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서 나오는 달력에서는 부활절의 표시를 보지 못하였습니다. 미국에서 만든 달력에는 부활절의 표시가 분명히 되어 있는데 말입니다. 그 만큼 부활절에 대한 의식이 한국의 삶에 뿌리내리지 못하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종교간의 문제가 있어 그렇다고도 하겠지만 같은 기독교 절기인 성탄절은 명시되어 있는데 부활절은 명시되어 있지 않다는 것은 그 만큼 상대적으로 부활절의 의식이 얕다고 할 수 있습니다. 성경 상으로 본다면 예수님의 부활의 날자는 확실하지만 탄생의 날자는 분명하지 않습니다. 그런데도 세속의 삶은 예수님의 탄생은 분명하게 의식하더라도 예수님의 부활은 분명하게 의식되지 않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의 말씀은 부활에 대한 의식을 다져보려는 쪽으로 준비하였습니다.
오늘 읽은 고린도전서의 말씀에서 사도 바울은 죽은 자의 부활이라는 일반적인 부활을 말하고 있습니다. 죽은 자의 부활이 있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부활이 있지 않았느냐고 합니다. 그러면서 그리스도의 부활을 논증하는 것으로 자신의 증거와 그것을 받아들이는 믿음을 보이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이 없었다면 자신이 전하는 내용이나 그것을 믿는 믿음이라는 것이 헛것이 아니냐 하는 것입니다.
신약 성경 27권 중 거의 절반에 해당하는 13권이 사도 바울이 직접 썼거나, 아니면 사도 바울의 이름을 빌려서 쓴 것입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예수님의 제자들과는 달라 살아 계신 예수님을 만나 본적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사도 바울은 무슨 근거로 그렇게 많은 글을 남기게 되었을까요?
사도 바울은 비록 살아 계신 예수님을 만나지 못하였지만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것이 사도 바울이 쓴 글의 근거가 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예수님께서 부활하시지 않았다면 자신이 전파하는 것이 헛것이고 그것을 믿는 것도 헛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이런 논법을 받아들여 우리들 자신에게 말한다면 우리 가운데 죽은 자의 부활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이 자리에 참석하여 예배드리는 것이 헛것이 아니냐 하는 것이 됩니다. 예수님의 부활에 근거한 믿음의 공동체로 교회가 이루어지며 지금까지 내려와 우리가 예배드리게 된다는 것입니다. 매 주일 교회라는 곳에 모여 예배를 드린다는 것에는 이미 부활의 믿음이 피어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점은 그냥 제가 이야기하였지만 좀 더듬어 생각하여 할 점이 있습니다. 우리가 부활이라고 하면 예수님이 다시 사신 것을 목격한 것을 우선 생각합니다. 여인들이 예수님의 무덤을 찾아갔다가 거기서 다시 사신 예수님을 만난 것, 그리고 제자들이 모여있는 가운데 예수님이 찾아오셔서 보이신 것 같은 것을 생각합니다. 그런 것에서부터 우리가 어떻게 우리 자신들의 부활을 생각할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목격한 것은 다시 사신 예수님입니다. 다시 사신 예수님을 본 것은 신기한 일이긴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예수님의 부활을 온전히 말하기는 어렵습니다. 다시 사신 것이 신기하지만 예수님이 다시 죽을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목격한 것이 예수님에게 일어난 일이기는 하지만 그것이 단지 예수님의 사건으로밖에 보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부활은 다시 사신 예수님을 목격하면서 그것이 하나님에 의하여 일으켜진 것으로 받아들일 때 믿음으로 안주하게 됩니다. 그래서 오늘 읽은 사도행전의 말씀은 중요합니다. 성령강림 날에 사도들은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죽은 자 가운데서 일으키셨다고 선포합니다. 하나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예수님을 일으키셨기에 예수님은 다시 죽을 수 없고 부활하신 예수님에게 하나님께서 함께 하심을 믿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중요합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죽은 자 가운데서 일으키셨기에 하나님께서 우리도 죽게 되면 다시 일으키시라는 소망을 갖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일반적인 부활을 말하는 근거입니다.
예수님이 다시 사신 것을 목격한 것과 더불어 성령님이 강림하심으로 예수님이 다시 사신 것이 하나님께서 권능으로 일으키신 것이라는 것으로 믿음을 다져감에 따라 예수님이 초대 기독교 공동체의 주와 그리스도로 자리잡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이 다시 사시지 않았다면 예수님은 단지 기억으로만 접할 수 있는 것인데 그렇다면 공동체의 주님으로 이야기될 수 없는 것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주와 그리스도로 고백하며 부활을 소망하는 공동체의 삶이 형성되어 간 것은 그것이 세상의 삶과 어떻게 구별되는지 이야기하여야 할 것입니다. 그런 공동체를 부활의 공동체라고 부른다면 그런 공동체가 보이는 특이한 점은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일반 사람들은 죽음을 향하여 산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 반면에 부활의 공동체에 사는 사람들은 생명을 향하여 산다고 하게 됩니다. 사람들은 산다는 것이 죽음에 종식된다는 것을 늘 의식하며 삽니다. 그러나 부활을 믿는 사람들은 죽음 너머에 있을 부활을 소망하며 산다는 것입니다. 죽음이 끝이 아니라 생명으로 이어진다는 것입니다.
죽음에로 사는 삶과 생명에로 사는 삶은 다릅니다. 죽음에로 사는 삶은 생존의 삶이라고 합니다. 죽음으로 끝나기까지 생존하는 것으로 삶을 말합니다. 그러나 생명에로 사는 삶은 하나님과 어울림으로 이루는 삶을 산다고 하게 됩니다.
여기서 하나님과 어울림이라는 것을 좀 생각할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님과 함께는 구약에서부터 늘 의식하여 온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부활을 보면서 예수님에게 하나님께서 함께 하심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과 함께를 부활의 내용으로 구체적으로 보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믿으며 부활을 소망하는 삶은 하나님과 어울린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생명에로 산다는 것은 바로 하나님과 어울린 삶을 말합니다. 하나님과 어울리기에 죽음을 이기는 삶이라고 하게 됩니다.
세상에서 생존하여 간다는 것은 언젠가는 죽음으로 그 생존이 끝난다는 것을 의식하며 사는 것입니다. 그러나 부활을 믿는 삶은 하나님과 어울리기에 죽음을 이기는 것을 생각하고 죽음 저편을 의식하는 것입니다.
생존하는 삶의 내용과 하나님과 어울리는 삶의 내용은 다릅니다. 생존하는 삶의 내용은 세상에 자리잡는 내용입니다. 세상에서 의미 있다고 여겨지는 내용이 삶의 내용입니다. 세상에 의미 있다고 여겨지는 도덕이나 지혜가 삶의 가치 있는 것으로 부각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과 어울린 삶에는 그런 것이 부각되지 않습니다. 하나님과 어울림을 드러내는 영과 진리가 드러납니다. 도덕이나 지혜는 세상을 사는 삶을 규정하지만 영과 진리는 하나님과 어울림을 드러낸다는 것입니다.
도덕이나 지혜를 강조하는 것은 세상에 뜻 있게 안주하려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도덕이나 지혜는 생존의 내용을 띠는 것이라고 하게 됩니다. 그러나 도덕이나 지혜로 하나님과 어울림을 이야기 할 수 없습니다.
영과 진리를 강조하는 것은 하나님과 어울림으로 보이기 위한 것입니다. 부활을 소망하는 삶의 진정한 뜻이 하나님과 어울리는 것이라면 영과 진리로 살아야 합니다. 영과 진리가 부활의 공동체의 구별된 내용이라는 것입니다.
물론 부활의 공동체도 세상에 있기에 도덕이나 지혜를 간과하여 버릴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목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영과 진리에 전념하면서 도덕이나 지혜를 의식하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어울림을 생각하지 않고 생존의 형태로 부활을 말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습니다. 부활을 존재의 형태로 생각하는 것은 자칫 영혼불멸설로 혼동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아도 기독교에서 영혼불멸설의 의거한 내세관이 남아 그것으로 이야기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영혼불멸설은 하나님과 함께의 내용이 전혀 없습니다. 부활은 사람이 다시 산다는 것보다 하나님께서 살리셨다는 내용이 중심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에 몰두하기 쉽습니다. 우리 자신에 몰두한다는 것은 우리 자신을 드려내는 것이 됩니다. 우리 자신을 드러낸다는 것은 결국은 세상에 자리잡는 것이 됩니다. 세상에 있는 것으로 영향력을 보이려는 것이 된다는 것입니다.
이런 경향에서 하나님과 함께 한다는 것을 묵상하여 보아야 할 것입니다. 자신이 몰두하여 세상에 자리잡는 것을 이루어 가는 것으로 하나님께서 축복하시기에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 것으로 생각한다면 부활의 내용을 상실하는 것입니다.
부활은 소위 말하는 자연 현상이 아닙니다. 창조된 내용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런 부활로 하나님께서 함께 하신다는 것은 창조된 내용에 내리는 축복으로 하나님께서 함께 하신다고 하는 것이 미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부활의 내용에 부합한 하나님과 함께를 생각하려면 영과 진리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예수님으로 하나님과 어울림을 생각하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함께 하는 내용을 예수님에게서 찾는다면 영과 진리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이야기하여야 하기에 예수님을 창조된 인간으로 말할 수 없다고 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로마서 1:4에 부활하심으로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심이 입증되었다고 하였습니다. 그것은 부활하신 예수님과 아울러 예수님을 말하게 될 때 하나님의 아들로 예수님을 말할 수밖에 없고 그런 이야기는 영과 진리로만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이야기하여야 한다고 할 때 예수님을 이야기하는 복음서는 영과 진리로 기술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곧 부활을 소망하는 공동체의 이야기도 영과 진리로 기술하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영과 진리를 떠나 공동체의 결속을 이야기한다는 것은 그것이 세상에 얼마나 영향력이 있는 것으로 보일지 모른다고 하더라도 부활의 공동체의 이야기는 될 수 없습니다.
현실에 많은 형태의 공동체가 있습니다. 그런 공동체는 대부분 생존을 같이 하는 공동체입니다. 생존이 아니라 부활을 소망하는 공동체는 교회라고 불리우는 공동체입니다. 그러니 교회는 부활로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 내용을 담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부활이 없는 예수님의 삶이 온전하지 않듯이 부활의 소망이 없는 인간의 삶은 온전하지 않다고 하겠습니다. 생존만으로 인간의 삶을 기술한다는 것은 언제나 불완전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실존주의자들은 인간의 실존을 부조리한 것으로 말합니다.
생존에서 부활로 의식의 전환이 부조리한 삶에서 영원한 삶으로 살아가게 합니다. 그것은 교회가 부조리한 삶의 문제를 짊어지고 갈 것인가 아니면 영원한 삶의 내용을 지녀가야 할 것인가 하는 것으로도 이야기되게 되는 것입니다. 만약에 교회가 영원한 삶의 내용을 지니지 못한다면 결국 교회는 죽고 마는 것입니다. 교회라는 공동체의 생명력이 생존의 생명력이냐 부활의 생명력이냐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아버지,
저희들에게 부활의 소망을 주어 삶이 이 세상의 생존만이 아니라는 것 의식하게 하여주시니 고맙습니다. 사는 것이 이 세상만 사는 것이라면 저희들의 삶은 별로 보잘 것 없습니다. 저희들에게 주는 작은 물질적인 것들로 저희들의 삶이 결정될 수 없다는 것이 너무나 큰 위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부활의 소망을 안고 아버지와 더불은 그런 영생으로 저희들의 삶이 부각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