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10 성인들과 함께 하는 내적 여정
욕망과 의지의 인간, 야곱 (3)
야곱이 길을 떠나 동방 사람들이 사는 땅, 즉 하란에 도착했다. 그곳에 있는 우물가에서 야곱은 어머니의 오빠인 라반의 딸, 라헬을 만난다. 라헬은 양들에게 물을 먹이기 위해 우물가로 온 것이다. 야곱은 라헬을 만나게 되었을 때 몹시 흥분할 수밖에 없었다. 아버지 이사악이 자기를 보내면서 “너는 아예 가나안 여자에게 장가들지 마라. 너는 바딴아람의 브두엘 외할아버지 댁으로 가거라. 거기에서 라반 아저씨의 딸 하나를 아내로 삼아라...”(창세28,2) 라고 말씀하셨다. 형 에사오가 가나안 여자들과 결혼한 것을 가장 못마땅해 하신 아버지가 아니였던가. 야곱이 유일하게 아버지 맘에 들 수 있는 선택, 그것은 같은 동족과 결혼하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돈도 한 푼 없이 명예도 지위도 아무 것도 없이 도망치듯 떠나온 야곱이지만 그래도 외삼촌은 나를 받아 주리라는 희망으로 그 먼 길을 달려왔기에, 야곱은 반가움과 안도의 기쁨으로 흥분할 수밖에 없었다.
3번 유형의 사람들은 대부분 아주 작은 희망만 있어도 잘 좌절하지 않는다. 이는 불굴의 의지를 가졌다는 면에서는 커다란 장점이 되기도 하지만, 현실을 객관적으로 판단하지 않고 긍정적 측면만 부풀린다는 면에서는 또한 단점이 되기도 한다. 더구나 3번 유형의 사람들은 자기 자신에 대해 지나칠 정도로 긍정적이기에 야곱 역시 멋진 자신을 만나게 되면 아무도 자기를 거절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리고 이제 외삼촌을 만나게 되니 자신의 고생은 다 끝났다고 느꼈을 것이다.
야곱은 선뜻 나서서 우물에서 돌 뚜껑을 굴려내고 외삼촌 라반의 양들에게 물을 먹였다. 그리곤 라헬에게 입 맞추고 소리 내어 울었다. 라헬에게 멋진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겠지만, 그간의 육체적 고생도 고생이려니와 또 마음고생은 얼마나 심했던가! 야곱은 본의 아니게 자신의 약한 모습을 보여주고 만 것이다. 그러나 라헬은 거지꼴을 한 야곱의 입맞춤을 거절하지도 않았거니와 야곱의 울음까지 다 받아준다. 가진 것이라고는 몸뚱이 하나뿐인 자신을 아무 조건 없이 있는 그대로 받아준 것이다. 게다가 몸도 아름답고 용모도 예쁜 라헬이다. 야곱은 그녀와 사랑에 빠지지 않을 수 없었다.
건강치 못한 3번 유형 사람들은 진정한 관계보다는 행복한 관계의 이미지를 원한다. 이들은 자신의 진정한 모습을 사람들이 알게 되면 자신이 얼마나 가치 없는지 알게 될까봐 두려워한다. 그래서 이들은 사람들과의 친밀감보다는, 최선을 다해 더 많은 것을 성취함으로써 다른 사람이 자신에게 만족하도록 만든다. 그러나 야곱은 자신이 가진 것이 아무 것도 없었기에 자신이 성취한 어떤 것도 보여줄 수 없었다. 그야말로 있는 그대로의 보잘 것 없는 자신의 진정한 모습뿐이었다. 그런 그를 라헬은 받아주었던 것이다.
800킬로미터가 넘는 길을 혼자 여행하고 오면서 나락으로 떨어졌던 야곱, 이런 자신을 라헬이 기꺼이 받아주는 체험을 하면서 야곱은 자신과 자신의 삶이 진정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지 않았을까. 건강한 3번 유형의 사람들은 자기중심적이거나 자기도취적인 태도 없이 진정한 자존심을 갖게 된다. 자신의 한계나 능력에 대해 정직한 평가를 하게 되며 나아가 이를 존중하게 되는 것이다. 이들은 자신의 삶을 발전시키려고 노력하게 될 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도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도록 도울 수 있게 된다.
한편 외삼촌인 라반의 반응은 라헬과 전혀 달랐다. 그는 조카가 왔다는 소리에 달려 나와 껴안고 입을 맞추지만, 거지꼴을 한 야곱을 보고는 한달이 지나도록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조카가 왔다고 동네잔치도 열지 않았고, 어머니 리브가의 말을 전했는데도 딸과 결혼시켜 가족 대우를 해주지도 않았다. 오히려 “네가 내 골육이라고 해서 내 일을 거저 해서야 되겠느냐? 품삯을 얼마나 주면 좋겠는지 말해보아라” (29,15) 하고 말한다. 겉으로는 선심 쓰는 척 말하면서 공짜 밥은 먹여줄 수 없으니 그 대가로 일을 하라고 하는 것이다. 완전히 머슴 대우를 하는 데, 세속적으로 볼 때는 실로 김빠지는 일이 아닐 수 없다.
야곱은 자신과 자신의 현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다. 그리고는 “칠 년 동안 외삼촌 일을 해드릴 터이니 작은 따님 라헬을 달라”고 청한다. 3번 유형의 사람들이 자유로워지기 위해서는 다른 사람에게 인정받을 수 있는 일이 아니라 정말로 자신이 필요로 하는 일을 선택해야 한다. 야곱은 처음으로 부모나 다른 사람들의 긍정적인 평가를 위해서가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 진정으로 가치 있는 일에 몰두하게 된다. 자신을 있는 그대로 사랑해준 사람을 얻기 위해 7년의 세월을 인내하는 것이다.
칠년이라는 세월이 며칠 밖에 안 되듯 지나갔지만, 라반은 야곱을 속이고 자신의 첫째 딸 레아를 잠자리에 들게 만든다. 야곱은 다시 라헬을 얻기 위해 또 칠년의 세월을 일을 한다. 자신이 원하는 오직 한사람 라헬을 얻기 위해 14년간 머슴처럼 일하는 것이다. 그러면서 그는 라반에게 인정받으려고도 하지 않는다. 이제 그는 오직 야훼만을 믿고 따르게 되었기 때문이다. 레아나 라헬이 아이를 얻을 때마다 하느님께 감사기도를 드리는 것만 보아도 알 수 있다. 그들의 아버지 라반은 신심이 깊은 사람이 아니었기에 그의 딸들도 당연히 신심이 있을 수가 없다. 그런데도 이들은 자신의 아들들과 자신의 몸종들이 아이를 낳을 때마다 아이들의 이름으로 야훼를 찬양한다. 그만큼 야곱이 오로지 하느님만을 믿는 모습을 보여주었기에 레아와 라헬 역시 믿음을 갖게 된 것이다.
20년 동안이나 라반의 집에 머물면서 야곱은 재산을 모으는 일에 있어서도 그 지방의 유지인 라반의 비위를 맞추려고 하지 않는다. 또 다른 사람이 자신을 성공적으로 이끌어 주기를 바라지도 않는다. 그 결과 다른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생각할까를 걱정하지 않고 자신의 감정을 표현하게 될 줄도 알게 된다. 이는 3번 유형의 사람들이 자신의 시각을 세상에 맞추지 않고 오로지 하느님만을 바라보며 자신의 가면을 벗게 될 때 나타나는 현상이다.
마침내 야곱은, 라반이 순순히 자신을 보내줄 리 없음을 알고 라반이 바쁜 틈을 타서 가나안 땅으로 길을 나선다. 뒤쫓아온 라반은 야곱을 나무라지만, 야곱은 라반을 따라온 일가친척들에게 “이 사람들더러 우리 둘 사이에 누구에게 잘못이 있는지 가리게 합시다. (...) 저로 말하면 낮에는 더위에 허덕였고 밤에는 추위에 떨면서 제대로 눈도 붙이지 못했습니다. (...) 그러나 장인은 저에게 주기로 한 삯을 열 번이나 바꿔치기하였습니다.”하며 항의한다.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속임수를 썼던 야곱이 이제 하느님 앞에서 떳떳한 만큼 정의감에 차서 항변하는 것이다. 3번 유형 사람들이 외부의 요청에 따르지 않고 자기 자신과 대면하여 진실해 질 때 이들은 정직해지며 단순하고 명확해진다.
(창세29,1~31,41) (다음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