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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월요일 오전 10시.
밀레타리와 동행하여 법원으로 향했다.
15지구 경찰대를 관할하는 순회판사의 압수수색 영장을 받기 위해서였다.
15지구대에 도착하니 정오가 가까웠다. 경찰서에서 출동할 팀을 짜는데 무려 세 시간이 걸렸다.
차의 별장은 15지구대의 관할이 아니어서 세리토에 있는 차의 사무실과 온세상가에 인근한
원단창고만 수색대상으로 잡혀 있었다.
차가 왕왕 중요한 문서는 별장의 철제금고에 보관한다던 말이 생각나 자칫 헛걸음이 되지나 않을까
자꾸 조바심이 났다. 세리토의 사무실에 도착한 시각은 오후 4시였다.
총을 휴대한 경찰 두 명과 사복차림의 형사 한 명이 앞장을 서고 경섭과 밀레타리가 그 뒤를 따랐다.
사무실로 그들이 들이닥치자 차의 직원들이 눈이 휘둥그레지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미스 김과 유양춘은 생전 이런 일은 처음인 듯 혼비백산하여 벽쪽으로 물러섰다.
이순주는 입가에 엷은 미소를 머금은 채 살며시 다가서더니 경섭에게 차의 집무실을 턱으로 가리켰다.
서둘러 경찰 한 명과 형사가 사무실 서랍을 뒤지며 서류를 꺼내 일일이 경섭의 얼굴에 들이밀었지만
사무실에서 나오는 서류들은 모두가 낯설고 무용한 것들이었다.
그 때마다 경섭은 고개를 가로 저었다.
한편 다른 경찰 한 명이 차의 방문을 군화발로 걷어차고 있었다.
차가 경찰이 들이닥치는 걸 알고 재빨리 문을 안쪽에서 잠갔기 때문이었다.
잠시 후 문이 부서지며 방이 열렸다. 놀랍게도 방안에 헬렌 리가 있었다.
형사가 방안으로 뛰어 들더니 헬렌 리가 등지고 있던 트렁크를 주목했다.
트렁크는 모두 세 개였다. 그 때 경섭은 차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리는 것을 보았다.
혹시 저 가방 안에...? 일말의 기대감에 가슴이 뛰었다.
그 때 여자가 여권을 흔들며 발악하듯 영어로 소리쳤다.
"나는 미국시민권자야. 이 짐은 내꺼야. 너희들은 손 댈 수 없어. 변호사를 부를 거야.
기다려! 기다리란 말이야!"
그러나 형사는 막무가내였다. 경찰이 달려들어 그녀를 끌어내자 형사가 경찰의 캘빈총을 건네받아
가방의 주둥이를 개머리판으로 부수더니 닭의 가랑이를 찢듯 가방을 열어 젖혔다.
아니나 다를까 가방에서 쏟아진 것은 경섭이 노렸던 바로 그 물건들이었다.
헬렌 리가 미국으로 가져갈 가방 안에서, 한국에서 보낸 입어허가 관련 팩스파일과 정부관공서
문서양식과 여러 가지 프로젝트 기안서와 드디어 쏠라 장관이 서명했다는 조잡한 영수증까지
콸콸 쏟아져 나왔던 것이다. 경섭은 형사에게 엄지손가락을 들어 보였다.
그 광경을 목도한 밀레타리도 좋아서 연신 입을 다물지 못했다.
당황한 차가 어디론가 황급히 전화를 걸었다. 그의 말로 대통령 고문변호사라는 작자에게 이 사태를
알리는 모양이었다. 곧이어 형사가 차와 헬렌 리의 신원을 확인하고 압류물건에 대한 확인과 서명을
받았다.
옷을 깡그리 벗긴 포로처럼 이미 수치심이 사라진 차와 여자가 악다구니를 퍼부었다.
여자가 먼저 얼굴을 붉혔다.
"흥, 당신 이 사장에게 말해, 웃기지 말라고. 출장 나와 과부들 밑구멍이나 파는 주제에..."
다음엔 차가 입에 거품을 물었다.
"야, 안 차장 ! 우릴 먼저 쳤으니깐 당신도 몸조심해야 할 거야. 너희 사장도 두고 보자고 말해.
내가 입을 열면 그 새낀 한국서 사업 못해. 이거 공갈 아니랑께."
경섭은 발악을 하는 그들의 눈을 결코 피하지 않았다. 그들의 두 눈을 똑바로 응시한 채 그는 속에서
부글거리며 솟아오르는 욕을 한 입 가득 물고 있었다. 그 순간 쉐라톤호텔의 서랍속에 누워 있던
메모지가 문득 머리를 스쳐갔다. 그들의 악다구니를 한 귀로 흘려들으며 경섭은 이것이 끝인지
시작인지 종잡을 수 없었다.
모레노 거리에 있는 수입원단 가게는 형식적인 수색에 거쳤다.
차가 해외로 빼돌리려 한 증거서류들이 헬렌 리의 가방에서 모조리 쏟아져 나온 터라 형사는 가게 안을
한 번 쓰-윽 휘둘러보더니 책상 위에 놓인 컴퓨터를 열어 상품수발부나 판매내역, 부가세 신고사항
등의 자료만 디스켓에 옮겨 담았다.
세리토에서 따라온 유양춘이 적의가 가득한 눈길로 줄곧 경섭을 노려보았지만 그는 처음부터 아예
유의 눈길을 무시했다. 마침 차가 그에게 전화를 걸어 이곳 동정을 물어보는 것 같았다.
호텔로 돌아온 경섭은 사장에게 그날의 경과를 보고했다. 헬렌 리의 이중플레이에 대해 사장도
경악했다. 가능하면 그녀도 이 건에 공범으로 연루시키겠다고 경섭은 그의 의견을 개진했다.
사장은 가타부타 말이 없었다. D-데이의 독자적인 결행과, 일거에 그들의 아킬레스근을 도려낸 그의
습격에 사장은 한껏 고무되어 있었다.
"헬렌 리와 차가 사장님에 대해 뭔가 터뜨릴 게 있는지 그 지경에서도 큰 소리 뻥뻥 칩디다.
뭔지는 몰라도 미리 대비하셔야 할 겁니다."
"허 허 허, 있기는 뭐가 있어. 때려죽일 년놈들! 그래 앞으로 어찌될 것 같아? "
"밀레타리 얘기론 차가 내일이라도 당장 살려 달라고 빌고 나올 거래요. 그 쪽 변호사가 나타나
명함을 주고 갔는데 협상의 여운을 얼핏 흘리더라고 하더군요. 압수수색의 성공으로 이젠 형사범의
요건이 갖춰졌으므로 판사의 예비구속 명령이 떨어지면 바로 민사로 이행할거라 하는데 시간이 문제
아니겠습니까."
그야말로 시간이 문제였다. 정치 테러범이나 흉악한 강도 살인범이 아닌 다음에야 남의 나라에 온
외국인들끼리 금전적인 일에 얽힌 이 사건이 과연 얼마나 알젠틴 판·검사들의 관심과 흥미를 끌 수
있을지 짐작하기 어려웠다.
"같이 죽는 거야. 너의 사장 그놈 섹스 스캔들을 폭로하겠어."
입에 거품을 문 차의 얘기가 목젖까지 올라 왔지만 경섭은 사장에게 대고 차마 그 말은 할 수가
없었다.
다음날 미스 리로부터 전화가 왔다. 세리토 사무실은 어제부로 문을 걸어 잠갔고 그래서 지금 집에
있다는 얘기였다. D-데이를 결심할 때부터 경섭은 그녀의 새로운 일자리를 염려했었다.
오후에 연락하마고 하고 서둘러 임팔라호텔로 숙소를 옮겼다.
혹시나 있을지 모를 차의 보복을 피하고 그에게 자신의 소재를 숨기기 위해서였다.
바로 어젯밤이었다. 10시 경 방의 전화가 울렸는데 수화기를 들자 아무런 기척도 없더니 저 편에서
덜컥 전화를 끊는 것이었다. 교환을 통하므로 상대는 그를 지목하고 전화를 걸었음이 분명했다.
그 순간 그의 등에서 돋아난 소름이 허리춤까지 타고 내렸던 것이다. 경섭은 앞으로는 밤거리를 혼자
걷는 일조차 조심해야 되겠다고 생각했다.
밀레타리 사무실에서 형사담당 변호사인 켄트를 만났다. 그에게 헬렌 리와 유양춘을 공범으로
추가할 것을 부탁했다. 형사소추건의 경우 첫 공판은 정상적으로 진행된다면 2개월이 걸린다고 했다.
예비구속과 체포명령은 동시에 이루어지므로 오늘 중 경찰이 법원에 신청서를 내도록 손을 쓰겠노라고
했다. 차가 바다에 떠 있는 조업선들을 끌어 오겠다고 허언을 한 것이 생각나 만약을 대비하여
작년에 차와 체결해 두었던 합작계약을 파기한다는 내용증명을 띄어줄 것을 켄트에게 요구했다.
곁에 있던 밀레타리가 경섭의 그 말에 파안대소했다.
"미스터 김은 나이에 비해 너무 걱정이 많은 사람이야. 차가 사기로 꼼짝없이 얽히게 된 마당에 그게
무슨 소용이람."
켄트도 그럴 필요가 없다고 단언했다. 합작계약건은 밀레타리에게 소송을 의뢰할 때부터 그가
지적한 사항이었다. 사장이 함께 있는 자리에서 그가 다짐하듯 말한 적이 있었다.
만약 이 일이 그 건으로 뒤엉키는 날에는 밀레타리 당신이 책임을 져야 한다고.
저녁에 경섭은 미스 리를 불러 할머니 설렁탕집으로 갔다. 그곳에서 미리 와 있던 윤 부장에게
미스 리를 소개시켰다. 사람 좋은 표정으로 윤 부장이 내일 사무실에서 정식으로 인터뷰를 하자고
해서 셋은 간단히 식사만 하고 헤어졌다. 돌아오는 택시 안에서 미스 리가 김국환 씨가 그를 만나고
싶다며 호텔이름을 묻더란 말을 전했다. 그녀가 그와 접선할 연결고리라는 것이 그들에게 간파된
것에 그는 놀랐다.
"내가 전화해줄 것이라고 말해. 호텔 이름은 비밀로 하고. 무슨 말인지 알겠지? "
헤드라이트가 걷어내는 어둠이 끊임없이 밀려오는 흉흉한 파도처럼 자꾸만 마음에 부대꼈다.
호텔로 돌아 왔으나 방이 낯설어 잠을 쉬이 이룰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는 방을 나와 국회의사당이 있는 방향으로 어슬렁거리며 걸었다.
얼굴에 부딪히는 밤공기가 으스스한 느낌이 들었다. 호텔이 접한 길모퉁이의 모자점 앞에서 잠시
진열장 유리 너머의 모자들을 구경했다. 갈색의 중절모가 눈에 띄었는데 짧은 털이 보풀거리는
펠트의 질감이 따뜻한 느낌을 주었다. 그는 갑자기 모자를 쓰고 싶어졌다.
머리가 으스스해지면 머리로 올라가는 혈관이 수축되고 그래서 기분이 침울해진다.
아마 머리가 시리면 스탈린처럼 유머가 사라지고 코와 광대뼈 사이로 깊은 주름이 생길거야.
모자 값으로 100 불을 치렀다. 모자를 머리에 얹으니 한결 기분이 나아졌다. 그는 모자를 쓴 채 두
블록을 더 걸었다. 자신이 마치 알젠티노가 된 기분이었다. 그러다가 어젯밤 걸려온 괴전화가 갑자기
생각나 그는 황급히 발길을 돌렸다. 돌아오는 길에 두 홉들이 브랜디와 꽁까스를 한 병씩 샀다.
방에 돌아와 꿀꺽거리며 브랜디를 반 병 이상 마신 뒤 안주삼아 꽁까스를 한 입 가득 들이켰다.
곧 몸이 더워졌고 술의 힘을 빌어 그는 죽은 듯이 잠들었다.
註)
1. 꽁까스(agua con gas ): 천연탄산수, 맹물인 생수는 agua sin gas 라 함.
식당에 가면 웨이터 가 의례히 씬까스? 꽁까스? 라고 묻는다
2. 펠트(felt) ; 양털 毛反毛 등의 섬유를 원료로 수증기,열 ,압력 등의 작용으로 서로 엉기게 하고,
그 축용성을 이용해 천과 같이 만든 것.그래서 중절모(중산모자)를 a soft hat,
또는 a felt hat라고 함. 당구대에 까는 천도 펠트의 일종임.
3. 헤트(hat) : crown 과 brim(테)이 있는 모자. 테가 없는 것은 캡(cap)이라 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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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스 리를 호텔로 불렀다. 윤 부장의 사무실로 데려 갈 생각이었으나 그보다 먼저 김국환의 소재를
물어볼 요량이었다. 이편에서 모레네 가게로 전화를 걸기가 마땅치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는 여전히 유양춘과 함께 기거하던 아파트에 있었다. 이순주를 윤 부장 사무실까지 데려다 준 뒤
점심 무렵 김국환을 팬아메리카호텔 커피숍에서 만났다. 자리에 앉자말자 그는 지난 월요일
차 사장에게 사표를 내고 그날 이후로 아파트에 죽치고 있었다며 그가 묻지도 않은 얘기를 했다.
월요일이면 D-데이였고 경찰들과 함께 차의 사무실로 들이닥친 시각이 오후 네 시였다.
그러고 보니 그 날 세리토 사무실이나 모레네 가게에서 그가 보이지 않았던 것이 생각났다.
그런데 왜 그가 뜬금없이 그날 아침에 사표를 썼다는 것일까?
"갑자기 사표는 왜...?"
"원단이 생각 외로 잘 안 팔리고 돈도 안 되니 차 사장이 나에게 사사건건 신경질을 부립디다.
한 달 전부턴 아예 일을 시키지도 않더니 얼마 전엔 서울에서 자기 동서란 사람을 불러와 떡하니
원단 판매를 맡기지 뭡니까. 그래 옛날 생각이 나데요. 한국에서 부도내고 미국으로 도망칠 땐데
그 때 그가 준 어음 때문에 나는 집을 날렸어요.
막판엔 동업자로 연루되어 내 돈도 많이 들어갔던 거죠. "
"그래 날 만나자는 일은 뭔데요? "
"‘79년부터 지금까지 차 사장 행적을 훤히 꿰뚫고 있어요. 그 양반 헬렌 리와 미국서 3년이나 동거까지
했어요. 미국에서의 저지른 차의 범죄기록을 제공할 수도 있습니다. 그가 나를 여기 오라고 부를 땐
마지막으로 한 밑천 잡아보자는 얘기였는데 그 양반 하는 짓을 보니 제 버릇 개 못준다 싶어요.
차를 때려잡는데 나도 뭔가 도울 수 있다는 생각입니다. 솔직히 그에게 복수하고 싶다 그 말입니다. "
김국환의 나이는 경섭과 또래였다. 그와 차의 인연이 십 년도 넘었다는 얘기인데 차를 여전히
그 양반이라 지칭하는 것을 보니 진정 그가 복수를 위해 칼을 가는 사람 같아 보이지는 않았다.
"그럼, 구체적으로 우리에게 어떤 도움을 주겠다는 얘긴가요? 또 그 대가는? "
"미국에서의 전과기록을 갖다 주겠어요. 그 양반 마약을 취급하다 걸린 적이 있거든요. 대가는 뭐...
미국 왔다 갔다 하는 활동비나, 구체적인 효과가 나올 땐 그 때 좀 생각해 주면 돼요. "
미국의 전과기록이 알젠틴 법정에서 과연 어떤 효력을 발휘할까. 도대체 그의 복수를 위해 내가 해
줄 수 있는 일이 무엇일까. 그의 얼굴을 바라보며 경섭은 잠시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때 김 씨가 조급한 지 사정조로 말했다.
"내일이면 아파트를 비워줘야 해요. 그래서 부탁드리는데 제가 안 차장님 호텔로 옮기면 안 될까요? "
갑작스런 그의 얘기가 황당하여 경섭은 그의 얼굴을 살피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사표를 냈다고 하니 차에게 그간의 임금이나 귀국여비를 받아 한국으로 돌아가면 될 일이었다.
그까짓 아파트 비우는 일이야 크게 원수진 사이도 아닌데 며칠 뭉개면 될 터이고. 그런데 갑자기
나랑 동숙하자는 말의 숨은 뜻은 무엇일까? 알젠틴에서 계속 죽치며 뭔가 먹고 살 일거리라도 찾자는
심산인가? 아니면 나의 일거수일투족을 읽기 위해 차가 꾸민 계략인가? 나에겐 천행의 쾌거였지만,
헬렌 리가 가방을 수습하여 도망가는 것을 급습한 일을 두고 그것이 사전에 은밀히 진행된 나의 정보
수집이었다고 판단한 차가, 그를 앞잡이로 내세워 이제부터 역으로 나의 행보를 손바닥에 올려
놓겠다는 뜻은 아닐까?
"김 형, 그쪽 생각이나 처지는 이해가 갑니다만 굳이 내가 묵는 호텔로 옮긴다는 말은 무슨 말인지
납득이 안돼요. 차 사장하고 일이 그리 되었으면 사무적으로 또 금전적으로 서둘러 차 사장간의
관계를 정리하는 것이 먼저라고 봐요. 차의 전과기록은 법원의 참고자료가 될 수는 있겠지만 법원에
제출할 문건이 되는지는 변호사 얘기를 들어봐야 하겠고......"
김국환은 경솔하게 자기 속내를 보이고 말았다는 생각이 들었는지 얼굴을 붉혔다.
"하도 내가 분해서......그 양반 죽는 꼴을 옆에서 구경이라도 했으면 싶어서요. 그런데 앞으로 일이
어떻게 진행되는데요? "
"그것도 변호사 소관이라 지금으로선 알 수 없어요. 아무튼 귀국하기 전에 함 더 만납시다.
차의 전과기록이 쓸모가 있다면 김 형이 미국에 들러 그 일을 볼 수 있다, 그 얘기였죠? "
"그럼요. 그럼 앞으로 연락은...? "
"미스 리에게 연락처를 남기면 제가 전화를 드릴게요."
김국환을 돌려보내고 경섭은 걸어서 호텔로 돌아왔다. 차종한과 마찬가지로 김국환도 전적으로
신뢰할 수 없는 인물이었다. 3월 초순 알젠틴에 막 도착했을 때 경섭은 한 며칠 그의 숙소에서
유양춘과 더불어 저녁 늦게까지 화투를 치며 논 적이 있었다.
있을 건 다 있는, 점에 1불짜리 고스톱이었다. 우연히 그가 쓰리고를 성공시켰는데 점수가 20점.
그때 김국환은 멍박에 피박이었다. 따블이 세 곱이었으므로 160불을 게워내야 할 판인데 그가
느닷없이 멍박은 족보에 없는 거라고 우겼다.
"멍박이 왜 없어요? 내가 서울서도 쳐 보고 부산에서도 쳐 봤어요.
멍박은 전국적으로 다 있는 건데 왜 없어요? "
"우리 동네엔 멍박 그런 것 없어요. "
"당신 동네가 어딘데요? "
"충청도유, 충청도. "
화가 난 그가 유양춘을 끌어들였다. 멍박이 처음 터진데다 김국환이 목숨을 걸고 우겨대는 판이니
유양춘도 즉답을 피하며 우물쭈물 했다. 나이 사십 줄에 고스톱깨나 쳤다는 작자가 멍박은 처음 들어
봤다며 오리발을 내미니 머리에서 김이 날 수밖에. 그 날 이후 경섭은 그들의 숙소에 발길을 끊었다.
그리고 그 날부터 그는 김을 잡놈으로 치부했던 것이다.
며칠 뒤 변호사 사무실에 들렀다. 밀레타리가 차동한이 오만 불을 예치시키고 예비구속면제를
신청했다고 전했다. 덧붙여 알젠틴은 살인범도 돈만 내면 불구속 재판이 가능한 나라라고 말했다.
걱정했던 대로 돈과 시간의 싸움이 시작되었던 것이다. 답답한 나머지 가슴이 울혈했다.
그런 그의 조바심을 아는지 모르는지 밀레타리는 데세아도로 일주일간 출장을 다녀오겠다고 말했다.
한국의 채낚이 어선이 한 척이 경제수역 침범으로 나포되었고 그 일을 풀려고 조덕창씨와
동행한다는 얘기였다. 집에서 몸이나 건사해야 할 노인이 한국 어선들이 나포될 때마다 원행을 불사
하니 딱한 노릇이었지만 이 곳 물정에 어두운 한국 선주들은 일만 터졌다 하면 맨 먼저 우루과이에
있는 조 회장을 찾았다. 김국환에게 들은 얘기를 하니 밀레타리는 차의 전과가 마약소지죄라면
도움이 안 될 것이라고 일축했다.
경섭은 무심코 벽에 걸린 달력을 바라보았다.
"아- 집을 떠난 지도 벌써 두 달이 넘었구나. 어느새 오징어 어기도 끝나가는구나. "
날짜를 짚어가던 그의 입에서 그런 탄식이 저도 모르게 새어나왔다.
D-데이에 몰두하느라 한 동안 어장의 상황은 귀담아 들을 여가도 없었다.
최근 출장 나온 사람들의 애기론 4월 말부터 종합상사들이 오징어 매집에 손을 떼는 바람에 5천 톤급
라비니아 운반선 6척이 짐을 부리지 못해 부산에서 발이 묶여 있으며, 한 상자에 삼만 오천 원 하던
오징어 값이 이만 원으로 곤두박질 쳤다고도 했다.
채낚이 어선들은 5월 말쯤 자기 뱃짐을 채워 부산으로 뱃머리를 돌릴 것이고 트롤어선들은
잡어조업을 위해 포클랜드 섬 주변으로 남하하리라. 예비구속 면제신청건의 결말을 보려면
또 일주일을 기다려야 할 것이다. 구속과 심문, 기소의 단계까지 또 얼마의 시간이 더 걸릴 것인가.
변호사 사무실을 나서는 그의 발걸음은 칠흑의 밤바다를 헤쳐 가는 작은 배처럼 다시 의기소침 하였다.
임팔라호텔에도 정체불명의 괴전화가 걸려왔다. 총기를 든 무장강도들이 주택가에 출몰하기 일쑤인
밤이 점점 두려워지기 시작했다. 괴전화를 받은 그날 오후, 경섭은 숙소를 그란도라호텔로 다시 옮겼다.
사장은 매일 아침저녁으로 전화를 걸어 차가 무릎을 꿇고 용서를 빌었는지 어쨌는지 물어보았다.
그리고 공연한 짓을 한 것은 아닌지 후회 섞인 얘기를 늘어놓곤 하였다. 그럴 때마다 경섭은 화가 났다.
그로선 평생 한번 만져보기도 어려운 돈을 꿀꺽 삼킨 차가 돈을 돌려주기는커녕 법적인 증거를
없애려고 잔머리를 굴린 판에 더 이상 무슨 수가 있단 말인가. 또한 한국의 외환관리법은 어떻게
돌파한다는 말인가.
호텔에 짐을 부린 후, 경섭은 빠소 거리의 낡은 건물 3층에 있는 ‘천사 이발관’을 찾았다.
오십대 후반의 주인은 그저 용돈벌이나 하는 셈으로 이발소를 차려 놓고 있는 듯 했다.
유리벽 위에는 한국의 시골 이발소를 연상케 하는 목가적인 싸구려 유화그림이 걸려있고,
잡지에서 오려낸 수영복 차림의 젊은 세뇨리타 사진들도 두어 개 벽면에 비스듬히 붙어 있었다.
머리를 짧게 자르고 덥수룩하게 길렀던 수염도 밀었다. 고르지 못한 식사와 불면으로 볼이 약간 패인
얼굴을 바라보다가 경섭은 문득 유리벽 안에서 물끄러미 그를 바라보는 아버지의 얼굴과 마주쳤다.
"이 먼 데까지 와서 뭐 하고 있노? "
그날 저녁 그는 백구촌에서 교포정화위원회 간부들을 만나기로 되어 있었다.
유양춘이 원단을 팔려고 온세상가를 돌아다닌다는 소문이 들렸다. 그도 차와 마찬가지로 예비구속
대상이었는데 원단재고를 털어내려고 안달인 모양이었다. 언젠가 이순주는 그와 차가 10여 회에 걸쳐
칠레를 다녀왔다는 애기를 한 적이 있었다.
알젠틴을 벗어나려고 이주할 곳을 여기저기 탐문한 것이리라. 그러나 예비구속을 신청한 이상,
즉 형사범으로서 혐의가 받아들여진 이상 그들이 구속면제를 받더라도 이젠 독 안의 쥐였다.
법원은 불구속 상태의 행동범위를 한정시킬 뿐만 아니라, 24시간 이상 거주지를 벗어날 수 없으며,
또한 국외여행을 제한하는 명령을 내렸기 때문이었다.
비원에 도착하니 식당주인인 L씨가 먼발치에서 알아보고 쫒아 나와 커튼이 드리워진 내실로 그를
안내했다. 원탁에 둘러앉은 사람들의 면면은 전 교민체육회장, 현 정화위원장, 정화심의위원,
전 교민회장 등이었다. 모두 60대의 연만한 분들이었다. L씨가 경섭이 겪은 저간의 사정과 그들을
초청한 취지를 미리 설명한 듯 그들의 얼굴은 심심한데 마침 잘되었다는 듯 저마다 입가에 가벼운
미소를 물고 있었다. 음식을 주문한 후 경섭은 단도직입으로 물었다.
"차동한 얘기는 들어서 대충 아시겠지만, 그를 족쳐서 돈을 받아낼 방법은 없을까요? "
"법원에 기소된 사건에 대해 함부로 주먹을 쓴다거나 위협을 가하는 것은 역으로 우리가 고발당할
여지가 있습니다. "
정화심의위원이라는 자가 먼저 물꼬를 텄다. 이어서 교민회장이라는 사람이 결론처럼 말했다.
"정화위원회의 취지를 살려 행동지침을 갖자면 상공인회, 교민회, 교민언론, 대한체육회 등
재아단체들의 수장들과 협의를 거쳐야 할 것이요. 단체장들의 연명으로 그에게 합의를 종용하고,
불응할 경우 어떠한 불이익도 감수해야할 것이라는 경고를 하는 정도 아니겠어요? "
잠시 침묵이 흘렀다. 음식이 나오는가 싶었는데 전 교민체육회장이란 자가 기발한 생각이 난 것처럼
상체를 내 앞으로 기울이며 큰 소리로 말했다.
"교포신문이나 광고물에 큼지막하게 그의 악행을 쓰는 겁니다. 이곳에서 교민들 상대로 장사를 아예 못하도록 하는 거지요. 그러면 복잡하게 여러 사람들 안 끼고도 될 거요. 광고비만 좀 들이면 돼요.
안 그래요? "
그의 말에 귀가 솔깃했다. 그러나 차가 역광고를 싣는다면 그 또한 승부가 없는 게임 아닌가.
일행들에겐 결국 아무런 부탁도 할 수 없었다. 헤어질 무렵 L씨에게 타이거 전을 수배해 달라고
부탁한 후 경섭은 지나가는 택시를 잡았다.
은밀하게. 쥐도 새도 모르게. 경섭은 차속에서 스스로에게 최면을 걸듯 그렇게 혼자 속으로 중얼거리며
가없이 펼쳐진 도시외곽의 팜파스를 머리에 떠올렸다. 그러자 갑자기 술을 마시고 싶어졌다.
또한 마르셀라가 보고 싶었다. 그는 싼타페 거리와 리오밤바 골목의 교차점에서 택시를 세웠다
마르셀라는 원시이며 자연이었다. 그녀의 벗은 몸은 여전히 일말의 부끄러움이나 주저함이 없었다.
경섭은 욕조에 몸을 잠그고 눈을 감은 채 낮에 보았던 중년의 아버지 얼굴을 그리고 있었다.
아버지는 늘 55세의 중년이었다. 그는 태어나서 한 번도 아버지의 얼굴을 닮았다는 생각을 한 적이
없었다. 다만 술을 좋아하고 아름다운 여자를 보면 습관처럼 머리를 점령하는 성애의 갈증을 두고
그게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피의 색깔이려니 짐작했을 따름이었다.
그런데 천사이발관의 유리벽 안에서 면도를 끝마친 그의 얼굴 위에 불쑥 아버지의 얼굴이 오버랩
되어 나타났던 것이다. 사춘기를 지나면서부터 그는 아버지를 극도로 미워했다.
그의 무책임한 음주를, 아내와 자식들 앞에 쏟아내는 여과 없는 주정을 몸서리치며 증오했다.
아버지의 죽음으로 그는 비로소 한 개체로서의 인간으로 직립할 수 있었다.
그런데 전혀 뜻밖의 곳에서 그것도 16년 만에 그의 얼굴에 나타난 아버지의 모습을 보는 순간 경섭은
울컥 울음이 터질 듯한 괴이한 슬픔에 사로잡혔다. 천생 그는 그 아버지의 아들이었음을 뒤늦게
깨달았으며 그때서야 그가 사무치게 그리웠던 것이다.
"세뇰 안! 내가 재미난 얘기 하나 해 줄까요? "
어느새 욕조에 들어온 마르셀라가 그의 겨드랑이 사이로 발을 집어넣으며 말했다.
"목장에서 소를 치던 한 농부 얘기인데요. 하도 부지불식간에 소를 도둑맞는 일이 많아서 목장
울타리에 이렇게 써 붙였대요. 고기는 가져가도 가죽은 두고 가시오, 라고 말이에요. "
그가 무슨 뜻인지 몰라 잠시 뜸을 들이자 그녀가 따분한 표정이 되더니 와락 그에게 몸을 기울이며
입술을 훔쳤다. 그의 몸은 곧 쏜살같이 팽팽해졌고 망설임 없이 그녀의 깊은 곳에 가 닿았다.
그녀의 손길은 사과열매를 권하는 이브와도 같았다.
그녀의 깊은 곳에서 그의 본능은 둥지속의 새처럼 아늑하였다. 몸이 서로 낯설지 않았으므로 오래된
연인들처럼 나란히 손을 잡고 좁은 오솔길을 걷듯 몸들은 저들끼리 은밀하게 속삭이며 소중하게 또
넉넉하게 서로를 탐했다. 그녀의 질도는 찰랑이는 시냇물로 흥건했으며 달뜬 그의 남성은 하동처럼
자맥질을 거듭했다.
몸을 몸에게 맡겨둔 채 경섭은 ‘마르 델 쁠라타’로 가는 길에서 본 광활하고도 기나긴 푸른 초장을
머리에 떠올렸다. 그 곳의 어디쯤이어야 할 것이야. 눈을 가린 그 놈을 인적 없는 허허벌판에 꿇어
앉힌 뒤 멱을 따듯 목에 칼을 들이대고 말할 것이야. 여기서 까마귀밥이 될래, 먹은 돈을 게워놓고
벽에 똥칠하도록 살래? 여기서 여우 밥이 될래, 자식들 등에 업힐 때까지 호강하며 살래?
마르셀라의 부드러운 몸 아래에 누워 있던 그는 그 순간 마치 실성한 사람처럼 허공에다 대고 주먹을
내지르고 있었다.
註)
1. 소와 소가죽의 우화; 알젠틴에서 유럽, 미국 등지로 수출되는 육우(肉牛)값은 소 몸무게를 달아
1킬로그램에 미화 1불 남짓이었는데 반해 소 한 마리를 통째로 벗긴, 털을 제거하지 않은
원피 한 벌 값이 조금 과장하여 미화로 100불이었다.
2. 마르 델 쁠라타 (Mal del Plata ); 부에노스아이레스의 남쪽에 위치한 어항을 겸한 해변 휴양도시.
해안가의 유럽풍 건물과 조경이 수려함.
첫댓글 가죽은 두고 가라는 말.... 당췌 몰겠는데요.
아르헨티나 속담 비슷한거에요.. 고기값이 워낙싼것을 비유한 말이에요. 반면 껍데기(가죽)값은 제값을 받고 있었다는 이야기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