먹이를 놓치지 않으려는 쿠거는 포악하게 공격하기 시작하고 새끼 곰은 비명을 지르며 저항하였다. 순식간에 새끼 곰의 주둥이와 얼굴은 피투성이가 되었다. 한 번만 더 공격을 받으면 새끼 곰은 꼼짝없이 쿠거의 먹이가 되어 물려 갈 것 같았다.
그러나 이게 웬 일인가?
쿠거는 갑자기 공격을 멈추고 뒤로 물러나 도망치기 시작하였다. 어미 곰이 새끼 곰의 비명소리를 듣고 소리치며 달려 왔던 것이다. 새끼 곰이 쿠거를 두려워하는 것처럼 쿠거는 어미 곰을 두려워하였던 것이다.
새끼 곰은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건져 어미에게로 달려갔다. 어미는 새끼의 상처를 몇 번이나 핥아주었다. 새끼는 완전히 저승사자에게서 풀려나게 되었다.
사람들의 운명도 어쩌면 새끼 곰과 다르지 않을 것 같다고 생각하였다.
어미를 떠나 즐겁게 놀던 현장에서, 아니면 달아나다가 개울에 걸려 있는 나무에서, 아니면 급류 속에 떠내려가다가 닿은 길목에서 죄 없이 쿠거의 밥이 될뻔한 새끼 곰처럼 사람도 언제나 불안하고 위험하고 비참하게 목숨이 끊어지고 말지도 모르는 운명이 아닌가.
정치인이나 경제인이나 학자나 예술가나 빈부귀천에 관계없이 사람은 누구나 어려운 일을 겪게 마련이다. 뜻하지 않은 천재지변이나, 교통사고나, 질병이나, 가정이나 사회의 환경적 요인으로도 어려움을 겪거나, 다른 사람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자신의 잘못이나 실수로도 어려움을 겪는다.
사람은 탐욕이나 과오를 범하여 어려움을 자초하는 수도 많다. 흔히 음식을 탐하여 질병을 얻을 뿐만 아니라 한 걸음 나아가 재물을 탐하기도 하고 함부로 성내기도 하며, 심지어는 남을 속이고 배신하고 도둑질하고 강도짓이나 살인까지 저질러서 파멸하기도 한다.
이러한 여러 가지 어려움을 겪는 인간들은 쿠거에게 쫓기는 어린 새끼 곰이나 별로 다름이 없다. 자신의 그릇된 지식이나 판단이나 탐욕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사나운 쿠거로 자라나 자신을 위협한다.
그런데 동영상에서 새끼 곰을 구해 낸 어미 곰은 어떤 존재일까.
우리가 어려울 때 우리를 도와주고 위기에서 건져 준 은인이나 지도자와도 같은 대단한 존재이겠지만 그 어미 곰은 어떤 불안이나 위험도 완전히 벗어난 존재일까.
새끼 곰에게는 어미라도 있어서 다행이지만 어미에게는 불행히도 자신을 도와 줄 어미도 없는 처지가 아닌가. 그러니 어찌 어려움이 없고 위험이 없을 수 있으랴. 때에 따라서는 어쩌면 새끼 곰보다도 더 어렵고 절박한 처지가 아닐까.
내가 살아 온 자취를 가만히 더듬어 본다. 외부로부터 말미암은 어려움만이 아니라 일찍이 내 스스로 범한 탐진치가 자라나 새끼 곰을 쫓는 쿠거처럼 나를 쫓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나는 새끼 곰의 처지를 지나서 어미 곰의 처지가 되어 더욱 외롭고 어렵고 위험한 벼랑 끝으로 쫓겨 온 것이다.
어미 곰이 누구에게도 의지할 곳 없이 홀로 서지 않으면 안 되는 것처럼 사람도 부모나 형제나 이웃이나 스승에게 의지할 단계를 벗어나 스스로 홀로서지 않으면 안 된다. 누구를 향하여 홀로 서야 하나?
대자연을 향하여, 우주를 향하여, 절대자를 향하여, 절대적 진리 앞에 홀로 서지 않으면 안 된다. 무저갱(無底坑) 안에서 쥐가 갉아먹는 등나무 줄기에 매달린 인간처럼 절망적이고 고립무원한 자신을 발견할 때 인간은 절대자를 찾게 된다.
새끼 곰이 절박하고 처절하고 피맺힌 울부짖음으로 어미를 부르는 것처럼, 인간은 진실하고 간절하고 겸손한 마음으로 절대자를 부르지 않으면 안 된다. 새끼 곰이 어미 곰의 존재를 통하여 존재하는 것처럼 인간은 절대자의 존재를 통하여 존재하며 절대자의 뜻을 따라서만 존재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절대자는 말이 없다.
새끼 곰이 부르기 전에는 새끼 곰에게 달려가지 않는 어미 곰처럼 절대자도 인간에게 달려가지 않는다. 달려가도 인간은 손사래를 치며 거절하는 수가 많다.
인간은 새끼 곰보다도 훨씬 잘난 체하고 오만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잘난 체하고 오만한 인간은 스스로 사나운 쿠거를 불러들인다.
인간이 스스로 불러들인 쿠거는 인간의 목덜미를 물고 늘어진다. 인간은 쿠거를 물리치기 위하여 절대자를 부를 수밖에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