨 징조인지 모르겠다. 저녁나절에 배 조방장과 우후 이의득(李義得)이 와서 봤다. 배 조방장의 종이 영남에서 와서 적의 형세를 전했다. 황득중(黃得中) 등은 와서 아뢰기를 내수사의 종 강막지(姜莫只)라는 자가 소를 많이 기르기 때문에 열두 마리를 끌고 갔다고 했다. 저녁에 어떤 사람이 천안에서 와서 집안 편지를 전했다. 봉한 것을 뜯기도 전에 뼈와 살이 먼저 떨리고 정신이 아찔하고 어지러웠다. 대충 겉봉을 뜯고 열(둘째 아들)의 편지를 보니, 겉에 통곡 두 글자가 씌어 있어 면이 전사했음을 짐작했다. 어느새 간담이 떨어져 목 놓아 통곡, 통곡하였다. 하늘이 어찌 이다지도 인자 하지 못 하는고! 간담이 타고 찢어지는 것 같다. 내가 죽고 네가 사는 것이 이치가 마땅하거늘, 네가 죽고 내가 사니, 이런 어그러진 이치가 어디 있는가! 천지가 캄캄하고 해조차 빛이 변했구나. 슬프다, 내 아들아! 나를 버리고 어디로 갔느냐? 남달리 영특하여 하늘이 이 세상에 머물러 두지 않은 것이냐? 내 지은 죄가 네 몸에 미친 것이냐? 내 이제 세상에 살아 있어본들 앞으로 누구에게 의지할꼬! 너를 따라 같이 죽어 지하에서 같이 지내고 같이 울고 싶건마는 네 형·네 누이·네 어머니가 의지할 곳이 없으니, 아직은 참으며 연명이야 한다마는 마음은 죽고 형상만 남아 있어 울부짖을 따름이다. 울부짖을 따름이다. 하룻밤 지내기가 일년 같구나. 이 날 밤 열시쯤에 비가 왔다.
◉ 1597년 10월 15일 [양력 11월 23일]<임신> 비바람이 종일 불었다.
누웠다 앉았다 하면서 종일 이리 뒤 척 저리 뒤 척 했다. 여러 장수 들이 와서 문안하니 얼굴을 들고 어찌 맞으랴! 림홍(林홍)·림중형(林仲亨)·박신(朴信)이 적을 정탐하려고 작은 배를 타고, 흥양·순천 등지의 바다로 나갔다.
◉ 1597년 10월 16일 [양력 11월 24일]<계유> 맑다.
우수사와 미조항 첨사를 해남으로 보냈다. 해남현감도 보냈다. 나는 내일이 막내아들의 죽음을 들은 지 나흘째가 된다. 마음 놓고 통곡할 수도 없으므로, 영안에 있는 강막지(姜莫只) 집으로 갔다. 밤 열 시쯤에 순천부사·우후 이정충(李廷忠)·금갑도만호·제포 만호 등이 해남에서 돌아왔다. 왜놈 열세 명과 투항했던 송원봉(宋元鳳) 등을 목 베고서 왔다.
◉ 1597년 10월 17일 [양력 11월 25일]<갑술> 맑은 날씨인 데 바람도 종일 세게 불었다.
새벽에 향을 피우고 곡을 하는데, 하얀 띠를 두르고 있으니, 비통함을 정말 참을 수가 없다. 우수사가 와서 봤다.
◉ 1597년 10월 18일 [양력 11월 26일]<을해> 맑다.
바람이 자는 것 같았으나 우수사는 배를 출항할 수 없어 바깥바다에서 잤다. 강막지(姜莫只)가 와서 알현했다. 림계형(林季亨)·임준영(任俊英)이 들어왔다.
◉ 1597년 10월 19일 [양력 11월 27일]<병자> 맑다.
새벽꿈에, 고향집의 종 진(辰)이 내려왔기에 나는 죽은 아들을 생각하여 통곡하였다. 저녁나절에 조방장과 경상우후가 와서 봤다. 백 진사가 와서 봤다. 림계형(林季亨)은 와서 알현했다. 김신웅(金信雄)의 아내·이인세(李仁世)·정억부(鄭億夫)를 붙잡아 왔다. 거제·안골·녹도·웅천·제포·라포·당포·우우후가 와서 봤다. 적을 잡은 공문을 와서 바쳤다. 윤건(尹健) 등의 형제가 왜적에게 붙었던 두 명을 잡아 왔다. 어두울 무렵 코피를 되 남짓이나 흘렸다. 밤에 앉아 생각하니 눈물이 났다. 어찌 다 말하랴! 이승에서의 영령이라 마침내 불효가 여기까지 이를 줄을 어찌 아랴! 비통한 마음 찢어지는 듯하여 억누를 수가 없다.
◉ 1597년 10월 20일 [양력 11월 28일]<정축> 맑고 바람도 잤다.
이른 아침에 미조항 첨사·해남현감·강진현감이 해남현의 군량을 운반 하려고 여쭙고 돌아갔다. 안골포만호 우수(禹壽)도 여쭙고 돌아갔다. 저녁나절에 김종려(金宗麗)·정수(鄭遂)·백진남(白振男)이 와서 보고, 또 윤지눌(尹志訥)의 못된 짓을 말하였다. 김종려(金宗麗)를 소음도(所音島) 등 열세 곳 섬의 염전의 감자도감검(監煮都監檢: 감독관)으로 정하여 보냈다. 영의 둔덕에서 일하는 사화(士化)의 모친이 배 안에서 죽었다고 했다. 그래서 곧 묻어버릴 일로 군관에게 시켰다. 남도포·여도 두 만호가 와서 알현하고서 돌아갔다.
◉ 1597년 10월 21일 [양력 11월 29일]<무인> 밤 두시쯤에 비 오다 눈 오다 했다.
바람이 몹시 추웠다. 뱃사공이 추워 얼까 걱정이 되어 마음을 잡지 못했다. 오전 여덟시부터 바람이 불고 눈이 펑펑 내렸다. 정상명(鄭翔溟)이 와서 아뢰기를 무안현감 남언상(南彦祥)이 들어 왔다고 했다. 남언상은 원래 수군에 소속된 관리인데, 사사로이 목숨만 보존할 꾀를 부려 수군에 오지 않고, 산골에 숨어서 달포쯤 관망하다가, 적이 물러간 뒤에는 무거운 형벌을 받을까 두려워 비로소 이제야 나타나니, 그 하는 꼬락서니가 참으로 괘씸하다. 저녁나절에 가리포 및 배 조방장과 우후가 와서 절했다. 바람불고 눈이 종일 내렸다. 장흥부사가 와서 잤다.
◉ 1597년 10월 22일 [양력 11월 30일]<기묘> 아침에 눈 오다가 저녁나절에 개었다.
장흥과 같이 식사를 했다. 오후에 군기사장(軍器査長) 선기룡(宣起龍) 등 세 사람이 임금의 분부와 의정부의 방문을 가지고 왔다. 해남현감(유형)이 적에게 붙었던 윤해(尹海)·김언경 (金彦京)을 묶어서 올려 보내 왔다. 그래서 나장이 있는 곳에 단단히 가두었다. 무안현감 남언상(南彦祥)은 가리포의 전선에 가두었다. 우수사가 황원에서 와서 말하기를, 김득남(金得男)이 처형되었다고 했다. 진사 백진남(白振南)이 와서 보고 돌아갔다.
◉ 1597년 10월 23일 [양력 12월 1일]<경진> 맑다.
저녁나절에 김종려(金宗麗)·정수(鄭遂)가 와서 봤다. 배 조방장과 우후·우수사우후도 와서 봤다. 적량·영등포만호가 잇따라 왔다가 저녁에 돌아갔다. 이 날 낮에 윤해(尹海)·김언경(金彦京)을 처형했다. 대장장이 허막동(許莫同)을 나주로 보내려고 밤 아홉시에 종을 시켜 불렀더니 배가 아프다고 했다. 싸움말의 떨어진 편자를 갈았다.
◉ 1597년 10월 24일 [양력 12월 2일]<신사> 맑다.
해남에 있던 왜의 군량 삼백 스무 두 섬을 실어왔다. 초저녁에 선전관 하응서(河應瑞)가 임금의 분부를 가지고 왔는데, "그것은 우후 이몽구(李夢龜)를 처형하라"는 것이었다. 그 편에 들으니, "명 나라 수군이 강화도에 이르렀다."고 한다. 밤 열시쯤에 병을 다스리려고 땀을 내니 등을 적시고 밤 한시에야 그쳤다. 밤 세시에 또 선전관과 금오랑이 왔다고 한다. 날이 밝자 들어오는데, 선전관은 권길(權吉)이요, 금오랑(의금부도사 주부) 홍지수(洪之壽)였다. 무안현감(남언상)·목포만호(방수경)·다경포 만호(윤승남)를 잡으러 여기 왔다.
◉ 1597년 10월 25일 [양력 12월 3일]<임오> 맑다.
몸이 몹시 불편했다. 윤련(尹連)이 부안에서 왔다. 종 순화(順花)는 아산에서 배를 타고 왔다. 집안의 편지를 받아보니 심회가 불편하여 이리 뒤 척 저리 뒤척이다가 혼자 앉아 있었다. 초저녁에 선전관 박희무(朴希茂)가 임금의 분부를 가지고 왔는데, 그것은 명나라 수군이 배를 정박하기에 알맞은 곳을 골라서 장계 하라는 것이었다. 양희우(梁希雨)가 장계를 가지고 서울로 갔다가 되돌아왔다. 충청우후가 편지를 보내고 또 홍시 한 접을 보내 왔다.
◉ 1597년 10월 26일 [양력 12월 4일]<계미> 새벽에 비를 부렸다.
조방장 등이 와서 봤다. 김종려(金宗麗)·백진남(白振南)·정수(鄭遂) 등이 와서 봤다. 이 날 밤 열시에 자는데 식은땀이 나서 몸을 적시었다. 온돌이 너무 따뜻한 탓이었다.
◉ 1597년 10월 27일 [양력 12월 5일]<갑신> 맑다.
영광군수(전협)의 아들 전득우(田得雨)가 군관이 되어 알현했다. 곧 그 부친이 있는 곳으로 돌려 보냈더니 홍시 백 개를 가지고 왔다. 밤에 비가 뿌렸다.
◉ 1597년 10월 28일 [양력 12월 6일]<을유> 맑다.
아침에 여러 가지 장계를 봉하여 피은세(皮銀世)에게 주어서 보냈다. 저녁나절에 강막지(姜莫只)의 집에서 대장선으로 옮겨 탔다. 저녁에 소금밭의 서원 도걸산(都巨叱山)이 큰 사슴을 잡아 바쳤다. 그래서 군관 등에게 주어 나누어 먹게 했다. 이 날 밤에는 잔잔한 바람도 일지 않았다.
◉ 1597년 10월 29일 [양력 12월 7일]<병술> 맑다.
밤 두 시쯤에 첫 나발을 불고 출항하여 목포로 향하는데 벌써부터 비와 우박이 섞여 내리고 샛바람이 살살 불었다. 목포에 이르러 보화도(목포시 고하도)로 옮겨 정박하니, 된 하늬바람을 막을 만하고 배를 감추기에 아주 알맞다. 그래서 뭍에 내려 섬 안을 둘러보니, 형세가 매우 좋으므로, (보 화도에서) 진을 치고 집지을 계획을 했다.
◉ 1597년 10월 30일 [양력 12월 8일]<정해> 맑으나 샛바람이 불고, 꼭 비올 것 같다.
아침에 집지을 곳으로 내려가 앉았으니, 여러 장수들이 와서 알현했다. 해남현감 류형(柳珩)도 와서 적에게 붙었던 사람들의 소행을 전했다. 일찍 황득중(黃得中)으로 하여금 자귀장이를 데리고 섬 북쪽 봉우리로 가서 집지을 재목을 베어 오게 했다. 저녁나절에 해남에 있던 적에게 붙었던 정은부(鄭銀夫) 및 김신웅(金信雄)의 부인이 왜놈에게 지시하여 우리나라 사람을 죽인자 두 명과, 선비 집 처녀를 강간한 김애남(金愛南)을 아울러 목 베어 효시하였다. 저녁에 양밀이 도양장의 벌레 먹은 곡식을 멋대로 나누어 준 일로 곤장 예순 대를 쳤다.
◉ (** 다음은 날짜는 적혀 있지 않으나, 1597년(정유)(Ⅰ) 10월 8일(乙丑) 뒷장부터 모두 3 장으로 적혀 있는데 그 앞의 한 장은「讀宋史」이다.)
어허 이 때가 어느 때인데, 저 강(綱)은 가려고 하는가. 가면 또 어디로 가려는가. 무릇 신하된 자로서 임금을 섬김에는 죽음이 있을 뿐이요, 다른 길은 없다. 그때야말로 종사의 위태함이 마치 터럭 한 가닥으로 천만 근을 달아 올림과 같아 정히 신하된 자는 몸을 버려 나라의 은혜를 갚을 때인데 이어서 간다는 말은 진실로 마음에 생각도 내지 못할 말이거늘, 하물며 어찌 입 밖으로 낼 수가 있단 말인가. 그러면 내가 강이라면 나는 어떻게 할까. 몸을 헐어 피로써 울며, 간담을 열어젖히고서 사세가 여기까지 왔으니 화친할 수 없음을 밝혀서 말할 것이요, 아무리 말하여도 그대로 되지 않는다면 거기 이어 죽을 것이요, 또 그렇지도 못한 다면, 짐짓 화친하려는 계획을 따라 몸을 그 속에 던져 온갖 일에 낱낱이 꾸려가며, 죽음 속에서 살길을 구한다면, 혹시 만에 하나라도 나라를 건질 도리가 있게 될 것이어 늘 강의 계획은 이런데서 내지 않고 그저 가려고만 했으니, 이것이 어찌 신하된 자로서 몸을 던져 임금을 섬기는 의리라 할 수 있겠는가.
◉ (** 다음은 위의 「독송사(讀宋史)」가 적힌 그 다음 장에 두 장으로 적혀 있는 것이다.)
새로 급제한 원경전(元景銓)·한치겸(韓致謙)·정복례(鄭福禮)는 우 병사의 진에, 남엽(南曄)·정재순(鄭在淳)·조형(趙珩)·조완(趙琓)은 진주 운곡에, 이홍훈(李弘勛) 주인집은 송곡에, 창노의 우두머리 봉환(鳳還)·석운(石雲)·뢰손(雷孫)은 백천 별장에, 훈련정 조신옥(趙信玉)·홍대방(洪大邦)은 쌀 14·콩 18·파초 4·콩2 및 10, 대오미 2를, 흥양 정병 김득상(金得尙)은 화살 쏘기로, 김덕방(金德邦)·김윤복(金允福)은 처음 벼슬에 나왔고, 처음 벼슬에 나온 조언해(趙彦海)·주부 송상보(宋象甫)는 말이 없고, 순천 이진(李珍)과 아산에서 처음 벼슬한 박윤희(朴允希)는 지금 충청도 방어사의 진중에 있는데 싸움 말이 있어 적을 죽일 수 있다고 한다.
◎ 난중일기(亂中日記) - 정유년 11월 (1597년 11월)
◉ 1597년 11월 초1일 [양력 12월 9일]<무자> 비가 내렸다.
아침에 얇은 사슴 가죽 두 장이 물에 떠내려 왔다. 그래서 명나라 장수에게 보내주기로 했다. 기이한 일이다. 오후 두시에 비는 개었으나 된바람이 몹시 불었다. 뱃사람들은 추위에 괴로워하며, 나는 선실에서 웅크리고 앉아 있으니, 마음이 무척 불편했다. 하루를 보내는 것이 일년 같았다. 비통함을 말할 수 없다. 저녁에 된바람이 세게 불어 밤새도록 배가 흔들리어 사람이 제대로 안정시킬 수가 없었다. 땀이 나서 몸을 적셨다.
◉ 1597년 11월 초2일 [양력 12월 10일]<기축> 흐렸는데 비는 오지 않았다.
일찍 우수사의 전선이 바람에 표류되어 암초에 걸려 깨졌다고 한 말을 들었다. 참으로 통분하다. 병선의 군관 당언량(唐彦良)에게 곤장 여든 대를 쳤다. 선창에 내려가 앉아서 다리 놓는 일을 감독했다. 그 길로 새 집짓는 곳으로 올라갔다가 어두워서야 배로 내려왔다.
◉ 1597년 11월 3일 [양력 12월 11일]<경인> 맑다.
일찍 새 집짓는 곳으로 올라가 선전관 이길원(李吉元)이 배설(裵楔)을 처단할 일로 들어왔다. 배설(裵楔)은 벌써 성주 본 집으로 갔는데, 그곳으로 가지 않고 곧장 본가로 왔다. 그 사정을 보아주는(이길원 의) 죄가 더 크다. 녹도의 배에 보냈다.
◉ 1597년 11월 4일 [양력 12월 12일]<신묘> 맑다.
일찍 새 집지어 세우는 곳으로 올라갔다. 이길원(李吉元)이 머물렀다. 진도군수 선의문(宣義問)이 왔다.
◉ 1597년 11월 5일 [양력 12월 13일]<임진> 맑다.
따뜻하기가 봄날 같다. 새 집짓는 곳으로 올라갔다가, 날이 저물어서 배로 내려왔다. 영암군수 이종성(李宗誠)이 밥을 서른 말이나 지어 일꾼들에게 먹이고, 또 말하되, "군량미 이백 섬을 준비하고, 중간 벼 칠백 섬을 마련하였다."고 한다. 이 날 보성 군수와 흥양 현감으로 하여금 군량창고 짓는 것을 보살피게 했다.
◉ 1597년 11월 6일 [양력 12월 14일]<계사> 맑다.
일찍 새 집짓는 곳으로 올라가 종일 어슬렁거리니 해가 저무는 것도 몰랐다. 새 집에 이엉으로 지붕을 이었다. 군량 곳간도 지었다. 전라우우후가 나무 베어 올 일로 황원장으로 갔다.
◉ 1597년 11월 7일 [양력 12월 15일]<갑오> 맑도 따뜻하다.
해남 의병이 왜놈의 머리 하나와 환도 한 자루를 가지고 와서 바쳤다. 이종호(李宗浩)와 당언국(唐彦國)을 잡아왔다. 그래서 거제의 배에 가두었다. 저녁나절에 전 홍산 현감 윤영현(尹英賢)·생원 최집(崔潗)이 와서 보고, 또 군량에 쓸 벼 마흔 섬과 쌀 여덟 섬을 부쳐 왔다. 며칠 동안의 양식으로 도움이 될만하다. 본영의 박주생(朴注生)이 왜놈의 머리 두 개를 베어 왔다. 전 현령 김응인(金應仁)이 와서 봤다. 이대진(李大振)의 아들 순생(順生)이 윤영현(尹英賢)을 따라왔다. 저녁에 새 집의 마루를 다 놓았다. 수사마다 와서 봤다. 이 날 밤 자정에 꿈에 면(면)이 죽는 것을 보고 구슬프게 울었다. 진도군수가 돌아갔다.
◉ 1597년 11월 8일 [양력 12월 16일]<을미> 맑다.
밤 두시쯤 꿈에 물에 들어가 물고기를 잡았다. 이 날은 따뜻하고 바람도 없다. 새방 벽에 흙을 발랐다. 이지화(李至和) 부자가 와서 봤다. 마루를 만들었다.
◉ 1597년 11월 9일 [양력 12월 17일]<병신> 맑다.
따뜻하기가 봄날 같다. 우수사가 와서 봤다. 강진현감이 현으로 돌아갔다.
◉ 1597년 11월 10일 [양력 12월 18일]<정유> 눈과 비가 섞여 오다.
된 하늬바람이 세게 불었다. 간신히 배를 구호했다. 이정충(李廷忠)이 와서 말하기를, "장흥의 적들이 달아났다."고 했다.
◉ 1597년 11월 11일 [양력 12월 19일]<무술> 맑으나 바람기는 약간 있었다.
식사를 한 뒤에 새 집짓는 곳으로 올라갔다. 평산포의 새 만호가 도임장(부임 명령서)을 바쳤다. 그는 하동현감(신진)의 형 신훤(申萱)이다. 전하는 말이 숭정으로 가자하는 것이 이미 발행되었다고 한다. 장흥부사와 배 조방장이 와서 봤다. 저녁에 우후 이정충(李廷忠)이 왔다가 초저녁에 돌아갔다.
◉ 1597년 11월 12일 [양력 12월 20일]<기해> 맑다.
이 날 저녁나절에 영암·나주 사람에게 배메기를 못하게 했다고 하여 묶어서 왔다. 그래서 그 중 주모자를 가려서 처형하고 나머지 네 명을 각 배에 가두었다.
◉ 1597년 11월 13일 [양력 12월 21일]<경자> 맑다.
◉ 1597년 11월 14일 [양력 12월 22일]<신축> 맑다.
남해현감 류형(柳珩)이 와서 윤단중(尹端中)의 무리한 일을 많이 전했다. 또 말하기를, 해남의 아전이 법성포로 피란 갔다가 돌아올 때 바람을 만나 배가 뒤집어지는데, 바다가운데서 만나도 구조하기는커녕 도리어 배안의 물건을 빼앗아 갔다고 했다. 그래서 중군 선에 가두었다. 김인수(金仁守)를 경상도 수영의 배에 가두었다. 내일은 돌아가신 아버지의 제삿날이라 나들이는 하지 않아야겠다.
◉ 1597년 11월 15일 [양력 12월 23일]<임인> 맑다.
따뜻하기가 봄날 같다. 새 집으로 올라갔다. 저녁나절에 림환(林환)과 윤영현(尹英賢)이 와서 봤다. 저녁에 송한(宋漢)이 서울에서 들어왔다.
◉ 1597년 11월 16일 [양력 12월 24일]<계묘> 맑다.
아침에 조방장·장흥부사 및 진중에 있는 여러 장수가 아울러 와서 봤다. 군공마련기(軍功磨鍊記: 개인별 전공 조사 기록)를 하나씩 점고했더니 거제현령 안위(安衛)가 통정대부(정3품의 당상관)가 되고, 나머지도 차례차례 벼슬을 받고, 은 스무 냥을 내게로 보냈다. 명나라 장수 경리양호(楊鎬)는 붉은 비단 한 필을 보내면서, "배에 이 붉은 비단을 걸어 주고 싶으나, 멀어서 할 수 없다."고 했다. 영의정의 회답편지도 왔다.
◉ 1597년 11월 17일 [양력 12월 25일]<갑진> 비가 내렸다.
경리 양호(楊鎬)의 차관이 초유문(招諭文: 적이나 적에게 붙었던 자들을 너그러운 조건으로 포용한다는 포고문)과 면사첩(免死帖: 사형을 적용하지 않을 것을 보증하는 증서)을 가지고 왔다.
◉ 1597년 11월 18일 [양력 12월 26일]<을사> 맑다.
따뜻하기가 봄날 같다. 윤영현(尹英賢)이 와서 봤다. 정한기(鄭漢起)도 왔다. 땀이 났다.
◉ 1597년 11월 19일 [양력 12월 27일]<병오> 흐렸다.
조방장 배흥립(裵興立)과 장흥부사가 와서 봤다.
◉ 1597년 11월 20일 [양력 12월 28일]<정미> 비가 내리고 바람이 불었다.
임준영(任俊英)이 와서, "완도를 정탐하니 적들이 없습니다."고 전했다.
◉ 1597년 11월 21일 [양력 12월 29일]<무신> 맑다.
송응기(宋應璣) 등이 산의 일꾼을 거느리고 해남에 소나무 있는 데로 갔다. 이 날 저녁에 순생(順生)이 와서 잤다.
◉ 1597년 11월 22일 [양력 12월 30일]<기유> 흐렸다가 개다가 했다.
저녁에 김애(金愛)가 아산에서 돌아왔다. 임금의 분부를 가지고 왔는데, 이 달 초열흘날에 아산에 들러 편지를 가져 왔다. 밤에 비가 오고 눈이 내렸으며 바람이 세게 불었다. 장흥에 있던 적들이 20일에 달아났다는 보고가 왔다.
◉ 1597년 11월 23일 [양력 12월 31일]<경술> 바람이 세고 눈이 많이 왔다.
이 날 승첩한 장계를 썼다. 저녁에 얼음이 얼었다고 했다. 아산의 집으로 편지를 쓰자니 죽은 아들 생각에 눈물이 흘러 거둘 수가 없었다.
◉ 1597년 11월 24일 [양력 1598년 1월 1일]<신해> 눈과 비가 내렸다.
된하늬바람이 계속 불었다.
◉ 1597년 11월 25일 [양력 1월 2일]<임자> 눈이 내렸다.
◉ 1597년 11월 26일 [양력 1월 3일]<계축> 비와 눈이 내렸다.
얼어서 막힌 게 갑절이나 혹독했다.
◉ 1597년 11월 27일 [양력 1월 4일]<갑인> 맑다. 장흥의 승첩계본을 수정했다.
◉ 1597년 11월 28일 [양력 1월 5일]<을묘> 맑다.
장계를 봉했다. 무안에 사는 진사 김덕수(金德秀)가 군량에 쓸 벼 열다섯 섬을 가져와 바치었다.
◉ 1597년 11월 29일 [양력 1월 6일]<병진> 맑다.
유격 마귀(麻貴)의 차관 왕재(王才)가, "물길을 따라 명나라 군사가 내려온다."고 했다. 전희광(田希光)·정황수(鄭凰壽)가 왔다. 무안현감도 왔다.
◎ 난중일기(亂中日記) - 정유년 12월 (1597년 12월)
◉ 1597년 12월 초1일 [양력 1월 7일]<정사> 맑다.
맑고 따뜻했다. 아침에 경상수사 입부 이순신(李純信)이 진에 왔다. 나는 배가 아파서 저녁나절에야 수사를 보고, 그와 종일 이야기하며 대책을 의논했다.
◉ 1597년 12월 2일 [양력 1월 8일]<무오> 맑다.
날씨가 너무 따뜻하여 봄날 같다. 영암의 향병장 류장춘(柳長春)이 적을 토벌한 사유를 보고하지 않았으므로, 곤장 쉰 대를 쳤다. 홍산 현감 윤영현(尹英賢)·김종려(金宗麗)·백진남(白振南)·정수(鄭遂) 등이 와서 봤다. 밤 열시쯤에 땀이 배어 젖었다. 된바람이 몹시 불었다.
◉ 1597년 12월 3일 [양력 1월 9일]<기미> 맑다.
바람이 세게 불렀다. 몸이 불편하다. 경상수사가 와서 봤다.
◉ 1597년 12월 4일 [양력 1월 10일]<경신> 맑다.
몹시 추웠다. 저녁나절에 김윤명(金允明)에게 곤장 마흔 대를 쳤다. 장흥 교생 기업(基業)이 군량을 훔쳐 실은 죄로 곤장 세 대를 쳤다. 거제현령 및 금갑도만호·천성보 만호는 배메기하는 데서 돌아왔다. 무안현감 및 전희광(田希光) 등이 돌아갔다.
◉ 1597년 12월 5일 [양력 1월 11일]<신유> 맑다.
아침에 공로를 세운 여러 장수들에게 상품과 직첩을 나누어 주었다. 봉제(奉제)가 김돌손(金乭孫)을 데리고 함평 땅으로 갔다. 보자기를 수색하는 정응남(鄭應男)이 점세(占世)를 데리고 진도로 갔다. 배를 새로 만들 때 나쁜 일이 있는지 없는지를 알아볼 일로 아울러 나갔다. 해남의 독동(禿同)을 처형했다. 전 익산군수 고 종후(高從厚)가 왔다. 김억창(金億昌)이 왔다. 광주의 박자(朴仔)가 왔다. 무안의 나덕명(羅德明)이 왔다. 도원수의 군관이 임금의 분부를 가지고 왔는데, "이번 선전관 편에 들으니, 통제사 이순신(李舜臣)이 아직도 상제라 하여 방편을 따르지 않아 여러 장수들이 민망히 여긴다고 한다. 사정이야 비록 간절하지만, 나라 일이 한창 바쁘다. 옛사람의 말에도 `전쟁에 나아가 용맹이 없으면, 효가 아니다.'고하였다. 전쟁할 때의 용감이란 소찬으로 기운이 없는 자는 해낼 수 없는 것이다. 예기에도 `원칙과 방편'이 있으니, 꼭 원칙대로만 지킬 수는 없는 것이다. 경은 내 뜻을 짐작하여 소찬에 더하여 방편을 쫓도록 하라."고 하면서 고기반찬 을 하사하셨으니, 더욱 비통했다. 해남의 강간·약탈한 죄인을 함평에서 자세히 다스렸다.
◉ 1597년 12월 6일 [양력 1월 12일]<임술>
나덕준(羅德峻)·정대청(鄭大淸)의 아우 정응청(鄭應淸)이 와서 봤다.
◉ 1597년 12월 7일 [양력 1월 13일]<계해> 맑다.
◉ 1597년 12월 8일 [양력 1월 14일]<갑자> 맑다.
◉ 1597년 12월 9일 [양력 1월 15일]<을축> 맑다. 종 목년(木年)이 들어왔다.
◉ 1597년 12월 10일 [양력 1월 16일]<병인> 맑다.
조카 해·아들 열 및 진원(珍原)이 윤간(尹侃)·이언량(李彦량)과 함께 들어왔다.
◉ 1597년 12월 11일 [양력 1월 17일]<정묘> 맑다.
경상수사와 조방장이 와서 봤다. 우수사도 와서 봤다.
◉ 1597년 12월 12일 [양력 1월 18일]<무진> 맑다.
◉ 1597년 12월 13일 [양력 1월 19일]<기사> 가끔 눈 오다.
◉ 1597년 12월 14일 [양력 1월 20일]<경오> 맑다.
◉ 1597년 12월 15일 [양력 1월 21일]<신미> 맑다.
◉ 1597년 12월 16일 [양력 1월 22일]<임신> 맑다. 저녁나절에 눈 오다.
◉ 1597년 12월 17일 [양력 1월 23일]<계유> 눈바람이 몹시 섞여 치다.
조카 해와 헤어졌다.
◉ 1597년 12월 18일 [양력 1월 24일]<갑술> 눈 오다.
새벽에 해는 어제 취한 술이 깨지 않았는데도 오늘 새벽에 출항했다. 마음이 편하지가 않다.
◉ 1597년 12월 19일 [양력 1월 25일]<을해> 종일 눈이 내리다.
◉ 1597년 12월 20일 [양력 1월 26일]<병자>
진원(珍原)의 어머니와 윤간(尹侃)이 올라갔다. 우후가 교서에 숙배했다.
◉ 1597년 12월 21일 [양력 1월 27일]<정축> 눈 오다.
아침에 윤홍산이 목포에서 와서 봤다. 저녁나절에 배 조방장과 경상수사가 와서 보고 몹시 취하여 돌아갔다.
◉ 1597년 12월 22일 [양력 1월 28일]<무인> 눈비가 섞여 내리다.
함평현감(손경지)이 들어왔다.
◉ 1597년 12월 23일 [양력 1월 29일]<기묘> 눈이 세 치나 내렸다.
순찰사가 진에 온다는 기별이 먼저 왔다.
◉ 1597년 12월 24일 [양력 1월 30일]<경진> 눈이 오다 개이다 하다.
아침에 이종호(李宗浩)를 순찰사에게 보내어 문안했다. 오늘 밤 나덕명이 와서 이야기하는데, 머무르고 있는 걸 싫어한다는 것을 모르니 한심하다. 밤 열시에 집에 편지를 썼다.
◉ 1597년 12월 25일 [양력 1월 31일]<신사> 눈 오다.
아침에 열이 돌아갔다. 제 어머니 병 때문이었다. 저녁나절에 경상수사·배 조방장이 와서 봤다. 오후 여섯시에 순찰사가 진에 왔으므로, 함께 군사에 관한 일을 의논하고, 연해안 열아홉 고을을 수군에 전속하게 하였다. 저녁에 방안으로 들어가 편안하게 이야기했다.
◉ 1597년 12월 26일 [양력 2월 1일]<임오> 눈 오다.
방백과 함께 방에 앉아서 은밀히 군사 대책을 논의했다. 저녁나절에 경상수사(이순신)와 조방장 배흥립(裵興立)이 와서 봤다.
◉ 1597년 12월 27일 [양력 2월 2일]<계미> 눈 오다.
아침을 먹은 뒤에 순찰사가 돌아갔다.
◉ 1597년 12월 28일 [양력 2월 3일]<갑신> 맑다.
경상수사와 조방장 배흥립(裵興立)이 와서 봤다. 비로소 경상수사가 지니고 있던 물건이 왔다는 말을 들었다.
◉ 1597년 12월 29일 [양력 2월 4일]<을유> 맑다.
김인수(金仁秀)를 놓아 보냈다. 윤□□에게 곤장 서른 대를 치고서 놓아 보냈다. 영암좌수(座首)는 문초를 받고 놓아 주었다. 두우(杜宇)가 종이 감으로 백지·상지를 아울러 쉰 장(아래 글자가 지워져서 알아볼 수가 없음)을 가져왔다. 초저녁에 다섯 사람이 뱃머리에 왔다고 했다. 그래서 종을 보냈다.(이 아래 글자가 지워져 알 수 없음) 그것이 무슨 듯인지 알 수가 없다. 거제의 망령됨을 알만도 하다.(이 아래 글자가 지워져 알 수 없음) 다친 팔과 손가락을 물로 씻었다고 했다.
◉ 1597년 12월 30일 [양력 2월 5일]<병술> 입춘. 눈보라가 몹시 휘날렸다.
□□□배 조방장이 와서 봤다. 여러 장수들이 와서 봤다. 평산 포만호·영등포 만호는 오지 않았다. 부찰사의 군관이 편지를 가지고 왔다. 오늘밤이 일 년의 마지막 날이 되는 그믐밤이라 비통한 생각이 한결 더 하다.
◎ 난중일기(亂中日記) - 무술년 1월 (1598년 1월)
◉ 1598년 1월 초1일 [양력 2월 5일]<정해> 맑다.
저녁나절에 비가 잠깐 내렸다. 경상수사·조방장 및 여러 장수들이 다 와서 모였다.
◉ 1598년 1월 초2일 [양력 2월 6일]<무자> 맑다.
나라제삿날(明宗 仁順王后 沈氏 祭日)이라 공무를 보지 않았다. 새로 만든 배의 진수식을 했다. 해남현감(류형)이 와서 보고 돌아갔다. 송대립(宋大立)·송득운(宋得運)·김붕만(金鵬萬)이 각 고을로 나갔다. 진도군수(선의경)가 와서 보고 돌아갔다.
◉ 1598년 1월 3일 [양력 2월 7일]<기축> 맑다.
이언량(李彦良)·송응기(宋應璣) 등이 산□□□ (□□□은 떨어져서 알아볼 수 없음)
◉ 1598년 1월 4일 [양력 2월 8일]<경인> 맑다.
무안현감(南彦祥)에게 곤장을 쳤다. □수사에게 □□했더니, 우수사가 □□□ 왔다.(□□□은 떨어져서 알아볼 수 없음.)
◉ (**날짜 없음)
명나라 계금(季金) 유격장(遊擊將)에게서 받은 물건은 4월 26일인데, 청운비단(靑雲絹) 1단, 남운비단(藍雲絹) 1단, 비단버선(綾襪) 1쌍, 구름무늬 신(雲履) 1쌍, 향기(香棋) 1부, 향패(香牌) 1부, 절 명(浙茗) 二근(36냥쭝), 향춘(香椿) 2근(36냥쭝), 사청차(四靑茶) 사발 10개, 산닭(生鷄) 4마리이고, 강인약(江鱗躍) 천총(千摠)에게서 받은 물건은 춘명(椿茗) 1봉, 화합(花盒) 1개, 등부채(藤扇) 1발, 복리(服履) 1쌍이고, 주천총(朱千摠)에게서 받은 것은 술잔(酒盞) 6개, 주사잔( 箋) 2장, 소합(小盒) 1개,찻잎(茶葉) 1봉, 신선로(神仙爐) 1, 응애(鷹埃) 2이고, 정문린(丁文麟) 천총(千摠)에게서 받은 것은 여름양말(暑襪) 1켤레, 영견(領絹) 1모, 양차(兩茶) 1봉, 호추(胡椒) 1봉이며, 진자수(陳子秀) 파총(把摠)에게서 받은 것은 수보(繡補) 1부 등받이이다, 시 쓴 부채(詩扇) 1발, 향선(香線) 10가닥이며, 육경(陸卿)에게서 받은 것은 꽃수건(花巾) 1조, 허(許) 파총(把總)에게서 받은 것은 청포와 홍포(靑布紅布) 각 1, 금부채(金扇) 2, 꽃수건(花 ) 2이다. 10월 4일에는 복일승(福日升) 유격(遊擊)에게서 받은 것은 청포(靑布) 1단, 남포(藍布) 1단, 금부채(金扇) 4자루, 젓가락(杭 ) 2모, 산닭(生鷄) 2마리, 양(鹹 羊) 1마리, 왕원주(王元周) 유격(遊擊)에게서 받은 것은 금띠(金帶) 1, 양감도서갑(양嵌圖書匣) 1, 향합(香盒) 1, 경대(鏡架) 1, 금부채(金扇) 2, 비단실(絲線) 1봉, 찻항아리(茶壺) 1, 빗(蘇梳) 2개, 오유림(吳惟林) 천총(千總)에게서 받은 것은 양대(양帶) 1개, 배첩(拜帖) 20장이며, 진국경(陳國敬) 파총(把總)에게서 받은 것은 꽃차(花茶) 1봉, 꽃무늬술잔(花酒盃) 1대, 구리찻숟갈(銅茶匙) 2부, 찻숟갈(細茶匙) 1부, 홍례첩紅禮帖) 1개, 전간첩(全柬帖) 5장, 서간첩(書柬帖) 10장, 길절간(吉折柬) 8장, 붉은 주사 젓가락(紅저) 10쌍이며, 계영천(季永천)에게서 받은 것은 금부채(眞金扇) 1발, 땀수건(汗巾) 1모, 부들채(蒲扇) 1자루, 수건(粗 ) 2장, 왕명(王明) 기패(旗牌)에게서 받은 것은 남포(藍布) 1단, 베개(枕頭花) 1 부, 푸른비단실(靑絹線) 약간, 공진(공璡) 파총(把總)에게서 받은 것은 붉은 종이(紅紙) 1부, 절차(浙茶) 1봉, 차숟갈(茶匙) 6개, 바늘(蘇針) 1포, 왕계자(王啓子) 중군(中軍)에게서 받은 것은 남띠 (藍帶) 1개, 빗(梳帶細) 2개이다.
◎ 난중일기(亂中日記) - 2월 3월 4월 5월 6월 7월 8월 기록에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