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일 내 아이가 눈이 보이지 않는다면, 당신이라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운명을 받아들여 극복해 가기 위해, 중요한 것이란 무엇일까요-------
인생에 헤매이고 괴로워하고 있을 때야말로, 아셨으면 합니다.
곤경 속에 한 줄기의 빛이 내리 비추고 있음을.
이러한 괴로움을 이겨내고, 마음의 눈을 떠서 행복을 발견해 간 한 여성의 체험을 전합니다.
<금색으로 빛나는 미래를 만들기 위한 불법진리의 말씀>
(1)"「인생은 한권의 문제집이다」라는 말로 표현되듯이, 인간에게는 각자 그 혼에 어울리는 시련이 주어집니다. 그 시련을 어떻게 빠져 나가는가가 그 사람의 진가(眞價), 가치를 결정하는 것입니다" (<부동심>에서)
(2)"선천성 병이 있거나 몸에 장애가 있거나 하는 사람은 이것에 대해 푸념만 하고 있어서는 안됩니다. 이것은 그 사람을 더욱 더 진화시키고 발전시키기 위한 방편으로서 나타나 있는 것입니다." (<영원의 법>에서)
(3)「자식은 육체적으로는 부모와 흡사해도, 혼으로서는 다르다」라는 관점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혼수행을 위해 금세에서는 우연히 자기가 부모노릇을 하고 있는 것이다」라는 사고방식이 중요합니다(<행복해질 수 없는 증후군>에서)
(4)"혼수행의 장(場)을 부여받고 있다고 하는 위대한 부처의 자비에 대한 감사의 마음을 가지고, 그 눈으로 보았을 때에 모든 것은 또 비 개인 세계처럼 태양의 빛에 넘치고 무지개가 떠 있는 것처럼 보여 오는 것입니다. (ꡔ침묵의 불타ꡕ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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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맹(全盲)인 딸이 가르쳐준 마음의 눈으로 보는,
빛으로 가득 찬 이 세계> ------라무 明子씨(미국 플로리다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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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무 아키코씨는 순풍에 돛단 인생을 살고 있던 여성이었다. 유복한 환경에서 자라 대학졸업 후에는 무역회사의 캐리어 우먼으로. 20대 후반에 미국에 유학하여 현재의 남편인 에릭씨를 만나 결혼. 그 무렵 아키꼬씨는 더 큰 성공의 인생을 꿈꾸고 있었다. 그러나 운명은 뜻밖의 전기를 그녀에게 가져다줍니다. 아키꼬씨가 “마음의 눈”을 열기 위해서.
* <뭐야? 눈은 어디 있지?>
의사는 막 태어난 딸의 얼굴을 주시하며 이리 저리 둘러 보았습니다. 지금부터 13년 전, 당시 살고 있던 도쿄에서 둘째딸 미셸이 태어났을 때의 일입니다. 내가 딸을 안으려고 하자 간호사가 딸을 신생아실로. 다음 날, 몇 번 신생아실로 갔지만 딸은 눈을 뜨지 않습니다.
그날 밤, 미셸의 눈이 보이지 않아 손더듬으로 방황하고 있는“기분 나쁜 꿈”을 꾸었습니다. 다음 날 저녁, 의사한테서 이런 말을 들었습니다.
딸은 무안구(無眼球)라고 해서 선천적으로 두 눈이 결손되어 있습니다.....」
입원중에는 필사적으로 동요를 억제할 수 있었지만, 퇴원해서 집에 돌아오자마자 불안이 밀려 왔습니다.
그 애는 “눈이 보이지 않아도 분발하겠습니다”라고 신과 약속하고 태어난 것이야“라고 크리스천인 남편은 격려해 주었습니다.
그래도 당시 아직 신앙을 갖고 있지 않았던 나에게는 그 애의 장래가 걱정되어 견딜 수 없었습니다. 안구가 없으면 얼굴 주위의 뼈가 발달하지 못하기 때문에, 생후 6개월에 의안(義眼)을 넣었습니다. 그러나 의안은 빠지기가 쉬워서, 나는 딸의 얼굴이 부자연스럽게 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걱정으로 온종일 빠져나온 의안을 찾아 다녔습니다. 사흘간을 계속 마당을 찾아다니자 남편과 딸한테 이상해졌나 하는 걱정도 들은 적이 있었습니다.
미셸이 세살이 되자 일반인과 같은 보통 유치원에 다니게 했습니다. 사회적으로 성공한 시각장애자의 책을 읽고, 「미셸도 노력하면 변호사도 될 수 있다」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나이 많은 아이들을 따라 다니면서 다른 아이들과 차이가 나게 되었습니다. 눈이 보이지 않는 딸은 선생의 설명만으로는 상황을 이해할 수 없어서, 집단생활이나 놀이를 따라갈 수 없는 일이 늘어갔던 것입니다.
집에서 여러 모로 가르쳐도 다른 아이처럼은 할 수 없습니다. 「싫어!」 하고 울면서 유치원 가는 것을 싫어합니다. 그런 딸을 보는 것이 괴로워서, 「이렇게까지 싫다면 초등학교는 맹학교가 좋을지도 모르겠다.......」라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생각 끝에 남편의 모국이기도 하고, 장애자도 성공하는 길이 충분히 열려 있는 미국에서 교육을 받게 하기로 하였습니다.
그 중에서도 플로리다 주립맹학교가 설비도 주위의 환경도 제일 좋았기 때문에 딸의 교육을 위해 일가가 플로리다로 이주했습니다.
* <딸에게 "안돼"라고 계속 말하며>
플로리다에서의 생활이 시작되자 마자, 미셸은 「학교가 싫어!」라고 울었습니다. 말이 안 통하고 모르는 사람뿐인 환경은 그 애에게 있어 공포밖에 없었던 것 같습니다.
「학교가 싫다고 하면 안돼!」라고 야단치자, 마지못해 등교했습니다. 그러나 학교에서 영어를 한 마디도 하지 않고, 친구를 사귀려고도 하지 않습니다. 수업도 겨우 따라가는 정도였습니다.
이대로 진학할 수 없게 되고, 취직도 못하게 되고, 결혼도 할 수 없게 되면 어떻게 하지.......
「친구를 사귀지 않으면 안돼」 「공부하지 않으면 안돼」라고 더욱 더 엄하게 주의를 계속 주었습니다.
"신체적 핸디, 정신적 핸디, 능력적 핸디 등,
여러 가지 것들이 있겠지만,
거기에 그 사람의 금세의 인생에 있어서의
목적과 사명이 밝혀져 있습니다." (<영원의 법>에서)
남편도 정규직에 취직을 못하고, 구조원의 아르바이트를 시작했습니다. 2년째에 저금도 바닥나고, 3년째에 들어서도 취직자리는 나지 않습니다.
「반드시 어떻게든 될 거야」라고 낙관적인 남편에게, 「무슨 그런 무사태평한 말을 하고 있어」라고 고함을 질렀습니다.
아침에 눈을 뜨자 몸이 무겁고, 「아아, 또 하루가 시작되는구나.....」라고 아무것도 할 의욕이 일어나질 않습니다. 심한 “우울상태”에 빠져 들었습니다.
보다 못한 남편이 「일본에서 천천히 쉬다 오면 돼」라고 권해 주었습니다. 친정아버지도 걱정하며 항공권을 보내 주었습니다.
정신적으로 기진맥진해진 나는 3년만에 일본으로 돌아왔던 것입니다. 99년 초여름의 일이었습니다.
*<신앙과의 만남>
나를 신앙의 길로 이끌어준 것은 여동생이었습니다. 일본에 도착한 그 날부터 "어쨌든 굉장한 것이야!" 라며 행복의 과학의 훌륭함을 열심히 이야기하기 시작했습니다.
동생의 친구도 집에 오셔서 「부처를 믿고, 나날이 사랑을 주면서 노력해 가면 부처님은 반드시 길을 열어주실 거에요」라고 하셨습니다. 그 부드럽고 힘찬 말에 마음이 가벼워져서 삼귀서원을 했습니다.
플로리다에 돌아오자 근처에 신자인 분이 살고 있어서, 잇달아 행복의 과학의 서적이나 강연비디오를 빌려주셨습니다. 나는 매일 비디오를 배청하고 내용을 노트에 적으면서 배워 갔습니다. 점점 마음이 밝아져서 나날이 즐거워지고, 우울상태에서 벗어났습니다.
그러나 딸이 학교를 싫어하는 것은 변함이 없어서 어떻게 대하면 좋을지 생각하다 지쳐 버렸습니다. 그런 때, 월간 <전도>에서 등교거부의 체험담을 읽고 퍼뜩 깨달았습니다. 어머니가 자식에게 자기의 이상상(理想像)을 강요하여, 자식을 소유물처럼 생각하고 있었던 데에서 “자신의 모습”을 보았던 것입니다.
친구를 사귀지 않으면 안돼, 학교에 가지 않으면 안돼......
딸의 장래를 걱정한 나머지, 자꾸자꾸 그 애에게 부담을 지워 갔습니다. 얼마나 힘들었을까.......미안함이 솟구쳤습니다. 「미셸의 생각도 듣지 않고, 지금까지 안된다는 말만 하고, 정말로 미안했어. 이제부터는 엄마도 협력할 테니까 같이 힘내자」
밤에 잠자는 딸의 베갯머리에서 말을 걸었습니다. 눈을 뜬 딸은 「겨우 이해해 주었다」는 듯이 안심하고 잠들었습니다.
* <“마음의 눈을 뜨다”>
2001년 5월, 미셸이 다니는 맹학교에서 봄 콘서트가 열렸습니다.
미셸은 8살부터 배운 바이올린으로 주선율(主旋律)을 맡습니다. 곡목은 드보르작의 유머레스크. 가볍고 즐거워서 딸이 제일 좋아하는 곡입니다.
그날 밤, 학교 강당에는 100명 정도의 청중이 모였습니다. 미셸은 긴장하여 굳은 표정이었습니다.
하얀 여름드레스를 입은 미셸은 자원봉사자인 여성과 함께 무대에 오르자 마자, 표정이 바뀌어 갔습니다. 너무나 기쁜 듯이 방긋방긋 웃으면서 바이올린을 연주하기 시작했습니다.
느긋한 템포로 편안한 선율이 연주되어 갑니다. 전신전령을 담아 연주하는 것이 전해져 옵니다. 애교 넘치는, 의지가 담긴 힘찬 소리였습니다.
이 아이는 이렇게 에너지 넘치는 강한 혼이었다....... 나는 비로소 딸의 진정한 모습을 본 듯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미셸은 금세에 눈이 보이지 않는 인생을 통해서 사람들에게 행복이나 용기나 희망을 주기 위해 태어난 것이다.......
예전에 읽었던 <헬렌켈러의 영언>에서, 헬렌켈러가 삼중고(三重苦)의 운명을 「신의 사랑」으로 받아들이고, 혼의 빛남으로 사람들에게 빛을 전해주었던 것이 생각났습니다.
무대에 선 딸을 보면서 인생도 하나의 무대라고 느꼈습니다. 지상에서의 인생드라마를 보고 있는 아득한 눈. 항상 우리를 따뜻이 지켜보시는 존재, 주 엘칸타아레의 시선을 생생하게 느꼈던 순간이었습니다.
연주가 끝나고 청중의 박수가 쏟아졌습니다. 꽃다발을 들고 무대를 내려온 딸에게 나나 남편, 큰딸도 달려가서 <멋졌어!>라고 축복했습니다.
교장선생은 「연주를 듣는 양친의 얼굴이야말로 정말로 행복하신 것 같았습니다. 정말로 따님은 자랑스러워요」라고 우리 부부에게 악수를 청하셨습니다.
미셸은 여기저기서 「아주 잘 했어!」라고 말을 걸어 왔습니다. 그 애는 기쁜 듯이 <땡큐>라고 하면서 날아갈 듯이 걸어갔습니다.
* <모든 것이 빛나는 세계>
푸른 하늘에 떠다니는 하얀 구름, 들에 핀 작은 꽃, 가족의 단란함, 내리 쏟아지는 태양의 빛....
그 날 이래, 나의 마음은 신기하게 평화로움에 감싸였습니다. 부처가 만드신 이 세계의 있는 그대로의 아름다움을 보고 있는 느낌입니다. 이 행복은 미셸의 존재 자체가 나에게 부여해 준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미셸은 지금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요, 인생의 사명에 대한 이야기를 엄마한테 듣고나서, 하느님을 계속 믿고 있어요. 하느님이 사랑해 주신다고 느껴요. 하느님이 사랑해 주셔서 정말 기뻐요」
미셸이 찬란히 내리비치는 <주의 사랑>을 감지할 수 있는 일이 지금의 나에게는 무엇보다도 기쁩니다.
나는 자녀양육 체험을 싣는 홈페이지에 「마음의 눈」이라는 이름을 붙였습니다. 신앙을 통해서 이 세계를 “마음의 눈”으로 보는 일의 기쁨을 전하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이제부터 딸과 함께 마음의 눈을 닦아서 진정한 세계의 빛남을 계속 보아가려고 합니다. 주의 강림에 진심으로 감사 드립니다.
* <남편 에릭씨>
아키코는 삼귀서원하고나서, 「지금까지 심한 말을 해서 미안해요. 그래도 사랑하고 있어요. 고마워요」라고 말해 주었습니다. 그녀는 날마다 온화하고 겸허해져서, 기쁨에 넘쳤습니다. 나도 삼귀서원하여 사랑과 용서를 보다 깊게 배우고 행복해졌습니다.
* <큰딸 스테파니>
어머니는 나에게 항상 좋은 어드바이스를 해 줍니다. 마음을 온화하게 유지하는 일, 남에게 부드럽게 하는 일의 소중함도 가르쳐 주었습니다.
* <둘째딸 미셸(13세)>
나는 눈이 보이지 않지만, 어머니한테서 전생윤회의 이야기를 듣고 분발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장래는 바이올리니스트가 되어 연주로 모두를 행복하게 하고 싶습니다.
* "그 운명 속에서 신의 자녀로서의 사명을 완수하라.
찬란히 빛나라. 빛의 자녀로서 빛나라" 라는 것이 신의 마음이었던 것입니다. (<오오카와 류우호우 영언전집 제14권> 헬렌켈러의 영언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