숙소에서 68번 버스를 타고 상문에 내려 1 Km 옛거리인 핑장루를 걸어들어가면 졸정원 옆이 소주박물관이다
68번 버스 노선표
황제의 곤룡포인가 ?
자사호 몇점과 상아조각.... 옥조각.... 설명은 생략한다.
컨텐츠 별로였다. 상해박물관의 1/10 도 않되서.. 획휙지나며 몇장만 건져서 올린다.
오히려 출구쪽에 태평천국관련 전시장이 인상적이다. 박물관 전시물 몇개 보고 태평천국의 난을 보기로 하자
자사호나왔다.. 흠 명, 청대 것이면 적어도 몇천... 억대 일 것이다
요것은 참 단아하니..... 탐난다
요건 좀 조악해 보인다
요건 옥으로 만든 것 같다
요것은 정말 비싸 보인다만 역시 내스타일은 아니다... 요란스러운 것은 싫다
상아 조각품 ... 디테일이 끝장이다
사람의 표정까지 살아있는....
옥 공예품인데 중국사람들은 옥을 참 좋아하고 그 가치도 높다
그런데 옥의 용도가 사실 이런 용도밖에 없지 않나 ? 여기에 있을 정도라면... 좋은 옥 비쌀 것이다
소주박물관은 주로 공예품 중심이다
또 시작이다... BC 4000년 전 토기.... 쩝 잘났다. 그래 쭝꿔 니들 역사 길다.
상해 박물관 1층에서 빌려온건가 보다 ... 거기는 이런 몇천년된 청동항로 지천이다
주나라... 열국지의 시작,,, 주평왕과 포사에서... 제환공, 진문공 춘추전국시대,,,,, 여불위.. 진시황제... 항우...유방
중국 산수화... 명청대 유물로 보인다
동양화에서 드물게 원근법이 보인다
추사의 세한도에서 보던 집과 비슷한 것이 보인다.... 아마도 비슷한 필법
붓의 달림속도로 농담을 조절한.... 극한의 필력을 대변하는...
채색과 함께 원근법이 사용된 ...
박물관을 나오니 태평천국을 주제로 한 전시관이 있는데... 컨텐츠는 그냥 그렇다... 당시 격전지 지도와... 몇몇 유뮬과
그러나 태평천국의 난이라고 했던 것이... 손문을 비롯 중국공산정부는 자신의 입장에 따라 미화를 한다.
평등을 주장하고, 토지 무상분배, 청나라 즉 만주족에 저항 등등이 같은 맥락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여느 반란이 그렇듯... 그 과정에서 2 - 5천만명이 죽었다고 하니.... 처참했을 것이다. 당시 통계가 있어 뭐가 있어...
체제 정비가 않된 상태에서 군사력을 가진 무리가 세력을 잡고 활개를 치다가 내부 균열로 망가진 청조 말기의 전형적인 반란인데... 미화한 것이 눈에 보이고 좀... 그렇다. 우리나라의 동학혁명과 비슷하다고 봐야하나 ? 성공했다면 전봉준도 홍수전과 같이 ??? 하긴 마오의 말년도,, 과히 아름답지는 않았으니...
탸평천국의 난 이왕에 한번 공부삼아 정리해보자.
1814 년 훗날 太平天國(태평천국)의 大亂(대란)을 일으킨 洪秀全(홍수전)이 중국광동에서 테어난다.
당시 제국의 중국은 최전성기를 구가했던 건륭제에 이어 가경제가 즉위했지만, 그간의 누적된 사회적 모순을 빌미로 하여 발생한 白蓮敎(백련교)의 대란, 이어서 天理敎(천리교)의 난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국가재정은 파탄지경이었다.
집안은 대대로 농사와 함께 글공부를 통해 때때로 관리도 배출해온 집안으로 오늘날 중산층에 해당되는 정도였다.
홍수전은 16 세 무렵 집안이 어려워져 학업을 중단하고 농사일을 거들었다가 다시 18 세 때는 고향 마을에서 훈장 선생 자리를 얻을 수 있었다. 그 이후 여러 차 과거에 응시했으나 계속 낙방의 고배를 마셨다. 이미 세상은 시험에서의 실력이 아니라 배경과 돈으로 합격하고 관리가 되는 시절이었다.
1836 丙申(병신)년, 그의 나이 24 세 무렵 그는 광동성의 성도인 광주시에 갔다가 서양 선교사로부터 기독교 홍보책자인 ‘권세양언(勸世良言)’ 즉 ‘세상 사람들에게 권하는 좋은 말씀’이란 것을 얻어 읽게 되었다. (광주시는 바로 ‘황비홍’이 명성을 떨친 대도시로서 홍콩에서 가깝다.) 이듬해인 1837 丁酉(정유)년에 그는 과거에 또 낙방하는 바람에 충격을 받아 40 일간 고열로 시달리는 병을 앓는데 이때 그는 병중의 꿈속에서 하늘로 올라가 여호와를 만났고, 그로부터 보검과 함께 세상의 요마들을 물리치라는 명을 받았다고 한다. 물론 홍수전의 주장이다. 그리고 1843 癸卯(계묘)년, 과거시험에 대한 미련을 정리하고 개혁을 구상한다.
독교와 유교의 교리를 절충해서 만든 자신의 새로운 가르침에 대해 拜上帝敎(배상제교)라는 이름을 붙였다. ‘
여호와 하느님을 崇拜(숭배)하는 종교’라는 뜻이다.
이리하여 그는 자신의 동생과 새로 만난 동지 풍운산이란 사람과 함께 고향 마을에서 선교활동을 펼쳤다.
그 과정에서 동네 서당의 공자 위패를 우상숭배라는 명목으로 철거했는데 그 바람에 동네에서 추방당하고 말았다.
이후 전략을 변경해서 문맹률이 높고 못사는 궁벽진 촌락을 돌아다니면서 사람들의 억울함을 들어주기도 하고 또 해결해주는 노력을 보여주면서 점차 교세를 확장해갔다. 아울러 1845 년부터 2 년에 걸쳐 좀 더 완비된 교리와 노래책등을 저술해 제법 그럴듯한 종교의 형태를 갖춘다. 주된 내용은 공평하고 정의로운 세상을 건설하자는 것이었고 핵심 내용은 ‘토지의 균등분배’였으니 均富主義(균부주의) 즉 중국식 공산주의라 하겠다.
열심히 노력한 결과 1847 丁未(정미)년에 이르러 교도가 3 천 여 명으로 늘어났고 어느덧 홍수전도 교주로서의 관록이 붙어갔다.
특히 이해 10월 마을의 사당에 가서 神像(신상)들을 모조리 부숴버렸는데 그러고도 아무런 천벌도 받지 않고 무사한 것을 본 사람들이 이거야말로 진짜구나 싶어 급거 따르기 시작했다. 사당의 신상들을 파괴하는 일은 계속 이어졌고 그럴수록 신도들은 급격히 늘어났지만, 기존의 가치관인 유교에 대한 공격행위에 불안을 느낀 사람들 특히 고을의 유지들은 그를 관아에 고발했고 또 정부도 개입하게 되었다. 본격적인 투쟁운동이자 선교활동이 시작된 셈이었다.
교세가 급속히 늘어나자 1851 년 1월 11일 홍수전은 급기야 청 정부를 타도하고 태평천국을 건설하자고 하면서 정식으로 반란을 일으켰다. 무려 13 년간 지속되면서 중국 전체를 황폐화시키는 태평천국의 대란이 시작된 것이다.
국호는 태평천국, 스스로를 天王(천왕)이라 칭하고 동서남북의 4왕 그리고 별도의 왕을 한 명 더 책봉했다. 그의 나이 38 세였다.
이렇게 해서 시작된 천하대란은 한때 청나라 조정을 거의 도산 직전까지 몰고 갔고 중국 전역을 피비린내 나는 아수라장으로 만들었다. 1853 癸丑(계축)년, 홍수전의 운기가 절정인 때에 이르러 중국 양자강의 대도시인 南京(남경)을 점령한 뒤 도읍으로 삼았다. 이름을 천경(天京)이라 개칭하였다.
그리고 토지균등을 원칙으로 하는 제도를 공포하였다. 모든 토지는 천하의 사람이 함께 경작해야 한다는 생각에서 사유를 금하고 경작자에게 골고루 나누어준다. 또 수확의 잉여분은 국고에 납입시키며 개인적인 축재는 허용하지 않는다는 것을 핵심 내용으로 했다. 그러고 홍수전의 정책에 반대하는 사람들에게 무자비한 학살이 자행된다. 중국식 공산주의는 여기에서 많은 시행착오를 공부한 것 같다 한때는 북경 근처까지 진격하기도 했지만, 나라를 세운 다음 해인 1854 년에 가서 청조의 명신인 曾國藩(증국번)이 조직한 농민군인 湘軍(상군)에 의해 패전하면서 기세가 일단 꺾였다. 비록 한 번 패하긴 했어도 남경 일대에서 홍수전의 위세는 대단했다. 청 정부는 양자강 이북, 홍수전의 태평천국은 양자강 이남으로 형세가 갈려 대치하는 상태였다.
신흥 종교국가의 교주인 홍수전은 이때부터 자만에 빠져 수천의 미녀를 데려다 궁녀로 삼았고 后妃(후비)만해도 88 인을 두었다.
그리고 화려한 궁궐을 새로 지어 백성들에게 큰 부담을 주었다. 또 하나의 중국식 황제가 등장한 것이다.
갑자기 등장한 세력은 언제나 내부 분란으로 기세가 꺾이는 법, 태평천국의 홍수전 역시 그 길을 갔다.
내부는 권력투쟁, 외부로부터는 청정부의 반격으로 태평군은 맥없이 무너져갔다.
1860년에는 다시 세력을 회복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잠시였을 뿐 이듬해 증국번의 군대에게 결정적인 패배를 당하고 무너져 내렸다. 여기에 악재가 또 생겼으니 서구 열강들의 군대가 청정부와 협조하여 진압에 나선 것이었다.
이에 태평천국 군대는 1864년 수도 남경은 사방으로 포위를 당했고, 홍수전도 51세의 나이로 죽는다.
1851년 1월 11일 금전촌의 봉기, 이른바 金田起義(금전기의)로부터 1864년 천경이 함락될 때까지
근 14 년간의 농민전쟁 동안 18개의 省(성)과 600여개의 市鎭(시진)을 접수했던 홍수전의 태평천국 봉기는 이렇게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아무리 봐도 당시의 기층민의 요구을 악용한 반란에 불과한데.... 민심은 천심...
박물관을 나오니 바로 졸정원이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