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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2005. 06. 11.壽76歲
■이달충(李達衷, 1309 ~ 1385) / 壽76歲
행장 - 권상일 찬(撰)
신도비명 - 곽종석 찬(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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本傳[제정 이달충 전기]
이달충은 경주 사람이다. 아버지 이천(李蒨)은 과거에 급제하여 관직이 첨의참리(僉議參理)에 이르렀으며 월성군(月城君)에 봉해졌다.
이달충은 충숙왕 때 과거에 급제하였으며 여러 관직을 거쳐 성균좨주(成均祭酒)가 되었다.
공민왕 1년(1352) 전리판서(典理判書)에 제수되었으며 감찰대부(監察大夫)로 자리를 옮겼다. 8년(1359) 호부상서(戶部尙書)로 있을 때 팔관회(八關會)의 유사(有司)가 복야청(僕射廳) 남쪽에 손을 씻는 장막을 설치하고 울타리를 단단하게 세워 안팎을 갈라놓았다.
이달충은 형부상서(刑部尙書) 이정(李挺)과 함께 복야청 위에 앉아 있다가 울타리를 철거하도록 명하였다. 왕이 의봉루(儀鳳樓)에서 이를 보고는 대노하여 공을 잡아 옥에 가두라는 명을 내렸다. 좌우 측근들이 만류하여 가노(家奴)를 잡아 가두는 것으로 그쳤다.
어사대(御史臺)에서 다시 탄핵하였는데, 이정이 일찍이 내불당(內佛堂)의 제조로 있었기 때문에 특별히 용서해 주었다.
15년(1366) 왕은 이달충이 명유(名儒)이므로 발탁하여 밀직제학(密直提學)에 임명하였다. 당시는 신돈(辛旽)이 막 국정을 장악하고 있을 때였는데, 이달충은 여럿이 모인 자리에서 신돈에게 말하기를, “사람들이 하는 말이 공께서는 주색을 좋아하신다더군요.”하자, 신돈이 좋아하지 않았다. 이달충은 오래지 않아 파직되었다.
신돈이 죽음을 당할 때에 이르러 이달충은 시(詩)를 지었는데 “여우가 범의 위엄을 빌리니 곰들이 벌벌 떨었고, 여우가 남자로 변하여 호리니 여자들 줄줄 몰려들었지. 누런 개와 보라매 싫어하는 것은 마땅하나, 오골계와 백마는 무슨 죄란 말인가.〔威能假虎熊羆懾 媚或爲男婦女趨 黃狗蒼鷹尤所惡 烏鷄白馬是何辜〕”라는 구절이 있었다.
신돈은 사냥개를 두려워하여 사냥을 싫어하였다. 그는 방종하고 음탕하여 늘 오골계와 백마를 잡아 조양제(助陽劑)로 먹었다.
당시 사람들이 신돈을 ‘늙은 여우의 정기[노호정(老狐精)]’라 하였기에 위와 같이 말한 것이다.
나중에 계림부윤에 임명되었는데 사직 상소를 올렸으나 윤허를 받지 못했다. 우왕 11년(1385) 계림군(鷄林君)으로 있으면서 졸했으며 시호는 문정(文靖)이다. 성품이 강직하여 흔들림이 없었으며 사람을 알아보는 재주가 있었다.
일찍이 동북면 도순문사(東北面都巡問使)로 나갔다가 돌아올 때 환조(桓祖)가 들에서 전별연을 베풀어 준 적이 있었다.
태조(太祖)가 환조의 뒤에 서 있었는데, 환조가 술을 올리자 이달충은 서서 마셨고 태조가 술을 올리자 꿇어앉아 마셨다.
환조가 이상하게 여겨 그 이유를 묻자 이달충이 말하기를,
“이 아들은 참으로 신이한 사람이외다. 공이 미칠 바가 아니오. 공의 집안은 이 아들로 인해 반드시 위대하게 될 것이오.”
하며, 자손들을 그에게 부탁하였다.
저술한 《제정집(霽亭集)》이 간행되어 세상에 퍼져 있다.
이달충의 시문은 이제현에게 크게 칭찬을 받았다.
아들로 준(竴)ㆍ전(竱)ㆍ수(䇕)ㆍ횡(竑)이 있다.
홍목재(洪木齋)의 《휘찬(彙纂)》 명신열전(名臣列傳)에도 이 전이 수록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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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原文]
本傳[제정 이달충 전기]
李達衷。慶州人。父蒨。登第官至僉議參理。封月城君。達衷忠肅朝登第。累官成均祭酒。恭愍元年。拜典理判書。轉監察大夫 。八年。遷戶部尙書。八關會有司設盥洗幕于僕射廳南。堅藩限內外。達衷與形部尙書李挺坐廳上。令撤其藩。王在儀鳳樓見之 。大怒命繫獄。左右請之。止囚家奴。御史臺又劾之。挺嘗提調內佛堂。待原之。十五年。王以達衷名儒。擢爲密直提學。時辛旽方用事。達衷於廣坐謂旽曰。人謂相公好酒色。旽不悅。未幾見罷。及旽伏誅。公作詩有威能假虎熊羆懾。媚或爲男婦女趨。黃狗蒼鷹尤所惡。烏鷄白馬是何辜之句。旽性畏畋犬。惡射獵。其縱淫。常殺烏鷄白馬以助陽道。時人謂旽爲老狐精。故及之。後拜鷄林尹。上箋辭不允。辛禑十一年。以鷄林君卒。諡文靖。性剛直不撓。有鑑識。嘗爲東北面都巡問使。及還。桓祖餞于野 。太祖立桓祖後。桓祖行酒。達衷立飮。太祖行酒。乃跪飮。桓祖怪問之。曰。此子誠異人。非公所及。公之家業。此子必能大之。因以子孫屬之。所著霽亭集行于世。其詩文。大爲李齊賢所稱賞。子竴竱䇕竑。洪木齋彙纂名臣列傳。亦載此傳。<끝>
霽亭先生文集卷之四 / 附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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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정 이공 행장(霽亭李公行狀) - 권상일(權相一) 찬(撰)
나의 외선조 고려 문정공(文靖公) 제정(霽亭)선생 휘(諱) 달충(達衷)은 초명이 달중(達中)이었는데 현릉(玄陵)의 명에 따라 ‘중(中)’을 ‘충(衷)’으로 고쳤다. 자(字)는 중권(仲權)이고 성은 이씨이며 본관은 경주이다.
공의 선조로 휘 알평(謁平)은 양산촌(楊山村)의 촌장으로서 신라 시조를 보좌하여 개국종신(開國宗臣)이 되었으며 관직은 아찬(阿飡)에 이르렀다. 그 후에 이찬(伊飡) 거명(居明)과 병부령(兵部令) 금현(金現)이 있었다.
고려 초에 이르러 금서(金書)는 좌명공신(佐命功臣)으로 호부낭중이 되었는데, 배(配)는 태조(太祖,왕건)의 장녀의 남편인 경순왕(敬順王)의 딸 신란궁부인(神鸞宮夫人)이었다. 그의 아들 윤홍(潤弘)은 대제학을 지냈으며 대대로 벼슬아치가 있었다.
고조 휘 득견(得堅)은 문림랑(文林郞) 상의원 직장(尙衣院直長)을 지냈다. 증조 휘 핵(翮)은 문하평리(門下評理)를 지냈으며 아들 셋이 있었는데 문장으로 이름이 높았다. 조부 휘 세기(世基)는 충렬왕 때, 성균시(成均試)에 갑과로 급제하여 왕으로부터 ‘나의 문생[吾門生]’이라는 칭찬을 받았고, 관직은 밀직부사(密直副使)ㆍ대제학(大提學)에 이르렀으며 시호는 문희(文僖)이다.
고(考) 휘 천(蒨)은 호가 국당(菊堂)으로 추성보리공신(推誠輔理功臣) 삼중대광(三重大匡) 첨의참리(僉議參理)에 올랐고, 월성부원군(月城府院君)에 봉해졌으며 시호는 문효(文孝)이다. 비(妣)는 연창군부인(延昌郡夫人) 박씨(朴氏)였다.
공은 충선왕(忠宣王) 1년 기유년(1309)에 태어나 충숙왕(忠肅王) 13년 병인년(1326)에 문과에 급제하였으니 당시 18세였다.
사한(史翰)을 거쳐 정언(正言)에 올랐으며 여러 관직을 역임하고 성균 좨주(成均祭酒)에 이르렀다.
충목왕(忠穆王) 4년(1348) 이학도감판사(吏學都監判事)로 자리를 옮겨 장항(張沆)ㆍ전윤장(全允臧) 등 여럿과 국정에 동참하였으니 모두 당시에 가장 훌륭한 선발이었다. 공민왕(恭愍王) 1년 임진년(1352)에 전리판서(典理判書)에 임명되었고, 2년(1353)에는 감찰어사(監察御史)가 되었다가 호부상서(戶部尙書)로 자리를 옮겼다.
이때 팔관회(八關會) 유사(有司)가 복야청(僕射廳) 남쪽에 손을 씻는 장막을 설치하고 울타리를 세워 안팎을 갈라놓았다.
공은 형부상서(刑部尙書) 이정(李挺)과 함께 복야청 위에 앉아 있다가 울타리를 철거하도록 명하였다.
이때 왕이 의봉루(儀鳳樓)에 행차하여 이를 보고는 노하여 공을 잡아 옥에 가두라는 명을 내렸다. 좌우 측근들이 정성을 다해 만류하여 마침내 처벌이 중지되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명유(名儒)로서 발탁되어 밀직제학(密直提學)에 임명되었다.
7년(1358) 여름 호부상서로서 동북면 병마사(東北面兵馬使)로 나갔다가 돌아오려 할 때, 우리 환조(桓祖)께서 삭방도 만호(朔方道萬戶)로서 함주(咸州,함흥)의 학선정(鶴仙亭)에서 전별연을 베풀었다. 태조대왕이 그 왼편에 모시고 서 있었는데 당시 17세였다.
공은 한번 보고는 태조의 신이한 모습을 알아보았다. 마침 일곱 마리의 노루가 언덕 위를 지나고 있었는데, 공이 말하기를,
“한 마리를 잡을 수 있겠소?”
하자, 태조가 활을 당겨 한 발을 쏘아 노루 다섯 마리를 잡았다. 술잔을 올리는 때가 되어 환조가 잔에 술을 부어 돌리자 공은 선 채로 마셨는데, 태조가 잔에 술을 부어 돌리자 공은 꿇어앉아 마셨다. 환조가 이상하게 여겨 묻기를,
“친구의 자식 놈에게 어찌 이렇게 대한단 말이오?”
하자, 공이 대답하기를,
“참으로 신이한 사람이외다. 공이 미칠 바가 아니오. 공의 집안은 이 아들로 인해 반드시 위대하게 될 것이오.”
하며, 자손들을 그에게 부탁하였다.
태조가 조선을 개국하여 왕위에 올라 공의 자손들의 이름에 모두 ‘입(立)’ 자를 쓰도록 명하였는데, 이는 공이 당시 선 채 술을 마셨던 일을 기린 것이다. 공민왕 14년(1365) 왕이 승려 편조(遍照)를 사부로 삼았는데 이가 곧 신돈(辛旽)이다.
신돈은 겉으로는 청빈하고 담박한 행동을 하여 임금과 세상을 속였지만, 실제로는 주색(酒色)을 탐하였다.
기세가 등등하여 기분에 따라 사람들의 화복을 좌지우지하니 온 조정이 감히 그의 뜻을 거스르지 못하였다.
그런데 한번은 공이 여러 사람이 모인 자리에서 신돈에게 말하기를,
“사람들이 하는 말이 상공께서는 주색을 좋아하신다더군요.”하자, 신돈이 좋아하지 않았다.
이듬해 겨울 공은 유숙(柳淑)ㆍ이귀수(李龜壽) 등 여러 사람과 함께 파직되었는데, 신돈이 중상(中傷)하였기 때문이었다.
신돈이 형벌을 받아 죽게 되자, 또 시(詩)를 지어 신돈을 늙은 여우에 비유하였다.
사관(史官)은 공을 ‘강직하여 흔들림이 없는 사람[강직붕요(剛直不撓)]’이라 칭하였는데, 이 일 하나를 보아서도 알 수 있다.
나중에 계림부윤에 임명되었는데, 공은 경주가 관향이라 여러 차례 사직 상소를 올렸다. 왕이 허락하지 않아 마침내 부임하였다.
부임한 후 사직을 청하는 전문(箋文)을 다시 올렸는데 이르기를,
“전쟁이 일어난 이래로 신 같은 자는 전하께 아무런 도움도 되지 못한 채, 산중에 들어가 산지 몇년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신의 보잘것 없는 마음은 한시도 왕실을 잊은 적이 없으니, 밝은 창가 책상에 조용히 앉아 삼가 한가락 향을 피우고 보록(寶籙)과 요도(瑤圖)가 만년토록 이어지기를 늘 축수를 하였습니다.”하였다.
충국애민(忠國愛民)하는 공의 마음은 관직에 나아가고 물러남에 따라 다르지 않았던 것이다.
당숙부인 익재(益齋)선생 이제현(李齊賢)은 국사(國史)가 제대로 갖추어져 있지 않음을 병폐로 여기고, 공과 백문보(白文寶)와 함께 본기(本紀)ㆍ연표(年表)ㆍ열전(列傳)을 작성하였다.
익재공은 고려 태조(太祖)부터 시작하여 숙종(肅宗)까지, 공과 백문보 공은 예종(睿宗)이하를 찬술하여 마침내 전서를 이루게 되었다.
우왕(禑王) 11년 갑자년(1385) 8월 18일에 졸하니 향년 76세였다.
단성보리익찬(端誠輔理翊贊) 삼중대광(三重大匡) 정당문학(政堂文學)을 지내고, 계림부원군(鷄林府院君)에 봉해졌으며, 후에 문정공(文靖公)이라는 시호가 내렸다.
아! 공은 뛰어난 재능과 원대한 도량을 갖추고 조정에 나아가 공무를 본 것이 거의 60년이나 된다.
훌륭한 말씀과 선한 행실, 위대한 공적은 후대에 길이 전해질 만한 것이 많다. 그런데 《여사(麗史)》 명신열전(名臣列傳)에는 대강만이 기록되어 있을 뿐이다.
또 공은 문장이 청신(淸新)하고 심오하여 익재 어른으로부터 크게 칭찬을 받았다. 그런데 여러 차례 병화를 겪으면서 문집의 간판(刊板)과 인본(印本)이 모두 유실되었으며, 자손들 집에는 단지 등본(謄本) 약간 편이 남아 있을 뿐이다.
초배(初配)는 정화택주(靖和宅主) 횡성조씨(橫城趙氏)로 정당문학(政堂文學) 조문근(趙文瑾)의 따님이고, 재취(再娶)는 충주안씨(忠州安氏)로 충렬공(忠烈公) 안우(安祐)의 따님이며, 삼취(三娶)는 평양조씨(平壤趙氏)로 상서(尙書) 조천우(趙千祐)의 따님이다.
4남 4녀를 두었는데 장남 준(竴)은 밀직(密直), 호조전서(戶曹典書)를 지냈고, 둘째 전(竱)은 동지밀직(同知密直)을 지냈고 월성군(月城君)에 봉해졌으며, 셋째 수(䇕)는 공조판서를 지냈고, 막내는 횡(竑)이다.
장녀는 내시윤(內侍尹) 윤발(尹發)에게, 둘째는 판사(判事) 방순(方恂)에게, 셋째는 김명리(金明理)에게, 넷째는 윤승렬(尹承烈)에게 출가하였다. 준(竴)의 아들 윤상(允商)은 부사를 지냈으며, 윤상의 장남 겸선(兼善)은 지평을 지냈고, 차남 계선(繼善)은 홍문 저작(弘文著作)을 지냈다.
겸선의 장남 성(筬)은 함안군수(咸安郡守)를 지냈고 차남 간(竿)은 첨 절제사(僉節制使)를 지냈다.
계선의 장남 절(節)은 직장(直長)을 지냈다. 성의 장남 승숙(承叔)은 문과에 급제하였고 군위(軍威)ㆍ강서(江西)의 현감을 지냈다.
승숙의 아들 중성(仲成)은 참봉을 지냈다. 중성에게는 아들 둘이 있었는데 장남 보(葆)는 봉사(奉事)를 지냈다.
전(竱)의 아들 승상(升商)은 계림군(鷄林君)에 봉해졌고 승상의 아들 재(栽)는 판서를 지냈다.
수(䇕)에게는 아들 넷이 있었는데 구상(具商), 영상(寧商), 안상(安商), 흥상(興商)으로 모두 높은 벼슬에 이르렀다.
그중에 흥상은 정난공신(靖難功臣)으로 계림군(鷄林君)에 봉해졌으며 양희공(襄僖公)이라는 시호가 내렸다.
흥상은 아들 넷이 있었는데 우(竬), 의(), 증(竲), 휴(로 모두 음사(蔭仕)로 관직에 나아갔으며, 의는 관직이 장사랑(將仕郞)에 이르렀다. 의는 아들 하나를 두었는데 그 아들 숙정(肅靖)은 중훈대부(中訓大夫) 남부 영(南部令)을 지냈다.
숙정에게는 아들 둘이 있었는데 장남 욱(昱)은 대호군(大護軍)을 지냈고, 차남 기(奇)는 현감을 지냈다. 대호군 욱에게는 아들 셋이 있었는데 양동(良童), 선동(善童), 영동(英童)으로 모두 과거에 급제하였다. 선동에게는 아들 셋이 있었는데 해(), 저(竚), 준(竣)이며, 해는 관직이 어모장군(禦侮將軍)에 이르렀다.
해에게는 아들 셋이 있었는데 중립(中立)은 진사시에 장원하였으며, 성립(成立)ㆍ개립(介立)은 진사시에 급제하고 학행이 있었다. 개립은 효성스러움과 청렴함으로 천거되어 관직이 산음 현감(山陰縣監)에 이르렀으며, 호가 성오당(省吾堂)이고 병조 참판에 추증되었다.
중립의 아들은 덕음(德音)이고 덕음의 아들은 동언(東彦)ㆍ진언(震彦)이다. 동언의 아들은 천의(天意)ㆍ인의(仁意)ㆍ시의(時意)이며, 진언의 아들은 재의(在意)ㆍ춘의(春意)ㆍ형의(亨意)이다. 성립의 아들 호음(好音)은 생원이 되었고 호음의 아들은 정언(廷彦)ㆍ홍언(弘彦)이며, 정언의 아들은 대의(大意)이다.
개립에게는 아들 둘이 있었는데 장남 휘음(徽音)은 문과에 급제하여 학유(學諭)를 지냈으나 일찍 졸했고, 차남 희음(希音)은 진사시에 합격하여 문장과 덕행이 있었다. 휘음에게는 아들 둘이 있었는데 장남 숭언(崇彦)은 문과에 급제하여 부사를 지냈고 차남 상언(尙彦)은 문과에 급제하여 군수를 지냈다.
희음에게는 아들 셋이 있었는데 장남은 승언(承彦)이고 둘째는 종언(從彦)이며 셋째는 계언(繼彦)이다. 숭언에게는 아들 다섯이 있었는데 장남 달의(達意)는 문과에 급제하고 양사(兩司)를 거쳐 세 고을의 수령을 역임하였고 관직은 첨추(僉樞)에 이르렀다.
둘째 원의(遠意)는 부호군(副護軍)을 지냈고 수의(遂意)와 술의(述意)는 진사시에 합격하였으며 다섯째 적의(適意)는 문과에 급제하고 지평을 지냈다. 상언에게는 아들 다섯이 있었는데 행의(行意)ㆍ창의(昌意)ㆍ각의(覺意)ㆍ발의(發意)ㆍ낙의(樂意)이며, 승언에게는 아들 셋이 있었는데 태의(泰意)ㆍ도의(道意)ㆍ호의(好意)로 생원이었다.
종언에게는 성의(誠意)라는 아들 하나가 있었다.준(竣)의 아들은 경립(景立)이고 경립의 아들은 정음(正音)이고, 정음의 사자(嗣子)는 계언(繼彦)이며, 계언의 아들은 석의(碩意)인데 문과에 급제하고 관직이 좌랑에 이르렀다. 그 외 내외 자손들은 세대가 멀고 수가 많아서 대과ㆍ소과에 등과한 자만을 기록할 뿐이다.
달의의 아들 태익(台翊)은 진사시에 합격하였고 창의의 아들 화익(華翊)은 진사시에 합격하여 현릉 참봉(顯陵參奉)을 지냈다. 명익(命翊)의 사자(嗣子)는 항배(恒培)인데 진사시에 합격하였고, 홍익(弘翊)의 아들 중배(重培)는 문과에 급제하고 정랑을 지냈으며, 수익(壽翊)의 아들 원배(元培)는 생원시에 합격하였다.
희음의 외손 권이급(權以汲)은 생원이었다. 숭언의 외손 이두정(李斗精)은 생원이었고, 장오상(張五相)과 장세상(張世相)은 생원이었으며, 남도익(南圖翼)은 전적(典籍)을 지냈고 남도훤(南圖翧)은 진사였다. 상언의 외손으로 권희열(權希說)은 좌랑을 지냈고 권희설(權希卨)은 찰방을 지냈으며 김시엽(金始燁)은 진사였고 김시빈(金始鑌)은 장령을 지냈다.
종언의 외손 황수억(黃壽嶷)은 좌랑을 지냈다. 계언의 외손 김휘벽(金輝璧)은 진사시에 합격하여 참봉을 지냈다. 달의의 외손 권상일(權相一)은 행 대간(行大諫)을 지냈다.후손들이 경향 각지에 흩어져 사는데, 그 일파 중 경성에 사는 판관(判官) 건(建)의 6세손 광신(光新)이 가문 대대로 내려오는 아름다운 덕을 이어받아 지키고 선조를 위하는 일에 독실하였다.
또 다른 일파는 연산(連山)에 있었는데 지금은 후손이 없다. 또 다른 일파는 영천(榮川 경북 영주)에 사는데 매우 번성하고 현달하였다.
다른 일파는 안동(安東)에 산다.공의 묘는 광주(廣州) 제릉(齊陵)의 북쪽 탄동(炭洞)에 있다.
당시의 이름난 명사들이 필시 공의 묘비명을 지어 행적을 기록해 두었을 것인데 모두 남아 있지 않다. 12대손 광익(光翊)이 공의 사적이 끝내 없어질 것을 염려하여 정성을 다해 사가(史家)의 여러 책에서 수집하여 가장(家狀) 한 통을 완성하고는 상탁(相托)에게 가져와 맡겼다.
나 상일(相一)은 외손으로 끼어 있으니 감히 늙고 병든 데다 글재주도 보잘것없다는 이유로 사양하지 못하고, 마침내 위와 같이 기술하여 후인들이 조사하여 진실을 밝히는 것에 대비할 따름이다.
숭정(崇禎) 갑신(甲申)후 두 번째 계유년(1753, 영조 29) 섣달 갑진일에 외(外) 13대손 가선대부(嘉善大夫) 전(前) 행 사간원 대사간(行司諫院大司諫) 안동(安東) 권상일(權相一)이 삼가 쓰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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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原文]
霽亭李公行狀 - 權相一 撰
惟我外先祖高麗文靖公霽亭先生諱達衷。初名達中。玄陵以御筆改中爲衷。字仲權。姓李氏。籍慶州。有諱謁平。初以楊山村長 。佐新羅始祖。爲開國宗臣。官阿飡。其後有伊食居明。兵郞令金現。至麗初。有金書。以佐命功。爲戶部郞中。配太祖長女壻敬順王之女神鸞宮夫人。子潤弘。大提學。世有冠冕。高祖諱得堅。文林郞。尙衣直長。曾祖諱翮。門下評理。有三子。以文章顯。祖諱世基。忠烈朝。魁成均。王穪以吾門生。官至密直副使。大提學。考諱蒨。號菊堂。推誠輔理功臣三重大匡僉議參理月城府院君。謚文孝。妣延昌郡夫人朴氏。忠宣王元年己酉。公生。忠肅王十三年丙寅。登第。時年十八。由史翰正言。累官至成均祭酒。忠穆王四年。轉吏部都監判事。與張沆,金允成諸人。同視事。皆時之極選也。恭愍王元年壬辰。拜典理判書。二年以監察御使。遷戶部尙書。入關會。有司設盥洗幕于僕射廳南。竪幡以限內外。公與刑部尙書李挺坐廳上。令撤其藩。時上御儀鳳樓。見之。怒命繫獄。左右固請之。遂止。尋以名儒擢爲密直提學。七年夏。以戶部尙書。出爲東北面兵馬使。將還。我桓祖以朔方道萬戶。餞于咸州之鶴仙亭。太祖大王侍立其左。而十七歲矣。公一見知其異表。適有七獐
岸上。公曰。可得一乎。太祖彎弓一發。殪五獐。及進酒。桓祖行酒。則公跪飮。太祖行酒。公立飮。桓祖恠之曰。故人之子。何乃爾。公對曰。誠異人。非公所及。公之家業。此子必大之。因以子孫屬焉。及太祖龍興。命其子孫以立字名之。蓋誌其立飮也。十四年。王以僧遍照。爲師傅。是爲辛肫。肫外爲苦淡之行。以惑君欺世。而實酖酒色。氣埶張大。禍福人。在於喜怒。滿朝不敢忤。而公嘗於稠坐中。謂肫曰。人謂相公好酒色。肫不悅。又作詩。媲肫於老狐。明年冬。公與柳淑李龜諸人貶罷。肫中之也。史穪公剛直不撓。觀於此一事。可知也。後拜鷄林尹。公鄕貫申辭。王不許。遂赴任。又上箋。略曰。兵興以來。如臣者無所贊襄。退處山林有年矣。然區區之心。未嘗不在王室。明牕靜几。敬焚一炷之香。寶籙瑤圖。恒祝萬年之筭。公之忠愛。蓋不以進退而有間也。當叔父益齋先生諸賢。病國史不備。與公及白文寶作紀年傳。而益齋起自太祖至肅宗。公及文寶。贊睿宗以下。遂爲全書。辛禑十一年甲子八月十八日卒。壽七十六。秩爲端誠輔理翊贊。三重大匡政堂文學鷄林府院君。贈謚文靖公。噫 。公以卓異之才。遠大之器。出身立朝。殆近六十歲。其嘉言善行。豐功偉績。可以傳於後而垂不朽者多矣。麗史名臣列傳。秪錄梗槩。且文章淸儁。大爲益齋翁所穪賞。而累經兵火。文集刊板及印本。皆遺失。子孫家。秪有謄本若干篇。初配靖和宅主橫城趙氏。政堂文學瑾之女。再娶忠州安氏。忠烈公祐之女。三娶平壤趙氏。尙書千祐之女。有四子四女。男長竴。直戶曹典書。次竱。同知密直月城君。次䇕。工曹判書。次竤。女長適內侍尹尹發。次適判事方恂。次適金明理。次適宋承烈。竴子允商。府使。允商子兼善。持平。次繼善。弘文著作。兼善子竿。僉節制。繼善子節。直長。竱子升商。鷄林君。無后。䇕有五子。曰具商,榮商,安商,興商。皆致顯秩。而興商以靖難功。封鷄林君。贈謚襄禧公。有三子。曰竬。曰𥫃。曰竲。皆蔭仕。而𥫃至將仕郞錄事。有一子曰肅靖。中訓大夫南部令。有二子。長昱大護軍。次奇縣監。護軍有三子良童,善童,英童。皆有科名。善童有三子。𥩲竚竣。而𥩲禦侮將軍。有三子。中立進士壯元。成立,介立進士。有學行薦孝廉。官至山陰縣監。號省吾堂。贈兵曹參判。中立子德音。德音子東彦,震彦。東彦子天意,仁意,時意。震彦子存意,春意,亨意。成立子好音生員。好音子廷彦,弘彦。廷彦子大意。介立子徽音。文科學諭。早卒。次希音。進士。有文行。徽音有二子。長崇彦。文科府使。次尙彦。文科郡守。希音有三子。長承彦。次從彦。繼彦。崇彦有五子。長達意。文科。歷兩司。典三邑。官至僉樞。次遠意,遂意,述意進士。適意文科持平。尙彦有五子。行意,昌意,覺意,發意,樂意。承彦有三子。泰意,道意,好意。從彦有一子。誠意。竣子景立。子正音。嗣子繼彦。子碩意。文科佐郞。他內外子孫。代遠且數多。只錄其大小登科者。達意子台翊進士。昌意子華翊生員。陵參奉。命翊嗣子恒培。進士。弘翊子重培。文科正郞。▣▣▣元培。▣▣。希音外孫權以鈒生員。崇彦外孫李斗精。生員 。張五相生員。世相生員。南圖翼典籍。圖翧進士。尙彦外孫權希說。佐郞。希卨察訪。金始燁進士。始鑌掌令。從彦外孫黃壽嶷。佐郞。繼彦外孫金輝璧。進士參奉。達意外孫權相一。行大諫。姓孫散居京鄕。而一派在京城。判官建之六代孫光新。傳守世德。篤於爲先。一派在連山。而今無后。一派在榮川。甚蕃且顯。公之墓在於廣州齊陵北炭洞。當時名公必銘其墓狀其行。而皆無有。十二代孫光翊。懼其事蹟之終然泯滅。誠心搜取史家諸書。成家狀一通。委來相托。相一忝在外裔。不敢以老病文拙辭 。遂撰次如右。以備後人之攷信焉。崇禎後再▣▣月日。外裔孫具官安東權相一。謹狀。
淸臺先生文集卷之十三 / 行狀
霽亭先生文集卷之四 / 附錄
[註解]
[편01]學 : 底本에는 “部”. 《高麗史ㆍ忠穆王世家》 4年 3月 丁酉日 기사에 의거하여 이하 모든 “吏部都監”은 “吏學都監”으로 고치며
교감기를 달지 않음.
[편02]全允臧 : 底本에는 “金允誠”. 《高麗史ㆍ忠穆王世家》 4年 3月 丁酉日 기사에 의거하여 이하 모든 “金允誠”은 “全允臧”으로 고
치며 교감기를 달지 않음.
[편03]李龜壽 : 底本에는 “壽”가 없음. 《高麗史ㆍ恭愍王世家》 14年 7月 기사에 의거하여 이하 모든 “李龜”는 “李龜壽”로 고치며 교
감기를 달지 않음.[편-004]甲子 : 문맥상 “乙丑”인 듯함.
[주01]현릉(玄陵) : 고려 공민왕(恭愍王, 1330~1374)의 능호이다.
[주02]알평(謁平) : 이알평(李謁平)으로, 생몰년은 미상이다.
신라 초기 사로 육촌(斯盧六村) 중의 하나인 알천양산촌(閼川楊山村)의 촌장이다. 기원전 69년 사로 육촌 촌장들과 함께 나정(蘿
井) 가에서 혁거세(赫居世)를 얻었으며, 기원전 57년 혁거세를 왕으로 추대하고 나라 이름을 서라벌이라 하였다.
[주03]아찬(阿飡) : 신라 17관계(官階) 중 여섯째 등위로 육두품(六頭品) 신분층이 오를 수 있는 한계 관계이다.
아척간(阿尺干)이라고도 한다.
[주04]이찬(伊飡) 거명(居明) : 이찬은 신라 17관계 중 둘째 등위로, 이척찬(伊尺飡)이라고도 한다. 거명은 이거명(李居明)으로, 신라 때
의 진골 출신이다. 시조 이알평의 36세손이며 경주 이씨의 실질적인 시조라고 할 수 있는 중시조이다. 시호는 소판(蘇判)이다.
[주05]병부 영(兵部令) : 신라의 중앙 행정 관청 13부 가운데 하나인 병부의 장관을 말한다. 병부는 군사 업무를 총괄하는 부서이다.
[주06]경순왕(敬順王) : 신라 제56대 왕이자 마지막 왕이다. 927~935년까지 재위하였다. 성은 김(金), 이름은 부(傅)이다.
아버지는 이찬(伊飡) 김효종(金孝宗)이며, 어머니는 헌강왕(憲康王)의 딸 계아태후(桂娥太后)이다.
927년 후백제 견훤(甄萱)의 침공으로 경애왕(景哀王)이 죽은 뒤 왕위에 올랐다. 명운이 고려로 기울자 군신(群臣) 회의를 소집하여
고려에 귀의하기로 결정하고, 935년 고려 태조에게 항복하였다. 태조의 장녀 낙랑공주(樂浪公主)를 아내로 맞고 정승공(政承公)에
봉해졌으며, 경주(慶州)를 식읍(食邑)으로 받았다.
[주07]신란궁부인(神鸞宮夫人) : 아버지는 경주 김씨로 신라 경순왕이며, 어머니는 고려 태조의 장녀 낙랑공주이다.
935년 경순왕이 고려에 항복하자, 태조는 자신의 장녀 낙랑공주를 경순왕의 아내로 삼게 했다.
[주08]천(蒨) : 이천(李蒨, 1274~1349)으로, 고려 후기의 문신이다. 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군실(君實), 호는 국당(菊堂)이다.
문희공(文僖公) 이세기(李世基)의 아들로 1299년(충렬왕 25) 국자감시에 장원으로 급제하였으며, 충숙왕 때 우사보(右思補)를
지냈다.
1344년(충혜왕 복위 5) 지공거를 지냈으며 이해 첨의평리상의(僉議評理商議)로 원나라에 다녀왔다. 1345년(충목왕1) 첨의참리
(僉議參理)를 거쳐 예문관 대제학 검교정승이 되었으며 월성부원군에 봉해졌다. 시호는 문효(文孝)이다.[
주09]이학도감 판사(吏學都監判事) : 대본에는 ‘吏部都監判事’로 되어 있는데, 《고려사》 권37 〈충목왕세가(忠穆王世家)〉 4년 3월 정
유일(丁酉日) 기사에 의거하여 ‘部’를 ‘學’으로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주10]장항(張沆) : ?~1353. 고려 후기의 문신으로, 호는 눌재(訥齋)이다. 과거에 급제한 뒤 사헌 규정(司憲糾正), 좌사의대부(左司議大
夫) 등을 역임하였다. 1327년(충숙왕14) 충숙왕이 참소를 입어 원나라에 5년 동안 억류되어 있을 때 시종한 공로로 이등 공신에 올
랐으며, 이어 나주 목사를 거쳐 군부 판서(軍簿判書)가 되었다.
충혜왕 때에 밀직 제학, 첨의참리, 평양 윤(平壤尹)을 지냈고, 1344년 충목왕이 즉위하자 참리(參理)를 거쳐 정당문학(政堂文學)에
올랐다. 시호는 문현(文顯)이다.
[주11]전윤장(全允臧) : 대본에는 ‘金允誠’으로 되어 있는데, 《고려사》 권37 〈충목왕세가〉 4년 3월 정유일 기사에 의거하여 ‘金’을
‘全’으로, ‘誠’을 ‘臧’으로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주12]팔관회(八關會) : 고려 시대에 국가 차원에서 거행된 불교 행사로 매년 행해졌다. 팔관회 의식이 이루어지는 곳은 사방에 향등을 달
고 2개의 채붕(綵棚)을 세워 장엄하게 장식하는 등 불교와 민속적 요소가 합치되어 있었다. 이로 인해 유학자들, 특히 고려 말 성리
학을 수용한 사대부들은 조정에서 팔관회를 거행하는 것에 대해 불만을 가지고 있었다.
[주13]복야청(僕射廳) : 고려 때의 관직인 좌복야(左僕射)ㆍ우복야(右僕射)가 정사와 관련하여 회동하던 관청을 말한다.
복야는 상서도성(尙書都省)에 소속된 벼슬로 문종 때에 처음으로 설치되었다. 이들의 품계는 정2품으로, 장관인 상서령의 다음 직
위였다.
[주14]이정(李挺) : 1297~1361. 본관은 청주(淸州), 초명은 춘길(春吉)이다. 1325년(충숙왕 12) 문음(門蔭)으로 팔관보 판관(八關寶
判官)에 보임되었으며, 감찰, 장령, 전법 총랑(典法摠郞) 등을 역임하였다.
10년간 관직에서 물러나 있다가 1353년(공민왕 2) 중정대부(中正大夫)에 개자(改資)되어 성균 좨주에 발탁되고, 이어 판통례문사
(判通禮門事), 보문 대제학(寶文大提學) 등을 지냈다. 공민왕의 각별한 총애를 입어 내불당(內佛堂)을 감역하였다. 1358년 광록대
부(光祿大夫) 형부 상서(刑部尙書)에 이르렀다. 시호는 문간(文簡)이다.
[주15]의봉루(儀鳳樓) : 고려 시대 개성의 궁궐 안에 있던 건물인데, 공민왕은 팔관회 때에 이곳에서 행사를 관람하였다.
[주16]얼마 …… 임명되었다 : 《고려사》 권112 〈이달충열전〉에 의거할 때, 이달충이 밀직 제학(密直提學)에 발탁된 것은 1366년(공민
왕 15)의 일이므로, 이 부분은 오류이다.
[주17]환조(桓祖) : 1315~1361. 조선 태조 이성계(李成桂)의 아버지로, 본관은 전주(全州), 휘 및 자는 자춘(子春), 시호는 연무성환 대
왕(淵武聖桓大王)이고, 묘호는 환조이다. 도조(度祖) 이춘(李椿)의 아들로, 아버지를 이어 함경도 쌍성 지방에서 세력을 떨치며 원
나라의 천호(千戶)로 있다가 고려 조정에 내알(來謁)하여 소부윤(少府尹)이라는 벼슬을 받고, 총관부를 함락하여 함주 이북의 땅을
회복하였다.
1361년 장작감 판사(將作監判事)로서 삭방도만호 겸 병마사(朔方道萬戶兼兵馬使)에 임명되어 함경도 지방을 다스리다가 죽었다.
이성계가 조선 개국 후 4대의 존호(尊號)를 추상(追上)할 때 환왕(桓王)에 추증되었으며, 능은 함흥(咸興)의 정릉(定陵)이다.
[주18]7년 …… 17세였다 : 조선 태조 이성계의 나이와 《제정집》 권4 이종재(李宗梓)의 발문에 의거할 때 1351년(충정왕3)의 일인 듯하
다.
[주19]유숙(柳淑) : 1316~1368. 본관은 서산(瑞山), 자는 순부(純夫)이다. 1340년(충혜왕 복위 1) 과거에 급제하였으며 후에 공민왕이
된 강릉대군(江陵大君)을 시종하여 4년간 원나라에 있었다. 1351년 공민왕이 즉위하자 고려에 돌아와 좌부대언(左副代言)이 되
었고, 이후 판도판서(版圖判書), 전리판서(典理判書) 등을 거쳐 1363년 첨의평리(僉議評理)에 올라 서령군(瑞寧君)에 봉해졌다.
1365년 신돈(辛旽)의 모함으로 영광(靈光)에 낙향해 있다가, 신돈이 보낸 자에게 교살되었다.
[주20]이귀수(李龜壽) : 대본에는 ‘李龜’로 되어 있는데, 《고려사》 권41 〈공민왕세가(恭愍王世家)〉 14년 7월 기사에 의거하여 ‘壽’ 1자
를 보충하여 번역하였다.
[주21]시를 …… 비유하였다 : 《제정집》 권1에 〈신돈(辛旽)〉 시가 실려 있다.
[주22]사관은 …… 칭하였는데 : 《고려사》 권112 〈이달충열전〉에 “성품이 강직하여 흔들림이 없었으며 사람을 알아보는 감식안이 있었
다.〔性剛直不撓有鑑識〕”라는 기록이 전한다.
[주23]부임한 …… 올렸는데 : 《제정집》 권2의 〈계림 부윤으로 부임한 후에 다시 사직을 청한 표문〔鷄林赴任後再辭表〕〉을 말한다.
[주24]전쟁 : 1359년(공민왕8)과 1361년에 있었던 홍건적의 침입을 가리키는 듯하다. 특히 1361년 홍건적이 침입하였을 때 공민왕은 경
상북도 안동으로 피신하기도 하였다.
[주25]보록(寶籙)과 요도(瑤圖) : 국가와 왕실을 가리킨다. 보록은 중국 전설에 봉황이 황제(黃帝)와 제요(帝堯)에게 전해 주었다는 예언
서이며, 요도는 왕실의 족보를 말한다.
[주26]우왕(禑王) …… 졸하니 : 우왕 11년은 을축년으로, 갑자년이라 한 것은 오류이다. 《고려사》 권112 〈이달충열전〉에도 우왕 11년
에 졸했다고 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졸년이 우왕 11년 을축년인 것은 확실하다. 《경주이씨구보(慶州李氏舊譜)》에도 갑자년으로
되어 있는데, 권상일은 이 자료를 근거로 행장을 작성하였기 때문에 같은 오류를 범한 듯하다.
[주27]여사(麗史) 명신열전(名臣列傳) : 《여사》는 홍여하(洪汝河, 1620~1674)가 지은 《휘찬여사(彙纂麗史)》를 가리킨다.
모두 47권으로 되어 있는데, 권1~6은 세가(世家), 권7~19는 지(志), 권20~46은 열전(列傳), 권47은 외이부록(外夷附錄)이다.
이 중 권22~37이 명신열전이며, 〈이달충열전(李達衷列傳)〉은 권31에 수록되어 있다. 홍여하는 조선 후기의 성리학자로 철저한
유교 사관에 입각해 이 책을 쓰는 한편 우리나라 역사의 주체성을 의식하고 이를 살펴보고자 하였다.
《휘찬여사》는 사료로서는 새로운 가치를 찾을 수 없으나, 과거 우리나라 학자들이 각 시대의 역사를 어떻게 인식했는지를 살피는 데
좋은 참고 자료가 된다.
[주28]조문근(趙文瑾) : 생몰년은 미상이다. 고려 후기의 문신으로, 참지문하정사(參知門下政事), 집현전 대학사(集賢殿大學士) 등을
역임하였다. 충렬왕 때 우부승지(右副承旨), 지밀직사사(知密直司事) 등을 역임한 조변(趙忭)의 아들이다. 기타 자세한 행적은 알
려진 바가 없다.
[주29]안우(安祐) : ?~1362. 고려 후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탐진(耽津)이다. 1352년(공민왕1) 군부 판서(軍簿判書)로서 최영(崔瑩) 등
과 함께 조일신(趙日新)의 난을 평정하였고, 이후 전리 판서(典理判書), 지추밀원사(知樞密院事), 지문하성사(知門下省事) 등을
역임하였다.
1358년 서북면 부원수로서 홍건적의 침입을 막아 냈으며, 1359년 지금의 선천(宣川)인 고선주(古宣州)에서 홍건적의 잔여를 소탕
하고 돌아와 중서 평장정사(中書平章政事), 추충절의정란 공신(推忠節義定亂功臣)이 되었다.
[주30]조천우(趙千祐) : 고려 후기의 문신으로, 정숙공(貞肅公) 조인규(趙仁規)의 손자이자, 장민공(莊敏公) 조서(趙瑞)의 아들이다. 《高麗史 卷105 趙仁規列傳》 기타 자세한 행적은 알 수 없다.
[주31]정난 공신(靖難功臣) : 조선 단종 때 계유정난(癸酉靖難)을 일으키는 데 공을 세운 사람들에게 내려 준 훈호(勳號)이다.
1453년(단종 1) 10월 단종의 숙부이자 후에 세조가 된 수양대군(首陽大君)은 반역을 도모하였다는 죄목으로 자신의 반대 세력인
영의정 황보인(皇甫仁), 좌의정 김종서(金宗瑞), 안평대군(安平大君) 등을 살해하고 스스로 영의정이 되어 조정의 실권을 잡았다.
이어 이 거사에 가담한 사람들을 공신으로 책록할 것을 요청하여 정난 공신으로 책봉하였다.
[주32]권상일(權相一) : 1679~1759. 본관은 안동, 자는 태중(台仲), 호는 청대(淸臺)이다. 1710년(숙종36) 문과에 급제하였으며 전적
ㆍ직강 등을 거쳐 예조 좌랑, 병조 좌랑 등을 역임하였다. 1746년(영조 22) 사헌부 헌납, 사간원 사성, 사헌부 집의, 동부승지, 형조
참의 등을 지냈다.
이후 대사간, 홍문관 부제학, 한성 좌윤, 지중추부사, 대사헌 등을 역임하고 기로소에 들어갔다. 저서로는 《청대집》을 비롯하여 《초
학지남(初學指南)》ㆍ《관서근사록집해(觀書近思錄集解)》 등이 있다. 시호는 희정(僖靖)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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高麗端誠輔理翊贊功臣, 三重大匡密直提學, 鷄林君謚文靖, 霽亭李公神道碑。
有隆然斧封於廣陵之炭洞。而歷五百載瞻式于行過者。麗季名臣霽亭先生李公諱達衷字仲權之玄宅也。其雲裔將勒銘於神道。以詔告于無極。謁其辭于鍾錫。竊惟公剛毅大節。炳於史傳。宏詞雅章。纍纍於文選諸家。卽此而公之不朽。可與造化者並。其何須於陳言之有無於石顔者之有時而泐也。辭之固而其請愈至矣。則亦有不得以終己者焉。公初諱達中。恭愍王以御筆改中爲衷。系出新羅阿飧諱謁平之後。世以慶州爲貫。有諱金書。佐麗祖官戶部郞中。繼有冠冕。曾祖翮門下評理。祖世基密直提學謚文僖 。考蒨月城府院君謚文孝號菊堂。妣延昌郡夫人朴氏。忠宣王己酉生公。公文章華敏。志節偉然。年十八擢魁第。由史翰正言。累遷爲成均祭酒。忠穆王四年。與張元,金允誠諸人。同判吏部都監事。盖極選也。恭愍元年拜典理判書。明年以監察御史轉戶部尙書。時設八關會。雜戱于僕射廳。竪藩于盥洗幕前。以限內外。公在廳上。令撤其藩。盖欲沮其會也。王怒命係獄。尋以爲名儒不可辱。陞拜密直提學。七年夏出爲東北面兵馬使。將還。我桓祖以朔方道萬戶。餞于咸州之鶴仙亭。太祖侍立于後。適有獐羣而過對岸。公曰可得一以佐酒乎。太祖抽弓一發。疊貫五獐。及酒進。桓祖行則公立飮。太祖行則跪而飮。桓祖怪問之。公曰此子非公所及。必大公家。因以子孫託焉。後公之子有犯者。太祖特原之。命名以立。盖志其立飮也。已而王惑於妖僧辛旽。旽淫於酒色。勢傾內外。人莫敢忤。公甞於稠中面質旽曰人謂公好酒色。旽不悅。公遂見罷。史氏稱公剛直不撓。後出尹鷄林。以輔理勳封鷄林府院君。歸老于家。壽七十六而終。乃廢王禑十一年八月十八日也。謚曰文靖。霽亭者公之所甞自號也。公初配靖和宅主橫城趙氏。政堂文學文瑾女。再娶忠州安氏。忠烈公祐女。三娶平壤趙氏。尙書千祐女。有八子。典書竴,月城君竱,判書䇕及竑四男也。內侍尹尹發,判事方恂及金明理,尹承烈四女婿也。典書一男允商府使。月城君一男升商鷄林君謚恭懿。判書四男具商鷄安君,寧商參判,興商鷄林君謚襄僖,榮商副正,竑無嗣。曾玄而下蕃熾而昌。名宦偉績文學行誼。裒然爲國中之望。盖公之積之厚而流祚于無窮也。公文學旣優。識度冲遠。大爲同堂父益齋先生所器重。其纂國史。引公及白忠簡文寶。與修紀傳。遂成完史。其他著作之盛。可奕奕然終古。而滄桑迭變。梓簡屢灰。今百千而不一二存。其詩文遺者。廑若干篇。而猶可想公之守而知其學之有本也。詩沉蓄雄勁而不尙浮華。跌宕而必止於禮。怨誹而不及於亂。駸駸有風雅之響。其箴惕若齋以毋不敬毋自欺。爲念玆之實。其爲動齋說曰其靜也不養之以敬。則其發也或歸於躁妄。曰動靜之理。循環無端。靜而動動而靜。互爲其根。曰寂無思爲。人知其爲靜而不知其有不動之動也。論其世而求之。苟非眞用力於居敬之方而灼見乎靜中有物之妙。其能依俙揣摸而發此於脫口肆筆之餘者難矣。是以其進止行藏。不苟於倖。不撓於邪。剛毅自持。不踰於中正之軌。夫豈無所修而至哉 。或者疑咸州跪飮。有乖於人臣之義。然公豈有將心者哉。其見我藝祖之天表英異。武藝精絶。謂可以大顯而作鎭于邦也。將來之天與人歸。公安得以逆其未形也。公之辭表曰區區之心。未嘗不在王室。明窓凈几。敬焚一炷之香。寶籙瑤圖。恒祝萬年之算 。公之乃心王室。質之神明者盖如此。圃隱鄭文忠先生甞拜公遺像於淸瀾亭。有詩曰傳家聲烈忠移孝。盖世文章道業儒。老朝誰更匡王志。淚灑淸瀾乞與湖。於乎其知公矣。吾於公無間然矣。銘曰。
內直者敬。其動亦靜。蔽之一言。昏衢獨檠。我諦之精。立此本領。旣富其蘊。亦確其秉。發之餘事。文彩煒炳。載揚于庭。
爲珪爲珽。百僚是儀。孰淫而逞。引君以道。敢忘俄頃。乍黜乍處。匪爾悻悻。一炷明窓。丹衷炯炯。勤學令終。是曰文靖。
烏川有詩。千載發省。我爰作銘。用諗來永。<끝>
俛宇先生文集卷之百四十七 / 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