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홉번째 이야기 – 찬드라굽타와 차나키야
(이 이야기는 The Story of India for Children에서 번역된 것입니다.)
서북 인디아의 탁실라는 무역과 교육으로 잘 알려진 큰 도시였다. 널리 그리고 멀리서 온 재능있는 젊은이들이 그들의 교육을 끝마치기 위해 거기로 갔다. 이곳에서 구루들과 선생들이 종교, 철학, 수학, 의약과 천문학을 가르쳤다. 기원전 4세기에 탁실라에서 가장 학식있는 학자였던 파니니는 산스크리트의 문법을 썼다.
알렉산더는 인도를 떠나면서 정복한 지역을 돌보도록 그리스 총독을 임명했다. 알렉산더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총독들 역시 떠났다. 서북 인도에 무질서와 혼란이 있었다.
모험을 좋아하는 한 젊은이가 아주 가까이 그 사건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의 이름은 찬드라굽타 마우리야였다. 그도 역시 알렉산더와 같이 정복자가 되기를 꿈꾸었다. 그는 시기가 그의 꿈을 실현하도록 무르익었다고 생각했다. 마가다(Magadha-남 비하르)는 북인도에서 강력한 국가였다. 다나 난다(Dhana Nanda)가 왕으로서 그곳을 통치했다. 모리야(Moriya) 부족에 속했던 찬드라굽타는 한때 다나 난다 왕의 군대에서 장군이었다. 약간의 이유 때문에 왕이 그에게 화를 내었고 그는 왕국에서 추방되었다. 그는 그의 때를 기다리며 펀잡에서 유랑했다. 곧 그는 차나키야(Chanakya)로 알려져 있으며 카우틸리야(Kautilya) 라는 이름을 가진 영리한 한 브라민(힌두 사제)을 만났다. 그때 카우틸리야 역시 다나난다의 궁전에 있었다. 왕이 그를 모욕했기 때문에 마가다를 떠나서 왕에게 복수할 것을 맹세했다. 두 사람은 친구가 되었고 함께 복수할 음모를 꾸몆다. 카루틸리야는 어떻게 강한 왕이 될 수 있는지를 찬드라굽타에게 가르쳤다.
찬드라굽타는 군대를 모집하기 시작했다. 그는 첫 번째 그리스 총독에 의해 황폐화된 지도자가 없는 서북 지방을 공격했다. 그의 지배아래 큰 지역이 돌어왔으므로 그는 마가다를 향해 진군했다. 마가다는 광대하고 강력한 왕국이었으므로 당장에 그 모두를 공략하는 것은 쉽지 않았다. 일설에 의하면 접시의 중앙에서부터 음식을 먹기 시작하는 아들을 꾸짖는 어머니를 찬드라굽타가 보았다고 한다. “거기는 너무 뜨거워” 어머니가 주의를 주었다. “ 입을 델 테니까 음식이 식어가는 접시의 가장자리부터 먹어라.” “바로 그거야” 아이디어가 그의 뇌리에서 섬광처럼 번뜩일 때 찬드라굽타는 말했다. “지금 나는 어떻게 마가다를 물리칠 수 있을지를 알았다. 우선 왕국의 변방부터 공격하고 점차 수도 파탈리푸트라(Pataliputra)를 향해 천천히 이동할 것이다.” 그의 계획은 효과를 보았고 작은 군대로 그는 큰 마가다 왕국을 점령했다.
기원전 321년에 그는 마가다의 왕이 되었다. 곧 그는 북인도 전체를 그의 지배아래 견고히 두었다.
그때 알렉산더 대제의 장군 중 하나였던 셀류코스(Seleukos)가 알렉산더가 정복했던 대부분의 왕국들의 지배자가 되었다. 그는 심지어 펀잡조차도 그의 영역으로 포함하기를 원했다. 찬드라굽타는 전투에서 만나서 그를 물리쳤다. 찬드라굽타는 아프가니스탄의 넓은 부분들뿐만 아니라 또한 결혼할 수 있도록 그의 딸을 줄 것을 강요했다. 후에 그들 사이에 평화가 있었고 셀류코스는 파탈리푸트라에 사신을 보냈다. 그의 이름은 마가스떼네스(Magasthenes)였다. 그는 인도에 머무는 동안 보았던 모든 것을 기술하려고 인디카(Indika)라는 책을 썼다. 카우틸리야 역시 아르따샤스트(Arthashastra)라라는 제목의 책을 썼다. 이 두 책들로부터 우리는 찬드라굽타 마우리야 시절에 대한 많은 정보들을 알게 된다.
찬드라굽타 왕조는 여러 번의 정복으로 크게 성장했고 큰 왕조가 되었다. 찬드라굽타는 영리한 신하 카우틸리야의 도움으로 그 땅을 잘 다스렸다. 그는 무장된 여인들의 집단에 호위를 받는 큰 궁전에서 살았다. 파탈리푸트라(현재 파트나)는 많은 아름다운 공원들과 연못들, 그리고 2,3층 높이의 집들을 가진 큰 도시였다. 그 도시는 500개 이상의 망대가 세워진 큰 성벽으로 둘러 싸여져 있었다. 많은 외국인들이 파탈리푸트라에 살았고 왕은 그들의 용무를 돌보도록 분리된 부서를 설치했다. 왕은 사람들의 복지를 위해 많은 사업들을 시작했다. 댐들과 운하들이 건조한 지역으로 물을 가져오기 위해 건축되었다.
병자들을 위한 병원들이 있었다. 도로는 중요한 도시들을 연결하기 위해 건설되었다. 푸루쉬푸라(페샤와르)와 파탈리푸트라를 연결하는 넓은 도로가 있었다. 그 도로의 길이는 1,900Km 이상의 거리였다. 도로 양편에는 그늘이 많은 나무들이 있었고 일정한 거리마다 숙소들이 있었다. 몇몇 고대 자이나 교 책들은 찬드라굽타가 자이나 교도가 된 그의 통치 말년에 대해 말해준다. 그는 왕좌를 아들에게 넘겨주고 몇몇 자인 수도승들을 대동하여 남인도에 있는 스라바나(Sravana) 벨라골라(Belagola -카르나타카 주, 핫산에 소재-)로 갔다. 거기서 그는 평화롭게 죽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