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멜번의장터
 
 
 
카페 게시글
.......@북한 소식,영화 스크랩 피난민 13세 탈북 소년의 피를 토하는 절규의 편지!
ANGEL 추천 0 조회 21 07.01.17 18:47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13세 탈북 소년의 피를 토하는 절규의 편지!
글쓴이 : cbkim47 (2006-05-17 21:58:40 ) 읽음 : 839, 추천 : 16
한 우익 사이트 게시판 관리자 님이 올린 탈북 소년의 편지를 읽기 쉽게 철자를 교정하여 다시 올립니다. 회원님 여러분들이 여러 곳에 퍼날라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왜 우리가 좌익을 척결하는 전쟁에 참여하여야 하는지, 김정일을 섬멸시켜야 할 명분이 무엇인지를 알고 싶으시다면, 이 편지를 읽어 주십시오. 너무나 가슴이 아파 통곡하는 마음으로 이 편지를 읽고 또 읽었습니다. 자유세계로 이 소년의 무사한 망명을 기도하며 다시 김정일 정권의 사악성을 고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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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조선 여러분들에게 드립니다.

북조선에서 도망쳐서 여기 지금 중국에서 이글을 씁니다. 저의 고향은 평양입니다, 아버지는 김일성 종합대학에서 정치학부 선생이었고 어머니는 김형직 사범대학에서 외국어학부 선생이었습니다. 누나는 평양음악무용대학에서 기악을 배우는 학생이었습니다. 저의 가족은 평양시 동대원 구역에서 살았습니다.

저는 중학교 1학년에 올라오자마자 인차 아버지, 어머니. 누나와 함께 정치범 관리소에 가게 되었습니다. 평양에 살 때 우리는 행복하게 잘살았습니다. 그런데 아버지가 친구들과 술 마시다가 술에 취해 노동당에 어긋나는 정치적 발언을 하여 반당, 반혁명분자로 지목되어 우리 집 식구들은 함경북도 명천군인가 하는 곳에 있는 정치범관리소에 잡혀가게 되었습니다.

밤에 자는데 갑자기 문을 쾅쾅 두드리며 사람들이 밖에서 소리쳤습니다. 아버지가 나가서 문을 열었는데 밖에서 기다리던 사람들이 4명이 시꺼먼 안경을 끼고 있었는데 아버지 가슴을 세게 때리더니 양쪽에서 팔을 비틀어 뒤로하여 족쇄를 채우고 두 사람은 아버지를 끌고나가고 두 사람은 우리 집을 수색하였습니다. 집안을 전부 망가뜨리고 부엌에 내려가 사발까지 다 깨버리더니 어머니와 누나. 나를 방바닥에 앉으라고 하더니 아버지가 집에서 반혁명적 소리들을 하지 않았는가, 나쁜 사람들과 접촉하지 않았는가. 녹음기로 라디오를 듣지 않았는가, 하면서 여러 가지를 자꾸 물어 보았습니다. 아버지 당증을 찾아서 그것은 자기네들이 건사한다고 하면서 주머니에 넣었고 아버지가 전국지식인대회, 사로청 대회, 그리고 군대 때 대회에 참가하여 찍은 기념사진 4개를 몽땅 벗겨서 보자기에 싸가지고 자기비판을 할 준비를 잘하고 있으라고 하더니 밖에 나오지 못하게 밖으로 열쇠를 채우고 가는 것이었습니다. 우리 어머니는 건강하지 못한데 그때 사람들이 나가자마자 기절하면서 쓰러졌습니다. 누나와 나는 울면서 어머니를 흔들었지만 새벽에 날이 밝아서야 어머니는 깨어나더니 누나와 나를 안고 계속 울었습니다.

아침에 9시가 되어서 까마즈차(러시아제 화물트럭)가 오더니 우리 집 물건을 다 실어가고 어머니와 누나, 나는 갱생차(68년 북한산 지프차)에 타라고 하더니 평양시 보위부에 싣고 가 거기서 이틀 밤을 감방 안에 있으면서 나는 그냥 지냈고 어머니와 누나가 계속 불리어 나가 조사를 받았습니다. 손도장을 여러 번 찍게 하더니 3일째 되는 날 아침에 냉동차(북한에서 자체로 철판으로 제작한 차인데, 적재함에 철 상자를 만들어 씌운 차인데 호송이나 폭약 ,탄약, 등 중요물건 나를 때 이런 차를 쓴다)에 타라고 하였습니다. 그 안에 들어가니 아무것도 없고 군인 4명이 총을 메고 앉아 있다가 우리를 끌어올려 놓았습니다. 그 때 우리가족 뿐 아니라 젊은 남자 3명, 여자 2명도 함께 갔습니다. 그 사람들은 손과 발에 족쇄를 다 채우고 우리가족은 그냥 갔습니다. 쉬지 않고 계속 가다가 어떤 곳에서 밖에 나가 변소(소변)보라고 하면서 우리 가족은 차에서 내리게 하여 길옆에서 볼 일을 보게 하고 족쇄에 묶이운 사람들은 차에 물 넣을 때 쓰는 바게쯔를 올려 보내 거기다 오줌을 누게 하였습니다.

우리 식구를 타라고 하더니 문은 하나만 닫고 하나는 열어놓고 군인 4명과 운전수 ,별을 단사람 2명이 밥 싸온 걸 펼쳐놓고 밥을 먹으면서 <먹고 싶지? 그러게 왜 당을 반대하나? 당을 배반하면 너희들은 짐승보다 못해!>하면서 쌍욕을 하면서 자기들끼리만 밥을 먹더니 별을 단 사람 한명이 나를 보고 <야! 거기 새끼 반동! 이리와!>하더니 <네 애비, 에미 반동이여서 너도 고생하는 거야>하면서 밀빵 두 개와 절군 오이 반찬 한 젖가락 크게 집어서 내손바닥에 주면서 다 먹은 다음 올라가라고 했습니다. 저는 오이만 씹어 먹고 빵은 먹는 것처럼 하면서 춤(침)을 발라 꽉 쥐여 조그맣게 덩어리 두 개를 만들어 쥐고 <잘 먹었습니다.>하고 인사를 하고 차에 올라가자마자 한 덩어리는 엄마 입에 넣고 다른 한 덩어리는 누니 입에 쑤셔 넣었습니다. 어머니는 아무 말도 못하고 내손을 꽉 잡고 빵덩이를 입에 문 채 나를 보면서 눈물을 흘렸습니다. 이렇게 우리는 새벽 2시쯤 해서 관리소에 도착했는데 정문 앞에 사람들이 나와서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이 아이가 들어간 수용소는 함경북도 화성군에 있는 16호 관리소인데 원래는 중요 범죄자들만 취급하던 곳이다. 반당 반혁명분자, 반당 반혁명 종파분자들로써 관모봉기슭에 있던 정치범 관리소를 없애게 되면서 거기에 있던 김창봉 ,허봉학 등도 여기에 있다가 화성관리소로 왔다고 한다. 관모봉 관리소를 없애게 된 근원은 6군단을 해산하면서 9군단사령부를 관모봉기슭에 건설하면서 그 안의 정치범 관리소를 없애게 되었다. 또한 온성군 종성구의 정치범수용소도 그 안에 인민군 담배농장을 건설하면서 인원을 각 정치범 관리소들에 분활 배치했는데 여기 인원 중에서 엄중범죄자들이 화성관리소로 가게 되었다. 6군단 사건을 마무리하면서 체포된 사건 관계자들도 모두 화성으로 옮겨졌는데 당시 그 인원들을 실어 나른 사람이 본인과 혈연관계이다. 이 때 부터 화성의 정치범관리소는 부피가 커지면서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편지 전달자)

그들은 꿱꿱 소리를 치며 우리를 보고 머리를 들지 말고 손을 올려 머리 뒤에 붙이라 하면서 초대소에 들어가더니 족쇄에 묶이운 사람들은 그냥 그길로 차에 싣고 들어가고 우리 가족은 방바닥에 무릎 꿇고 앉으라고 하더니 이것저것 물어보며 책에다 쓰는 것이었습니다. 사람 4명이 오더니 어머니와 누나를 먼저 데려 내가고 우리를 데려온 사람들에게 이젠 다 됐다 돌아가도 된다고 하자 그 사람들은 자기네끼리 말하면서 나갔습니다.

사무실바닥에 혼자 앉아있는데 어떤 보안원이 오더니 나를 데리고 가더니 감방에 가두었습니다. 들어가기 전에 입고 온 옷들을 다 벗기고 거기서 죄수복을 주었는데 너무 커서 마대처럼 너덜거리고 너무 낡아서 다 구멍이 뚫리고 때가 너무 껴서 옷처럼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 안에는 20살부터 10살까지 남자아이들만 30명 있었는데 그런 반이 6개가 있었습니다. 나는 4반이었습니다. 내가 잇는 데는 3구역이라고 했습니다.

새벽에 반장이 기상하고 소리쳐서 다 깨여나 밖에 나가 줄을 섰습니다. 그 때 밖을 보니 양옆이 다 벼랑인데 벼랑에다 동굴을 파고 거기에 기관총을 걸고 군대들이 보초를 섰습니다. 내가 거기 있을 때 벼랑초소를 세여 보니 12개 초소가 3구역을 지키고 있었습니다. 그 날부터 나를 가구 만드는 조에 넣더니 목수 일을 배워주기 시작했습니다.

우리가족은 다 갈라져서 아버지는 1구역, 어머니와 누나는 2구역에 갔는데 1구역 아버지 방은 손과 발에 족쇄를 차고 있어야하는 엄중한 죄수 구역이고 2구역은 허리 굽히고 들어가는 콩크리트 창고인데 계단으로 해서 땅속으로 내려가면서 방들이 있었습니다. 천정은 살창을 치고 그 위에 보초병이 총을 메고 보초를 서고 있었습니다. 2구역은 강제노동을 시키는 곳인데 남자들은 벌목과 제재일을 하고 (통나무를 판자로 만드는 곳) 여자들은 농사일을 하였습니다. 3구역은 나이 많은 사람들과 어린아이, 그리고 1.2구역의 가족들이었는데 죄수들을 치료하는 진료소도 있었습니다. 밥은 하루 두 끼 주었는데 한 끼는 감자 1개와 소금 몇 알을 주고 다른 한 끼는 통 강냉이 삶은 것을 한 줌 주거나 벼 겨, 강냉이 겨를 가루 내여 범벅을 만들어서 한 덩지씩 주기도 했고 통밀을 삶은 것을 한 줌 주기도 했습니다. 나는 일을 잘 하지 못한다고 하면서 반장이 자꾸만 절반씩 빼앗아갔습니다. 그래도 선생님들에게 말하면 안 되었습니다. 감옥 주변에는 풀도 제대로 나지 못하게 약을 쳐서 배가 고파도 풀 뜯을 데가 없었습니다. 어쩌다가 빽빽이 풀과 고마리 풀, 도꼬마리 풀과 강태나무 풀을보면 선생들에게 들키지 않게 뿌리까지 다 뽑아서 먹고 나머지는 씹어서 덩지를 만들어 숨겼다가 밤에 잘 때 몰래 먹었습니다. 3구역 안에 사는 사람들 중에는 산에서 도토리를 잘 줏거나 송이버섯을 잘 따는 사람들은 그래도 산에서 일하면서 칡뿌리, 머루, 다래, 돌배도 먹는데 우리처럼 평양에서 살던 사람들은 아무것도 모르니 관리소 안에서 시키는 일만 했습니다.

작년에 관리소에 들어왔을 때 몇 달 동안은 우리가족이 모두 검토 기간여서 남들보다 고생을 숱하게 했습니다. 일주일에 2번 아니면 3번씩 아버지와 우리가족을 한 자리에 모이게 하고 여러 가지를 물어 보았으며 감시원 선생들이 아버지가 제대로 불지 않는다고 하면서 우리 가족이 보는 앞에서 각자 몽둥이로 아버지를 때렸으며 메고 있는 총에서 소제 대를 뽑아서 때렸습니다. 또 어떤 때는 전동기에 끼우는 피대를 잘라서 만든 채찍으로 때렸습니다. 아버지가 맞을 때마다 어머니는 기절하였습니다. 어머니가 기절하면 선생들은 물 한 바게쯔를 떠다가 나에게 주면서 엄마에게 부으라고 하기에 나는 무서워서 떨면서 엄마의 몸에 물을 부었습니다. 아버지가 그 때마다 소리치면 선생들은 <이 새끼. 아직 정신 덜 들었다>면서 양옆에서 달려들어 아버지의 관절사이에 각자나무를 끼우고 무릎을 밟아댔습니다. 어떨 때는 아버지를 거꾸로 매달아놓고 <여기 자료가 다 있다. 돈 얼마를 받았어? 안기부 요원을 대라. 너희 단체를 대라>하면서 때렸습니다. 너무 맞아서 아버지는 이빨이 남은 것이 없고 입이 터져서 말도 제대로 하지 못하였습니다. 머리를 다 깎아 놓았는데 머리를 너무 맞아서 성한 데가 없었습니다. 온몸이 상처가 가득 했고 제대로 걷지 못하니까 선생들이 양옆에서 끌고 다녔습니다. 선생들도 때리고 조사 나온 양복차림의 사람들도 때렸습니다. 자꾸만 대라고 하면 아버지는 그런 일이 없다고 하면서 선생들에게 대들고 그러면 여러 명이 달려들어 거의 죽게 때렸습니다.

작년겨울 12월입니다. 설날을 며칠 앞두고 우리 가족을 모두 불러내어서 <설전에 네 새끼일 끝내야 한다, 골 아프다, 야 이 새끼야! 시원히 확 불어버리면 너도 편안하구 나도 편안할거 아니냐?>면서 1구역 안에 있는 작업장 창고 앞 돌배나무에 묶어 놓았습니다. 양복 입은 사람이 동복(외투)큰 거 걸치고 나와서 앉아 있고 다른 선생들은 옆에 서 있었는데 양복 입은 사람이 다른 선생에게 가서 각자나무 6개를 가져 오라고 시켰습니다. 그 선생이 한 쪽에 메고 있던 총을 목에다 걸어 가로 메더니 (인민군에서 지어총! 자세를 보고 하는 말) 가서 제재소에서 켜둔 각자나무를 가져왔습니다. 어머니와 누나, 나에게 하나씩 쥐라고하더니 <이제부터 한마디 물어봐서 말 안하면 한 사람이 3대씩 힘껏 때리라>고 하였습니다. 저도 3번이나 9대를 아버지를 때렸습니다. 그래도 아버지는 <나는 그런 걸 모른다. 나는 당에 떳떳하다> 하면서 겨우겨우 말했습니다. 그러니까 선생들은 < 이 새끼 이래서는 안 되겠다> 하면서 어머니와 누나를 발가벗기더니 마당에 광산에서 쓰는 광차가 4개 있었는데 거기에 물을 가득 채워둔 것이 얼어서 곡괭이로 깨더니 그 안에 들어가라고 하였습니다. 어머니와 누나는 울면서 발악하니까 선생들이 얼음 속에다 엄마와 누나를 넣고 나오지 못하게 꼭대기에서 발로 누르고 있었습니다. 그리고는 아버지 앞에 다시 세우고 아버지의 죄를 불게하면 <너희는 집에 갈 수 있다>하면서 시켰습니다. 제대로 말을 하지 않는다고 꽁꽁 언 어머니와 누나의 온 몸을 군관 혁대로 때렸습니다.

또 다른 선생 한 명은 우리 어머니의 두 다리 사이를 벌리게 하고 <이년 까치둥지 멋있다>하면서 엄마의 아래 도리 털을 당기면서 뽑았습니다. 다른 선생은 누나에게 < 야, 너 대학다닐 때 아새끼들과 (청년들) 몇 판 했나?>하고 물으니까 누나가 울면서 <한 번도 그런 일이 없습니다.>하니까 거짓말 한다면서 <벌려라 보자, 검열하겠다.>하면서 맨 땅바닥에 눕게 하더니 다리를 하늘 공중에 벌리라고 하더니 신발신은 채로 누나의 아래 도리를 후벼대며 그리고는 각자 몽둥이로 비비면서 <쌍년. 많이 놀아 봤구만. 그래도 거짓말이야>하더니<거짓말한 대가다, 너 처벌이다> 하더니 가스라이타를 크게 올리더니 <움직이면 밟아 죽인다.>하면서 소리치며 누나의 밑에 불을 달아 놓았습니다. 누나가 악! 소리치며 비트니까 선생들은 와하고 재미있다 하면서 고아댔습니다. 그날 우리 가족은 모두 죽는 줄 알았습니다. 어머니가 기절한 후 정신을 차리지 못하자 그때에야 조사가 끝났습니다.

그 후 10일이 지나서 또 가족이 모여 조사를 받았는데 저녁때까지 하다가 생활 총화 한다면서 (북한에서는 한 주일에 한 번씩 당생활총화, 청년동맹 생활총화. 지맹원총화 등을 한다) 다른 선생들은 다 가고 두 명이 남아서 아버지는 기둥에 묶어놓고 어머니는 나무 가지에다가 밧줄로 두 손을 묶어놓은 다음 나는 어머니와 함께 묶어놓더니 누나를 보면서 <이년은 이안에 온지 1년 돼 오는 데두 아직 고기 좀 붙어있구나. 뭘 도적질해 먹구 고기 안 빠졌나?>하더니 누나에게 <네 년 이상하다. 왜 고기가 안 빠지는지 검열해봐야겠다>하면서 억지로 옷을 벗겼습니다. 아버지가 묶인 곳에 가마니와 갈대로 만든 나래(갈대를 엮어서 두루마리처럼 한 것임)가 있었는데 선생들이 그걸 끌어다가 누나에게 그 위에 누으라고 하더니 한 선생이 <이 간나. 때 호미루 긁을 지경이다. 더러워서 못 보겠다.>하더니 지하족을 벗고 발사개 하나를 주면서 광차 속에 있는 물에 적셔서 밑을 깨끗이 닦으라고 했습니다. (자기는 새 발사개를 품에서 꺼내 갈아 신었다고 함) 누나가 발사개를 적셔서 닦고 또 닦자 시뻘겋게 되었습니다.

누나가 접어드는 두 선생에게 반항하자 누나를 몇 대 때리더니 다른 한 선생은 말아 피우던 독초꽁초를 (북한군은 권연이 없어 잎담배를 신문지로 말아 피움) 누나의 젖꼭지에 비벼대며 죽여 버린다고 하면서 누나를 땅바닥에 쓰러뜨리고 누나의 얼굴 위에 엉덩이를 대고 눌러앉아 두 손을 발로 눌렀습니다, 그래도 누나가 발버둥치자 손과 발을 따로따로 묶었습니다. 발 하나는 아버지가 묶인 기둥에 묶고 다른 발 하나는 어머니의 몸과 나무무지에 묶고 두 손은 기둥과 광차손잡이에 묶어 놓더니 <네 간나 ,오늘 걸레 만들겠다.>하면서 강간했습니다.

그리고는 엄마와 나에게 다른 선생들에게 말하면 너희는 그 시간부터 이 세상에 없을 줄 알라고 욱박질렀습니다. 아버지에게는 이래도 불지 않느냐하면서 이런 독종새끼니까 안기부 밀정한다면서 아버지를 풀어 얼음물에 잠그려고 하였습니다. 그때 순간에 아버지는 최대의 힘을 다하여 한 선생의 옆구리에 매달려있는 총창을 비틀어 잡고 자기 배에 힘껏 찔러 자살했습니다. 군인들은 자동보총에 칼 꽂는 것을 혁대에 매달아서 옆구리에 달고 다닙니다. 칼집채로 박히다보니 아버지 주변에 피가 숱해 흘렀습니다. (북한군 AK자동소총에는 육박전을 위한 총창이 있는데 혁대에 차게끔 되어있다.) 선생들이 급해서 연락해서 의사들이 와서 담가에 싣고 가는데 그 때까지는 아버지가 숨이 붙어 있다가 가는 도중에 사망했습니다. 그때 엄마가 또 기절하면서 신경이 돌아 다음날 정신병자 병동에 들어가 있다가 어느 날 변소 칸에서 인분을 세 사발 되게 먹고 죽었습니다.

(그 사건으로 하여 처녀를 강간했던 군인 두 명은 강직 처벌되어 다른 부대로 갔다고 함. 그 문제로 하여 위에서 검열까지 내려왔으며 관리소 내 군인들 사상투쟁회의도 있었다고 함.)

누나도 잡병이 많이 와서 계속 앓았는데 아버지, 엄마가 죽은 후 머리가 돌아 정신이 들락날락했습니다. 나는 하나 남은 누나를 살려보려고 내게 나오는 음식을 몰래몰래 숨겨 제재소에 심부름 갈 때마다 누나의 호실에 던져 넣었습니다. 매일 저녁 사상개조회의를 했는데 남자들 따로, 여자들 따로 앉히고 공부시키다보니 누나와 나는 마주보며 소리도 내지 못하고 울기만 했습니다. 누나는 점점 약해져서 정말 귀신처럼 되었습니다. 머리도 뜯어 먹힌 것처럼 (마구 헝클어짐) 깎아 놓아서 어떨 때는 누나를 찾기도 힘들었습니다.

평양에 있을 때 우리 누나는 너무 고와서 화보(잡지)에도 나고 청년문학에도 나고 하였습니다. 아파트사람들이 정말 영화배우감이라고 (북한에서는 예쁜 여성들을 영화배우 감으로 비유하여 표현한다) 하면서 성격도 조용하고 말이 적고 예절이 밝아서 대학에서랑 누나를 아는 사람들은 다 칭찬했습니다. 그러나 감옥에 온 후 별의별 고생을 다 당하고 별의별 일을 다 당하면서 누나는 병신이 되고 폐짝(페인, 식물인간)이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8월 달이 되었는데 그때부터는 관리소에서는 먹을 것이 없어 감자밭에서 감자를 캐서 죄수들에게 주었습니다. 감자 캐는 건 여자들이 호미로 감자를 캐놓으면 남자들이 삼태기에 담아 선생이 지키는 곳에 가져다 모아놓으면 소달구지가 와서 실어갔습니다. 점심시간이 되여 선생들이 모여앉아 감자 구워 먹는다고 경비선생까지 불더미에 간 사이 남자 죄수 3명이 누나에게 달려들어 강간하는데 누나가 저 혼자 죽었습니다. 계속 앓는데다가 며칠 동안 먹지 못하고 있다 보니 감자 캐러 나와서 경비선생의 눈을 피해 생감자를 정신없이 먹었는데 그게 탈이 난데다가 남자들이 달려드니 너무 혼이나가 정신발작까지 일으킨 것입니다. 선생들이 달려와서는 뻔히 기색을 알면서도 <도적질해 먹으니까 죄 만나 죽지>하면서 감자 캔 줄기로 덮으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남자죄수 3명은 호송선생들이 데려 갔습니다. 그때 나는 감자 캐는데 없고 산나물 다듬는 조에서 일하다보니 누나가 죽은 줄 몰랐습니다.
계속 안보이기에 선생들에게 누나를 찾아달라고 하면 머리를 때리면서 모른다고만 했습니다. 나와 친한 영수가 알려주어서야 나는 누나가 죽은 줄 알았습니다.

그런 줄도 모르고 있었는데 사람이 없어지면 관리소가 야단칠 텐데 조용하기만 했습니다. 며칠 동안 비가 계속 오니 밖에 내보내지 않고 감방 안에 가둬두기만 하다 보니 소식을 알 수가 없었습니다, 그게 8월 10일 전인데 20일이 다 되여서야 다시 감자 캐기가 시작되면서 나도 감자 캐는데 나갔습니다. 밭에 먼저 들어간 사람들이 밭정리 하면서 누나의 시체를 찾았습니다. 관리소에서는 10일 그때 죽은걸 처리해야겠으나 그 사이 비가 계속 오니까 다시 감자 캐기 할 때 가서 날라다 처리하려 한 것이었는데 우리 담당선생이 그걸 모르고 나를 그만 감자 캐기에 내보낸 것입니다. 나는 울면서 선생들에게 우리 누나 묻어달라고 했지만 선생들은 가마니에 둘둘 말아 죄수들보고 들라하더니 나를 따라오지 못하게 하고 그날 화장터에 갖다가 화장해 버렸습니다. 관리소 안에 화장터가 있는데 한 달에 10명이 넘게 화장했습니다. 누나의 시체를 보니 한 손에는 감자줄기가 썩어있었고 다른 손에는 흙이 있었습니다. 입안에는 감자 썩은 것이 흙과 함께 있었습니다. 그래서 손가락으로 입안의 흙과 썩은 감자를 파내면서 누나를 안고 우는데 선생들이 달려와 나를 때리면서 반장에게 소리쳐 나를 데려가라 하더니 가마니에 말아서 누나를 가져갔습니다. 나는 며칠을 몰래 울며 보냈습니다. 우는 것이 선생들에게 들키면 반혁명분자를 동정한다하면서 사상투쟁무대에 세우기 때문에 우는 것이 들키지 말아야 했습니다.

나와 제일 친한 애가 영수인데 내보다 두 살 더 먹었습니다. 그는 <남자 새끼. 그만한 건 참고 견뎌내라. 그리고 잊어버려라. 어떻게 하나 살아야한다. 통일되면 무슨 일이 오겠지> 하면서 나를 생각했습니다. 영수네는 할아버지가 전쟁 때 악질치안대로 사람들을 많이 죽였는데 월남한 것이 들켜 가족이 모두 중국에 가서 숨어있었는데 3년 만에 잡혀서 여기 온지 4년 되었고 아버지는 그때 인차 죽고 어머니는 2년 전에 죽었다고 합니다. 형과 누나는 소식을 모른다고 했습니다. 누나가 중국에 있다고 하면서 자기네가 중국에 있을 때 못 먹어 본 것이 없다하면서 중국자랑을 많이 했습니다.

9월부터 버섯 뜯는 조를 만들었는데 나도 거기에 뽑히게 되었습니다. 아직 버섯이 나지 않아 먼저 산나물을 뜯기 시작했는데 한 사람이 하루에 두 배낭을 꽈 채워야 했습니다. 영수도 함께 다니게 되었는데 그 애는 자꾸만 도망가자고 했습니다. 무섭기도 하고 길도 모르고 선생들이 총을 들고 지키는데 어떻게 도망치겠는가고 하자 고사리 뜯는 체 하면서 저 산만 넘으면 된다고 했습니다. 자기가 3년 넘게 여기를 다녀서 잘 아는데 어디에 철조망 있고 어디에 구덩이가 있고 어디에 지뢰 묻은 것까지 다 안다고 했습니다. 산나물 뜯으러 8일을 다녔는데 풀이라도 실컷 먹으니 힘이 좀 났습니다.

우리가 도망치기 전날인데 그날 영수는 큰 뱀을 잡았습니다. 대가리만 뜯어버리고 절반을 돌로 끊어버리더니 손가락을 배에 넣고 밸을 쏟아버리고 껍질 채로 우리는 풀뜯는 흉내 내면서 씹어 먹었는데 가죽이 너무 질겨 잘 넘어가지 않았습니다. 나는 할 수 없이 가죽을 버리고 몸뚱이만 꿀꺽꿀꺽 넘겼습니다.

영수는 내일은 꼭 튀자고 했습니다. 다음 날 보슬비가 많이 내렸습니다. 선생들은 비옷을 쓰고 사회 사람들이 물건들을 들고 와 산나물과 바꾸는데 술과 바꾸어서 저희들끼리 몰려서서 마시었습니다. 감시조장들이 사방에서 보고 있지만 우리는 대담하게 봐둔 곳으로 기어나갔습니다. 때 마침 저쪽에서 지키던 감시조장 한 명이 나무 꼭대기 올라가 지키다가 비에 나무가 젖어 미끄러지면서 떨어졌는데 그 바람에 선생들이 우리에게 신경을 쓰지 못하고 거기로 몰려갔습니다. 그 사이 영수와 나는 철조망을 나무 가지로 뻗치고 그 밑으로 넘어가 반대 켠 산꼭대기로 정신없이 뛰었습니다. 영수가 미리 한 말이 몇 사람이 이렇게 도망치면서 아래로 뛰는 바람에 잡혀 총에 맞았다고 하면서 산꼭대기에는 관리소 보초들이 보이기 때문에 거기로 도망갈 생각을 못한다고 하면서 우리는 쪼그만 하기 때문에 잘 보이지도 않고 보슬비가 내리면서 안개가 껴 쌍안경으로도 잘 안보일거라 하면서 등잔 밑이 어둡다면서 거기로 가자고 했습니다. 산꼭대기 거의 올라갔는데 총소리가 여러 번 났습니다. 우리가 없어진 걸 알고 찾기 시작한 것 같았습니다.

영수와 나는 죽을힘을 다하여 뛰고 또 뛰어 산 2개를 넘었습니다. 골짜기에 물이 흘렀는데 영수는 개들이 혹시 냄새 맡을 수 있으니 물속에 숨자면서 물에서 우리 둘은 저녁 어두어 질 때까지 있었습니다. 그런데 군대들이나 개들이 오지 않았습니다. 영수는 저 산만 넘어가면 화성 역전이 보인다고 했습니다. 나는 그때에야 여기가 함경북도 화성군인 걸 알았습니다. 관리소에서 칠보산이 가깝다는 소리는 들었지만 살고 있는 데가 어디인지 모르고 있었습니다. 산에서 마을로 내려오면서 산나물 뜯는 사람들이나 소토지 일하는 사람들(산에 일군 땅에서 부업일 하는 사람들)을 보면 멀리 피해서 마을까지 와서 밤이 된 다음, 영수와 나는 유치원을 습격했습니다. 거기서 속도전 가루 한 중태기와 강냉이 쌀 3키로 되게 훔쳐가지고 나와서 한 집을 또 털어 옷을 갈아입었습니다. 그 집에는 먹을 것이 없고 배를 삶아서 식장 안에 둔 것이 있었는데 우린 영수와 둘이서 다 먹어버렸습니다. 영수는 기차타면 안 된다고 하면서 길로 가지 말고 철길을 따라가자고 했습니다. 세상에 나서 함경북도에는 처음 왔는데 청진까지 오는데 정말 무섭고 힘들었습니다. 걸어서 생기령이라는 곳까지 왔다가 화물방통타고 청진수성에 갔는데 거기서 철이 형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중국에 같이 온 청진내기 아이 18살임)

철이 형은 자기 혼자서 중국에 7번이나 갔다 왔고 중국에 친척이랑 아는 사람이랑 많다고 하면서 자기가 데려다 주겠다고 했습니다. 그 형은 장마당에서 영수와 싸웠는데 영수가 이겼고 또 영수가 먼저 철이 형에게 친구하자고 하는 바람에 우리는 3명이 친구가 되었습니다. 철이 형이 남양교두에서 기다리다가 중국 들어가는 석탄방통에 붙자고 했습니다. 나와 영수는 수영을 할 줄 모르기 때문에 두만강물이 깊은데 빠지면 죽는다고 하면서 정광이(광석 1차 가공 분말가루, 무산광산에서 캔 철광을 가루 내어 청진제철소에서 철 생산하는 원료임) 중국에 많이 들어가는데 이제 정광방통이 남양 역에 들어오면 거기에 동굴을 파고 숨으면 된다고 했습니다. 먼저 온성에 갔다 오자고 했습니다. 돈을 만들자면 장마당 큰 데 가서 한탕 해야 되는데 철이와 영수는 그런 도적질에 펄펄 날았습니다.

온성 주원 장마당 옆, 다리 밑에서 자면서 3일 동안 장마당에서 쓰리(소매치기)한 돈이 3만원이나 되었습니다. 이제 정광방통 들어오면 검사원에게 돈을 주고 우리가 파고들어간 데는 쇠꼬쟁이로 찌르지 않게끔 약속한답니다. 먼저 남양군당학교 뒤산에 올라 중국 쪽을 보았습니다. 아래로 내려가면 결핵병원인지 간염병원인지 있었는데 거기로 사람들이 많이 다녀서 우리는 위험해도 벼랑 끝에다가 나무로 벋치고 그날 밤 거기서 잤는데 영수가 태질하면서 그 기둥을 차는 바람에 아래로 떨어졌습니다. 그 아래에는 철길이 지나가고 군대들의 잠복초소도 있었는데 악! 소리치며 영수가 떨어지자 사방에서 전지 불(후래시)들이 달려오더니 왁작왁작 했습니다. 철이 형은 내입을 틀어막으며 빨리 빠져나가야한다면서 나를 끌고 반대켠 산으로 도망쳤습니다. 나는 울면서 영수를 찾지 못한 채 도망쳐야 했습니다. 깊은 산속에서 나는 영수를 부르고 또 부르며 울었습니다. 억울하게 아버지, 어머니. 누나를 관리소에서 빼앗기고 죽으려고 할 때도 영수가 없었으면 나도 죽었을 것인데 지금까지 영수 때문에 살아남았는데 이제는 내 친형이고 형제인 영수마저 죽었으니 어떻게 합니까?

불쌍한 영수는 이렇게 두만강을 앞에 놓고 죽었습니다. 그 다음날부터 영수가 죽은 주변의 불룩한 웅덩이와 묘지는 다 뒤져보았지만 끝내 영수의 시체를 찾지 못했습니다. 그렇게 4일이 지나서 철이 형과 나는 중국 들어오는 정광방통에 숨어서 10월 5일 날 중국 안도라는 곳에 도착했습니다. 안도에 있는 철이 형 친척은 돈 350원을 주더니 집에 들여놓지 않았습니다. 거기서 버스를 태워줬는데 목단강 나가는 차라고 했습니다. 철이 형과 나는 목단강에 7일 날 도착했다가 다시 버스를 타고 철이 형이 아는 사람의 도움으로 천진에 오게 되었습니다. 북경에서는 위험하기 때문에 천진에서 기차를 타던지 버스를 타라고 그래서 먼데 안쪽으로 들어가라면서 철이 형이 아는 사람이 알려 주었습니다.

조선 사람 식당에서 밥 먹고 나오는데 이렇게 한국에서 온 기자 삼춘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지금도 눈앞에서 아버지, 어머니, 누나, 영수의 모습이 사라지지 않습니다. 저는 지금 이팝에 고기를 배불리 먹고 있습니다. 먹으면서 항상 생각합니다.

“나는 크면 꼭 복수하고야 말겠습니다!”

아직은 내가 어려서 잘 모르지만 중국에 와서 남조선 영화도 많이 보았고 남조선사람도 보았습니다. 기자 삼춘이랑 여기 고마운 사람들을 만나면서 많이 알게 되었습니다. 저는 크면 꼭 죽은 아버지, 어머니, 누나, 영수의 복수를 할 것입니다. 기자 삼춘이 편지를 쓰라고 해서 지금 쓰는 이 편지가 남조선 사람들에게 전달된다고 하니 아버지. 엄마. 누나 생각이 더 나면서 울음 밖에 나오지 않습니다.

저를 도와주십시오. 저와 같은 처지의 북조선 사람들을 도와주십시오. 은혜를 잊지 않고 꼭 갚겠습니다.


--아버지, 어머니, 누나가 학살당하여 고아가 된 탈북자 아이가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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