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례받으신 예수
누가복음 2:21-24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동정녀 마리아를 통하여 이 땅에 육신을 입고 오셨습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육신을 입고 오실 때 베들레헴에서 다윗의 자손으로 호적을 한 요셉의 아내 마리아를 통해 아기 예수로 탄생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탄생할 즈음에 베들레헴에서 양을 치던 목자들에게 천사들이 나타나 예수님의 탄생을 알리며 구주이신 그리스도의 나신 기쁜 소식을 전한다고 말했습니다. 목자들은 베들레헴에 가서 요셉과 마리아에게 천사들이 자신들에게 전해준 말을 전해주었습니다. 할례를 받는 팔일이 되어 이름을 예수라 하였습니다. 이는 천사 가브리엘이 마리아에게 나탄 예수의 탄생을 고지할 때 일러준 이름이었습니다. 예수라는 의미는 ‘저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건지실 자’입니다.
1. 할례를 받으신 아기 예수
할례할 팔일이 되매 그 이름을 예수라 하니 곧 수태하기 전에 천사의 일컬은 바러라. (2:21)
아기 예수는 탄생 후 팔일 만에 할례를 받게 됩니다(21절). 사내아이가 태어난 지 팔일 만에 할례를 받는 것은 이스라엘의 율법에 따른 것입니다. 할례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사내들마다 다 양피를 벗기어 하나님께 던지어 그들이 하나님께 속하였음을 표하는 것입니다. 이 할례는 오늘날 세례와 같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을 얻은 자는 누구나 세례를 받아 자신이 죄 가운데서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았음을 고백하는 신앙고백과 같습니다.
요셉과 마리아는, 아기가 할례를 받을 때 이름을 예수라 칭합니다. 그것은 마리아가 “수태하기 전에 천사의 일컬은바”입니다(21절). 성경에는 아기가 출생하기도 전에 이름이 먼저 지어진 예가 여러번 나옵니다. 예를 들면 이삭(창 17:19), 솔로몬(대상 22:9), 요시야(왕상 13:2, 왕하 22:1), 고레스(사 44:28-45:1), 세례요한(1:13,60-63) 등이 이러한 경우에 해당됩니다. 예수라는 이름을 지은 것은 마리아나 요셉의 의도가 아니고, 이것은 이미 아기 탄생 전에 천사가 지시한 바를 따른 것뿐이었습니다. 요셉과 마리아가 아기의 이름을 짓는 과정에서 자신들의 의견을 전혀 가미하지 않고 하나님께서 천사를 통해서 명령하신 그대로 수행했다고 하는 것은, 이 일이 처음부터 성령의 역사하심 가운데 진행되어온 일이라는 것을 인정하며, 앞으로의 일 역시 성령께서 진행시켜 나가실 것이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2. 예루살렘에 올라간 아기 예수
모세의 법대로 결례의 날이 차매 아기를 데리고 예루살렘에 올라가니, 이는 주의 율법에 쓴바 첫 태에 처음 난 남자마다 주의 거룩한 자라 하리라 한대로 아기를 주께 드리고, 또 주의 율법에 말씀하신대로 비둘기 한 쌍이나 혹 어린 반구 둘로 제사하려함이더라(2:22-24)
율법에 따라 결례의 날이 차매 그 부모가 “아기를 데리고 예루살렘에 올라”갔습니다(22절). 결례의 날이란, 유대의 모든 산모는 자녀를 낳은 후 율법에서 정한 기한이 지나면 제사장에게로 가서 규례대로 예물을 드려 속죄를 받아야 했습니다. 그 이유는 자녀를 해산한 산모는 부정하게 된 것으로 여겨졌기 때문입니다. 율법에서는 부정하게 된 산모와 아이들을 위해서 정결케 될 수 있는 제도적 장치를 마련하였습니다. 그래서 율법이 명시한대로 정결케 되는 기간이 찬(남자 아이 40일, 여자 아이 80일; 레12:1-5) 산모는 최종 정결 예식으로서 번제와 속죄제를 드려야만 했습니다. 여기서 번제는 출산에 대한 감사와 헌신의 마음을 표하기 위하여 드렸고 속죄제는 출산에 따른 부정(不淨)을 제거하는 뜻에서 드렸습니다. 이때 각 예물은 번제로 양, 속죄제는 비둘기였으나 가난할 경우 번제로 양 대신 비둘기 둘로 대치할 수 있었습니다(레 12:1-8). 본문에서 누가는 어머니의 정결 예식과 아기를 바치는 행위를 함께 묘사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아기 예수를 위해 제사장을 찾아가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지만, 결국 이 예수님은 우리를 위한 대제사장이십니다(히 3:1). 이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체휼하지 아니하는 분이 아니며 우리의 모든 일에 한결같이 시험을 받으시되 죄는 없으신 분이십니다.
요셉과 마리아가 예수님을 예루살렘으로 데려간 것은 율법에 기록된 대로 “첫 태에서 난자마다 주의 거룩한 자라 하리라”(출13:2,12)라는 말씀대로 행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23절).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첫 태에서 처음난 자마다 하나님의 것으로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이스라엘백성이 애굽의 종살이에서 벗어나 애굽에서 해방되어 나올 때, 바로가 이스라엘 백성을 놓아주려고 하지 않자 하나님께서 애굽의 모든 장자를 죽이기로 하시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유월절 의식을 통하여 구원하셨기 때문입니다. 그 때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명하시어 이스라엘 백성들은 가족 수대로 흠없는 어린양을 준비하였다가 그 양을 잡아 그 피를 문설주와 인방에 바르고 그 고기는 구워서 쓴나물과 함께 먹도록 하셨습니다. 죽음의 사자가 애굽의 장자를 치실 때 문설주와 인방에 어린양의 피가 발려져 있는 이스라엘 백성의 집은 죽음의 사자가 지나갔습니다. 그래서 이 행사를 ‘넘어갔다’는 의미의 ‘유월절’이라 부르게 되었습니다. 유월절 어린양은 장차 우리를 위하여 갈보리 십자가에서 우리 죄인들을 위하여 피흘려 죽으실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합니다.
율법은 처음 난 짐승의 새끼를 여호와께 드리도록 규정하였습니다(출 13장; 22:29; 34:19; 민 3:11-13; 40-51; 8:16-18; 신 15:19).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첫 아기를 제물로 드리는 일을 대치시키기 위해 레위 지파를 성별하셨는데 이때 이스라엘 장자의 수가 레위인의 숫자의 비율에 맞지 않을 때에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장자 수만큼, 즉 한 사람당 다섯 세겔씩을 속전으로 지불하도록 하셨습니다. 이러한 율법에 근거하여 예수님께서도 장자, 곧 거룩한 자로서 하나님께 드려지게 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비록 인간의 몸을 입으셨긴 하지만 전혀 무죄하십니다(히 4:15). 따라서 예수님이 주께 바쳐진 것은 그가 자신을 중보자로서 주께 드림을 상징합니다(딤전 2:5). 실로 예수님의 생애 자체는 인류의 죄를 대신 짊어지기 위한 희생과 헌신의 연속이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율법을 제정하신 하나님께서 친히 그 율법에 순종하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규례를 따라 요셉과 마리아는 아기 예수를 데리고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비둘기 한 쌍이나 어린 반구 둘로 제사를 드리려” 했습니다(24절). 이는 지극히 가난한 자의 제사드릴 예물이었습니다. 반구는 산비둘기를 말합니다. 이는 예수님의 부모의 가난한 삶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 구절은 예수님께서 태어나셨던 가정환경과 그 사회적 형편을 단적으로 나타내 줍니다. 또한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 오셔서 가난을 체험한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레위기 12장에는 해산한 여인이 하나님께 드려야 할 예물을 '양 한마리와 비둘기 한마리'로 규정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있어서 율법에 따라 제물을 드리는 것은 하나님과의 약속으로서 그 양(量)과 방법들이 엄격하게 법으로 정해져 있습니다. 그러나 극빈자의 경우는 정한 제물의 양대로 바치지 못하게 되고 그것으로 인해 종교적으로 갈등을 갖게 될 것이므로 그 양을 줄이는 것 역시 법으로 정하여 바치게 했습니다. “그 여인의 힘이 어린 양에 미치지 못하거든 산비둘기 둘이나 집비둘기 새끼 둘을 가져다가 하나는 번제물로, 하나는 속죄 제물로 삼을 것이요 제사장은 그를 위하여 속할지니 그가 정결하리라”(레 12:8). 이것은 가난한 자들을 위한 세심한 배려와 관심에서 이루어진 일들이기도 하지만 또 다른 의미에서는 부유한자나 가난한 자나 남녀노소할 것 없이 누구나가 하나님을 경배하여 그에게 예배를 드려야 함을 암시합니다. 당시 비둘기의 가격은 어린 양의 약1/10정도에 해당하였습니다. 마리아와 요셉이 하나님의 율법을 신실하게 지키는 경건한 사람들이었음에 비추어볼 때 그들이 극빈층에 속하였던 것이 분명합니다.
적용: 율법에 순종하는 삶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도 할례를 통하여 율법에 순종하는 모습을 보이셨습니다. 우리가 율법을 지킴으로 구원을 얻는 것은 아니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을 얻었지만, 하나님의 자녀가 된 우리들도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여야 할 것은 하나님의 자녀로서 마땅히 행하여할 본분이라 생각됩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율법을 다 이루시어 완성하셨고, 십자가의 대속과 부활을 통해 예수님을 믿는 우리에게 영생을 주셨지만, 우리 또한 율법에 순종해야합니다. 예수님은 율법의 대강령에 대해,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내 몸같이 사랑하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마 22:37-40).
하나님을 어떻게 사랑해야합니까?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그 계명을 지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요 14:15). 또 예수님은,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 같이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거하리라”(요 15:10)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과 그의 계명을 지키는 것이 같은 일이라는 것입니다. 주님의 계명을 지키는 일을 통해 그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또 이같이 말씀하십니다. “내 계명은 곧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하는 이것이니라”(요 15:12)
내 이웃을 내 몸같이 사랑하려면, 이웃을 존중해야합니다. 십계명에서 제 6계명부터 10계명까지 말씀하는 것은 비로 이웃을 존중해야할 것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살인하지 마라는 것은 다른 사람의 생명을 존중하라는 것이고, 간음하지 말라는 것과 도둑질하지 말라는 것은 이웃의 아내나 소유를 존중하라는 것입니다. 이웃에게 거짓증거를 하지 말라는 것은 그 인격을 존중하라는 것입니다. 요즘 가짜 뉴스나 악풀로 다른 사람을 괴롭히는 사람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런 사람들은 그만큼 악한 것입니다. 이웃의 아내나 소유를 탐하지 말라는 말씀은 이웃을 존중할 때 가능한 말씀입니다. 우리가 이렇게 이웃을 내 몸같이 사랑하면 우리 사회에는 정의가 실현되고 사랑이 넘치는 사회가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