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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교당학교와 부령공립국민학교
내가 어렵게 댕기머리를 깎고 학교에 들어가게 된 것은 12세 때인 1942년 봄이었다. 그때 외당숙(林鍾鶴)께서 읍내 군청 앞에서 안일지물포(安一紙物鋪)라는 문방구점을 하고 계셨는데, 어머니께서 이 분과 상의하니 나이도 초과되고 창씨개명을 안했으므로 정규 학교에는 넣을 수 없다며(당시 창씨개명을 안한 사람은 입학원서를 받지 않았다) 천주교당에서 경영하는 4년제 강습소에 넣어 준 것이다. 공식 명칭은 <부안천주교회 학술강습소(扶安天主敎會 學術講習所)>라 했으나 사람들은 신교당학교 또는 신교당이라 불렀다. 부안 천주교당은 초기에는 하서면의 등룡리에 있다가 부안읍내 서외리 성황산 중턱의 읍성 밖으로 옮겨오면서 성당 안에 학교 형태의 강습소를 부설하여 아무런 규제 없이 약간의 수업료를 받고 누구나 받아 주었는데 1944년의 전쟁 말기에 강제 폐쇄되었다.
키가 훤칠하게 큰 이기순(李基順) 신부님이 교장이고 이상룡(李相龍), 박동화(朴東和) 두분의 선생님이 계셨는데 이상룡 선생님은 서외리에서 솜틀집을 운영하고 있었으며 서림약국 이현섭(李鉉燮)씨의 부친이었다. 가르친 교과는 국어(일본어), 산술, 수신, 습자, 음악, 체조 등으로 정규 학교에서 가르치고 있는 교과를 그대로 따르고 있었던 것으로 보아 일제의 규제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특별히 천주교의 교리나 미사 등의 종교적인 행사 등에 참여하도록 하지도 않았다. 교실이 두 칸이어서 1학년과 4학년, 2학년과 3학년이 합반으로 복식수업을 하였는데, 한 학년에 40여 명 내외로 여학생도 10여 명씩이 있었으며 학생들 대부분이 나보다 연상이었으며 담임은 이상룡 선생님이었다. 그때가 일본이 제2차 세계대전을 일으킨 다음 해로 간교한 일본이 미국의 태평양함대 총사령부가 있는 하와이 진주만을 기습하여 큰 타격을 입힌 후 초기에는 승승장구 동남아 일대를 석권하면서 영국군 동남아 사령부가 있는 싱가폴까지 함락하고는 자만에 겨워 그 이름을 ‘쇼난도(昭南島)’라 고하고 ‘쇼난도간나꾸(昭南島陷落) 기념행사’를 대대적으로 하였는데, 이때 전국의 국민학생들에게 고무공 한 개씩을 승전의 기념품으로 나누어 주었지만 천주교당 아이들에게는 주지 않았다. 나는 이 천주교 학교에서 서당공부와는 다른 새로운 세계의 학문을 흥미 있게 배우고 익혀나갔는데 서당공부에 비하여 하고마잘 것이 없었다.
어느 날 선생님이 ‘황국신민의 선서(皇國臣民 宣誓)’라는 것을 가르쳐주고 잠시 후에 이것을 외워 써내라고 하였는데 만점을 받은 사람이 나 한 사람이었다. 선생님은 아이들 앞에서 나를 크게 칭찬하고는 반장에게로 가더니 반장 뱃지를 떼어 내게 달아주면서 “오늘부터 네가 반장이다” 하였다. 그때 반장은 나보다 3세 쯤 위인 신흥리에 사는 신종렬(申鍾烈)이라는 학생이었는데 이 갑작스럽고도 황당한 일에 나는 어쩔 줄을 몰라 당황했던 일이 지금도 기억에 생생하다. 이상룡 선생님은 나중에 내가 부안국민학교로 편입학하여 거기에서 또 만났던 선생님으로 학생들 지도에서 애증의 편향성이 두드러졌으며 상벌이 공평하지도 않은 분이었던 것 같았다. 후에 생각하여 보니 일본을 가장 미워하셨던 아버지의 아들인 내가 ‘황국신민’임을 맹세하는 선서를 틀리지 않고 잘 외워 써서 반장이 되었다니 나는 철없는 아이의 총력탓으로만 돌릴 수도 없는 어처구니 없는 불초의 자식이 된 셈이었다.
선친께서는 내가 머리 깎고 일본말 지껄이며 왜놈 공부하러 학교에 다니는 것을 매우 싫어하셔서 몇 차례 교과서를 찢어버리기도 하고 어머니와 다투기도 하였지만 어머니와 형님의 적극적인 도움의 덕으로 어렵사리 계속 다닐 수 있었으며 종내에는 다소 누그러지기는 했지만 보고도 못 본 척 하셨을 뿐이지 인정하지는 않으셨으나 한가지 산술(수학) 교과만은 인정하시는 눈치였다. 이 어른께서는 수학에도 매우 능하시어 전답의 면적이나 용적 계산 산출법 등도 숫대(산까치)를 이용하여 조선조 시절의 옛 산법의 방식으로 막힘 없이 계산해 내는 어른이었다.
이렇게 천주교의 강습소를 2학년까지 다니고 드디어 소망하던 부령공립국민학교(扶寧公立國民學校 :부안초등학교의 왜정 때 명칭)로 편입학을 하였는데 나이가 많다고 3학년은 건너뛰고 4학년으로 입학한 것이다. 어머니와 형님께서 힘쓰시고 읍내 외당숙이 왜놈 교장에게 돈 3원을 대가로 주었다고 하였다. 부안에서도 제일 큰 중앙의 학교에 입학이 된 나는 처음 얼마동안은 믿어지지가 않을 정도로 좋아서 밤에는 잠도 오지 않았었다. 4학년 죽조(竹組) 맨 뒷줄 니시하라진슈(西原珍洙)라는 학생과 한 짝으로 앉아 공부를 하였는데 니시하라진슈는 뒷날의 한진수(韓珍洙) 일본식의 창씨명이다. 그는 행중리에 산다고 하였다. 무명베 바지저고리에 조끼를 입고 다니는 촌놈인 나는 3학년을 건너뛰었지만 학년말에는 우등생 3인에 끼었었다.
이 창씨개명의 제도는 일제가 조선사람들을 저들과 동화시킨다는 명목으로 조선사람들의 성과 이름을 왜놈들처럼 4자 또는 5자로 바꾸라 하여 1940년 2월부터 조선인 창씨개명령을 내려 강제로 시행하였는데, 이때 우리나라 사람들의 약 90%쯤이 창씨와 개명을 하였다. 그때 우리 학급에 창씨를 하지 않은 학생이 두 명 있었는데 나와 안쟁갈리에 사는 최동호(崔東鎬)였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의 부친도 간재 선생의 문인(崔敏洪씨)이었다. 간재 선생의 제자들은 창씨를 거부한 분들이 많았다.
이때 우리나라 저명한 인사라는 사람들 상당수가 다투어 창씨 또는 창씨개명까지를 하였는데 예를 들면 소설가로 유명한 춘원 이광수(李光洙)는 이름까지 일본식으로 바꾸어 가야마미츠오(香山光郎)라 하였고, 시인으로 친일문학에 앞장섰던 서정주(徐廷柱)는 닷세이시스오(達城靜雄)로, 군사혁명을 일으켜 정권을 거머쥐고 장기간 독재정치를 했던 일본군 장교 출신 박정희(朴正熙) 대통령은 다까끼마사오(高木正雄)였으며, 이화여대(梨花女大)의 총장이요 이 나라 여류 명사 행세를 한 김활란(金活蘭)은 아마끼가쓰란(天城活蘭)이라 하였으며 이외에도 많은 인사들이 성도 이름도 바꾸어서 일본인 행세를 하면서 살았다. 그들 중 상당수의 친일파들이 광복이 되자 얼른 얼굴을 바꾸어 국가 사회의 요직까지 차지하고 거들먹거리면서 애국자 행세를 하였으니 진실로 일제의 잔재를 깨끗하게 털어버린 진정한 해방은 된 것인가 안된 것인가. 지금까지도 정화되지 못한 나라의 정체성이 한심하고 부끄럽다.
학교는 부안군의 중앙 학교답게 크고 학생수도 많았다. 학급당 학생 수가 40~50여명 내외였으며 학년 당 3학급이었는데 한 학급이 여자반으로 남녀가 가급적 어울리지 않도록 학급 편성에 유의하였던 것 같다. 학교는 정남향이고 교문은 북쪽으로 나 있어 교문 밖이 바로 시장이었다. 교사(校舍)가 길게 동서로 두 채였으며 서편으로 숙직실이 있고 그 옆으로 창고가 있었다. 교사와 교사 사이에 연못이 하나 있고 연못 속에는 가석산(假石山)이 있어 거기에 큰 수양버들 한그루가 잘 자라고 있었다.
교문을 들어서면 탱자나무 울타리를 따라 북동쪽으로 벚나무들이 잘 자라서 봄에 벚꽃이 피면 장관이어서 학교의 명물이었으나 해방 후 젊은 선생님들의 강력한 주장에 의하여 모조리 베어버렸으니 이는 벚꽃이 일본을 상징하는 국화(國花)였기 때문이기는 하나 신중치 못한 조급한 처사라는 비판도 많았었다. 동편 운동장 가에 왜놈들의 국조신(國祖神 :天照大神)을 모셨다는 진샤(神社)를 지어 놓고 학생들이 등하교 때면 그 앞에 가서 사이게이례(最敬禮)를 하고 손뼉을 두 번 치고 전쟁을 이기게 도와달라고 빌도록 강요했으며 운동장 조회 때는 일본 천황이 살고 있는 동쪽을 향하여 초고의 경례를 하였다. 또 매월 8일을 ‘다이쇼호다이비’라 하여 전교생이 성황산 밑 신사당(神社堂)에 모여 승전을 기원하는 축원을 하고 왔는데 1941년 12월 8일이 저들이 연합국에 선전포고를 한 날이기 때문이다. 학교의 운동장이 꽤 넓었는데 남쪽 끝으로는 실습지가 1,000평 쯤 있었으며 그 울 너머로는 지금은 모두 시가지요 번화한 시장지역이 되었지만, 그때는 매산메(梅山) 공동묘지로 사람들의 내왕이 없는 혐오지역이었으니 이것이 1940년대 초의 부안초등학교의 모습이다. 이 학교의 건물은 1947년 봄에 학교의 서무직원이 자신의 경리 비리를 은폐하기 위한 방화로 모두 소실된 이후 다시 지은 건물들이다.
일본 국조신을 모신 신사당 내부
일본이 태평양전쟁을 일으키면서 학교생활은 급속하게 달라져 갔으며 무지개 같았던 꿈도 잠시였고 차츰 검은 구름으로 덮여져 갔다. 교내에서 조선말은 한마디도 못하게 하고 일본말만 사용하여야 하였는데 심지어 돌부리에 채여 넘어지며 본능적으로 “아이고매!”라고 소리쳐도 조선말 했다고 처벌을 받았으니 왜놈들의 우리말 말살정책은 가혹하기 이를 데가 없었다. 무식한 농부가 ‘황국신민선서’를 못 외운다 하여 배급품을 주지 않았었다.
이때 우리는 일주일에 두 번씩 점심 후에는 ‘공동훈련’이라는 명칭으로 전교생이 운동장에 모여 악대에 맞추어서 군인들의 열병과 분열을 흉내 내며 군사훈련을 하였는데 5, 6학년은 목총을 메고 하였으며 체조시간에는 총검술 연습도 하였다. 초등학교 아이들까지도 완전히 전쟁체제의 교육으로 바뀐 것이다. 그래서 모든 학생이 군마에게 먹일 마초를 베어 잘 말리어 의무적으로 제출하여야 하였고, 송진을 기름 대용으로 쓴다며 산에 가서 소나무의 관솔 굉이를 채취하여 제출하였으며 운동장에 가마니틀을 늘어놓고 5, 6학년은 가마니 짜기를 하게 하였다. 4학년 이상은 오전 수업이 전부요 오후에는 노력동원이라 하여 일손이 모자라는 마을로 나가 논밭에 거름도 내고 보리 베기며 모내기를 하였으니 전쟁의 뒷받침을 위한 총동원이었다.
이때 부안에는 중학교가 없었으므로 전주나 서울 등으로 진학을 못하는 학생을 위하여 부안국민학교에만 중학과정을 가르치는 2년제의 고등과라는 것이 설치되어 있었는데 고등과의 임아무개라는 학생이 이 가마니틀들의 날줄들을 학생들이 모두 보는 앞에서 주머니칼로 모조리 잘라버린 사건이 발생하여 학교가 한바탕 시끄러웠다. 이 사건이 그 후 어찌 처리되었는지는 모르나 일제에 항거하는 반전행위로 볼 수도 있을 심상치 않은 사건이었다. 단순히 학교 내의 불량학생의 행위로만은 처리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더욱이 그 학생은 학생들이 우상처럼 여긴 인기 있는 학생이었다. 그가 6·25 직후 변산에서 빨치산 유격대장으로 유명했었던 바로 그 임아무개씨다.
저들이 일으킨 태평양전쟁이 개전 초기와는 달리 미국과 영국의 연합군에 의하여 제공권과 해상권을 모두 빼앗기면서 차츰 패퇴하기 시작하였고 거기에 전쟁물자까지 크게 부족하니 온갖 발악적인 짓을 다 하였다. 이때 왜놈 교장 야마모도긴소(山本金藏)라는 사람은 왜소한 체구에 안경을 낀 전형적인 왜놈이었는데 그는 자신부터가 가마니도 잘 짜고 농사일도 할 줄 알았으며 소리(草履 :왜놈들의 게다 같이 생긴 짚으로 삼아 신는 신발)도 잘 삼았는데 앞장서서 학생들과 선생님들을 정신 못차리게 몰아 세웠다.
일본이 패망하던 1945년 나는 5학년이었다. 이때 미군이 이미 사이판 섬에 이어 오끼나와까지 점령하면서 일본의 목을 옥죄어오고 있었으므로 곧 미군들이 조선의 서해안으로 상륙할 것으로 예상한 일본은 소련과 불가침조약을 맺고 만주와 소련의 국경에 배치된 일본군 최강의 정예부대라고 자랑하는 관동군을 빼내어 조선의 서해안에 배치하였는데, 부안지방 해안에 많은 일본군인들이 배치되어 학교를 비롯한 웬만한 기관의 건물이나 시설물들은 모두 차지하여 버렸다. 그리하여 우리 학급은 학교 밖 서편에 있던 이영일(李永日)씨 창고에서 공부하게 되었다. 담임선생은 일본인 야나기다(柳田)란 분이었으며 일본군의 ‘고쪼(伍長)’ 출신이었는데 우리들은 주로 자습을 하게 하고 그 분은 조선청년 징병 해당자들을 소집하여 전투훈련을 시키는 교관의 일에 주력하고 있었다.
학교 정문에는 무장을 한 군인이 보초를 서고, 운동장은 저들의 군사훈련장으로 변하였으며, 읍내 주변의 솔밭과 오리정 근처의 임야 등은 군마들의 마굿간이 되어버렸고, 지금의 대림아파트 뒤 옛 부안주조장 옆에는 군인들 위안소라는 것이 들어서 위안부들이 득실거렸었으니 그런 난리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