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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육사의 삶과 문학
-손병희(안동대 국어국문학과 교수)/ 김길영 옮김
대구와 이육사
이육사의 생애는 일제 강점기 우리 겨레의 수난과 항쟁의 역사와 겹친다. 육사가 태어난 때는 대한민국의 외교권을 강탈당한 을사늑약이 체결되던 한 해 전이었고, 육사가 순국한 이듬해에 광복을 맞았다.
일제 강점기와 같은 어두운 시대를 살아온 것은 고통이었으나, 그 고통에 압도당하고 패배한 것은 아니다. 육사와 같이 고통을 뛰어넘어 새로운 역사를 창조하는 정신도 있기 때문이다. 이육사는 참혹한 식민지 시대에 항일의 칼날을 세우고금강심에서 우러나오는 시를 쓰고자 했다. 어두울수록 별이 빛나듯이 그의 단련된 정신과 굳건한 의지는 언제나 새삼스런 감동을 불러일으킨다.
육사는 안동에서 태어났지만, 1920년 이후 십대 후반부터 이십대 후반까지 대구에서 활동했다. 그의 일생을 일관하는 항일 투쟁과 문필활동이 이 시기에 모색되고 구체화 되었다. 대구 시절 육사는 결혼을 하고 일본과 중국에 유학했으며 대구청년동맹 간부로서, 언론인으로 활약하면서 시를 투고했다. 또한 장진홍(張鎭弘)의사의 조선은행 대구지점 폭파 의거에 연루되어 1년7개월 옥고를 치른 후 여러 차례 피검되고 풀려났다.
그런 점에서 육사에게 대구는 신념의 시인이자 논객이며 항일투쟁가였으며 억압적인 현실 속에서 자신의 정신과 의지를 단련한 터전이 대구였다. 따라서 이후 전개된 그의 삶은 대구시절의 집약과 총화라고 할 수 있다. 육사의 실질적인 대구생활은 1931년에 끝났다.
그해 육사는 중국으로 가서 이듬해 의열단장 김원봉(金元鳳)이 항일무장투쟁을 위해 설립한 <조선혁명정치군사간부학교>에 입교하고, 졸업 후 귀국하여 주로 서울에서 활동하면서 시와 시사평론을 비롯한 다양한 갈래의 글을 발표했다.
내면화된 전통과 균형감각
육사는 1904년 4월 4일 안동시 도산면 원촌리 881번지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李家鎬는 퇴계 이황의 13대 손이며 그의 어머니 김해 허씨는 허형(凡山 許蘅)의 딸이다. 육사의 아버지 치헌공은 경술국치에 이르러 거느린 비복들을 풀어준 다음 그 문서를 불태웠다고 하며 예안에 세워진 신교육기관 보문의숙의 초대 숙장에 추대되었다고 한다.
또한 경술국치를 당하여 목숨을 끊은 이만도(李晩燾), 이만규(李晩煃), 이중언(李中彦) 등은 육사의 근족이었으며 외조부 허형을 비롯한 외족으로서 방산 허훈(許薰), 왕산 허위(許蔿), 성산 허노(許魯) 등은 의병활동 및 항일에 열렬한 분이었다. 또한 석주 이상룡(임시정부 국무령)과는 사가(査家)간이었다.
육사는 원기源祺, 원록源祿(活), 원일源一, 원조源朝, 원창源昌, 원홍源洪 등 육형제의 둘째였는데 막내인 원홍은 19세에 미성으로 일찍 세상을 떠났다. 그의 동생 이원조는 당내에 널리 알려진 비평가였으나 해방 후 대한민국 정부수립 직전 월북한 까닭에 육사와 형제간이라는 사실이 세상에 크게 알려지지 않았다. 1990년에 이원조의 비평집이 그의 장조카인 이동영 교수(전 부산대)에 의해 책으로 출간되었다.
육사의 첫 이름은 源祿이며 두 번째 이름은 源三이었으며 活이라는 이름도 사용했다. 이활이라는 필명을 사용하기도 했다. 1930년대 중반 이후에는 이육사(二六四, 戮史, 肉瀉(生) 등으로 쓰기도 했으나 그것은 예외적으로 한다.)로 통일했다. 특히 시, 소설 수필, 평문 등 창작문학을 발표할 때는 대체로 이육사로 사용했다. 사회, 정치적 주제를 다룬 평문들을 발표할 때는 李活이란 이름을 사용했다.
육사는 여섯 살 때 소학을 배웠고, 그 후 십 여세까지 집안 소년들과 한학을 했다. 이어서 고향의 도산공립보통학교를 다녔다. 유년시절의 교육에 대해, 육사는 ‘학교교육 이전의 조선의 교육사의 일부’라고 하면서 자신의 수필 <은하수>에서 그 일부 모습을 다음과 같이 그렸다.
가령 말하자면 내 나이 칠팔 세쯤 되었을 때 여름이 되면 낮으로 어느 날이나 오전 열 시쯤이나 열한 시 경엔 집안 소년들과 함께 모여서 글을 짓는 것이 일과였다. 물론 글을 짓는다 해도 그것이 경국문학(經國文學)도 아니고 오언고풍(五言古風)이나 좀도둑을 해보는 것이었지만, 그래도 그 때는 그것만 잘하면 하는 생각에 당당히 열심을 가졌던 모양이었다.
그래서 글을 지으면 오후 세시쯤 되어서 어른들이 모여 노시는 정자나무 밑이나 공청에 가서 고르고, 거기서 장원을 얻어하면 요즘 시 한 편이나 소설 한 편을 써서 발표한 뒤에 비평가의 월평 등류에서 이러니 저러니 하는 것과는 달라서 그곳에서 좌상에 모인 분들이 불언 중 모두 비평위원들이 되는 것이었고(아래 줄임)
근대 신교육 이전에 이루어진 家學은, 육사에게 전통과 주체성을 내면화시켰을 것이다. 또한 많은 항일지사를 배출한 친가와 외가의 의롭고 매운 가풍 역시 육사의 가치관과 의식을 형성하는데 큰 영향을 끼쳤을 것이다.
육사는 새로운 문명과 사상을 받아들이는 데도 적극적이었다. 광범한 책읽기와 일본, 중국 유학은 근대의 지식과 사상을 체계적으로 흡수하기 위한 것이었다. 고향의 도산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한 후 영천 백학학원을 거쳐 일본의 동경정칙예비교(東京正則豫備校), 일본대학 문과 전문부, 그리고 북경의 중국대학에서 공부한 것은 그러한 노력의 일부이다. 그러나 일본과 중국 유학은 여러 가지 사정으로 단기간에 그치고 말았다.
새로운 지식과 문학에 대한 육사의 욕망은 그의 폭넓은 책읽기에서 간접적으로 엿볼 수 있다. 셰익스피어, 보들레르를 비롯하여 육사가 탐독한 서양의 작가와 사상가들은 에밀졸라, 발 작크, 시 디 루이스, 매슈 아놀드, 펄벅, 앙드레 말로, 괴테, 하이네 등 그 수가 결코 적지 않았다.
또한 알베르(앙드레?) 보나르를 비롯해 불안의 철학자 셰스토프, <월든>과 <시미불복종>으로 유명한 헨리 소로우 등도 빠뜨리지 않았고, 당대 중국의 명망 있는 작가 노신(魯迅)과 서지마(徐志摩)를 비롯해 중국문학과 사회 전반에 대한 정통한 지식도 갖추고 있었다. 중국 현대작가의 시와 소설 작품을 번역하고 중국문학사와 현대시에 관한 평론을 남긴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많은 사람들이 육사를 시인으로만 알고 있다. 육사는 시, 시조, 한시, 소설, 수필, 비평, 번역에 걸친 다양한 갈래의 글을 남겼다. 글에서 다룬 주제 또한 사회, 정치, 경제, 그리고 영화예술에 이르기까지 매우 폭넓고 다채로웠다. 육사는 실제로 영화와 시나리오에 적극적인 관심을 가지고 있었고, 이를 위한 구체적인 활동을 한 것을 최근 새로 확인했다.
육사가 영화이론과 시나리오 연구를 목적으로 창립된 <영화예술>(1938년) 동인에 참가한 것이 그것인데, <영화예술>의 발기인은 육사를 포함하여 이병현, 윤규섭, 이운곡, 김관, 박민천, 서민, 민형일, 이기현 등이었다. <영화예술> 동인은 1938년 2월에 결성된 듯하며 사무실은 동아예술사 안에 두고 동인지 <영화예술>을 계간으로 발간 하고자 했다.
육사의 뛰어난 분석력과 현실인식은 이미 대구 약령시와 대구사회단체 관한 기사문에서도 유감없이 나타난 바 있다. 그런데 무엇보다 육사의 폭넓은 지식과 안목을 보여주는 것은 당대 중국정세와 국제관계에 대한 분석을 다룬 글들이다. 육사는 중국의 정세와 농촌현실을 분석하면서 장개석의 국민당을 매판계급 독제로 비판하고, 중국농촌의 몰락이 농민 개개의 문제가 아니라 “농업 중국의 파멸”이라고 진단했다.
아울러 중국농민의 궁핍은 당대 정권에 대한 부정이 경제투쟁에서 정치투쟁으로 격화되는 것과 정비례한다고 파악했다. 또한 국제무역과 관세정책의 흐름을 진단하면서 세계무역은 전 세계의 일반적인 정치적 위기와 보조를 같이하여 관세정책으로 나아가고 있다고 전망했다. 이라한 분석은 예리하고도 심도 있는 것이었다.
국제관계와 사회문제에 대한 진단과 분석을 보여준 글들은 육사가 매우 폭넓은 지식과 사상으로 무장되어 있었다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사실 육사는 전통적인 세계관과 함께 아나키즘과 사회주의를 비롯한 당대의 다양한 이념과 사상의 세례를 받은 것으로 보인다.
풍부하고 폭넓은 서구적 교양과 지식에도 불구하고 육사는 결코 몰 주체적이거나 서구 편향적인 지식인이 되지 않았다. 육사가 이렇게 균형감각을 유지 할 수 있었던 것은 어릴 때 체득한 유가적 교양과 전통교육, 곧 내면화된 전통이 무엇보다 큰 힘이 되었을 것이다.
항일투쟁
육사는 1921년 혼인하고 1923년 대구지역의 여러 사람의 도움을 받아 일본으로 갔다. 일본에서 육사는 예비학교와 일본대학 문과 전문부를 다니다가 병으로 퇴학하였다. 1925년 경 대고 조양회관을 중심으로 한 문화운동에 참여하는 한편 중국에 드나들면서 항일운동에 투신한 것으로 보인다.
1927년 중국에서 귀국한 육사는 장진홍 의사의 조선은행 대구지점 폭파의거 혐의자로 장기간 투옥되었다가 무혐의 석방 되었다. 그 후 <중외일보> <조선일보> 대구지국 기자로 활동했지만, 광주학생의거로 예비검색을 당하고 대구배일격문사건의 배후로 피검되어 또 다시 옥고를 치렀다. 옥고에도 불구하고 육사의 항일의지가 오히려 굳세진 것을, 이 시기에 발표한 글 중 하나인 <대구사회단체개관>에서 볼 수 있다.
육사는 “수난기에 있는” 각종 사회단체 활동의 침체가 외래의 억압과 자체의 부진에 기인한다고 분석했다. “새로운 용자여 어서 많이 나오라”라고 촉구하고 있다. 동시에 역사적 필연성만을 믿고 강태공처럼 기다릴 수만은 없다고 했다.
그 뒤 여러 차례 중국을 왕래하다 1932년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1기생으로 입교했다. 무력항일단체인 의열단이 ‘한국의 절대 독립’과 만주국위 탈환을 목적으로 설립한 항일독립혁명가 양성소였다. 육사를 포함 26명이었는데, 졸업생들의 활동방침은 ‘일제요인 암살’ ‘조선과 만주의 혁명 준비공작’이었다. 육사가 사격에 능하고 옥고를 치른 경력 때문일 것이다.
다음해 귀국했지만, 본격적인 활동하기 전에 체포되어 모진 옥고를 겪었다. 거듭된 감시와 피검으로 활약에 제약을 받았다. 이후 육사는 창작에 몰두하다 1943년 다시 북경에 갔다. 귀국한 뒤 검거되어 북경으로 압송되었다. 다음해인 1944년 1월 16일 40세 나이로 북경 감옥에서 순국하고 말았다.
일상의 이육사
독립투사라는 후광에 가려 육사의 생생한 인간적 모습은 잘 알려지지 않았다. 육사와 절친한 문우 신석초에 따르며 육사는 말이 적고 자신을 과장하지 않았다. 다만 문학에 관한 얘기를 할 때는 의외로 다변이었고 열렬했다. 언제나 옷매무새가 단정하고 여름에도 넥타이를 풀지 않는 예의바른 모습이었다.
신석초 회고에 따르면 육사는 말술을 마셨지만 떠들지 않았고, 만취하면 조용히 잠을 잤다. 화사한 요정이나 바에도 더러 갔지만 여자에게는 담담한 주객이었다. 그런 육사에게도 비밀스런 한 여성이 있었다고 회고했다.
육사는 신석초에게 투병과 고독을 호소하기도 했고, 답장이 없는 친구에 대한 그리움을 고전적이고 여성적인 어투로 표현한 시조를 짓기도 했다. 필자가 발굴한 이 시조는 경주 옥룡암에 요양 중이던 육사가 신석초에게 보낸 엽서에 적힌 것인데, 육사는 시조 앞머리에 “전서(먼저 보낸 편지)는 보셨을 듯, 하도 답 안 오니 또 적소. 웃고 보사요.” 라며 조금은 쑥스럽고 겸연쩍은 듯한 자신의 심정을 숨기지 않았다.
뵈올가 바란 마음 그 마음 지난 바램
하로가 열흘같이 기약도 아득해라
바라다 지친 이 넋을 잠재울가 하노라
잠조차 업는 밤에 燭태워 안젓으니
리별에 병든 몸이 나을 길 없오매라
저 달 상기 보고 가오니 때로 볼가 하노라
가세가 기울어 고향을 떠난 뒤 육사는 넉넉한 살림을 할 수 없었다. 육사에 대해 “자산이 없고 생활이 빈곤하다”고 1930년대 일제 경찰기록은 전하고 있다. 이런 생활은 육사의 일생동안 계속된 것이기도 하다. 1942년 육사가 그의 재종 이원석에게 호적등본을 떼어 급히 우송해 달라는 부탁을 담은 편지에서도 그런 상황이 잘 나타나 있다. 이때 육사는 연이어 부모와 맏형의 상을 당했으며 집안은 대소사가 분산되어 큰집은 고향 원촌으로 돌아갔다.
원석군아, 일간 졸한猝寒(갑자기 닥친 추위)에 당상숙부 내외분 기력 강녕하시며, 우리 집도 형수씨 아해들 다리시고 무고하시고, 일촌이 안녕들 하시온지 알고저우며 죄종罪從(상을 당한 몸이라 죄인이라 칭함)은 제형이 모다 무양無恙하니 다행이오, 수일 전 대구 하서下書 받들어 종형제분 강녕하신 듯 만행이나 일(전) 나의 호적등본 때문에 상서하였는데 아직 아무런 하시下示가 없으니 어찌된 일(인)고 묻자와 곧 등본 한 통을 지급부송至急付送 하여 다고(오). 그것이 늦어지면 나의 일은 만사와해 일 뿐만 아니라 우리 집 장래 생활방도 조차 막연한 때문이다. 천만 범연泛然히 듣지 말고 부로라마 예안까지 와서 부쳐 보내라. 일전 편지에 초본이라 하였으나 그것은 잘못이니 기왕 부송하였더라도 다시 등본을 해보내기 바란다. 할 말 많으나 위선 급한 대로 이만 끝인다.
한편 빈곤하고 감시 받는 일상 속에서도 육사는 여유와 유머를 잃지 않았다. 육사가 남부지방을 여행하면서 신석초에게 보낸 엽서에서 그런 일면을 볼 수 있다.
지금 삼량진 역에 나리니 육점종(여섯 시). 그 앞 진주여관에 드니 마산(을) 7시 10분에 간다기(에) 대금 1원 60전에 낙동강 잉어회와 막걸리 5배를 통음하였다. 여차 풍류를 서울서는 상상만 하여라. 자세(한 것)는 가서 보고함세.
이육사의 시
모든 시인이 육사처럼 일제에 직접적으로 대항하기를 바랄 수는 없을 것이다. 또한 아무리 식민지 시대였다 하더라도 항일 투쟁 경력 자체가 훌륭한 시인의 조건이 되지는 않는다. 시인의 임무는 모국어에 불멸의 혼과 생명력을 불어넣어 아름다운 문학을 창조하는 일이다. 그것은 시인에게 소중하고 가치 있는 일이다. 육사가 감동적인 시를 남기지 못했더라면 우리는 육사를 탁월한 시인으로 기억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육사는 시인이었다. 유언을 거부하고 단호히 “행동의 연속만이 있을 뿐”이라고 한 육사는 “시를 생각는다는 것”도 자신에게 “행동”이 된다고 했다. 시인의 길과 투사의 길을 아우른 육사는 우리 문학사에서 매우 희귀한 존재이다. 시와 혁명을 함께한 육사의 의식 밑바탕에는 인간과 역사에 대한 분출하는 사랑과 열정이 자리 잡고 있었다. 육사의 실질적인 문단 진출 작인 <황혼>은 그 점을 잘 보여 준다.
내 골방의 커-튼을 것고
정선된 맘으로 황혼을 마저드리노니
바다의 흰갈매기들 갓치도
인간은 얼마나 외로운 것이냐
황혼아 네 부드러운 손을 힘끗내미라
내 뜨거운 입술을 맘대로 맛추어보련다
그리고 네 품안에 안긴 모-든 것에
나의 입술을 보내게 해다오
저一十二성좌의 반ㅅ작이는 별들에게도
종소리 저문 森林속 그윽한 修女들에게도
쎄민트 장판우 그만흔 囚人들에게도
의지할 가지업는 그들의 심장이 얼마나 떨고 잇슬가
<고비>사막을 끈어가는 낙타 탄 行商隊에게나
<아프리카> 綠陰 속 활쏘는 <인데안>에게라도
황혼아 네 부드러운 품안에 안기는 동안이라도
지구의 반쪽만을 나의 타는 입술에 맛겨다오
내 五月의 골방이 아늑도 하니
황혼아 내일도 또 저 푸른 커-텐을 것게하겠지
情情이 살어지긴 시냇물 소리갓해서
한번 식어지면 다시는 도라올줄 모르나부다
이육사 <황혼> -오월의 병상에서-
육사는 스스로 고뿔도 잘 걸리지 않을 정도로 건강하다고 했다. 그러나 피고름 받아낸 모진고문과 거듭된 옥중생활을 감당할 수 없었다. 여러 차례 바닷가와 암자에서 요양을 해야 했고, 나중에는 폐 질환까지 얻었다.
<황혼>은 우주적인 사랑이 넘치는 시이다. 병을 얻어 쇠약했지만 소외되거나 외로운 모든 사물과 사람들에게 사랑을 보낸다. 황혼이 세상을 품듯이 자신의 타는 입술을 땅과 하늘 곳곳에 맞추고자 한다. 외롭고 힘든 모든 존재를 향한 애정이야말로 우주적인 사랑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우주적인 사랑은 육사의 시와 의식(사상)을 이해하는 하나의 통로가 된다. 세상의 고통을 껴안은 육사의 무한한 애정은 순결한 이상주의자의 몸짓이다. 이러한 이상주의는 때로 비현실적인 관념으로 비쳐질 수도 있다. 절대적이고 완전한 것은 추구하는 이상이 없다면 참혹하고 왜곡된 현실을 어떻게 부정하고 비판할 수 있겠는가.
식민지 백성의 현실은 참혹한 것이었다. 육사는 자신의 시 <子夜曲>에서 고향에 대해 “노랑나비도 오쟎는 무덤 우에 이끼만 푸르리라”라고 했다. 이 황폐한 고향은 식민지 현실 그 자체였다. 그것은 염상섭이 ‘묘지’로 상징한 불모지가 되어버린 식민지 조국의 모습이기도 했다.
식민체제와 급변하는 시대에 의해, 고향(조국)의 유구한 역사와 전통도 허물어지고 안정된 삶도 불가능 했다. 식민지 백성은 실향민의 처지가 되고, 떠돌이의 삶은 고달프고 고통스러울 수밖에 없다. 떠돌이가 된 식민지 백성의 처지를 육사는 <路程記>에서 “쫓기는 마음! 지친 몸이길래/ 그리운 지평선을 한숨에 기오르면/ 시궁치는 열대식물처럼 발목을 오여 쌌다.” 고 표현했다. 사랑스럽고 가치 있는 것들이 파멸하고 정착할 곳을 잃어버린 사람들의 상실감이야말로 식민지 시대 망국민의 지배적인 정서였을 것이다. 그것은 1930년대의 많은 시들이 고향 상실의식을 드러내고 있는 데서도 잘 드러난다.
육사는 낭만주의 서정 시인으로 출발했다. 이상주의적 성향과 개인의 주관을 분출하는 점에서 그렇다. 그러나 현실은 육사가 서정적이고 낭만적인 열정을 마음껏 펼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육사는 자신에게 무한히 너른 공간이 필요하지만 “벼룩이 꿇어앉을 만한 땅”도 없다고 한탄했다.
육사의 절창 <절정>에서는 위태로운 현실을 더 적극적으로 묘파했는데 “한발 재겨 디딜 곳 없다”는 표현은 절체절명의 상황을 간결하고도 날카롭게 드러낸 것이다. 그것은 인간의 삶을 원천적으로 불가능하게 하는 상황이다. 그러나 이러한 상황 속에서 육사는 혼절하지 않고 오히려 새로운 앎을 추구한다.
매운 季節의 챗죽에 갈겨
마츰내 北方으로 휩쓸려오다
하늘도 그만 지쳐 끝난 高原
서리빨 칼날 진 그 우에서다
어데다 무릎을 꾸러야 하나
한발 재겨디딜 곳조차 없다
이러매 눈감아 생각해볼밖에
겨울은 강철로된 무지갠가보다.
이육사,<절정> 전문
한 시인이 일찍이 보여준 없는 ‘비극적 황홀’이라고 평가한 바도 있지만, <절정>은 고도의 언어적 압축과 긴장을 보여준다. 작품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누어지는데, 앞의 두 연은 상황에, 뒤의 연은 의식에 초점이 놓인다. ‘매은 계절’ ‘하늘도 그만 지쳐 끝난 고원’의 상황과 ‘서리빨 칼날진 그우’에 ‘서’는 의지/ 행위의 위기감과 절박성은 ‘한발 재겨디딜 곳조차 없다’는 데서 극점에 도달한다.
이러한 극한적인 상황 속에서 단련되지 못한 정신은 자신을 지탱하지 못한다. 이 한계상황은 우리를 전율케 하고 압도적인 충격 속에 몰아넣는다. 그러나 육사는 ‘이러매 눈감아 생각해볼밖에’ 라고 담담하게 말한다. ‘생각’한다는 것은 상황에 대한 육사의 사유/ 인식행위이자 의미부여다. 그것이 다음 역설을 낳는다.
‘ 겨울은 강철로 된 무지갠가 보다’에 대한 해석은 다양한 바가 있다. 그러나 관심은 ‘매운 계절’인 ‘겨울’이 어떻게 ‘무지개’로 인식되는 것이며 그것을 어떻게 해석하는 것이 정당할 것인가에 모아진다. 무지개가 대체로 지극히 아름다움, 황홀, 영광과 기쁨, 지상과 천상의 연결 등의 상징적 의미를 갖는 것이라면 삶의 불모성을 상징하는 ‘겨울’이 어떻게 무지개로 인식될 수 있는 것일까. ‘무지개’가 추구하고 바라는 것이라면 ‘겨울’은 제거되어야 할 어떤 것인가.
육사는 제거해야할 것에서 도달할 것을 발견한다. 이것이야말로 일상적 언어가 이르기 힘든 역설적 인식이다. 이 놀라운 정신과 힘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 그것은 참되고 정당한 것, 그리고 생명과 역사의 불멸을 믿는 굳센 윤리적 확신과 소망에서 비롯한다. 목숨을 버리고 외로움을 구하는 선비정신 역시 그 바탕을 이룰 것이다.
육사는 일찍이 <季節 五行>이란 글에서 위협적인 현실에 맞서 자기를 희생하려는 굳건한 의지를 다음과 같이 선언한 적이 있다.
내가 들개에게 길을 비켜줄 수 있는 겸양을 보는 사람이 없다고 해도, 정면으로 달려드는 표범을 겁내서는 한 발자국도 물러서지 않으려는 내 길을 사랑할 뿐이오. 그렇소이다. 내 길을 사랑하는 마음, 그것은 내 자신에 희생을 요구하는 노력이오, 이래서 나는 내 기백을 키우고 길러서 금강심에서 나오는 내 시를 쓸지언정 유언은 쓰지 않겠소.
다만 나에게는 행동의 연속만이 있을 따름이오. 행동은 말이 아니고 나에게는 시를 생각는다는 것도 행동이 되는 까닭이오. 그런데 행동이라는 것이 있기 위해서는 나에게 무한히 너른 공간이 필요로 되어야 하련마는 숫 벼룩이 끓어 앉을만한 땅도 가지지 못한 내라, 그런 화려한 팔자를 가지지 못한 덕에 나는 방 안에서 혼자 곰처럼 뒹굴어 보는 것이오.
“정면으로 달려드는 표범”과 맞서는 기백과 자기희생을 무릅쓰는, 육사의 용기는 바른 세상과 참된 역사에 대한 신념과 소망이 없다면 불가능한 것이다. 육사는 생명을 억압하는 부당한 식민체제가 반드시 끝날 것을 믿었고, 또 그렇게 되도록 자신을 역사의 제단에 바쳤다.
육사는 유작 <꽃>에서
“북쪽 툰드라에라도 찬 새벽은/ 눈 속 깊이 꽃맹아리가 움작거려/ 제비 떼 까맣게 날아오길 기다리나니/ 마침내 저버리지 못할 약속이여!”
라고 했다. 언 땅에서 움트는 생명의 불꽃은 누구도 거역하지 못할 약속이며 새로운 역사의 도래 역시 필연적인 것으로 확신한다. 일제하 많은 지식인들이 육사와 같은 믿음을 지닐 수 있었다면 친일과 훼절의 역사에 자신의 오명을 남기는 치욕을 겪지 않았을 것이다.
육사의 윤리적 확신과 소망은 막연한 관념이나 헛된 공상 아니었다. 그것은 새로운 미래를 꿈꾸고 기다리며, 준비하는 구체적이고도 적극적인 실천으로 이어졌다. “매화 향기 홀로 아득한”, 눈 내리는 광야에서 “가난한 노래의 씨를 뿌리는” 시인의 모습이 그것이다.
스스로 “가난한 노래”라고 시인은 겸손하게 말하지만, 이러한 씨 뿌리기는 마땅한 미래를 앞당겨 현실화 하려는 시인의 적극적이고 실천적인 행위이다. 그것은 또한 미래의 ‘초인’을 위해 신성하고 장엄한 자기희생의 제단을 쌓는 일이기도 하다.
한 개의 별을 노래하자 꼭 한 개의 별을
十二星座 그 숫한 별을 었지나 노래하겟늬
꼭 한 개의 별! 아츰날 때 보고 저녁들때도 보는 별
아름다운 미래를 꾸며볼 東方의 큰 별을 가지자
한 개의 별을 가지는 건 한 개의 지구를 갖는 것
아롱진 서름밖에 잃을 것도 없는 낡은 이따에서
한 개의 새로운 지구를 차지할 오는날의 깃븐노래를
목안에 핏때를 올려가며 마음껏 불러보자
이육사,<한 개의 별을 노래하자>
한 개의 별을 노래하는 것, 그것은 “새로운 지구”를 갖는 것, “아름다운 미래를 꾸며”보는 일이다. 그것은 “아롱진 서름밖에 잃을 것도 없는” 망국민에게 허락된 마지막 기도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육사는 마침내 억압의 세계가 무너지고 반듯이 바라고 꿈꾸는 해방된 세계, 새로운 역사가 시작될 것이라고 믿었다. “새로운 지구를 차지할” 날이 “오는 날”로 신념화되어 있는 것은 그러한 까닭이다.
고통에 갇혀서는 결코 고통을 넘어설 수 없다. 고통을 줄이기 위하여 근거 없이 섣부른 희망을 가질 수도 있지만, 거짓된 희망을 갖는 일은 더욱 위험하다. 그것은 근거 없는 낙관주의이며 기만적인 자기 위이다. 오직 현실의 어둠을 정직하게 인식하고 그에 대결하고자 하는 사람에게만 희망은 현실극복의 튼튼한 디딤돌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암흑 속에서 빛나는 별을 꿈꾸고 “오는 날”의 기쁨을 노래할 수 있었던 육사는 거짓된 희망에 사로잡히지 않았다. 그는 결코 현실의 위압에 압도되지 않았고 오히려 그를 넘어서는 빛나는 정신의 경지를 보여주었다.
“백마 타고 오는 초인”을 기다리며 “가난한 노래의 씨”를 뿌리는 의연한 모습이나 “서리빨 칼날진” 위에 자신을 세우는 것에서 볼 수 있는 것은 바로 육사의 정신이 이룩한 비장한 아름다움이다.
비장한 아름다움 속에서 육사의 기다림이 이해되어야 한다. 육사의 기다림은 미래에 대한 막연한 몽상이 아니다. 그의 기다림은, 치유된 세계, 해방된 삶을 윤리적으로 강렬히 소망하고 확신하는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것이다. 육사의 의식이 先取한 미래는 경험적 사실은 아니지만 인간의 윤리적 소망과 확신 속에 살아 있는 하나의 ‘약속’이다. 카시러(Ernst Cassirer)는 이것을 ‘상징적 미래’ 혹은 예언자들의 삶 속에서 잘 드러난다는 뜻에서 ‘예언적 미래’라고 불렀다. 상징적 미래에 대한 이와 같은 육사의 윤리적 확신은 생명의 강인성과 무궁함을 노래한 <꽃>에서 직접적으로 나타난다.
따라서 “바라는 손님”(청포도)이나 “백마 타고 오는 초인”(광야)을 위해 “하이얀 모시 수건”을 준비하고 “노래의 씨”를 뿌리는 것은 적극적인 행위이다. 미래는 저절로 오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의식이 애타게 갈구하면서 만들어 가는 것이기 때문이다.
내 고장 七月은
청포도가 익어가는 시절
이 마을 전설이 주저리주저리 열리고
먼데 하늘이 꿈꾸려(원본) 알알이 들어와 박혀
하늘 밑 푸른 바다가 가슴을 열고
흰 돛단배가 곱게 밀려서 오면
내가 바라는 손님은 고달픈 몸으로
靑袍를 입고 찾아온다고 했으니
내 그를 맞아 이 포도를 따 먹으면
두 손은 함뿍 적셔도 좋으련
아이야 우리 식탁엔 은 쟁반에
하이얀 모시 수건을 마련해 두렴
이육사, <청포도>전문
<청포도>는 공간의 응축과 확장을 통하여 자연과 자연, 자연과 인간의 융화와 호응을 보여준다. 조그마한 포도 알에 끝없이 넓은 하늘이 응축되는 것은 놀랍고도 아름다운 상상이 아닐 수 없다. ‘주저리주저리’ 열린 포도 알이 ‘마을의 전설’에 비유되면서 고향에서 이루어진 유구하고 풍부한 역사를 넌지시 암시한 데 이어 이제 포도 알은 높고 귀한 하늘의 꿈이 어린 사물이 된다. 포도라는 사물을 통하여 마을(인간과 역사)과 하늘과 땅이 호응하는 데 이어 그 아래 연에선 바다와 사람의 일(기다림과 만남)로 연결된다. 공간은 하늘에서 포도 알로 축소되는가 하면 다시 ‘바다’로 확장되었다가 청결한 ‘식탁’으로 축소된다. 이러한 공간의 역동적인 흐름 자체가 주는 즐거움은 <청포도>가 제공하는 심미적 쾌락과 중요한 일부이다.
서정성 넘치는 아름다운 시 <청포도>는 마침내 인간적 삶이 가능한 해방된 세계의 행복한 시간과 공간을 탁월하게 그리고 있다. 여기서는 청포도를 통해 풍성한 마을의 역사가 복원되고 무한한 하늘을 인간이 호흡한다. 그것은 황폐화한 현실의 재건이자 자연과 인간의 조화와 화합한다. 이 조화롭고 아름다운 공간에서 바라던 사람과 함께 우주의 기운이 충만한 청포도를 함께 먹는 것! 이 사소해 보이는 일상의 행복이야말로 인간이 인간답게 살 수 있는 가장 근본적인 조건이 아닐까.
마침내 기다리는 사람을 만나 정결한 식탁에서 함께 ‘포도를 따 먹’는 상상은 사람을 행복하게 만든다. 또한 기다림이 해소되고 만남의 기쁨을 나누고자 하는 열망은 어느 시대 누구나 가질 법한 상상이며 꿈이다. 단순히 식민지 시대가 끝나기를 바라는 나라 잃은 백성만이 가지는 바람에 그치지 않는다. 그것은 정치적 해방을 싸안으며 동시에 그것을 뛰어넘는 진정 해방된 세계, 행복의 본질적인 세계를 환기하는 서정의 문맥을 구성한다. 따라서 <청포도>에서 형상화된 이 아름답고 행복한 상상의 세계는 특정한 시대와 역사를 넘어서는 보편적 공감력을 지닐 것이다.
어두운 시대 빛나는 정신
자신의 수필<질투의 반군성嫉妬의 叛軍城>에서 육사는 자신이 ‘부정할 바를 부정’하고, 다른 사람에게 요구하지 않는 고민을 ‘혼자 무한히 고민’한다고 했다. 부정할 것을 마땅히 부정하는 것, 남에게 요구함이 없이 스스로 시대와 역사의 짐을 지는 것, 그것은 어느 시대든 남다른 의지와 자기희생의 각오 없이는 낼 수 없는 일이다.
육사는 어두운 밤, 태풍과 폭우 속에 겨우 발끝밖에 비추지 못하는 전등을 들고 바다를 향했던 경험에 빗대고 있다. 태풍과 폭우, 어둠을 뚫고서야 마침내 “영롱하게 빛나는 바다의 일면!”과 대면한 경험은 그것이 심미적인 것이든 그것을 넘어서는 역사적이고도 정치적인 문맥의 것이든 현실의 난관을 뚫고 나가려는 의지의 산물이다.
육사가 “나는 아직도 꿈이 아닌 그날 밤의 바닷가로 태풍의 속을 가고 있는지도 모릅니다.”라고 끝맺은 것은 이후 그가 걸어갔던 항일투쟁과 순국의 길을 미리 보여주는 것일지도 모른다.
“유언”을 거부하고 단호히 “행동의 연속만이 있을 뿐”이라고 한 육사는 자신에게는 시를 생각하는 것도 행동이라고 했다. 육사는 온갖 “고독이나 비애를 맛볼지라도 <시 한편>만 부끄럽지 않게 쓰면 될 것”이라고 말했다. 이것은 스스로 시인으로서의 자의식과 지향을 뚜렷이 밝힌 것이기도 하다. <절정>, <광야>, <청포도>와 같은 그의 시편들이 오늘날까지 지속적인 공감력을 발휘할 수 있다는 사실 역시 그것을 웅변하고 있다. 따라서 항일 시인이라는 선입견에 사로잡혀 육사의 모든 시편들을 정치적 저항의 차원에서만 해석하려는 강박증은 경계해야 마땅하다.
항일투사로서의 육사 또한 마땅히 본받고 기려야 할 것이다. 그러나 시인 이육사를 이해하고자 한다면, 육사의 시가 주는 감동을 실감하는 데서 출발할 수밖에 없다. 시는 시인의 다양한 의식세계를 다채롭게 형상화하는 까닭에 독자는 시를 통해 시인의 내면과 시인이 경험한 시대를 다시 살아 볼 수 있다. 육사의 시가 축조된 심미적 세계를 실감 있게 느끼는 것이 육사와 그가 산 시대를 이해하는 지름길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육사는 일제 식민지의 어두운 시대, 부당한 세계와 훼손된 삶을 강렬하고도 정직하게 드러낸 시인이다. 그는 식민지 시대의 찢긴 삶을 다만 드러내는 데 머물지 않았다. 그를 뛰어넘어 그것을 치유하고 훼손되지 않는 시간과 공간을 그의 시 속에 굳건히 쌓아 올림으로써 시인으로서의 자기완성을 이룩했다.
다시 말해 육사는 망국민의 일그러진 삶을 치유하는 해방된 조국, 나아가 인간다운 삶이 가능한 해방된 세계에 대한 윤리적 소망과 확신 속에 살아 있는 미래를 시적 현실로 형상화하였다. 그것이 <청포도>와 <광야>이다. 온 겨레가 정치적 노예의 신분에 있을 때, 절망하지 않고 해방된 세계를 예언하고 그 씨앗을 뿌린 이육사를 우리는 어두운 시대를 밝히는 빛나는 정신이라고 부를 수 있다.
(서술의 편의를 위해 주석은 생략하였습니다.)
손병희교수
*경북대 국어국문학과 졸. 동대학원에서 석. 박사 취득. *이육사 시 문학상 심사위원. *이육사 기념사업회 회장. *안동대 국어국문학과 교수.
*저서 <한국현대 시 연구> <정지용 시의 형태와 의식> <이육사 전집(공저)> <예향의 도시, 문학을 말하다> 등 다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