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참된 인성 부인 | 가현설, 영지주의, 양태론 |
참된 신성을 부인 | 에비온주의, 양자설 |
인성의 완전성 부인 | 아폴리네리우스 |
신성의 완전성 부인 | 아리안주의 |
두 인격으로 나눔 | 네스토리우스 |
본성을 혼합(단성론) | 시릴, 유티커스 |
② 칼세돈 기독론은 아래로부터의 기독론(Christology from below)을 철저히 배격하고 위로부터의 기독론(Christology from above)을 강하게 주장하고 있다. 현대의 아래로부터의 기독론이 주장하는 바와 같이 나사렛 예수라는 인간이 그의 인격적인 활동으로 말미암아 신성을 획득한 것이 아니라, 완전한 신성을 소유하신 신적인 인격체, 하나님이 아래로 내려오셔서 인성을 취하셨다는 것을 강조함으로 말미암아 온갖 종류의 양자설, 인간 중심적 기독론을 배격하고 있다. 복음사역의 전문가가 될 사람들은 이렇게 복잡한 문제들도 열심히 공부해야 한다. 평신도들이 아니고 지도
자이기 때문이다.
Ⅱ. 현대 기독론의 동향과 도전
1. 현대 기독론의 흐름
1) Christology from below VS Christology from above
① 계몽주의 사상의 영향 : 이런 기독론은 칼세돈 등 전통 기독론에 대한 반작용인 동시에 계몽주의에서부터 발전된 현대사상의 많은 영향을 받아 이루어진 산물이다. 계몽주의 후에 사상계에 대변혁이 일어난다. 중세의 하나님 중심에서 인간 중심의 세계관으로 전환. 그런 상황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진리의 절대적 척도가 아니고 인간의 이성과 이념이 진리의 척도가 됨. 성경에서 인간의 이성과 경험으로 이해되고 입증되지 못한 부분들을 더 이상 성경의 권위에 의지해서 맹목적으로 받아들일 수 없다. 초자연, 초월 세계의 역사성을 부인하고 신화적으로 본다. 그러나 계몽주의의 운동 아래서 인간의 이성과 경험을 너무 절대시하는 이런 극단성에 대해 자책, 비판운동도 일어났다. 특별히 칸트는, 계몽주의 철학의 한계성을 분명히 설정한 동시에, 계몽주의 철학을 완성했다고 볼 수 있다. 칸트는 과학과 철학이 서로 독립적이어서 조화하지 못한 채 발전하는 것을 아주 못마땅해 했다. 이성은 절대적이지 않고 극히 제한되어 있음을 강조했다. 칸트의 기본 입장은 이미 강의했다. 그는 경험주의, 회의주의로부터 과학을 구원하려 했다. 또 이성주의가 절대적인 역할을 하려는 횡포에서 종교를 구원하려 했다. 우리가 알 수 있는 지식은 경험세계에 국한되어 있다고 했다. 즉각적으로 경험한 것만 알 수 있다는 흄의 입장이다. 흄은 결국 회의주의로 빠져버렸다. 즉각적으로 감각하는 것만 확실한 지식이라고 보았기 때문에. 그런데 칸트는 흄과 같이 우리의 지식이 경험에 국한되어 있음을 인정하지만 이런 회의주의를 극복하기 위해 인간의 정신세계의 놀라운 기능을 새롭게 강조했다. 코페르니쿠스적 혁명. 우리의 마인드는 사물과의 교류에서 수동적인 역할만 하지는 않는다. 수납한 그 인상을 통일성 있게, 질서 있게 재구성하는 놀라운 정신적 기능을 가지고 있다. 정신이 오히려 우리가 감각하는 사물에게 능동적인 역할을 한다. 이원론적으로 칸트는 생각한다.
noumenal world | 종교 | 하나님, self(Ding an sich), 도덕의식... | 실천이성 |
phenomenal world | 과학 |
| 이론이성 |
경험세계에 지식은 제한되어 있다. 경험으로부터 오는 인상과 자료들을 통일성 있고 질서 있게 재구성하는 기능이 정신 안에 있고 그것으로 말미암아 과학이 가능하다. 그러나 현상세계(과학)를 초월한 본질 세계(종교)에 대한 지식은 우리가 가질 수 없다. 그것은 경험할 수 없는 세계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 안에는 본질세계를 파악하고 감지할 정신적 기능은 없다고 주장한 점이 문제이다. 칸트는 우리들이 논하는 이론이성으로 본질 세계를 부인할 수도, 증명할 수도, 논할 수도 없다고 했다. 이론이성의 분명한 한계를 인정함으로써 종교가 들어설 자리를 마련하는 듯 했다. 많은 사람들은 종교에 기여를 했다고 한다. 그러나 그러한 평가는 옳지 않다. 그런 평가는 과학과 종교를, 믿음과 이성을 완전히 상충된 것으로 보았다. 신이 존재하는 것을 믿는 것은 OK지만, 그 사실을 다루는 것은 NO OK라고 했다. 도덕적인 삶을 살기 위해 신은 요청된 신이다. 종교는 이론이성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 우리 삶의 유익을 위해서 실천이성에 근거한 것이라고 보았다. 믿음의 내용에 대한 기능성은 인정하지만 본질적인 고찰은 거부한다. 신학적 회의주의, 불가지론이다. 믿음의 내용을 교리화, 신학화 하는 것은 큰 문제가 있다고 주장. 예수님에 대해서 신적인 본질에 대한 논의, 성경의 증거는 nonsense라고...
이런 대사상적인 변혁, 짙은 회의주의가 팽배한 상황에서 신학을 하고 신학을 발전시키려 할 때 현대신학자들의 문제가 생긴다. 더 이상 예수님의 신적 본질을 논하는 기독론은 힘들게 되어 버렸다. 이런 사상가들에게 신랄한 비판한 대상이 되니까. 그래서 신랄한 비판을 피하기 위해서 인간의 경험이라는 측면에서 출발했다. 예수님이 다른 인간과 다른 독특성, 어떤 측면에서 신적 존재라 볼 수 있는가? 크게 두 가지 방향으로 기독론이 발전될 가능성이 있다.
① 예수님의 종교적 의식과 경험
② 예수님의 윤리적 의식과 경험에 초점을 맞추는 것.
이 시도의 대표적인 신학자와 사상가가 다음의 두 사람이다.
① Schleiermacher : 이렇게 변화된 사상계의 상황 속에서, 이런 현대사조의 도전과 요구 앞에 그에 맞추어서 기독교의 진리를 재해석하려고 했다. 예수님의 신적 본질에서부터 출발하는 기독론이 아니라, 예수님이 인간이라는 관점에서. 그의 사상은 계몽주의, 특히 칸트가 이룬 새로운 사상적인 체계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체계에서 다루고 있다. 예수님이 인간이라는 측면에서. 이런 면에서 슐라이어마흐는 칸트의 영향아래 있으면서 따라가지는 않는다. 칸트는 종교는 윤리(실천이성)에 근거한다고 했지만(리츨도 종교를 윤리에 근거해서 기독교를 발전시켰다), 슐라이어마흐는 종교를 윤리적 관점에서 논하는 것을 거부했다. ‘감성’을 강조했다. romanticism의 영향을 받았다. 슐라이어마흐는 경건주의 가정에서 자라서 감성과 체험을 강조하는 분위기에서 자랐다. 여기서 창조적인 통찰력을 발견할 수 있다. 종교의 핵심은 'feeling'이라고 했다. 좀 더 우리 마음의 심층에 도사리는 종교적 심성에서 우러나오는 affection, religious awareness, consciousness이다. 그는 성경을 통해서 예수라는 특별한 인간의 내면세계를 분석한 결과, 발견한 사실은 예수가 독특한 것은 그 안에는 아주 순수하고 온전한 feeling이 있다. 종교적 심성과 의식이 있다.
폴 틸리히는 이런 슐라이어마흐의 사상을 나름대로 해석하기를, 예수님은 항상 하나님을 의식하고 살았다는 것으로 이해했다. 이것을 다른 말로 슐라이어마흐는 절대자를 절대적으로 의존하는 the sense of absolute dependence, the sense of Divine Immanence라고 했다. 이런 점에서 특별한 종교의식을 가졌기 때문에 이상적이고 모범적인 인간의 표본이라고 했다. 인간 안에는 이런 종교적인 감성이 있다. 모든 사람에게는 죄로 말미암아 종교적 의식, 절대적 의존감이 약화되고 흐려졌다. 슐라이어마흐에 의하면 감성이 풍부하지 못한 사람은 문제가 많다 ^^
*. 구원은 죄로 말미암아 흐려지고 약해진 종교적 감성이 풍부해지는 것이다(조나단 에드워드도 종교적 감성이 충만해야 한다고 했다...). 예수 그리스도의 역할은 그 안에 완전한 모형적인 종교적 의식을 우리에게 계시해 주었다. 완전한 임재 의식 가운데 사는 인간 존재의 표상을 우리에게 보여주었다. 우리도 회복할 수 있도록 인도해주는 model이다. 교회라는 공동체 안에 공동체의 표상으로 제시된 예수 그리스도의 model을 바라봄으로, 모든 사람에게 어느 정도 있는 종교적 의식을 고취시킨다.
이런 이론은 일리가 있는 측면이 많다. 예수를 믿음으로 일어나는 새로운 현상 중 하나는 하나님의 임재 의식으로 사는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예수를 믿음으로 우리 안에 하나님에 대한 의식이 소생되는데, 그 의식은 우리 안에서 생래적으로 조성되는 것이 아니다. 우리 안에 있는 원초적인 종교성이 새로워지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위로부터 오는 것이다. 성령으로 온다. 예수를 믿음으로써 성령이 임재하셔서 가장 먼저 하나님의 임재를 의식하고 체험하는 감성을 새롭게 하신다. 우리의 입장은 그것이다. 성령의 내재하시는 은혜는 어떻게 오나? 예수님이 완전한 종교의식을 사셨다는 model을 듣고 생각함으로, 가르침으로 오는가?
★★★ 신적인 본질을 가진 예수님이 이 땅에 사람으로 오셔서(성육신) 고난받으시고 죽으시고 부활하신 그 구속 사역의 대가로 성령을 보내셔야만 한다. 이것을 먼저 강조해야 한다(시험 출제 가능성). 따라서 기독론은 하나님의 신적 본질에서 출발해야 한다. 로고스, 성육신, 죽음...에서 출발해야 한다. 슐라이어마흐는 예수님의 대속의 죽음을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그에게는 인간에게 내재한 생래적 종교의식에서 비롯된 무의식으로 이해할 수밖에 없다. Barth 같은 사람은, 슐라이어마흐의 이런 견해가 바로 성령의 역사를 혼동시켜 버렸다고 본다. 여기에 대항해서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하려면 초월적인 은혜가 주어져야 한다고 ‘초월신학’을 강조했다. 슐라이어마흐는 성령에 대한 언급이 그의 신학에 매우 결여되어 있다. 바르트는 비판하면서도 슐라이어마흐가 좀더 자기가 말하려는 것들을 성령론적으로 접근했더라면 오류를 많이 피했을 것이라고 본다. 슐라이어마흐가 너무 하나님의 은혜의 내재성을 너무 강조했다면 바르트는 초월을 너무 강조했다. 하나님을 하나님 되게 하라(Let the god be God!). 위로부터, 계시로부터 찾아오는 하나님을 먼저 이해하라.
religious awareness - 슐라이어마흐
moral awareness - 알버트 리츨
② Albert Ritschl : 리츨도 신적 본질에서 출발하지 않고 예수님이 인간이라는 측면에서 출발. 계몽주의와 칸트가 이룬 새로운 사상적 패러다임 위에서 작업. 리츨은 좀더 칸트의 영향을 받았다. 리츨은 예수님을 특히 윤리적, 도덕적 인간으로 이해했다. 기독론에 대한 본질적 언급 피하고 동정녀 탄생 거부. 단순한 도덕적 인간의 관점에서 기독론을 시작. 그에 의하면 예수의 독특성은 이 땅에서 사랑의 윤리가 지배하는 하나님 나라를 이루시려는 하나님의 뜻과 목적을 이루신 분이다. 자신이 먼저 모범을 보이시고 많은 사람들이 자신을 따르게 해서 기독교 공동체를 이루었다. 하나님께서 의도하시고 목적하신 하나님 나라의 창시자이다. 예수는 사람에게 그가 미친 신적 영향으로 신적 존재로 불릴 만한 인물이라고 했다.
★★★(시험문제 가능성) 리츨의 문제점도 슐라이허마허처럼, 예수님이 신적 본질을 가지신 분으로서 성육신 하시고 고난받으시고 부활하심으로 성령을 보내셔서 성령의 은혜로 말미암아 인간성이 개조되고 갱신되고 죄로부터 자유하여 선을 실천할 능력이 주어져야 사랑의 윤리, 가르침을 좇아 살 수 있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리츨은 imperative를 우선적으로 강조하시지만, 실은 성령의 은혜, 복음의 은혜가 먼저 필요하다. indicative, 축복의 메시지가 먼저 강조되어야 한다.
예수님의 신적 본질을 무시하고 예수님의 구원론적인 기능만을 강조하는 것은 하나의 허상이다. 예수님의 구원론적 기능은 신적 본질로서 그 사역을 완수하신 토대 위에서만 가능하다. 자유주의 신학에 바탕을 둔 복음의 메시지를 들으면 답답하다. 사회윤리를 강조하기 때문에. 그렇게 해야 한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그러나 그것을 행한 도덕성이 없다는 것이 문제다. 그것을 해결하기 위해서 하나님이 인간이 되셨다. 모든 대속 사역을 완수하심으로 그런 삶을 살 수 있는 가능성을 확보하셨다.
2) Historical Jesus VS Kerygmatic Jesus(역사적 예수 VS 선포된 예수)
Jesus of history VS Jesus of faith(or kerygma)
① "The search of for the Historical Jesus" - David Strauss, Ernst Renam, Adolf von Harnack
예수의 신적 본질에서 출발하는 정통 기독론을 배격하고 인간 예수에 초점을 맞추는 현대의 기독론은 또 하나의 관심을 자연히 자극하게 된다. 이제는 한 단계 더 나아가서, 예수가 인간이라면 예수라는 존재가 참으로 복음서에 증거된 실재의 인물인가 하는 의문제기. 역사적인 예수의 참모습을 발견해 보자는 운동이 발생. 19세기의 고동비평, 문서비평이 발전되면서 성경에 나타난 예수의 증거의 역사적 신빙성 의문. 그들 주장은, 성경의 주장은 초대교회의 주관적인 경건, 신앙으로 채색되어서 예수가 신화적, 초인간적으로 과장되었다고 주장. 이 운동은 실제 역사의 지평에 존재했던 예수라는 존재를 파악해 보자, 아마 성경에 증거된 예수와는 아주 다를 것이라는 전제 위에서 이런 탐구의 노력을 하였다.
이들은 서로 여러 가지 차이점이 있지만, 공통으로, 초대교회가 증거하고 선포한 예수는 역사적 예수와는 다르다는 것. 성경증거의 많은 부분은 신화적, 종교적으로 채색된 비사실들이다. 역사적 예수와 복음서에 증거된 예수는 일치하지 않을 뿐 아니라, 바울이 증거한 예수와도 아주 다르다. 바울 서신의 증거된 예수는 바울의 주관적인 신앙과 신학화의 산물이지 정말 역사적으로 존재한 사람이 아니다. 바울의 기독론에 있어서 결정적으로 중요한 면에 대해서 예수는 전혀 알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들의 견해의 문제는 어떤 확실한 객관적 증거에 근거하지 않고 자신들의 견해, 특히 계몽주의의 전제에서 출발하고 있다. 인간이 이성적으로 경험적으로 입증할 수 없는 성경의 증거는 신화로 배격한다. 하르낙은 예수의 기적에 대해 논하면서 예수의 초자연적 사건의 증거를 다 부인한다. “예수가 존재했던 시기에는 과학이 발달하지 않아서 계몽되지 못했기에 무엇이 과학적으로 가능하고 불가능한지를 파악하지 못했다. 예수가 물위를 걸으신 것도, 그 때는 중력의 법칙을 몰랐으니 마음이 선한 사람은 물위를 걸어도 빠지지 않을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했을 수 있다. Tyrell은 하르낙을 비판, 하르낙이 성경에서 보는 예수는 깊은 우물에서 비치는 19세기 자유주의 신학자 자신의 얼굴이다. 역사적 탐구는 19세기에 일어났다. 그 탐구의 허구성이 드러나자, 20세기에는 선포된 예수에 대한 신학자들의 관심이 전환되었다. 그 선구자는 Martin Kahler.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용옥은 낡아빠진 자유주의 신학에 근거해서 우리 나라의 대중들을 현혹시킨 바 있다. 김용옥이 자신의 스승이라고 공공연하게 이야기하는 조영남도 마찬가지다. 예수를 하나님으로 보지 않고 인간으로 보는 전제에서 출발하기 때문에 이들의 모든 결론은 결국 예수의 하나님 되심을 부인하게 된다.
② "kerygmatic Jesus"에 대한 새로운 관심 - Martin Kahler, 「So-called Historical Jesus and the Historical Biblical Christ」(Der sogennate historische Jesus und der geschichtliche, biblishe Christus)
소위 말하는 역사적 예수란 현대 신학자들의 창작물에 불과하다. 그들의 말처럼 성경에 증거되지 않은 예수는 있을 수도 없고, 만일 그런 예수가 있다면 그 예수에 대한 증거도 찾을 수 없고, 후대에 영향도 없고 제자도 없는 존재이다. 오고 오는 세대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초대교회가 선포하고 신앙한 그리스도가 우리의 믿음의 근거다. 우리는 선포된 예수 배후에 숨어있는 다른 예수를 발견할 수 없다. 그는 역사를 두 가지 개념으로 나눈다.
․Geschichte - existential history, significant history. 하나님의 구속역사는 역사적 연구와 탐구에 의해서 이해할 수 없다. 오직 믿음의 눈으로 이해할 수 있다. 부활과 성육신을 어떻게 역사적 지평 위에서 일어난 사건처럼 역사적 탐구로 이해할 수 있겠느냐?
․Historie - 우리가 아는 Factual history
이런 구분이 20세기 현대신학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특히, 신정통주의 신학자들에게 영향을 주었다.
Karl Barth : 바르트는 19세기에 만연했던 역사비평, 고등비평의 공격에서 기독교의 진리를 방어하고 보전하기 위해서 이런 이원론적인 역사 개념을 도입했다. 우리가 믿는 내용은 예수 그리스도의 사건은 역사 속에서 일어난 사건이지만, 보통 역사의 사건을 다루는 역사적 탐구의 방법으로는 입증할 수 없다. 범주 바깥에 속했다.
우리의 믿음이 내용은 100% 확실하게 역사로 증명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이성적, 역사적 탐구를 획득해서 믿음을 갖는 것이 아니고 선포된 말씀 가운데 성령으로 찾아오시는 예수와의 인격적인 만남을 통해서 믿음을 갖는다. 이런 배경 속에서 바르트의 초기 작품에는 이성과 믿음을 상충된 것으로 보는 경향이 있다. 믿음은 비이성적인 것처럼. 바르트 교의학의 서론에 보면, 교의학을 까고 시작한다. 특히 system을 깐다(그러면서 자기는 굉장히 조직적이다). 이성을 깐다. 전통주의의 계시의 특성은 propositional(명제적; 역사적 사실에 대한 명제적인 사실이라는 점에서)한데, 바르트의 견해는 우선적으로 I-Thou personal encounter(하나님께서 인격적으로 찾아오셔서 우리를 만나심)이다. 이런 바르트의 신학은 상당히 매력이 있다. 설교자들의 신학을 잘 분석해 보면 바르트와 참 비슷하다. 그러나 이런 바르트의 입장에서 우리가 조심해야 할 문제는, 그래 personal하지만, propositional한 것을 무시할 수 없다. 바르트는 19세기에 이성적인 검증으로 예수를 파악하려는 운동이 범람하는 상황에서 기독교 진리를 방어하려는 노력에서 이런 극단성이 발현되었다고 볼 수 있다.
Emil Brunner : 브루너도 믿음은 이성적인 증명에 근거하지 않는다고 했다. 믿음은 자연적 이성 밖에 있다. 역사적 탐구가 어느 정도 도움이 될 수는 있지만, 믿음의 바탕이 되지는 못한다. 우리들의 믿음이라는 것은 이성적 증명방법으로 역사적 사실을 detail하게 알고 관찰해서 생기는 것이 아니고, 선포된 말씀으로부터 주어지는 것이다. 이성적인 증명, 역사적 탐구를 통해 믿음을 가지려는 것은 예수를 육신적으로 알려는 것이다. ‘Christ in the flesh’를 알아야 하지만, ‘Christ after the flesh’로 알려고 해서는 안 된다. 예수 이해에 있어서 공관복음의 증거보다 좀 더 신학적인 해석이 포함된 바울의 가르침을 고려해야 한다고 보았다. 선포된 예수에 우선적인 관심. 이런 의미에서 바르트와 브루너의 입장을 kerygmatic theology(말씀의 신학)라고 한다. 그러나 이들의 쓴 책은 너무 방대해서 이들의 책을 읽다가는 성경을 못 읽는다. kerygmatic theology는 새로운 각도에서 Christology from above로 돌아간 것이다.
Rudolf Bultmann : 신정통주의의 마지막 주자라고 할 수 있고, 극단적으로 발전시킨 불트만에게 가면... 예수에 대한 신약의 증거, 계시의 핵심은 역사적 예수가 아니라, 믿음의 예수, 선포된 예수다. 우리는 복음서와 신약을 통해 역사적 예수를 알 수 없다. 신화가 많다. 따라서 ‘비신화화’ 해야 한다. 역사적 예수를 알 수 없다고 해서 우리 믿음에 큰 지장이 있는 것은 아니다. 믿음은 역사적 예수에 대한 지식을 확인해서 오는 것이 아니고, 지금도 성령으로 오시고 살아 계신 선포된 예수 그리스도와의 인격적 만남을 통해서 오는 것이다.
그러나 기억할 것은, 우리의 신앙의 역사적 근거를 완전히 무시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의 믿음이 과거의 십자가사건과 아무 연관이 없다는 입장을 취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예수의 사건을 detail하게 묘사하는 것은 역사비평에 계속 공격을 받기 때문에 그것을 아는 것은 별로 중요하지 않다고 한 것. 불트만은 예수의 이해에서 너무 실존적인 접근을 함으로 기독교 신앙을 약화시켰다(?)
③ "The new search for the historical Jesus"
Ernst Kasemann : 여기에 대항해서 새로운 기독론 운동이 일어났다. 불트만의 제자 케제만. 역사적 예수의 믿음에 있어서의 중요성을 강조. 항상 제자는 스승보다 앞서야 한다. 제자는 스승에 배우면서 가장 스승의 약점을 잘 파악할 수 있어야 한다. 이 운동의 창시자 역할을 한 케제만. 그는 예수에 대한 믿음은 역사적 예수에 기초해야 한다고 보았다. 19세기의 문제는 예수가 단순히 인간이라는 전제에서 출발해서 그 전제가 결론까지 control했다. 그것이 문제다. 그러나 새로운 예수의 역사적 탐구는 결국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에 대한 확신과 믿음에 도달하게 한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되심, 신성에 대한 믿음은 이 연구의 전제가 아니고, 이 연구의 마지막 산물이어야 한다고 보았다. above에서 below로 또 전환한 것이다. 그러나 참된 below는 위로 올라갈 수 있다는 것.
Wolfhart Pannenberg : 대표적인 신학자다. 살아있는 바르트의 후예 중에서 가장 신학적 깊이가 있다고 봄. 몰트만과 쌍벽. 깊이와 짜임새가 있어. 팬난버그는, “우리의 믿음이 선포된 예수에게만 근거할 수는 없다”고 했다. 우리 신앙의 일차적 근거는 역사적 예수다. 우리는 맹목적으로 선포, 설교된 예수를 받아들일 것이 아니라, 정말 역사적 사실에 근거하는지 심각하게 탐구해야 한다고 보았다. 위로 시작된 기독론이 예수의 신성을 전제하고 출발함으로 인간 예수에 대한 역사적인 면의 중요성을 제대로 부각시키지 못한 약점을 가지고 있다. 전통 기독론이 위에서부터의 시도 속에서 선포된 그리스도를 근거하여 예수의 신성을 전제함으로 인간 예수의 역사성을 무시하는 약점. 밑에서부터의 기독론이 참된 인성을 밝혀주고, 또한 신성도 밝혀줄 수 있다. 참된 인간의 모습을 살펴봄으로써 예수의 참 인성을 규명하여 전통 기독론의 약점을 보완하고, 전통 기독론이 보전하려고 힘쓰는 신성도 증명할 수 있다.
예수의 하나님 되심에 이르는 새로운 전개.
그는 신정통주의의 신학자와는 달리, 이원론적 역사를 배격한다. 예수의 역사는 세상의 보편적인 역사와 동일하다. 보통 역사의 지평에서 일어난 사건이기에 같은 역사적 연구방법을 통해서 입증될 수 있는 것이다. 이런 접근은 위로부터의 기독론이 신앙의 객관적 근거를 제시하는데 약점을 안고 주관주의에 치우칠 약점을 극복할 수 있다. 그리고 선포된 예수가 역사적 근거가 있는지 확인하는 작업을 추구함으로써 참신한 도전을 준다. 그러나 문제는, 팬난버그가 주장하는 역사적 예수로만 예수의 사건에 대한 객관적인 확실성을 확보할 수 있겠는가 하는 점이 우리 신학자들의 의문점으로 남아있다. 선포된 예수의 증거를 고려하지 않고서는...
* 현대 기독론의 흐름
결론 : 이런 갈등의 문제를 어떻게 원만하게 이해할까?
성경의 예수 계시는 역사적 예수+선포된 예수다. 이 둘이 계시의 unity를 이루고 있다. 선포된 예수는 역사적 예수와 관계없는 초대교회가 만들어낸 종교적, 신학적 가공물이 아니다. 선포된 예수는 역사적 예수의 사건 안에 포함된 의미를 진술하고 있는 것이다. 공관복음에 예수가 사람으로 고난받으셨다는 fact의 의미는 우리를 죄에서 자유케 하기 위한 본질적 의미가 포함되어 있다. 그것을 우리에게 진술하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계시에 있어서 사건과 그것의 의미는 분리된 것이 아니다. 사건의 의미가 따로 그 사건에게 부여되는 것이 아니고, 사건 안에 의미가 담겨서 전달된다 선포된 예수는 역사적 예수의 사건에 대해서 색다른 의미를 추구하여 조작한 것이 아니라, 역사적 사건 자체에 담긴 본질적 의미를 해석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계시는 사건과 그 사건에 담긴 의미의 해석의 형태로 주어진다. 서로 보완되어야 한다. 분리될 수 없다. 역사적 예수의 사건과 그 의미 해석으로서의 선포된 예수는 긴밀한 연관 속에서 상호보완 되어서 예수에 대한 온전한 계시이다. 그러므로 신약의 예수는 역사적 예수인 동시에 선포된 예수이다. 기독론의 출발점은 한쪽만을 택할 것이 아니고, 전체를 다루어야 한다. 역사적 예수의 의미를, 비밀을 푸는 열쇠로서의 선포된 예수, 근거로서의 역사적 예수가 엮어져서 기독론의 출발을 이룬다.
3) Functional Christology vs. ontological Christology(기능적 기독론 VS 본질론적 기독론)
정통기독론 - 본질론적 기독론 :
현대기독론 - 기능적 기독론 : 슐라이어마흐, 리츨
현대기독론은 예수의 기능적인 측면을 다룬다. 예수가 본질적으로 누구인가를 다루지 않고, 우리를 위해서 무슨 사역을 하셨는가에 관심을 둔다. 칼세돈이 인격에 역점을 두었다면, 예수의 사역에 주안점을 둔 것이 기능적인 기독론이다. 성경신학적 관점에서 접근한 사람이 Oscar Cullmann.
Oscar Cullmann, 「Christology of the New Testament」- 신약에서는 칼세돈 기독론처럼 예수의 인격을 사역과 분리해서 다루고 있지 않다. 신약성경은 예수의 본질이 무엇인가를 다루는 것이 아니라, 예수는 우리를 위해 무엇을 하셨는지 사역과 기능을 다루고 있다. 초대교회에서는 이단 사상에 대응해서 예수에 대한 본질적 질문에 대답해야 했기 때문에 신약의 기독론과는 다른 기독론이 발전한 것이다. 그런 상황 속에서 교회 기독론은 신약과 다른 형태를 띄었다. 그런 상황을 고려할 때 얼마든지 접근의 필요성을 인정할 수 있지만, 이런 기독론의 관심과 방법론의 전환이 성경적인 관점을 우리들이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게 하는 문제를 야기할 수 있다고 본다. 이단 사조를 배격하기 위해 필요했지만, 이런 관심과 강조점의 전환은 성경적 관점이 유실될 위험성이 있다고 지적. 초대교회의 기독론이 안고 있는 약점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신약이 담고 있는 기능적 기독론으로 돌아가야 한다. 쿨만과 비슷한 맥락에서 많은 학자들이 신약성경은 예수의 본질보다 사역에 더 강조하고 있다고 보았다. 헬라 사상과 히브리 사상의 두드러진 차이점을 강조하면서... 예수의 본질을 다루는 칼세돈은 헬라사상의 영향을 받았다. 그러나 성경의 사상은 히브리적이다. 예수의 본질이 아니라, 사역과 기능에 우선적인 관심을 둔다.
얼마 전까지는 이런 주장이 상당히 일리가 있다고 받아들여졌다. 맹목적으로 받아들일 수는 없다. James Barr, B. Childs 등이 이 견해를 더 이상 받아들일 수 없다고 말하고 있다. 성경 안에도 본질적인 의미를 내포한 말씀이 많이 있다. “아버지와 나는 하나이니라” 등이 많다. 그리고 칼세돈 기독론이 우선적으로 본질을 다루지만, 그러나 기능적인 면을 전제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이미 이전의 사도신경과 니케아신경을 전제하고 있다. 이미 두 신경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을 다루고 있다. 칼세돈은 사도신경과 니케아신경의 연장과 발전으로서 앞의 신조의 사역적, 기능적인 강조를 전제하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 칼빈과 개혁자들은 칼세돈의 본질적인 접근과 함께 예수의 사역에 역점을 기울이는 기독론을 전개한다. 그래서 예수의 신성, 인성과 삶에 큰 관심을 기울인다. 그래서 구원론과의 관계성 속에서 기독론을 다룬다. 우리는 종교개혁의 전통을 따라 이 양 측면이 긴밀한 통일성을 이루도록 강조해야 한다. 우리는 본질만 강조하는 사변적 기독론이나 사역만 강조하는 현대신학의 오류에 빠지지 말아야 한다.
4) Christ's Uniqueness and Universality(예수의 유일성과 보편성)
Cosmic Christ vs historical Jesus
최근 신학계의 최대의 이슈와 관심은, 예수 그리스도가 과연 이 창조계의 모든 영역 속에서 어떤 의미가 있는가? 이것이 창조 신학, 생태학 신학, 과정 신학, 종교다원주의 신학자들의 관심. 예수의 우주적 차원에서의 중요성과 의미는 무엇인가? 이런 신학자들이 지적하는 문제점 중 하나는, 전통 교회는 너무 역사적인 예수의 유일성만 강조한 나머지 예수 사건의 의미와 중요성을 너무 개인 영혼과 종교적 영역 안에 제한시켰다. 그럼으로써 예수님의 사건의 우주적 중요성을 등한시했다고 지적. 그래서 우리의 신학이 현대 상황 속에서 새롭게 제기되는 전 지구적 문제, 생태학적 문제, 창조세계가 파괴되는 문제에 응답하기 위해서, 그 요구를 충족할 신학이 되기 위해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우주적 적용성과 중요성을 재발견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것의 한 형태로 나타나는 신학적 입장이, 미국의 크레먼트 신학교의 John Cobb. 그는 'Cosmic Christ'를 주장.
Cosmic Christ : 이 우주적 그리스도가 이 세상에 창조세계에 임재한 한 형태, 가장 모델적인 한 형태가 2000년 전에 나사렛 예수 안에 나타났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이 나사렛 예수 안에만 제한되지 않는다. 그 예수를 기점으로, 통로, 채널로 해서 우주적 그리스도는 전 우주적으로 파급된다. 세상 속에 스며들어간다. 모든 문화와 종교, 창조계, 피조계에서 이 우주적 예수가 임재함으로 우주적 갱신을 이루신다. 나사렛 예수는 그리스도다. 그러나 그만이 그리스도는 아니다. 그리스도는 나사렛 예수보다 훨씬 광범위하다. John Cobb는 나름대로 예수 그리스도의 유일성, 독특성을 주장한다. 이 우주적 그리스도가 나타나는 가장 모범적인 형태로서의 예수 그리스도의 유일성. 다른 종교 안에 나타나는 그리스도의 모습들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나타나는 모델을 척도로 해서 검증되어야 한다. 그러나 동시에 예수 외에 다른 문화와 종교의 매개체에서도 그리스도가 나타난다는 것임. 그것들을 통해서도 예수를 만나고 그분의 임재를 경험할 수 있다. 그래서 Cosmic Christ가 요즘 유행이다. 호소력이 있다. 나사렛 예수 안에 나타나는 모델적인 출현을 인정하면서도, 그리스도는 나사렛 예수 안에만 국한되지 않는다는 것. 그를 채널로 해서 그의 임재를 우주 안에 확장시켜 나간다. 그럼으로써 우주적 갱신을 이루어나간다. 굉장히 설득력 있는, 적응성 있는 메시지로 와 닿는다.
그러나 예수만이 only Christ다. 예수 밖에는 그리스도의 출현 가능성은 없다. 나사렛 예수가 바로 그리스도다. 그러나 이 점만 강조하면, 현대신학자들이 지금 비판하고 도전해 오는 문제를 극복하기 힘들다. 우리는 2000년 전의 나사렛 예수가 그리스도이심을 강조함으로 독특성을 강조하면서도, 우리의 신학을 성령론적으로 발전시켜야 한다. 이제 성령으로 말미암아 새로운 존재 방식으로 우리 가운데, 세상 가운데 임재하신다는 것이다. 성령으로 새롭게 임재하신 주님은 이제 시공간의 제한을 탈피하고, 무시간적으로, 종말론적으로, 우주적 차원에서 역사하신다. 그래서 성령은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을 종말론적으로, 우주론적으로 확장시키신다. 성령을 통한 새로운 임재로 그는 만물을 새롭게 하시려는 우주적 갱신 사역을 구체적으로 실현시켜 나가신다. 우주적 Christ는 예수 그리스도 그 자신인데, 그것은 성령의 방식으로 찾아오시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나사렛 예수는 한 알의 밀알로. 성령 안에서 그분의 사역과 임재의 우주적 관점을 강조해야 하지만, 우리가 그런 축복을 누리는 것은 2000년 전의 고난을 받으신 역사적 예수의 독특성을 강조해야 한다. 그 보혈의 의미를 강조해야만 한다. 이 양면성을 조화롭게 강조해야 한다.
2. 기독론의 나아갈 방향
이렇게 현대 신학 안에 양립되는 입장들을 보았는데, 대립되는 입장들의 장단점을 보완할 수 있는 기독론적인 전망은 무엇인가?
이상적인 model : λογος-πνευμα -> 삼위일체적 관점
1) 두 유형의 기독론
신약 성경에는 대표적으로 로고스 기독론과 성령 기독론이 나타난다고 신학자들이 말한다. 이것을 삼위일체적으로 통합하는 것이 필요하다.
① Logos Christology(로고스 기독론) : 요한복음, 바울서신에 주로 나타난다고 한다. 전통적인 기독론(칼세돈)은 로고스 기독론에 더 많이 의존하였다. 예수를 선재하신 그리스도,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측면을 강조하는 기독론. 신적인 본질을 강조한다. 위로부터의 기독론의 입장.
② Spirit Christology(성령 기독론) : 공관복음에 주로 나타난다고 함. 예수는 성령의 사람이라는 입장에서 이해. 예수를 구약에 예언된 기름부음을 받은 종말론적 선지자, 메시야라는 관점에서 이해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기능적, 사역적인 면을 더 부각시킬 수 있다. 성령의 능력으로 사신 예수님의 인간적 측면을 부각시키는 장점이 있다.
․삼위일체적 관점에서 두 기독론의 통합 : James Dunn은 지적하기를, 신약의 기독론은 원래가 성령의 기독론이었고, 로고스 기독론은 초대교회가 나중에 문제를 해결하다가 나온 교의학적 결과. 우리는 우선적으로 성령 기독론에서 출발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이해하고 기독론을 발전시켜야 한다고. 그러나 그의 후기 저서에서는 견해를 수정. 신약 성경에는 이 두 유형의 기독론이 공존하고 있다. 그래서 교의학에서는 이 둘을 합성하고 병합해야 한다. 그래서 요즘 신학자는 먼저 로고스 기독론을 성령 기독론으로 대체해야 한다고 주장하지 않고, 로고스 기독론을 성령 기독론으로 보완시켜서 약점을 극복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제는 두 기독론의 가치와 유용성을 인정하는 관점에서 병합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렇게 두 기독론을 잘 통합하게 될 때, 현대신학에서 계속 대립되는 문제들을 어느 정도 극복할 수 있겠다.
로고스 - 위로부터/본질/선포된 그리스도/유일성과 독특성 강조할 장점
성령 - 아래로부터/기능/역사적 예수/우주적 보편성 강조할 장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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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육신 세례 부활
2) 로고스 기독론과 성령 기독론의 병합
이들을 잘 병합한다면 전통적 성령 기독론은 예수가 세례를 받을 때부터 시작한다. 그때서부터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다는 양자설의 위험을 안고 있었음. 이것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예수가 성육신 되었을 때부터 성령이 그에게 강력하게 역사했다고 해야 한다. 그리고 부활할 때까지 성령의 사람이었다. 성령 안에서 하나님과 하나됨을 누리고 삼위일체적 교제를 누리는 인간의 삶을 살았음을 강조해야 한다. 그러나 여기에도 한계가 있다. 로고스 기독론의 관점을 도입해서 완성해야 한다. 성령 안에서 하나님과 하나됨을 사신 분은 영원 전부터 하나님과 하나되신 분이셨다. 그럼으로 말미암아 예수 그리스도는 성령 안에서 이 땅에서 하나님과 unity를 이룬 삶을 사셨다. 성령 안에서의 그의 존재가 참된 인간이 어떤 존재인가를 보여줄 뿐만 아니라, 삼위 하나님의 모습을 보여주셨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의 지상의 삶을 통해서 삼위일체의 모습이 경륜론적인 삼위일체의 클라이맥스가 나타난다. 그리고 부활 후의 예수 그리스도의 후재는 성령 안에서 우주론적으로 그의 사역이 확장됨으로써 하나님과 하나된 삼위일체적 교제를 누리고 계신다. 예수는 지상에서만 삼위일체적 교제를 누린 것이 아니라, 영원 전에서부터 영원까지 하나님과 하나된 교제를 누리시는 분이다.
Ⅲ. 성육신(Incarnation)
1. 성육신의 의미
1) lo/goj 기독론의 관점
로고스 기독론 - 위로부터/본질/선포된 그리스도/유일성과 독특성 강조할 장점
① 로고스 기독론의 관점에서 본 성육신의 의미
바울이 로마서에서 언급하듯이 그리스도는 선재하신 로고스이며 영원 전부터 존재하신 성자 하나님이다. 그리고 이 분이 사람이 되셨다. 그래서 그분은 하나님 되심을 조금도 포기하시지 않으시고, 그의 신성을 조금도 희생하시지 않으시고 동시에 완전한 사람이 되셨다. 이것이 바로 니케아에서 칼세돈으로 이어지는 정통 기독론의 관점이다. 정통 기독론의 관점은 christology below의 관점을 배격한다. 그리고 현대 신학자들이 주장하는 kenotic theory를 배격한다. “[6]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7]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빌 2:6-7)
② Kenotic Theory : "keno/w" - to empty
kenotic theory이론은 신적인 속성을 포기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자신을 낮추어서 낮은 위치와 역할과 신분을 자신이 택하셨다는 의미이다. 본질적인 신성의 변화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역할과 신분의 변화를 의미한다. 존귀하신 분이 가장 낮은 위치를 택하셨다. 케노틱 이론의 가장 반박이 되는 말씀이 골 2:9이다.
“그 안에는 신성의 모든 충만이 육체로 거하시고”(골 2:9)
“For in Christ all the fullness of the Deity lives in bodily form,”(골 2:9)
예수께서는 신성을 조금도 희생하거나 버리시지 않았다. 그는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 일시적으로 약함에 종속되신 것이다. 혈육에 속하기 위해서 우리와 똑같은 모양으로 혈육에 속한 존재가 된 것이다. 히 2:14이 증거하는 말씀이다. “자녀들은 혈육에 함께 속하였으매 그도 또한 한 모양으로 혈육에 함께 속하심은 사망으로 말미암아 사망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없이 하시며”(히 2:14) 우선적으로 시공간의 제약을 받는다.
공간을 초월하시고 시간을 초월하신 분이 역사의 쳇바퀴 속에 들어오셨다. 하나님의 시간은 우리의 시간과 다르다. 하나님은 흐르고 있는 시간에 계신 분이 아니시다.
예수께서는 30년을 기다리시면서 능력이 많으신 분이 아무 것도 하지 못하고 계셨다. 아무 것도 못하는 그런 무력한 삶을 사시면서 기다리셨던 것이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는 인간으로서의 모든 약함과 모든 조건과 규정과 부정적인 한계성을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이셨다. 예수의 철저한 인간되심을 완전한 하나님 되심에서 이해할 때 참 의미와 참 가치를 더 부각시킬 수 있다. 예수께서 인간으로서 이런 삶을 사셨다면 별 의미가 없지만 영원에 계시던 분이 이렇게 유한한 세상에 오셨다는 것은 사랑의 극치를 나타낸다. 하나님의 능력과 전능하심은 하나님의 거룩성과 사랑과의 관계성 속에서 이해해야 한다. 전능하신 하나님은 인간을 구원하는 사랑의 목적을 위해서 무한히 약해질 수 있는 분이다. 그래서 우리는 그렇게 약해질 수 있는 자유 속에서 하나님의 전능성을 이해해야 한다. 전능하다고 하면 무한히 강해질 수만 있는 것이 아니다. 사랑의 목적 안에서 무한히 약해질 수 있는 하나님의 전능성이 나타날 수 있다. 십자가에 죽기까지 무력해지셨고, 약해지셨다. 그러나 부활을 통해서 자신의 전능을 또한 나타내셨다. 사랑과의 긴밀한 관련 속에서 예수님의 신성을 이해해야 한다.
③ 예수의 공적 사역 전까지의 삶
우리는 공관복음에서 예수님의 철저한 인간됨과 동시에 예수님의 전능하심을 보게 된다. 그는 우선적으로 바람과 바다를 잔잔케 하시는 분이시라는 것을 통해서 자연과 우주를 주관하는 전능하신 분이라는 것을 엿볼 수가 있다. 우주를 주관하시고 영계를 주관하시는 분이시며, 사람들의 생각과 상상까지 아시는 분이셨다. 사람들의 과거를 아셨고, 자신이 어떻게 고난을 받으실 것인지를 내다보셨다. 병자에게 죄사함을 주시면서 병을 고쳐 주심으로써 하나님만이 가지신 죄사함의 권세를 가지신 분임을 보이셨다.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심을 믿으라 그렇지 못하겠거든 행하는 그 일을 인하여 나를 믿으라”(요 14:11).
그분은 사적인 생활까지는 신적인 능력을 나타내지는 않으셨다. 사적 삶에 대해서 나타내고 있는 로마 카톨릭이 사용하는 어떤 가경에 의하면 예수님의 어린 시절에 대해서 기적 사건을 증거한다. 예수님이 진흙으로 새를 만드셔서 거기에다가 입김을 불어 넣어서 진짜 새가 되게 하셨다. 어린 친구들을 염소로 둔갑시키기도 하시고, 어떤 사람을 귀머거리와 장님으로 만드셨다가 치유하기도 하셨다고 한다. 그러나 공적 사역을 하기 전까지 기적을 행하지 않았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성경에서는 가나 혼인 잔치의 기적이 첫 번째 기적임을 밝히고 있다. 그의 사적인 삶에서는 특별한 능력을 보이지 않았다. 그의 형제들도 그를 믿지 않았다는 것을 보아도 알 수 있다. 요셉이 일찍 죽어서 집안의 생계를 위해서 목수로 사셨을 것으로 본다. 망치에 손이 찍히기도 하고, 가난을 겪으셨으며, 형제들을 위해서 많은 희생을 하셨다. 그는 철저한 인간이 되셨는데, 평범한 인간이 되셨다. 천재적인 인간성을 입지는 않으셨다. 지금 이 신학교에 와서 공부를 하셨다면 얼마나 공부를 잘하셨을지 모르겠다. 조직적이셨을지 비조직적이셨을지 모르겠다. 예수님은 평범한 얼굴을 가지고 계셨다. 예수님은 모든 면에서 평범한 인간성을 입으셨다. 외모도 평범했거나 못생기셨을 것이다. 그분을 접하는 사람은 동시에 하나님의 임재를 느끼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저도 어떤 목사님을 뵐 때 항상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했던 그 정도의 은혜스러운 모습을 가진 목사님을 접한 기억이 있다.
뛰어난 육적 카리스마로 사람들을 끈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충만한 성령의 감화로 사람들을 끌었다.
예수님의 사적인 생애에서 배울 수 있는 교훈은 두 가지이다. 첫째는 예수님께서 자질구레한 일을 하면서 30년을 기다리셨다는 것이다. 그것이 고난일 수가 있다. 그러나 아무 의미가 없는 삶은 아니었다. 능력 있는 삶이란 자질구레한 일이 계속되는 일상의 따분함과 무의미함을 극복하고 의미 있게 보람있게 사는 것이 바로 능력이다. 요즘 능력 크리스천, 파워 크리스천이라는 말이 많은데, 파워라는 개념을 잘못 이해하면 안 된다. 우리가 이 땅에서 살아가는 과정 속에서 작은 일들의 연속이다. 허드렛일들을 계속하면서 살아가는 것도 능력 있는 삶이다. 준비하는 삶이다. 나중에 더 큰 사명이 주어질 때 목회 사역을 착실하게 잘 감당할 수 있다. 그러니까 신학교에 다닐 때 필요한 능력은 작은 일들, 무의미해 보이는 일상들을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아주 보람있는, 의미 있는, 가치 있는 일상들로 바꾸어 나가는 것이 하나님의 능력이 있는 삶이다. 조직신학 3시간 강의를 버티는 능력도 상당히 큰 능력이다. 이 시간이 따분하다고 생각하면 아주 어렵다. 하지만 이 속에서 의미를 찾고 가치를 찾는 것이 후에 목회 사역을 준비하는 것이다. 설교를 잘하기 위해서도 엉덩이가 무거워야 한다. 오래 앉아서 생각을 하고 정성스럽게 말씀을 준비해야 한다.
두 번째로 배울 수 있는 것은 자기의 능력을 자기의 편의를 위해서 사용하지 않으셨다는 것이다. 주님의 본을 받아야 한다. 자기 성공을 위해서 자기 권위를 세우기 위해서 능력을 사용하면 안 된다. 우리 사역자는 Wounded healer이다. 자기 상처도 치유 못하지만 하나님의 은혜로 다른 사람을 치유하는 사역의 삶을 사는 사람이다. 우리는 영광의 신학을 배격해야 한다. 요즘 보면 잘못된 목사들, 이단 집단들은 영광의 신학을 추구하고 십자가 신학을 배격한다. 성령론에 대한 책을 쓴 여자 목사의 책을 보니 희한한 역사를 간증하고 있다. 죽은 배터리에 손을 대니까 배터리가 다시 살아나고, 자기 딸을 위해서 기도하니까 쌍거풀이 생겨났고, 자기 딸 여드름 난 부분에 손을 대고 기도하면 여드름도 없어졌다고 한다. 『성령님께 여쭤봐요』라는 책이 그 책이다. 구로동의 이재록 목사라는 만민중앙교회 목사의 비디오를 받아와서 체크해 보았다. 교인들이 간증을 하는데 많은 교인들이 이런 간증을 한다. 임신을 했다. 그런데 체크를 해보니 여자라고 했다. 그런데 이재록 목사에게 기도를 받고 나서 낳아보니 남자였다는 간증을 하는 것이었다. 이것은 하나님의 능력을 자기 이익을 위해서 도깨비 방망이처럼 사용하는 것이다.
2) 성령론적 관점
로고스 기독론은 선재하시는 하나님을 강조한다. 선재하신 하나님이 사람으로 오셨음을 강조한다. 선재하시는 하나님이 오시는데 오실 때 그 특별한 방편이 성령으로의 잉태로 오셨다. 성육신은 로고스 기독론과 성령 기독론을 접목시키는 지점이다. 성령론적인 관점에서 성육신을 살펴볼 때 두 가지로 이해할 수 있다.
① 성부의 성령을 통한 성자의 파송 사건이다
성부 하나님의 뜻에 대한 순종이며 성부 하나님의 경륜과 뜻에 대한 순종이 성령의 사역 안에서 구체화된 것이다. 그래서 성령 안에서의 성부와 성자의 영원한 사랑의 교제(fellowship)이 지상의 삶 속에서 구체적으로 실현되고 가시화 되었다.
하나님 안에 가장 비밀한 하나님에 대한 지식, 삼위일체가 예수 그리스도의 성령 안에서의 삶 속에서, 지상의 삶 속에서 분명히 계시되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참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 하는 것이 계시됨과 동시에 참된 인간이 어떤 분인가가 계시되고 있다. 내재적인 삼위일체, 경륜론적인 삼위일체.
ontological trinity, immanent(내재적) trinity -> God in himself
economical trinity -> God for us
참된 인간은 예수 그리스도와 같이 성령 안에서 하나님과 교제하며 연합하는 존재이다. 참된 인간이란 무엇인가를 지상의 삶을 통해서 보여주셨다. 성육신의 사건을 성령론적인 관점에서 볼 때 근본적으로 삼위일체적 관점에서 이해할 수 있다.
② 새창조를 의미한다
성령으로 잉태하심을 새로운 창조를 의미한다. C. K. Barrett과 같은 유명한 성경신학자는 지적하기를 예수 탄생에 대한 기사에 있어서 저자들의 1차적인 관심과 의도는 예수의 탄생을 야웨의 창조하는 영에 의한 새로운 창조로 부각시키고 있다고 한다. 예수의 탄생에 사용되는 단어의 사용을 보면 창1:1의 수면에 운행하는 야웨의 영을 강하게 연상시킨다. 이러한 기사의 의도는 성령에 의한 예수의 탄생이 천지창조와 대비될 수 있는 새로운 창조임을 시사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성령의 역사로 말미암아 새로운 인류의 머리가 창조되었다. 성령께서 옛사람과 옛 인류와 구별되면서도 연관되어 있는 새 사람을 창조하셨다. 따라서 예수는 새로운 인류의 시작이다. 그래서 성령 사역은 예수를 새 인류, 둘째 사람의 head로 창조하심으로 예수 안에서 인류가 새로운 출발이 가능하게 하신다. 새로운 인류, 둘째 사람에 참예할 수 있는 특권과 축복을 누리게 되었다. 예수 그리스도는 New Man이다. 모든 사람이 지향해야 하는 새로운 사람이다.
2. 성육신의 목적
성육신의 목적은 두 가지이다.
1) 예수가 인간으로 오심은 인간의 죄를 대속하시기 위함이다
로고스 기독론에서 강조되고 있는 바이다. 예수께서 내가 있는 자리, 죄인의 자리에 내려오셔서 죄인의 대리자가 되셨다. 율법을 내가 완전히 지키지 못하는 형벌과 대가를 대신 받으시기 위해 오셨다. Anselm이 이것에 대해서 적절하게 설명하고 있다. 왜 성육신이 필요한가? 모든 인간은 자신의 죄악으로 인해서 하나님의 저주의 대상이기 때문에 그 누구도 자신과 다른 사람을 대신할 수 없다. 그리고 그 형벌은 너무나도 엄청난 것이기 때문에 어떤 사람도 이 징벌을 받고 나갈 수가 없다. 인간을 죄에서 구원할 수 있는 구세주는 오직 전능하시고 완전하신 하나님뿐이다. 그리고 그 구세주는 인간이어야 하는데, 그래야만 인간을 속죄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를 위한 구세주는 완전한 인간이면서 완전한 하나님이다.
2) 참된 인간의 모습을 우리에게 보여줌으로, 우리로 하여금 그 형상을 본받게 하시기 위해서 오셨다
이 두 번째 목적은 별로 강조되지 못했다. 참된 하나님의 형상을 잃어버린 세상에 참된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시켜 주시기 위하여 오셨다. 새 사람의 머리가 되어서 당신을 믿는 모든 사람이 당신에게 접붙임 받아서 새 사람이 되도록 하신다.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시기 위한 목적과 우리를 하나님의 형상으로 회복하기 위한 목적이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고 분리할 수 없다.
우리는 믿음과 순종을 분리할 수 없고, 신자가 되는 것과 제자가 되는 것을 분리할 수 없고, 칭의와 성화를 분리할 수 없다. 보수계에서 반쪽 고구마를 너무 강조했다. 죄에서 구원은 강조했는데,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을 본받는 것은 강조하지 못하였다. 우리가 새사람, 예수의 형상을 본받는 것에 대한 강조가 부족하였다. 가나안 땅에서 풍성한 삶을 누리게 하기 위해서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탈출시키셨던 것처럼, 우리도 풍성한 새사람이 되기 위해서 우리를 부르셨다. 반쪽 복음을 타파해야 한다. 또 문제는 이 순서를 뒤바꾸는 것이다. 역복음이다. 이것은 자유주의에서 나타나는 현상이다. 예수의 은혜로 죄에서 구원되는 것을 강조하지 아니하고, 영혼이 새롭게 되는 것을 강조하지 아니하고 예수를 본받는 것만 강조하여서 율법주의에 빠진다. 예수를 본받는 것만 강조하고 예수를 믿고 구원받는 것을 강조하지 않는 것을 강조하는 것은 큰 오류이다.
구원의 두 측면은 성령의 역사로서 긴밀하게 엮여 있다. free from sin and free for new life을 위해서 우리가 구원을 받았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죄에서 구원받고 옛 창조와 죄의 세계에서 단절되고 새 창조에 참여하는 것을 의미한다. 둘째 사람, 둘째 인류에 참여하는 것이다. 둘째 사람에 참여하는 사람만이 구원을 얻는다. 전에는 아담 안에 접붙임을 받았는데, 옛창조의 소산이었는데, 바울 사도의 표현대로라면 육신(sa/rc)에 속한 사람이었는데 이제는 새창조의 소산이
고 영의 사람이고 예수님에게 접붙임을 받았다. 존재론적인 변화를 받은 사람이다. 성령의 능력으로 참된 새 사람으로 변화를 받았다. 예수를 믿으면서도 아무런 변화가 없다면 심각한 문제이다.
3. 성육신의 방편 : 동정녀 잉태 (Virgin conception)
1) 동정녀 탄생을 거부하는 현대 사조
① 자유주의와 근본주의의 논쟁
자유주의자들은 동정녀 탄생을 설화로 취급한다. 그에 반해서 근본주의자들은 동정녀 탄생, 기적의 역사성, 예수의 육체적 부활의 역사성, 성경 무오설, 예수의 대속사건의 5 fundamental doctrines를 강조한다. 근본주의의 공헌이 있다. 가장 근본적인 기독교의 교리들을 중요하게 생각한다는 점에서는 우리와 공통점이 있다. 그러나 근본주의자들의 문제점이 있다. 개인의 구원만을 강조하고 사회의 변혁에 무관심하다. 영적인 갱신만을 강조한 나머지 사회문화적인 면에서의 기독교의 영향을 도외시하고 있다.
한국 교회는 개혁주의를 따른다고 하면서도 실제적인 내용면에서는 근본주의에 가까웠다.
자유주의자들의 입장에 대항해서 근본주의자들은 특별히 동정녀 탄생을 기독교의 근본적인 진리라고 강조하였다.
② 신정통주의
신정통주의 안에서도 바르트와 브룬너 간의 첨예한 대립이 있었다.
․ Barth와 Brunner
브루너는 동정녀 탄생은 반드시 필요한 증거가 아니라고 하였다. 그는 동정녀 탄생을 믿는 것을 예수에 대한 정통 신학의 시금석으로 간주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라고 하였다. 정통 신앙을 같기 위해서 동정녀 탄생을 반드시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은 성경적 근거가 없다고 하였다. 그러면서 그는 지적하기를 동정녀 탄생이 마1과 눅1에만 기록되어 있으며, 성경의 다른 부분에는 전혀 언급이 없으며, 동정녀 탄생의 두 곳도 성경 다른 부분에 비해서 가장 설화적이고 전설적인 부분이다. 따라서 역사적인 신뢰성과 신빙성이 가장 약한 부분이라고 하였다. 이 두 기사 때문에 성육신을 믿는 것이 아니라, 이것과 상관없이 성육신을 믿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에 비해 바르트는 성육신과 동정녀 탄생은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다고 주장하였다. 이 둘 간의 관계를 끊는 것을 옳지 않다고 하였다. 빈무덤이 예수님의 부활을 증거하듯이, 동정녀 탄생이 성육신의 신비를 잘 증거하고 있다고 하였다. 기독론의 양대 기적이 빈무덤과 동정녀 성육신 사건이라고 하였다. 예수 그리스도를 다른 모든 인간과 구별해주는 하나님의 증거가 이 둘이라고 하였다.
․ Moltmann, Pannenberg
동정녀 탄생을 바르트처럼 같은 레벨에서 논의하는 것을 부정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에 근거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부활 사건을 기점으로 해서 소급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이해할 필요가 있다고 하였다. 부활에 근거한 종말론적인 기독론을 주장한다. 예수님의 신성에 대한 증거는 부활에 근거한 것이 아니고 성육신에 근거한 것이라고 주장하는 반대 주장을 우리는 한다. 성육신부터 온전히 신성을 가진 분으로 사셨다고 우리는 주장한다.
③ 복음주의 신학자들
․ Erikson, Garrett, Grenz
현대 복음주의 신학자들의 상당수도 동정녀 탄생이 역사적 사실이라는 것을 인정하면서도 이 교리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필수불가결한 교리는 아니라고 주장한다. 특별히 침례교 조직신학자들 에릭슨, 가렛, 그렌츠 등이 이렇게 주장한다. 사도행전에 기록된 사도적 설교나 가르침, 서신서에 동정녀 탄생에 대해서 전혀 언급이 없다는 점을 지적하면서 이렇게 주장한다. 그래서 그들의 입장에 의하면 십자가를 믿고 예수님의 하나님 되심을 믿어야 하고 예수님의 부활을 믿어야 하는 것처럼 동정녀 탄생을 꼭 믿어야 구원받는 것은 아니라는 식으로 이야기 한다. 구원받기 위해서 꼭 알아야 하는 사실은 아니다. 이 교리를 받아들이지 않다고 구원받을 수 있다고 주장한다. 기독교의 존폐가 부활을 받아들이냐 안 받아들이느냐에 있는 것처럼 동정녀 탄생의 수용 여부와는 관계가 없다고 한다. 동정녀 탄생에 대해서 두 군데밖에 기록이 없다고 해서 다른 복음서나 서신서 저자들인 동정녀 탄생에 대해서 전혀 모르고 있었다고 말할 수는 없다. 마태, 누가의 증언과 다른 저자들의 침묵 사이에 대립이 있다고 볼 수는 없는 것이다. 모든 저자들이 인정하고 알고 있는 성육신의 사실을 특별히 마태와 누가는 그 성육신이 어떻게 이루어졌는지를 보고하고 있는 것이라고 보아야 한다.
“교회”라는 단어를 놓고 볼 때도 복음서에서 단 두 번밖에 사용되지 않았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예수님의 계획 속에 교회의 설립은 애초부터 없었다고 말하는 것은 넌센스이다.
성육신 교리 안에 내포된 동정녀 탄생에 대한 진리는 성육신 진리 안에 내포된 진리로 이해해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이 인간으로 오신 성육신의 진리를 믿을 때 그는 성령으로 잉태하셔서 동정녀를 통해서 오셨다는 것을 함께 믿어야 한다. 그래야 사도신경에서 고백하는 내용을 우리도 참되게 따르게 된다. 동정녀 탄생은 선재하신 하나님이 오신 독특한 방편이다. 하나님의 신비를 나타내는 기독론적 기적이다.
2) 하나님의 아들이 사람으로 오신 적절한 방편
이 방법을 통해서 자신의 아들을 사람으로 세상에 보내셨다. 인성과 신성을 결합시키셨다. 이 외에 인성과 신성을 결합시키는 적절한 방법을 생각하기 어려울 것이다. 하나는 하나님께서 마리아의 몸을 통하지 아니하고 하늘에서 완전한 인간을 만드셔서 인간으로 내려보내는 것이다. 이것은 완전한 인간이 아니고 천사와 같은 존재로 생각하기가 쉽다. 초대교회의 가현설docetism이 바로 이러한 것을 주장한다. 반대로 예수께서 사람과 똑같이 아버지와 어머니 사이에서의 출생에서 탄생했다면 인간과 본질적으로 다른 하나님으로 보기가 어렵고, 우리와 똑같은 인간적 소생으로 볼 것이다. 하나님은 남자의 역할을 배제시킴으로 근본적으로 하나님으로부터 창조된 그런 존재로 부각시킴과 동시에 여자를 통해서 임하게 하심으로 사람의 소생임을 밝혀준다. 성령께서 이런 방법을 통하여서 옛사람과 근본적으로 연결되면서도 단절된 새 사람을 창조하신 것이다.
3) 동정녀 탄생과 예수의 죄 없으심
동정녀 탄생과 죄 없으심을 밀접한 관계가 있는 것으로 알려져 왔다. 예수님은 성관계를 통해서가 아니라 동정녀에 의해 탄생될 필요성이 있다. 성관계를 통해서 탄생하지 않았으므로 부패성으로부터 자유하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문제는 섹스 자체가 죄악으로 여겨지는 것이다. 그리고 이 부패성이 꼭 남자를 통해서 전수된다고 전제하고 있다는 점이다. 남자의 역할을 배제한 이유가 남자로 인해서 부패성이 전수된다고 보는 근거가 어디에 있는가? 여자는 부패성 전수의 근거가 되지 않는가? 로마 카톨릭은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마리아 무죄설(마리아는 원죄가 없고, 평생 동정녀로 살았다고 증거)을 주장한다. 그래서 예수님의 죄 없으심을 동정녀 탄생에 근거해서 이해하려고 할 때 이러한 문제에 직면하게 된다. 그래서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로마 카톨릭과 다른 입장에서 해결하려고 하는데, 가장 원만한 견해가 헤르만 바빙크과 G.C. 베르까워의 주장이다. 그들은 남자의 역할을 배제한 것은 예수님이 남자를 통해서 임하지 않으셨다고 하는 것은 아담의 라인을 통해서 태어나지 않으신 것이고, 원죄가 전가되지 않으셨다는 것을 나타낸다. 실제적인 부패성이 전가되지 않은 것이 아니고, 아담에 의해서 전가되는 죄가, 우리에게 법적으로 전수되는 죄를 끊어버린 것이다. 그러나 이런 이해는 한계가 있다. 좀 더 이런 이해에 보충되어야 할 점을 살펴보자. 원죄가 차단되어 버렸다. 법적으로 전가되는 원죄가 예수님께 전가되지 않았다는 문제는 해결되었다. 그러나 마리아를 통해서 오셨다면 마리아의 죄성은 유전되지 않았을까?
육체와 영혼도 부모라는 매개체를 통해서 부패성(죄)이 유전적으로 창조되게 하신다. 하나님께서 영혼을 만드시는데 영혼을 독립적으로 만드신 것이 아니고 부모라는 매개체를 통해서 만드시기 때문에 창조설을 취한다고 할지라도 유전설의 관점에서 부모의 부패성은 전수될 수 있다. 그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할 수 없다. 그래서 아담부터 오는 원죄를 차단한다 하더라도 마리아로부터 오는 부패성을 어떻게 차단할 것인가? 그에 대한 대답은 이러하다. 예수께서는 완전히 성령으로 새로운 새창조를 이루셨다. 육신에 속한 휴머니티가 아니라 성령의 휴머니티로 만드셨다. 예수 그리스도는 태어날 때부터 성령의 사람이다. 마리아를 통해서 전수될 수 있는 부패성을 성령이 치유하셨다.
Ⅳ. 예수의 성령 안에서의 삶
1. 세례시의 성령강림
예수님의 종교적 체험의 관점에서 기독론을 접근한 신학자는 슐라이어마허이다. 그는 다른 모든 사람들과 구별되는 종교적인 의식을 예수가 가졌다고 한다. 절대적인 의존감정이라고 하였다. sense of absolute dependence.
절대자에 대한 의존감정, 의식이 있는데 예수님 안에 생래적으로 일어난 것이 아니고 인간 심연 안에 내재해 계신 하나님의 임재와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다고 폴 틸리히는 말하였다. 하나님의 임재의 증거라고 하였다. 예수님은 항상 하나님의 임재의식을 느끼면서 사신 분이라고 그는 말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슐라이어마허가 새로운 기독론적 접근을 했지만, 예수님의 종교의식에 대해서 성령론적인 접근을 시도하지는 못하였다. 바르트는 슐라이어마허의 신학의 문제점을 지적하면서도 그의 장점, 공헌을 많이 인정을 하였는데, 슐라이어마허가 그의 신학을 좀 더 성령론적으로 발전시키고 표현하였다면 최초의 성령론적 신학이 되었을 것이라면서 안타까워했다. 그러나 슐라이어마허는 하나님에 대한 예수의 체험을 자세히 분석했다. 정통신학도 예수님이 인간으로서 하나님을 체험함으로 말미암아 무엇을 느꼈는지, 내면의 어떤 변화가 있었는지를 알 필요가 있다. 예수님의 의식적인 변화와 체험이 우리 안에서 재현될 수 있기 때문에 연구할 필요성이 있다.
1) 세례시 성령강림의 신학적인 의미
① The revelatory significance of His sonship
신적인 은혜가 예수라는 사람을 신적인 사람으로 만들었다는 주장, 특별한 성령의 은혜가 그를 신적인 존재로 만들었다고 보는 것은 바로 기능적인 기독론이다. 헬라 철학의 영향을 받은 초대교회의 산물. 예수님이 온전히 사람이라는 출발점. 그러나 이러한 입장은 어떤 오류에 빠지게 되는가? 이러한 기독론의 문제는 상당히 논리적인 설득력이 있는 것 같지만, 많은 현대 신학자들이 선호하고 있지만, 기능적인 기독론을 주장할 뿐만 아니라 그로 말미암아 본질적인 하나님의 신성을 예수님이 가졌다는 것을 부인한다. 양자설adoptionism에 빠지게 된다. 남다른 은혜를 받은 예수가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 양자로 입양이 되었다는 것이다. 세례시 성령 강림에서부터 성령 기독론을 출발하게 되는 기독론은 양자설의 잠재적인 위협을 극복하기가 어렵다. 그러므로 우리가 성령 기독론을 전개할 때는 성육신의 시점으로부터 성령기독론을 주장해야 하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그가 태어난 시점에서부터 성령의 사람이므로 아버지와 영원히 교제하는 분이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례시의 성령 강림의 중요성은 무엇인가? 예수가 잉태시부터 성령의 내재가 있었다면 그가 성령을 받을 필요성은 무엇인가? 두 가지이다. 첫 번째는 세례란 배경background을 가지고 보아야 한다. 예수님은 회개의 세례를 받을 필요가 없었다. 예수님이 세례를 받는 것은 죄인의 대리자로 오셨다는 것이다. 나를 구원하는 메시아가 되었다는 것이다. 죄인의 자리에 내려갈 수 있는 것은 죄인을 대신해서 죄를 짊어지고 죄인을 구속하는 메시아라는 분명한 선포이다. 그가 하나님 되심, 메시아 되심에 대한 revelatory계시적이고 선포적인 사건이다. 두 번째는 공적 사역을 위한 능력의 부여이다. 표현이 적절하지 못하지만 다른 표현이 없다. 그럼 그 전에 능력이 없었느냐? 그렇지 않다. 처절하게 약했을 때도 그는 전능하신 분이었다. 예수님께서 능력을 사용하실 수도 있고, 보류하실 수도 있다. 약해질 수도 있는 능력이 전능성이다. 이런 측면에서 우리는 이해할 수 있다. 능력부여라는 것은 예수님이 무능했기 때문에 능력을 주신 것이 아니라, Max Turner같은 신학자는 성령이 없어서 성령을 준 것이 아니고, 이미 계신 성령의 새로운 역사, 획기적인 새로운 역사를 의미한다고 본다. 성령이 예수 안에 전인격적으로 내주하셨다. 그 성령이 공적사역을 위해서 좀 더 생산적이고 효과적으로 역사하게 되는 포인트이다. 그리고 성령이 새로 우리에게 주어진다는 것은 성령을 공간적인 개념으로 이해하고 표현하기 때문에 이런 용어들의 온전한 의미를 포착하기 어렵다. 시공간에 매여 있는 개념으로 성령의 역사를 이해하려고 하면 안 된다. 성령은 이런 물체와 같이 장소, 위치를 이동함으로 역사한다고 볼 필요는 없다. 우리 안에 성령이 전인격적으로 거하신다. 우리 가운데도 전인격적으로 거하신다. 성령은 우리의 공간을 넘어 존재하신다. fluid하게 존재한다. 이미 우리 안에 와 계시지만 우리 위에도 계신다. 판넨베르크는 성령을 세력장force field이라고 본다. 예수 안에 성령이 전인격적으로 계시지만 공적인 사역을 위해서 능력이 주어졌다.
2) 하늘로부터의 선포의 의미
시편 2:7 - “내가 영을 전하노라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날 내가 너를 낳았도다”
(시 2:7)
이사야 42:1 - “내가 붙드는 나의 종, 내 마음에 기뻐하는 나의 택한 사람을 보라 내가 나의 신을 그에게 주었은즉 그가 이방에 공의를 베풀리라”(사 42:1)
예수가 구약에 예언된 나단 선지자의 전승을 따라서 삼하 7장에 나타난...(놓침) 구약에서 예언한 대로 예수가 다윗의 후손으로서 이스라엘을 대표하는 자로서 이스라엘을 통치하도록 왕으로서 메시아로서 기름 부음을 받아 등극하는 것으로 이해한다. 이러한 하늘로부터의 선포로 의해서 예수는 자기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됨과 메시아 사역의 성격을 온전히 이해하게 되었다. 성령을 체험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되고, 자기에게 주어진 메시아적인 사역이 무엇인지를 깨닫게 된다고 주장한다. 김세윤 박사도 이런 식으로 주장을 하고 있다. 이 문제에 대해서 다음 주에 살펴보겠다.
2. 성령체험과 예수의 자기 이해
예수님이 원래 육신의 사람이었는데 성령으로 말미암아 메시아, 하나님의 아들이 된 것이 아니다. 성령을 받음으로 말미암아 존재의 본질적인 변화가 일어난 것이 아니라, 체험적인 면(experience)에서 획기적인 사건이었다.
김세윤 박사도 성령을 받음으로 말미암아 메시아 미션을 깨닫게 되었다고 본다. 교의학자들은 성경을 이해하는 데 있어서 교의학적 전제를 가지고 이해하려고 하는 우를 범하기도 한다. 그러나 성경학자들은 아무런 전제 없이 아주 객관적인 입장에서만 성경 자료에 접근하고 그것을 해석하고 있다고 볼 수 없다. 성경학자들도 자신의 전제가 있고 선입관이 있다. 그것들은 성경 자료를 해석하는데 많은 영향을 미치고 있다. 그들이 예수께서 성령을 받음으로 말미암아 비로소 메시아의 사명을 깨닫게 되었다는 입장을 말하는데, 이것이 성경적 근거가 있는지 의문을 제기할 수가 있다.
성경의 예수에 대한 전체적인 가르침 속에서 그러한 사건들을 이해해야 하는데, 너무 어떠한 사건 자체, 문맥 속에서만 이해하려고 함으로 말미암아 그 사건의 온전한 의미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
1) 하나님의 아들됨의 의식
그의 아들됨의 의식은 예수께서 세례를 받기 전부터 가지고 계셨다. 12세때 성전 사건, “내가 아버지 집에 있어야 할 줄을 알지 못하셨나이까?”라고 말씀하심으로서 아들됨에 대한 의식을 가지고 있었다는 근거를 가질 수 있다. 우리와 같이 인간적인 성숙의 과정을 거치셨을 것이라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육체적인 것 뿐만 아니라 정신적인 것도 포함된다.
성장 속에서 하나님의 아들됨의 의식도 점차적으로 발전을 하였을 것이라는 것도 인정할 수 있다. 그러나 그 의식의 정확한 발달 단계를 알기는 어렵다. 갓난 아기 때부터 마리아보고 “여자여, 나를 낳느라 수고하셨소”라고 말하지는 못했다. 하나님의 아들됨의 의식마저도 점진적인 성숙의 과정에 포함된다. 그래서 성령을 받음으로 말미암아 그것을 확신한 것은 그가 가지고 있었던 아들됨의 의식의 하나의 결정적인 단계, 최종적인 확신의 단계로 볼 수 있다. 그 의식이 하나님의 계시에 의해서 확증 받는 시점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어린 시절에 자기가 하나님의 아들됨의 의식을 가지지 못하였다고 해서 하나님의 아들이 아닌 것은 아니다. 확실한 의식을 가질 때부터 아들이 된 것은 아니라는 뜻이다. 성령 받음으로 가지게 된 아들됨의 확신은 최종적인, 결정적인 단계이지, 그 때 가서야 하나님의 아들됨을 의식했다고 보는 것은 양자설(adoptionism)의 오류에 빠질 수가 있다.
2) 메시아 사역에 대한 이해(눅 4:18-19, 이사야 61:1)
아들됨의 의식과 함께 그의 미션에 대한 확고한 의식을 정립했다고 볼 수 있다. 구약에서 메시아는 종말론적인 문맥 속에서 드러난다. 예수 그리스도는 종말론적인 영(靈)을 부여받은 사람이다.
“[18]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케 하고 [19]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더라”(눅 4:18-19)
“주 여호와의 신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사 가난한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나를 보내사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며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갇힌 자에게 놓임을 전파하며”(사 61:1)
이사야 후반부에 묘사된 고난의 종이 바로 자신이라는 의식을 가지고 계신 것으로 보인다.
1) 풀러나 제임스는 고난의 종이 종말론적인 선지자라고 이해한다.
2) 베쓰는 사람은 고난의 종이 메시아라고 본다.
3) 하워드 마샬은 고난의 종은 종말론적인 선지자를 의미하면서도 동시에 메시아를 의미한다고 본다. 마 11:1-5까지 세례요한이 이런 질문을 한다. “예수님이 바로 오실 그이니이까?” 이에 대해서 예수께서는 종말론적인 선자자의 사역이 바로 메시아의 사역과 동일하다는 것을 말씀하신다.
“[1] 예수께서 열 두 제자에게 명하시기를 마치시고 이에 저희 여러 동네에서 가르치시며 전도하시려고 거기를 떠나 가시니라 [2] 요한이 옥에서 그리스도의 하신 일을 듣고 제자들을 보내어 [3] 예수께 여짜오되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이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이까 [4]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가서 듣고 보는 것을 요한에게 고하되 [5] 소경이 보며 앉은뱅이가 걸으며 문둥이가 깨끗함을 받으며 귀머거리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마 11:1-5)
마 11:5의 말씀을 통해서 특별히 자신이 고난의 종의 미션을 받았는데, 종말론적인 선지자와 메시아의 사명으로 부름받았다는 것을 의식하고 확신했다. 예수님은 메시아라는 칭호를 공적으로 사용하기를 꺼러하셨다. 그래서 상당수의 학자는 메시아라는 칭호를 사용하기를 꺼려하셨다는 점에서 자기 자신이 메시아라고 생각하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공적으로 그런 칭호를 사용하기를 꺼려하신 것은 메시아에 대한 유대인들의 오해와 잘못된 기대 때문이었을 것이다. 예수님은 부활하신 후에 이 칭호가 본격적으로 사용되고 있다. 메시아라고 하는 칭호는 예수님의 죽음, 부활과 매우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christ라는 칭호는 꼭 죽음과 연관된다. 예수님께서 세례시에 성령을 받음으로 말미암아 아들됨의 의식과 함께 당신이 메시아가 종말론적인 선지자 사명을 부여받았다는 의식과 확신을 갖게 되었다. 그리고 그 사역을 수행할 수 있는 능력을 부여받았다.
3. 광야의 사역
driven. 강권적으로 광야로 내몰리셨다. 공적인 사역의 첫 단계. 하워드 마샬은 이 시험이 글자 그대로 일어난 시험이 아니라 환상일 것이라고 본다. 무엇을 근거로 그렇게 말할까? 본문에 보면 사단이 예수를 지극히 높은 곳으로 끌고 가서 천하 만국과 영광을 보였다고 했는데, 유대 땅에 천하 만국을 보여줄 수 있는 높은 곳이 없을 뿐만 아니라, 천하 만국을 즉각적으로 볼 수 있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시험에 환상적인 요소가 있다고 보는 것을 부인할 수는 없다. 그러나 우리는 모든 시험을 환상으로 이해할 수는 없다. 다른 사건은 문자 그대로 일어난 것으로 본다. 40일 금식 후에 주님이 너무 배가 고파서 모든 돌이 떡덩이로 보인 것은 아니다.
이 시험은 첫 사람 아담의 시험과 이스라엘의 시험과 대조된 예수 그리스도의 시험을 묘사하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 사단이 세 가지 시험을 한다.
① “돌로 떡을 만들어라” - 신 8:3을 인용하셔서 물리치심
“너를 낮추시며 너로 주리게 하시며 또 너도 알지 못하며 네 열조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네게 먹이신 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너로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신 8:3)
애굽의 고기가마를 그리워하면서 이스라엘이 원망할 때 하나님이 그들에게 만나를 주시면서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살 것이라는 것을 상기시키고 권면하고 있는 장면”에서 나타난다. 떡 문제로 하나님을 원망하고 그 시험에 실패한 이스라엘과 완전히 대조가 되는 예수님을 여기서 묘사한다.
이스라엘 민족들이 많은 하나님의 기적과 그들을 향한 신실한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하고 난 이후에도 하나님께 순종하지 못하고 그저 어려울 때마다 하나님을 원망하였던 이스라엘과 대조적으로 아주 핍절한 상황 속에서, 원망할 수밖에 없는 상황, 하나님을 도무지 의뢰하고 신뢰할 수 없는 상황 속에서 하나님을 조금도 의심하지 아니하고 온전히 순종함으로 말미암아 둘째 사람의 온전한 모습을 우리에게 보여주셨다. 또 여기에서 이스라엘 민족과 대조될 뿐만 아니라 첫 사람 아담과 대조가 된다. 아담은 낙원에서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존하지 못하고, 시험에 실패했다. 그러나 둘째 사람 예수 그리스도는 아담과 반대되는 지옥과 같은 상황, 핍절한 상황 속에서, 처절한 빈곤 속에서도 그 시험을 능히 극복하셨다. 이렇게 대조가 된다. 복합적인 대조의 의미를 우리는 발견할 수 있다.
또 여기서 한 가지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오병이어의 기적을 베풀었을 때 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메시아로 세우려고 했다. 돌덩이를 떡으로 만드는 기적을 통해서 많은 사람들이 원하는 메시아가 되라는 유혹과 시험이라고도 볼 수 있다.
②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 내리라 - 사단 하나님의 말씀을 인용하여 시험한다
“[11] 저가 너를 위하여 그 사자들을 명하사 네 모든 길에 너를 지키게 하심이라 [12] 저희가 그 손으로 너를 붙들어 발이 돌에 부딪히지 않게 하리로다”(시 91:11-12)
신 6:16을 사용해서 시험을 물리치신다.
“너희가 맛사에서 시험한 것 같이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를 시험하지 말고”(신 6:16)
모세가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을 시험치 말라”고 경고한다. 하나님의 엄청난 기적과 은혜를 체험하고도 그를 신뢰하지 못하고, 맛사와 므리바에서 물 달라고 하나님을 원망하고 시험한 것과 대조적으로 이런 핍절한 상황 속에서도 시험을 이겨냈다.
또 아담과도 비교할 수 있다. 사단이 말씀을 가지고 아담을 유혹했다. “하나님의 말씀이 믿을 만하냐? 시험해 보아라!”고 유혹했던 것과 비슷한 시험이다.
③ 내게 엎드려 경배하면 모든 것을 주리라 - 아담에게 사단이 “하나님같이 되게 해주겠다”고 거짓 약속을 했던 것과 비슷하다
그런데 주님은 사단의 거짓 약속을 단호히 배격하고 있다.
“이에 예수께서 말씀하시되 사단아 물러가라 기록되었으되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 하였느니라”(마 4:10)
사단은 자신의 뜻을 이루는 메시아, 자기가 통치하는 메시아 상을 제시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뜻에 온전히 순종하는 메시아가 되기를 원하셨다. 그 의식이 얼마나 확고했는지 조금도 약화되지 않는 모습을 우리는 분명히 살펴볼 수 있다. 사단은 하나님께 철저히 순종하고 의지하려는 예수님을 방해해서 메시아 사명을 철저히 수행하지 못하도록 하려고 했다. 요아킴 예레미아스는 “메시아 시험의 의의는 하나님이 세례시에 주신 메시아 역할에 대해서 응답하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또한 사단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메시아, 고난의 메시아가 아니라 영광의 메시아, 만능의 메시아의 길로 그를 유혹하고 있다. 사람들이 원하는 메시아, 유대인들이 원하는 메시아를 제시하고 있다. 사람들의 빵문제, 정치문제를 해결해 주는 메시아가 되라고 유혹하고 있다. 현대에도 육신적인 가치를 가진 사람들의 뒤틀린 메시아관을 가지고 신앙생활을 한다. 그들이 원하는 메시아는 어떤 메시아인가? 그들을 형통하게 해주고, 병을 고쳐주고, 부자가 되게 해주는 메시아를 원하지, 십자가의 메시아를 원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번영 신학을 추구하는 복음은 마귀에 의해서 뒤틀린 복음을 전파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사람들은 십자가의 메시아를 통해서 거룩하게 되고 변화되는 것 보다도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잘되고 형통하고 병고침 받는 것만 원하고 있다. 그것은 마귀의 사상을 통해서 은밀하게 메시아에 대한 생각이 뒤틀렸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 시험의 신학적인 의미는 무엇인가?
① 첫 사람 아담과 이스라엘의 실패와는 대조적으로 하나님께 온전히 순종함으로써 예수 그리스도는 이 시험을 통과함으로 말미암아 자기 자신이 새 시대, 구원의 시대를 연 메시아이심을 입증하셨다.
② 자신이 시험을 당함으로 말미암아 시험 당한 이를 능히 도와주실 수 있게 되었다. 대제사장이 되셔서 우리의 시험을 도와주실 수 있게 되었다. 히 2:18.
“자기가 시험을 받아 고난을 당하셨은즉 시험받는 자들을 능히 도우시느니라”(히 2:18)
예수께서 우리의 대리자, 대표자로서 시험을 이겨주셨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 안에서 예수와 같이 시험을 이긴 자가 된다. 우리를 대신해서 시험을 극복하심으로 말미암아, 둘째 사람의 머리가 되심으로 말미암아 그와 연합한 자는 그의 공로로 인해 시험을 이기게 하셨다. 실제적으로 우리가 시험을 매일 이기지는 못하지만, 예수 그리스도께서 시험을 이김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그의 안에 있을 때 시험을 온전히 이긴 자로 법적인 인정을 해 주신다. 이것이 바로 칭의의 의미이다. 우리도 둘째 사람으로 인정해 주신다. 시험을 완전히 극복하고 의인이 된 것으로 인정해 주신다. 법적으로 그러한 시험을 극복한 공로를 우리에게 전달해 주실 뿐만 아니라 실제적으로 우리 삶 속에서 시험을 극복할 수 있도록 도우신다. 바로 시험을 극복하신 둘째 사람의 영을 우리에게 보내주심으로 말미암아, 주님이 우리 안에서 역사하셔서 당신이 2천 년 전에 시험을 이긴 것처럼 오늘날 우리가 시험을 이기게 하신다. 당신이 세상을 이긴 그 분이 우리와 함께 하심으로 나를 도우셔서 세상을 이기게 하신다는 뜻이 내포되어 있다. 이런 양 측면에서 주님의 시험의 효력을 이해해야 한다.
․ 광야에서의 40일 금식 기도 - 주님만이 하실 수 있는 독특한(unique) 사역이다. 제자들이 40일 금식기도를 했는지 확실히 알 수 없지만 그렇게 하라고 명령하지 않으셨다. 깊이 오랫동안 기도할 수 있으면 참 좋겠지만, 그렇게 한다고 해서 유익만 있는 것도 아니다. 40일 금식기도하고 라면 먹고 죽은 사람도 있고, 불상사가 많이 일어난다. 깊이 기도한 다음에 사람이 은혜가 충만해 지고, 겸손해지고 해야할텐데, 더 교만해지는 경우가 다반사이다. 40일 버텨내 깡다구로 사람이 더 억세지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너무 금식을 부정적으로 생각할 필요가 없다. 『영적 훈련과 성장』에서 리차드 포스터는 금식에 대해서도 자세히 다루고 있다. 사역자들은 정기적으로 금식을 해야 한다. 루터, 칼빈, 조나단 에드워즈, 찰스 피니도 금식을 했다. 금식의 유익이 많다.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지하게 된다. 이틀만 금식해도 정신이 혼미해지고 주님만 의지하게 된다. 주님을 닮는 것을 금식을 통해서 배워갈 수 있다.
아담 - 이스라엘 | 예수 - 새 이스라엘 |
첫째 사람 시험의 실패 첫째 사람처럼 이스라엘도 시험에서 실패 | 둘째 사람 시험의 승리 둘째 사람의 영이 우리를 도우심 |
광야의 기간을 잘 통과해야만 성령 충만하고 하나님께 쓰임 받는 사람이 될 수가 있다. 광야의 훈련기간을 최대한 단축하기 위해서는 사단의 유혹을 배격하고 하나님만 전적으로 온전히 의존하는 신앙을 갖추어야 한다. 광야의 시험기간이 사역자로 부름 받은 사람에게는 매우 중요하다. 광야 시험을 통과해야 하나님께서 기름부어서 사용하신다.
군대에서 유격 훈련을 받듯이 빨간 모자 조교가 있다. 나는 얼마 전까지만 해도 꿈속에서 유격을 할 때 빨간 모자 조교가 나타났다. 제대한 지가 얼마나 오래됐는데도 말이다. 지금 여러분의 유격 조교로 독일전차군병을 대기시켜 놓으셨다.
4) 예수님의 죄없으심과 시험받으심의 관계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 연약함을 체휼하지 아니하는 자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 같이 시험을 받은 자로되 죄는 없으시니라”(히 4:15)
① 시험을 굴복치 않고 끝까지 시험을 극복한 이만이 그 시험의 강도를 최고로 체험하게 된다. 우리는 시험에 쉽게 극복하기 때문에 우리는 그것을 완전히 경험해 보지 못한다. 루이스, 발버둥 쳐본 사람만이 내 안의 죄성이 얼마나 큰지를 알 수 있다. 역도 선수도 역기를 끝까지 들어올렸을 때만이 역기의 중압감을 최대로 느낄 수 있다.
② 신적 능력을 동원해서 쉽게 극복하지 않고, 똑같은 인간의 육신의 연약함 가운데 그 시험을 통과하셨다. 성령의 도우심은 마취제가 아니다. 고통을 받지 않는 마취제가 아니고, 배고프지 않게 해 주는 역할이 아니고, 성령은 오히려 인간의 약함을 철저하게 맛보는 쪽으로 역사한다. 철저하게 배고픔을 느끼게 하면서도 하나님에 대한 순종과 사랑의 마음으로 그 고통을 극복하게 해 주신다. 온전한 사람으로 그 시험을 당하셨기 때문에 우리와 똑같은 조건에서 그 시험을 당하셨다.
③ 거룩한 사람일수록 죄의 유혹, 충동에 대해 더 큰 고통을 느끼게 된다. 우리는 경건하지 못하기 때문에 불결한 죄의 생각을 별로 양심의 통증을 느끼지 못한다. 그러나 거룩할수록 죄의 추함이 마음에 큰 고통이 된다. 죄가 없는 그분에게 하나님께 반역하는 그런 시험은 너무나 큰 고통을 안겨주었을 것이다.
시험의 이런 대조적인 면을 성경이 강조하고 있는데, 히 3:7-8같은 구절은 우리와 이스라엘을 비교하고 있다.
“[7] 그러므로 성령이 이르신 바와 같이 오늘날 너희가 그의 음성을 듣거든 [8] 노하심을 격동하여 광야에서 시험하던 때와 같이 너희 마음을 강퍅케 하지 말라”(히 3:7-8)
4. 축사와 병고침의 능력(The power of exorcism and healing) - 성령 안의 경험의 양상들
스트라우스(역사적 예수연구의 선구자였던 자유주의 신학자)는 초자연적인 복음서의 기록 중에서 가장 역사적인 신빙성이 있는 것이라면 예수가 귀신을 쫓아낸 사건이라고 보았다. 많은 신학자들이 예수를 엑소시스트(exorcist)였다고 본다. 제임스 던도 예수는 귀신을 쫓아내는 이라고 본다. 마 12:28, 눅 11:20에 성령의 능력과 귀신을 쫓아냄이 연결되어 있다. 마태는 성령의 능력으로라는 표현을 사용했는데, 누가는 하나님의 손이라는 표현을 사용했다. 누가는 그의 글에서 성령론적인 모티브를 강조하고 있다. 그런데 여기에서는 성령이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지 않다는 점에서 매우 특이하다. 신학자는 이것이 매우 의도적이라고 지적하는데, 누가는 엑소더스 모형론(exodus typology)을 사용해서 예수의 기사를 쓰고 있다고 본다. 이스라엘을 애굽의 속박에서 구원하여 내실 때의 놀라운 기적과 사단을 물리칠 때의 놀라운 능력을 비교하고 있다. 능하신 손으로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이끌어 내셨던 것처럼, 하나님께서 능하신 손으로 사단에게서 우리를 구원해 내신다.
그래서 이런 능력의 역사함은 구약에서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는 싸인이다. 종말론적인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는 표적이다. 인간과 세상을 지배하는 악의 세력이 정복당하고 쫓겨나가는 전시적인 사건이다. 마 12:29에 이런 예화를 들고 있다.
“사람이 먼저 강한 자를 결박하지 않고야 어떻게 그 강한 자의 집에 들어가 그 세간을 늑탈하겠느냐 결박한 후에야 그 집을 늑탈하리라”(마 12:29)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의 귀신을 쫓아내는 사역은 예수님의 메시아 사역, 종말론적 선지자 사역의 일환으로 볼 수 있다. 종말론적 선지자의 사역 세 가지 : 가난한 자에게 복음, 억압된 자에게 자유, 병든 자를 치유하는 것에 포함되어 있는 것이다.
예수님의 축사 사역은 독특성과 유일성이 있다. 어떤 사람은 주장하기를 예수님께서 말씀 사역과 병행해서 축사사역을 했기 때문에 우리도 말씀 사역과 축사사역을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전에 특강을 하러 오신 어떤 목사님은 마포 지역에서 오셨는데, 마포 지역을 사로잡고 있는 귀신을 쫓아내고 결박해야 한다고 주장했었다. 그러나 예수님의 축사 사역은 독특한 점이 있다. 결정적인 사건, 최초로 인간 역사 속에서 하나님 나라가 도래하는 포인트였다.
칼 바르트는 역사적 이해에 있어서 큰 공헌을 했는데,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역으로 말미암아 사단에 대한 결정적인 승리가 일어났다. 십자가의 사건 전과 후는 완전히 다르게 이해해야 한다고 보았다. 승리가 이루어진, 완전히 변혁된 리얼리티의 빛 가운데 세상을 이해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십자가가 결정적인 사건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독특성과 함께 연속성이 있다.
물론 어떤 지역에 복음이 최초로 전파될 때 그 곳에 하나님 나라가 도래했다는 싸인으로서 축사 사건이 일어나는 경우가 많이 있다. 이러한 현상들이 많이 일어난다. 그러나 복음이 최초로 들어가서 하나님 나라가 임할 때 이런 싸인이 많이 일어나지만, 하나님의 나라가 확장되면서 이러한 현상들이 드물게 일어난다. 최초로 하나님 나라가 임할 때 이런 현상이 많이 일어난다. 교회가 정착되고 하나님 나라가 편만하게 이루어질 때 이런 싸인이 전혀 일어나지 않는다는 뜻이 아니다. 그러나 선교지역처럼 자주 일어나지는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게 사단과의 싸움이 계속된다는 점에서 연속성이 있다. 영적 전쟁. war field. 사단과의 영적 전쟁의 최전선에 서 있는 사람들이 바로 사역자들이다. 사단에게 얻어터져서 갈기갈기 찢기지 않으려면 제대로 준비를 해야 한다. 우리가 보기에 형편없어 보이는 선배들도 신학교에 다닐 때는 겸손하고 괜찮은 신학생들이었다. 사단의 유혹 가운데 빠지지 않도록 깨어서 제대로 준비해야 한다.
병고침의 능력도 종말론적 선지자적 사역 세 가지 중에 하나이다. 예수가 행한 치유 사역을 우리는 구약의 종말론적인 배경을 통해서 이해해야 한다. 구약의 선지자들은 종말에 이스라엘을 모든 억압에서 해방시킬 메시아의 시대가 도래할 것을 대망했다. 선지자들이 대망한 메시아는 time of liberation and healing에 오시는 분이라고 보았다.
“[18]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케 하고 [19]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더라 [20] 책을 덮어 그 맡은 자에게 주시고 앉으시니 회당에 있는 자들이 다 주목하여 보더라 [21] 이에 예수께서 저희에게 말씀하시되 이 글이 오늘날 너희 귀에 응하였느니라 하시니”(눅 4:18-21)
종말론적인 회복과 구원의 일환으로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파하셨다. 하나님 나라의 복음의 구체적인 내용이 바로 종말론적인 구원과 회복이다. 종말론적인 구원과 회복이 임했다는 구체적인 메시지의 표현으로서 병을 고쳐 주셨다. 요즘 성경신학자들이 병고침에 대해서 새롭게 조명하고 있다.
예수님의 메시아되심과 하나님의 아들되심을 보여준다. 눅 7:21-23.
“[21] 마침 그 시에 예수께서 질병과 고통과 및 악귀 들린 자를 많이 고치시며 또 많은 소경을 보게 하신지라 [22]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가서 보고 들은 것을 요한에게 고하되 소경이 보며 앉은뱅이가 걸으며 문둥이가 깨끗함을 받으며 귀머거리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 [23] 누구든지 나를 인하여 실족치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하시니라”(눅 7:21-23)
병고침은 예수님의 신성을 나타내기 위한 것이라고 워필드는 보았다. 그러나 현대의 성경신학자들은 구약에 비추어 보아 이해해야 하는 것이다. 전통적인 신학자들의 견해뿐만 아니라 메시아이심을 나타내시고 아들이심을 나타내기 위해서 병고침의 기적을 행하셨다는 점을 부각시켜야 한다.
가버나움 중풍병자를 고치시고 하나님만이 가지신 죄사함의 권세를 말씀하심으로 당신이 하나님이심을 주장하고 계신다. 그리고 그의 치유의 기적은 독특성이 있다. 역사 속에 나타난 어떤 치유의 기적과 같지 아니하다. 실패가 없었고, 대부분 즉각적이었다. 지금도 하나님 나라가 도래한다는 사인으로서 병고침이 일어날 수는 있으나, 예수님의 병고침은 우리들이 본받을 수 없는 독특성도 포함하는데 바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되심과 메시아 되심을 보여주는 점이다. 이러한 것은 오늘날 우리가 반복할 수 없는 것이다.
그리고 병고침은 새창조의 싸인이다. 죄로 파괴되고 망가진 인간 세계에 대해서 전 우주적인 회복과 구원이 일어났다는 싸인이다. 특별히 예수께서 안식일에 병고치신 사역에 특별한 의미가 있다. 예수께서 안식일에 병을 고치신 이유가 무엇일까? 죄로 말미암아 안식을 누리지 못하고 있는 우리, 안식을 상실한 우리에게 죄로 말미암아 손상되고 파괴되고 뒤틀린 창조 세계를 고치심으로 말미암아 원래 하나님께서 의도하신대로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심히 좋은 상태로 회복하시려고 하는 것이다. 아버지께서 일하시매 나도 일한다고 하셨다. 죄로 말미암아 상실한 안식, 창조 세계가 뒤틀리고 부패한 것에 대해서 새창조의 일을 계속하신다는 의미로서 안식일에 특별히 병고침을 많이 행하셨다고 본다.
병든 창조와 인간을 고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심히 좋은 창조로 회복하시기 위함이다. 창조를 죄와 사단의 지배 하에서 하나님의 통치 아래로 옮김으로 말미암아 본래 좋았던 상태로 회복하여서 진정한 안식일이 있게 하기 위함이다.
현대인들은 기적은 자연의 일반 법칙을 깨뜨리고 위대한 변칙적인 것으로 배격한다. 그러나 현대인들이 크게 오해하고 있는 것은 이 세상은 정상이 아니라는 점이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정상적인 상태와 모습이 아니다. 이 세상은 죄로 인해서 와해되고 손상되고 뒤틀린 상태이다. 그래서 현재 혼동과 사망과 질병과 고통과 이런 모든 오욕은 원래 하나님이 정하신 자연 법칙이 죄로 인해서 파괴되고 오도된 것이다. 따라서 비정상화되고 뒤틀린 것을 바로 잡는 것은 어떠한 의미에서 자연적인 것이다. 자연을 바로 잡는 방편으로서 초자연적인 방법을 쓰셨다는 것이다. 몰트만이 말하는 것처럼 “초자연적인 기사는 어떤 의미에서 진정으로 자연적인 사건이다.” 기적을 통해서 인간의 근본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지 않으셨다. 인간의 불신을 기적을 통해서 인간이 믿도록 하지 않으셨다. 증거 앞에 인간을 굴복시키려고 하지 않으셨다. 사람들이 기대했던 것처럼 십자가에서 엘리야처럼 자신을 구원함으로 말미암아 자신이 메시아임을 과시해 보이지 않으셨다. 이런 기적으로 말미암아서는 사람들을 구원할 수 없다는 것을 아셨다. 사람들을 제압하고 어쩔 수 없이 인정하고 믿지 않게 만들 수는 없다는 것을 아셨다. 그러므로 기적을 통해서 인간의 근본문제, 죄의 문제를 해결하려 하지 않으셨다. 예수님의 기적은 나사로를 살리시는 일에서 절정에 도달한다. 그러나 그 사역을 통해서 유대인들이 더욱 더 완악해지고 강퍅해지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놀라운 기적을 통해서도 인간의 하나님에 대한 원수된 마음이 줄어들기는커녕 더 늘어났다. 인간을 구원하는 방법이 오직 십자가 밖에 없음을 보여준다. 나사로의 기적 사건을 절정으로 해서 예수님의 기적적인, 초자연적인 사건은 공관복음의 무대에서 사라지고 십자가의 고난이 부각된다. fade away. 십자가가 드디어 드러난다. 기적을 행하시는 것은 진정한 반응을 일으켜서 죄의 문제를 해결하려고 한 것이 아니라, 기적은 오히려 오직 인간을 구원하는 방법은 십자가 뿐임을 더욱 더 간접적으로 부각시키는 역할을 한다. 기적 사건의 절정 이후로 기적은 물러가고 십자가가 나타난다.
예수의 인간이해는 전인적이고 히브리적이다. 나사로를 살림으로써 종말론적인 부활을 예표해서 말씀하시고 계신다.
“[25]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26]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요 11:25-26)
5. 말씀의 권위(εξουσια)
막 1:27, 눅 4:36 “그의 가르침에 사람들이 놀랬다” 그의 행하심, 말씀에는 사람들을 놀래키는 권세가 있었다. 또한 그의 presence 자체가 사람들을 압도하는 권세였다. powerful. 막 5:22, 10:17등 예수님의 부름에 제자들이 아무런 말이 없이 따라갔다. 귀신들도 그가 말씀하시기 전에 누구신지 알았다. 마 1:24, 5:7, 9:20, 요 18:6.
“예수께서 저희에게 내로라 하실 때에 저희가 물러가서 땅에 엎드러지는지라”(요 18:6)
사람들이 뒤로 넘어져 버리는... 그의 presence가 사람들을 압도. John Hick(종교다원주의 주창), Lampe(옥스퍼드 신학자)는 예수 그리스도를 완전히 인간으로 보는데, 예수 그리스도가 가진 독특성은 그의 임재 앞에 서면 모든 사람들이 어떤 강력한 영향을 받는다. 그의 임재 가운데 어떤 자가 들어가면 완전히 하나님을 의식하게 된다고 주장.
말씀 사역자는 주님과 같이 영적인 권위가 있어야 한다. 제가 청년때 모시고 있던 목사님은 말을 잘 하지는 못하셨다. 설교에 있어서 탁월한 지혜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러나 영적인 권위가 있었다. 설교를 하시면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과 같은 인상을 받았다. 그 때 영향을 받았던 사람 중에서 목사가 된 사람이 많은데, 가끔 만나서 이야기를 하면 “요즘 그런 말씀을 듣기가 참 어렵다”는 말을 하곤 했다. 영적인 권위가 우리 말 가운데 있어야 한다. 우리가 진실하게 살면 이런 권위가 우리에게 주어진다. 은혜로 말미암아 주어지는 권위가 없으니까 인위적으로 권위를 만들려고 한다. 목사를 욕하면 입이 비뚤어진다는 식의 이야기나 하고 다닌다. 하나님 앞에 진실하게 살면 영적 권위가 다른 탤런트가 부족하더라도 주어진다.
샌프란시스코 근교에서 목회하는 목사님께 들은 말씀이다. 자기가 아무리 설교를 잘하고 내려와도, 한상동 목사님이 축도를 한 번만 하면 엄청난 축도의 은혜를 받았다고 한다.
“a)mh/n le/gw u(mi=n...” : 구약의 선지자들은 “여호와께서 가라사대”라고 말씀하셨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라고 말씀하셨다. 예수님께서는 자기 자신의 권위가 절대적이셨다. 그래서 타자의 권위를 기대어서 자신의 말씀을 하실 필요가 없었다.
“e)gw/ de\ le/gw...” :
주님께서는 마 13:31에서 이렇게 말씀한다. 사 40:7과 평행을 이룬다.
<개역한글판> “또 비유를 베풀어 가라사대 천국은 마치 사람이 자기 밭에 갖다 심은 겨자씨 한 알 같으니”(마 13:31)
<표준새번역> “<겨자씨와 누룩의 비유> 예수께서 또 다른 비유를 들어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하늘 나라는 겨자씨와 같다. 어떤 사람이 그것을 가져다가, 자기 밭에 심었다.”(마 13:31)
<NIV> “He told them another parable: "The kingdom of heaven is like a mustard seed, which a man took and planted in his field.”(마 13:31)
<개역한글판>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듦은 여호와의 기운이 그 위에 붊이라 이 백성은 실로 풀이로다”(사 40:7)
<표준새번역> “주께서 그 위에 그 입김을 부시면,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든다. 그렇다. 이 백성은 풀에 지나지 않는다.”(사 40:7)
<NIV> “The grass withers and the flowers fall, because the breath of the LORD blows on them. Surely the people are grass.”(사 40:7)
6. 기도의 삶
예수님의 하나님에 대한 종교적 체험 중 가장 중요한 측면은 예수님의 기도생활이다. J. Jeremias, "예수는 아마 그의 전 생애에 걸쳐 하루 세 번씩 유대의 생활을 따라 기도했을 것이다“고 함. 그러나 성경적인 증거는 아니다. 그러나 복음서를 통해서 그의 기도생활의 윤곽은 알 수 있다. 홀로 기도하셨다(눅 9:18, 28, 막 9:2, 막 1:35, 눅 5:16). 산에서(막 6:46, 눅 6:12, 9:18) 기도하셨다. 아침에(1:45), 밤늦도록, 온 밤을(막 6:46, 14:32-42, 눅 6:12) 주님은 새벽기도, 철야기도, 금식기도를 다 하셨다. 그리고 중요한 결정 앞에서 눅 6:22, 22:41-5 등에 보면 항상 기도를 하셨다.
그의 기도의 모습을 보면 유대인들의 기도의 모습과 아주 대조가 되었다. 유대인들은 쇼를 하기 위해서 공중 앞에서 기도를 많이 하셨다. 그러나 주님은 은밀한 곳에서 기도하라는 것을 강조하셨다. 공중에서 유대인들은 아주 길게 자기의 경험을 과시하기 위해서 기도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공중에서의 기도는 짧게 하셨다. 과거에 교회에 다닐 때 장로님과 권사님은 기도를 아주 오래 하셨다. 다방에서 커피를 놓고 기도하면 커피가 다 식고, 잔치에서도 음식이 다 식었다. 웃지 못할 많은 일들이 있었다. 어떤 장로님은 설교보다 기도를 더 오래하는 경우도 있었다. 그래도 어떤 목사님이 잡아당기면 오기가 나서 더 오래하기도 했다고 한다. ^^;
기도에 대한 가르침 : 마음이 하나님께 바쳐져야/은밀하게 보시는 하나님께/두드리고 찾고 구하라/간절히 낙심하지 말고/시험에 들지 않게/주기도문에서 기도의 내용
이런 것을 볼 때 기도는 신앙생활에 가장 중요한 것으로 주님이 여기셨다. 기도는 하나님과의 관계/교제의 근본바탕이었다. 왜 기도가 그의 삶과 사역에서 이렇게 중요했나? 기도가 그의 삶에서 어떤 역할을 했나? 기도가 그의 사역의 힘의 근원이었다. 위기 상황에서 그를 지탱하는 화신과 능력이 기도에서 주어졌다.
① 예수님은 기도를 통해서 참된 인간의 삶이 무엇인가를 보여주셨다. 기도의 삶을 통해서 전적으로 하나님을 의존하는 삶을 사셨다. 겸손하게 어린아이와 같이 하나님을 전폭적으로 신뢰하고 의존하는 삶을 보여주셨다. 하나님 안에서 안식하는 법을 보여주셨다. 모든 중요한 위기 상황 속에서 하나님의 상담과 도움을 구하셨다. 그의 삶의 원동력은 기도에서부터 비롯된다. 기도의 채널을 통해서 하나님이 공급하시는 능력으로 사셨다. 그의 힘의 근원이 기도로부터 주어졌다.
② 그분은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과 삼위일체적인 교제를 누리며 사셨다. 기도 안에서 아버지와 성령님과 하나가 되는 삶을 사셨다. 특별히 기도 속에서 하나님을 ‘아바’라고 부르셨다.
“a)bba/” : 하나님과 예수님이 가지신 특별히 친밀한 관계를 알려주는 말이다. 더 중요한 것은 기도 속에서 하나님과의 아들 됨 친밀한 관계를 경험하셨다. 기도 속에서 그는 하나님을 ‘아바’라 부르는 친밀한 관계를 가졌다. 막 14:36.
“가라사대 아바 아버지여 아버지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오니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하시고”(막 14:36)
J. Jeremias의 “Abba”라는 소책자. 이 책자가 최근에 예수에 대한 역사적 탐구에 대한 공헌 중 하나로 인정되고 있다. 그의 책에서 밝히길, “예수는 그의 기도에서 항상 하나님을 실제적인 아람어 호칭인 ‘아바’로 불렀다. 이 단어는 가족의 극도로 친밀한 관계를 표현하는 용어이다.” 구약에는 그렇게 개인이 하나님을 어린 아이처럼 아빠로 부르는 경우는 없다. 구약과 유대 문서에서 그런 경우는 전무하다.
예수의 이 호칭을 통해서 하나님에 대한 특별한 의식을 가졌음을 담지할 수 있다. 그의 ‘아바’라는 호칭은 하나님과의 특별한 관계를 말하고 있다. 그의 아들 됨의 의식은 다른 모든 이와 구별되는 독특하고 유일한 것이었다. 주님이 제자들에게 하나님을 ‘아바’라 부를 수 있는 특권을 부여하셨다. 부를 수 있는 특권 뿐만 아니라 부를 수 있는 은혜를 주셨다. 바로 그의 영을 통해서 아바 아버지라 부를 수 있는 내적인 은혜를 주셨다.
결론(임정훈) : 인간으로서의 예수. 그는 지상의 삶 속에서 성령 안의 삶 속에서 ‘아바’라는 호칭이 분명히 암시하는 것처럼, 아버지와 긴밀한 하나되는 관계를 누리면서 사신 분이다. 지상에서 삼위일체적 교제를 누리셨다. 성령기독론에서 밝히는 것은 아버지와 온전히 unity를 이루고 사신 분이다. 그리고 영원 전부터 하나님과 교제를 누리셨던 분이다. 따라서 우리의 성령기독론은 성령으로 잉태한 성육신부터 시작한다. 성육신의 근본 의미는 선재하신 아들이 사람이 되었다는 것이다. 우리가 성령 기독론을 성령으로 잉태한 것에서 출발하면 그것이 성육신으로 이어지고, 성육신은 로고스기독론의 정체성과 연결된다. 성령기독론적 관점에서 살펴볼 때, 이것이 다시 로고스기독론과 병합되어서 예수그리스도의 유일성과 독특성을 살펴 볼 수 있다.
Ⅴ. 예수와 하나님 나라
1. 예수의 하나님 나라의 복음
The kingdom of heaven(h( basilei/a tw=n ou)ranw=n) - 마태(유대적 표현)
The kingdom of God(h( basilei/a tou= qeou=) - 마가, 누가, 요한(헬라적 표현)
마태도 12:28, 21:31 등에서 하나님 나라라고 한다. 19:23, 24에는 천국과 하나님 나라를 교차해서 사용한다. 따라서 특별한 의미적 차이가 있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 나라는 헬라적 표현.
1) 하나님 나라의 성격
예수의 하나님 나라의 가르침에 대해서 두 가지 신학적 입장이 있었다.
① 예수가 전한 하나님 나라는 현재적이면서 또한 미래적이다
Futuristic eschatology : J. Weiss, A. Schweitzer. 예수가 가르친 하나님 나라는 종말론적이고, 미래적인 특징이 있었다.
Realized eschatology : C. H. Dodd. 예수가 가르친 하나님 나라는 현재적으로 이루어진 하나님의 나라이다.
"The kingdom of God which had been initiated is his ministry, would be effected by his death and resurrection and would be consummated in glory at the end."
그러나 그 이후의 학자들은 예수가 가르친 하나님의 나라는 현재성과 미래성이 다 포함된다고 주장했다. 미래적이면서도 현재적이라고 본다. 김세윤 박사도 주장하기를 복음서에는 미래에 임하는 하나님 나라보다 성령에 의해서 현재에 임한 하나님 나라다라고 말한다. 바울 서신에 보면 현재에 임한 하나님의 나라를 많이 증거한다. 자신의 사역과 더불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도래했다는 것을 여러 구절에서 증거하고 있다. 많은 백성들이 이미 하나님의 통치 속에 들어가고 있다는 것을 증거한다. 축사의 사역이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는 싸인이라고 말한다.
② 하나님 나라의 은닉성
겨자씨와 같이 누룩과 같이 사람들이 보기에는 하잘 것 없는 것처럼 시작한다. 믿음이 없는 자는 그것을 파악할 수가 없을 정도이다. 은밀하게 하나님 나라는 시작한다. 그러나 이렇게 미미하게 시작한 하나님의 나라가 나중에 가서는 온 세상을 변혁시키고 개혁시키는 그러한 운동으로 확장된다고 말씀하고 계신다. 그래서 하나님의 나라의 은닉성을 ‘비밀’이라는 말로 표현하고 있다.
비밀(musth/rion)
믿음이 없는 자는 하나님 나라를 볼 수가 없는 것이다. 사회적, 정치적 혁명을 수반하는 획기적인 천지개벽적인 사건으로 하나님 나라가 임하는 것이 아니라 아주 비밀스럽게 하나님의 나라 운동이 전개된다. 하나님의 은혜로 조용하고 은밀하게 이러한 운동을 전개해 나갈 필요가 있다.
③ 하나님 나라의 의미
"The activity of God's kingly power through Christ"
ㄱ. 다스림 : 하나님 나라는 우선 동적인 뉘앙스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를 동적인 의미로만 이해하면 안 된다.
ㄴ. 주권적 영역 : 동시에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이 다스리는 주권적인 영역이다. 영적인 영역, 종말론적인 영역이다. 그 속에서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이 왕노릇하는 영역이다. 하나님의 나라의 주권적인 영역의 관점에서 장소성을 가지고 있다는 점이다. 문, 열쇠라는 표현을 사용하신다. 그리고 ‘들어가다’(ei)serxesqai)는 표현을 사용하고 계신다. 하나님 나라가 하나의 집의 개념으로 설명하고 계신 것이다. 왕좌가 놓인 하나의 집이라고 보는 곳이다. 교제하고 잔치하는 집인 것이다. 들어가다는 표현은 성전에 들어가다는 구약의 표현과 양식사적으로 표현되는 것이다. 예수께서 자주 사용하신 ‘들어가다’라는 표현은 구약에서 성전에 들어간다고 할 때의 ‘들어가다’와 양식사적인 맥락에서 일치한다.
곧 성전으로 들어가는 모습을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모습으로 표현하고 계신다. 그러므로 분명히 장소적인 측면이 하나님의 나라 개념에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장소성
들어가다(ei)serxesqai)
문(마 7:13; 눅 13:24)
열쇠(마16:19; 23:13)
성전
ㄷ. 하나님 나라의 백성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구원하시기 위함이다. 12제자를 뽑은 것은 12지파를 대체하는, 옛 이스라엘과 상응하는 새 이스라엘을 상징하고 있는 것이다. 예수님의 하나님 나라 선포의 의도가 바로 그것이다.
카할(ל)(e)kklhsi/a)
※ 예수님의 음부하강에 대한 토론을 다음 주에 하겠다. 왜냐하면 예비군훈련 때문에 많은 사람이 빠지기 때문에...루이스 벌콥의 견해와 유해무 교수님의 견해, 그리고 자신의 견해를 정리해서 다음 주에 만나자.
④ 하나님 나라의 축복 : 의와 희락과 화평
죄와 흑암의 권세에서 자유하는 영역에서 이제는 하나님을 향하여 의의 열매를 맺을 수 있게 되었다. 그래서 하나님과의 화평이 이루어지는 곳이다. 화평을 누리는 삶은 바로 희락이 맺히는 삶이다. 그래서 하나님 나라는 혼인잔치로 많이 비유된다. 그것은 상당히 의도적이다. 하나님을 섬기는 신앙의 세계는 침울한 금욕적 세계가 아니고 혼인잔치와 같은 곳이다. 그래서 그의 첫 번째 기적을 가나혼인잔치의 어려움을 해결하심으로써 우리의 기쁨을 인정하심. 당신이 오실 때의 예표로 제시하고 있다. 유대주의자들의 율법적이고 경직된 신앙생활을 통해서 잘못된 관념이 유대사회에 팽배되어 있었다. 참 하나님을 섬기는 신앙의 세계는 혼인잔치 같은 환희의 삶이다. 이런 주권적 영역 안에서 의, 화평, 희락의 열매가 맺힌다. 바울은 이런 핵심을 간파해서, “하나님 나라는 먹고 마시는 것이 아니고 성령 안에서의 의, 희락, 화평”이라고 했다. 예수님과 상통함.
⑤ 하나님 나라는 주권적으로 임하는 동시에 구하는 이에게 임한다
인간이 이것을 좌지우지 할 수 없다. 주님은 하나님 나라를 구하라고 명령하셨다. 모든 것을 팔아서 사야 한다고. 마 13:44,5 침노하는 자가 빼앗는다. 간절히 하나님의 통치를 바라는 자에게 임한다. 천국의 축복은 추구하는 가난한 마음에 임한다. 마음이 가난한 자에게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이라고 하셨다.
⑥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방편 : 회개와 믿음
막 1:15, “때가 찼고 하나님 나라가 가까웠느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회개 : reorientation of one's whole life
- 철저한 방향전환. 전 인격이 완전히 탈바꿈된다. 사랑과 관심의 우선순위가 바뀐다. 나를 재산, 부모, 처자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하나님 나라에 합당치 않다고 주님이 말씀하심. 거기서 마지막으로 언급하신 것은 ‘나 자신’. 그것이 젤 어렵다. 그 모든 우상의 저변에 깔린 궁극적인 우상은 ‘자기’다. 하나님 일도 자기 영광을 위해서 하는 일이 너무 많다. 자기 우상을 깨뜨릴 때 하나님을 참 사랑하는 것이다. 꼭 그것이 우선되어야 한다. self-denial을 요구하신다. 지금까지 내가 first로 생각하던 모든 것들이 second가 되어야 한다. ‘나냐, 그리스도냐’ 이 둘 중의 하나가 분명히 결정되어야 한다. 그러면 누가 회개를 하고 구원을 받을 수 있겠나? 복음서에도 같은 의문이 제기되고 있다. 부자 청년이 돌아가는 것을 보고 “사람으로서는 할 수 없지만, 하나님은 할 수 있다”
-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만 가능하다. 성령으로 거듭나야. 전격적인 돌이킴이 있어야 한다. 예수님의 십자가가 나의 십자가를 가능하게 한다. 누가 자기를 미워하고 부인할 수 있나? 예수님의 십자가의 효력, 은혜가 우리를 감화할 때 나의 십자가가 가능한 것이다. 그 은혜가 내 안에 넘쳐흐를 때... ‘회개하라’ 명하신 이가 ‘애통하는 마음의 축복’까지 예비하고 계신다. 이 회개는 선재하는 은혜에서 비롯된 것이다. 우리 심령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키는 은혜, 말세에 신을 부어주고 심비에 하나님의 법을 세워주시는 새 언약의 은혜에 근거해서 회개를 요구하고 계신다.
- 이 회개는 믿음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회개하고 믿어야 한다. 회개는 죄에서부터 하나님께로 돌이키는 것이다. 흑암의 왕국의 억압, 곤고함, 암울함에서 하나님 나라의 풍성함, 기쁨으로 돌이키는 것이다. 쥐엄 열매에서 풍요로운 양식이 있는 아버지께로 가는 것이다. 그래서 자기가 갖고 있던 것을 버리는 것이다. 아버지 집에 풍부한 것이 있음을 알고 쥐엄열매를 갖다 버리는 것이다. 회개는 찡그린 얼굴로 돌이키는 것이 아니고, 기쁨의 얼굴로 돌이키는 것이다. 어떤 신학자, “to be converted not into long faces but to short one-to repent into delight” 일시적인 슬픔, 애통히 있지만, 곧 이어지는 성령의 위로, 하나님 나라의 축복이 부어진다. 여기는 믿음의 요소가 있어야 한다. 스펄전, “믿음이 결여된 회개는 회개해야 회개이다.” 돌이키고 나면 우울한 금욕의 세계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고, 기쁨과 영광의 세계로 들어가는 것이다.
2) 하나님 나라의 원리 : 산상보훈(천국대헌장)
① 산상보훈의 개요 outline
㉠ 하나님께서 복 있는 사람이라고 부르는 사람은 누구인가? (5:3-16)
㉡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선은? (5:17-48)
㉢ 받으실 만한 예배는? (6:1-18)
㉣ 요구하시는 봉사는? (6:19-24)
㉤ 원하시는 믿음은? (6:25-34)
㉥ 우리가 다른 이를 어떻게 대하기를 원하시는가? (7:1-12)
㉦ 참 신앙은 실천하는 신앙이다. (7:13-28)
② 해석의 원리
선으로 악을 이기라(속옷을 가지려는 자에게 겉옷도 주라). 인색을 너그러움으로, 사나움을 온유함으로 대해야.
③ 실천가능성
너무 어렵고 현실적응성이 없어 보인다. 어떤 이는, “이 말씀의 실천은 높은 경지의 사람이 가능한가?”, “이 말씀은 인간이 지향해야 할 이상이지만, 미래의 천국에서나 가능한 이상이다.” 루터파 어떤 이는, “이것은 직접 실천하라는 것이 아니고, 높은 도덕 수준을 요구함으로써 우리의 부족과 죄임을 보게 해서 그리스도의 의를 바라보게 하는 역할. 오직 그리스도만 이것을 할 수 있다. 이것은 율법의 제2용법만 본 것.
인간이 도저히 이룰 수 없는 도덕적 이상이나 교훈을 제시한 것이 아니고, 인간의 본래적인 삶의 모습과 그 원리를 제시하는 것이다. 창조 시 의도하셨던 인간의 모습과 삶의 원리이다. 산상보훈은 유대 율법사들의 잘못된 관점을 바로잡고 율법의 참된 의미를 가르쳐 주고 그것을 따르도록 요구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사는 삶을 제시한다. 그렇게 살 때 비인간화의 모습이 팽배한 이 사회에서 빛과 소금의 역할을 하도록 한다. 참된 형상을 회복한 우리의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죄인이 어디로 돌이켜야 하는가를 분명히 제시해 주어야 한다. 빛과 소금의 역할은 이런 원리를 따라 사는 삶이다.
④ 근본적 변화를 전제함
이런 삶을 사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획기적인 인간성의 변화가 먼저 요구된다. 산상보훈은 8복(축복)으로 시작된다. 하나님의 은혜로 심령이 가난해진 자만이, 의에 주리고 목마른 마음을 가진 사람만이 이런 삶을 살 수 있다는 것을 제시한다. 산상보훈에도 indicative, imperative의 요소가 다 있다. imperative만 보면 절망할 수밖에 없다. indicative를 분명히 강조해야 한다.
⑤ “더 나은 의”
바리새인과 서기관의 의보다 낫다고 하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율법주의자들이 강조하는 의로움은 행위로 말미암은 것이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심령에서부터 우러나오는 것이다. 율법주의자들은 심령이 근본적으로 깨끗해지지 않았다. 하나님에게 절대 순종할 수 없는 반역된 마음을 가진 자들이다. 이 세상에서 가장 힘든 것은 자기가 가장, 극도로 싫어하는 것을 사랑하는 것이다. 하나님과 원수된 마음, 즉 사랑과 정반대 되는 마음이 자신 안에 도사리고 있기 때문에 바리새인은 하나님을 속이고 자기를 속이는 것이다. 회개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여 회개의 가능성을 잃어버리는 것이다. 마음으로부터 율법의 온전한 의미를 지키는 삶을 살아가야 한다. 이는 근본적인 마음의 변화로부터 시작한다. 이는 하나님의 은혜를 필요로 한다. 하나님의 은혜로 마음이 할례를 받아야 한다. 하나님의 율법이 요구하는 것이 내 마음이 요구하는 것이 되어야 한다.
2. 예수의 세 직분과 하나님 나라
교의학에서는 전통적으로 예수의 사역을 왕, 제사장, 선지자 세 직분의 관점에서 설명해 왔다. 칼빈은 ‘기독교 강요’에서 세 직분을 따라서 예수의 사역을 다룬 후 그것이 개혁주의 교의학의 전통으로 굳어졌다. 최근에는 이런 세 직분을 따라 논하는 전통적인 관점에 문제점을 제기하는 신학자들이 많다. 이들의 견해가 상당히 일리가 있음을 인정해야 한다. 예수의 사역을 세 직분이라는 범주에서 논하는 것은 한계가 있다. 또한 예수님 자신이 구약의 선지자들과 구분하기도 하셨다. 예수님은 구약의 왕, 선지자, 제사장이 아니며 단순한 사역의 연장이 아니다. 근본적으로 차원이 다르다. 그러나 우리는 예수의 사역을 세 직분에 비유하여 논할 수는 있다. 태동과 유형에 따라서 설명하고 고찰.
이 세 직분론이 가진 한계성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안고 있는 장점은, 예수의 사역을 하나님 나라의 관점에서 이해할 수 있게 한다는 것이다. 하나님 나라의 형상의 요소, 내용을 공부할 때, 하나님 형상은 하나님 나라 안의 존재임을 말했다. 왕, 선지자, 제사장의 특권을 누리는 존재. 창조 시 낙원에서 처음 인간에게 주어진 세 가지 역할이 바로 왕, 제사장, 선지자의 역할이다. 인간은 원래 하나님을 반영하는 선지자적 존재, 만물을 대표하고 예배를 드리는 제사장, 만물을 통치하는 왕의 직분이 주어졌다. 죄로 인해 이런 직분과 특권을 상실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안에 이런 직분을 통해서 희미하게 그리스도 안에 하나님 나라가 회복될 것을 보여주셨다. 그리스도의 구속으로 우리에게도 이런 축복이 주어졌고 하나님 나라 안에서 우리 모두는 이 세 가지 특권과 직분을 누리게 되었다.
그러나 이 직분은 교회 안의 특별한 사람에게만 국한되는 것은 아니다. 로마 카톨릭은 구약의 제사장 제도의 연장으로 사제직을 이해했다. 교권주의의 논리적 도구로 남용되었다. 그러나 어떤 경우에는 개혁교회에서도 목사의 권위를 인위적으로 강조하기 위해서 이와 비슷한 오류에 빠지는 경우를 볼 수 있다. 종교개혁의 중요한 정신 중 하나는 ‘만인제사장’. 목사는 역할과 기능 면에서 중요한 직분이다. 인위적으로 권위를 신장하려 해서는 안 된다.
| 삶 | 죽으심 | 열매
many 하나님 나라의 백성 세상의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 나라의 축복을 누리셨다. 예수 믿고 우리가 얻는 축복이 뭐냐? 하나님 나라의 축복이다. 죄에서 자유하고, 사망의 권세에서 자유. 은혜와 의가 왕노릇하는 능력. 하나님 나라의 세 가지 특권을 누리는 삶이 우리에게 주어졌다.
many 하나님의 형상(New man) 하나님이 원하시는 참된 인간상 회복
many 의인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율법 앞에 의인이 되게 하셨다. 실제로 죄가 많지만, 예수님의 공로가 법적으로 우리에게 전가되어서 우리의 죄의 문제가 완전히 해결된 완전한 의인으로 취급해 주시고, 실제로 아들의 영을 주어주셨다. 의인만, 죄의 문제가 해결된 사람만 누릴 수 있는 아바, 아버지를 우리에게 성경을 부어주심으로 가능하게 하셨다. 이런 의로움을 받았기에 우리가 성령 안에서 화평을 누린다. 법적 전가(칭의) 뿐만 아니라 실제적 성화 2000년 과거에 내 대신 객관적으로, 내 밖에서 완성하셨다(단번에 이루어진 것). 또 이제는 성령으로 우리 안에 오셔서 내주하시면서 나를 통해서 현재 내 안에서, 나를 통해서 율법을 따라 살게 한다(성화, 불완전하지만 점진적으로). 이 양면성을 동시에 강조해야 한다. |
1) | One 하나님 나라를 소유한 이. 모든 생명력을 내포하고 있는 한 알의 밀알 | 의미 : ***** 이런 삶을 사시고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 나라를 상실한 사람을 위해서 죽으셨다. 흑암의 왕국에 속한 사람, 죄와 저주에 아래 속한 사람, 죄와 사단의 종이 된 사람을 위해서 죽으심. 그리고 그런 사람(죄인)이 되어서 죽으셨다. 안전히 하나님 나라의 축복을 누리신 분이 저주를 받아 하나님 나라를 상실한 사람이 되고 그런 취급을 받고 모든 수치와 모욕을 받고 죽으셨다. 이런 분이 죽으셨기 때문에 우리에게 열매가 나타났다. | |
2) | One(유일하신) 하나님의 형상. 하나님께 전적으로 의존하고, 은혜 안에 안식하고 율법을 온전히 단 마음으로 지키고 자유하는 가운데 지키는 삶을 사셨다. 자유와 책임을 가진 존재, 이웃과 함께 하는 존재, 만물을 다스리는 존재... 인간론에서의 하나님의 형상으로의 모습은 예수님의 모습에서 유추해 낸 것이다. |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형상을 상실한 사람, 흉하게 일그러진 사람을 대신해서, 그 자리에 내려오셔서 죽으셨다. 그 인간이 되셔서 그렇게 취급받으면서 죽으셨다. | |
3) | One 의인(율법 앞에서 완전한 의인) 율법을 온전히 지킨 율법의 의인으로 사셨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인간의 모습을 제시하는 율법을 온전히 지키심. 율법 아래 오심. 율법을 지킬 의무가 없는, 율법의 제정자이신 분이 율법의 준수자로 오셨다. 우리의 대리자, 대표자로서 율법을 완전히 지켜주셨다. 그 삶이 우리의 의롭다함의 근거가 된다. 그의 죽으심으로만 우리를 구원하신 것이 아니고, 율법을 완전히 지키신 삶으로 우리를 구원한다. 교의학에서는 예수님의 순종을 active obedience(율법을 완전히 지키는 삶-우리의 의롭다함을 얻는 근거)와 passive obedience(죽으심으로 우리가 율법을 범한 죄에 대한 대가를 받으셨다. 그래서 죄사함의 근거가 되었다)로 나눈다. 그러나 박교수의 생각은 엄밀한 의미에서 구분하는 것은 힘들다. 문제가 있다. 그의 죽으심도 어떻게 보면 매우 적극적으로 율법을 끝까지 지켜 완성하신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율법을 마지막까지 지키신 율법의 완성의 행위. 그리고 주님의 사심도 우리의 죄악 때문에 사신 것. 삶 자체가 고난이고 형벌이었다. 따라서 편의상 구별하더라도 좀 문제가 있다. 우리는 그의 삶과 죽으심으로 우리를 의롭다하시고 죄사함을 얻게 하셨다고 보아야 한다. | 율법을 철저히 어기고, 깨뜨린 죄인들을 위해서 죽으셨다. 율법을 범함으로 모든 지옥형벌을 받을 사람들을 대신해서 죽으셨다. 하나님이 얼굴을 돌리시고 모든 진노의 사건을 십자가에 퍼부으셨다. 그의 죽으심의 의미가 참으로 값진 것은, 이런 삶을 사셨기 때문이다. 유일하게 완전히 하나님의 뜻을 순종하는 율법의 의인으로 사셨기 때문이다. |
Ⅵ. 예수의 죽으심
1. 예수의 죽으심의 의미 : 하나님 나라의 밀알로써의 죽으심
그의 죽으심은 그의 삶의 목표요, 완성이다. 그는 한마디로 죽으러 오셨다. 그는 전 생애에 걸쳐서 그가 죽으러 오셨다는 확고하고 투철한 의식을 가졌고, 죽음에 대한 열망을 가지고 사셨다.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양이라고 자신을 인식하고 계셨다.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한다고(요 3:14). 그는 자신이 땅에 떨어져야 할 밀알로 보셨다(요 12:24). 얼마나 확고부동했는지는 특히 베드로는 꾸짖는 부분에서 볼 수 있다(마 16:21). 이런 의식을 조금이라도 흔드는 유혹을 철저히 배격하고 계신다. 그는 죽기 위해 오셨고, 그의 삶은 죽음의 목표를 향해서 질주하신 삶이다. 그는 인류 역사상 가장 참혹하고 저주스러운 죽음을 죽으셨다. 그러나 동시에 인류 역사상 가장 영광스런 죽음을 향해 가셨다. 지상 위에서 주님의 가장 위대한 사역은 죽으시는 것이다.
그래서 지상에서의 예수님의 일차적인 관심은 영혼구원도 아니다. 주님은 베드로보다 영혼을 많이 구하지도 않으셨을 것이다. 가난한 자들을 돕는 것도 아니다. 향유 옥합의 문맥에서 당장 더 중요한 것은 나의 죽음이라고 했다. 더더욱 사회적, 정치적 문제도 아니었다. 이런 예수님의 사역을 근거로, “예수님은 영혼구원을 위해서 오셨다. 사회정치적 문제에 관심이 없었다. 그래서 교회는 사회에 관여해서는 안 된다”라고 하는 것은 근본주의다.
그러나 예수님의 일차적인 관심은 영혼구원도 아니었다. 그의 관심은 죽으심에 집중되어 있었기에 다른 것에 관심이 없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 세상에 많은 열매를 맺게 하는 한 알의 밀알로써의 죽으심이다. 그러나 그 모든 열매(영혼구원, 교회를 통한 가정과 사회의 변화, 우주의 회복 등)가 하나님 나라 안에 이루어졌다.
공관복음은 죽으심에 초점을 맞추고 있고, 사도행전과 서신서들은 죽으심의 열매들이 어떻게 확장되는가를 보여주고 있다. 영혼구원은 하나님 나라가 이 세상에 확장되는 도구요, 샘플이지만 하나님 나라는 피조 세계의 모든 영역에 확장되어야 한다. 때문에 주님은 하나의 밀알로서 죽으셨다. 우리는 근본주의처럼 교회의 사명을 영혼구원만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새로운 공동체를 만들어서 세상 속에 하나님 나라를 확장하는 사역이 예수님이 궁극적으로 또한 원하시는 것이다. 칼빈주의도 세상 모든 곳에 하나님의 주권과 영광이 나타나는 것이다.
2. 예수의 죽으심의 열매(영혼구원, 교회/사회변화/
현대신학은 예수님의 죽으심, 십자가를 별로 강조하지 않는다. 예수님의 죽으심이 내 안에 성령으로 적용되기 때문에 우리도 그렇게 살수 있는 것이다. 현대주의자들은 인간성의 부패를 제대로 보지 못한다. 보수주의의 문제는 죽으심은 많이 강조하는데, 열매의 측면을 강조하지 못한다. 영적 침체, 윤리적 타락을 보는 것은 그것 때문이다.
우리가 제시하는 복음의 내용이 너무 빈약하다. 천국, 구원밖에 말 못한다. 예수께서 죽으심으로 우리가 얼마나 많은 축복을 누렸는가... 그 풍요로움을 분명히 제시함으로써 그리스도 안에서의 보화를 발견하게 해야 한다. 더 값진 보화를 선택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3. 음부에 내려가심 - 기독론에서 가장 큰 논쟁의 대상이 되는 교리
1) 여러 가지 견해
① 실제적 음부하강을 주장하는 입장
- 라틴, 스콜라철학자들의 견해. 구약의 성도들이 머물고 있는 limbus patrum에 내려가셔서 직접 그들에게 복음을 전한 것이 아니고, 그들을 중간상태에서 구원해 냈다.
- 루터파. 예수님은 음부에 내려가서 복음을 전하고 구원의 은혜를 전한 것이 아니라, 사단에 대한 승리를 선포하시고 정죄를 선언하셨다. 그것은 주님의 높아지심, 승귀의 첫 단계라고 본다.
② 실제적 음부하강을 부인하는 견해
- Calvin : 은유적으로 이해한다. 예수는 십자가의 고난과 죽음 속에서 지옥 고통을 철저히 맛본 것을 의미한다. 웨스트민스터, 하이델베르그, 교의학이 이 견해를 수용.
- Louis Berkhof : 글자 그대로가 아니다. 음부하강의 교리는 두 가지의 의미를 내포한다. 칼빈 주장처럼 철저한 지옥고통을 맛보신 것과, 죽음의 상태에서 가장 깊은 자기비하의 상태까지 내려가신 것을 말한다.
- Erickson : 침례교의 대표적 조직신학자. 성경적 근거가 확실치 한다. 성경에 음부하강을 의미하는 듯한 구절은 난해하다. 그것을 근거로 실제적인 음부하강을 교리화 하는 것은 타당하지 않다. 최대한 교리적으로 다루지 않는 것이 지혜롭다.
- Grudem : 트리니티의 조직신학 교수. 성경은 글자 그대로의 음부하강을 가르치지 않는다. 사도신경의 이 언급은 가르치지 않는 것이 옳다.
2) 성경이 과연 음부하강을 가르치고 있는가?
대표적인 성경구절 : 벧전 3:19-20(벧전 4:6)
“Through the spirit, Christ preached to people who are now spirits in prison when they were still persons on earth”
① 글자 그대로 음부하강으로 해석하는 입장
1. R. C. ; Lutheran - 구약의 죽은 성도들이 머문 limbus patrum ; 지옥
음부에 있는 모든 영혼에게 주님이 가셨다는 것을 말하지 않고, 노아의 시대에 불순종한 사람들에게 가셨다고 명시하고 있다.
2. Origen ; Vogels - 노아 시대에 불순종의 사람들이 머무는 지옥에 내려가셔서 복음을 전했다고 글자 그대로 해석한다. 그러나 이 해석은 성경의 모든 가르침과 반대된다. 만약 이 구절을 그렇게 해석한다면 기독론의 또 다른 중요한 교리가 추가되어야 한다. 예수님께서 음부에서 하신 활동을 다루는 교리(메시지의 내용/전도사역의 열매와 결과 등)가 만들어져야 한다. 그러나 성경 어디에도 그것을 다루고 있지 않다.
② 음부하강으로 보지 않는 해석
1. Augustine - 아퀴나스, Grudem도 비슷. 이 구절은 예수님이 죽으신 후에 하신 일을 말하지 않고, 노아 때 선재하신 예수님이 성령으로 행하신 일을 의미한다. 이 해석을 특히 문맥이 지지하는 것은, 1장 11절에 구약 속에 역사하신 예수의 영을 언급하고 있다. 벧후 2:5에는 노아를 ‘의를 전하는 이’라고 하고 있다. 예수의 영이 노아를 통해서 당시 불순종하는 사람들에게 전파하셨다. ‘옥에 있는 영’이라는 표현은 당시 전파할 때는 존재하는 사람이었지만, 지금은 죽어서 옥에 있기 때문에 이렇게 표현할 수 있다. 이런 해석은 쉽게 무시할 수 없는 고전적 해석. 이 해석의 약점은 문맥 속에서 이 해석이 자연스럽지 않다. 18절 “육체적으로는 죽으심을 당하여 영으로는 살리심을 받았다”라고 하고 있다. 따라서 부활하신 예수님이 하신 것이다.
2. H. Barvink, Greijdanus - 선재하신 예수님이 하신 일이 아니라, 부활하신 주님이 하신 일. “예수가 영으로 다시 사셔서 하늘에 올라가신 것은 옥에 있는 영들에게 하나의 선포의 사건이다 그의 부활과 승천이야말로 옥중의 영들에게 하나의 선포이다.” 그레다누스는 “가서 전파하니”라는 문맥에서 가는 행동자체가 예수님의 주되심을 선포하는 사건이라고 본다. 전파한다고 했을 때, κηρυσσω라고 한다. 벧전에서 복음전파를 의미할 때는 유앙겔리오ευαγγελιζω를 사용한다(2:) 왜 하필이면 노아 시대에 죽어서 지옥에 간 영들인가? 죄로 인해 온 세상이 멸망 받은 것은 노아 시대뿐이라서 특히 멸망의 세계이다. 그래서 부활의 소식이 이 멸망의 세계까지 흔든다는 것을 강조. 20,21 ”홍수로 인해 멸망 받는 세계와 그리스도로 인해 멸망 받는 세계를 비교하고 있다. 그러나 여기서 '가서‘를 그렇게 은유적으로 해석할 수 있나?
3) 결론적인 고찰
① (칼빈의 견해) 음부하강은 주님의 십자가의 고난과 죽음을 통해 철저히 지옥 고통을 맛보셨다. 자기 비하의 심연으로 내려가셨음을 의미한다.
② (이런 개혁주의의 입장을 루터란의 장점을 수용해서 좀 더 보완-유해무 교수) 음부에 내려가신 사건은 바로 승귀의 첫 단계이다. 죽음을 이기시고 승리하셨음을 선포하는 사건. 밑으로 내려가신 것 자체가 사단을 이기셨다는 선언이다. 청교도 신학자 존 오엘, “죽음은 죽음을 죽여주시는 죽음이다(death of death in Jesus's death)”
③ (우리는) 두 가지 가능성을 모두 열어줌이 지혜롭다. 웨스트민트터, “예수는 죽으신 후에 죽음의 상태에 계속 계셨다” 이것은 음부에 내려가셨다는 말이다. 시 16편. 행 2:27? 모든 죽은 자가 내려가는 곳, 구약과 신약이 말하는 죽음의 상태에 머무는 것, 음부에 계셨다는 것까지만 우리가 확실히 말할 수 있다. 구체적으로 그 음부가 무엇이며, 주님이 무엇을 하셨는지는 말할 수 없다. 죽음의 상태, 음부에 계셨다는 것까지는 말할 수 있는 가능성을 인정함이 지혜롭다. 인간이 맛볼 수 있는 최대한의 고통, 음부에서의 고통까지도 친히 맛보심으로 그의 구원 사역을 철저하게 완성하셨다고 보는 것이다. 나아가서 음부에서의 그의 존재의 활동이 무엇인가를 얘기하는 것은 사변적으로 흐르는 것이다. 칼빈이 말하는 은유, 루터란이 말하는 실제적인 의미를 다 받아들일 수 있다. 그러나 실제적인 의미를 받을 때는 지나치게 나아가는 것을 주의해야 한다.
<토론> 5월 29일
*강신현 : 벌콥은 음부하강에 대한 문자적 해석을 지지하지 않는다. 육체는 무덤에 있는데 영만 음부에 내려갔다고 볼 수 없기 때문이다.
*박태선 : 저희들은 두 가지 쟁점을 가지고 논쟁했다. 사도신경 가운데 어떤 것은 이 것을 포함하고 있고 그렇지 않은 것도 있는데 일단은 음부하강을 받아들이는 것이 유익하다고 결론지었다. 그 이유는 예수님께서 인간이 겪을 수 있는 가장 큰 고통을 몸소 체험하셨다는 의미에서 받아들이는 것이 유익하다는 것이다. 지난 번에 베드로전서 주석 하면서 이 구절을 다루었는데 영으로 옥에 있는 영들에게 죽으셨다는 구절.....영으로 살으셨다는 것은 성령으로 살으셨다는 것
이다. 성령으로 말미암아 살아나신 다음, 즉 부활하신 다음에 어떻게 하셨는가를 다루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구절을 근거로 음부하강을 이야기 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음부하강에 대한 성경적인 근거는 없다고 결론지었다.
*류길상 : 음부에 내려갔다는 개념에 대해서 이야기했다. 장소적 개념이냐, 아니면 지금 현재 상황 가운데서 하나님과의 분리를 이야기하는 것이냐....음부에 대한 정확한 개념이 없이는 이 주제를 해결할 수 없다는 의견에 동의했다. 예수의 음부경험은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과 십자가에서 “엘리엘리 라마 사박다니”를 외치던 고통에서 절정을 이루었다고 보아야 한다. 이는 칼빈과 벌콥의 견해, 그리고 유해무 교수님의 견해와 큰 맥락에서 다르지 않다고 본다.
*강세원 : 유해무 교수님과 벌콥의 견해를 살펴본 다음에 각자의 개인적인 의견을 나누었다. 찬성과 반대의 견해, 절충적인 의견이 각각 나왔다. 음부하강을 찬성하는 의견은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의 완성이 음부에까지 가서 비로소 완성되었다는 의견에서 기인한다. 실제로는 음부하강을 하신 것이 아니라는 의견이 있었다. 육체는 무덤에 있었기 때문이다. 영으로만 음부에 내려가서 승리를 선포하셨다는 견해.....예수님께서는 이미 십자가 상에서 완벽한 대속을 이루었기 때문에 음부에까지 내려갈 필요가 없었다는 견해도 있었다. 음부에까지 내려가지 않더라도 십자가에서 충분히 음부를 향해 승리를 선포하실 수 있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3일동안 무엇을 하셨는가? 모른다가 정답이다. 결론적으로 토론 가운데 느낀 것은 이미 개인적인 생각들이 토론 과정에 전제로 박혀 있어서 토론이 어려웠다는 것이다. 이는 신학자들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강충건 : 음부하강에 대한 성경적 근거는 희박하다. 음부가 과연 무엇인가? 죽음까지인가, 실제 지옥까지인가? 예수께서 실제로 지옥에까지 가셨는가? 사람이 지옥에까지 갔다면 그건 이미 끝난 것이 아닌가? 거기에 가서 예수님께서 다시 구원의 메시지를 선포했다면 이는 다소 위험한 생각이다. 지옥에 가셔야만 예수님의 사역이 완성되는 것은 아니다.
VII. 속죄(The Atonemant)
1. 여러 가지 속죄설
1) 사단배상설(The Ransom to Satan Theory)
일부 초대 교부들의 견해로서 안셈(Anselm)의 속죄론이 등장하기까지 압도적인 지지를 받았던 입장이었다. 이 견해에 따르면, 예수님의 속죄의 죽으심은 사탄에 대한 배상, 속전(ransom)이다. 초대교부 오리겐(Origen)은 사탄은 이 세상에서 타락한 인간을 지배하는 자로서, 그의 권리를 간단히 무시할 수 없다고 하였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사탄이 요구하는 이 권리금, 몸값을 지불하기 위해 아들을 속전으로 제공하였다는 것이다. 이 견해는 마20:28의 “인자가 온 것은 ...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라”는 말씀에 주로 근거한다. 그러나 이 구절은 사탄에게 배상을 의미하지 않는다.
이 견해에 따르면 예수의 피의 대속을 요구하는 이는 하나님이 아니라 사탄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사탄에게 아무 것도 지불할 의무가 없으시다. 다만 사탄을 처벌할 권한만을 갖고 계시다. 예수님은 그의 대속으로 사탄에게 무엇을 지불한 것이 아니고 사탄의 권세를 분쇄하시고 사탄의 결박에서 인간을 자유하게 하신 것이다.
2) 도덕절 감화설(The Moral Influence Theory)
중세신학자 Peter Abelard(1079-1142)가 주장한 이 속죄설은 예수님의 죽으심은 대속의 죽음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인간을 얼마나 사랑하시는가를 보여줌으로 인간을 도덕적으로 감화하기 위한 사건으로 보았다. 우리가 십자가를 바라볼 때 하나님의 지극히 크신 사랑을 보게 되고, 이 사랑이 우리 안에 하나님에 대한 사랑을 불러일으킨다.
하나님의 공의와 심판에 대한 두려움보다 오히려 십자가에서 죽으시는 예수의 모습이 우리 마음을 움직여 참된 회개와 믿음에 이르게 한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죽으심의 목적은 하나님의 공의를 만족시키기 위함이 아니고 하나님의 사랑을 계시하므로 인간의 마음을 감화시키는데 있다.
이 견해는 어느 정도 일리는 있으나, 하나님의 공의의 분명한 요구, 그에 대한 만족으로서의 대속의 필요성을 간과하고 있다.
3) 통치설(The Governmental Theory)
도덕적 감화설에 대항하여 일어난 견해로서, Hugo Grotius(1583-1645)가 대표적으로 이를 주장하였다. 그는 도덕적 감화설과 같이 하나님의 사랑을 지나치게 강조하면 무율법주의와 신앙의 방종을 초래하는 위험성이 있다고 보고, 예수의 죽으심을 사랑의 계시라는 관점보다 오히려 공의의 계시로 보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 견해에 따르면 예수의 죽으심은 하나님의 공의를 만족시키기 위한 대속의 죽음이 아니다. 그 주요목적은 만약 하나님의 법을 범하면 하나님의 공의는 우리에게 어떠한 형벌을 부과하는가를 보여주기 위함이다. 곧 죄를 지으면 하나님의 공의에 의해 이같이 처벌받는다는 본보기를 보여주려던 것이다.
따라서 예수님의 죽으심은 우리 죄를 대속하기 위함이 아니고 우리가 계속 죄짓는 삶에 빠지지 않도록 막아 주는 통제(government) 역할을 하기 위함이다. 예수님의 죽으심은 우리 죄에 대한 모든 형벌을 담당한 것이 아니다. 그렇게 되면, 더 이상 우리는 우리의 죄에 대한 처벌을 받지 않게 되니, 자연히 신앙의 방종에 빠질 수 있다.
이러한 견해들은 나중에 미국의 청교도 신학자들이 이어받아 주장하였다. 하나님 앞에서의 경건을 지나치게 강조하다가 이런 비성경적인 속죄설을 주장하게 된 것이다.
4) 모범설(The Example Theory)
이는 개혁주의자들의 입장에 대항한 16세기 Socinians의 견해이다. 이들의 주장에 따르면 예수의 죽으심은 하나님의 공의에 대한 만족이나 죄에 대한 형벌을 위한 것이 아니다. 그 가치는 믿음과 순종의 길(model)을 영생의 방편으로 보여 주는데 있다. 그의 죽으심은 우리에게 참된 순종과 믿음의 완전한 모형을 제시함으로써 우리를 예수와 같이 순종의 삶을 살도록 인도한다. 이 견해의 저변에는 인간의 전적타락을 부인하고 하나님의 계명을 따를 수 있는 인간의 영적, 도덕적 역량을 인정하는 낙관적인 인간론이 깔려 있다. 예수의 모범을 따르는 삶은 오직 예수의 대속의 피로 인해 인간 본성이 근본적으로 갱신되어야 가능하다.
5) 속죄만족설 (The Satisfaction Theory)
Canterbury의 대감독 Anselm(1033-1109)이 그의 유명한 저서 『Why did God become Man?』에서 확실히 제시한 견해이다. 그는 일부 초대교부들에 의해 주장되고 중세 교회에서 지배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던 사탄배상설을 배격하며 하나님은 사탄을 처벌할 권리 외에 사탄에게 아무런 빚도 없다는 점을 강조하였다. 그는 예수의 대속의 궁극적인 목적은 하나님의 명예(honor)를 회복하기 위한 것으로 보았다. 죄는 이 하나님의 명예, 영광을 더럽히고 훼손한 것이기에, 이 명예를 변호하고 회복하기 위해 예수가 대속의 죽음을 당하셨다는 것이다.
이 속죄설은 앞에서 살펴본 다른 견해들보다 더 성경적 진리에 근접하나, 아직 보완되어야 할 약점을 안고 있다. 예수의 죽으심은 우선적으로 훼손된 영광과 명예를 회복하기 위함보다 하나님의 공의를 만족케 하기 위함으로 보아야 한다.
6) 개혁주의 입장
개혁주의 입장을 요약하여 형벌적 대속(Penal Substitution),또는 대리적 속죄(Vicarious Atonement)라고 한다. 예수는 우리가 받아야 할 죄의 형벌을 받으신 것이다(penal, 형벌적). 예수는 이 형벌을 우리를 대신하여 받으신 것이다(Substitution, 대리적).
Charles Spurgeon : "Substitution is the very marrow of the whole Bible, the essence of the gospel, we ought to saturate all our sermons with it."
요즘 강단은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의미를 강조하는 메시지를 너무 간과하고 있다. 스펄젼은 그렇게 많은 설교를 했는데 거의 대부분의 설교에서 이 형벌적 대속의 의미를 강조하고 있다.
(1) 개혁주의 입장이 강조하는 속죄의 의미
① 희생(Sacrifice)
사53:4 “그의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요1:29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
히 9:6-15에서는 예수님의 속죄사역을 구약의 속죄제사와의 관계 속에서 설명하고 있다. 예수는 영원한 대제사장으로 짐승의 피가 아닌 자기 피로써 하나님 앞에 완전한 속죄를 위한 제사를 단번에 드리셨다(9:28). cf.히13장
바울 사도는 엡5:2에서 예수의 죽음을 향기로운 제물(sacrifice)라고 묘사했다. 고전5:7에서도 “유월절 양 곧 그리스도께서 희생이 되셨느니라”고 하였다.
② Substitution(대리)
루터는 말했다. “축복된 자리바꿈! 예수 그리스도께서 죄 덩어리인 죄인의 자리에 내려오셔서 내 대신 심판과 형벌을 맛보셨다.” 예수는 우리를 위해, 우리를 대신해서, 우리 자리에 내려와서 죽으셨다(Jesus died for our sake or in our behalf.).성경은 우리의 죄를 예수께서 담당하셨다(사53:6,12), 예수가 우리를 위해 죄가 되셨다(고후5:21), 우리를 위해 예수께서 율법의 저주가 되셨다(갈3:13),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다(벧전2:24)고 말한다. 예수의 대속사역과 관련되어 사용되는 전치사 ἀντὶ 나 ὑπέρ은 특별히 이 대리적 성격의 의미를 전달하고 있다(마20:28, 롬 5:6-8 ; 8:32, 갈2:20, 요11:50, 고후 5:15, 딤전 2:6, 히 2:9).
③ Propitiation(화목제물)
롬 3:25-“그의 피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로 세우셨으니” - ἱλὰσκομαι(ἱλὰστὴριον)
예수님의 죽으심은 하나님의 죄에 대한 진노를 진정시키는 화목제물로서의 죽으심이다.
④ Reconciliation(화해)
예수의 죽으심은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원수됨과 단절을 종식시키고 둘 사이의 근본적 화해가 이루어지게 하였다(골 1:20, 엡 1:7, 고후 5:18-19).
(2) 대리속죄설은 역사적으로 등장한 다른 속죄설이 강조하는 바를 올바르게 부각시킬 수 있다. 앞에서 살펴 본 사탄배상설, 도덕적 감화설, 통치설, 모범설, 만족설은 나름대로 일면적 진리를 강조하였으나, 바른 속죄에 대한 견해를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오직 대리속죄설의 관점에서만 이들이 의도한 의미를 바로 강조할 수 있다.
① 예수께서 우리 죄를 위해 죽으심으로 우리가 사탄의 지배에서 자유케 되었다. 예수는 사탄에게 배상하게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공의, 율법의 요구, 대가를 치르기 위해 죽으심으로 우리를 율법의 저주에서 해방하셨고, 그 결과로 우리의 죄와 사탄의 권세에서 자유케 한 것이다.
② 예수께서 우리 죄를 위해 대신 죽으심으로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을 온전히 계시하셨다.
③ 예수께서 우리 죄를 위해 대신 죽으심으로 하나님의 공의를 확실히 보여주셨다. 자기 아들을 율법의 저주를 받아 죽게 하심을 통해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얼마나 죄를 미워하는 공의의 하나님인가를 분명히 계시하셨다.
④ 예수께서 우리 죄를 위해 죽으심으로 하나님께 죽기까지 순종하는 본을 보여주셨다. 그러나 순종의 본이 되기 위해서만 죽으신 것이 아니다. 그런 죽으심으로 우리를 구원할 수 없다. 우선적으로 죄에 대한 대리적 속죄를 위해 죽으셨고, 이것이 또한 우리에게 본이 되는 것이다. 예수의 대리적 속죄로 먼저 우리가 죄에서 자유케 되며 새롭게 변화되어야 예수의 순종의 모범을 따라 살 수 있는 것이다.
⑤ 예수께서 우리 죄를 위해 죽으심으로 죄로 인해 훼손된 하나님의 명예와 영광을 회복하셨다. 하나님께서는 예수의 대속사건을 통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반영하는 하나님의 형상을 인간 안에 회복하시고 온 세상 안에 하나님의 영광이 가득하게 하셨다.
2. 속죄의 범위(The Extent of the Atonement)
particular atonement &universal atonement / limited atonement &unlimited atonement
17C 초의 칼빈주의와 알미니안주의 간에 격렬한 논쟁의 대상이었던 문제이다. 도르트 신조(Canon of Dordt)에서 알미니안주의에 대항하여 제한 속죄설(limited atonement)를 선언한 이후 이 견해가 전통적인 칼빈주의 입장으로 받아들여져 왔다. 이에 대한 논쟁은 아직도 계속되고 있으며 복음주의, 개혁주의 조직신학자들 간에도 이에 대한 견해가 엇갈리고 있다.
1) 두 견해의 정확한 차이는 무엇인가?
- 먼저 양측이 서로 일치하는 점
ⓛ 예수의 대속의 가치와 효력은 무한하여 모든 이를 구원하기에 충분하다. 그 효력이 부족하여 모든 사람이 다 구원받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② 오직 예수를 개인적으로 구주로 받아들이고 믿는 자만이 구원을 얻는다. 보편적 속죄를 주장하는 자들도 대부분 예수는 모든 이를 위해 죽었으나 오직 믿는 자만이 실제 구원을 얻는다고 주장한다. 보편적 속죄를 보편적 구원과 혼동해서는 안 된다.
③ 양측 모두 모든 사람들에게 구원의 복음이 제공되었다는 점을 강조한다(A free offer of Gospel to all men). 복음의 부르심은 보편적이다. 누구든지 주 예수를 믿으면 구원을 받는다.
- 두 입장의 차이는 대속의 목적, 의도(design)에 있다.
곧 그 차이는 ‘예수의 죽으심은 모든 사람을 구원하기 위하심인가 아니면 선택된 자만 구원하기 위하심인가? 또는 예수는 모든 사람을 위해 죽었는가 아니면 오직 선택된 자만 위해 죽었는가?’에 있다.
2) 두 입장에 대한 성경적 근거
① 제한 속죄설(limited atonement)이 근거하는 성경구절
▪예수는 자기 백성을 위해 죽으셨다는 구절 :
마 1:21 그 이름을 예수라 하리니 그는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라
요 10:11, 15선한 목자는 자기 양을 위해 목숨을 버린다.
▪자기 교회를 위해 죽으셨다는 구절 :
행 20:28 그 피로 교회를 사셨다.
요 17:9 (예수님의 중보기도) 내가 기도하는 것은 세상을 위함이 아니요 오직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자를 위해 기도한다고 하심.
R. B. Kuiper는 이 중보기도는 예수의 희생과 하나로 연결되어 있는 제사장적 사역으로 대속사역의 일면이라고 하였다.
▪믿는 우리를 위해 죽으셨다는 구절 :
롬 5:8 우리가 죄인 되었을 때에 우리를 위해 죽으셨다.
롬 5:10 우리가 아직 원수 되었을 때에 우리를 위해 죽으셨다.
고후 5:2 죄를 알지도 못하신 이가 우리를 위해 죄가 되셨다. 엡 1:7, 갈1:4
엡 1:3-4; 2:8 모든 구원과 성화의 축복이 그의 백성, 그의 선택된 백성에게 주어진다고 함
② 보편 속죄설(Unlimited atonement)이 근거하는 성경구절
▪예수께서 세상을 위해 죽으셨다는 구절 :
요 1:28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양
요 3:16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고 세상을 구원하려 하심이니...
고후 5:19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요일 4:14아버지가 아들을 세상의 구주로 보내신 것은...
▪예수가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으셨다는 구절 :
딤전 4:10모든 사람의 구주가 되신다.
딤전 2:6 모든 사람을 위하여 자기를 속전으로 주셨으니
요일 2:2 저는 우리 죄를 위한 화목제물이니 우리만 위할 뿐 아니요 온 세상의 죄를 위하심이라
히 2:9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음을 맛보려 하심이라
3. 논쟁의 핵심은 무엇인가?
제한 속죄설을 주장하는 이들이 가장 중요하게 강조하는 것은 하나님의 목적과 경륜은 항상 효과적이라는 점이다(efficacious). 예수님이 모든 이를 구원하기 위해 죽으셨다면 모든 이가 반드시 구원받아야 한다. 만약 일부만 구원을 받는다면 하나님의 영원한 경륜, 목적이 인간에 의해 좌절되는 결과를 초래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되면, 하나님의 주권이 인간의 자유에 의해 제한된다. 이 견해를 주장하는 이들은 하나님의 주권 사상이 약화되는 것을 염려하였다.
또한 예수님께서 결국 구원에 이르지 못할 사람을 위해 죽으셨다면 하나님의 예견에 문제가 있는 것이 되어 버린다. 그는 예견이 짧아 그것을 내다보지 못하고 헛수고를 하신 셈이 된다. 또한 예수님이 위해 죽은 사람이 구원받지 못한다면 예수의 대속의 효력이 유실되어 버린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예수가 모든 사람을 위해 죽으셨는데 일부만이 구원을 얻는다는 주장은 심각한 논리적 모순을 범하는 것이다. 이런 모순을 피하기 위해서는 결국 예수가 만약 모든 사람을 위해 죽으셨다면 모든 사람이 궁극적으로 구원을 받는다는 보편적 구원설의 입장을 취할 수밖에 없다. 따라서 논리적 일관성이 있기 위해서는 예수님은 오직 택한 자만을 위해 죽으셨다고 보아야 한다.
이에 대해 보편적 속죄설을 선호하는 자들은 예수가 택한 자만을 위해 죽으셨다면 어떻게 모든 사람에게 구원의 은혜가 제공됐다고 볼 수 있겠느냐는 반론을 제기한다. 만약 예수가 죽으심으로 모든 사람의 구원이 가능하게 되지 않았다면 모든 사람에게 구원의 은혜를 제시하는 것은 아주 진실성이 결여된 일종의 속임수(trick)가 아닌가? 성경에 모든 사람을 위해 죽으셨다, 모든 사람이 구원 얻게 하기 위함이라는 말씀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두 입장의 논리적 차이를 요약하면,
Atonement
Objectively accomplished Subjectively applied
예수가 객관적으로 우리에게 주관적으로 성취하신 것 적용되는 것
칼빈주의 for the elected ⇒(반드시 적용. 불가항력적 은혜)
알미니안주의 for all men ⇒(어떤 사람에게는) ×(어떤 사람에게는)
인간의 자유의지에 의해 얼마든지 거부될 수 있다.
① 제한 속죄설(limited atonement)
객관적 성취와 주관적 적용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성취된 것은 꼭 예외 없이 실현된다. 이 둘은 분리될 수 없다. 예수가 대신 죽은 사람이 구원 못 받을 수 없다. 예수가 어떤 이를 위해 죽었으면 그 사람은 반드시 구원받는다. 하나님의 주권적 경륜과 은혜는 인간의 자유에 의해 좌절될 수 없다. 불강항력적 은혜. 이 입장은 우선적으로 하나님의 주권과 선택을 강조하는 관점에서 예수의 대속을 이해하고 있다.
② 보편적 속죄설(unlimited atonement)
객관적 성취와 주관적 적용을 그렇게 무리하게 연결시키는 것이 문제의 근원이다. 이것은 성경적 관점이라기보다 하나님의 선택과 경륜을 지나치게 인과론적 개념으로 이해하려는 시도에서 비롯된 것이다(칼빈의 뒤를 이은 베자가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의 인과론을 근거로 이 속죄설을 정리하려고 하였다. 이에 대한 비판으로 볼 수도 있다). 하나님의 선택이 그렇게 기계적으로 실현되는 것으로 보는 것은 문제이다. 보편 속죄설은 인간의 책임, 자유에 좀 더 역점을 둔 견해라 볼 수 있다.
※ Karl Barth는 이런 문제를 해결하고 두 견해를 어느 정도 중재할 수 있는 입장으로 ontic과 noetic / Objective와 Subjective, 객관적인-주관적인 구원이라는 이원론적인 개념으로 구원을 이해하려 하였다.
4. 결론적 평가
양측이 모두 어느 정도 일리가 있다. 두 입장의 장단점을 보완할 필요가 있다.
① 먼저 제한 속죄설의 기본적 입장을 따라야 한다.
그러나 속죄의 목적에 초점을 맞추기 보다 속죄의 실제적 결과에 더 우선적 관심을 집중시킬 필요가 있다. 예수님의 죽으심의 목적, 경륜이 선택된 사람들만을 위한 것인가 아니면 모든 사람들을 위한 것인가 하는 문제를 가지고 논쟁을 하는 것은 그 해결책을 찾기 힘들다. 이런 논쟁은 결국 선택설과 연결되고 자연히 예지예정이냐, 예정이냐는 논쟁으로 이어지며, 논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게 될 것이다. 목적, 경륜 보다 우선적으로 속죄 사건으로 인해 실제적으로 나타난 열매, 결과에 관심의 초점을 맞추어야할 것이다. 예수가 죽으심으로 그는 실제적으로 믿는 자에 대한 영원한 형벌의 대가를 치르신 것으로 보는 것이 합당하다(He did actually pay the penalty only for the sins of believers). 그의 죽으심으로 오직 믿는 자의 죄에 대한 형벌, 대가를 치르신 것이다. 모든 이의 죄의 대가를 치르신 것으로 볼 수 없다.
만약 주님께서 대신하여 죽으신 이가 구원받지 못하고 지옥에 간다면 예수님께서 그를 대신해서 형벌을 받았는데 또다시 형벌을 받는 것이 된다. 주님께서는 결국 구원받지 못할 사람을 위해 엄청난 희생의 헛수고를 하신 셈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공의에 위배되는 일이다. 하나님께서는 죄인을 이중으로 처벌할 수 없다. 예수께서 그를 대신해서 율법의 저주가 되어 율법을 범한 형벌을 다 치르셨는데 그들이 다시 율법의 저주가 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 이것은 율법의 관점, 하나님의 공의의 관점과 부합되지 않는 견해이다.
또한 주님께서 세상의 구원을 위해 죽으셨다는 성경 말씀은 하나님께서 세상 속의 죄인들을 그들의 죄의 경중에 상관없이, 의로움의 정도에 상관없이, 어떤 조건과 상관없이 보편적으로 구원하시기 위해 죽으셨다는 말씀으로 보아야지, 세상 속의 모든 사람을 예외 없이 구원을 얻게 하기 위해서라는 말씀으로 이해할 수 없다.
‘세상과 화목케 하려 하심이라’는 말씀은 세상에서 한사람도 예외 없이 모든 사람이 하나님과 화목케 된다는 말씀으로 볼 수 없다(이런 구절에서 사용된 전치사 ‘for’는 단순히 “~에 관하여, 대하여” - “concerning”, “with respect to”를 의미한다).
② 제한 속죄설을 보편 속죄설을 주장하는 이들이 지적한 점들을 고려함으로 보완할 필요가 있다.
제한 속죄설이 예수의 구속을 하나님의 경륜, 선택에서 출발하여 인과론적 논리의 틀 속에서 이해하려는 경향을 좀 완화시킬 필요가 있다. 성경적인 관점, 표현, 언어를 최대한 고려해야 한다. 성경은 예수가 그의 백성을 위해 죽으셨다고 말하는 동시에 또한 예수는 모든 사람을 위해 죽으셨다고 말한다. 이 두 표현 모두 복음을 전할 때 사용할 수 있다. 성경이 자주 사용하고 있는 표현을 우리도 사용해야 한다. 복음 전할 때 “예수님은 여러분 모두를 위해, 바로 당신을 위해 죽으셨다”고 외쳐야지, “여러분 중에 오직 선택된 사람만을 위해 죽으셨다”고 전하면 매우 효과 없고 지혜롭지 못한 메시지가 되어버린다. 성경이 사용하는 표현은 복음전파에 아주 적합한 실용적 용어이다.
칼빈주의자들은 간혹 “예수는 오직 택한 자만을 위해서 죽으셨다고 말해야지 모든 사람을 위해 죽으셨다고 말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 말이 자주 잘못 이해되기 쉽다는 것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특별히 평신도들에게, 처음 복음을 듣는 이들에게 오해를 야기할 뿐 아니라, 전도의 효과를 떨어뜨릴 수 있다.
우리는 ‘예수가 모든 사람을 위해 죽으셨다’고 말할 때 ‘예수가 모든 사람의 죄에 대한 형벌을 실제로 받으셨다’는 의미로 그렇게 말할 수는 없다. 그러나 우리는 다른 의미, 곧 ‘예수께서 모든 사람에게 보편적으로 구원의 은혜가 제공되게 하기 위해 죽으셨다’, 혹은 ‘모든 사람에게 복음이 값없이 제공되게 하셨다’는 의미로는 그렇게 말할 수 있다.
“Christ died to actually pay the penalty for the sins of all men.” (×)
“Christ died to make salvation available to all people.” (○)
“Christ died to bring the free offer of the Gospel to all people.” (○)
성경적 표현의 실용적, 목회적 효과를 잘 고려해서 이 문제를 검토해야 한다. 성경은 이 문제를 아주 중요한 교리로 다루고 있지 않다. 너무 이런 문제를 가지고 쓸데없는 소모전을 벌이는 것은 시간과 정력낭비이다. 논리적 표현과 말의 차이로 인해 큰 분쟁을 일으키지 않는 것이 지혜로운 일이다. 제한적 속죄설을 따르는 파와 보편적 속죄설을 따르는 파로 날카롭게 구분하여 서로 대립시키는 것은 합당치 않다. 두 입장이 서로 이해하는 관점과 논리가 다르며 모두 장단점을 가지고 있기에, 어떤 입장만이 완전히 성경적이라고 단정하기보다는 서로의 장단점을 보완할 필요성이 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우선적으로 우리가 볼 때에는 칼빈주의가 주장하는 제한 속죄설이 보다 타당하고 온건한 입장임은 분명하지만 열린 자세가 필요한 것은 부인할 수 없다.
진리를 사수하려는 전투적인 자세는 귀한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우리의 부패성과 결합되어 서로를 허물고 자기를 세우려는 논쟁으로 발전되어서는 안 된다. 그 동안 교회역사 속에 얼마나 많은 분쟁과 싸움이 진리의 이름으로 자행되어 왔던가를 깊이 숙고하며 다시는 그런 전철을 밟지 않도록 우리 모두가 노력해야 할 것이다.
VIII. 예수의 부활
1. 부활 신앙의 근거
1) 성경이 제시한 역사적 증거
빈 무덤에 대해 4복음이 일치된, 상세한 정보를 제공한다. 빈 무덤과 함께 부활사건의 장본인인 주님이 제자들에게 나타나셨다. 복음서와 고전 15:8에 의하면 부활 주님이 10-11번의 나타남 증거(막달라 마리아/다른 여자/엠마오 제자/베드로/도마 없는 제자/포함한 제자/ /바울)
2) 실존적인 증거
초대교인들과 우리는 성령으로 오신 부활의 주님을 실존적으로 만남으로 예수를 믿는다. 부활 신앙의 근거는 성령으로 오신 주님과의 실존적 만남이다. 역사적 증거를 무시하고 실존적 접근을 한 신학자는 불트만. 성령으로 오신 선포된 예수 그리스도만 중요하다. 그러자 제자 중 똑똑한 Kasemann이 나와서 역사적 예수에 대한 새로운 연구를 주장했다. 그가 시작한 이 연구의 관심은 최근에 펜난버그에 의해 발전되고 있다. 이들은 너무나 부활신앙을 역사적인 증거에만 국한시키려는 것이 문제이고, 불트만은 너무 실존적인 접근만 하는 게 문제다.
역사적 사건의 주인공을 실존적으로 만나고 체험하는 것에 근거해야 한다. 부활이 다른 모든 역사적 사건과 다른 것은, 다른 것들은 100% 고증할 수 없다. 역사 속에 사라졌기 때문에. 그러나 우리는 그 주인공이 지금도 살아 계셔서 지금도 찾아오신다는 점이다. 당신이 이루신 역사적 사건에 대한 성경의 기록이 참임을 우리 마음 가운데 확증해 주신다. ‘성령의 내적 증거’이다.
따라서 우리들의 부활신앙의 근거는 ‘성경의 역사적 증거 + 성령의 증거’가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다. 실존적인 증거들은 제자들의 경험, 삶과 인격의 변화, 초대교회의 전승...
2. 부활의 신학적 의미
1) 예수님이 하나님 아들이심의 최종적 확증
펜난버그는 예수님의 아들 되심을 오직 부활에 근거해서 이해. “부활에 와서야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이 확실히 입증되었다”고 함. 그러나 부활이 중요하지만, 하나님 되심에 대한 유일한 입증은 아니다. 삶과 메시지 등 전 생애의 사역이 그가 하나님 아들이심을 여러 차원에서 증거하고 계신다. 부활은 유일한 증거라기보다는 마지막 증거이자 결정적인 증거이다. 최종적인 확증하심이다. 이런 측면에서 펜난버그가 뛰어난 학자지만 비판받아야 한다. 롬 5:1은 이런 맥락에서 이해해야 한다.
2) 하나님께서 예수의 대속의 제사를 받으셨다는 확증
부활은 하나님께서 예수님의 우리의 죄를 위한 피의 제사를 분명히 열납하셨다는 확증이다. 구약의 대제사장이 일년에 1번씩 제사지낼 때 그가 살아나오면 그 제사가 열납되었음을 알았다. 이와 같이 예수께서 부활하신 것은 하나님이 받으셨음의 증거. 우리 죄에 대한 완전한 제사를 하나님이 열납하셨다.
3) 부활은 우리의 칭의의 근거
롬 4:25, “예수는 우리의 범죄함을 위하여 내어준바 되고 우리의 의롭다함을 위하여 살아나셨다” 부활로 인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이 완결된다. 부활은 예수님의 대속 사역의 climax다. 고전 15:17, “그리스도께서 다시 사신 것이 없으면 믿음이 헛되고 여전히 죄 가운데 있다” 따라서 죽으시고 부활하셔야 그것을 근거로 의롭다함을 얻는다. 역사적인 주님이 구속 사역을 끝내시고 성령으로 오셔서 우리 안에 내주하셔야만 구원이 우리 안에 체현되는 것이다. 우리의 의로움은 전적으로 바깥에서부터 오는 것이다(alien righteousness).
역사적으로는 객관적 구원이 2000년 전에 실현되었다. 그러나 부활하신 주님이 성령으로 우리 안에 주관적 실현으로 오셔서 구원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예수를 믿음은 fact를 믿는 것이 아니고, 그분을 마음에 모시고 사는데 있다.
4) 부활은 신자의 새로운 삶의 바탕 : 가장 중요한 포인트. 시험에 나옴
그리스도인의 삶은 예수의 부활에 정초 되어 있다. 바울 서신이 증거하는 신자의 삶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은 삶이다. 신자의 삶은 근본적으로 부활의 삶이다. 죄에 대해서는 죽고 의에 대해서는 다시 살았다. 엡 2:1-6 “허물과 죄로 죽었던 우리를 살리셨다” , 골 3:1, 엡 2:10, 롬 6:4, “우리가 예수를 믿음으로 예수의 죽으심과 함께 연합하여 죄에 대해 죽고 다시 살아” 부활의 능력은 마지막 때만 맛보는 것이 아니고, 연합을 근거로 이 땅위에서도 부활의 종말론적 능력을 맛보고 살 수 있다. 부활의 능력으로만 죄를 이길 수 있는 것이다.
엡 1:19-20, 바울은, “예수를 죽은 자들 가운데 살리신 능력이 ... ” 현재 우리 신자들 안에 강력으로 역사하고 있다. 미리 우리로 하여금 이 땅위에서 맛보게 하신다. 신자의 큰 축복이다. ‘생명의 성령의 능력’ 다시 살리시는 능력이다. 죄를 이기기 위해서는 이 부활의 능력이 꼭~ 필요하다. 왜 작은 죄라도 우리 힘으로 이길 수 없는가? 죄의 배후에는 사단의 세력이 역사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사망의 권세이다. 사망의 권세를 이기는 것은 부활의 권세와 능력밖에 없다. 성령이 우리에게 부여해주시는 능력이 바로 부활의 능력이다. 우리가 이 부활의 능력을 체험하는 방편은 무엇인가? 십자가이다. 십자가의 능력을 체험하지 않고는 부활의 능력을 경험할 수 없다. 십자가에 나의 욕망과 죄를 향하는 자아를 끊임없이 못박아야 한다. 부활의 능력은 나의 죽음을 통해서 역사한다. 그러므로 나는 매일 죽음을 연습해야만 한다. 이중표 목사의 별세 신학......그러나 별세에서 머물면 안 된다. 별세에서 부활로 나가야 한다.
5) 부활은 예수의 새로운 사역의 바탕
부활하신 주님은 성령을 통하여 이 땅위에 우주적, 종말적 갱신 사역을 이루어 가신다. 새로운 존재 방식으로 그의 사역이 우주의 모든 영역 속에 임재하시고 역사하셔서 당신의 구원의 경륜, 목적, 우주적 갱신을 이루어 가신다. 또 이를 위해 우리를 사역자로 부르셨다. 우리 안에 성령님과 그 안에서 부활하신 주님이 함께 내주하신다. 우리는 성령과 동역하면서 우주를 새롭게 하는 사역에 참여하는 영광스러운 직분에 참여하는 사람들이다.
박영돈교수. 작은목자들교회. 전 고려신대원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