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반도 동해 남부에 위치하고 있는 이 마을은 앞이 확 트여 서생면에서는 수평선을 가장 넓게 볼 수 있고 뒤로는 송림이 우거져 경치가 아름다운 곳이다. 그러나 이 마을 앞에 있는 간절곶 앞 바다는 지형적으로 돌출지역이 되어 해류가 급해 옛날에는 이 해역을 지나는 배들이 많이 침몰되기도 했다. 이 마을은 동은 바다, 북은 진하 그리고 서남쪽으로 나사와 접하고 있다. 일제시대부터 이곳에는 항로를 인도하는 등대가 있었다. 이 때문에 2차대전 때는 미군이 등대를 여러 번 폭격해 주위 주민들이 피해를 입은 지역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 등대는 광복 후 다시 복원돼 지금까지 운영이 되어 왔는데 지금은 다시 새로운 등대를 세우고 있다. 이 지역의 경우 주민들 대부분은 바다에 생업을 두고 있고 일부 농사를 짓기도 한다. 그러나 이 지역 대부분의 논은 천수답이기 때문에 수확량이 많지 않다. 이 때문에 농민들은 논농사보다는 밭농사에 더 매달리고 있는 실정이다. 최근 들어 이곳은 동북아에서 2000년 새해 해가 가장 먼저 뜨는 지역이 되어 전국적인 명승지가 되었고 이에 따라 도로 역시 많이 신설이 되었다. 이 때문에 요즘 들어서는 철도청에서 매주 관광 열차를 운행하고 있어 이곳을 찾는 관광객들이 갈수록 늘어나고 있다. 그러나 이 마을은 지금부터 20여년 전만 해도 겨우 차 한 대가 다닐만한 도로밖에 없었고 그마저도 포장이 되지 않아 차가 다닐 때면 먼지를 많이 내었다. 그리고 이 길로 부산과 울산을 연결하는 버스가 하루에 두 번씩 다녔을 뿐이다. 이 지역은 대송, 평동, 송정 등 3개 마을로 이루어져 있는데 이들 마을에는 횟집 등이 많아 주민들의 소득을 증대시키고 있다. |
|
|
서생면소재지가 있는 신암과 진하해수욕장 사이에 있는 마을로 해돋이로 유명한 간절곶과는 남쪽으로 접하고 있다. 마을 전체가 산으로 둘러싸여 들판이 거의 없기 때문에 마을 사람들은 대부분 서생, 용리, 나사, 대송 등 다른 마을로 나아가 농사를 짓는다. 이 마을이 송정으로 불린 것은 옛날부터 소나무가 많았기 때문이다. 이 마을 중앙으로 31호 국도가 지나고 있는데 지금도 국도 위쪽으로는 아름드리 해송이 병풍처럼 마을을 감싸고 있다. 이 때문에 일제시대 말기에 이 마을에 살았던 사람들은 소나무 송진을 일본에 공출하기 위해 부역에 시달려야 했다. 이 마을은 또 주변에 어항이 개설되기 전에는 간절곶을 항해하던 어선이나 상선들이 계절풍을 만나면 간절곶을 넘기 힘들어 바람이 잘 때까지 정박하여 식수나 식량을 공급받는 피항지 구실을 해왔다. 이 마을 앞 바다는 또 수심이 깊어 방파제나 어항시설이 개발되면 어업전진 기지항으로 발전할 가능성도 있다. 이 마을에 사람이 들어왔던 것은 약 250년 전으로 추정하고 있다. 이때 부엉듬(부엉이가 둥지를 틀고 있었다는 뜻)에 성씨 불명의 학석이네와 잠박굼(현 진하리 1번지)에 역시 성씨 불명의 한 집이 살면서 불씨가 떨어지면 서로 불씨를 얻어다 쓰곤 했다는 얘기가 전해 오고 있다. 학석이네가 살았다는 곳에는 지금도 돌담이 남아 있으며 고동, 조개껍데기 등이 발견되기도 한다. 이 마을은 1914년 이전부터 송정이라는 행정명을 사용해 오고 있으나 오히려 마을 사람들에게는 '잿골'이라는 이름이 더 친근하다. 이 마을이 옛날부터 이렇게 불린 것은 기와를 구웠기 때문이라고 하는데 잿골에서 구워진 기와는 서생첨사 관청을 건립할 때 사용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오고 있다. 당시 기와 가마터는 현 대송리 산 9-7번지 김주배(金珠培) 집터로 추정되고 있다. 약 250년 전 연안(延安) 송씨(宋氏) 할아버지와 지씨(池氏) 할머니가 정착하여 마을이 형성되면서 지금도 연안 송씨 집성촌(14가구)을 이루고 있다. 이외에도 충주 임씨(5가구), 전주 김씨(4가구), 청주 한씨(5가구), 충주 지씨(3가구), 경주 이씨(3가구), 경주 최씨(5가구) 등의 성씨가 살고 있다. 이 마을은 조선조 말엽에 서생면의 행정구역에 속하게 되었고 1910년 대륙(大陸)·송정(松亭)·평동(平洞) 3개 마을이 합하여 대송리로 개편되었다. 이후 1961년 대송(大松)에서 분동되어 송정리가 되면서 초대 이장을 선출하게 되었다. |
|
|
이 마을은 최근 들어 간절곶이 전국 명소가 되면서 마을 이름이 전국적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특히 간절곶의 낭끝바위는 간절곶에서도 가장 돌출 지역으로 이곳에서 해를 보는 것이 가장 빨리 볼 수 있다하여 명소가 되고 있다. 요즘 들어 이 마을에는 전국의 관광객들이 모여들고 있지만 아직 교통사정과 숙박 시설이 제대로 되어 있지 않다. 이 마을의 이전 명칭은 대륙동(大陸洞)이었는데 이는 대운산 줄기가 바다로 뻗고 있어 이의 대(大)자와, 육지의 끝(간절곶)이 튀어나왔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었다. 그러다 대륙동의 대(大)자와 송정동(松亭洞)의 송(松)자를 따서 대송마을이라 부르게 되었다. 이 마을에 처음 자리를 잡은 사람은 공씨(孔氏) 할아버지와 구씨(具氏) 성을 가진 할머니로 알려지고 있다. 이들은 처음에는 바닷가에서 살았는데 어느해 장질부사가 창궐해 사람들이 죽어나가자 지금의 대송리로 자리를 옮겼다고 한다. 이들 부부가 처음으로 자리를 잡았던 곳은 간절곶 북쪽으로 현재 회를 파는 포장마차가 즐비한 곳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곳에 정착한 연대는 500년 전이라고 한다. 또 마을 전설에 따르면 입향조인 공씨 할아버지와 구씨 할머니는 죽어서 마을을 지키는 수호신이 되었는데 사람들은 이들을 '골매기 할배 할매'라고 부르면서 이들을 위해 제당을 지었다고 하는데 이 제당이 현재 간절곶으로 들어가는 입구에 있다. 현재 이 마을에는 이들 입향조의 후손은 없는 상태이다. 대신 지금은 김해 김씨와 학성 이씨, 밀양 박씨 등이 사는데 정월 보름에는 반드시 골매기 할배와 할매에게 제사를 올린다고 한다. 해안에 자리를 잡고 있는 이 마을은 어업을 전문으로 하는 사람들이 많아 어촌계가 구성되어 어민들의 이익에 기여하고 있다. |
|
|
서생면 소재지에서 울산 방향 동쪽으로 3㎞ 지점에 있다. 마을이 해안가에 있기는 하나 뒷산이 동서로 가로막고 있고 마을이 남쪽으로 향해 있어 겨울에는 따뜻하고 여름에는 시원하다. 바다와 면하고 있는 마을이라 여름에는 피서객이 많이 찾아오고 사계절 내내 관광객이 드나든다. 마을 사람들은 주로 어업을 하거나 생선회를 팔아 살아가고 있다. 현재 마을 앞으로는 간절곶과 나사리를 연결하는 해안도로가 공사 중인데 완공될 경우 이 마을을 찾는 사람들이 더 많아질 것으로 보인다. 마을 뒤로는 국도 31호선이 있어 교통이 편리하고 또 주위에 해송이 많아 경치 또한 뛰어나다. 지금으로부터 200년 전 순조 때 충주(忠州) 지씨(池氏) 32세조 4형제가 안착하면서 마을이 형성되었으며 당시 지명은 양산군 외남면에 속했는데 새터라 불렀다고 한다. 그후 1910년경 대송리에 편입되어 울산군 서생면 대송리 평동으로 바꿔 부르게 되었다. 평동이란 들이 넓고 평평하다는 뜻으로 붙여진 명칭이다. 처음에는 충주(忠州) 지씨(池氏), 추계(秋溪) 추씨(秋氏), 밀양(密陽) 박씨(朴氏), 울산(蔚山) 박씨(朴氏), 달성(達城) 서씨(徐氏), 김해(金海) 김씨(金氏), 인동(仁同) 장씨(張氏), 월성(月城) 이씨(李氏) 등 16가구가 살다 2000년 현재 87가구로 늘어났다. 민간신앙으로 2백여 년의 나이를 가진 해송 당산나무에 매년 음력 정월 보름에 동제를 모셔오고 있다. 또 이 마을은 1972년 마을 호안공사를 성공리에 마쳐 서생면에서 최초로 새마을 우수마을로 선정(1973)돼 대통령 표창을 받기도 했다. 이로 인해 다른 지역에서 여러 차례 견학할 정도였다. 1940년 이전까지 이 마을에는 천주교와 기독교의 예배터가 있었다고 하나 그동안 신자가 줄어들어 지금은 예배장소가 경작지로 바뀌었고 예전의 종교적 흔적도 찾아볼 수 없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