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츠맨십과 드라마와 사내들의 테스토스테론이 공존하는 그라운드 위엔 정서를 건드리는 결이 있다. 평일 새벽에도 ESPN의 ‘본방’ 을 사수하는, 축구 보는 여자 이야기.
2008
년 5월 22일, 유럽 축구 클럽들의 최강자를 가리는 UEFA 챔피언스리그 결승전이 열리던 날. 나는 강남의 한 클럽에서 새벽
3시 45분부터 열리는 결승전을 관람했다. 그 자리에 있던 대다수는 박지성의 출전을 고대하며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를 응원하기 위해
모인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대한의 아들은 대한의 아들일 뿐. 그의 천적 첼시의 팬인 나는 홀로 반역자가 되어 조용한 응원을
했다. 연장전으로도 끝이 보이지 않는 팽팽한 대결, 결과는 승부차기 끝에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승리. 출근길 군중으로 붐비던
강남대로에서 초췌하고도 고독했던 나는 근 몇 년 만에 눈물을 흘리며 가슴으로 소리쳤다. ‘다 부숴버릴 거야!’
세상엔
이런 여자도 있다. 1년에 한 번 있는 결전의 날에서 응원하는 팀이 고배를 마신게 두고두고 한이 되는 여자(다행히그날의패배감은
얼마전 마무리된 2009~2010시즌 프리미어리그에서 첼시가 우승하는 것으로 어느정도 보상 받았지만). 어떤 선수가 이적한다는
소문이 돌면 촉각을 곤두세우고, 우리 팀이 졌을 땐 심판이 매수 당했다고 분노하는 여자. 〈보그〉의 하우스 포토그래퍼는 평일
새벽에도 축구 경기를 보며 흥분하는 나를 변태라 부른다. “윽!” “아!” 하고 소리 지를 내 모습이 야심한 시각에 은밀하게
‘란제리 쇼’ 를 보는 남자들과 다를 바 없다나? 친구들은 아이폰에 ESPN의 어플리케이션을 깔아두고 경기 일정과 주요 기사를
체크하는 나를 보며 혀를 내두른다.
축구 보는 여자를 흥미롭게 바라보는 시선은 얼마든지 감수할 수 있지만, 난감할
때는 “왜 축구를 봐?” “왜 그 팀을 응원하는 거지?”라는 질문을 받을 때다. 좋아하고 미친다는 감정은 지극히 감성적인
영역인데, 그것에 논리라는 잣대를 들이대니 “너는 왜 태어나서 그렇게 맹렬하게 사니?”란 질문을 받은 것마냥 존재 의의를 흔드는
물음처럼 느껴지는 것이다. 대신 축구가 어떤 스포츠인지, 어떻게 하면 축구를 즐길 수 있는지를 말하는 게 ‘왜 축구를 보는가’에
대한 우회적인 답이 되지 않을까 한다.
마지막 순간까지 결과를 단정할 수 없는 야구가 놀이로서의 스포츠라면, 축구는
철학이자 종합예술의 스포츠다. 한 나라와 지역 간의 오랜 역사적 배경이 전제된 축구는 치열한 전쟁이고, 전술에 따라 각 팀이
일사분란하게 움직이는 축구는 다이내믹한 체스다. 때로 패스라는 정확한 재단과 공을 향한 점프에선 무용이, 거친 몸싸움에선 무예가
읽히기도 한다. 죽어라 뛰는데도 골이 터지지 않는 지난한 여정은 시지프스적인 형벌의 시간이다. 그래서 축구는 뛰는 사람도 보는
사람도 고독한 스포츠인 동시에 그 어떤 스포츠보다 지구 단위의 단결을 이끌어내는 희한한 스포츠다. 흙먼지 날리는 뒷골목에서 혼자
공을 가지고 놀던 아이가 어느 순간 연봉 몇 백억원을 받는 한 팀의 얼굴이 되는 것만 봐도, 고독과 함성은 축구라는 동전의
양면이다.
축구에 자연스럽게 젖어 드는 방법 중 하나는 좋아하는 선수를 찍는 것이다. ‘그들’은 도처에 널려있다.
지나가다 마주치는 나이키와 아디다스 매장에, 광고나 화보 속에(그것도 속옷 바람으로!), 파파라치 사진 속에도 그들이 있다.
사람이 좋아서 발들인 서당개 생활 몇 개월이면 서서히 그가 속한 팀에 관심이 가는 법. 다음엔 그 종목 자체에 눈을 뜨게 되고,
이제 단편적이던 시각이 조금씩 넓어진다. 그러고 나면 베컴의 섹시한 얼굴에, 기성용의 살인미소에, 정교한 복근과 말 같은
허벅지들에 이끌려 축구의 ‘축’ 자를 들먹이던 나의 부끄러운 과거는 깨끗하게 물타기 되는 것이다(영국의 명문구단인 첼시에 대한 내
애정도 독일 출신인 미하엘 발락이 입단한 2006년부터 시작됐음을 고백한다).
또 다른 방법은 하나의 팀을 만나는
것이다. 같은 스페인의 명문팀이라도 카탈루냐의 후예들은 FC 바르셀로나를 응원하고, 마드리드 사람들은 레알 마드리드를 응원한다.
누구는 아름다운 축구를 구사하는 팀을 좋아하고, 누구는 유소년 육성에 충실한 팀을 좋아한다. 그처럼, 마음 가는 팀에 대한
애정에서 종목 전반에 대한 관심으로 시각이 넓어지는 경우 역시 일반적이다. 2002 한일 월드컵 때를 떠올려보면 된다. 대체,
왜, 페널티킥이 뭔지도 모르는 여자들까지 광장에 나가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던 걸까? 아무리 좋은 말로 포장을 해도 스포츠는
본질적으로 승부 게임이다. 승부를 가리는 전투에 참여하기 위해선 당연히 ‘우리 편’ 이 있어야 한다. 너나없이 ‘우리’로
대동단결되는 국가 단위의 게임에선 태극마크가 박힌 유니폼이 참전용사의 군복인 셈이다. K리그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이 저조한 것은
국내 축구에서 ‘우리 편’ 의 중요한 기준이 되는 연고지 개념이 희박한 탓이 크다. 성적이 좋든 밑바닥에서 헤매든 변함없이
지지해줄 수 있는 우리 팀, 혹은 성적이 내리막을 걸을 때 욕 하며 엉덩이를 차줄 우리 팀이 있어야 그 종목을 향한 애정의 끈이
질겨진다.
여기에 ‘인간승리의 신화’ 가 곁들여진 스포츠라면 이야기는 끝난다. 축구에선 ‘부상을 극복하고 투혼을
발휘한 선수’ 이상의 정신을 볼 수 있는 예들이 더러 있다. 성장 호르몬이 불균형해 키가 크지 않았던 아르헨티나의 축구 신동
메시는 신장 169cm의 ‘메시아’ 로 등극했고, 평발인 박지성은 ‘두 개의 심장’으로 성장했다. 멘탈과 매너가 갖춰진 선수들은
아무리 치고 박고 태클을 걸다가도 상대가 넘어지면 손을 내밀어 일으켜주며, 어깨한번 두드려줄 줄 안다. 그 아름다운 장면들 앞에서
흐뭇해하는 여자에게 ‘변태’라니? “선수들의 육체를 탐하고 싶었다면, 경기를 볼 게 아니라 스파르타쿠스〉를 봤겠죠!” 아무리
감상적인 언어를 빼고 담백하게 대하려 해도, 스포츠맨십과 드라마와 사내들의 테스토스테론이 공존하는 그라운드 위엔 정서를 건드리는
결이 있다는 말씀이다. 그러나 중요한 건, 승리 앞에서 존중은 있어도 우정은 없다는 사실. 이번 월드컵에서 아르헨티나,
나이지리아, 그리스와 같은 조에 속한 대한민국으로 말할 것 같으면, 우리 외에 피파 랭킹에서 가장 밑에 있는 나이지리아보다도
30위 정도 밑에 있다. 우정은커녕 존중도 다른 조에서 찾고 그저 발바닥이 흥건해지도록 뛰어야 한다는 결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