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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대 중반부터 널리 일기 시작한 백석의 시와 삶에 대한 관심은 이즈음에 와서도 누그러진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 내놓고 요란한 관심을 들내고 있지는 않지만, 대학에서 중고등학교에 이르는 우리의 문학교육 제도 안에서 그의 자리는 뚜렷하게 자리매겨진 것으로 보인다. 참으로 짧은 기간 안에 이루어진 상찬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밝혀내고, 찾아 들어서야 할 일들이 많다. 그의 가계에 대한 것뿐 아니라, 개인사에서도 더 확인될 일은 널려 있다. 각별히 1940년을 앞뒤로 한 시기, 의 만주, 곧 지나 동북삼성에서 보냈던 나날들에 대한 행적 조사는 꼭 필요한 일이다. 광복 뒤 남쪽으로 내려오지 않고, 평양문단에 머물게 되는 배경과 그 시기의 활동이 한 고리로 맞물려들 가능성이 큰 까닭이다.
게다가 아직까지 발굴되지 않은 작품도 적지 않게 있을 것으로 짐작된다. 까다로운 사람됨에도 불구하고, 언론에 몸담고 있었던 까닭에 그는 다양한 영역의 문화인들과 교류가 잦았다. 작품 발표가 다양한 경로로 이루어졌을 가능성을 점쳐볼 수 있게 하는 대목이다. 이동순, 송준, 박혜숙, 김재용과 같은 이들이 열심히 찾아낸 공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앞으로 백석 작품에 대한 조사와 갈무리는 꾸준하게 이어져야겠다.
이 글에서는 백석의 미발굴된 시를 한 편 소개하려 한다. 시 「머리오리」가 그것이다. 이 작품은 한글시로 알려진 것이 아니다. 처음부터 번역된 꼴로 실려 있어, 원문을 알 수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백석 시의 개성을 잘 보여주는 작품으로 보인다. 비록 온전한 꼴이 아니어서, 아쉬움이 크나, 백석의 작품 가운데 하나로 올려두기에 모자람이 없는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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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한이라는 시인이 있다. 1916년 함경북도 경성군 명천에서 태어났으니, 백석보다는 몇 살 아래인 사람이다. 1937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시가 당선되었고, 1939년에는
『문장』에 정지용의 손을 빌어 다시 추천되기도 했다. 그러나 작품 활동이 그리 잦지는 않았다. 게다가 부왜시를 여럿 남기고, 부왜활동을 죄가가 크다. 그리 크게 눈길을 끌 만한 일을 이룬 바가 없는 셈이다. 그가 일문 번역시집 『雪白集』을 낸 것도, 부왜행각 가운데 하나였다.
『雪白集』은 이승만이 전통한옥을 화려하게 그려 표지그림으로 올리고, 책의 맵씨까지 꾸몄다. 앞머리에 시집을 옮겨 엮은 김종한 자신의 서시가 한 편 실렸고, 끝에 후기까지 붙었다. 시들은 모두 네 마디로 나누어 실었다. '壽之章', '福之章', '富之章', '貴之章'이 그것이다. '수지장'에서는 "正統的인 半島詩人의 自然感"을 가장 잘 보여준 정지용 시인의 자연시들을 모았다. '복지장'에서는 이른바 "半島 農民의 生活과 風俗을 노래한" 작품을 모았다. 그러면서 그러한 작품은 "民族的"인 것이어서 올린 것이 아니라, 이른바 '大東亞共榮圈 建設'을 눈앞에 둔 "皇國의 한 地方으로서 半島의 땅과 自然性의 뿌리"에 닿아 있는 "國民文學"적 작품으로 올린 것이라는 번지레한 흰말을 덛붙였다. 김종한 자신의 작품과 홍사용, 김동환, 주요한, 정지용, 김상용, 백석의 작품이 그것이다.
그리고 '부지장'에서는 이른바 "半島人의 大陸進出의 副産物"로서 "강력한 결의로 帝國의 臨戰食糧問題의 한 쪽을 맡아내고 있는 半島農業"의 재편성과 그 성과를 잘 보여주는 바, 동북삼성 지역의 "새로운 생활"을 노래하고 있는 작품을 모았다. 백석의 작품, 「두보나 이백같이」, 「 唐에서」,「수박씨, 호박씨」, 「安東」과 유치환의 「首」를 실었다. '귀지장'에서는 이른바 "半島의 徵兵制가 결정"된 앞뒤 시기에 "國民詩와 愛國詩"를 어떻게 쓰야 할 것인가를 고민하는 "宿命的인 焦燥感"이 부자연스럽게 드러난 작품들이라 했으니, 그의 부왜의식이 잘 보이는 듯 싶다.
크게 보아 『雪白集』에는 조선의 토착 정서나 소박한 향토성을 드러내고 있으면서 완성도가 높다고 판단한
작품들을 실었다. 따라서 이 책의 발간도 1930년대 중반 이후 두드러졌던 근대문학의 상고적, 향토적 취향의 분위기에서 멀리 벗어나지 않아 보인다. 게다가 그무렵 조선 거주 왜인 문인이나 지식인들 사이에 유행하고 있었던 조선풍토에 대한 애찬과 탐색의 분위기 또한 설백집의 편찬과 맞물려 있다. 김종한은 그 위에다 태평양침략전쟁기 왜로제국주의자들의 이른바 '국책문학', '국민문학'에 이바지하겠다는 공식적인 출판 명분을 하나 더 얹었던 셈이다. 백석의 「머리오리」는 이 책의 '복지장' 부분에 실려 있는 것 가운데서 한 편이다. 김종한은 조선 농민의 토착 정서를 잘 보여주고 있는 것으로 이 작품을 골랐던 셈이다.
번역시를 우리말로 다시 옮기면 아래와 같다.
머리오리
할머니 머리오리
오마니 머리오리
작은오마니 머리오리
빗으로 빗어 말아둔 머리오리를
할머니 오마니 작은오마니
머리오리를 서까래에 나란히 꽂는 까닭은
할머니 머리오리는 안채 서까래에
오마니 머리오리는 뒷문 서까래에
작은오마니 머리오리는 별채 서까래에 꽂는 까닭은
할머니 오마니 작은오마니
이른 봄 산을 넘어 갯장어 장수가 오면
흰장어 먹장어 갯장어와 바꾸어서
정답게 화롯불에 구워먹으려 한다
할머니 오마니 작은오마니
머리오리를 서까래에 꽂는 까닭은 또한 가을
황해도로부터 황화장수가 오면 큰바늘 작은바늘 바늘과 실을 사고
추월옥색 진분홍 연분홍 가루분을 사려고 한다
깊은 일본어 지식에 바탕을 둔 번역이나, 섬세한 문법적 고려는 내 힘을 벗어난 일이다. 몇 가지 옮기는 데 유의했던 대강만을 보인다. 먼저 시의 제목은 '머리오리'로 삼았다. 「髮の毛」의 번역이다. 우리말로 바로 옮기면 '머리카락'이다. 그런데 단순한 머리카락이 아니고, 내다팔기 위해 빗어 모아둔 머리카락, 곧 달비다. 백석의 다른 시 속에서 달비란 말이 보이지 않는다. 머리카락이라는 말도 없다. 다만 「女僧」에서 '머리오리'가 보인다.
산꿩도 설게 울은 슬픈 날이 있었다
산절의 마당귀에 여인의 머리오리가 눈물방울과 같이 떨어진 날이 있었다
가 그것이다. 물론 위의 시에서 '머리오리'는 머리카락을 총칭해서 부른 말이라기보다는 차례차례 떨어져내리는 머리의 묶음을 일컫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할머니와 어머니, 그리고 작은어머니의 빗어둔 머리카락을 표현하기 위한 말로서는 '머리카락'이라는 말보다는 '머리오리'가 더 어울린다. 게다가 '카락'이라는 센소리보다는 '오리'라는 부드럽고 밝은 소리가 이 시의 따뜻한 분위기에 걸맞다. 따라서 제목을 '머리카락'이라 하지 않고, '머리오리'로 확정했다.
일역시를 옮기는 일에서 다음으로 문제가 된 것이 부름말이다. '할머니', '어머니', '작은어머니' 그리고 '행상인이 그것이다. '할머니'와 같은 마로 백석의 시에서는 '할미'(「古夜」), 또는 '큰마니'(「가즈랑집」)가 쓰인다. 그 가운데서 빈도가 가장 높은 말이 '할머니'다. '할미'나 '큰마니'의 경우는 자신의 친할머니를 일컫지 않고, 외할머니나 일반의 할머니를 통칭할 때 주로 쓰이는 것을 볼 수 있다. 따라서 자신의 친할머니를 일컫는 이 시의 경우에는 할머니로 쓰는 것이 자연스럽다.
'어머니'의 경우는 '엄마'(「수라」), '어마니'(「여우난 곬족」 ), '오마니'(「넘언집 범같은 노큰마니」), '엄매'(「童尿賦」), '어머니'(「흰 바람벽이 있어」), ' '어미'(「모닥불」)들이 그의 시에서 두루 쓰이고 있다. 이 시에서는 지역말을 살려 '어머니'보다는 '오마니'로 옮겼다. 뒤의 '작은오마니'와도 연결이 자연스러운 까닭이다.
그 다음에 문제가 되는 부름말은 '작은오마니'다. 이 말은 원문에 'をばさん'로 되어 있다. 흔히 '아주머니'로 옮길 수 있는 말이다. 이밖에도 '고모'나 '이모', '백모', '숙모'의 뜻을 아울러 지닌 말이다. 특히 그 가운데서 '고모'는 백석 시 속에서 아주 중요한 친족 구성원의 한 사람으로 들앉아 있다. 확대가족 구성원 가운데서 고모는 삼촌, 사촌들과 더불어 그들의 즐겁고 화해로운 풍경을 되살리는 데 중요
한 동기가 되고 있다. 따라서 이 시의 원문에서도 '고모'나 '고무'로 되어 있을 확률이 높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의 가락감을 드높이기 위해 '작은오마니'로 옮겼다. 이 시가 거듭 점증하며 되풀이되는 낱말과 말마디를 빌어 시의 분위기를 강화시키고 있는 점을 고려한 까닭이다. 평북을 비롯한 여러 지역말에서 숙모를 일컫지 않고, 아버지의 소실이나 첩을 일컫는 말로 '작은어머니'가 쓰이기도 하지만, 이 시에서는 물론 숙모를 뜻한다.
그리고 '갯장어 장수'와 '황화장수'가 문제 된다. '갯장어 장수'는 그리 옮기는 데 별 다른 대안이 있을 것 같지 않다. 그러나 본문에 김종한이 '行商人'으로 옮겨놓은 '황화장수'의 경우는 우리 말로 되바꾸려 할 때는 다음 네 가지가 모두 가능하다. 첫째, '도붓장수'다. 둘째, '행상인'을 그대로 쓴다. 세째, '등짐장수'로 옮기는 경우다. 네째, '황화장수'다다. 이 가운데서 첫째는 왜말에 뿌리를 둔 말이라는 점에서 굳이 따를 필요가 없겠다. 둘째 행상인의 경우는 너무 딱딱하며, 앞의 시줄에 있는 '갯장어 장수'와 흐름을 잇기가 부자연스럽다. 따라서 세째와 네째의 경우가 가능하겠는데, '등짐장수'보다는 '황화장수'라는 한잣말이 더 알맞아 보인다. '등짐장수'는 토박이말이 되어 부드럽고 좋으나, 너무 남성적인 느낌이 강하다. 이어진 '대침 소침'이라는 여성적 기물의 분위기와도 맞선다. 따라서 갖가지 잡스런 일상 잡화를 옮겨다니며 파는 '황화장수'라는 말이 좋겠다. 앞의 '황해도'와 이어져 말맛을 살리는 쪽일 뿐 아니라, '황화장사'로 이미 「통영」에서 한 차례 쓰이기도 한 까닭이다.
집집이 아이만한 피도 안 간 대구를 말리는 곳
황화장사 영감이 일본말도 잘도 하는 곳
처녀들은 모두 어장주한테 시집을 가고 싶어 한다는 곳
그리고 물건의 이름 또한 옮기는 데 주저스러운 몇 부분이 있다. 먼저 '海鰻'이 그것이다. '흰 海鰻'은 '흰 갯장어'로 옮기면 될 터이나, '검은 海鰻'이 문제 된다. '검은 갯장어'는 '먹장어'를 뜻하는 까닭이다. 따라서 이 부분은 "흰 장어 먹장어 갯장어 장수와"로 옮겨 '갯'이라는 접두어를 거듭 쓰지 않으면서도 이 시 속의 장어가 바다장어, 곧 '갯장어'임을 알릴 수 있도록 했다.
다음으로 '大針小針'이다. 이 말을 "큰바늘 작은바늘"로 바꾸기보다는 그냥 두는 것도 좋을 듯 싶다. 그러나 앞의 '행상인'을 '등짐장수'가 아니라 한잣말에 뿌리를 둔 '황화장수'로 옮겼고, 그 다음 시줄에서 한잣말이 시의 앞에서보다 갑자기 많이 쓰이고 있어, 시의 무게가 뒤쪽으로 너무 쏠린다. 그렇지 않아도 뒷부분에서는 시줄이 길어지고 숨길이 늘어지고 있다. 따라서 무게를 조금 덜어내기 위해 "큰바늘 작은바늘"로 옮겼다.
맨 마지막 시줄 "秋月玉色の 唐紅の 朱鷺色の染粉"도 문제다. '秋月玉色'은 '가을달 옥빛'이나 "추월옥빛"으로 옮기기보다는 그대로 쓰는 것이 자연스러워 보인다. 그래서 바로 뒤의 "진분홍 연분홍"과 걸맞는 소리결로 이어지도록 했다. '染粉'은 바로 옮기면 '가루물감'이 된다. 그러나 이 시에 담겨 있는 인물형들이 가정에서 바깥 세계 사람을 기다리는 일에 익숙한 여자들이라는 점에 초점을 두어 볼 때, 바깥 세계에서 가지고 들어오는 것으로, "큰바늘 작은바늘"과 마찬가지로 단순한 가루물감이라기보다는 여성용품인 '가루분'이 알맞을 것으로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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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록 옮긴시이긴 하지만, 백석의 「머리오리」는 그의 특성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작품이다. 시의 주도동기가 무엇보다 백석이 득의한 바 있는 자잘한 나날 속에 향토적 사물이다. 흔히 지나치기 쉬운 그러한 사물은 패티시즘에까지 이른 백석의 눈길과 손길에 힘입어 우리의 토착 체험을 환기시켜주는 주요한 몫을 다한다. 때로는 부엌의 갖가지 기물이, 때로는 갓마련한 음식물이, 때로는 너겁이나 허접쓰레기와 같은 사물들이 서로 서로를 환하게 끌어당기며 백석다운 구체적이고도 따뜻한 자장공간을 마련해준다.
이 시에서는 말할이는 집안 여자들이 각기 머물고 있는 장소를 중심으로 그들이 공통적으로 하루하루 빚어내린 머리카락을 모아, 파는 풍속에다 촛점을 두었다. 그리고 그 일에 얽힌 추억을 흥겹게 좇아가고 있다. '화롯불처럼 정답게 한 집안에서 살아가고 있는 대가족 여성들의 정겨운 풍속을 시인은 반복되고 병렬된 말에다 적극적으로 담아내고 있다. "이른 봄 산을 넘어" 가까운 바닷가에서 오는 "갯장어 장수"나, "황해도로부터 오는 황화장수"가 물고 온 바깥 지역의 즐겁고 낯선 풍문조차 내 고향, 우리 집의 추억을 완성하는 소도구로 쓰인다. 그들 모두 우리집이라는 화해로운 중심공간 안으로 쉬임없이 들어와 새롭게 되살아난다.
"할머니 머리오리/오마니 머리오리/작은오마니 머리오리"가 푸르른 삼밭의 바람소리처럼 시원한 향수를 불러일으키면, 시인은 서울의 소란한 골목 어느 길에서 문득 행복한 미소를 머금었으리라. 이 시의 말법은 단순하다. 고향의 집안 여자들이 머리카락을 버리지 않고 집안 은밀한 곳에 모아두는 까닭을 거듭 묻고, 그에 답하는 말형식을 빌고 있을 뿐이다. 그러나 쓰잘 데 없는 "할머니 오마니 작은오마니"의 머리카락을 "화롯불"가에서 이루는 정겨운 친족 삶의 실체로, 빛빛깔의 "가루분"처럼 다채롭고 아름다운 행복으로 되살려내는 놀라운 요술을 이 시는 보여준다. 제국주의 근대의 폭압 아래서 찢어지고 망가지고,
억압되었던 우리들의 마음자리, 든든한 삶의 장소를 생생하게 되살려주었던 그의 요술을 이 시 또한 예외없이 확인시켜 준 셈이다.
비록 그 원문을 알 수는 없으나 이 시는 그 대강의 분위기만으로도 여느 것에 뒤떨어지지 않는 훌륭한 작품으로 여겨진다. 아직 발굴되고 있지 않은 백석의 다른 글들과 함께 이 시의 원문도 곧 제 모습을 찾아 널리 사랑받게 되기를 바란다. 김종한이 후기에서 『雪白集』에 실린 번역시들은 한글로 씌어진 것에서 가져왔다고 한 바 있다. 시의 원문이 어느 구석 매체 속에서 발견될 가능성을 점쳐보게 하는 말이다.
시 「머리오리」를 빌어 새삼스럽게 평안북도 수원백씨 정주 백촌, 아름다운 백석의 고향 풍경을 떠올려본다.
흙꽃 이는 봄의 무연한 벌을
輕便鐵道가 노새의 맘을 먹고 지나간다
멀리 바다가 뵈이는
假停車場도 없는 벌판에서
차는 머물고
젊은 새악시 둘이 나린다
- 「曠原」
"젊은 새악시" 둘은 '할머니'의 멀리 사는 손녀였을까, 백석의 고모였을까? 그들의 딸의 딸들은 지금 어디서 어떤 삶을 매만지며 살아가고 있을까?
첫댓글 좋은 게시물이네요. 스크랩 해갈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