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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페정보
함안조가 감찰공파 하림유사(遺事)
 
 
 
카페 게시글
함안조가의 역사 및 인물 1927년에 발행된 <동국명현 언행록>에는 함안 조씨의 시조 조정(趙鼎)의 공적이 다음과 같이 나와 있다.
조성래 추천 0 조회 743 20.06.01 19:18 댓글 18
게시글 본문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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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20.06.02 11:51

    첫댓글 조성래 관정 스님께서 통도사 금수암에 입산한 것은 참으로 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 수행과 함께 함안조씨의 선조들에 대해 깊은 연구를 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스님께서는 원래 학교와 어학원에서 영어 교사였는데, 한문과 조상의 역사에 대해 그 시대를 훤히 꿰뚫어보듯이 알기쉬운 설명을 전해주는 것이 참으로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앞으로 더욱더 깊은 연구를 기대하면서 그 정성에 찬사를 보냅니다. 감사할 따름입니다.

  • 20.06.02 21:35

    답 1번 9세기말ㅡ897년생이므로
    답 2번 926년 29세때 ㅡ당나라가
    태평하여 일이없다고 한탄하다
    가 동쪽나라에서 전쟁이 일어
    났다는 소식을 듣고.
    답 3번 장길 ㅡ10살이 많음
    답 4번 중국 절강성 소흥부에서
    대사마대장군 장원의 아
    들로 태어났다.

  • 작성자 22.07.14 03:23

    1. 직래 형님은 90점입니다. 문제 4번 답은 좀 더 집중해서 읽어본 뒤에 답해주시기 바랍니다. 저는 이 "장길(張吉)"이라는 분은 우리 시조(始祖) 할아버지에게는 매우 중요한 분이라고 봅니다.
    2. 읽은 분들은 꼭 문제에 답을 하여 잘 읽었음을 확인 받으시기 바랍니다. 댓글 달아주는 분들이 고마운 분들이고, 이 카페를 활성화시키는 분들입니다. 글을 올렸는데, 별 반응이 없으면 글 올린 분이 머쓱해질 수가 있습니다. 컴맹은 어쩔 수 없지만.
    3. 조직래 형님(1947년생, 돼지띠) 댓글 감사합니다.~~~~~

  • 20.06.02 21:52

    점수가 별로 안좋네 ㅡ공부좀 더해야 되겠다.

  • 20.06.05 01:11

    관정 스님의 열정과 노고에 깊은 감사를 드리면서 저의 소견을 올려봅니다.

    당나라는 황소의 난(875~884) 이후 혼란을 거듭하다가 907년 멸망한다. 이후 50여 년 동안 북쪽에서는 5개의 왕조(후양→후당→후진→후한→후주)가 교체되고 남쪽에는 10개의 나라가 난립하는데 이 시대를 5대 10국 시대라 한다. 이 5대 10국을 마감한 이가 바로 송(960~1279)을 건국한 태조 조광윤(927~976)(趙匡胤 : 趙鼎 선조와 같은 趙씨일 가능성이 아주 높음)이다.
    “장길은 888년에 태어나 5세(892)에 아버지 장원(대사마대장군:육군참모총장)을 따라 당나라 말기의 혼란을 피해 신라로 망명하여 강릉에 머물다가 안동에 정착하였다. 18세(905년)에 당나라에 다시 들어가 24세(911년:후양)에 문과에 장원급제하여 벼슬이 이부상서에까지 올랐으나 벼슬을 버리고 926년(후당)에 장길(39세)은 조정(趙鼎:29세) 형제들과 함께 우리나라에 다시 들어와 안동에서 제자들에게 학문을 가르쳤다.” 라고 되어있는데, 이 내용을 분석해보면 장길과 조정은 후당(923~936)인 이라고 볼 수 있다.

  • 20.06.05 00:29

    926년은 각지에서 일어난 반란과 내부의 권력 다툼으로 후당은 큰 혼란에 빠져 있던 시기였다. 이 때 장길은 후당의 권력 다툼에서 밀려나 다시 근거지가 있는 안동으로 망명해 온 것으로 추측된다. 그리고 조정(趙鼎)은 장길과 생사고락을 같이 했던 최측근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그래서 장길을 따라 망명하여 함께 생활했을 것이다. 그런데 930년 고창 전투 당시 경남 합천은 완전히 후백제의 지배권 안에 있던 지역이다. 따라서 합천에서 의병을 일으켰다고 하는 것은 무리가 따른다. 중국에서 오신지 4년 밖에 되지 않고, 장길은 안동에서 제자들을 가르치고 있는데 홀로 합천에서 의병을 일으킬 만한 힘이 있었을까? 좁은 나의 소견으로는 고창 전투에 장길과 함께 참가하여 공을 세우고 난 뒤 후삼국 통일 후에 합천으로 내려와 터전을 마련하지 않았을까 추론해 보는 바입니다. 그리고 두 아우 부(釜)와 당(鐺)의 후손들이 각지로 흩어지고 세월이 흐르면서 趙씨 성의 본관이 21개로 늘지 않았나 하는 추론도 해봅니다. 옛 어른들 말씀에 趙자를 쓰는 姓氏들끼리는 결혼하면 안 된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 작성자 20.06.04 15:21

    아침에 일어나서 보니, 조광제 님(1959년 하림생 )께서 댓글을 달아 놓았네예. 매우 반갑고 감사합니다. 조광제님은 부산대학교 역사교육학과를 졸업한 뒤 줄곧 부산 해운대고등학교 역사교사로 근무하다가 1년 전에 정년퇴직한 분입니다. 트머아제 조용석의 외아들이고, 조민영(女), 조은한(子)의 아버지입니다.
    조광제님이 우리 시조 할아버지가 중국에서 들어올 때의 중국 상황을 알 수 있게 해주어서 고맙습니다. 일단 <동국명현언행록> 속에 들어 있는 위의 텍스트에 기록돼 있는 내용이 우리가 신뢰할 만한 것이 되는지를 확인해봐야 할 것 같습니다. 제가 이렇게 저렇게 이 기록의 정확성을 크로스(cross) 체크해 본 결과, 약 95~98% 정도의 정확성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확인됩니다. 중국에서 같이 들어 온 장길의 족보 내용과도 일치하고, 또 한반도 신라말 후삼국의 역사와도 그 연대 및 사건이 일치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세부사항은 미세한 오류가 발견되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고창(안동)전투 상황을 묘사하는 장면에서 그 전투 3년 전에 일어났던 공산(팔공산) 동수(桐藪,동화사)의 상황이 등장하는 것은 명백한 오류라고 볼 수 있습니다.

  • 작성자 20.06.05 09:44

    <동국명현언행록> 속에 들어 있는 이 기록은 사용한 어휘나 한문의 문체로 볼 때 1927년 그 때 작성된 것으로 보입니다. 물론 <동국명현언행록> 편저자도 밝히고 있듯이 함안조씨 집안에서 소장하고 있는 옛 문서들을 바탕으로 해서 작성한 것으로 보입니다. 전해내려오는 옛 문서 내용에 오류가 있었을 수도 있고, 또 1927년에 이 글을 그 시대에 맞는 어휘와 표현과 문체로 고쳐쓰면서 고쳐쓰는 사람이 이해하기 쉽도록 만들기 위해 원래 옛 문서에는 없던 내용을 삽입해 넣은 부분도 있을 수 있는데, 그 때 삽입해 넣으면서 1,000년 전에 일어났던 전투에 대해 다 알 수가 없어서 일어난 착오일 수도 있습니다. 우리 시조 솥 정(鼎) 자 할아버지께서 중국에서 한반도로 들어온 지 4년 밖에 안 된 분이 합천에서 의병을 일으켰다는 것은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기가 어렵기 때문에 그 합천은 안동 부근의 어떤 곳이 아닐까 라고 생각해 볼 수도 있다고 봅니다. 하지만 저는 그 합천은 대야성(大耶城)의 합천일 가능성이 훨씬 더 높다고 봅니다. 우리 시조 할아버지가 단독으로 합천에서 의병을 일으키지 않았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아니면 합천에서 의병을 일으켰다는 내용 자체가

  • 작성자 20.06.05 09:49

    잘못된 것일 수도 있을 것입니다.
    우리 시조 할아버지는 아마 중국에서부터 장길과 아주 가깝게 지내면서 그를 상관으로 모셔왔던 것이 아닌가 합니다. 그 당시 장길은 정적(政敵)인 후당의 김남석에 의해 모함을 당해 관직에서 물러났고, 그 때 한반도 후삼국의 정세가 복잡하게 돌아가자 자신에게 충직(忠直)하고 전투를 잘 하는 조정(趙鼎)의 3 형제를 데리고 한반도로 들어왔던 것이 아닌가 합니다. 의병을 일으킬 때는 미리 의도를 가지고 장길(張吉)과 시조 할아버지가 합천으로 들어갔던 것이 아닌가 합니다. 합천지역에서 약3~4년의 작업 끝에 의병을 일어킬 수 있었다고 봅니다. 장길과 우리 시조(始祖) 할아버지는 이미 중국 관계(官界)에서의 복잡한 정치 상황들을 다 겪은 프로선수였다고 볼 수 있습니다. 당시 장길은 40대 초중반이었고, 우리 시조 할아버지는 30대 초중반이었습니다. 두 사람은 프로선수로서 한참 힘을 쓸 수 있는 나이였죠. 특히 장길은 중국 과거시험에 합격하여 문관 고위직인 정3품 직위인 이부상서 자리까지 올라갔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앞으로 한반도 후삼국의 정세가 어떻게 돌아갈지 잘 알았을 것이라고 봅니다.

  • 작성자 20.06.05 09:51

    그 두 사람은 합천과 안동이 군사 요충지라는 사실도 잘 알았을 것이고, 앞으로 이 후삼국의 전쟁에서 승리하려고 하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잘 알았다고 봅니다. 그래서 김선평과 권행은 안동지역에서 의병을 일으키고, 장길과 우리할아버지는 합천지역에 미리 침투하여, 의병을 일으켰던 것이 아닌가 합니다. 이 때부터 합천은 우리 함안조가에게는 아주 중요한 지역(고향)이 되어, 조선초까지 계속되어 왔던 게 아닌가 합니다. 함안조가 10세손 할아버지인 전서공 열(悅) 자 할아버지께서 이성계가 역성(易姓)혁명을 하였기에 공조전서(工曹典書)라는 장관직을 집어던지고 두문동으로 들어간 뒤 얼마 안 있어 홍재, 이오와 함께 합천으로 내려와 1~2년 정도 살았는데, 아마 그 때 합천이 고향이 아니었던가 합니다. 함안조가 10세손인 전서공 그 윗 대의 산소들은 합천 반포에 있었다는 것이 옛 기록에 남아 있습니다. 그 이후 임진왜란 및 여러 번의 전란과 함안으로의 이주, 그리고 벼슬(관)직을 맡아서 멀리 떨어진 지역에 근무하면서 산소를 잃어버렸던 것입니다.

  • 20.06.05 00:57

    당시는 호족의 시대로서 호족은 정치적, 군사적, 경제적 지배권을 가진 토착세력을 말하는데, 실제 백성들은 호족의 지배하에 있었다. 그런데 적진에 들어가 3~4년 만에 호족 세력으로 성장한다는 것은 당시로서는 불가능한 일이고, 의병을 일으켰다는 것은 조선시대의 표현으로 임진왜란 이후에 족보를 처음 만들 당시의 느낌이나 감성으로 표현하지 않았나 사료됨.

  • 작성자 20.06.05 10:43

    @조광제 이 앞에서도 말했듯이 이 <동국명현언행록> 에 들어 있는 조정(趙鼎)의 공적에 관한 내용은 100% 다 정확하게 기록된 것이라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미 명백한 오류가 발견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솥 정 자 조정(趙鼎) 할아버지가 신라말에 합천에서 의병을 일으켰다는 내용이 사실일 가능성이 70~80% 정도는 된다고 봅니다. 만약 <동국명현언행록>에 나오는 이 합천이 안동 부근의 어떤 지역 이름이 아니었을까 라고 추측하려면 그런 이름을 실제로 사용한 지역을 문헌을 통해 찾아내야 설득력을 확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의병을 일으켰다는 표현은 <동국명현언행록>을 출판할 당시의 언어로 표현한 것이 아닌가 합니다. 그리고 의병은 꼭 임진왜란 때 생겨난 용어가 아니라고 봅니다. 고구려의 안시성 싸움에서 의병들이 일어나 수, 당과 맞서 싸웠고, 고려 때는 대몽골항쟁에서 농민, 천민들이 항쟁의 주체로 활동하였습니다. 만약 그 당시에 후백제 견훤이 920년에 대야성(합천)을 함락한 뒤 930년까지 10년 동안 계속 그 지역을 지배하고 있었다면, 그 지역민과 호족들은 불만이 많았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 작성자 20.06.05 11:01

    @조성래 중국에서 건너온 조정(趙鼎)이 그 지역을 오랫동안 지배해왔던 호족들과 손을 맞잡고 견훤의 군대를 몰아내자고 결의하여 의병을 일으킬 수 있었다고 본다면, 무리가 있습니까? 여기서 의병은 향군(鄕軍), 즉 유사시 징집되는 군인으로 해석됩니다.

  • 20.06.05 14:10

    @조성래 우리 선조께서 합천에 자리 잡은것믄 틀림없으나 그 시점을 재고해볼 필요가 있을것 같습니다. 견훤에게 불만이 많은 호족들과 손잡고 세력을 키울 수는 있습니다만 장길에 관련된 기록을 보면 "926년에 안동에 다시 와서 제자들을 가르쳤다" 라고 되어있는데 조정 선조께서 홀로 합천으로 가셨을까 의문이 들며, 고려시대 우리 선조들이 합천에서 대를 이어왔기때문에 조선후기 족보를 처음 편찬할 당시 시조 할아버지의 이야기를 약간 미화하여 삽입한것이 아닌가 추측됩니다.
    합천에서 거병한것이 사실이라면 고려사에 그 기록이 보여야 정상인데 그렇지 않은걸로 볼때 더욱 그런 생각이 듭니다.

  • 작성자 20.06.04 09:43

    합천은 함안조씨에게는 아주 중요한 곳입니다. 합천에가면, 운구서원(雲衢書院, 운구서당)이 있습니다. 이 서원은 전서공 조열 할아버지와 홍재, 이오, 이 세 분의 정절을 기리기 위해 1786(정조 10)년에 왕의 허락하에 처음 만들어졌다. 여기에는 이 세 분의 위패가 모셔져 있다. 대원군의 서원철페령에 의해 없어졌다가 1923년 홍재의 후손들에 의해 다시 합천 두심동에 지어졌다.
    다른 분들도 다 댓글을 달아주시면 고맙겠습니다. 댓글은 간단히 한 두 마디만 하셔도 됩니다. 물론 위의 문제에 답을 해주시면 더 좋겠지만. 원래 관객들은 본문보다는 댓글을 더 즐겨 읽는답니다. 댓글이 많이 달려야 카페가 재미있는 곳이 됩니다. 꼭 감찰공파, 하림사람, 함안조가가 아니어도 좋습니다. 이 카페 회원으로 가입하여, 글을 쓸 수 있습니다. 물론 상업적이거나 정치적인 글은 바로 삭제됩니다. 아마 댓글은 회원가입을 안 해도 달 수 있을 것입니다.

  • 작성자 20.06.07 15:20

    재미난 사실 발견 : 국민대학교 이건호 교수가 쓴 책 <한국사를 움직인 100대 사건>을 보니까 후백제 견훤도 경북 문경지역의 호족출신이네요. 다음 문장을 옮깁니다.
    "견훤은 경북 문경 지역의 호족 아자개(阿慈介)의 아들로, 군 지휘관을 지낸 뒤 농민 세력을 규합해 무진주를 점령하면서 패권 싸움에 뛰어든다. 6두품 출신 유학자인 최승우(崔承祐)를 책사로 삼아 900년 후백제를 일으키면서 본격적인 건국사업에 나선다."
    왕건은 개성의 호족출신이고, 견훤은 경북 문경의 호족출신이네요. 그래서 강릉, 경북 문경, 안동에서부터 울산지역에 이르기까지 110개가 넘는 성의 호족(城主성주)들이 견훤에게 거부감을 크게 느낄 이유가 별로 없을 수도 있었겠네요. 개성 사람인 왕건과 경상도 사람인 견훤이 싸울 때 정서적으로는 견훤의 편을 드는 호족들도 꽤 많이 있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나 고창(안동)지역 호족인 김선평, 권행, 장길이 고창전투에서 고려 왕건의 편을 들어서 견훤의 군대를 공격하여, 왕건이 완승을 거두도록 한 것은 단순히 견훤이 3년 전에 경주를 침공해서 신라 경애왕을 죽이고, 온갖 약탈을 해간 것에

  • 작성자 20.06.05 20:40

    대한 의협심(義俠心)의 발로로 그렇게 한 것으로 보이네요. 인터넷에 "고창전투"를 검색해 보면, 거기에 이건호 교수의 책 중 고창전투에 대한 내용이 상세하게 나옵니다.
    우리가 학교에서 배우지 않았던 많은 중요한 사건들이 있네요. 족보 연구를 하면서 많은 것을 배웁니다.

  • 20.06.05 21:19

    난해한 고문서에 대한 이와같은 친절하고 자세한 해석과 해설은, 우리 선조의 발자취를 찾고 집안의 자긍심을 고취하는 데 상상할 수 없이 큰 밑거름이 됩니다.

    더욱이 다른 이도 아닌 그 후손이 스스로 조사하고 연구하여 도출해 내었으니, 얼마나 정성과 애정을 쏟아 부었을지는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만인이 인지하리라 생각합니다.

    이처럼 우리 가문을 올바로 널리 알리려는 노력에 쉼과 끝이 없는 성래 님께 무한한 감사와 존경을 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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