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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세계 신인문학상
단편소설
이젠 니 손을 잡아줄게
김덕호
“이게 무슨 향이지?” 서장수 박사는 환자들에게 침을 놓으면서 코를 벌렁거렸다.
“금년에는 날이 가물어 아카시아 꿀 마이 따겠다.” 치유센터 공사장 작업 인부 한 사람이 말하자,
“날씨도 마이 더운데 시원한 냉수에다 아카시아 꿀 한 그릇 타서 벌컥벌컥 마셨으면 좋겠구마.”
창문 밖에서 다른 작업 인부 한 사람이 대답했다.
“벌써 아카시아 꽃이 그렇게 폈나?” 서 박사가 고개를 돌려 잠시 진료실 뒷쪽 창밖을 내다보니
뒷산에는 아카시아 꽃이 한창 흐드러지게 피어 있었다.
하얀 꽃이 총총 달려 있어 탐스러운 모습이 나무가 마치 함박눈을 뒤집어쓰고 있는 것 같았다.
며칠간 업무가 많아 별보고 출퇴근하느라 꽃이 핀 줄 모르다가,
살랑살랑 부는 바람 덕에 뒤늦게나마 상큼한 향기를 맡을 수 있었다.
눈꽃처럼 아카시아 꽃으로 뒤덮인 인애가 동산 산마루를 바라보노라니
꽃놀이를 즐기는 환자들이 눈에 들어왔다.
아카시아 꽃을 보면 서 박사는 어린 시절 자기에게 격려와 희망의 말을 안겨주었던 곽영주가 생각났다.
오늘따라 그녀가 무척 보고 싶었다.
사춘기 시절에 영주는 누군가 너를 위해 밤낮으로 기도하는 사람이 있다고 말한 적이 있었다.
누군가는 바로 영주였다.
서 박사는 첫 단추를 잘 끼워주었던 영주가 있었기에 지금의 그가 있다는 고마움이 가슴속 깊이 사무쳐왔다.
금년에는 여느 해의 아카시아 꽃이 필 때보다도 더 선명하게 영주의 얼굴이 아롱거렸다.
아카시아 꽃과 꿀단지 그리고 연과 솔가리에 얽힌 어렸을적 추억이 머릿속을 주마등 같이 스쳐갔다.
장수는 누가 볼까봐 주위를 두리번거리면서 안뜰 쪽문을 열고 살금살금 고방 쪽으로 갔다.
콩닥거리는 가슴을 억누르면서 문을 살그머니 열고 꿀단지를 찾았다.
마침 할아버지가 왕진 나가신 틈을 이용해
진료실 책상서랍 깊숙이 들어있는 열쇠를 꺼내기 위해선 적잖이 작전을 짜야했다.
혹시 들키는 날에는 호랑이 할아버지와 그나마 유지되던 소통이 끝장나기 때문이다.
꿀만큼은 할아버지 허락 없이 가져갈 수 없도록 명령이 내려져 있었다.
아버지는 면에서 주최하는 호미씻이 준비위원으로 회의 참석차 가셨고,
어머니는 예천 외갓집에 다니러 가신 틈을 본 것이다.
준비해간 병과 숟갈을 호주머니에서 꺼내 꿀을 담는 동안 대문소리가 나서 간이 콩알 만해졌다.
잠시 구석에 몸을 붙였으나 인기척이 없는 걸 보니 바람이 그랬나보다.
여름방학이 시작될 무렵에는 보리타작에 이어 꿀 뜨는 작업을 거들어야 했다.
벌집을 넣고 회전 틀에 연결된 손잡이를 돌리면 통 내벽에 꿀이 흘러내려 모였다.
손가락으로 찍어먹는 재미에 잔심부름을 자원했었다.
며칠 전, 막 뜬 꿀이라 신선하고 향도 진할 것이기에 친구에게 선물로는 안성맞춤이라고 생각했다.
장수는 빙수골 징검돌에서 물장난을 치면서 기다리고 있던 영주에게 검은색 작은 병 하나를 내밀었다.
“이기 뭐꼬?” 영주가 물었다.
“꿀이다. 니 줄라꼬 어른들 몰래 쪼매 훔쳐 왔다.”
장수는 힘들게 가져온 걸 영주가 알아주기를 은근히 바라며 말했다.
“그라면 되나?” 영주가 걱정스럽게 말했다.
“니한테 도움을 받기만하고 고마운 마음 표시도 못했잖아.”
장수는 밥상보에 돌돌 말아 싸온 노란 옥수수 빵을 함께 내놓았다.
“옥수수 빵에 꿀 찍어 묵어봐라.” 장수는 영주가 배가 고팠는지 맛있게 먹는 걸 보고나서야 기분이 좋았다.
“영주야, 지난 가정실습 때 다친 데는 괜찮나?”
“괜찮타카이. 꿀 참 달다. 이기 아카시아꿀 아이가?”
가정실습 때 장수가 할 일은 못단을 모판에서 논으로 옮기는 작업이었다.
모심기는 손을 많이 필요로 했다. 장수는 세 명의 친구가 도와주어서 후다닥 해치웠다.
모내기가 끝날 무렵에 영주가 논둑길을 따라 걷다가 미끄러져 다리가 피멍으로 범벅이 되었다.
모심기 날은 일꾼들에게 맛있는 밥상을 차리는 날이다.
수고한 대가로 친구들은 용돈과 먹을 것을 푸짐하게 받았다.
장수와 친구들은 닭고기와 전과 떡이 들어있는 대나무 소쿠리를 싸들고 빙수골로 갔다.
오월의 뙤약볕을 피해 나무그늘을 찾았다. 마침 아카시아 꽃이 흐드러지게 피어 늘어진 곳에 돌무더기가 있었다.
그 위에 앉아서 못 다한 이야기꽃을 피우며 평소에 잘 먹어보지 못했던 진찬을 나누었다.
빙수골은 장수면, 배태라고도 부르는 성곡리 주마산 허리에서 이어진 앞산을 따라 작은 도랑을 낀 계곡이다.
얼음처럼 찬물이 난다고 하여 빙수골이라고 부쳐진 이름이다.
일급수가 흐르고 가재나 묵지를 잡던 곳이었다.
지난 봄방학에는 영주가 가재를 잡다가 이곳에서 손가락을 다쳤었다.
“아-야!” 영주가 소녀답지 않게 갑자기 냅다 비명을 질렀다.
장수는 워낙 큰 외마디 비명소리여서 영주에게 무슨 일이 생겼구나,
걱정하면서 소리가 나는 쪽으로 급히 고개를 돌렸으나
굽어진 둑에 가려 상황을 알 수가 없었다.
“빨리 와봐, 장수야!”
영주의 무명지 끝이 가재 집게발에 물려있어 민교가 놀라서 장수를 불러 댄 것이다.
영주가 왼손으로 오른손 손목을 감아쥔 채 오른손을 쳐들고 방방 뛰었다.
손가락 끝에는 피가 철철 흐르고 있었다. 물기가 남아있는데다,
상처가 깊고 살점이 일어나서 무척 아픈 모양이었다.
영주가 가재를 손으로 집어 올리다가 미끄러워 놓치자 다시 시도하다가 큰 집게발에 물렸다는 것이다.
“가재의 어데를 집었는데 그리 물렸노?” 장수는 영주가 걱정이 돼 물린 과정을 물어보았다.
“야! 그게 그리 중요하냐? 피가 나고 아파 죽겠는데. 퍼뜩 가서 소독약 갖고 온나.”
집까지 갔다 오기에는 꽤 먼 거리였다.
셋이서 머뭇거리고 안절부절 하니까 민교가 차분한 어조로 제의했다.
“내가 피나는 손가락 부근을 누르고 있을 테니 니들이 빠른 길을 찾아봐.”
아랫 개울과 집 사이 중간쯤에 교회가 있었다.
의논 끝에 결국 가재에게 손가락이 물린 영주는 목사님댁에서 임시 소독치료를 받았었다.
이처럼 도시에서는 경험 못하는 일들을 두메산골에서 겪으면서 장수와 영주는 가까워지게 된 것이다.
“니는 집안이 좀 핀해졌나?”
이야기판이 아직 벌어지고 있는데 이야깃 주머니인 영주가 옆의 돌로 옮겨 앉으면서 장수에게 대뜸 물었다.
“아이다, 콱 죽어버리고 싶은 심정이다.”
장수는 집안의 갈등과 삼촌 뒷바라지, 엄한 가정 분위기 때문에 숨도 제대로 못 쉴 지경이었다.
장손이라는 위상은 없고 머슴처럼 일만 해야했다.
“고마 칵 죽고 싶다” 장수가 중얼거리자,
“야, 니는 아직도 그 카노? 생명은 니꺼 아이다, 하나님 끼다. 알았제?”
장수의 얼굴 표정이 갑자기 굳어버린 탓인지 화기애애하던 분위기가 돌변했다.
“하나님? 하나님이 있으면 와 이래 두노?”
장수는 신앙에 대한 반항심을 애꿎은 영주에게 퍼부었다.
“하나님은 니가 돌아오기를 기다리신다카이. 니를 엄청 사랑하시고 계실 끼다.”
나지막하지만 확신에 찬 어조로 영주가 말했다.
다른 두 친구들도 교회학교에서 배운 풍월로 같이 거들었다.
마침 산들바람에 아카시아 꽃이 이따금씩 눈송이처럼 밥 소쿠리 위에 떨어지고 있었다.
“내일은 영주가 대구로 가야 되니까 아랫마을로 가서 재미있게 놀자.”
영주와 가장 친한 민교가 초등학교 마당에서 다시 모이기를 제의했다.
장수는 아카시아 꽃을 따서 합류하기로 했다.
셋이서 가위 바위 보로 계단 오르내리기 게임을 하는 동안
장수는 아카시아 꽃으로 반지와 팔찌와 목걸이를 세 개씩 만들었다.
“오늘 수고했는데 선물로 하나씩 줄께.” 장수가 한 개씩 직접 끼워주고 걸어주고 있는데,
“영주꺼가 더 예쁘고 두툼하잖아. 영주랑 뭔 사이라도 되나?”
신중하기만 하던 재희의 이 한마디에 장수는 순간 변명도 못하고 괜히 낯이 뜨거워진 건 어쩔 수가 없었다.
장수와 영주는 서로 고민을 털어놓고 지내는 사이라도 세상 때가 아직 묻지 않았기 때문이다.
지난 봄을 떠올리던 장수가 문득 자기 어머니의 인내가 한계에 왔다는 걸 영주에게 털어놓았다.
“그러니까 니를 위해서 기도한다 아이가?” 영주가 장수에게 말했다.
그 소리를 듣는 순간 장수는 자기를 위해 기도하는 친구를 봐서라도 참고 견뎌보자고 이를 악물었다.
“장수야, 넌 잘 할 끼다. 암 잘 하고말고. 힘 내그라이, 장수야!”
그녀는 티 없이 맑은 눈망울을 장수의 눈에 고정시키고 한참 동안 뚫어지라고 바라보았다.
어린 시절 장수의 삶에 많은 영향을 끼쳤던 영주와는 이렇게 알게되었다.
윗동네 하늘에 연이 날고 있었다. 긴 꼬리를 단 가오리연이었다.
500여 미터 떨어진 거리인데도 작지만 쉽게 눈에 들어왔다.
학교 운동장에서 놀고 있던 친구들 중에 체격이 큰 민교가 소리쳤다.
“야들아! 저기 연 보이나? 장갑 낀 검지로 북쪽하늘을 가리켰다.
“가오리연 아이라? 꼬리 되게 기네. 여자 연이네.”
두툼한 목도리로 입을 막고 있던 재희가 나지막하면서도 재미있게 말했다.
가오리연은 암놈이고 꼬리가 없는 방패연은 수놈으로 간주하는 풍습에서 나온 말이다.
“동글산 부근쯤 되는 걸 보면 장수 짓 아이가?
글마는 지 집에서 일하는 형하고 자주 연을 날리곤 하제. 둘이서 연을 잘 만든다 카던데.”
봉현이가 말했다. 동글산은 장수네 고택 바로 뒤에 있는 산인데 동그랗게 생겼다고 해서 불린 산의 이름이었다.
“장수? 개가 누구로?” 영주가 궁금해서 물었다.
영주는 방학이 되면 할아버지를 간호하러 가족과 함께 대구에서 오는 동갑내기 여학생이었다.
"성탄절 발표회 때 성경 암송하던 머스마 아이가.”
민교의 대답에 영주는 장갑을 낀 손으로 볼을 감싸면서 고개를 끄덕거리는 모습이
마치 무엇인가 골똘히 생각하는 것 같이 보였다. 그리고는,
“아~. 걔가 장수야?” 무언가 궁금했던 일이 해결되었다는 듯이
감쌌던 오른 손을 귀 뒤로 가져가 엄지와 중지를 딱 부딪치면서
앞쪽, 친구들 앞으로 다시 손을 가져가 한참을 들고 있었다.
날은 춥고 장갑을 낀 채여서 그렇지 아마도 ‘딱’ 소리가 컸을 것이다.
자기 집안 어른들로부터 장수에 관한 얘기를 어느 정도 듣고 있는 듯 했다.
“야들아. 장수 한번 놀려주자.” 과묵하던 재희가 말하자 모두 의아해 하면서도 괜찮은 생각이라고 동의했다.
언젠가 장수가 재희에게 약을 올린 적이 있어 적극 앞장을 섰다. 민교가 날짜를 정하자고 했다.
“봉현아, 니가 장수네 집과 가깝고 머스마니까 장수하고 약속날짜 잡으면 된다 아이가?
놀려준다는 얘기는 입 밖에도 내지 말거레이.” 민교가 신신부탁을 했다.
봉현이네 집은 토종닭을 많이 키우고 있었다.
민교네 어머니가 계란 두 판을 사들고 사립문을 열고 나서는데
담장 모서리를 빠른 걸음으로 돌아 들어오고 있는 봉현이와 맞닥뜨릴 뻔 했다.
민교 어머니가 화들짝 놀랐다. 모서리와 문 사이 거리가 짧아 피할 여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미안하이더. 참, 민교한테 내일 오후 연화네집으로 모이라 카이소.”
그는 오리궁둥이 마냥 엉거주춤한 모습으로 냅다 뒤꼍으로 달려갔다.
연화네 집은 창이 달린 큰 다락방이 있어서 동네 사람들은 이층집이라고 불렀다.
생필품을 파는 미니 구멍가게였다.
장수는 신정 때 외갓집에 갔다가 안주머니에 꼬깃꼬깃 넣어둔 용돈 얼마가 있어서
가게에 모인 친구들 앞에서 기를 펼 생각이었다.
봉현과 같이 미리 도착한 장수는 선반에 어떤 물건이 있는지 살펴보았다.
화약총과 구슬이 먼저 눈에 들어왔다. 화약총이라도 총알이 나가는 게 아니고
일정한 순간자극을 주면 녹두알만한 크기의 화약이 탕하는 소리와 함께 터진다.
달리기 출발신호에 사용되는 총처럼 단순기능만 장착한 일종의 장난감 총이다.
누가 더 총소리를 크게 내는지를 내기하는 시합에 사용되곤 했다.
총을 만지작거리고 있는데 민교와 재희가 낯선 여학생 하나를 데리고 왔다.
“니들 앉아 보거라.” 강냉이를 한 소쿠리 들고 연화 어머니가 들어오셨다.
“자는 처음 본데이. 누구로?”
“권오재 어르신 외손녀시더. 대구서 살고 있니더 .”
연화 어머니의 질문이 떨어지기 무섭게 연화와 민교가 동시에 말을 받았다.
“저 이름은 영줍니더, 곽영주. 전에 여기 몇 번 할배가 편찮으셔서 와봤심더. 니, 장수아이가? 만나서 반갑다.”
영주는 크지 않은 눈이지만 반짝거렸고 가지런한 단발머리에 작지만
도톰한 앵두 빛 입술로 차근차근 말하는 모습이 무척 인상적이었다.
"으으…응, 나 장수맞어. 반갑데이." 장수는 영주를 흘깃 쳐다보면서 자신을 어색하게 소개했다.
시골 아이들이 표현력 훈련에 익숙되어있지 않듯이 장수도 그랬다.
어쩌다 눈을 마주칠 때는 장수가 오히려 쑥스러운지 다른 친구들 쪽으로 눈을 피하곤 했다.
도시물을 먹은 영주는 대구 주위에서 경험했던 얘기들을 소녀답게 쏟아놓았다.
걸스카우트 생활과 발레공부 얘기를 할 때는 다들 입을 딱 벌리고 듣고 있었다.
장수 차례가 되었다. 홍수 얘기, 물에 빠져 익사할 뻔한 얘기, 불장난 하다가 화재 낸 얘기,
이사 온 얘기를 두서없이 뜨문뜨문 하다 보니 꽤 시간이 많이 흘렀다.
“여기로 이사 온 후에 겪은 마음고생은 나중에 얘기 할란다.” 장수가 말꼬리를 돌리려하자,
“니 얘기 재미있다. 빠른 시일 내에 들어보제이.” 영주는 장수 쪽으로 다가앉으면서 들고 온 보자기를 풀었다.
“계란이다. 이건 소금이고…ㅊ.” 계란 한 꾸러미와
신문지에 싸인 굵은 소금뭉치를 둘러앉은 중간쯤에 내놓았다.
“소금 쓰임새가 다양한 건 다들 알제?” 영주가 잠시 머뭇거리다가 아랫입술을 지그시 깨물고 말했다.
“되게 중요하고 웃기는 건 남자 아이들 오줌 쌀 때 소금이 필요하다는 거야. 이히히…….”
장수와 봉현이를 번갈아 바라보며 약 올리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순간 침묵이 흘렀다. 민교가 둘의 얼굴을 흘낏 보고는 화제를 급히 돌리려했다.
장수의 얼굴이 붉게 달아오르는 듯 했다. 표정을 속일수가 없는 아이였다.
자신의 비밀을 알고 있는 것 같았다. 불쾌했다.
그렇다고 이 자리에서는 뭐라고 변명 할 수가 없었다.
괜히 긁어 부스럼이 되니까 말이다. 장수는 빨리 이 자리를 모면하는 게 상책이라고 생각했다.
봉현이도 집에 가서 소죽 끓여야 할 시간이었다. 각자 몫을 먹고는
집으로 올라가는 길에 장수가 봉현이에게 물었다.
“영주라는 아 말이다. 니하고 내가 소금 꾸러 간거 아는 모양인데
혹시 니가 누구한테 얘기해서 영주 귀에 들어간 거 아니라?”
“내가 왜 그랬겠노? 나도 창피한데.” 봉현의 표정은 진실해 보였다.
“그러면 걔들이 우리가 이불에 오줌 싸서 소금 꾸러 간걸 우째 알았노?
우릴 놀리려고 작정한 거 같잖아?”장수가 씩씩거리며 말했다.
“그러게. 혹시 니 전에 그 지지바 할배네 집에 소금 꾸러 간적 있제?”
봉현이가 어렴풋하게 몇 년 전 기억을 갖고 물었다.
“맞아. 내가 여기 이사 오자마자 힘이 들어서 밤에 오줌을 가끔 쌌지.
몇 번씩 싸니까 할매가 그 집에 가서 소금 꿔오라고 시켰어.”
장수는 키를 뒤집어쓰고 그 집에 갔다가 아주머니한테 막대기로 몇 대 얻어맞았다.
또 소금을 뿌린 후 바가지 한가득 소금을 주기에 받아온 기억이 난다고 했다.
그는 오늘 일을 마음에 담아두고 언젠가는 되 갚아줄 거라고 다짐을 했다.
며칠 뒤 설날이 되어 가족 친척 일가 세배는 오전 중에 끝내고 재희네 집에 세배 드리러 갔다.
세배가 끝난 뒤 옆방으로 안내되었다. 뒤이어 오빠가 들어오기에 연날리기 예비연습 날짜와 시간을 약속했다.
재희가 갑자기 말을 꺼냈다.
“야, 니 오줌싸개냐? 영주네 집에 소금 꾸러 갔다며?”
장수는 평소 진지하던 친구가 들어내놓고 말한 것도 그렇고,
그것도 여러 명 앞에서 꺼낸 건 분명 지나치다고 생각을 했다.
“누가 그카도?” 장수는 배태로 이사 온 후 실제로 그런 적이 있었으니 아니라고는 말을 못하겠지만
진짜 친구라면 알더라도 비밀을 지켜주는 게 예의라고 생각했다.
재희는 장수의 표정이 심상치 않음을 느끼고 침묵했다.
안되겠다 싶어 이참에 영주네 집으로 가자고 했다.
영주네 집은 차 한 대가 겨우 다니는 길에서 30m쯤 들어가는 골목 끝 집이었다.
급히 들어가는데 영주네 외삼촌과 세배꾼 몇이서 나오고 있었다.
외삼촌이 장수가 왔다고 크게 소리를 치니까 방문이 빠끔히 열리면서
영주 남동생이 좁은 틈새로 확인을 하고는 누나에게 전달한 모양이다.
조금 있더니 영주가 앞치마에 손을 닦으면서 뛰어나왔다.
장수는 영주가 자기를 오줌 싸게로 소문을 냈다고 생각하니
화가 목구멍까지 치밀어 올라왔지만 태연하게 세배드릴 방으로 안내되었다.
“건강하게 오래 사이소. 할배요.” 장수는 영주네 할아버지와 다른 어르신들에게도 세배를 드렸다.
“그래. 과세는 편히 했느냐? 어르신들은 만안하시고?” 선비풍의 덕담이었다.
“세뱃값 받아라.” 장수는 누런 봉투를 두 손으로 받았다.
당시에는 누런 봉투도 귀했고 손가락에 전해온 감각으로 봐서는 기본액수 이상임이 틀림없었다.
많이 주시는 이유는 뭘까 궁금증이 일어나는데 영주가 뒷방으로 불렀다.
민교와 영주 여동생들과 같이 얘기하고 있었다. 영주와 민교의 표정을 살펴봐서는 잘 알 수가 없었다.
“니들 내일 점심 먹고 재희네 집으로 온나.”
영주가 바로 나가려고 하는 장수를 나가지 못하게 막으면서 말을 던졌다.
“와카노? 상 봐오는데 앉아라.”
“나 집에 가서 소죽 줘야 된다.” 장수는 방문을 열고 어르신들에게 인사하고는 종종 걸음으로 빠져 나왔다.
남아있던 민교와 영주는 서로 바라보면서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평소와 달리 장수가 급하게 도망치는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연날리기 대회가 꼭 일주일 남았다. 장수는 대회가 기다려졌다.
정월 초이튿날 오후에 재희네 집으로 다들 모였다. 마지막 점검을 위해서였다.
재희오빠와 마무리 얘기를 하는 동안 재희는 눈치 있게 부엌으로 가더니 재빨리 상을 차려 나왔다.
마지막으로 장수에게 감주를 잔에 채우면서 오빠한테 많이 배웠느냐고 물었다.
살얼음이 떠있는 감주를 마시다가 붕대로 감은 장수의 오른쪽 검지에 일제히 눈이 갔다.
“손가락에 붕대는 왜 맺노?” 먼저 영주가 걱정스러운 듯이 말을 꺼냈다.
장수는 입을 꽉 다문 채 눈을 감고 아무 얘기도 하지 않았다.
얼마전에 놀림을 받은 걸 생각하면 부아가 치밀어 올랐다.
“내 얘기 안들리나?” 영주가 다시 재촉했다. 서로 굳은 표정으로 눈치만 보고 있는 것 같았다.
“아랫줄을 매기위해 공춧 구멍을 뚫다가 실수해서 송곳에 찔렸다, 와 묻노?” 장수가 퉁명스럽게 내 뱉었다.
“억수로 걱정 되서 안 카나?” 영주는 자기의 속마음을 모르고 맞받아치는 장수가 야속하다고 생각했다.
“부아통이 폭발직전이다. 건드리지 마라, 니들. 내 친구 맞나? 이 지지바들아! 친구 흉이나 보고 돌아다니고.
남의 사적인 얘기를 숨겨주기는 커녕 속닥속닥 옮기기나 하고, 간사하게스리.
사나이 자존심은 생각하지도 않고. 이제 니들과 안 논다, 나 오줌 싼 적 있다 와? 니들은 한 번도 안 쌌냐고?”
장수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서 부리나케 그곳을 벗어났다.
개울을 따라 올라오면서 방황하는 자기 모습을 조금이라도 가리기 위해서는
연날리기 대회에 차질이 없도록 각오를 단단히 해야 한다고 다시금 굳게 다짐을 했다.
그런데, 대회 전날 오후부터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대회에 차질이 없었으면 좋겠는데 조바심이 났다.
평소보다 일찍 소여물을 쑤고 닭 모이를 주기위해
뒷마당 창고에서 짚단 세단과 등겨 한 소쿠리를 얹어서 안고
흙 비탈길을 내려오다가 그만 미끄러지고 말았다.
순간, 별이 보였다. 머리가 번쩍하고 전기가 흐르는 것 같았다.
그리고는 기억이 나질 않았다.
“야야, 이제 정신이 좀 드나?” 가족들이 장수 주위를 둘러서서 지켜보고 있었다.
“여기가 어디이껴? 내가 왜 여기 와 있제? 머리가 띵하네.”
창고에 갔다가 내려오는 건 기억나는데 그 다음부터 필름이 끊겼다.
입원실이었다. 왼쪽 다리는 깁스를 하고 있었다.
왼쪽발목 가까운 경골 부위가 금이 갔다고 했다. 내일 대회가 걱정이었다.
꼭 참석해야 되는데 그렇지 못 할까봐 안달이 났다. 죽을 한 숟갈 받아먹었더니 토했다. 뇌진탕이었다.
“내일 대회 참석해야 되는데…….”
혼잣말로 중얼거리는 걸 아버지가 들으시고는 현재의 상황을 자초지종 설명하셨다.
지금 밖에는 대설경보가 발효되어 눈이 많이 내리고 있다는 것과
따라서 내일 대회는 무기 연기 되었다는 학교의 소식을 전해주셨다.
오히려 잘 됐다는 생각이 들어 얘기 도중 잠에 깊이 빠져들었다.
아침 일찍 창밖을 내다보니 눈이 집채만큼 쌓였고 그것도 모자라 계속 내리고 있었다.
일주일을 입원해야 한다는 의사의 말에 걱정이 태산 같았다.
친구가 찾아왔다는 어머니의 목소리에 깜짝 눈을 떠 보니 영주였다. 억지로 다시 눈을 감았다.
아무 말도 없이 고개를 창 쪽으로 돌려버렸다.
“장수야. 내가 잘못했다. 얼마나 아프노? 내가 대신 아프면 안 되겠나?”
영주는 장수의 오른손을 두 손으로 꼭 감아 잡고는 떨리는 목소리로 말을 이어나갔다.
“사실, 며칠 전에 니가 화낸 건 당연했다. 내라도 니 입장이라면 더 했을 기다.
니에 대해 또 다른 면을 생각하지 못했던 나를 용서해 줄래?”
어느새 장수는 손등 위로 따뜻한 물방울이 떨어지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진심인 듯 했다.고개를 영주 쪽으로 반쯤 돌려서 흘끗 쳐다보았다.
눈시울에 맺혀있는 눈물이 전깃불에 반사되어 반짝거리고 있었다.
“친구끼리 그냥 넘어가도 될 걸 그놈의 자존심 때문에 삐쳤지 뭐.
이렇게 눈이 억수로 내리는데 왜 왔노? 난 니가 걱정이다. 개학하는데 대구 못가잖아.”
장수의 말에 영주가 손수건을 꺼내 눈물을 닦아 내고는 고개를 가로 저었다.
“병원 입구에 부모님이 기다리고 계셔. 눈이 와도 가야 된다고 성화셔.
어제 데리러 오셨지 뭐냐. 이렇게 아픈 걸 보고 가서 어떡해?” 영주는 다시 눈물을 글썽거렸다.
대구까지 먼 거리이고 불편한 교통 때문에 자주 오갈 수가 없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시면 그나마 방학에도 못 올지 모른다고 생각하니 가슴이 꽉 메여 왔다.
“장수야, 빨리 나야 돼. 니가 여러 가지로 고민이 많다는 거 알고 있다.
내가 니편에 서 줄 끼다. 편지할께.”
영주는 장수의 양손을 쥐었다가 제자리에 갖다 놓고는 굿바이 손짓을 한 후 문 쪽으로 천천히 걸어갔다.
다시 고개를 돌려 살짝 미소를 띤 표정을 보이고는 사라졌다.
비록 연날리기 대회가 무산이 되어 소원은 풀지 못했지만
무엇보다 마음의 상처를 싸매주고 지쳐있던 심신을 위로해주는
소중한 친구를 얻었다는 것이 장수에게는 최고의 겨울이었다.
장수네는 그해 내내 집안에 바람 잘 날이 없었다. 세모에는 회리바람이 더 세차게 불었다.
장수는 어머니가 모진 시집살이에 아무도 없는 구석방이나
모두가 잠에 빠진 야심한 시각에 혼자서 훌지락거리면서
흘리는 눈물을 몰래 목격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어머니와 외갓집에 가는 게 그나마 모자에게는 유일한 해방이었다.
그렇다고 자주 갈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장수야, 너만 보고 참고 살아왔데이. 그러니 나쁜 생각은 아예 말그레이.”
장수는 어머니의 말씀을 거역할 수가 없었다. 고민 끝에는 또 꾹꾹 참아야 하니까 힘에 겨운 시간들이었다.
다행히 며칠 전 영주 편지에 이번 겨울방학에 온다는 기대감에 힘이 났지만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는지 입맛이 없어 점심을 먹는 둥 마는 둥 할 때가 있었다.
그 날도 여느 때처럼 지게를 지고 뒷산으로 올라갔다. 땔감을 해오기 위해서였다.
땔감으로는 장작거리나 마른가지는 물론 솔잎이 떨어져 말라진 솔가리가 단연 우선이었다.
화력이 활엽수의 낙엽보다 강하기 때문이었다.
급히 오르다 보니 숨이 가빠 넓은 바위에서 잠시 쉬면서 주위를 돌아보았다.
소나무가 밀집해 있는데 그 틈에 참나무 하나가 훤칠한 키를 자랑하고 있었다.
혼자서 외톨이로 서 있는 것이 애처로워 보였다.
긴긴 겨울을 나목으로 견디기가 어려웠는지 옷을 다는 벗지 않고 가지마다 마른 잎 몇 개씩은 달고 있었다.
침엽수의 그늘 아래서 어렵사리 싹을 틔우고 긴 세월동안
생존경쟁을 하면서 성장해온 그 나름대로의 삶의 지혜가 돋보였다.
하늘 가까운 꼭대기 가지에 잎사귀 하나가 홀로 붙은 채 겨울바람에 흔들리는 모습이 꼭 방패연 같았다.
장수는 자기 고민을 연에다 실어 하늘나라로 전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나무들이 겨울 내내 칼바람과 눈보라를 맞으면서 흔들리고 부딪쳐 자신들만의 소리를 낼 수 있다는 것이
침엽수가 갖지 못한 또 다른 힘이라는 것을 느꼈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면서 주마산 둥주리봉 정상까지 올라갔다.
겨울바람은 매웠으나 등에는 땀이 났다. 사방을 휘둘러보면서 외쳤다.
“야~호.” 메아리 없이 소리가 흩어졌다. 입김이 짙게 나왔다.
“서장수, 바보야, 니는 뭐하는 놈이고? 왜 사노?”
독백을 하는 자신이 우스웠지만 가슴이 뚫리는 듯 했다.
이따금씩 이름 모를 새들이 짹짹거리면서 바람 부는 쪽으로 날아가다가도
재빨리 방향을 틀어 흔들리는 가지 사이로 왔다 갔다 하는 모습이 보였다.
장수는 대가족 속에서 서로 부대끼면서 살아가는 게 또 다른 삶의 지혜를 터득하는 것이라면
앞으로 숱하게 만나는 인간관계에 큰 도움이 될 것이라고 긍정적으로 생각하기로 했다.
잠시 복잡한 생각을 하고 있는데 뒤에서 바스락 소리를 내면서 다가오고 있는 건 산토끼였다.
겨울철이라 먹을 것이 부족해서 아니면 답답해서 굴을 나왔는지 도망가지 않고
큰 눈으로 귀를 쫑긋 세웠다 내렸다 하면서 이쪽을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었다.
같은 신세이니 친구하자는 듯이 보였다.
장수는 얼마 전까지는 아버지의 공기산탄총으로 작은 야생동물 사냥에 미쳐있었다.
그것도 스트레스를 총알에 날려 보내려고 배웠다.
하지만 다시는 생물을 죽이지 않기로 마음먹었었다.
사람의 스트레스 해결방법으로 다른 생명을 희생시킬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지게를 두고 온 중턱으로 내려오는 동안 생각을 좀 정리하고 나니 한결 속이 풀렸다.
상쾌한 기분으로 다시금 야호를 외쳤다.
올라가면서 봐 놓았던 위치로 가서 갈퀴로 솔가리를 긁어모았다.
다른 사람들 손이 안탄 곳을 찾아야 그나마 모으기 쉽지,
그렇지 않으면 작업 반경을 넓혀가면서 고생해야 했다.
자주 다니다 보면 직감이 있게 마련이다.
다른 이들이 언제 훑고 지나갔는지 그 흔적을 느낄 수 있었다.
다행히 봐둔 곳은 언덕에서 경사가 지고 움푹 들어가 낮은 곳이어서 솔가리가 수북 쌓여있었다.
행운이었다. 지게에 얹어 쌓는 기술이 필요했다.
지겟작대기와 같은 굵기와 길이로 나뭇가지를 여러 개 잘라서 지겟가지 위에 가로로 가지런히 올려놓았다.
그 위에 최대한 압축시킨 솔가리 뭉치를
작은 직사각 형태로 만들어 옆으로 그리고 위로 차곡차곡 얹어 나갔다.
솔가리 뭉치가 흐트러지지 않도록 솔가지를 꺾어 사이사이에 끼워 넣었다.
지겟작대기는 잠시 쉴 때 지게를 버티어 세울 때 쓰일 뿐 아니라 길이 고르지 않거나 바람이 불거나 지게를 앉힐 때
사람과 짐을 중심을 잡게 해주는 유일한 도구이기에 매우 중요했다.
작대기의 길이와 굵기, 단단하고 끝이 예리한 정도에 따라 무사히 작업을 끝내느냐가 결정된다.
짐을 질 때 등이 배기지 않도록 짚을 엮어서 걸치는 등태도 알맞게 조정했다.
며칠 전 내린 눈이 녹아서 적셔진 솔가리라서 마른 것 보다는 무게가 있어 높이를 조절해야했다.
정신없이 한 짐을 만들었다.
잠시 땀기를 돌리면서 야호를 외쳤다.
등성이를 따라 메아리쳤다.
“서장수가 한 바리 했데이.” 메아리로 울려오는가 싶었는데 언덕 쪽에서 인기척이 났다.
“서장수, 어디 있노?” 고음의 앙칼진 목소리와 허스키목소리가 교대로 들려왔다. 영주와 민교였다.
“장수 여기 있데이.” 위치를 밝히고선 급히 길 쪽으로 가다가 비탈진 언덕위에서 만났다.
반가운 나머지 엉겁결에 니 언제왔니,하기가 무섭게 영주를 껴안았다. 영주 또한 응 어제,라는 외마디 외에 더이상 말할 겨를이 없었다.. 영주도 장수도 흠칫 놀랐다.
잠시 서로 멍하니 바라보았다.
두 사람 눈빛이 나무사이로 비치는 석양빛에 혼재되어 반짝거렸다.
장수가 미안한 표정으로 말을 꺼냈다.
“니들 여기가 어딘데 이까지 온 거냐? 지지바들이 겁도 없이.”
“니네 집에 놀러갔더니만 니 동생이 산에 갈비 하러 갔다고 해서 도와주러 왔제.” 영주가 말했다.
“이렇게 추운데 산속까지 왔냐? 고맙다.할아버지는?"장수가 걱정하는 말에,
"오늘 내일 하셔."영주가 맥없이 대답했다.
" 걱정이구나.”하면서도 장수는 내심 영주를 더 이상 보지못할까봐 조바심이 났다.
그리고는 지겟작대기 끝을 좌측 앞으로 비스듬히 하여 땅을 짚었다.
오른쪽 다리를 굽혀 무릎을 땅에다 대고 발끝으로 힘껏 땅을 차면서 엉덩이를 힘껏 들어올렸다.
한편 왼쪽 무릎은 60°로 굽힌 상태에서 다리에 전체의 무게를 실으며
지겟작대기를 요령 있게 사용하여 거뜬히 일어섰다.
민교는 앞에서 길을 안내하고 영주는 뒤에서 앞으로 쏠리는 무게를 조절하기 위해 지게꼬리를 잡았다.
얼마동안은 괜찮다고 느꼈는데 한참을 내려오다 보니 무거워지기 시작했다.
오솔길에는 박힌 돌부리나 튀어나온 나무뿌리가 군데군데 많았다.
미끄러운 곳도 살펴야 했다. 빙수골과 소미 길로 갈라지는 곳에서 쉬어가야지 하는데
왼쪽발이 오른쪽으로 미끄러지면서 순간적으로 지겟작대기와 오른발에 힘을 힘껏 주었지만 헛일이었다.
살얼음 낀 진흙탕을 피하려고 습기를 머금은 굵은 나무뿌리를 밟은 것이 화근이었다.
왼쪽 길섶으로 넘어진 솔가리 더미는 흐트러졌고 단단히 맨 지게꼬리도 소용없었다.
길섶은 낭떠러지는 아니지만 약간 비탈졌고 고랑이 진.
길 폭이 좁은 곳이었다. 지게를 진채로 한 바퀴 굴렀다.
영주도 순간적으로 몸을 돌려 안 넘어가게 붙잡다가 같이 넘어갔다.
한 바퀴 굴러 쳐 박힌 곳은 길이 깎여 내린 흙과 낙엽이 뒤섞여 쌓여 있었다.
장수의 가슴은 솔가리에 덮여있었고 등은 지게 멜빵에 조여 다리가 공중에 떠 있었다.
영주는 뒤쪽에서 떨어져서 그런지 팔다리 일부를 빼고는 몸 전체가 보이지 않을 정도로 솔가리 더미에 파묻혔다.
간신히 헤치고 나온 영주는 옷과 머리카락에 온통 흙먼지와 솔가리 조각들이 뒤엉켜 있었다.
장수도 이리저리 몸을 움직여서 멜빵에서 팔을 빼고는 급히 영주가 어떤지를 살폈다.
영주가 더미를 헤치고 일어서려고 하지만 어디가 아픈지 몸이 말을 안 듣는 것 같았다.
장수가 급히 다가갔다.
“일어서기가 힘든 걸 보니까 어디 다친 거 아이가?” 장수가 걱정하면서 하는 말에,
“왼쪽 발목이 삐었나봐. 좀 아프네.” 영주가 다시 시도하지만 잘 되질 않았다.
“아픈 다리 뻗어봐라.” 장수는 흐트러진 솔가리 더미를 대충 편편하게 한 다음 다가앉아서 발목을 움직여보게 했다.
안쪽으로 꺾을 때 얼굴을 찡그렸다. 장수가 짧게 자른 나뭇가지를 다친 발목 안팎에 대고 양말을 벗어서 아래위를 동여맸다.
짐을 지고 내려가는 겨울작업이라 발을 보호하기 위해서라도 두 켤레를 신고 온 것이 다행이었다.
아버지한테서 응급 처치하는 방법을 배운 것이 그나마 도움이 되었다.
그리고는 이어서 무릎과 종아리를 손으로 눌러주었다.
“숨 좀 더 돌리고 일어서제이.” 장수가 말하자 영주가 아무 말 없이 장수의 눈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떨리는 눈꺼풀을 의식한 듯 두 손으로 장수의 볼을 감쌌다가 이내 양손을 꼭 쥐었다.
“니는 괜찮나?” 하면서 손을 놓는 순간 오른쪽 손에 피가 묻어있었다.
“이거 어디서 나는 거지?” 영주가 깜짝 놀라면서 하는 말에,
장수는 네 손에서 상처 난 것 아니냐고 물었다.
“난 아니야, 니 얼굴 좀 보자.” 장수의 볼을 살펴보던 중
왼쪽 귀 바로 밑에 뾰족한 꼬챙이에 깊이 긁힌 듯한 상처에서 피가 나오고 있었다.
정면으로 봐서는 잘 보이지 않는 곳이었다.
영주가 손수건을 급히 꺼내 상처부위를 자긋자긋 두드리면서 닦아 나가는 모습이 조금도 서툴지 않게 보였다.
장수는 눈을 감고 가만히 있다가 미소를 머금은 눈으로 영주의 눈빛을 바라보았다.
영주의 가늘고 보드라운 손가락이 장수의 피부에 와 닿을 때는 몸이 움츠려드는 듯한 묘한 느낌이 전해져 왔다.
게다가 손수건에서 풍겨 나오는 아카시아 향에다 조금 전 영주가 볼을 감싸줄 때 느껴졌던 포근함이 포개졌다.
장수는 행복한 이 순간을 가슴에 담아두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영주가 손수건을 뒤집어서 접는 동안 장수의 손은 영주의 머리카락을 만지고 있었다.
머리카락에 붙은 솔가리 조각과 흙먼지를 흔들어서 털어냈다.
바람이 불 때 머릿결에서 나는 머릿내를 두고두고 기억하고 싶었다.
순간 영주는 환한 미소를 지으면서 두 손가락을 입술에 댔다가 뗐다.
해가 지고 있으니 빨리 내려가자고 재촉했다.
장수는 그날 처음 영주가 살갑게 느껴졌다.
구렁에 쳐 박혔던 나뭇지게를 다시금 가다듬었다.
안간힘을 쓰며 일어서려고 애를 쓰자 영주가 말했다.
“장수야, 내가 니 손을 잡아 줄께.” 영주는 장수의 손을 잡고 용을 쓰며
솔가리 짐을 일으켜 세워 주었다.
장수가 삶의 무거운 짐에 억눌려 괴로워 할 때마다
영주는 언제나 손을 내밀어 그를 일으켜 세워 주었듯이 말이다.
서장수 박사는 친하게 어깨동무를 하고 지냈던 여자 친구 곽영주가 있었기에
지금의 그가 있다는 고마운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가슴 속 깊이 영주에 대한 그리움으로 가득 차 있었다.
올해는 아카시아 꽃이 필 때 더 선명하게 어린 시절에 만났던 영주 생각이 났다.
그리고 그가 산에서 나무지게를 지고 넘어 졌을 때,
“장수야, 내가 니 손을 잡아 줄께.”하고 내밀었던 그녀의 가녀린 손이 생각났다.
그리고 자기의 상처받은 마음을 치유해 주고 다독여 주었던
영주의 보드라운 손길과 그녀의 머리카락을 만졌을 때의 미묘한 감정과 향긋한 머릿내를
50여년 세월이 지나간 지금까지도 잊을 수가 없었다.
갑자기 진료실 밖에서 두 사람의 중년 여인들의 목소리가 들려 왔다.
서 박사는 고개를 돌려 귀를 기울였다.
“우리여고 동기생 영주 있지?”
“이영주 말이야?”
“아니, 개 말고, 삼학년 오반에 곽영주 있지?”
“개가 왜?”
“여기 치유센터에 온다카드라,”
“뭔 병인데?”
“간암 말기인데, 대학병원에 있다가 일로 온다카드라.”
“언제?”
“오늘.” 영주는 서 박사가 사춘기 시절에 가정 문제로 방황하고 고뇌하던 시절에
그의 마음을 치유하고 달래주었던 유일한 이성 친구가 아니었던가?
그런데 50년 세월이 지난 지금, 말기 암을 치유하기 위해 자기를 찾아온다는 것이다.
이번에는 그가, 50년 전에 진, 마음의 빚을 갚아야 할 차례가 된 것이다.
지금 누군가 널 위해 기도하는 사람이 있다면, 고백할 사람이 바로 자기라는 걸 진하게 느꼈다.
침상에 누워 뜸과 온열치료를 받고 있던 환자들의 대화가 서 박사의 가슴을 찡하게 만들었다.
말기 암으로 자연치유 요양 차 입원중인 제일 언니쯤 되는 392호실 환자가 말했다.
“내년에 아카시아 꽃이 필 때까지 우리 악착같이 살아남자.” 순간 서 박사는 고개를 돌렸다.
그 환자에게 두 손가락으로 'V'자를 힘있게 만들어 보였다.
“언니, 저도 여기 소개받고 치유센터에 와서 완화치료 프로그램에 적응하고 나니까 마음이 많이 편해졌어요.
언니도 꼭 살아남아 우리 내년에 여기서 잔치해.” 프로그램에 열심인 막내가 같이 거들었다.
갑자기 “끽!”하는 승용차의 브레이크 소리에 서 박사는 생각을 멈췄다.
창밖을 내다보니 치유센터 현관 앞에서 검정색 승용차가 멈춰 섰다.
그리고 승용차 뒷좌석의 문이 열리며 어떤 여인이 혼자서 내렸다.
옷차림이 깔끔하고 세련되어 보였다.
그 여인이 50년 전, 사춘기 시절에 만났던 바로 그 영주가 아닐까?
서 박사는 혼자서 중얼거렸다.
“영주야, 내 손을 꼭 잡아봐, 이젠 내가 니 손을 잡아 줄게."
그렇게 보아주시니 고맙습니다. 솔개님 ~~~ 자주 오셔서 좋은 말씀 남겨 주세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