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낙강을 빛낸 여류 시인들(Ⅰ)
김우연(시인·문학평론가)
낙강(洛江)은 1965년 4월 25일, 창립회원으로는 회명을 <경북시조문학동호회>로 정하고 고문에 이호우, 회장에 이우출을 뽑아, 초창기 회무를 주로 이끌어 갔으며, 모일 적마다 작품 품평회를 했다.
2년 후 1967년 6월 25일에 부산에서 임종찬도 참석하여 영남시조문학회로 개칭하였으며 7월 1일부터 공식 명칭으로 사용하였다. 영남시조문학회의 회장은 대가이신 이호우 선생이 맡으면 좋다는 회원들의 뜻에 따라 승낙하시어 그해 12월에 창간호 낙강(洛江)을 발간하게 되었다.
정운(丁芸) 이영도(李永道) 선생을 비롯한 많은 여류 시인들이 낙강이 시조단을 빛내었는데 모두 인품이 훌륭한 분들이었다. 낙강의 후배 회원들은 그들을 영원히 기억하고자 한다. 필자가 소장하고 있는 개인 시집들을 위주로 몇 명의 여류 회원들의 작품을 살펴보고자 한다.
낙강 2집(1968)에 이영도, 낙강 3집(1996)에 여류시인 특집으로 김정자, 정표년, 낙강 13집(1980)에 박옥금, 정표년, 낙강 15집(1982)에 김남환, 김일연, 박옥금, 정표년 시인이 발표하였다. 그러다가 낙강 17집(1984)에 34명의 발표 회원 중에 정표년, 김남환, 박옥금, 김혜배, 김송배, 정위진, 이일향, 김일연 등 8명의 여류 시인들이 참여하여 여류시인들이 꽃을 피우게 되었다.
1. 정운(丁芸) 이영도(李永道)
사흘 안 끓여도/ 솥이 하마 녹슬었나// 보리 누름 철은/ 해도 어이 이리 긴고// 감꽃만/ 줍던 아이가/ 몰래 솥을 열어보네.
-「보리 고개」 전문
우러르면 내 어머님/ 눈물 고이신 눈매// 얼굴을 묻고/ 아, 우주이던 가슴// 그 자락/ 학같이 여시고, 이밤/ 너울너울 아지랑이
-「달무리」 전문
다스려도 다스려도/ 못 여밀 가슴 속을// 알 알 익은 고독/ 기어이 터지는 추청(秋晴)!// 한 자락/ 가던 구름도/ 추녀 끝네 머문다.
-「석류」 전문
그대 그리움이/ 고요히 젖는 이밤// 한결 외로움도/ 보배냥 오붓하고/ 실실이/ 푸는 그 사연/ 장지 밖에 듣는다.
-「비」 전문
너는 저만치 가고/ 나는 여기 섰는데// 손 한 번 흔들지 못한 채/ 돌아선 하늘과 땅// 애모는/ 사리(舍利)로 맺혀/ 푸른 돌로 굳어라.
-「탑3」 전문
이영도 시인은 1916년에 청도군 대성면 내호동에서 3남 2녀 중 차녀로 태어나셨으며 이호우 시인의 여동생이다. 황진이 이후의 최고의 여류시인이라는 평을 받고 있다. 시집 곳곳에 애절한 그리움의 시적 서정이 잘 형상화가 되어 있다.
정운(丁芸) 이영도(李永道)는 조선 중기 황진이(1511∼1541)이래 오랜만에 이 땅이 낳은 최고의 여류 시조시인이다.(……)/ 그는 시보다 아름다운 사랑을 하였다. 대시인 청마 유치환과 많은 편지를 교환하면서 가히 세기적인 정결한 사랑을 한 것은 너무나 유명한 이야기다.(……)/ 이영도는 아름답고, 총명하고, 알뜰하고, 부지런하여 여성으로서 거의 완벽한 분이었다. 그 완벽했음이 결점이었을 것이다. 사람이 조금은 틈이 있어야 친근감을 느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하는데 그는 그렇지 못하고 매사에 철저했으니 단명하였다고 생각된다.
이영도 시인은 1935년 결혼하여 1945년 남편이 작고하였는데 시보다 아름다운 사랑을 하였다고 박옥금 시인은 말하고 있다.
애달픈 인연이 아니면 내 인생에 있어 죽음이 애석하고 슬픈 것이 하나도 없는 것입니다. 아름답고 고운 당신을 알뜰한 아내로서 삶을 이룩해 보지 못하고 허탕칠 목숨이, 이 지극한 상애(相愛)가 보람없이 시들어 죽고 말 것이 원통할 뿐인 것입니다.
1962년 7월 2일에 청마가 정운에게 보낸 편지의 한 대목이다. 박옥금 시인은 말처럼 사랑이란 만나서 하나가 되어야 하는 법인데 그것이 안 된다면 참으로 애달프고 슬픈 인연일 것이라고 하였다.
2. 정표년 시인
정표년 시인은 1946년 대구 달성 출생으로 1969년 《여원》에 「너 앞에」로 시조 당선, 1973년 《현대시학》에 「설일」로 추천 완료하였다. 2019년 낙강 총회에 모시어 회원님들께 좋은 말씀 전해주시기로 했으나, 박영교 고문님이 꼭 참석해야 하는 결혼식에 가시게 되어서 두 분이 함께 모이는 해에 다시 모시기로 하고 양해 말씀을 올렸다. 폰 문자 답변에 “낙강에 대한 애정은 변함없어요. 늘 애틋합니다. 지켜주셔서 감사합니다. 오래 오래 가야 합니다.”라고 낙강에 대한 무한한 애정을 보여주셨다.
새벽마다 울던 새가/ 산빛 물빛 다 흔들었나// 술렁대던 자리마다/ 툭툭 생명들 여는 소리// 예수여/ 가시관 위에/ 눈이 부신 황금 햇살
-「부활」 전문
당신을 사랑한 것은/ 내 죄가 아닙니다// 비 온 뒤 나뭇잎 푸르듯 그렇게 온 당신의 정은// 이 가을 저문 뜰에도// 낙엽질 줄 모르고// 내 허물 앞에 놓고/ 절망으로 어둠 찍으며// 마주하지 못하고/ 마음 꼭꼭 접어 안고// 이 가을 저문 뜨락을/ 낙엽 밟고 가는 달
-「당신」 전문
마음에 비오는 날은/ 시집 한 권 뽑아 읽는다// 생각의 갈기갈기/ 빗줄기에 씻기우며// 시인의 잊었던 시를/ 다시 꺼내 읽는다// 시인은 시로 말한다/ 온갖 느낌 온갖 푸념// 조용조용 읊조리다/ 거칠게 분노도 하며// 숨겨 둔 소중한 얘기도/ 슬쩍 꺼내 보인다// 마주앉아 얘기하듯/ 같이 웃고 공감하며// 끄덕끄덕 말려든다/ 구름 슬슬 걷어내며// 어느새 마음밭에는/ 파란 하늘 다가온다
-「시집 속의 시인과」
아무로 모르고 있는/ 신의 섬으로 찾아가서// 슬픈 일 고픈 일 다/ 모른 체 눈귀 닫고// 한 석 달 잠들고 싶다/ 깊은 잠에 들고 싶다// 행여나 생각날까/ 혹시나 보고플까// 그저런 생각들까지/ 까맣게 잊어버리고// 멍하니 나도 모르게/ 세월 훌쩍 넘고 싶다
-「신의 섬으로 가서」
여빈아 네가 만드는/ 티 없는 언어들은// 세상을 열어가고/ 사랑을 일깨우는// 둘만의 은근한 암호/ 막 떠들고 싶은 비밀// 꽃잎이 벙그듯이/ 눈 맞추고 입 오무려// 온힘을 한데 모아/ 떨림으로 풀어내듯// 숨소리 멈추게 하는/ 천사의 시 낭송소리
-「옹알이」
정표년 시인이 2018년에 발간한 산문집에 시조 관련 내용이 몇 곳만 발췌해본다.
민족시로서의 시조를 대하는 국민의 자세는 바뀌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비록 쓰지 않으나 시조를 이해하고 아껴는 줘야 할 것이다. 극언일지 모르나 시조를 모르는 것은 민족혼民族魂을 모르는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 이제 반해 쓰는 사람에게도 약간의 문제는 있는 것 같다. 꼭 문학 분야 특히 시·시조분야에 있는 문제만도 아니지만 어떤 모임이나 개인에게 있는 아류亞流나 아집我執도 문제인 것 같다./ 우리 아니면 인정하지 않고, 나 아니면 별로라는 생각은 위험하기 짝지 없다.(……) 나의 인간됨과, 나의 작품과, 나의 인생관이 과연 내가 생각하는 만큼 상대편에서, 독자가, 혹은 제삼자가 인정하느냐의 문제가 아닐까? (……)/ 결국 많은 독자를 갖기 위해서는 또 독자들의 관심과 사랑을 받기 위해서는 어느 평자가 말했듯이 사심 없이 인식의 공감을 얻을 수 있는 좋은 작품을 쓰는 일밖에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그리 쉽지 않으니 또 문제로 남는다.
이호우 선생님께 직접 사사 받도록 권해 주셔서 일주일에 한 번씩 이호우 선생님을 뵙고 시조에 관한 얘기도 듣고 작품 지도도 받고 지낸다는 소식을 드렸더니 주신 편지 였다. 그러다가 내 건강 문제로 걱정을 했더니 선생님께서 불러 주신 것이었다. 그렇게 해서 스물 세 살의 나이로 서울 첫나들이를 하게 되었다.(……)
마포구 하수동 95-10번지에서 1968년 7월 23일부터 여름날 오십 일간을 선생님과 함께 생활하면서 가까서 선생님을 뵐 수 있었던 것은 내 생애에 큰 보탬을 주었다.
문학에 큰 기대감 없이 투병 중인 무료함을 메꾸며 투고자로 있던 나를 문단으로 이끌어 주셨고 매사에 함부로 하지 않으시고 보통 사람이 피곤해하리만치 철저한 삶을 사셨던 분이었다. 목말라 하는 이웃을 그냥 보아 넘기시지 않았으며 한자리에서 혹 잘못하거나 실수를 하면 상대방이 민망해하지 않도록 그 자리에서 직접 고쳐주기도 하셨다.
박옥금 선생님을 처음 뵌 것은 1968년 여름 마포구 하수동 이영도 선생님 댁에 머물록 있을 때였다.(……)/ 대구 경북의 시조 전문 문학단체인 영남시조문학회(낙강) 회원으로 활동하시면서 연말 모임이 되면 김남환, 이일향, 정위진 선생님을 비롯해 작고하신 김혜배, 김해석, 배위홍 선생님이 오셨고, 모임 끝에는 대구의 회원들과 지금은 활동을 쉬고 계시는 전영순 선생님, 김숙자 선생님이 필자랑 한 숙소에서 하룻밤을 묵은 적이 있었다.
정표년 시인의 인품에 대해서는 박옥금 시인의 글에서도 알 수 있다.
이영도는 그 때 혼자 살았는데 외롭기도 하고 불편하기도 하여 대구에 있던 정표년을 불러 올렸던 것이다. 다정하고 단순한 이영도는 정표년을 딸처럼 사랑하였다. 자기 딸은 고분고분 하지 않았기에 친딸보다 더 사랑하였는지 모른다. 애견가가 강아지를 귀여워하듯 그렇게 사랑스러워하는 것을 보고 나는 내 잘못은 생각지도 않고 슬며시 심술이 잘 정도였다.
나는 남편이 구박도 구박이지만 그래도 마음속으로 큰 의지가 되었던 친언니 같은 이영도가 뒤늦게 알게 된 젊은 후배를 더 사랑하느라 나와 멀어진 것 같아 외롭고 쓸쓸한 심정이 더해 갔다. 나와 남편 사이에는 기어이 큰 일이 벌어지고 말았으니 그 이야기는 다음에 하겠다.
그럼, 이영도가 딸 이상으로 귀여워한 정표년은 어떤 사람인가. 그것도 여기에 기록해 주어야겠다. 과장 없이 말을 하라면 그는 내가 존경하는 시조시인이다. 나보다 10년 이상 연하인 그를 존경한다함은 그의 시조가 소박하고 아름다워 그 기법을 따르기 힘들 정도로 시조 솜씨도 좋았지만, 무엇보다 그 착하고 순한 인품 때문이었다.(……) 그 순하디 순한 눈빛이며 그 착한 마음씨는 가을에 숨어 피는 가련한 들국화 같은 사람이다.
3. 김남환 시인
김남환 시인은 경북 김천에서 출생했으며, 이화여자대학교 국문과를 졸업하였으며, 1972년 월간문학 신인상 당선으로 등단하였다. 김천에 백수 선생이 있어 걸출한 여류 김남환 시인이 배출된 것은 인연이라 볼 수밖에 없다.
내 고향 수꾹새를/ 닮은 白水 先生님// 열매 같이 익은 孤獨/ 望黃岳의 窓에// 深深山 저문 가을 해/ 먼 生涯를 바람이 풀데// 피를 나누 듯/ 목숨을 쪼개 듯// 주신 사랑 외줄기/ 열어 둔 이 長江에// 萬갈래 세월 사이로/ 떨리는 落花를 보네.
-「因緣」 전문
김남환 시인이 등단 25년 되던 해에 펴낸 제6시집 『이차돈의 江』(동방, 1997)에서 몇 작품을 뽑아 본다. 한 편 한 편 모두 가편들이라 현대시조의 정수를 보여주고 있다. 「저자의 말」에서 “이 텅 빈 대금의 가락처럼 은은한 목소리로 이 세상의 온갖 어혈들을 풀어내는 그런 노래를 부르고 싶다. 시인은 오직 자신의 삶에 대하여 끝없이 추구하고 끊임없이 고뇌하는 속에서만이 보다 아름다운 꽃을 피울 수 있을 것이다.”라고 하고 있다. 고뇌하는 시인의 모습을 엿볼 수 있는 말이다. 낙강 총회에 서울에서 참석하시던 모습이 눈에 선하다. 정표년 시인이 “서울 도심에다/ 시골 한 폭 옮겨 놓고// 형님네 4대 가족/ 끈적이는 정의 고리// 그 옛날 엄마 솜씨/ 통김치도 맛들었네”(「남환 형님」 두 수중 첫째 수)라고 노래 한 바 있다.
이 저승 넘나드는/ 장군봉은 보았을까// 죽어서 꽃을 피운/ 이차돈의 푸른 話頭// 서라벌 長天을 누빈// 새벽달은 보았을까.// 무시로 범람하는/ 강물을 이끄시며// 무지개 둘러놓고/ 어루만진 빈 하늘을// 빛부신 연꽃을 들고/ 날마다 환생한다.
-「이차돈의 江」 전문
새야, 무등산 새야/ 숨어 우는 무등 새야// 총칼 앞에 무참히 진/ 망월동 넋을 불러// 울어서 일으킨 봄 한 철/ 저승까지 물든 초록.
-「무등산 새야」 전문
밀려오는 물굽이를/ 대패질로 깎아 내며// 피울음 울지 말고/ 갈매기나 뛰울 것을// “우리 님 지키오리다”/ 마주 섰는 금강문.
-「독도」 전문
종 소리 받아 안으면/ 나도 한 자락 강으로 흘러// 산수유, 목련, 철쭉꽃/ 소신 공양 하는 이밤// 오십년 저편의 하늘이/ 쪽빛 입고 내리신다.
-「봄날, 直指寺에서」 전문
산이 가로막으면/ 높이 날아 산 오르고// 짖어대는 밤바다를/ 너울너울 건넌다// 때로는 곤두박질한/ 천 길 벼랑도 있었다.// 햇살 한 잎 따물고/ 묵화밭에 깃 내리면// 욕망들이 난무하는/ 이 시대의 북새판이야// 찰나에 사라져 버릴/ 요지경 속 아니던가.// 노래여, 눕지를 말고/ 무쇠처럼 울 일이다// 피 뱉으며, 혼절하며/ 잠긴 목청 다 틔우며// 움츠린 산빛을 열고// 강물 흘릴 일이다.
-「노래여, 눕지를 말고…」 전문
휘영청 사철을 넘는 풍류장이 한량이라.// 꽃소식 들 때마다 구름 한 자락 잡아 타고 三春을 다 놀고는 오뉴월 불볕 속을 가랑이 껑충대며 흰웃음 뿌려대다가 저만치 소슬바람이 대금을 불어 흩는 날은 팔도강산 휘젓고 돌아칠거나. 그러다가 겨울 왕대밭에 들어 휘날리는 눈발되고 가슴 열두 골짜기에 불 당겨 활활활 타 버린들 또 어떠리// 어차피 한판 인생길/ 탈놀음이 아니던가.
-「취바리의 춤」 전문
시집 『이차돈의 江』에서는 강과 바다의 이미지가 많았다. 강을 직접 거론한 것은 「江을 위하여」,「임진강」, 「사이공 江」 등이 있다. 강을 통하여 깊은 역사와 인생을 통찰하는 의식들이 승화되어 있었다. 각 작품마다 선명한 이미지를 구현한 것은 수준 높은 시적 표현들이다. 「노래여, 눕지를 말고……」 에서는 물욕이나 권력의 압제 등 부정적 현실에 에 굴복하거나 물들지 않고 순수한 시인의 길을 걸어가겠다는 다짐을 한 것이다. 섬세하면서도 나약하지 않은 어조들은 사소한 것에 얽매이지 않는 시인의 성품이 잘 나타난 것이라 본다. 「취바리의 춤」은 사설시조이다. 달관한 인생의 경지를 보여 주고 있다. 김남환의 시에 대한 연구자들이 많이 나왔으면 한다.
4. 박옥금 시인
남주(南州) 박옥금(朴玉金) 시인은 1927년 2월 26일에 청도 유천에서 태어나서 2005에 선종(善終)하였다. 조부님은 유천에 있는 박동철한의원이었다. 1944년 봄에 부산항 공립고등여학교(현 경남여고)를 졸업하여 밀양 산외초등학교 교사로 갔다가 거기서 해방을 맞았다. 공부를 더 하고 싶어서 현 영남대학에 입학하여 시작과 연극 활동에도 적극적이었다. 그러다가 2학년 재학 중에 검정시험을 쳐서 안동여자중학교 교사로 부임하였다. 동생 박정수는 공학박사로 빙그레 사장 및 한국피혁연구소장을 역임했다.
1972년에 『탑』 간행으로 등단하시어 그해 《낙강》 제6집에 작품을 발표하기 시작하여 2002년까지 빠짐없이 《낙강》에 작품을 발표하였다. 낙강에 보인 사랑은 끝까지 변함이 없었다. 그러나 돌아가신 후에 소식을 제대로 듣지 못하여 지금까지 추모 특집도 싣지 못한 것은 죄송한 일이다. 추모하면서 짧게나마 박옥금 시인의 한 단면을 살펴본다.
정표년 시인은 박옥금 시인에 대하여 이영도의 말을 전하면서 다음처럼 말하고 있다.
이영도 선생님은 생전에 박옥금 선생님을 “마음이 여리지만, 머리는 참 비상하다.”고 하셨다. 참 열심히 사셨고 자녀들도 잘 커 주어서 효자 효녀로 어머니께 각별했다는 흐뭇한 얘기도 들었다.
박 선생님은 아마 하시고자 했던 일은 다 하셨던 것으로 안다.(……)막상 박선생님의 운명 소식을 한참 뒤에 듣게 되어 작별 인사도 못 했다. 그것이 늘 마음에 걸렸는데 이번에 소박하고 순박했던 모습대로 영원한 안식을 누리시길 진심으로 빌면서 이 글을 두서없이 놓는다.
박옥금 시인은 시조도 빼어났지만 이영도 평전 『내가 아는 이영도, 그 달빛 같은』(문학과 청년, 2001)은 우리 문학사에 길이 남을 평전의 명저이다. 최승범 시인은 “정운은 우리 문학사에서 하나의 빛이며, 그 일생을 이처럼 가까이서 밀도 있게 다룬 책은 아직 없다.”라고 뒷표지에서 말하고 있다.
이 책을 발간한 이유를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사후 25년이 되었지만 나에게는 하늘같은 스승이자, 고향을 함께 하고 어린 시절부터 자매처럼 지낸 분이기도 하다. 내가 늦었지만 이 글을 쓰는 것은 그로부터 받은 태산 같은 은혜에 보답하고자 하는 뜻 이외에도 그가 남긴 족적이 너무나 위대하다고 생각되어 문학사에 기록으로 남겨야 되겠다는 제자로서의 사명감 때문이기도 하다.
평전의 핵심은 세기적인 사랑에 대한 것이라고 한다.
이영도에게 또 하나 슬픈 사연은 아무래도 내가 쓰는 이 평전의 하이라이트가 될, 한 남성과의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이야기이다. 헌헌장부인 대시인 청마 유치환(柳致環)과 정신적인 사랑을 하면서 그 동안 교환한 애정 편지가 무려 5,000통이 이른다니 가히 이것은 세계적이고 세기적인 사건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이영도의 평가가 빛을 보지 못함을 안타까워하고 있다.
그 후. 이영도는 문단 생활 31년 유작집 합해서 시조집이 3권, 수필집이 7권 등 도합 11권이나 되니 양적으로는 이호우를 능가하고 질적으로도 뒤떨어지지 않는다고 보여짐에도 이영도는 이호우의 그늘에 가려 제대로 빛을 보지 못하고 있는 것이 안타깝게 여진다.
이영도의 평전을 쓰기 위하여 서울에서 이영도 생가를 방문한 후에 이영도와 그의 문학을 비유한 「구원의 달빛」이 있다.
바람도 비켜가리라 이 자리 새겨진 업적/ 이것은 구원에 흐를 당신의 달빛입니다
이득함 감당치 못해 비파강이 우옵내다.// 이수삼산(二水三山) 고향에는 이름만 남기시고/ 이 땅을 덮고도 남을 구원의 달빛 같은/ 생가 뜰 감나무에는 가을이 익고 있습니다.// 안채며 사랑채며 그 날의 꽃은 지고/ 천리 찾아온 발길 눈물에 젖으면서/ 휘영청 달빛을 보며 당신 음성을 듣습니다.
위 시에서 감나무는 어릴 때보던 그 감나무였다고 평전에서 밝히고 있다. 박옥금 시인은 이영도 선생과 고향이 같다. 어릴 적 그 댁에서 감꽃 줍던 어린 시절을 다음과 같이 회상하고 있다.
내가 처음 이영도를 만난 것은 일곱 살 때쯤이었다. 대궐 같은 그 댁에 큰 감나무가 있었는데, 감꽃이 많이 떨어진 것을 보고 할머니를 졸랐다.(……) 누구보다도 삼단 같은 검은 머리에 붉은 댕기를 달고, 수를 놓고 있던 이영도는 눈부시게 아름다운 모습에 강한 충격을 받았다. 그 시절 나는 동무들과 예배당에 다니고 있으면서 예배당에서 들은 바 있는 천사가 그가 아닌가 하였다. 내가 너무 어렸기 때문에 그 시절은 이영도의 말동무가 되지 못했다./ 그 후로는 나는 길이 나서 해마다 감꽃을 주우러 다녔는데 어느 날이었다. 혼자 그 솟을대문을 쥐새끼처럼 뚫고 들어가서 혼자 열심히 감꽃을 소쿠리에 주워 담고 있는데 미닫이를 반쯤 열어 놓고 수를 놓고 있던 이영도가 바늘에 색실을 달고 감나무 밑으로 내려 왔다. 감꽃을 바늘로 색실에 꿰어 꽃타래를 만들어서 내 목에 걸어주면서 이렇게 말하였다. /“옥금이라고 했지, 참 예쁘구나. 이 많은 감꽃 주워서 다 뭐 하려고?”/ “먹기도 하고요, 말려서 먹기도 하고요, 동무들과 소꿉놀이도 해요.”/ “옥금, 예쁜 옥금이, 이제부터 나를 힝이(언니)라 해라.”/ 나는 다만 꿈을 꾸고 있는 듯 너무너무 감격하여 말을 잇지 못했다. 이영도는 막내라 동생도 없었지만 집안에 갇혀서 의외로 고독하지 않았던가 지금 생각된다.
박옥금 시인은 《낙강》 35에 마지막으로 발표한 해는 이영도 평전을 낸 이듬해인 2002년이었다. 지금까지는 박옥금 시인에 대한 글이 이영도 선생의 평전과 인연을 중심으로 살펴보았다. 박옥금 시인과 이영도 선생은 그만큼 인연이 깊기 때문일 것이다.
박옥금 시인은 시조집으로는 『탑』, 『한생 피는 뜻은』, 『생활의 서』, 『도농리 가는 길』, 『저 하늘 끝에서』, 『은하의 가을 소식』, 『가지산을 넘으며』, 에세이집 『여자의 강』, 편저 『한국여류시조문학전집』 외 1권이 있다. 1986년 한국시조문학상, 1887년 정운시조문학상, 1991년 노산문학상, 2000년 가람문학상을 수상하였다.
박옥금 시인이 《낙강》에 발표한 마지막 해인 2002년을 준으로 5년을 거슬러 올라가 일 년에 한 편씩만 감상함으로써 마지막의 그의 작품 세계를 엿보고자 한다.
금빛 옷 갈아입고 가을을 등에 지고/ 호접처럼 나래 펴고 작별을 고하는가/ 가슴에 지핀 불씨가 西天을 태우는데….
-「은행잎 떨어지니」 전문
꽃 한 송이 달지 못한/ 사철 푸른 병정처럼// 말 수 없는 고부간에/ 세모꼴 다리를 놓고// 솔솔히/ 구름을 밀고/ 처마에 거는 초승 달.
-「관음죽(觀音竹)」 전문
건져 올릴 수 없을까/ 제주도의 아들 같아서/ 산과 들 까만 돌멩이들/ 제주도 닮은 눈빛인데/ 해종일/ 밀고 밀리며/ 파도는 왜 우는가// 風浪에 동동 뜬/ 네 외로움 묻지 않겠다/ 물결과 싸우다가/ 물개가 된 섬 아이들이/ 갈매기/ 나래에 방울 다는/ 작은 학교 종소리
-「牛島」 전문
넘어야할 산이 있었고/ 건너야할 강이 있었다// 暴風雨 치는 날에는/ 슬피 눈물 뿌리던 나무// 그 山河 뒤돌아보니/ 하마 西山에 해 저무네.// 돌아갈 수 없는 땅에/ 눈처럼 내리는 悔恨// 어느 큰 손길이 있어/ 저 스크린 맑게 닦으랴// 내 세월 남은 세월의 짧아 고운 落照여.
-「歲月」 전문
비에 젖어 돌아가는/ 京釜高速道路/ 하늘은 나즉이 숙이고/ 山野는 꿈 속에 잠자고/ 내 車는/ 千里長江을/ 배가 되어 흐르네.// 이런 날 홀로 나그네/ 외로움도 오붓해라/ 상처 입은 가슴을 달래며/ 생각의 우물을 판다/ 몇 길을 깊이 파야만 내 물줄기 솟을까// 살아온 날과 달리/ 車窓에 어룽진다/ 다시는 않으리라/ 人間에 집념 않으리라/ 기나긴 旅路를 딛고/ 다가서는 서울이여.
-「비오는 旅路」에서
마지막 발표에서는 위의 「은행잎 떨어지니」 외에도 「落葉」이 있어 제목만 봐도 죽음이 가까이 와 있음을 예감하고 있음을 느낄 수 있다. 시에 대한 가슴은 여전히 뜨거운데 서천(西天)이 붉게 타오르는 모습에 숙연한 마음마저 일어난다. 「관음죽」에서는 의사소통이 제대로 되지 않은 고부간에 관음죽이 초승달을 처마에 걸어와 대화가 되도록 중간 역할을 하도록 하고 있다. 가까이 있는 사람들 사이일수록 소통이 필요함을 은근히 나타내고 있다. 「우도」에서는 학교의 종소리가 갈매기 날개에 방울을 단다는 것은 변형묘사로서 참신한 이미지이다. “파도는 왜 싸우는가”에서 끝이 없이 밀여 왔다가 사라지는 파도를 통해 인생의 고단함을 느낄 수 있다. 「세월」은 한 편이 자서전이요 자화상이라 볼 수 있겠다. 「비오는 여로」에서는 “다시는 않으리라/ 人間에 집념 않으리라”의 인생을 달관한 경지를 보여주고 있다. 이 말은 “내가 잊을 수 없고 아직도 가끔 내 귀에 쟁쟁 울리는 이영도의 말씀”이라고 한다.
옥금아, 인간에게 집념하지 말라. 인간을 너무 사랑하면 고의든 고의가 아니든 끝내는 배신을 당하기 마련이다. 고의가 아니더라도 사랑하는 자식이 뜻대로 안 될 때는 일종의 배신이고, 사랑하는 남편도 일찍 죽으면 배신이라 할 수 있지. 친구는 말할 것도 없다. 그저 거리를 두고 덤덤히 사랑하여라. 배신이 없는 것은 시, 즉 예술과 신앙과 자연뿐이란다.
이상으로 <낙강>을 빛낸 여류시인들(Ⅰ)을 살펴보았다. 이영도, 정표년, 김남환, 박옥금 시인 네 명은 모두 인품이 훌륭하고 개성 있는 시의 경지를 보여주고 있다. 그동안 여류시인들에 대한 관심이 부족하지 않았는가를 돌아보면서 앞으로도 여류시인들을 발자취를 돌아볼 것이다. 특히 세상이 더욱 각박해지고 가까운 사람 사이에도 대화가 단절되는 면이 있는 이 시대에 독자들은 감수성이 풍부한 여류시조를 통해서 내면의 치유와 기쁨을 얻는데도 도움이 될 것이라 본다.
또한 <낙강> 동인들은 철학자 발터 베냐민이 “역사성은 현재를 통해 과거가 역사로서 살아 움직이게 하고, 역사를 통해 현재가 미래로서 살아 움직이도록 하는 것이다.”라고 하였듯이 선배 회원님들의 작품을 통해서 후배들은 <낙강> 오랜 역사에 합류하게 된다. 특히 근년에 입회하신 회원님들께서 관심을 가진다면 가장 오래된 시조 동인인 <낙강>의 푸른 물을 함께 이루어서 끊임없이 흘러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