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나라는 희성(姬姓)의 제후국으로 서주 말엽에 주 선왕(宣王)이 동생 환공(桓公) 우(友)를 정(鄭: 지금의 섬서성 화현華縣 동쪽)에 봉지를 내려 생겨난 중원의 소국이다.
서주가 망하고 환공도 죽자 아들 무공이 동쪽의 괵과 회 지방(지금의 하남성 형양)에 도읍을 정하고 신정(新鄭)이라 하였다.
서주 초기 정나라는 주 동천을 계기로 발흥하여 중원의 중심지인 지정학적인 이점을 살려 교통과 상업이 발달한 까닭에 세력균형을 유지해 나가며 열강들을 주도해 갔다.
2대 무공과 3대 장공시대가 전성기였다.
「국어國語」는 환공이 주 왕실이 쇠퇴할 것을 예견하고 태사太史에게 도피할 마땅한 땅이 있는지 물어 보았는데 태사가 3년 안에 주나라 존망이 판가름날 것이라 예상하고, 동서남북의 각 지역의 정세를 설명하면서 괵과 회 지방이 앞날을 도모하기에 적당한 땅이라 그곳을 취하라고 조언하는 긴 문장으로 되어 있다.
태사는 이미 晉 秦 齊 등 세나라가 향후 중원을 주도해 나갈 것이라 예견하고 있다.
춘추시대 말엽에 자산子産이 개혁정치를 통해 부흥하기도 했으나 군신들의 권력다툼으로 건국 430년만에 韓나라에 멸망당했다.
[개요]
중원의 한가운데 자리한 소국 정(鄭)나라는 춘추 초기 제후 열강들과 세력을 같이하고 국제 질서를 주도한 강국이었다.
주나라에 견융족이 침범하자 정백 우(환공)는 이를 격퇴하다 견융족의 화살을 맞고 장렬히 전사함으로서 소국 정나라가 중원 무대에 처음으로 모습을 나타냈다.
세자 정백 굴둘(무공:2대)도 부친의 뜻을 이어 견융족을 격퇴한 공으로 주 황실의 경사를 겸직하여 몰락한 주 황실을 보필하고 부흥하는 데 많은 노력을 기울였을 뿐 아니라 주평왕을 도와 동천(낙읍)하여 동주를 재건함으로서 소국 정나라의 위세와 세력은 급성장하기 시작했다.
동괵과 회땅을 정복하고 도읍을 회로 옮겨 신정(新鄭)이라 일컬었다.
3대 정장공(오생)도 탁월한 지략과 수완으로 친동생 공숙 단이 친모와 짜고 반역을 일으키자 이를 기다렸다는 듯이 일거에 진압하고, 제족(祭足),고거미 등의 뛰어난 명신들의 보좌를 받으면서 부친의 업적을 계승하여 정나라 최고의 전성기를 구가하였다.
정장공의 업적이 춘추오패보다는 못하지만 소패(小覇)로서의 세력을 떨칠만할 정도로 정나라의 판세는 위력적이었으며 열강을 주도하였다.
장공을 오만하다고 본 주환공이 친히 군사를 이끌고 응징하려다 오히려 어깨에 화살을 맞는 수모를 당한 적 있고, 장공은 황실을 위협하여 인질을 맞교환할 정도였다.
그러나 정장공이 죽고 난 후 4대부터 자식들간에 내쫓고 쫓기면서 임금을 번갈아 바꾸기 시작하여 국세는 약화되기 시작하였고, 골육상쟁으로 조그만 국토는 이리저리 떼이고 뺏기면서 춘추 말 명재상 자산(子産)이 반짝거렸을 뿐 약소국으로 전락하고 말았다.강공(康公)21년 강공(康公) 21년 (기원전 375년) 韓나라에게 병탄당하고 말았다.
[주왕실과의 전쟁]
주 환왕은 본시 정장공을 싫어했다.
선왕 평왕 때 정나라의 위세에 눌려 천자국과 인질을 교환하기로 하여 태자 호가 정나라에 가 있다 부왕 주평왕이 세상을 떠나자 주나라에 돌아 왔으나 부친의 병간호도 한 번 못한 것을 애통해하다가 병이 나서 왕위에 오르지도 못하고 죽었다.
이에 태자 호의 아들 임(林)이 왕위에 올랐는데 그가 주환왕(周桓王)이다.
주환왕은 그 부친이 오랫동안 정나라에 인질로 가서 외로히 살다 왔기 때문에 그 수명을 다 누리지 못한 것이라 믿어 정장공을 미워하고 싫어했다.
정장공은 전에 성주(成周)지방에 군사를 끌고 와 곡식을 베어 가져 간 적이 있는데다 정장공이 천자의 명을 받았다고 속이고 송나라를 쳤다는 소식을 듣고 몹시 분노하여 마침내 환왕 12년 (기원전 708년) 채,위 진(陳)에게 영을 내리고 친히 군사를 이끌고 정나라를 치는데 정장공은 군사를 몰고 와 천자와 맞대결을 하였다.
싸움이 시작되자 무력한 주나라군과 지원국병들이 밀려 싸움은 싱겁게 끝났고 환왕은 정나라 장수 축담이 쏜 화살을 맞고 부상까지 당하고 퇴각했다.
꾀가 많고 교활한 정장공은 소 열두 마리와 염소 한 쌍과 좋은 곡식 100여 수레를 거느리고 주환왕에게로 가 머리를 조아리고 백배사죄하니 주환왕은 부끄럽고 모욕을 당했으나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장공과 골육상쟁]
장공은 정나라 3대군주이다.
정무공 굴둘과 강씨의 장남으로 태어날 때부터 이상하여 그 모친이 장남을 싫어하고 차남을 편애했다.
강씨는 해산할 때 깜박 잠드는 사이 이미 장남이 태어났다고 한다. 그래서 그 아이의 이름을 잠 깰 오, 낳을 생자로 오생(寤生)이라 했다.
강씨는 이 일을 몹씨 불쾌히 생각했다.
그래서 그런지 강씨는 장남보다는 차남 단을 사랑하여 차남이 뒤를 잇기를 열망했다.
그러나 무공은 장남을 세자로 삼고 차남에게는 식읍으로서 조그만 공성(共城)이란 땅을 주고 단을 공숙(共淑)이라 불렀다.
무공이 죽자 장남 오생이 군위를 이어 장공이 되었다.
무공은 부친의 뒤를 이어 주 황실의 경사를 겸직하여 여전히 강국으로서의 면모를 과시했다.
강씨는 차남이 공성이라는 조그만 성에 머무는 것을 늘 불평하였고 군주인 장남에게 경성을 내어 줄 것을 요구했다.
제족 등 신하들이 경성은 수도나 다름없는 경성을 내 주는 것을 극구 반대하였으나 마음이 착한 장공은 동생 단에게 경성 땅을 봉했다.
모친은 차남에게 기회가 닿는대로 군사를 모아 군위를 차지하라고 부추켰다.
차남은 날마다 사냥을 핑계대고 성 밖에 나가서 군사와 병졸을 훈련시켰다.
태숙의 이러한 상황을 모두 보고받은 장공은 아무 말없이 경사의 일을 돌보기 위해 주 왕실로 간다며 떠났다.
이를 들은 모후 강씨는 밀서를 태숙에게 보냈는데, 공자 여(呂)가 중간 길목에서 밀사를 죽이고 이를 빼앗아 장공에게 바쳤다.
장공은 이를 읽어본 후 다시 전처럼 봉하여 강씨의 밀사처럼 가장시켜놓은 심복에게 밀서를 내주며 태숙 에게서 답서를 받아오라 하였다.
태숙의 답서가 돌아왔는데 정성(鄭城)을 공격하겠으니 그때 성루에 백기를 세워 내응하는 장소를 알려달라는 것 이었다.
정장공이 강씨에게 가 주나라 조정일을 돕겠다고 하직하고 정을 떠나 주나로로 가다가 도중에서 방향을 바꿔 언읍으로 군사를 몰았다. 공자 여는 태숙이 있는 경성 근방에서 매복하고 있었다.
태숙은 모후의 밀서를 받은지라 아들 공손활에게 위나라로 가 구원요청하라 명하고 자신은 군사를 거느리고 정성을 향했다.
장사꾼으로 변장한 공자 여의 군사들은 경성으로 잠입하여 불을 지르고 성문을 열어 공자 여를 맞아 쉽게 점령했다.
그리고는 곧 방을 걸어 정장공이 효심있고 형제간에 우애 돈독하다는 것과 태숙의 배은망덕한 사실을 알렸다.
한편 태숙은 정성으로 향한지 이틀이 못 되어 경성이 함락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황망히 군사를 돌려 경성으로 되돌아 왔으나 이미 성안의 민심은 돌아섰고 군사들도 방을 보고는 뿔뿔히 흩어져 버렸다.
태숙은 언읍(焉+)으로 달아났으나 장공이 이미 고 곳에 있다는 것을 알고 공성(共城)으로 갔으나 얼마 안가 함락되고 말았다.
태숙은 「모친이 나의 앞길을 망쳤구나 내 무슨 면목으로 형님을 대하랴」하고는 스스로 칼을 뽑아 목을 찌르고 죽었다.
장공은 태숙의 품속에서 강씨의 밀서와 자기가 가지고 있는 지난날 태숙의 답장을 한데 봉하여 강씨에게 바치라하고 모친을 영 땅에 안치하라 명하였다.
영곡 땅에 영고숙(潁考叔)이라는 관리가 있었는데 위인이 정직하고 효심과 우애 있기로 유명하였다.
그는 정장공이 그 어머니 강씨를 영 땅에다 안치시켰다는 소문을 듣고 탄식했다.
영고숙은 몇 마리의 올빼미를 구하여 장공에게 바쳤다.
장공이 무슨 새냐고 묻자 영고숙은,
「이 새는 올빼미로 어릴 때 어미의 젓을 먹고 일단 장성하면 그 어미를 쪼아 먹기 때문에 세상에선 불효한 새라고 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서슴지 않고 이 새를 잡아먹습니다」
.....
정장공은 아무 말이 없었다.
이 때 재부宰夫가 염소를 찐 요리를 들고 들어와 장공에게 바쳤다. 장공은 그 염소를 떼어 영고숙에게 줬다. 영고숙은 먹지 않고, 먼저 연하고 맛난 살을 골라 종이에 사서 소매 속에 넣었다.
장공이 그 이유를 묻자 영고숙은,
「소신에게 늙은 어머니가 계십니다. 집안이 가난하여 한번도 맛난 고기를 올리지 못했는데 주공께서 이런 맛난 고기를 소신에게 주셨으니 어머니를 생각하니 고기가 어찌 목에 넘어가겠습니까. 그러므로 싸가지고 가서 어머님께 드리려고 합니다.」
마침내 정장공이 탄식하자 영고숙이 시치미 떼고 묻는다.
「그대는 어머니를 지극히 봉양하여 사람의 자식된 도리를 다 하거늘, 과인은 황천이 아니면 다시는 모친을 만나지 않겠 다고 맹세를 했으니 이제와 후회한들 한번 한 맹세를 돌이킬 수 없구려」 이에 영고숙이 지하를 파 물이 나는 곳에 지하실을 만들고 강부인을 먼저 그 곳에 모신 후 장공이 지하실로 내려가 모친과 만나면 황천에서 만나게 되는 것으로 약속을 지킨 셈이라 계책을 아뢰었다.
이리하여 정정공은 모자의 정을 다시 돌이켜 준데 대하여 깊이 느끼고 영고숙에게 벼슬을 주었는데 공자 알閼과 함께 병권을 맏게 되었다.
태숙의 잘못됨을 알고도 모른체 하고 반역하도록 죄를 키우도록 한 정장공이야말로 간웅이었다라는 것을 읊은 시가 있다.
[군위를 두번씩]
정장공은 아들을 열하나 두었다.
장남 자홀(子忽)은 오랫동안 세자의 자리에 있었으나 장공은 내심으로 가장 지혜가 많고 걸출한 둘째인 자돌(子突)에게 자리를 물려주고 싶었다. 대부 제족과 이를 상의하였으나 제족이 불가하다고 진언하자 장공은「자돌은 남의 아래 있을 성미가 아니니 외가인 송나라로 보내라」고 유언하고 세상을 떠났다.
장공은 홀과 돌 외에도 야심이 있는 자미와 자의(子儀)를 두고 있었다.
세자 홀이 뒤를 이으니 그가 정소공(昭公: 4대)이다.
소공은 제족을 송나라에 친선사절로 보냈는데 송장공은 느닷없이 제족을 감금하여 자돌을 군위에 않히도록 위협하였다. 제족은 하는 수 없이 자돌일행을 몰래 귀국시켜 대부들을 위협하여 군위에 오르게 하였다. 소공 자홀은 위(衛)나라로 달아났다.
자돌이 군위에 올라 여공(勵公: 5대)이 되었다.
송장공은 일전에 자돌이 군위에 오를 경우 세 성과 보물 및 곡식을 보낼 것을 요구했고 자돌을 이를 승낙한 바 있었다. 자돌이 왕위에 오르자 송장공은 약속대로 이행할 것을 요구했으나 자돌은 생각이 바뀌어 이를 거절하였다.
그러고는 노나라에 이 일을 원만히 해결해 줄 것을 부탁하였다. 노환공이 송장공을 만났으나 중재가 실패로 돌아가자 정나라는 아예 노나라에 뇌물을 주고 연합하여 송나라에 선전포고를 하였다. 싸움 결과 송나라가 크게 패하여 손실이 더 컸다.
정나라에 원한이 골수에 찬 송장공은 제,채 위,진(陳)나라에 뇌물을 주고 규합하여 정나라를 공격하였다.
정여공이 맛서 싸우려 하자, 제족이 송국은 대국으로 맛설 경우 사직도 보존하기 어렵다는 이유를 들어 싸우지 말고 피할 것을 진언하였다.
이에 송나라 군사는 정나라 성안으로 들어와 무인지경의 도성을 쑥대밭을 만들어 놓고 철수하였다.
피란에서 본국으로 돌아 온 송여공은 황폐가 된 성내를 보고 이게 다 제족의 말을 들어 일어난 일이라 하여 제족을 원망하기 시작했다.
「내 늘 제족에게 구속만 받으니 임금인들 무슨 즐거움이 있으리오」
정여공의 울적한 심사를 눈치 챈 옹규가 제족을 죽이기로 거사를 꾸몄으나 사전에 탄로나 옹규는 목이 달아나고 정여공은 채나라(역읍)로 도망쳤다.
제족은 위나라로 달아났던 소공 자돌을 불러 복위토록 하여 다시 군위에 올랐다.(6대)
그 후 2년 뒤 제족이 제나라와 화친을 도모하기 위해 떠난 틈을 타 평소 소공을 미워한 대부 고거미가 정소공을 시해하고 자미(7대)를 옹립하였다.
제양공은 정나라 내란에 개입하여 자미와 고거미를 참하고 자의(8대)를 군위에 않혔다.
그 후 13년 뒤인 기원전 680년, 그동안 채나라로 도망가 기회를 엿보고 있었던 여공 자돌이 이번에는 제환공의 원조로 부하傅瑕)의 도움을 받아 자의를 죽이고 다시 복위하였다. (9대)
그러나 여공은 자신의 복위를 도운 부하를 처형하였다.
여공은 7년간 재위에 있다 죽고 아들 첩(捷)이 뒤를 이어 10대 문공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