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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7년에 발행된 <동국명현언행록(東國名賢言行錄)>에는 함안조씨의 시조 조정(趙鼎)의 공적(功績)이 다음과 같이 나와 있다.
함안조씨의 시조 원윤공(충장공) 趙鼎(조정)
(번역) 함안조씨의 시조 이름은 鼎(정)이고, 자(字)는 우보(禹寶)이며, 호는 모당(慕唐)이다. 본래 당나라(後唐후당) 사람이었는데, 신라 경애왕(924-927년) 때 두 아우인 부(釜)와 당(鐺)과 함께 조선으로 들어와서 함안조씨가 되었다.
(원문) 諱鼎(휘정)字(자)禹寶(우보)號(호)慕唐(모당) 本以唐人(본이당인) 新羅景哀王時(신라경애왕시) 與釜鐺二弟(여부당이제)來于朝鮮(래우조선)爲咸安趙氏(위함안조씨)
(번역) 조정(趙鼎) 공은 897년에 태어났다. 지혜는 천 명을 능가했고, 키는 팔 척(260cm, 팔 척은 키가 매우 큰 사람을 묘사할 때 흔히 쓰는 표현이다)이 넘었다. 늘 당나라가 태평하여, 일이 없다고 한탄하다가 동쪽 나라에 전쟁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듣고, 926년 29세에 절강성 출신인 장길(張吉, 887년생, 조정(趙鼎)보다 10살 많음)과 함께 단지 자신의 칼 하나만 믿고 동쪽으로 와서 김선평(金宣平,안동·고창의 호족), 권행(權幸,안동 권씨의 시조, 원래 김씨), 장길(張吉, 중국에서 같이 들어옴, 안동 장씨의 시조), 신숭겸(申崇謙,평산 신씨의 시조), 배현경(裵玄慶,경주 배씨의 시조), 복지겸(卜智謙,면천 복씨의 시조) 등과 의형제를 맺으니, 사람들은 그들을 7형제라고 불렀다.
(원문) 後唐僖宗十二年乙巳生(후당희종십이년을사생) 智過千人(지과천인) 身長八尺餘(신장팔척여) 常恨唐國無事(상한당국무사) 忽聞東方有亂(홀문동방유란) 景哀王丙戌(경애왕병술) 與浙江人張吉(여절강인장길) 杖釼東來(장인동래) 與(여)金宣平(김선평), 權幸(권행), 申崇謙(신숭겸), 裵玄慶(배현경), 卜智謙(복지겸) 結義兄弟(결의형제) 世稱七兄弟(세칭칠형제)
(장길張吉) 926년 39세에 조정(趙鼎)의 형제들과 함께 중국에서 들어왔다. 안동장씨의 시조인 장길(장정필)은 고창(古昌,안동)의 호족이었다. 그는 고려 태조가 후백제의 견훤을 정벌할 때 고창군(古昌郡)에서 김선평, 권행과 함께 전공을 세운 삼태사(三太師) 중 한 명이다. 『안동장씨대동속보(安東張氏大同續譜)』에 안동장씨의 시조인 장길(장정필)에 대해 다음과 같이 나와 있다.
그의 처음 이름은 장길(張吉)이다. 그는 888년에 중국 절강성 소흥부(蘇興府)에서 대사마대장군(大司馬大將軍,정1품)인 장원(張源)의 아들로 태어났다. 5세 때 난을 피해 아버지를 따라 우리나라에 망명하여, 강원도 강릉에 머물다가 경상북도 노전(蘆田,안동)에 정착했다. 18세 때 다시 당나라로 들어가서 문과에 급제하여, 이부상서(吏部尙書,정3품)를 지내다가 김남석(金南錫)이 무고하여, 다시 한반도로 돌아와 제자들을 가르쳤다. 930년(고려태조 13, 당시 장길은 43세, 조정趙鼎은 33세)에 병산(甁山)에서 고창의 성주(城主)인 김선평, 판관(5~6품) 권행 등과 함께 태조를 도와 견훤의 군대를 대파한 공으로 삼중대광보사벽상공신태사(三重大匡保社壁上功臣太師)에 오르고, 고창군(古昌君)에 봉해졌다. 후손들이 본관을 안동으로 했다. 삼태사(三太師) : 김선평, 권행, 장길
(시대상황) 신라의 왕권이 약해지자 895년에 궁예가 후고구려를 건국하고, 900년에 견훤이 후백제를 건국했다. 918년에 왕건이 궁예를 몰아내고, 고려를 건국하고, 이듬해 송악(개성)으로 천도했다. 후삼국시대에 신라는 이미 국력이 약화됐기 때문에 후삼국을 통일할 세력은 고려와 후백제 뿐이었다. 고려는 후백제와 대결하기 위해 신라와 친선관계를 유지하려고 했고, 후백제는 신라와 고려의 통로를 차단하기 위해 경상도 일대를 공격했다. 후삼국시대의 패권을 다투는 격전지로는 안동과 합천 지역을 들 수 있다. 왕건과 견훤은 이 두 지역을 확보하기 위해 치열한 공방전을 벌렸다. 920년 보마군(步馬軍) 1만인으로 대야성(大耶城:합천)을 쳐서 함락시킨 견훤은 군사를 진례성(進禮城:전북 무주)으로 옮겼다. 다급한 신라의 경애왕은 아찬 김률(金律)을 고려에 파견하여, 구원을 요청했다. 공산전투와 의성전투에서 승리를 거둔 후백제는 그 여세를 몰아서 930(태조13)년 교통의 요충지인 고창군을 포위하여 공격했다. 견훤은 이미 고려군의 퇴로를 차단하기 위해 죽령을 봉쇄한 상태였다. 후백제 견훤이 고창군(古昌郡:안동)을 포위하여 전세가 고려에게 매우 불리했다. 견훤이 929년 12월 고창에서 고려군 3,000명을 포위하자, 왕건은 직접 대규모의 구원병을 이끌고 고창(안동) 병산으로 진격했다. 왕건은 3년 전인 927년에 대구 공산(公山)의 동수(桐藪) 전투에서 견훤에게 참패한 뒤 계속 수세에 몰리는 상황이었다. 930년 1월, 소백산 자락의 고창에서 고려 왕건과 후백제 견훤의 운명을 가를 일전이 벌어졌다. 고려와 후백제 군사들이 500m 떨어진 곳에서 서로 마주 보며, 진을 치고 대치하고 있을 때 왕건은 의외의 원군(援軍,지원군)을 얻었다. 현지의 지리에 밝은 고창군 성주 김선평과 판관 권행, 지방호족 장길 등이 향군(鄕軍,유사시 지방에서 소집한 군인)을 이끌고 고려군에 합세한 것이었다. 이들은 견훤이 927년 신라 55대 경애왕(재위 924~927)을 숨지게 한 것에 대해 앙갚음을 하고 싶었다. 격전 끝에 후백제 군사들은 퇴각을 거듭했다. 이 과정에서 후백제의 시랑(侍郞,국무총리)인 김악(金渥)이 고려군에게 생포되고, 8,000여 명의 후백제 군이 목숨을 잃었다.
결국 왕건이 고창전투에서 승리하면서 후삼국의 정세는 급변했다. 그 이후 고려와 후백제 사이의 싸움에서 입장이 불분명했던 안동, 청송 일대의 30여 개의 군현이 잇따라서 고려의 편을 들어서 붙었고, 곧 이어 명주(溟州: 현 강릉)에서 흥례부(興禮府: 현 울산)에 이르는 동해안 일대의 110여 성(城)도 고려의 편을 들어서 붙었다. 충청 일대에서도 30여 개의 성이 고려의 지배로 들어왔다. 또 신라계를 비롯한 각 지역의 호족들이 가세하면서 왕건은 후삼국 통일의 기반을 다질 수 있었다. 반면 후백제는 고창전투의 패배 이후 급격히 동력이 상실된 데다 왕위계승을 둘러싼 부자간의 갈등까지 겹쳐 패망의 길을 걷게 되었다. 이에 고려는 이 전투에서 공이 큰 김선평, 권행, 장길에게 대광(大匡)과 대상(大相)의 관계(官階)를 주어서 포상했고, 고창군을 안동부(安東府)로 승격시켰다. 이 승리는 당시 고창지방의 호족으로 추측되는 이들의 협조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신숭겸과 공산전투) : 궁예의 말년에 홍유, 신숭겸, 배현경, 복지겸 등은 함께 혁명을 일으켜서 궁예를 몰아내고 왕건을 추대하여, 개국일등공신(開國一等功臣)에 봉해졌다. 태조 즉위 후 7, 8년 동안 소강상태였던 후백제와의 긴장 관계는 견훤이 신라를 공격해들어옴으로써 악화되었다. 견훤이 927년 9월 경북 문경군을 빼앗고, 이어서 경북 영천을 공격하여, 탈취한 뒤에 경주로 군사를 밀고 갔다. 이에 신라 경애왕(924-927년)이 고려태조에게 구원병을 요청하자, 태조는 곧 몸소 잘 훈련된 오천 명의 기마부대를 이끌고 출전했다. 그러나 태조왕건의 원군이 도달하기도 전에 후백제군은 경주를 함락했다. 경주에 들어간 견훤은 군사를 풀어서 크게 약탈하고, 경애왕을 스스로 목숨을 끊게 한 뒤 왕족 김부(金傅: 경순왕)를 세워서 왕위에 올리니, 이가 곧 경순왕이다. 이 소식을 들은 고려 왕건은 사신을 신라에 보내서 조문하게 하고, 대구에 부대를 대기시키고 있었다. 견훤은 경순왕의 아우 효렴과 재상 영경(英景) 등을 포로로 붙들고, 각종 보물과 기술자 등을 약탈하여 귀환길에 올랐다. 고려 왕건은 대구 동남 쪽에 위치한 공산 동수(桐藪: 동화사)에 대기하고 있다가 경주에서 철수하는 후백제군과 전투를 벌이게 되었다. 이 공산전투에서 고려군은 크게 패하여, 장군 김락(金樂)과 신숭겸(申崇謙) 등 8명의 장수가 죽었고, 많은 병사가 전사했으며, 왕건도 변장하여, 간신히 몸을 피했다. 이것이 927(태조 10)년에 일어난 공산전투다. 그러나 후백제군에게 포위되어 태조 왕건이 위급하게 되었을 때, 신숭겸은 대장(大將)이 되어서 원보(元甫), 김락(金樂) 등과 함께 힘써 싸우다가 전사했다. 왕건이 신라를 구원하기 위해 출전했던 공산전투에서 후백제의 견훤에게 참패하고, 죽음의 위기에 처하자 신숭겸은 자신이 왕건의 투구와 갑옷을 빌려 입고 미끼가 되어 후백제군을 유인했다. 왕건은 일반 군졸의 옷을 입고 탈출하는 데 성공했다. 후백제군은 신숭겸이 왕건인 줄 알고 쫓았고, 결국 신숭겸은 전사했고, 시신은 참수되었다. 함께 유인작전에 나섰던 김락과 김철, 전이갑, 전의갑 형제도 모두 전사했다. 이 때 이 네 사람을 포함하여 총 8명의 장수가 전사했다고 하여, 공산의 이름이 “팔공산(八公山)”이 되었다고 한다. 간신히 위기를 벗어난 태조는 신숭겸의 죽음을 매우 슬퍼하여 장절(壯節)이라는 시호를 내려주었다. 또한 아우 신능길(申能吉)과 아들 신보(申甫)를 모두 원윤(元尹)으로 삼고, 지묘사(智妙寺)를 창건하여, 그들의 명복을 빌게 했다.
(배현경) : 본래 궁예의 부하로서 병사로 시작해서 마군장군(馬軍將軍)이 되었다. 궁예가 개국할 때 많은 역할을 했으나, 그의 폭정이 심해지자 신숭겸, 복지겸, 홍유 등과 함께 왕건에게 거사를 권하여, 왕건을 따라 궁예를 축출했다. 고려사에도 개국 4공신의 한 명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는 경주배씨의 시조이다.
(번역) 원윤공 조정(趙鼎)이 고려 태조왕을 북경(北京,송악,개성?)에서 처음 만났을 때 제가 미력하나마 최선을 다해 돕겠다고 약속한 뒤 돌아왔다. 공은 합천에서 의병을 일으키고, 김선평과 권행은 고창(안동)에서 의병을 일으켰다. 930년에 <왕건이 공산(公山,팔공산) 동수(桐藪,동화사)에서 적에게 포위당했다>(이 < >속의 내용은 한문원문의 내용이 잘못된 것임. 공산전투는 3년 전에 일어났던 것임)는 소식을 듣고, 4명의 공[四公사공: 김선평, 권행, 장길, 조정]이 삼천 명의 병사를 이끌고 밤낮 없이 달려가서 고창에 도착하여, 견훤을 크게 격파했다.(견훤군 8,000명을 죽임) 그 뒤 강릉에서 울산에 이르기까지의 동해안 쪽의 백 열 개가 넘는 성(城)들이 모두 다 고려에 항복해 들어옴으로써 고려 태조는 조정(趙鼎)에게 대장군(大將軍종3품)과 원윤(元尹)의 벼슬을 내리고, 개국벽상일등공신(開國壁上一等功臣)으로 봉(封)했다. 조정(趙鼎)은 그 때 나이가 34세였고, 장길은 44세, 왕건은 54세였다. 고려태조 왕건이 말했다. “조정(趙鼎)과 장길(張吉)은 한(漢)나라의 조자룡(趙子龍)과 장비(張飛)와 같은 인물이니 당나라에게는 불행한 일이나 나에게는 큰 복”이라고 말하며, 고창(안동)의 칠현묘(七賢廟)와 동수(桐藪,팔공산)의 충렬사(忠烈祠)에 그 위패를 모시라고 지시했다.
(원문) 初見麗王於北京(초견려왕어북경) 約助一臂之力(약조일비지력)而歸(이귀) 公起義陜川(공기의협천), 金宣平(김선평) 權幸(권행) 起義古昌(今安東)기의고창(금안동). 聞麗王被圍於公山桐藪(문려왕피위어공산동수, 이 부분의 내용은 잘못된 것임, 공산전투는 고창전투 3년 전에 일어났음) 四公率兵三千(사공솔병삼천) 罔夜倍道(망야배도) 至古昌城(지고창성) 擊破甄萱(격파견훤) 東京州縣百十餘城皆降以(동경주현백십여성개항이) 公爲大將軍元尹(공위대장군,원윤) 封開國壁上一等功臣(봉개국벽상일등공신) 賜諡忠壯(사시충장) 麗太祖曰(려태조왈) 趙鼎(조정) 張吉(장길)卽漢之趙子龍張翼德(즉한지조자룡,장익덕)於唐不幸(어당불행)於我爲福(어아위복)云配享於古昌七賢廟及桐藪忠烈祠(운배향어고창칠현묘급동수충렬사)
<요약정리>
1. 918년 고려건국. 홍유, 배현경, 신숭겸, 복지겸 등이 궁예를 몰아내고, 왕건을 왕으로 모심.
2. 후삼국시대에 고려와 후백제가 패권다툼을 시작함. 920년에 견훤이 대야성(합천)을 함락시킴.
3. 함안조씨의 시조인 조정(趙鼎)은 전쟁이 났다는 소식을 듣고, 926년 29세에 장길과 함께 중국에서 한반도로 들어옴.
4. 그 1년 뒤인 927(태조 10)년에 대구에서 공산전투가 일어남. 고려태조 왕건이 견훤에게 참패당함.
5. 공산전투에서 승리를 거둔 후백제는 그 여세를 몰아서 930(태조13)년 교통과 군사의 요충지인 고창군(古昌郡,안동)을 포위하여, 공격해 들어옴. 견훤이 고창군을 완전히 포위하여, 전세가 고려왕건에게 매우 불리했다.
6. 이 때 의외의 원군(援軍,지원군)이 나타났다. 그 지역의 지리에 밝은 고창의 성주(城主) 김선평과 판관 권행, 그리고 장길과 조정(趙鼎)이 향군(鄕軍,유사시 지역에서 징발되는 군인)을 이끌고 나타나서 견훤의 군인 8,000여명을 죽이고, 고려 왕건에게 후삼국을 통일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해주었다.
다음 물음에 답하시오.
1. 함안조씨의 시조인 원윤공 솥 정(鼎) 자 할아버지는 몇 세기 인물인가?
2. 함안조씨의 시조 조정 할아버지는 몇 살 때, 그리고 왜 중국에서 한반도로 들어왔는가?
3. 누구와 함께 들어왔나? 그 사람과의 나이 차이는 몇 살 나는가?
4. 중국에서 함께 들어온 사람은 어떤 인물이고, 시조 할아버지는 그 사람과 어떤 관계였을까?
5. 그 때 한반도에는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었나?
6. 시조 할아버지는 중국에서 직업이 무엇이었다고 보는가?
7. 한반도로 들어와서 처음 활동을 시작한 곳은 어디였나?
8. 왜 거기서 활동했으며, 어떤 활동을 했나?
9. 시조 할아버지는 한반도로 들어온 지 몇 년 만에 결정적인 첫 전투를 했고, 거기가 어디였나? 그리고 그 때가 몇 년도이고, 몇 살이었나?
10. 위의 <동국명현언행록>의 내용을 보면, 고려태조 왕건이 공산 동수에서 적에게 포위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김선평, 권행, 장길 등 네 명이 군사를 이끌고 달려가서 적을 격파했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그들이 달려갔을 때가 왕건이 공산 동수에서 포위되었을 때인가?
11. 시조 할아버지는 누구를 도와서 전투를 했고, 누구를 격파했나?
12. 시조 할아버지가 전투에 뛰어들었을 때 고려태조 왕건은 어떤 상황이었고, 왕건은 왜 전투에서 이길 수 있었는가?
13. 견훤의 군대를 격파한 결과, 한반도에는 어떤 일이 일어났나?
14. 고려태조 왕건이 고창(안동)전투에서 공을 세운 공신들을 왜 고맙게 생각할 수밖에 없었고, 왜 높은 벼슬을 내릴 수밖에 없었는가?
15. 고려태조 왕건은 시조 할아버지에게 어떤 벼슬을 내려주었고, 시조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뒤 어떤 예우를 해주었는가?
16. 시조 할아버지는 2세, 3세, 4세, 5세 등 모든 후손들이 살아가는 데 어떤 도움을 주었는가?
각자 1~2문제씩 골라잡아서 댓글에 답을 달아주시기 바랍니다.
* 이 글은 한문으로 되어 있는 원문을 조성래(1959년 함안 하림생)가 우리말로 번역하고, 당시의 상황을 입체적으로 이해할 수 있도록 만들기 위해 작은 글씨로 해설을 붙인 것이다. 한문원문은 1927년에 이병관(李炳觀)이 편찬하고, 경성(京城) 대성학회(大聖學會)에서 발행한 <동국명현언행록(東國名賢言行錄)> 속에 수록되어 있는 것이다. 이 한문원문은 1987년에 발행된 <함안조씨 종흥록(宗興錄)>에도 번역문과 함께 실려 있다. 그런데 그 번역이 거의 다 한자로 표기되어 있어서 이해하기가 쉽지 않다. 그래서 필자가 다시 쉬운 말로 번역했다. <동국명현언행록>에는 이 한문원문의 출처는 「조씨가장(趙氏家藏)」, 즉 <조씨집안의 소장 문서>라고 기록되어 있다. <동국명현언행록>은 신라 이래 유학의 정착 발전에 공헌이 큰 한반도의 유학자들을 모아서 그들의 행적과 언행을 기록한 책이다. 이것은 한문독본용(漢文讀本用)이다.
* 이 글은 다음 카페 <함안조가 감찰공파 하림유사(遺事)>에 올려져 있는 글입니다. 이 글을 주변의 함안조가 일가들에게 카톡으로 많이 전해주시기 바랍니다. 조성래 올림
첫댓글 조성래 관정 스님께서 통도사 금수암에 입산한 것은 참으로 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 수행과 함께 함안조씨의 선조들에 대해 깊은 연구를 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스님께서는 원래 학교와 어학원에서 영어 교사였는데, 한문과 조상의 역사에 대해 그 시대를 훤히 꿰뚫어보듯이 알기쉬운 설명을 전해주는 것이 참으로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앞으로 더욱더 깊은 연구를 기대하면서 그 정성에 찬사를 보냅니다. 감사할 따름입니다.
답 1번 9세기말ㅡ897년생이므로
답 2번 926년 29세때 ㅡ당나라가
태평하여 일이없다고 한탄하다
가 동쪽나라에서 전쟁이 일어
났다는 소식을 듣고.
답 3번 장길 ㅡ10살이 많음
답 4번 중국 절강성 소흥부에서
대사마대장군 장원의 아
들로 태어났다.
1. 직래 형님은 90점입니다. 문제 4번 답은 좀 더 집중해서 읽어본 뒤에 답해주시기 바랍니다. 저는 이 "장길(張吉)"이라는 분은 우리 시조(始祖) 할아버지에게는 매우 중요한 분이라고 봅니다.
2. 읽은 분들은 꼭 문제에 답을 하여 잘 읽었음을 확인 받으시기 바랍니다. 댓글 달아주는 분들이 고마운 분들이고, 이 카페를 활성화시키는 분들입니다. 글을 올렸는데, 별 반응이 없으면 글 올린 분이 머쓱해질 수가 있습니다. 컴맹은 어쩔 수 없지만.
3. 조직래 형님(1947년생, 돼지띠) 댓글 감사합니다.~~~~~
점수가 별로 안좋네 ㅡ공부좀 더해야 되겠다.
관정 스님의 열정과 노고에 깊은 감사를 드리면서 저의 소견을 올려봅니다.
당나라는 황소의 난(875~884) 이후 혼란을 거듭하다가 907년 멸망한다. 이후 50여 년 동안 북쪽에서는 5개의 왕조(후양→후당→후진→후한→후주)가 교체되고 남쪽에는 10개의 나라가 난립하는데 이 시대를 5대 10국 시대라 한다. 이 5대 10국을 마감한 이가 바로 송(960~1279)을 건국한 태조 조광윤(927~976)(趙匡胤 : 趙鼎 선조와 같은 趙씨일 가능성이 아주 높음)이다.
“장길은 888년에 태어나 5세(892)에 아버지 장원(대사마대장군:육군참모총장)을 따라 당나라 말기의 혼란을 피해 신라로 망명하여 강릉에 머물다가 안동에 정착하였다. 18세(905년)에 당나라에 다시 들어가 24세(911년:후양)에 문과에 장원급제하여 벼슬이 이부상서에까지 올랐으나 벼슬을 버리고 926년(후당)에 장길(39세)은 조정(趙鼎:29세) 형제들과 함께 우리나라에 다시 들어와 안동에서 제자들에게 학문을 가르쳤다.” 라고 되어있는데, 이 내용을 분석해보면 장길과 조정은 후당(923~936)인 이라고 볼 수 있다.
926년은 각지에서 일어난 반란과 내부의 권력 다툼으로 후당은 큰 혼란에 빠져 있던 시기였다. 이 때 장길은 후당의 권력 다툼에서 밀려나 다시 근거지가 있는 안동으로 망명해 온 것으로 추측된다. 그리고 조정(趙鼎)은 장길과 생사고락을 같이 했던 최측근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그래서 장길을 따라 망명하여 함께 생활했을 것이다. 그런데 930년 고창 전투 당시 경남 합천은 완전히 후백제의 지배권 안에 있던 지역이다. 따라서 합천에서 의병을 일으켰다고 하는 것은 무리가 따른다. 중국에서 오신지 4년 밖에 되지 않고, 장길은 안동에서 제자들을 가르치고 있는데 홀로 합천에서 의병을 일으킬 만한 힘이 있었을까? 좁은 나의 소견으로는 고창 전투에 장길과 함께 참가하여 공을 세우고 난 뒤 후삼국 통일 후에 합천으로 내려와 터전을 마련하지 않았을까 추론해 보는 바입니다. 그리고 두 아우 부(釜)와 당(鐺)의 후손들이 각지로 흩어지고 세월이 흐르면서 趙씨 성의 본관이 21개로 늘지 않았나 하는 추론도 해봅니다. 옛 어른들 말씀에 趙자를 쓰는 姓氏들끼리는 결혼하면 안 된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아침에 일어나서 보니, 조광제 님(1959년 하림생 )께서 댓글을 달아 놓았네예. 매우 반갑고 감사합니다. 조광제님은 부산대학교 역사교육학과를 졸업한 뒤 줄곧 부산 해운대고등학교 역사교사로 근무하다가 1년 전에 정년퇴직한 분입니다. 트머아제 조용석의 외아들이고, 조민영(女), 조은한(子)의 아버지입니다.
조광제님이 우리 시조 할아버지가 중국에서 들어올 때의 중국 상황을 알 수 있게 해주어서 고맙습니다. 일단 <동국명현언행록> 속에 들어 있는 위의 텍스트에 기록돼 있는 내용이 우리가 신뢰할 만한 것이 되는지를 확인해봐야 할 것 같습니다. 제가 이렇게 저렇게 이 기록의 정확성을 크로스(cross) 체크해 본 결과, 약 95~98% 정도의 정확성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확인됩니다. 중국에서 같이 들어 온 장길의 족보 내용과도 일치하고, 또 한반도 신라말 후삼국의 역사와도 그 연대 및 사건이 일치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세부사항은 미세한 오류가 발견되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고창(안동)전투 상황을 묘사하는 장면에서 그 전투 3년 전에 일어났던 공산(팔공산) 동수(桐藪,동화사)의 상황이 등장하는 것은 명백한 오류라고 볼 수 있습니다.
<동국명현언행록> 속에 들어 있는 이 기록은 사용한 어휘나 한문의 문체로 볼 때 1927년 그 때 작성된 것으로 보입니다. 물론 <동국명현언행록> 편저자도 밝히고 있듯이 함안조씨 집안에서 소장하고 있는 옛 문서들을 바탕으로 해서 작성한 것으로 보입니다. 전해내려오는 옛 문서 내용에 오류가 있었을 수도 있고, 또 1927년에 이 글을 그 시대에 맞는 어휘와 표현과 문체로 고쳐쓰면서 고쳐쓰는 사람이 이해하기 쉽도록 만들기 위해 원래 옛 문서에는 없던 내용을 삽입해 넣은 부분도 있을 수 있는데, 그 때 삽입해 넣으면서 1,000년 전에 일어났던 전투에 대해 다 알 수가 없어서 일어난 착오일 수도 있습니다. 우리 시조 솥 정(鼎) 자 할아버지께서 중국에서 한반도로 들어온 지 4년 밖에 안 된 분이 합천에서 의병을 일으켰다는 것은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기가 어렵기 때문에 그 합천은 안동 부근의 어떤 곳이 아닐까 라고 생각해 볼 수도 있다고 봅니다. 하지만 저는 그 합천은 대야성(大耶城)의 합천일 가능성이 훨씬 더 높다고 봅니다. 우리 시조 할아버지가 단독으로 합천에서 의병을 일으키지 않았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아니면 합천에서 의병을 일으켰다는 내용 자체가
잘못된 것일 수도 있을 것입니다.
우리 시조 할아버지는 아마 중국에서부터 장길과 아주 가깝게 지내면서 그를 상관으로 모셔왔던 것이 아닌가 합니다. 그 당시 장길은 정적(政敵)인 후당의 김남석에 의해 모함을 당해 관직에서 물러났고, 그 때 한반도 후삼국의 정세가 복잡하게 돌아가자 자신에게 충직(忠直)하고 전투를 잘 하는 조정(趙鼎)의 3 형제를 데리고 한반도로 들어왔던 것이 아닌가 합니다. 의병을 일으킬 때는 미리 의도를 가지고 장길(張吉)과 시조 할아버지가 합천으로 들어갔던 것이 아닌가 합니다. 합천지역에서 약3~4년의 작업 끝에 의병을 일어킬 수 있었다고 봅니다. 장길과 우리 시조(始祖) 할아버지는 이미 중국 관계(官界)에서의 복잡한 정치 상황들을 다 겪은 프로선수였다고 볼 수 있습니다. 당시 장길은 40대 초중반이었고, 우리 시조 할아버지는 30대 초중반이었습니다. 두 사람은 프로선수로서 한참 힘을 쓸 수 있는 나이였죠. 특히 장길은 중국 과거시험에 합격하여 문관 고위직인 정3품 직위인 이부상서 자리까지 올라갔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앞으로 한반도 후삼국의 정세가 어떻게 돌아갈지 잘 알았을 것이라고 봅니다.
그 두 사람은 합천과 안동이 군사 요충지라는 사실도 잘 알았을 것이고, 앞으로 이 후삼국의 전쟁에서 승리하려고 하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잘 알았다고 봅니다. 그래서 김선평과 권행은 안동지역에서 의병을 일으키고, 장길과 우리할아버지는 합천지역에 미리 침투하여, 의병을 일으켰던 것이 아닌가 합니다. 이 때부터 합천은 우리 함안조가에게는 아주 중요한 지역(고향)이 되어, 조선초까지 계속되어 왔던 게 아닌가 합니다. 함안조가 10세손 할아버지인 전서공 열(悅) 자 할아버지께서 이성계가 역성(易姓)혁명을 하였기에 공조전서(工曹典書)라는 장관직을 집어던지고 두문동으로 들어간 뒤 얼마 안 있어 홍재, 이오와 함께 합천으로 내려와 1~2년 정도 살았는데, 아마 그 때 합천이 고향이 아니었던가 합니다. 함안조가 10세손인 전서공 그 윗 대의 산소들은 합천 반포에 있었다는 것이 옛 기록에 남아 있습니다. 그 이후 임진왜란 및 여러 번의 전란과 함안으로의 이주, 그리고 벼슬(관)직을 맡아서 멀리 떨어진 지역에 근무하면서 산소를 잃어버렸던 것입니다.
당시는 호족의 시대로서 호족은 정치적, 군사적, 경제적 지배권을 가진 토착세력을 말하는데, 실제 백성들은 호족의 지배하에 있었다. 그런데 적진에 들어가 3~4년 만에 호족 세력으로 성장한다는 것은 당시로서는 불가능한 일이고, 의병을 일으켰다는 것은 조선시대의 표현으로 임진왜란 이후에 족보를 처음 만들 당시의 느낌이나 감성으로 표현하지 않았나 사료됨.
@조광제 이 앞에서도 말했듯이 이 <동국명현언행록> 에 들어 있는 조정(趙鼎)의 공적에 관한 내용은 100% 다 정확하게 기록된 것이라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미 명백한 오류가 발견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솥 정 자 조정(趙鼎) 할아버지가 신라말에 합천에서 의병을 일으켰다는 내용이 사실일 가능성이 70~80% 정도는 된다고 봅니다. 만약 <동국명현언행록>에 나오는 이 합천이 안동 부근의 어떤 지역 이름이 아니었을까 라고 추측하려면 그런 이름을 실제로 사용한 지역을 문헌을 통해 찾아내야 설득력을 확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의병을 일으켰다는 표현은 <동국명현언행록>을 출판할 당시의 언어로 표현한 것이 아닌가 합니다. 그리고 의병은 꼭 임진왜란 때 생겨난 용어가 아니라고 봅니다. 고구려의 안시성 싸움에서 의병들이 일어나 수, 당과 맞서 싸웠고, 고려 때는 대몽골항쟁에서 농민, 천민들이 항쟁의 주체로 활동하였습니다. 만약 그 당시에 후백제 견훤이 920년에 대야성(합천)을 함락한 뒤 930년까지 10년 동안 계속 그 지역을 지배하고 있었다면, 그 지역민과 호족들은 불만이 많았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조성래 중국에서 건너온 조정(趙鼎)이 그 지역을 오랫동안 지배해왔던 호족들과 손을 맞잡고 견훤의 군대를 몰아내자고 결의하여 의병을 일으킬 수 있었다고 본다면, 무리가 있습니까? 여기서 의병은 향군(鄕軍), 즉 유사시 징집되는 군인으로 해석됩니다.
@조성래 우리 선조께서 합천에 자리 잡은것믄 틀림없으나 그 시점을 재고해볼 필요가 있을것 같습니다. 견훤에게 불만이 많은 호족들과 손잡고 세력을 키울 수는 있습니다만 장길에 관련된 기록을 보면 "926년에 안동에 다시 와서 제자들을 가르쳤다" 라고 되어있는데 조정 선조께서 홀로 합천으로 가셨을까 의문이 들며, 고려시대 우리 선조들이 합천에서 대를 이어왔기때문에 조선후기 족보를 처음 편찬할 당시 시조 할아버지의 이야기를 약간 미화하여 삽입한것이 아닌가 추측됩니다.
합천에서 거병한것이 사실이라면 고려사에 그 기록이 보여야 정상인데 그렇지 않은걸로 볼때 더욱 그런 생각이 듭니다.
합천은 함안조씨에게는 아주 중요한 곳입니다. 합천에가면, 운구서원(雲衢書院, 운구서당)이 있습니다. 이 서원은 전서공 조열 할아버지와 홍재, 이오, 이 세 분의 정절을 기리기 위해 1786(정조 10)년에 왕의 허락하에 처음 만들어졌다. 여기에는 이 세 분의 위패가 모셔져 있다. 대원군의 서원철페령에 의해 없어졌다가 1923년 홍재의 후손들에 의해 다시 합천 두심동에 지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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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미난 사실 발견 : 국민대학교 이건호 교수가 쓴 책 <한국사를 움직인 100대 사건>을 보니까 후백제 견훤도 경북 문경지역의 호족출신이네요. 다음 문장을 옮깁니다.
"견훤은 경북 문경 지역의 호족 아자개(阿慈介)의 아들로, 군 지휘관을 지낸 뒤 농민 세력을 규합해 무진주를 점령하면서 패권 싸움에 뛰어든다. 6두품 출신 유학자인 최승우(崔承祐)를 책사로 삼아 900년 후백제를 일으키면서 본격적인 건국사업에 나선다."
왕건은 개성의 호족출신이고, 견훤은 경북 문경의 호족출신이네요. 그래서 강릉, 경북 문경, 안동에서부터 울산지역에 이르기까지 110개가 넘는 성의 호족(城主성주)들이 견훤에게 거부감을 크게 느낄 이유가 별로 없을 수도 있었겠네요. 개성 사람인 왕건과 경상도 사람인 견훤이 싸울 때 정서적으로는 견훤의 편을 드는 호족들도 꽤 많이 있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나 고창(안동)지역 호족인 김선평, 권행, 장길이 고창전투에서 고려 왕건의 편을 들어서 견훤의 군대를 공격하여, 왕건이 완승을 거두도록 한 것은 단순히 견훤이 3년 전에 경주를 침공해서 신라 경애왕을 죽이고, 온갖 약탈을 해간 것에
대한 의협심(義俠心)의 발로로 그렇게 한 것으로 보이네요. 인터넷에 "고창전투"를 검색해 보면, 거기에 이건호 교수의 책 중 고창전투에 대한 내용이 상세하게 나옵니다.
우리가 학교에서 배우지 않았던 많은 중요한 사건들이 있네요. 족보 연구를 하면서 많은 것을 배웁니다.
난해한 고문서에 대한 이와같은 친절하고 자세한 해석과 해설은, 우리 선조의 발자취를 찾고 집안의 자긍심을 고취하는 데 상상할 수 없이 큰 밑거름이 됩니다.
더욱이 다른 이도 아닌 그 후손이 스스로 조사하고 연구하여 도출해 내었으니, 얼마나 정성과 애정을 쏟아 부었을지는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만인이 인지하리라 생각합니다.
이처럼 우리 가문을 올바로 널리 알리려는 노력에 쉼과 끝이 없는 성래 님께 무한한 감사와 존경을 표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