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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8.01 통권 587호(p538~54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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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미의 문화사 - 재미는 관점을 즐기는 일이다 특전사보다 해병대가 행복한 이유 |
김정운 명지대 교수·문화심리학 entebrust@naver.com |
사는 게 팍팍할수록 사람들은 처세서를 읽는다. 그러나 처세서에 씌어 있는 대로 사는 일은 쉽지 않다. 습관과 삶의 태도를 바꾸라고 하지만, 정작 ‘어떻게 바꿔야 하는지’에 대해선 알려주지 않기 때문이다. 여기, 김정운 교수가 그 해답을 제시한다. 자기 자신을 바꿀 수 없다고 말하는 사람도 많겠지만 절망하지 말라, 그 해결책 또한 알려줄 것이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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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셔作 ‘천국과 지옥’.
나는 미국식 ‘성공처세서’를 싫어한다. ‘성공하려면 수십 가지 습관을 가져라’ ‘새벽부터 벌떡벌떡 일어나라’ ‘네 삶의 방식을 바꿔라’ ‘마인드를 바꿔라’ 등과 같은 내용의 책들이다. 다 비슷한 이야기를 제목만 바꿔 써놓은 것을 돈 주고 사보는 이들이 있다는 사실이 신기할 정도다.
그런데 요즘 경제 경영관련 책 중에서 이런 성공처세서가 꽤 잘 팔리는 모양이다. 책방에는 이런 종류의 책들이 꼭 앞쪽에 진열되어 있다. 그뿐만 아니다. 기업 강연을 가보면 화장실 소변기 앞에 이런 종류의 글들이 번호 순서대로 예쁘게 코팅되어 붙어 있다. 이런 글들을 아무 생각 없이 멍하게 읽다 보면, 갑자기 오줌이 콱 막힌다. 나에게 해당되는 것이 하나도 없기 때문이다.
꼭 이런 식이다. 미국식 성공처세서는 한결같이 사람을 좌절케 한다. 이런 처세서가 던지는 메시지의 공통점은 한결같이 ‘너를 바꿔라’다. 그런데 사람이 그렇게 쉽게 바뀌는가? 누구나 한 번쯤 자신에 대해 생각해보라. 철든 이후에 자신의 성격의 바뀐 적이 있는가? 죽다 살아난 사람들도 웬만해선 성격이 바뀌지 않는다. 그런데 이렇게 바꾸기 힘든 자신을 자꾸 바꾸라 하니 사람들은 매번 좌절한다. 이 좌절에 길이 들어 다른 제목의 처세서가 나오면 다시 책을 사게 된다. 혹시나 하고. 심리학을 30년 가까이 전공한 나는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사람은 절대 안 바뀐다.
사람은 절대 안 바뀐다
누구나 꼭 고치고 싶은 개인적인 약점이 있다. 나도 마찬가지다. 내게 치명적인 결함은 열 받으면 확 뒤집히는 시한폭탄 같은 성격이다. 잘나가다가 일이 뜻대로 안 풀리면 제 성질을 못 이겨 뒤엎어버린다. 사람관계도 마찬가지다. 잘 지내다가도 단 한 번의 만회하기 힘든 실수로 인간관계가 망가지기도 한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운전하다가 뛰어나와 멱살잡이도 참 여러 번 했다. 이제 교수라는 나름의 사회적 지위도 있는 만큼 이런 실수를 범하지 않았으면 하지만, 여전히 욱하는 성격 탓에 크고 작은 사건을 저질러 잠 못 이루는 밤이 여러 날이다.
고민하는 내게 아내는 그 성격을 구태여 고치려 하지 말라고 충고한다. 그리고 서류함을 뒤져 내 고등학교 생활기록부 복사본을 가져다 준다. 고 2때 담임선생님은 이렇게 써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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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의 고등학교 2학년 생활기록부. 특기사항 란에 그때나 지금이나 ‘쉽게 격하는 결점 있음’이라고 적혀 있다.
‘과묵하고 착실한 성격이나 쉽게 격하는 결점 있음.’ 참 잔인한 선생님이다. 어쨌거나 고등학교 2학년 때나 지금이나 쉽게 격하는 성격은 하나도 변한 게 없다는 얘기다. 그런 내게 자꾸 ‘너를 바꿔라’고 하는 미국식 처세서는 정말 참기 힘든 스트레스일 뿐만 아니라, 끊임없이 자신에 대해 좌절하는 안 좋은 습관만 생기게 한다.
사람의 성격은 안 바뀐다. 적어도 미국식 처세서에서 이야기하는 그런 종류의 성격은 절대 안 바뀐다는 이야기다. 그러나 인간의 성격을 다르게 규정하면 양상은 아주 달라진다. 개체로서의 성격은 변하지 않지만, 사회적 컨텍스트, 즉 맥락에 따라 성격은 아주 쉽게 변화할 수 있다. 인간의 성격은 맥락과의 게슈탈트(Gestalt)이기 때문이다. 게슈탈트, 즉 사회적 맥락과의 통합된 전체란 이야기다. 그래서 사회적 맥락이 달라지면 성격은 바뀌게 되어 있다.
내 성격은 동일하지만 사회적 맥락에 따라 변할 수밖에 없다는 이야기다. 강의할 때의 나는 아주 ‘권위적’이고, 끊임없이 잘난 체한다. 나름 터득한 효과적인 강의기법이다. 그러나 아내 앞의 나는 아주 ‘비겁하다’. 우리 아이들에게 나는 아주 ‘자상한’ 아빠다. 나는 우리 아들들이 몹시 예쁘고 사랑스럽다. 우리 대학원생들에게 나는 아주 ‘엄격한’ 선생이지만 학부생들에게는 ‘재미있는’ 교수다. 나는 한 사람이다. 그러나 맥락이 어디냐에 따라 나는 권위적이고, 잘난 체 하고, 비겁하고, 자상하고, 엄격하고, 재미있는 사람이 된다.
이 사회적 맥락에 대한 인식이 부재할 경우 상황은 매우 심각해진다. 엄격해야 할 때 비겁해지고, 재미있어야 할 때 권위적이 되고, 자상해야 할 때 잘난 체하는 대책 없는 인간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미국식 성공처세서의 문제는 바로 여기에 있다. 맥락에 관한 어떠한 인식도 없이 자꾸 ‘너를 바꿔라’고 하니 맥락에 따라 의도하지 못한 황당한 결과가 나오게 되는 것이다. 사람은 안 바뀐다. 피부살갗 안에 들어 있는 나는 절대 안 바뀐다. 중요한 사실은 자신을 둘러싼 맥락을 파악하는 능력, 즉 맥락적 사고는 ‘재미’의 필수불가결한 조건이라는 것이다. 삶의 재미는 바로 이 맥락을 바꾸는 능력에서 나온다.
맥락을 바꾸면 재미가 생긴다
훌라후프 만드는 한국의 한 회사 사장이 미국에서 엄청난 양의 훌라후프를 주문받았다. 은행 빚을 내서 훌라후프를 잔뜩 만들고 선적하기 위해 인천 앞바다에 쌓아놓았다. 그런데 미국에서 연락이 왔다. 주문한 회사가 망했다는 것이다. 이런. 이 사장도 같이 망하게 생겼다. 사장은 이 훌라후프를 팔려고 한국의 운동용품점을 발에 불이 나도록 돌아다녔다. 그러나 모두들 한결같이 대답한다. “아니, 요즘 누가 훌라후프 해요? 필요 없어요.” 절망한 사장은 터벅터벅 걷다 들판에 가득한 비닐하우스 단지가 눈에 들어왔다. 사장의 아이디어가 생기는 순간이었다. 그러곤 선적장에 가득한 훌라후프를 전부 반으로 잘라 반 토막 난 훌라후프를 비닐하우스 제작공장에 팔아버렸다. 계산해보니 돈은 갑절로 벌렸다.
반 토막 난 훌라후프는 모두 비닐하우스 뼈대로 쓰였다. 작은 비닐하우스를 만들 때 대나무를 썼는데, 대나무는 잘 부러지고 자칫하면 비닐을 찢어지게 했다. 그런데 반 토막 난 훌라후프는 비닐하우스 뼈대로 기가 막히게 들어맞는 것이었다. 휘어지지도 않고, 비닐을 찢지도 않고 완벽한 조합을 이뤘다. 맥락을 바꾼다는 것은 바로 이런 것이다. 훌라후프를 운동하는 것으로만 생각하면 빚을 갚을 수 없지만, 농사짓는 맥락에서 활용하니 엄청난 이익을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도대체 누가 훌라후프를 운동하는 것으로만 생각하라고 했을까? 바로 자신이다. 맥락은 바로 자신이 규정하는 것이다.
지식기반사회의 맥락 바꾸기는 지난 달에 설명한 ‘정보와 정보의 관계를 통해 형성되는 지식’에도 동일하게 적용된다. 20세기 초반의 러시아 심리학자 루리아(Luria)의 실험을 예로 들어 살펴보자. ‘도끼, 망치, 나무, 톱. 이 네 가지 중에서 하나를 빼라’면 당신은 무엇을 빼겠는가? 물론 나무다. 나무 패는 일과 관계없이 자란 이들은 한결같이 나무를 뺀다. 다른 것들은 도구이고, 나무만 대상이기 때문이다. 이들은 ‘도구’와 ‘대상’이라는 ‘추상적 지식(abstract knowledge)’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만약 동일한 질문을 러시아 벌목공들에게 던지면 이들은 잠시 고민하다가 ‘망치’를 뺀다. 이들에게 나무 없는 도구는 아무런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가능하다면 다 사용해야겠지만, 구태여 하나를 빼라면 다른 것들에 비해 불필요하게 느껴지는 망치를 빼겠다는 것이다. 이들은 나무를 자른다고 하는 ‘실천적 지식(practical knowledge)’을 가지고 있다. 도끼, 망치, 나무, 톱이라는 동일한 정보들은 이렇게 각기 다른 방식으로 엮인다. 정보와 정보의 관계는 각 사람이 처한 맥락에 따라 전혀 다른 방식으로 분류된다. 추상적 지식과 실천적 지식, 이 두 가지는 전혀 다른 지식체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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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선택한 일은 무조건 재미있다
그렇다면 맥락은 도대체 어떻게 바뀌는 것일까? 사람들은 흔히 맥락을 내 영향력 밖의 어떤 것으로 여긴다. 그리고 그것을 객관적 맥락이라고 부른다. 그래서 어쩔 수 없다고 여긴다. 그러나 객관적 맥락은 존재하지 않는다. 객관적 맥락을 인식하는 주관적 포지셔닝이 존재해야만 객관적 맥락이 가능해지기 때문이다. 즉, 주관적 관점이 객관적 맥락에 선행한다는 얘기다. 게슈탈트 원리를 설명하는 ‘루빈의 컵’이라는 그림을 보자 .
검은색을 맥락으로 하면 우아한 장식용 컵이 보인다. 그러나 하얀색을 맥락으로 하면 서로 마주 보는 사람의 얼굴이 보인다. 그럼 우리는 컵을 봐야 할까, 아니면 마주보는 두 사람의 얼굴을 봐야 할까. 도대체 어느 쪽이 객관적인가? 둘 다 객관적이 될 수 있다.
객관적 맥락에 선행하는 자신의 관점을 발견할 때, 우리는 기쁨을 느낀다. 주체로서의 자신을 발견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관점을 변화시켜 맥락을 바꿀 때, 우리는 희열을 느낀다. 행위의 주체가 되기 때문이다.
재미의 가장 중요한 전제 조건은 자신이 행위의 주체가 될 때다. 그래서 심리학에서는 ‘선택의 자유(freedom of choice)’가 재미를 결정짓는다고 설명한다. 높은 산에 땀을 뻘뻘 흘리며 올라가는 일을 만약 누가 시켜서 한다고 생각해보자. 절대 못 올라간다. 그러나 자기가 선택했기 때문에 사람들은 힘들어하면서도 어떻게 해서든 올라가려 한다. 내가 선택한 일은 무조건 재미있다.
일이 재미없는 이유는 돈을 받기 위해 일하기 때문이다. 시켜서 하는 일이란 얘기다. 그러나 내가 선택했다는 자부심이 먼저고, 돈이 나중이라고 생각하면 일은 얼마든지 즐겁고 보람 있게 여겨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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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빈의 컵.’ 검은색을 맥락으로 하면 컵이 보이고, 하얀색을 맥락으로 하면 마주 보는 두 사람의 얼굴이 보인다. 이렇게 맥락을 마음대로 바꿀 수 있어야 사는 재미가 있다.
관점에 굶주린 한국인
심지어 군대도 마찬가지다. 해병대나 특전사나 훈련은 모두 힘들고 어렵다. 그러나 해병전우회는 동네마다 컨테이너를 가져다놓고, 동네에 어려운 일만 터지면 군복 입고 나타나는 반면, 특전사는 그렇지 못하다. 왜 이런 차이가 나오는 것일까? 해병대는 내가 선택해서 지원하는 곳인 반면, 특전사는 차출되는 곳이기 때문이다. 앉으면 국방부 시계 타령이나 하는 보병은 더 말할 나위도 없다. 보병은 그야말로 끌려가는 곳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훈련은 해병대에 비교할 수 없이 단순해도 훨씬 힘들고 길게 느껴진다. 그만큼 선택의 자유는 중요하다. 내가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을 인식하고 대안적 관점을 스스로 선택하는 일은 재미있는 삶을 살기 위해 가장 필요한 과제다.
사람들에게 물어본다. “요즘 재미있어요?” 대답은 심드렁하다. 다시 물어본다. ‘지금 뭐하면 재미있을 것 같아요?’ 그럼 대부분 대답이 이렇다. “영화?” “여행?” 이런 대답은 우연이 아니다. 앞서 이야기한 대로 재미는 20세기에 새롭게 의미가 부여되며 사회적으로 구성된 단어이기 때문이다. 영화는 물론 20세기에 들어서 비로소 대중적 엔터테인먼트의 도구가 된 것이고, 여행 역시 기차가 발명된 후에 가능해진 활동이다. 영화를 보거나 여행을 다니며 우리가 즐기는 것의 내용은 도대체 무엇일까? 관점, 즉 퍼스펙티브(perspective)다.
여행을 가고 싶다는 이들에게 나는 묻는다. 도대체 어디로 여행을 가고 싶으세요? 대부분 유럽여행을 가고 싶단다. 도대체 유럽 어디로요? 그럼 대답이 없다. 독일에서 13년을 지내는 동안 내게도 매년 유럽여행에 굶주린 친구, 친척들이 한국에서 찾아왔다. 내 차는 고작 시속 130km를 달릴 수 있는 10년 된 고물 자동차기에 매번 차를 빌리곤 했다. 약 2주간의 여행을 마치고 차를 반납할 때, 렌터카회사 직원은 내게 이렇게 물었다. “한국 사람이지요?” 나는 놀라 물었다. “어떻게 알았나요?” 그 직원은 이렇게 대답했다. “2주 동안 5000km를 달릴 수 있는 사람은 한국 사람밖에 없습니다. 하루에 적어도 300km 이상을 달렸다는 이야긴데, 이렇게 여행하는 사람은 분명히 한국 사람입니다.” 허걱. 황당하지만 정확한 관찰력이다. 정말이다. 유럽 여행에서 그저 달리기만 하는 사람은 한국사람뿐이다. 그 렌터카 직원은 도대체 그게 자동차 경주지 어떻게 여행일 수 있느냐고 내게 되묻는다. 정말이다. 도대체 왜들 그렇게 달리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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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파엘로의 ‘성처녀의 결혼식’. 초기 원근법 구성의 원리를 잘 보여주는 그림이다.
하나의 관점 vs 다양한 관점
보고 싶은 것이다. 즉 관점에 굶주렸다는 것이다. 내가 일상적으로 살아온 세상과는 전혀 다른 세상을 이번 기회에 원도 없이 보고 싶은 것이다. 그래서 미친 듯 달리는 것이다. 압권은 스칸디나비아 반도를 달리는 일이다. 한도 끝도 없는 피요르드 해안을 달린다. 그곳의 여름밤은 백야현상으로 인해 길어야 고작 3시간이다. 그러니까 밤 12시가 가까워야 해가 진다. 한국 사람들은 그때까지 달린다. 그리고 새벽 3시에 해가 뜨면 부스럭거리며 일어나 또다시 달린다. 사물을 볼 수 있는 한 무조건 달린다. 정말 대단한 민족이다.
미국식 처세서에도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것이 바로 이 관점이다. 인생을 바꾸려면 관점을 바꾸라고 한다. 그런데 도대체 무엇이 관점인지, 관점을 어떻게 바꿀 수 있는지 설명하지 않고, 무조건 관점만 바꾸라고 한다. 그러니 어찌 관점이 바뀌겠는가? 그래서 인문학적, 사회과학적 통찰이 필요한 것이다. 관점의 본질을 깨달아야 관점을 바꿀 수 있다.
관점은 원근법에서 나온다. 인류역사에서 가장 위대한 발명이 뭐냐고 누가 내게 묻는다면 나는 원근법의 발견이라고 말한다. 원근법도 영어로 퍼스펙티브(perspective)다. 그러니까 관점과 원근법은 어원상 동일한 단어다. 관점을 즐기는 것은 원근법으로 인해 가능해진 근대 이후의 문화현상이다. 따라서 관점을 설명하려면 원근법을 먼저 이해해야 한다.
원근법이란 3차원을 2차원으로 축약하는 기술이다. 원근법을 제일 먼저 발명한 이들은 르네상스시대 화가들이다. 앞의 그림은 라파엘로의 ‘성처녀의 결혼식’이다. 초기 원근법을 설명할 때 예로 자주 언급되는 그림이다. 원근법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소실점’의 위치다. 소실점은 그림에 등장하는 모든 요소의 중심을 잡아주는 부분이기 때문에 그림을 바라보는 이의 눈이 어디로 향해야 하는지를 알려주기도 한다. 현실에는 불가능하지만 모든 요소가 한 점으로 수렴된다면, 다시 말해 소실된다면 사람들의 관점은 동일할 것이다.
관점의 비밀이 숨겨진 그림
소실점을 중심으로 그림의 모든 요소는 떨어져 있는 거리에 맞춰 그 크기가 배열된다. 가까운 사물은 크게, 멀리 있는 사물은 작게 표현하는 원근법이라는 합리적 장치를 통해 우리는 3차원의 실제 사물에 근접한 시각적 경험을 하게 된다. 이런 방식으로 원근법은 객관성과 합리성이라는 근대성의 기초를 만든 근원이 됐다.
서양이 동양을 식민지로 만들어 초토화하는 계기도 바로 이 원근법에서 비롯됐다. 동양화에도 물론 원근법이 있다. 그러나 명도나 채도를 통한 원근법이다. 소실점을 중심으로 한 원근법은 발견하기 어렵다. 아래 그림은 추사 김정희의 세한도다. 그림의 미학적 가치는 높지만, 원근법적 원리를 전혀 반영하고 있지 않다. 바로 이러한 원근법의 부재는 객관성과 합리성에 기초한 과학적 사고의 부재로 이어지고, 서양의 앞선 과학기술에 형편없이 무릎 꿇고 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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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사 김정희의 ‘세한도’. 그림의 미학적 가치는 높지만, 소실점을 통한 원근법적 원리는 발견하기 어렵다.
물론 21세기는 사정이 사뭇 달라진다. 동양문명이 가지고 있는 통일되지 않은 다양한 관점, 즉 싱글 퍼스펙티브(single perspective)가 아닌 멀티플 퍼스펙티브(multiple perspective)는 21세기 포스트모던 시대에 훨씬 적합한 형태다. 근대 이후, 서구로 몰려갔던 문화와 부의 주도권이 동양으로 옮겨오기 시작한 것도 그런 맥락이다. 물론 그 동양에 한국도 해당되는지는 또 다른 토론의 주제다. 좌우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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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오나르도 다빈치의 그림 ‘수태고지(受胎告知)’는 원근법적 원리를 어겼다는 이유로 부정적인 평가를 받았다. 그러나 이 그림을 오른쪽에서 바라보면 원근법이 구현된 것을 알 수 있다.
원근법을 발명한 르네상스 시대의 화가들 중에서도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원근법은 압권이다. 특히 그의 작품 ‘수태고지(受胎告知)’는 내가 이 글에서 논하고 싶은 원근법의 철학적 기초가 아주 깔끔하게 구현되어있다. 마리아에게 천사가 나타나 아기를 잉태할 것이라고 알리는 성경의 장면을 묘사한 이 그림에 대한 평가는 오늘날까지 상당히 부정적이다. 다빈치가 20세 때 그렸다고 알려진 이 그림은 원근법적 원리에 충실하지 못한 미숙한 그림으로 평가받는 경우가 많다.
우선 우측 벽의 각도다. 각 벽돌의 각도는 그림 중앙 쪽의 소실점으로 일치되어야 하지만 각 벽돌의 끝 선을 길게 늘여보면 그 끝이 중앙의 소실점으로 수렴되지 않는다. 마리아 앞의 식탁도 좀 이상하다. 식탁이 마리아 앞쪽에 있어야 하는데 그림 앞쪽으로 나와 있다. 마리아의 오른팔도 왼팔에 비해 상당히 길게 묘사되어 있다. 그림 왼편에 있는 천사의 전체적인 자세도 뭔가 어색하다. 이 그림을 3차원으로 묘사하면 가운데 그림처럼 된다. 마리아의 오른팔이 왼팔에 비해 훨씬 긴 기형적인 모습이 되는 것이다. 하지만 놀라운 일은 따로 있다.
원근법의 원칙에 어긋나는 이러한 그림을 다빈치가 의도적으로 그렸다는 사실이다. 이 그림에서 나타나는 원근법적 문제들은 그림을 정면에서 볼 때 생기는 것들이다. 그러나 이 그림을 오른쪽에서 올려다보면 앞의 이러한 문제들은 한꺼번에 해소된다(아래 그림). 오른쪽 벽돌들의 각도는 동일한 소실점으로 수렴되고, 마리아의 오른팔은 짧아지고, 식탁도 화면 안쪽으로 들어가며, 살찐 비둘기 같은 느낌이 들던 천사의 자세도 아주 자연스러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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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을 비스듬히 봐야 정상으로 보이는 이유는 이렇다. 이 그림은 원래 건물의 오른쪽 벽, 위쪽에 걸려 있던 것이었다. 그리고 건물의 구조상 아무도 정면에서 이 그림을 볼 수 없었다. 그러니까 이 그림은 처음부터 비스듬히 올려다봐야만 하는 것이다. 다빈치는 이 점을 미리 계산해 보는 사람의 위치를 고려해 그림을 그린 것이다.
사람들은 그림은 정면에서 바라보는 것이라는 고정관념에 사로 잡혀 있다. 그랬기에 500년이 가깝도록 이 그림이 원근법적으로 문제가 있다고 비판해왔던 것이다.
주체의 관점에 따라 맥락과 대상이 달라진다. 이런 인식론적 전환의 메커니즘을 다빈치는 그의 처녀작 ‘수태고지’에서 구현해냈다. 그림의 전체 구도를 결정하는 원근법적 맥락은 객관적인 것이 절대 아니다. 관점의 위치, 즉 그림을 바라보는 주체의 의도에 따라 원근법적 원칙도 변형된다. 자신의 의도에 따라 관점을 변경할 수 있는 사람만이 자기 삶의 주인이 될 수 있다. 내가 선택하고, 내가 변화의 주체가 될 때 느끼는 감정이 바로 재미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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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르사유 궁전의 정원은 왕의 창문을 소실점으로 자연을 원근법적 원리에 맞춰 재구성했다.
철도여행에서 느끼는 재미
회화에서 원근법이 등장한 이후 귀족들의 정원에도 원근법이 등장해 또 다른 재미를 불러왔다. 귀족들의 정원은 통제할 수 없는 자연을 축소해 자신의 손아귀에 넣고자 하는 욕구에서 시작됐다. 자신의 통제 안에 들어온 자연을 바라보며 그 전지전능한 관점을 즐기는 행위였다. 이 의도를 가장 적나라하게 반영한 것이 베르사유 궁전으로 대표되는 프랑스 정원이다. 프랑스 정원은 회화의 원근법적 원리를 역으로 자연에 적용한 경우다. 그러니까 3차원의 자연을 2차원으로 축소하는 방법론인 원근법이 다시 3차원으로 적용된 것이다. 베르사유 궁전은 왕의 창문을 소실점으로 하여 자연을 좌우대칭, 비율에 맞춰 인위적으로 재구성했다. 모든 것이 창문을 통해 바라보는 왕의 관점으로 수렴되도록 만들고, 정원을 바라보는 왕이 자신의 전능함을 피부로 느끼도록 한 것이다. 당시 왕의 재미는 이렇게 관점을 즐기는 것이었다.
왕과 귀족의 영역이었던 관점을 즐기는 행위는 근대 이후 대중에게 확산되기 시작한다. 증기기관의 발명과 이어진 기차의 발명으로 철도여행을 할 수 있었다. 이렇게 과학과 기술의 진보는 재미의 내용에도 혁명적 변화를 가져왔다. 사람들은 달리는 기차 안에서 세상이 달라지는 관점을 즐기기 시작했다. 나는 가만히 앉아 있는데 세상이 바뀌는 경험은 당시로는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의 엄청난 재미였다. 무서운 속도로 세상이 바뀌는 파노라마적 풍경을 발견하면서부터 사람들은 세상을 바라보는 새로운 관점을 즐기기 시작한다. 여행은 이렇게 관점을 즐기는 행위로 시작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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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마이크로소프트의 창을 통해 세상을 본다. 그리고 나를 보여준다. 사이버 세상에서 우리는 훔쳐보기와 드러내기라는 이중적 구조를 즐긴다.
사진과 영화라는 시각적 매체로 인해 또 한 번의 혁명적 변화가 닥쳐온다. 사람들은 실제가 아니라 극장이라는 인위적 공간에서 카메라 렌즈를 통한 인위적 관점을 즐기기 시작했다. 초기의 영화는 한 대의 카메라로 현장을 있는 그대로 찍고, 그것을 상영했다. 이후 20세기 초 세르게이 아이젠슈타인의 몽타주 기법이 등장하면서부터 관점의 편집기술은 재미를 불러왔다. 제작자 관점에 따라 대상이 마음대로 편집되고 조작되기 시작한 것이다. 다양한 카메라를 통해 모아진 관점을 편집해 즐기는 새로운 기술은 이후 히치콕의 영화로부터 21세기 한국의 ‘올드보이’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형태로 발전하게 된다. 오늘날 우리가 즐기는 대부분의 재미는 다양한 매체를 통해 굴절된 관점을 즐기는 것이라 할 수 있다.
Window를 통해 훔쳐보는 재미
마이크로소프트의 운영체계가 ‘윈도’인 것도 우연이 아니다. 컴퓨터 화면이 가상세계를 바라보는 창문이 되고, 우리는 이 창문을 통한 관점을 즐긴다. 우리는 이 창을 통해 남의 은밀한 세계를 본다. 아무도 내놓고 이야기하지 않지만 한국의 인터넷 통신이 가장 비약적으로 발전한 시기는 바로 ‘O양의 비디오사건’과 같은 훔쳐보기와 깊은 관련이 있다. 매일같이 타인의 블로그를 보는 것도 타인의 삶을 훔쳐보는 행위에 다름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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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운 ● 1962년 서울 출생 ● 고려대 심리학과 졸업, 독일 베를린대 박사(심리학) ● 베를린대 심리학과 전임강사 ● 現 명지대 여가경영학과 교수 ● 저서 : ‘휴테크 성공학’ ‘노는 만큼 성공한다’ ‘일본 열광’ 등 | |
사람들은 훔쳐볼 뿐만 아니라 드러내기도 한다. 하루도 빠지지 않고 자신의 삶을 블로그에 올린다. 사진뿐 아니라 내면의 아주 은밀한 내용까지 모두 올린다. 이런 행위는 자신의 삶을 드러내 타인의 시선을 즐기는 행위다. 바바리맨의 사이버적 형태라고나 할까? 관점의 발견에서 시작된 재미가 21세기에 들어서면서 훔쳐보기와 드러내기의 이중적 구조로 진화한다. 타인의 마음을 들여다보는 심리적 관점을 즐기기 시작한 것이다. 인간의 의사소통 행위가 재미의 내용이 된다.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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