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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준권 판화전 – 칼의 노래, 판의 노래, 삶의 노래
2022.6.21.~8.14 김해문화의전당 윤슬미술관
-김종기 (부산민주공원 관장, 훔볼트대학교 철학박사 미학/사회철학)
김준권의 현실주의 정신
약 10여 년 전 부산의 어느 시민운동단체에서 여러 회에 걸친 미학 강좌를 마치고 오랜 기간 교육운동을 해 온 선배 선생님으로부터 김준권(1956-) 작가의 작품 <명암리의 겨울 (49/50)>(1996)을 선물로 받았다. 김준권의 작품을 소장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2014년 750 한정판으로 출판된 畵刻人 김준권 나무에 새긴 30년(이하 30년)을 구입하는 소중한 기회를 얻었다. 올해 김해의 윤슬미술관에서 그의 작품을 대규모로 다시 만났다. 이제 그에 대해서 나름대로 어떤 정리를 해 두어야겠다는 욕구를 느낀다. 사실 김윤수, 윤범모, 이태호, 원동석, 유홍준, 윤진섭, 라원식 등 존경받는 원로 비평가들, 김진수 화백, 김시천 시인뿐 아니라 역량 있는 중견 연구자이자 예술경영자 손경년, 김준기까지 김준권에 대한 다양한 관점에서의 비평은 이미 30년과 다른 여러 지면에 발표되어 있다. 따라서 이 글은 지금까지 나온 김준권에 대한 기존의 훌륭한 비평들에 어떤 내용을 덧붙인다기보다, 필자 스스로 김준권 작업의 성과를 정리해보고 김준권의 작업에서 포착할 수 있는 ‘네오’ 민중미술의 한 가닥을 가늠해보고자 하는 개인적 욕구에 기인한 것이다.
김준권의 수묵목판화는 1969년 오윤이 중심이 된 젊은 작가들이 ‘현실동인’ 선언에서 주창한 현실주의의 맥을 잇고 있다. 고티에(Théophile Gautier, 1811-1872)가 채택한 슬로건, ‘예술을 위한 예술’(l’art pour l’art) 또는 ‘예술지상주의’는 당시 부르주아 시민 문화가 과거의 지배 문화에서 벗어나 독자적 심미 세계를 심화하고자 염원한 데에서 기인한다. 당시 왕립 아카데미나 관전(官展)의 심미관은 예술을 도덕적 고양이나 정치적 교화 등등의 ‘유용성’에 종속시키는 것이었다. 이에 대해 고티에는 자신의 소설 모팽양 서문에서 다음과 같은 도발적인 주장을 한다. “진정으로 아름다운 것들은 아무 데에도 쓸모가 없는 것들뿐이다. 유용한 것들은 모두 추하다. 왜냐하면 그것은 무엇인가 필요의 표현이기 때문이며 게다가 인간의 필요라는 것은 그 가련한 본능과 마찬가지로 역겹고 혐오스럽기 때문이다. 한 채의 집안에서 가장 유용한 장소는 화장실이 아닌가?” 이를 통해 고티에는 예술을 일체의 유용성으로부터 분리시키고자 하였던 것이며, 그러한 점에서 ‘예술을 위한 예술’을 주장하는 이들의 심미관은 예술을 과거 지배계급의 손에서 시민들의 품으로 돌려놓는 진보적 역할을 수행할 수 있었다. 이러한 관점은 유용성, 또는 정치적 교화 등등의 예술 이외의 목적에 예술을 종속시키는 주류 화단, 또는 과거 지배계급(과 또한 그 지위를 넘겨받은 상층 부르주아지)의 미의식에 대한 도전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미를 실용성으로부터 단절시키며, ‘정치적’ 교화, ‘도덕적’ 함양 등의 예술 외적의 목적으로부터 예술을 해방하는 것, 이것은 그 자체로 기성의 제도에 도전하는 진보적인 측면을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것이 바로 칸트 이래로 ‘예술의 자율성’으로 추구되었던 예술의 자유였으며, 하버마스의 말처럼 ‘과학의 객관성’ 및 ‘도덕과 법의 보편성’과 함께 그 자체로서 근대성(Modernität)의 한 축이었다. 이러한 점에서 자연주의, 사실주의, 인상주의 등 19세기 후반 유럽의 현대미술(modern art)은 왕립 아카데미나 관전에 도전하면서 예술의 자율성을 확보하고자 했던 것이다. 추후 모더니즘 미술의 흐름이 형식주의 모더니즘과 역사적 아방가르드로 나뉘어 진행되고, 나아가 형식주의 모더니즘 미술이 ‘삶과 예술의 분리’로 고착되었다 하더라도 ‘예술의 자율성’이라는 테제가 당시의 역사적 상황에서 제도에 대한 비판과 저항성을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는 없다.
그러나 일제 강점기에 조선에 이식된 ‘예술의 자율성’은 그러한 저항성을 상실한 채, 변용된 관조주의 형식미학이었다. 「선전」[朝鮮美術展覽會, 1922-1944]의 규정 가운데 가장 핵심적인 것은 치안・풍교를 해치는 작품을 출품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이때 치안(治安)이란 일제의 식민통치를 위한 치안이며, 풍교(風敎)란 일제가 강요하는 풍습이며 공중도덕이다. 따라서 선전의 작가들은 일제의 식민통치에 순응하거나 그 통치를 묵인 방조하는, 그리하여 식민지 민중의 일상의식과 분리되는 심미적 기능과 사고를 내재화시켰다고 할 수 있다. 「선전」에 나타나는 동양화 양식은 형식상으로는 르네상스 이후 서양의 투시원근법을 수용하여, 전통적 삼원법(고원법, 심원법, 평원법)과 역원근법에 바탕을 둔 다원적 시점, 유연한 자연의 생성감, 풍부한 상상과 여백의 상징을 제거하면서 일원적 시점으로 협소화되며, 내용적으로는 현실과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는 정태주의 미학으로 정착된다. 이러한 입장이 선전 미술에 나타난 ‘향토적 서정주의’로 미화된 세계이다. 선전의 미술에서 자주 보이는 향토적 소재는 민족 미의식의 단서라기보다 식민통치라는 정치적 토대에서 미술의 순수 기능을 주창하면서 현실을 외면하는 관조주의 미학에 바탕을 둔 것이었다.
나아가 해방 이후의 「국전」[대한민국미술전람회, 1949-1981]은 선전의 제도를 관리직제의 명칭만 바꾸어 답습하였다. 무엇보다 남북분단, 한국전쟁, 이데올로기 대립이라는 시대적 상황은 제도권 미술 「국전」에서 역사의식이 실종되고 관료적 권위의식이 팽배하게 되는 바탕이 되었다. 이러한 한국 현대미술사의 상황에서 해방 후 50년대 말 60년대 초의 추상미술운동은 기성의 국전 제도권 미술에 도전하였다. 전후 세대의 작가들은 서구의 앵포르멜 미술을 적극적으로 수용하면서 이 운동을 주도하였다. 이들은 전후 서구의 현대미술에 민감하게 반응하면서 선배들의 낡은 감수성과 예술관, 낙후된 제도나 가치를 모두 부정하면서 국전을 중심으로 한 기성세력과 질서에 타격을 가한다. 이 싸움에서 일차 승리를 거두면서 이들은 현대주의자로서 서구 화단의 미술 조류에 적극적으로 가담하기 시작했으며 국내 화단은 이들의 활약을 통해 점차 새로운 질서로 재편되어 간다. 이는 우리 미술이 서구 미술로 편입되는 과정이었고 국내적으로는 그것에 대응하는 질서의 재편성 과정이었다. 그리고 이후 20여 년간은 이 과정의 연속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추상미술은 삶과 예술을 통합하고자 했던 ‘역사적 아방가르드’ 미술과 달리 서양의 형식주의 모더니즘이 안고 있었던 ‘삶과 예술의 분리’(예술의 자율성)라는 틀에서 제기되는 비사회성과 반대중성을 이어받아 우리의 역사적 현실과 그 속의 고통, 이상을 예술 속에 담고자 하지 않았다. 그리고 70년대에 들어서는 미니멀 아트, 모노크롬 회화가 성행하는데, 모더니즘 평론가들은 이들 회화의 이념을 한국 고유의 근원적 정신(자연주의 사상)의 발로라고 주장한다. 예컨대 이일과 서성록은 우리나라 미술의 미니멀 아트적 경향이 구미(歐美) 현대미술의 맥락 속에서 포착되는 것이 아니라, 한국 고유의 근원적 정신의 발로라고 주장한다. 말하자면 70년대 단색화는 서구 모더니즘의 한 유형에서 나온 그림이라기보다 동양의 유서 깊은 의식 체계 위에서 기능한 것이며 자연으로의 회귀, 자연과의 동화에서 태어났고, 나아가 서양의 미니멀리즘과 가시적 결과물은 유사하지만 그 발상과 경로는 사뭇 다르다고 주장한다.
그럼에도 현대 한국미술사에서 70년대 모노크롬 회화는 미적 자율성의 추구, 순수화의 의지, 평면성의 확대라는 지점에서 서구 형식주의 모더니즘과 일정 부분 상응한다. 이렇듯 한국 미술계는 60년대 70년대를 거치면서 모더니즘의 회화기법과 방법론, 나아가 이념까지 아우르면서도 다양한 실험을 통해 미술계를 장악하였다. 그렇지만 다른 측면에서, 단색평면은 작가가 사회적으로 무엇을 표현하거나 발언하려는 의지를 억압하고 은폐하는 기제로도 작용하였다. 따라서 한국 모노크롬 회화가 이룬 국제적 성취 및 그 동양적 사유의 깊이에 대한 국제적 평가와는 다른 한편에서 70년대의 제도권 미술은 사회의 각 방면에서 일어난 반독재 민주화 투쟁과 무관하게 현실을 외면하고 있었거나 현실에 무관심했다.
김준권이 대학에 들어간 시기는 1975년 유신 시대였다. 당시 청년 김준권은 모더니즘 단색화를 하던 미술가들이 대학에서 교편을 잡고 있던 상황에서 나타난 예술의 독립성, 예술지상주의 같은 탈사회적 지향성에 의문을 가지면서 대학 생활을 했다. 70년대 말에 한국의 근현대사에 대한 관심을 가지면서 단색화가 주류인 화단에서 형상(形像)에 대한 관심을 키워나갔다. 그래서 선배들과 <시각의 메시지>라는 그룹을 만들어 활동한다. 그렇지만 이 그룹이 지향했던 극사실적 형상이 또한 ‘객관성’이라는 입장에서 탈가치성 또는 가치중립성에 머물러 있는 것에 반발하여 결별한다. 이 젊은 시기 김준권의 <자화상>(1977), <친구>(1980)와 같은 유화 작품은 마치 뭉크의 초기작 가운데에서 표현주의로 넘어가는 자화상을 연상하게 하면서도 그보다 더 강렬한 저항성이 엿보인다.
이후 김준권은 <상(像)-오월광주> 유화 연작을 다수 제작하였다. 그런데 이 작품들은 그의 말을 빌어 표현하면, “용기가 부족하여 광주 5월의 참혹한 사건을 야구선수, 교복 입은 학생, 피크닉 가는 사람 등의 이미지를 그리고 그 바탕에 실루엣으로 처리한 그림을 그렸다.”(그림 1) 또한 김준권이 그렸던 그림들은 사회주의적 리얼리즘에 가까운 도상이었다. 이때 제작된 작품이 <상(像) –000>으로 제작된 안중근, 조만식, 장준하. 전봉준 등의 초상이었다.
이후 김준권은 많은 운동가들이 노동현장에서 위장취업을 하던 시기, 미술교사가 되어 학교로 들어간다. 또한 1982년부터 남원과 임실 등 전라도를 다니며 풍물굿을 배웠고, 이때의 경험은 그가 전통적 리듬에 바탕을 둔 조형미를 추구하는 바탕이 되었다. 아울러 교사 운동을 통해 사회현실과 접목하면서 김준권의 작업은 본격적으로 민중미술로 넘어간다. 그리고 이때부터 다른 민중미술가들처럼 민화와 불화 같은 전통회화와 판화에 관심을 가지게 된다. 이 시기 김준권은 <학교에서>라는 제목의 목판화 연작을 통해 일제 강점기와 독재시절의 유물이었던 주입식 교육을 비판하고 인간화 교육을 실현하고자 했다. 1985년 김준권이 참여한 <한국 미술 20대 힘전>은 청년 작가들이 현실을 비판하면서 운동성을 드러내고자 시도한 기획이었는데, 이 전시가 이 정부 당국에 의해 좌경용공으로 몰려 탄압받고 와해된 후, 미술인들은 당국의 탄압에 맞서 전국적인 미술운동조직 민족미술협의회(이하 민미협)을 건설한다. 이때부터 김준권의 작업은 운동현장과 더욱 밀접히 결합된다. 그리고 이때 메시지를 전달하고 빠른 작업을 가능하게 하는 매체가 판화였다.
교사운동을 하던 시절 <태극도><나는 밥이다>(1985) 등을 시작으로 <잉어부인도><하늘과 땅><선재동자><나 태어난 이 강산에>(1986), <사(師)><민족교육만세><통일대원도><부활하는 한반도여><상생도><대동세상><새야 새야>(1987) 등을 선보였다. 이때의 작품들은 교육현장의 민주화와 조국통일의 염원을 고무판이나 목판에 새겨 찍은 것이었다. <태극도><나는 밥이다><잉어부인도><나 태어난 이 강산에> 등에서 보이는 춤사위 동작은 그가 익혔던 풍물이나 탈춤의 기본동작 중 하나인 연풍대 동작이다. 이 시기 작품들은 흑백 판화가 기본이었고, 그 위에 채색을 더한 작품도 선보이는데 흑백 판화 위에 채색하는 기법은 차후 다색 판화의 바탕이 되었다. 이때 고무판과 목판에 새긴 작품들은 저항과 상생의 염원을 강하고 굵은 선으로 새긴 거친 칼질의 동세를 보여준다. 또한 태극 문양이나 문자도 같은 전통도상과 민화나 불화에 나타나는 서사적 구성을 차용하면서 우리 민족 고유의 신명을 춤사위로 형상화시키고 있다.
예컨대 <새야 새야>(그림 2)는 전봉준이 꿈꾸던 세상은 어떤 것인가를 상상해보면서 그것을 도상적으로 드러내 본 것이다. 기본적으로는 불화의 수월관음도 도상의 구도를 차용하고 있는데, 이는 또한 중세 제단화의 주대종소(主大從小) 구도이다. 녹두장군을 서사의 중심이 되는 주대(主大)로 중앙에 크게 묘사하고 풍물을 치면서 길놀이를 하는 민중들을 종소(從小)로 작게 그리고 있다. 한반도와 만주대륙 위에 앉아있는 녹두장군 좌우의 금강산 봉우리들은 산해경의 신화에 나오는 곤륜산 봉우리 옥산(玉山)과 연결되어 있으며 그 옥산에는 낙원정토를 상징하는 반도(蟠桃) 복숭아가 열려있다. 위로는 구름 속의 용을 그린 운룡도(雲龍圖)가 있는데, 이 운룡도는 산해경의 신화에 따르면 기우(祈雨)의 염원을 표하는 것으로 조선 시대 전 시기 동안 문인화에서도 운룡의 신묘한 조화술과 영이(靈異)함이 표현되었고 민간에서는 기복벽사(祈福辟邪)의 염원으로 그려졌던 것이다. 아래는 전통 민화의 십장생 그림에서 보이는 울렁이는 파도가 그려져 있는데, 이것은 본디 서왕모의 정원에 있는 벽옥수로 가득한 연못, 요지(瑤池)를 연상시킨다. 요지의 물 위로 용문을 거슬러 올라가는 잉어가 나타나는데 민화에서 잉어는 과거시험의 합격을 상징하는 기표였다. 이는 세속에서의 성공을 바라는 민화적 기복신앙이다. 또한 그 옆에 대동세상을 염원하는 민중들의 길놀이는 사물놀이를 하는 사람들과 밥그릇을 들고 춤을 추는 사람들로 이어진다. 이들의 신명난 대동춤 위에 그려져 있는, 밥이 가득 찬 밥그릇은 밥이 하늘(한울)임을 말하는 동학의 세계관을 보여준다. 여기서 김준권은 단순히 동양신화의 이상향을 내세우는 것이 아니라, 그 이상향이란 이 땅 민중들이 지배층의 억압을 뚫고 이루고자 한, 동학이 지향하는 시천주(侍天主)와 인내천(人乃天)의 이념에서 이루어짐을 보여준다. 여기서 김준권은 내용적으로 고대 동양신화, 민간설화, 불교 및 동학의 정신세계를 혼합, 변주시켜 현실에 대한 저항과 대동세상의 염원을 표현하였고, 형식적으로 민중미술의 대표적 매체인 고무 또는 목판 판화가 지닌 거칠고 강한 칼맛의 동세를 보여준다. 이것을 칼의 노래라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경향은 <북소리><상생도><통일대원도>(1987), <대동천지굿>(1988) 등에서 6월항쟁의 성과로 형식적으로나마 정치적 민주화가 이루어진 배경에서 해방된 세상과 통일의 염원을 담고 있는 작품으로 이어진다. 또한 이 작품들은 전교조 결성 대회 등의 집회에서도 내걸렸다. 그런데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은 이미 이 시기부터 김준권은 개인적으로 우리의 미술사를 다시 공부하면서 미술의 근본인 붓질을 다시 연구하기 시작했다는 사실이다. 그것이 풍물에서 말하는 “열고 닫고 맺고 풀고”라는 리듬을 조형에서도 적용시켜 가려는 탐구의 과정이었다. 이미 이 시기부터 동양화의 기본 필법인 구륵법, 몰골법을 익히고 미점준, 피마준 같은 준법을 판화에 적용할 수 있는 바탕을 이루어갔다.
2. 서정적 사실주의
1989년 전국교직원노동조합(전교조) 결성으로 해직되고 만든 작품들이 <학교에서 7><보고싶은 선생님께><백두산 함께 올라가리다>(1989), <얘들아 얘들아>(1990) 등이었다. 이 시기 김준권은 학교 현장을 떠나 민미협의 사무국장, 상임집행위원장이 되어 미술을 통해 현실의 사회운동에 더욱 깊숙이 개입하게 되었다. 그런데 김준권은 1991년 길거리 현장 미술을 떠나게 된다. 그것은 국내외 정세와 사회정치적 변화가 그 바탕에 있다. 1989년 11월 9일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고 연이어 1991년 소비에트 연방의 해체로 인한 동유럽의 사회주의 붕괴는 전 세계적으로 진보적 사회운동의 방향성과 침로에 큰 의문을 던져 준 사건이었다. 물론 많은 모순과 한계를 드러내고 있었던 소연방이라는 ‘현실’ 사회주의가 진보 운동의 목적지일 수는 없지만 소연방의 해체와 동유럽 사회주의의 붕괴라는 세기적 사건은 한국을 포함하여 전 세계적으로 진보적 이론가들이 이론적 반성과 재검토를 하게 하는 계기를 제공했다. 또한 유럽의 68혁명 당시에 발생하여 1980년대에 전 세계의 지성계에 큰 영향을 미치고 90년대에 한국에서도 확산된 포스트모더니즘과 포스트구조주의의 이론들은 계급투쟁이나 사회변혁운동 등의 거대담론을 비판하고 다양성과 차이에 주목하게 만들었다. 이러한 상황은 한국의 민중미술 진영에도 큰 영향을 미친다. 이러한 국내외적 사회 환경은 이 무렵 민중운동 및 사회운동과 결합하여 ‘운동’에 치중하던 많은 미술가들로 하여금 그러한 실천적 운동으로서의 미술 활동을 접고 다시 내부로 침잠하여 활로를 모색하도록 만들었다. 예를 들어 강요배는 강렬하고 투쟁적인 4.3 역사화를 넘어 제주의 산천과 바다를 화폭에 담아내었고 이종구는 강렬한 투쟁 현장에서 벗어나 우리 국토의 영성(靈性)을 담아내는 작업을 보여주었다.
이 시기 민미협의 간부로서 투쟁의 중심에 서서 미술운동을 통해 정부 당국과 싸워야 했던 김준권도 강경대 학생 치사 정국을 거치면서 길거리를 떠나게 된다. 이 과정에서 김준권은 서울을 떠나 1991년 가을 충북 진천으로 들어간다. 이때부터 김준권의 작품은 현장성과 투쟁성보다 농촌이나 시골 등의 우리 산천을 사실적으로 묘사하는 서정적 사실주의로 넘어간다. 내용적으로는 <붉은 산>(1991)(그림 3)이 분수령을 이루는 것이라 할 만하다. 그의 말처럼 이 시기 그는 10년간의 ‘아스팔트’ 활동을 떠나서 스스로를 되돌아보는 시간을 가지면서 집단적 운동에서 벗어나 한 사람의 개인으로서 자신과 주변을 살펴보게 된다. 이 시기에 만든 작품들이 농촌과 시골의 풍경을 그린 <노을>(1992), <두고 온 고향 –6> 등이다. 그런데 이미 김준권은 1980년대 말부터 흑백 판화 위에 채색하던 기법에서 다색판화로 옮겨가고 있었다. 1991년의 <소나무><붉은 산><봉천동에서-3> 등의 작품들이 아직 목판 위의 채색 기법에 머물러 있는 것이라면, 1991년의 작품에서부터 다색판화가 본격적으로 등장한다. 우리의 전통 목판화는 미세한 선묘의 선각 기술이 빼어나지만 다색판화가 시도되지는 않았다. 김준권은 청년 시절 유화를 전공했던 까닭에 본디 다색판화에 관심이 컸다. 이러한 관심에서 1989년 일본으로 건너가 아타치 판화연구소에서 에도시대부터 발달한 수성 다색 목판인 우끼요에의 기법을 익혔다. 이곳에서 그는 다색판화 제작기법과 수성으로 찍는 수묵채색 인화기법을 직접 확인했다. <지리산-겨울>(1991)에는 수성목판에서 보이는 수묵선묘가 담채톤의 배경과 어울리며, <사북에서><황토마을><노고단에서><지리산 이야기>(1991년), <뒷동산><귀로><안면도에서><산동네><폐광>(1992) 등 유성목판의 다색판화는 우키에요의 화법이 엿보인다.
우리의 구한말 전통 민화는 다양한 채색으로 민중들의 다양한 감정과 염원을 표현했는데, 그것이 가능했던 이유는 수요가 존재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전통 판화는 그렇지 못해 일본처럼 풍부한 다색판화로 발전하지 못했다. 그렇지만 김준권은 우리나라는 사계절의 색이 선명한 곳이므로 그러한 자연환경을 판화로 담을 수 있고 또 담아야겠다는 생각을 가지게 된다. 회화에서는 이미 한국적 인상주의 화풍의 선구자로 칭해졌던 오지호(1905-1982)가 한국의 자연 사계를 화폭에 담았지만, 목판화에는 그런 작업을 한 사람이 없었다. 이 사실은 90년대의 김준권으로 하여금 전통 판화의 전통을 잇고 나아가 우리의 자연을 다색판화로 묘사해야겠다는 일종의 장인적 의무감을 가지게 했다. 이렇게 하여 그는 눈앞에 보이는 ‘있는 풍경’<겨울 언덕, 1994>을 화폭에 담았고, 또한 산업화에 의해서 우리가 ‘잃어버린 풍경’(<논길, 1994>, <황토, 1994>)을 찾아내고자 하였다. 또한 그에 더해 전통 산수화에서 구현되는 이상향, 우리의 영혼을 치유하고 삶에 윤기를 부여하는 ‘있어야 할 풍경’(<달맞이, 1994>)을 그려내었다. 바로 이것이 거대담론을 추구했던 아스팔트를 떠나 김준권이 찾고자 한 예술적 대상이었다.
그런데 이 시기 그가 그린 ‘잃어버린 풍경’, 그래서 되살리고 싶은 ‘있어야 할 풍경’ 속 대상에서 대표적인 것은 무엇보다 엉컹퀴<엉컹퀴 2, 1991>(그림 4)라 할 수 있겠다. 김준권은 <엉컹퀴> 연작을 그릴 때, 민족시인이자 저항시인 민영의 ‘분단선’에 핀 엉컹퀴를 염두에 두었다. 전경에는 비례관계를 무시한 채 고원법으로 크게 그려진 엉컹퀴가 있고 원경의 산맥과 그 위의 산도 고원법으로 그려져 있고 중경의 들판은 평원법으로 그려져 있다. 전경의 엉컹퀴와 원경의 산은 원근법이 무시된 채 밀접하게 붙어 있는 듯하다. 여기서 엉컹퀴는 분단과 소외, 억압을 버티며 살아가는 이 땅 민중들을 상징하는 것이다. 따라서 엉컹퀴는 짓밟히고 소외된 민중을 나타내는 대표적인 꽃이다. 엉컹퀴 아래에는 들일을 하는 농부 부부가 있고, 마을에서 여자아이가 동생과 함께 새참을 이고 오고 있다. 이 이미지는 우리가 산업화 이후에 잃어버린 풍경이다. 이는 또한 우리 실경산수의 전통을 잇고 있다 하겠다.
엉겅퀴꽃 -민영
엉겅퀴야 엉겅퀴야 / 철원평야 엉겅퀴야 / 난리통에 서방 잃고 /홀로 사는 엉겅퀴야
갈퀴손에 호미 잡고 / 머리 위에 수건 쓰고 / 콩밭머리 주저앉아 / 부르느니 님의 이름
엉겅퀴야 엉겅퀴야 / 한탄강변 엉겅퀴야 / 나를 두고 어디갔소 /쑥국 소리 목이 메네
(창작과 비평, 1987)
이렇듯 우리의 산천은 이별과 분단 속에서도 살아남아 희망의 벌과 나비를 부르는 엉컹퀴의 산천이다. 이렇듯 형식상 다색판화로 넘어갔음에도 김준권이 그리는 대상은 여전히 이 땅의 산천이요 또한 민중으로 의인화된 자연물이다. 이것은 판에 새겨지는 ‘판의 노래’이자 우리 삶이 표현되는 ‘삶의 노래’이다. 이 ‘판의 노래’, ‘삶의 노래’는 유성목판과 수성목판에서 계속 이어진다.
3. 유성목판에서 수묵목판으로 – 판의 노래, 삶의 노래
김준권은 1994년도에 그때까지 작업한 다색 목판화로 인사동 ‘현화랑’에서 두 번째 개인전<김준권 목판화전 – 사람들의 마을에서, 1994>을 개최한다. 이 전시에서 그는 각 판화의 모든 에디션(Edition)을 거의 완판하는 성과를 거둔다. 그리고 여기서 모은 돈은 더 깊은 수련을 위한 바탕이 되었다. 여전히 수성 판화와 다색목판화 기법을 더욱 탐구하고 싶은 열망으로 1994년 중국 심양(瀋陽)의 노신미술학원에서 장학금을 받는 연구원으로 유학해 수인(水印) 판화기법을 전수받았다. 유성 잉크를 쓰는 서양 판화가 프레스기를 위에서 내려찍는 방식 뿐이라면, 수인(水印) 판화는 색판을 밑에 놓고 그 위에 종이를 얹어 그 물감이 종이 위로 묻어나게 하는 방식이다. 이때 몇 번이고 반복해서 색감의 농도를 자연스럽게 일반 색채화의 농도와 일치시킨다.
중국은 전통적으로 명청 시대부터 수성 다색판화가 발달했다. 그렇지만 노신미술학원에만 머물지 않고 중국의 전통 다색목판화인 수인판화를 탐구하기 위해 전국의 원로 판화작가를 만나러 다녔다. 그 성과로 1995년 12월 노신미술학원 미술관에서 ‘김준권 목판화전’을 갖기도 했다. 이때 김주권의 다색목판화 실력을 인정한 노신미술학원은 김준권을 1996년부터 명예 부교수로 임명했을 정도이다. 이렇게 김준권은 한국의 선각 목판화와 일본의 다색 목판화 우키요에, 중국의 수인판화를 배우고, 더 나아가 동아시아의 목판화 기술을 다각도로 섭렵했다. 형상을 새기는 기법과 다색판 제작뿐 아니라 종이에 수성안료를 찍어내는 인화(印畫)의 기술을 거의 완벽하게 체득했다. 이미 일본 우끼요에의 기법을 연구하여 체득한 김준권의 판화작업은 이로써 거칠고 강한 칼맛의 초기 흑백 목판화를 넘어 회화적인 정취를 살려낼 수 있게 되었다.
그런데 김준권 판화의 발전과정은 80년대 말에 해인사의 경험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해인사에서 그는 우리식의 기법과 형식을 찾고자 하였다. 거기서 그는 먹으로 찍는 판화를 접하고, 먹에는 서예나 그림을 그릴 때 사용하는 먹, 불경 같은 인쇄출판을 위한 먹, 금속활자를 찍는 먹 등의 세 가지 먹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 가운데 금속활자를 찍는 먹은 희석제로 콩기름을 사용하는 유성 먹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이로써 그는 서예나 그림을 그릴 때 쓰는 먹만으로는 판화를 하기가 어렵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리고 우리의 전통 판화가 서기 800년대부터 있었지만, 그때 용어는 판화가 아니라 인화(印畫), 즉 찍은 그림임을 가리킨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이로부터 그는 유성 목판과 수묵 목판의 재료의 차이를 집어내고 유성 목판은 다색 다판으로 여러 번 찍으려면 질긴 한지(韓紙, 닥종이)에 찍고, 수묵 목판은 번지는 효과를 잡아내기 위해 화선지에 찍어야 함을 포착한다.
중국으로 떠나기 전에 이루어졌던 1994년까지의 많은 작품은 대부분 유성 목판의 다색 판화였다. 이 작품들은 대부분 농촌 풍경을 사실적으로 묘사한 ‘서정적 사실주의’ 작품들이다. 한 장의 판화를 찍는데, 최소한 5판, 6판을 사용한다. ‘지리산’, ‘노고단’, ‘사북’, ‘아우내’, ‘명암리’, ‘안면도’ 등의 실제 지명을 나타내는 작품들이 우리 역사 속에서 민중들의 고단하고 억압된 삶이 펼쳐졌던, 눈에 보이는 우리네 산천과 마을이라면, ‘황토마을’, ‘두고 온 고향’, ‘붉은 산’, ‘겨울나무’, ‘노을’, ‘뒷동산’, ‘귀로’, ‘갈아엎는 땅’, ‘야행(夜行)’, ‘나의 살던 고향은’, ‘터’ 등의 작품은 직접 눈에 보이는 특정 지역의 풍경이 아니라, 그의 마음에 남아있는 우리의 잃어버린 풍경, 마음속 풍경으로 우리의 보편적 풍경이라 할 만하다.
중국 유학을 거친 후 1995년부터 2002년까지의 작품은 <민들레 산천, 1996>, <엉컹퀴, 1996>, <며느리밥풀꽃, 1996>, <참나리 핀 언덕, 1997> 등 앞서 나왔던 유성 목판이 계속 등장한다. 민들레는 앞서 언급됐던 엉컹퀴와 비슷하게 우리 산천 곳곳에 흩뿌려져 밟아도 죽지 않고 살아나는 민중 그 자체이다. 이렇게 우리의 산천은 억눌리고 짓밟혀도 죽지 않고 살아남는 민들레의 산천이며, 소외와 억압 속에서 희망을 노래하게 하는 엉컹퀴의 산천이다. 또한 마찬가지로 흑산도, 성대리, 백곡, 청송마을, 동강 연포마을, 화원반도 등 전국 각지를 답사하여 우리 산천의 풍경을 직접 담았고, 또한 이 산천을 떡갈나무, 유채밭, 눈내린 아침, 겨울, 조팝나무 마을, 미루나무, 그해 겨울 등 어느 지역을 특정하지 않고 우리 산천 풍경을 전형화 시킨 형상으로 담았다.
그런데 이 시기에는 이전의 유성 목판에 더하여 본격적으로 수묵 목판과 채묵 목판이 등장한다. 수묵 목판이 흑백의 수묵화처럼 수묵의 농담 정도에 따라 여러 판을 만들어 찍는 것이라면, 채묵 목판은 우리의 고유의 색채 안료를 사용하여 농담의 차이에 따라 여러 판을 만들어 찍어내는 것이다. 그러나 그의 유성 목판, 수묵 목판, 채묵 목판이 전통적 단색 흑백 목판화를 넘어서 기법과 형식상 뛰어난 성취를 이룬 것이라 하더라도, 내용상 그가 묘사하는 우리의 산천에는 그의 초기 작품에서부터 보이는 현실주의 정신과 사회비판 의식이 여전히 생생히 살아 있다. “저 언덕은 누대에 걸쳐 허리굽은 우리네 삶을 드러낸 듯 고달파 보이지만 선조들이 살았고, 지금 내가 딛고 서 있으며, 나의 후손이 마주할 땅! 나랏말싸미 … 생명의 땅”, “추수가 끝난 들녘에 서 있다. 늘 있던 한해살이 풍경이건만 …… 마을 어귀에는 이젠 그리 낯설지 않은 빛바랜 구호가 펄럭인다. 쌀개방 반대, 식량주권 사수”. 이렇듯 이 산천과 풍경은 그저 관념적 관조의 대상이 아니라 민중들의 치열한 삶이 펼쳐지는 장인 것이다.
제주도 <오름 0420, 2004>, <오름 0421, 2004>, <오름 0422, 2004> 연작은 유성목판이지만 여백의 맛을 살리는 채색 수묵화처럼 제작되었다. 또한 <오름 0701, 2007>(그림 5) 이후의 연작은 본격적으로 수목 목판으로 제작된다. 그리고 이후부터는 더욱 본격적으로 수묵판화와 채묵판화가 등장한다. 이 시기부터 작품은 크기가 대형화되면서 여백을 표현하기 쉬워졌고, 여백을 표현하게 되면서 그의 판화는 우리 수묵화의 전통을 되살려낸다. 2005년부터 이어진 <산> 연작, 2007년부터 제작된 <산에서> 연작은 흑백의 수묵목판과 채색의 채묵목판으로 제작되면서 전통 산수화의 맥을 잇듯이 깊은 여백의 맛과 여운을 보여준다.
무엇보다 김준권 작가의 수묵 목판화는 지난(至難)한 과정을 거쳐 이루어지는 결과물이다. 다색 판화 초기에 작은 크기의 유성판화도 한 장의 판화를 찍는데 최소 5판 또는 6판이 사용되었다. 그런데 수성 판화는 한 판을 찍고 종이가 마른 후에 다음 판을 찍어야 하니 한 작품을 완성하는 데에도 많은 시간이 걸린다. 가까운 곳의 물체를 표현하는 판은 짙고 선명하게 찍어내고, 거리가 멀어질수록 판을 달리하여 옅고 흐리게 찍어낸다. 이 때문에 수묵이든 채묵이든 먹의 농담을 달리하는 여러 판이 필요하다. 이렇게 농담이 다른 여러 판이 겹쳐져 완성된 작품은 대기원근법, 색채원근법처럼 깊은 원근감이 드러난다. 그러나 그의 수묵 판화는 과감한 생략을 통해 여백을 남긴다. 따라서 눈에 보이는 자연을 그대로 옮긴 것이라기보다 전형화시킨 것이다. 그리하여 그의 수묵 목판화는 우리의 자연을 형사(形寫)하면서도 내면의 뜻을 표출하고자 하는 사의화(寫意畵)를 닮아있다.
2018년 남북정상회담에서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방명록에 서명한 평화의 집에 내걸린 <산운 0901, 2009>은 백두대간의 남쪽을 형상화한 작품이다(그림 6). 그의 수묵 목판화 작업은 엄청난 노동력과 집중력이 요구된다. <산운 0901>은 무려 48개의 목판, <산에서 1303>은 40개의 목판을 사용하여 찍은 것이다. 우키요에의 영향을 받은 유성목판의 다색판화에서 유화적 정서가 엿보인다면, 이들 수묵판화는 온전히 우리 수묵화의 전통을 잇는 것처럼 보인다. 이태호 선생은 이것을 ‘허정(虛靜)의 산수미’라고 압축하여 정의한다. 이 앞에 서서 감상자는 아무런 생각 없이 고요하게 마음을 가라앉힐 수 있다. 그리하여 깊은 사유에 빠져 들어가면서 저마다 자신의 삶을 되돌아볼 수 있게 된다. 화면을 가득 채우는 로스코(Mark Rothko, 1903-1970)의 색면 추상(<Black on Grey, 1970>)이 우리를 깊은 심연 속으로 끌어당기는 숭고함을 불러일으킨다면, 김준권의 <산운>은 비움을 통해 저 깊은 곳까지 채워지는 숭고함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산운>은 정신적 깊이를 포착해내는 사의화(寫意畵)라 할 수 있을 것이다.
한편 유성 목판이 돋을새김의 각인(刻印)이라면, 김준권의 수성 목판은 각인도 있지만 평인(平印), 즉 평판으로 찍는 평판인도 있다. 그런데 여기서 김준권은 판화(版畫)가 아닌 인화(印畵)를 말한다. 여기서는 마치 수묵화가 화선지에 번져나가는 효과를 통해 그림을 그리는 것처럼 유성 판화에서는 생길 수 없는 스며들고 번짐의 효과를 얻을 수 있다. 그의 말처럼 판화는 판이 위주이기 때문에 판이 정해지면 누가 찍어도 같이 나오게 된다. 그렇지만 인화는 찍는게 위주이기 때문에 찍을 때마다 다르게 나올 수 있다. 판만큼이나 중요한 것이 찍는 방법이기 때문에 인화(印畵)라고 하는 것이다. 유성 판화가 판에 따라 그림의 내용이 결정되는 것이라면, 수성판화는 붓으로 물감을 칠하기 때문에 찍히는 부위와 강도의 조절이 가능하며, 또한 판과 종이가 물에 젖은 정도를 조절해서 찍어 표현을 달리 할 수 있다. 따라서 그의 말처럼 유성판화가 여백이 없이 판을 가득 채운 ‘산문(散文)’이라면 수성판화는 여백을 통해 여운을 남기는 ‘운문(韻文)’이라 할 수 있다. 2009년 <산운>에서 수묵판화의 섬세한 기술을 보여준 그는 수묵판화의 기법을 계속 연마해갔다. 그리고 <이 산 저산, 2017>(그림 7)에서는 목판을 무려 60장을 찍어 섬세한 농도 변화를 통해 색의 맛을 내는 채묵판화를 보여준다.
이번 김해 윤슬미술관의 전시는 수묵목판화와 채묵목판화로써 자신만의 새로운 경지를 개척하고 있는 김준권의 최근 작품을 망라한 대형 전시이다. 그는 우리의 실제 삶의 공간을 사실적 풍경으로 묘사한 유성 목판화와 우리의 산천을 이상화시켜 형상화한 수묵・채묵의 ‘산수화’를 보여준다. 이것은 초기의 ‘칼의 노래’가 ‘판의 노래’와 ‘삶의 노래’로 하나로 연결되어 있음을 잘 보여준다.
김준권은 무엇보다 우리 민족의 정서를 가장 잘 표현하는 심미적 대상이 백두대간이라 본다. 그런 점에서 그의 오랜 스승은 고산자 김정호이며, 대동여지도에 드러나는 판각작업의 숭고함은 그의 모범이 된다. 또한 그의 청년 시절 강한 투쟁적 사회 참여적 작품에서부터 우리의 삶의 토대가 되는 시골 마을과 백두대간의 형상화에 이른 작품들을 관통하는 현실의식은 그의 말처럼 캐테 콜비츠(Käthe Kollwitz, 1867-1945)의 현실주의 정신과 그 속에 들어있는 반전(反戰) 평화와 민중의 고통에 동참하는 휴머니즘 정신이라 할 것이다. 무릇 예술가의 자유란 시대의 과제 및 소명과 함께 갈 때 참된 것이 되며, 예술가는 자신이 만들어내는 예술 형식 속에서 끊임없이 사회와 조응해야 한다. 바로 이것이 그가 일관되게 추구해온 현실주의이며, 또한 현재 우리가 제기할 수 있는 네오민중미술의 내용적 요체이다. 이 내용을 공유하면서 작가들이 각자 자신에게 걸맞은 형식을 찾아낼 때 민중미술은 더욱 진화된 네오민중미술로 우리에게 드러날 것이라 본다.
70년대 제도권 미술이 현실을 외면할 때 이들을 옹호하는 모더니즘 평론가와 달리, 원동석 선생과 함께 이에 본격적으로 이의를 제기하면서 70년대와 80년대를 잇는 가교 역할을 한 고(故) 김윤수 선생의 말을 인용하면서 이 글을 마무리하고 싶다. “김준권은 한국의 현대사가 만들어낸 화가로, 감히 우리가 세계에 자랑해도 좋을 예술가이다. 우리는 민주화운동을 했던 사람이 진정한 조국을 새로운 방식으로 드러내는 훌륭한 화가를 또 한 사람 갖게 된 것이다. 이를 어찌 자랑이라고 하지 않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