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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정고시 수기집(2 누구라도 삶을 소중하다 않으리)
서러웠던 사연들을 가슴에 묻고 배 대 열 1979년 말, 정치적으로 한국 현대사의 분수령이 되었던 박정희 대통령의 시해사건이 나던 그해 겨울, 나는 군에 갓 입대하여 군부대에서 후반기 특기교육으로 탱크 정비를 배워 전방으로 배치를 받게 되었다. 날씨도 추웠지만 이등병이라는 심리적 위축감에다 당시 군내부에서 권력을 둘러싼 암투로 인한 살벌했던 분위기 때문에 초기 군대생활은 적응하기가 상당히 힘겨웠다. 일선부대로 배치를 받기 전 2~3일 정도 보충대에서 머무르게 되었는데, 일석 점호시간에 주임상사의 눈에 뜨게 된 덕분에 큰 부대의 사령부에서 운전병으로 군대생활을 시작하게 되었다. 운전병생활을 8개월 정도 하다가 모시고 있던 장군님이 다른 부대로 전출을 가게 되면서 나도 장군님께서 옮겨 가시는 부대로 따라가게 되었다. 부대를 옮기고 나서 새로 부여받은 직책이 사무실 당번병이었다. 그때부터 내 인생의 항로가 수정되기 시작하였다. 당시 나의 학력은 중졸이 전부였다. 보통 군대의 지휘관이나 장군 정도 계급의 참모들 사무실에는 한두 명씩의 당번병이 있기 마련인데 그 당번병들의 학력은 대개가 대학 재학 이상이었다. 당번병이라는 직책이 고도의 전문성을 요구하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높은 분들께서 고학력자를 원했기 때문이었으리라 생각된다. 기이하게도 탱크정비 훈련을 받은 저학력자가 장군의 사무실에서 근무하게 된 것이다. 일은 여기서부터 발생했다. 장군님을 만나려고 사무실로 찾아오는 손님들과 대화를 나누다보면 자연스럽게 나오는 말이 학력문제였기 때문이다. “배병장은 어느 대학을 다니다가 왔지?”등으로 아예 대학은 기정사실로 못박아두고 이야기가 시작되는 경우가 많았다. 군대에 들어오기 전만 해도 내가 고등학교를 못가고 대학을 안다닌 것에 대해 그렇게 심각한 고민을 하지는 않았었다. 그고 그럴 것이 농을 짓던 나의 위치에서 주로 접촉하는 대상이 학력과는 무관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군에서는 특히 사무실 당번병으로 근무하면서부터는 유수의 명문대학 이야기들을 수시로 들을뿐더러 주위사람들에게서 대학 문제를 자주 질문 받다보니 자존심 상하는 일이 자주 있었다. 군대생활을 이렇듯 고민스럽게 보내고 스물다섯에 제대를 한 다음, 나는 내 일생에서 가장 중요한 결정을 내려야 했다. 군대시절, 대학문제와 관련하여 난처한 입장에 처했을 때마다 “중학교 밖에 못 다녔어요. 라는 말을 차마 할 수가 없어서 이대로는 사회생활을 정상적으로 할 수 없다는 판단이 섰기 때문이다. 그래서 늦었지만 꼭 공부를 해서 그동안 해온 거짓말을 참말로 바꾸기로 결심했다. 그러나 그렇게 결심하기까지는 우여곡절이 많았다. 고향에서 농사를 지으시던 부모님께서는 아들이 제대해서 돌아오면 같이 농사일을 도와 함께 살 것으로 알고 기대에 부풀어 계셨는데 3년 동안의 군대생활을 마치고 와서는 갑자기 공부하러 서울로 가겠다고 하니 어처구니없으시다는 듯 말리시는 것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내가 고등학교라도 다녔더라면 대학을 간다고 하여도 크게 놀라시지는 않으셨겠지만 중학교밖에 못 다닌 녀석이 대학을 가겠다니 놀라시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고 본다. 겨우 여비를 마련하여 서울로 올라와서 후암동의 판자촌에 거처를 정했다. 그러나 며칠 동안은 학원에 입학하지도 못하고 검정고시학원 앞에서 서성거려야 했다. 도저히 용기가 나지 않아서 상담실에 들어가지 못하고 나보다 먼저 학원에 다니면서 공부를 하고 있는 학생들을 부럽게 바라만 보다가 돌아서기를 몇 차례, 그러다가 어렵게 용기를 내어서 상담실 문을 열고 들어갔다. 그간의 사연들을 상담선생님께 말씀드리고 입학을 하였다. 그러고는 그날 오후 이발소에 가서 머리를 완전히 깎아버렸다. 까까머리 스님처럼 말이다. 이튿날 입학식을 마치고 학습교재를 지급받아 설레는 마음으로 책을 펼쳐보았다. 중학교를 졸업하고 10년 가까이 녹슬어버린 머리로는 도저히 이해하기 힘든 내용들 ……. 절망감이 엄습해왔다. 두렵기도 하였다. 도대체 내가 왜 검정고시를 하겠다고 부모님께 큰 소리 치고 서울로 왔는지 후회가 되었다. 그러나 다시 포기하고 시골로 간다는 것은 꿈에도 생각할 수 없는 일이었다. 군대에서 겪었던 수치심에 치가 떨리는 듯하였다. 일단은 부딪쳐보기로 하였다. ‘루트4는 2와 같다’라는 것이 이해가 되지 않아 교무실로 수학선생님을 찾아갔다가 무안을 당했던 적도 있었고 경제적인 문제로 심각한 상태가 되어버린 경우고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러나 나는 물러설 수 있는 처지가 아니었다. 배수의 진을 치고 있었기 때문이다. 만약 포기를 하게 된다면 ‘한강’으로 가는 길밖에 없다는 최후의 수단을 머릿속에 넣고 있었던 것이다. 무조건 외웠다. 수학책도 모조리 외워버렸다.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도 일단 외워 놓고 보면 나중에 머리가 끄떡여지는 경우가 많았다. 학원을 오가는 시간에도 책을 손에서 놓지 않았다. 지하철 안에서 책을 읽고 있는 모습을 마침 출근하시던 담임선생님께서 보시고는 종각 역에서 열차가 서자 “대열아, 이제 내리자” 하면서 어깨를 두드려주셨던 일도 있었다. 그렇게 어렵게만 보였던 책 속의 내용들이 공부를 시작한 지 3개월쯤 지나자 차츰 머릿속에 들어오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8개월 만에 당당하게 검정고시에 합격할 수가 있었다. 하지만 합격의 기쁨을 누릴 시간적 여유가 없었다. 바로 대학시험 준비를 시작했다. 낮에는 경제적인 문제의 해결을 위해 일을 하여야 했고 밤에는 학원에서 입시준비를 한다는 것이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니었다. 정말로 힘든 자신과의 싸움이었다. 이런 노력 끝에 나는 대학에 들어갈 수가 있었다. 대학에 지원서를 넣고 합격자 발표일 까지 1개월여를 시골에서 지내다가 합격통지서를 받아들고 고속버스 편으로 서울로 올라오면서 너무 기쁜 나머지 눈물을 주르륵 흘리던 일을 생각하면 지금도 입가에 미소가 돈다. 당시 대학 등록금은 원로 코미디언이신 배삼룡 선생님께서 내주신 덕분에 당당히 대학생이 될 수 있었다. 대학생활 검정고시를 할 당시만 하여도 나는 대학에 들어가기만 하면 모든 문제가 해결될 줄만 알았다. 그러나 그것은 희망사항에 불과했다. 씀씀이가 검정도시 준비를 할 때보다 훨씬 커졌고 또한 한의과 대학을 다니는 막냇동생의 학비도 함께 조달해야 했기에 나는 더 바쁘게 움직여야 했다. 검정고시 시절부터 대학을 졸업하기까지 50여 가지의 장사를 하였는데 당시의 체험들이 나에게 현재의 사회행활을 하는 데 직. 간접적으로 큰 도움이 되고 있다. 대학 재학시절 동창생들보다 평균 열 살쯤 더 먹은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나는 급우들과 어울리려고 많이 노력했다. 한양대학교부근, 행당동 산꼭대기에 반평짜리 방을 얻어놓고 자취를 하면서 낮에는 학교수업을 받고, 밤에는 길거리에서 리어카 행상을 하였다. 평소 학교수업을 마치고 자취방에서 리어카를 끌고 행인들이 많이 붐비는 종로2가 YMCA맞은편 삼일서적 앞에까지 원정을 가서 장사를 하곤 했는데 그곳에서 장사를 하고 있던 상인들의 텃세가 너무 심했다. 그래서 그 텃세를 극복해보려고 동급생 30명을 불러내어 나의 리어카주위에 포진을 시켜놓고 붕어빵을 구워서 팔았다. 그러나 이 작전은 텃세를 극복하는 데이는 성공하였지만, 과다한 비용의 지출로 인하여 빈껍데기 장사가 되고 말았다. 건장한 녀석들이 붕어빵을 굽는 즉시 팔기도 전에 해치워버렸기 때문이다. 당시에 나는 방학 기간 중에 나와 동생의 등록금을 마련해야 했기에 늘 부감 감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겨울방학 동안에는 동생과 업무를 분담해서 한꺼번에 두 가지 일을 하기도 하였다. 동생이 빵굽는 리어카를 먼저 끌고 나가고 나는 해빙시키는 기계를 메고 달동네였던 행당동 일대를 돌아다니면서 언 수도를 녹여주고 돈을 받았다. 날씨가 추운 날은 주문이 밀려서 즐거운 비명을 지를 정도였다. 벌써 10여 년 전의 일로, 많이 버는 날은 하루 10만 원 이상의 돈을 벌기도 하였으니 당시 소득으로는 꽤나 많이 번 셈이었다. 한 겨울 동안의 고생으로 다음 학기의 등록금과 생활비를 벌수가 있었던 것이다. 기온이 몹시 떨어져 추웠던 어느 날, 무방비 상태로 있던 가정의 수도가 많이 얼어버린 적이 있었다. 밤늦게까지 무거운 해빙기를 메고 다니면서 수도를 녹여주며 일을 하다가 집에 들어와서 잠시 쉰다는 것이 피곤에 지쳐서 그만 골아 떨어져버렸다. 동생과 함께 평소 밤12시경 짐을 챙겨 집으로 들어오기로 약속이 되어 있었는데 일이 벌어진 것이다. 우리가 살던 방까지는 혼자서 리어카를 끌고 올 수가 없는 언덕길이고 추운데다가 눈까지 많이 온 그날 밤 아무리 기다려도 오지 않는 형을 기다리다 지친 동생은 행인들의 도움으로 간신히 리어카를 끌어다놓고는 방에서 자고 있는 형을 보고 원망스럽게 울음을 터뜨렸다. 나도 깨어나 동생을 안고 울었다. 서럽게 울었다. (그러던 동생이 한의사가 되어 지금은 한의원을 개업하고 있다.) 동생의 생각으로는 형이 야속하게 보였겠지. 대학 4학년 때는 그래도 경제적으로 꽤나 안정되었다. 내 돈으로 봉고 트럭을 한 대 살 수 있을 정도였으니까 말이다. 군에 가기 전에 배워놓은 운전 실력이 나에게는 큰 밑천이었다. 봉고 트럭에다 과일을 싣고 골목을 누비면서 장사도 했고 때로는 영업용 트럭을 몰기도 하였다. 결혼은 2년여 동안의 연애 끝에 88년 봄, 행당동에 조그마한 전세방을 얻고 신혼생활을 시작하였다. 그러나 그 달콤하던 신혼생활도 불과3개월. 우리 부부는 당시 나의 가게(?)가 있던 부천역 북부광장 부근으로 이사를 가야만 했다. 서울에서 부천까지 다니기가 너무 멀었기 때문이다. 학교수업이 끝난 오후 4,5시쯤이면 나의 자가용 트럭에 짐을 싣고 나가서 전을 펼쳤다. 노점상을 하면, 단속하는 반원들과의 마찰은 필연적이다. 단속을 용케도 잘 빠져나가다가 어느 날, 경찰서에 연행되어 즉결재판을 받고 3일간 구류를 살았던 기억은 나의 과거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한 부분이다. 그렇게 세월은 흘러갔다. 나의 능력을 최대한으로 발휘해 가면서 몇 가지 일을 한꺼번에 해낸 대학시절이었다. 사실 대학에서의 공부는 그렇게 잘한 편이 아니었다. 매일 생업ㅇ 쫓겼었고 그러다보니 공부를 할 수 있는 시간적 여유도 많지 않았다. 대신, 좋은 친구들을 대학생활을 통하여 많이 사귀었다. 그러한 사연들을 겪은 끝에 1989년 봄, 드디어 졸업장을 받았다. 그 많았던 고생들이 주마등처럼 머리를 스쳐 지나갔다. 군대생활을 하면서 겪어야 했던 남모르는 설움들, 서글펐던 열등감을 떨쳐버리고 이제는 당당히 사회의 일각에서 일할 수 있으리라는 자신감을 대학 4학년을 통하여 얻게 되었다. 그러나 나는 생각한다. 대학을 졸업했다고 해서 많은 지식을 얻고 만능 인간이 되는 것은 아니라고, 다만 대학을 다니고 공부를 함으로써 어떤 일을 하게 되든 자신감을 가지고 임할 수 있는 자세를 터득하게 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런 면에서 나의 대학 생활 4년은 성공적이었다고 평가해도 될 것 같다. 새로운 사회에의 도전 새로운 환경에 접하게 될 때, 두려움과 설렘이 교차하게 되는 것은 인간에겐 누구나 마찬가지 현상일 것이다. 가슴 벅찬 대학 졸업을 끝으로 학생으로서 누리던 특권(?)도 끝이 났다. 대학을 다닐 때에는 사소한 실수가 있어도 대학생이라는 신분확인만으로 면책이 될 수 있었지만 대학을 졸업하고 사회인이 되고서부터 는 상황이 달라졌다. 모든 일에 능동적인 대처가 필요했던 것이다. 대학을 졸업하고 나니 제일 큰 문제가 직장이었다. 아내도 결혼을 하면서 직장을 그만두었던 터라 당장 먹고사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돈을 벌어야했다. 보통 졸업생들보다 10살이나 더 많다보니 웬만한 기업체엔 응시 자격조차 부여되지 않았다. 검정고시를 하기 전이나 대학에 재학 중일 때에는 아무 일을 해도 별 문제가 없었으나 대학을 마치고 나니 오히려 대학 간판이 짐이 되어버렸던 것이다. 검정고시를 마치고 대학을 졸업한 만학도 들은 나와 비슷한 경험을 했을 터이다. 그러나 혼자 힘으로 검정고시를 마치고 대학까지 졸업한 잡초 근성을 가진 내가 만만하게 물러설 수는 없었다. 곧바로 경기도 하남시의 외딴 마을 지하실에 방을 얻어 장사를 시작하였다. 주위사람들이 “대학까지 마친 사람이 저런 장사를 할까”하면서 비웃을 것만 같아서 일절 대학을 다녔다는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다. 그런 자존심을 가지고 있는 한 나는 새로운 사회에의 도전에서 성공할 수 없을 것이라는 판단을 갖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다시 마음을 독하게 먹었다. 검정고시를 시작하기 직전의 마음가짐으로 되돌아간 것이다. 처음에는 전라남도 고흥, 보성 등지에서 누렁호박을 사서 가락시장이나 경동시장까지 기지고 화서 도매상에 넘겼다. 대학을 마치던 해에 처음으로 시작한 사업이 이것이었다. 자본금이 없었던 나로서는 이 방법밖에 달리 도리가 없었다. 겨울 한철을 이렇게 늙은 호박 장사로 세월을 보내다가 드디어 1990년 4월 2일에 세무서에다 사업자등록을 하고 정식으로 사업을 시작하였다. 직원이래야 내가 사장이고 아내는 경리사원, 그리고 막내처남은 영업담당으로 셋이 전부인 이름뿐인 사업이었지만 그래도 나의 감회는 남달랐고, 나름대로의 포부를 가지고 있었다. 이즈음큰아들은 낳은 아내의 헌신적인 노력 덕택으로 내 사업은 조금씩 커져갔다. 30평짜리 지하실에 방 한 칸을 넣어서 사무실 겸 우리 가족이 사는 방으로 사용하였고, 나머지 공간은 창고로 사용하면서 새벽에 경동시장으로 나가서 더덕, 고사리 등을 구입하여 유원지 부근의 식당에 팔았다. 속리산이나 수안보 등이 주거래처로 많은 물건을 팔수가 있었고 그 수익도 상당하였다. 그러다가 90년 10월에는 처음으로 중국 대륙에 들어가서 거래처를 뚫은 다음, 직접 무역을 하기 시작하였다. 당시에는 중국과 우리나라의 수교가 되어 있지 않았던 때여서 중국과의 직항로도 없었고 따라서 중국을 왕래하기가 참으로 어렵던 시절이었다. 중국으로 가려면 김포공항에서 비행기로 홍콩까지 갔다가 거기서 며칠을 머무르면서 중국 당국의 비자를 발급받은 다음에야 대륙으로 입국을 할 수가 있었다. 중국을 다니기가 그렇게 번거롭던 시절 나는 다른 사람들보다 비교적 자유롭게 중국을 왕래하면서 사업을 키워나갔다. 처음 중국에 들어갔을 때 받았던 중국에 대한 인상은 상당히 감격적이었다. 난생 처음으로 밟아보는 대륙……. 내가 중학교에 다니던 시절, 지도를 펼쳐놓고 광개토대왕께서 평정하셨다던 옛 고구려 영토를 그려보면서 그렇게도 가보고 싶었던 땅. 그러나 이제는 그 중국을 나의 사업무대로 끌어들이면서 안착할 수가 있었던 것이다. 세상의 일이란 마음먹은 대로 쉽게 되는 것이 많지 않다. 하지만 최선을 다하는 일에 불가능이란 역시 많지 않다는 것을 절실히 느끼면서 중국 사업을 진행시켜나갔다. 중국에 다니면서 제일 크게 느낀 점이 언어소통에 대한 불편이었다. 중국에서 사업을 벌이기 위해서는 언어장벽을 뛰어넘어야 한다고 판단한 나는 바로 중국어 공부를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그다지 길지 않은 기간 동안에 기초적인 대화는 나눌 수 있을 정도로 실력을 쌓았다, 중국어 공부를 할 때, 검정고시 시절의 경험과 정신력이 동원되었음은 물론이었다. 지금은 중국 사람들과 큰 어려움 없이도 대화를 나눌 수 있을 정도가 되어 나의 중국 사업에 적지 않은 도움이 되고 있다. 수년간을 중국을 다니면서 중국의 풍습이나 중국인들의 생각을 익히면서 무역 업무에만 봉사하였다. 그러다가 앞으로의 사업을 지속적으로 추진하기 위해서는 제조업을 경영하지 않으면 안 되겠다는 판단아래 93년 초부터 식품제조공장의 설립을 추진하였다. 당시 내가 국내에서 처음으로 개발하여 시판 중이던 그래뉼 형태의 도토리 녹말이 인기 절정의 상태로 되면서 국내 생산만으로는 도저히 수요를 감당하지 못할 형편이 되었기 때문이기도 하였다. 그리하여 우리나라와의 교통이 편리한 산동성에 ‘고려식품유한공사’가고 하는 도토리녹말 가공공장을 100% 한국 고려 종산상사 단독 출자의 형태로 설립하였다. 한국 수출입은행에 조흥은행에서 발행한 지급 보증서를 제출하고 부족한 지금을 지원받아 그동안 내가 무역업으로 번 돈을 합쳐서 중국에다 공장을 설립한 것이다. 원료인 도토리는 중국 각 지방에서 열차나 배편으로 실어 와서 공장을 가동하였다. 생산품의 판매는 한국의 고려농산상사에서 전담하였다. 원료를 구입하기 위해 열차 편으로 중국의 내륙지방을 여행하다 보면 한국과는 다른 대륙의 정서를 느끼곤 하였다. 30~40시간의 긴 여정을 딱딱한 나무의자에 앉아서 여행을 하면서도 불평이 없는 중국인들의 인내심을 보고는 감탄이 절로 나왔다. 10억이 넘는 거대한 중국이 큰 분열 없이 굴러가고 있는 것은 중국인특유의 뚝심이 있기에 가능한 일이라고 여겨진다. 이렇게 해서 나의 새로운 사회에의 도전은 많은 고통과 번뇌 속에서도 성공적이었고 또한 앞으로의 꿈을 키워갈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할 계기가 되었다. 기업을 통한 보국 나는 내 자신의 어려웠던 청년시절이 없었더라면 지금처럼 강한 정신력을 가진, 그리고 성공적인 인생으로 살아갈 수 없었으리라고 생각한다. 군에서의 열등의식을 그대로 지닌 채 사회에 나섰더라면 한평생을 패배감 속에서 지냈을 것이기 때문이다.“늦었다고 생각할 때가 가장 빠른 시기이다”라는 말이 있는데 군을 제대하면서 10년 늦게라도 공부를 시작한 것이 나에게는 나머지 인생을 인간답게 살 수 있는 동기가 된 것을 바탕으로 일군 나의 힘을 기업 활동을 통해 사회에 보답코자 한다. 그 내용을 여기서 소개하기로 한다. 최근(1995년 9월1일)나는 별난 매운탕 체인점 본부와 함께 별난 매운탕 본점을 개업하여 영업을 시작하였다. 어렸을 적부터 나의 별명이 ‘별난 사람’이었는데 그 별명을 그대로 원용하여 회사와 식당의 이름을 짓고, 순전히 내 자신이 개발한 음식인 별난 매운탕을 선보인 것이다. 매운탕하면 여느 음식과 대동소이하다고 생각하겠지만 나의 별난 매운탕은 독창적인 개발품으로서 이 세상에 처음 태어난 것이다. 다섯 가지 신선한 버섯을 썰어서 샤브샤브처럼 매운탕 국물에 살짝 데쳐서 먹을 수 있도록 한 방식이었다. 처음에 내가 식당사업을 하겠다고 하니까 식당사업을 할 수 있겠느냐는 식으로, 그러나 나는 자신이 있었다. 4년 전에 구입하여 방치하다시피 놓아둔 서울 올림픽 아파트 근처 60평짜리 건물을 개조하고 부근의 땅을 더 사서 50대 정도를 세울 수 있는 주차장도 확보하였다. 그리고 음식점과 체인본부 운영의 3가지 원칙을 세웠다. 첫째, 우리 농민을 돕자는 것이다. 우루과이라운드 등으로 어려움에 처한 우리농촌과 농민을 살리기 위해서는 농민들에게 소득원을 안겨주어야 하는데, 현재까지는 정부에서 이중곡가제 등 농촌정책의 실패로 인하여 농민을 망하게만 해놓고는 뚜렷한 대안을 제사하지 못하고 있었는데 일개인인 내가 우리나라의 농민을 도우는 일에 앞장서기로 한 것이다. 내가 개발한 요리들이 대량으로 보급될 수만 있다면 우리농민들에게 새로운 희망을 안겨줄 수 있으리라 확신한다. 둘째, 우리 국민들의 건강에 도움이 되어야 한다는 원칙이다. 버섯이나, 미나리, 메기 등은 새로운 건강식품으로 각광받고 있는데, 이러한 음식들을 많이 섭취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함으로써 영양과잉과 운동부족, 공해 등으로 허약해진 현대인들에게 좋은 약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실제로 이 음식은 섭취하는 자체만으로써 몸에 이롭다는 것이 여러 학자들의 연구 결과 밝혀졌다. 셋째, 나라의 체통을 세워야 한다. 다소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앞으로 정부에서는 농민이나 생산자 단체에 지원을 해줄 수가 없도록 세계 무역기조가 바뀌어가고 있다. 쇠고기나 밀 등 주요 농축산물을 수입해서 먹지 않을 수사 없게 되었는데 정부가 법이나 관세장벽 등으로 외국 상품의 수입을 막을 수는 없게 되어가고 있는 길이다. 이러한 시점에서 우리가 나라의 체통을 세워나갈 수 있는 길은 우리의 입맛을 서구화 시키지 않는 것이다. 요즘 어린이들은 피자나 햄버거를 먹으면서 콜라를 마시는 것이 일상화 되어가고 있고 김치나 쌀밥 같은 음식에는 얼굴을 찌푸리니 이래서야 되겠는가? 그래서 일단은 우리의 맛을 되찾고 개발해나가면서 외국에서 생산되어 들어오는 식품의 소비를 줄여나갈 수 있다면 그것이 바로 애국하는 것이요, 미국 등 강대국의 수입개방 요구를 들어주면서도 외국식품의 소비량이 많지 않게 되니 나라의 체통을 세워나갈 수가 있는 것이다. 이렇듯 3가지 원칙을 정해놓고 시작한 식당사업은 개업 초기부터 엄청난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손님들이 별난 매운탕을 먹어보려고 줄을 서는 것은 거의 매일 일어나는 현상이었고, 심지어 어떤 날은 손님이 너무 몰려와서 간판의 불을 끄고 영업을 하는 날도 있었다. 사업 시작 초기에 ‘별난 매운탕’이라는 상호를 특허청에 등록 출원을 해놓고 있었는데 나의 사업이 잘된다는 소문이 나기 시작하자 주변의 우리 음식을 모방하는 음식점도 생겨났고, 체인점이나 분점을 희망하는 사람들도 많았다. 서초동, 역삼동, 분당, 안산 등지에는 이미 분점의 영업을 시작하였거나, 곧 영업을 시작할 예정이다. 내가 개발한 한국적인 별난 매운탕이 국민들에게 사랑을 받아서 이 음식이 한국을 대표할 수 있는 좋은 음식이 되기를 희망하며, 아울러서 대한민국의 어느 식당이나, 가정에서도 이 요리가 보편화되어 원래 내가 목표했던 농민을 돕고, 국민 건강에 도움을 주며 나라의 체통을 세우는 일에 우리들 스스로 힘을 합칠 수 있었으면 더 바람이 없겠다. 이 정신은 바로 내 자신이 견지하고 있는 기업 활동을 통한 보국정신이며, 앞으로 그 방향으로 기업 활동을 해나갈 것임을 분명히 한다. 검정고시를 준비하는 후배들에게 드리는 고언 지난여름의 가뭄과 이상고온 현상으로 북한산의 단풍은 유난히 고왔습니다. 사랑하는 아내와 두 아들, 딸 등 다섯 가족이 다함께 11월초 북한산을 다녀올 기회가 있었습니다. 아름다운 우리의 자연 속에서 잠시나마 시간을 내어 여유를 즐기면서 겨울날 풀빵장사를 하던 종로 거리의 풍경들도 머릿속에 스쳐갔습니다. 중국 대륙을 며칠씩 힘겹게 여행하면서 사업을 일구기 위해 노력하던 장면들도 떠올랐습니다. 그렇지만 저 자신도 아직 끝이 아니라 이제 시작이라는 각오로 다시 마음자세를 가다듬고 있습니다. 후배님들! 이 세상에서 가장 서러운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배고픔입니까? 아닙니다. 못 배운 것만큼 서러운 일은 없습니다. 용기를 내십시오. 정규 과정에서 못 다한 배움의 꿈을 꼭 이루어냅시다. 서러웠던 사연들은 가슴에 묻어두고, 더 큰 영광을 위해 매진합시다. 여러분들의 인생을 성공적으로 이끌어가기 위해서는 누구의 도움도 필요치 않습니다. 단지, 여러분 자신의 의지가 필요한 따름입니다. 의사든, 장군이든 혹은 성공한 사업가이든, 그 사람이 태어날 때부터 현재의 위치에 있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사람은 자신의 목표를 정해놓고 꾸준히 그 목표를 향해 정진할 때만이 성공을 거둘 수가 있습니다. 후배님들께서 검정고시와 대학을 마치고 사회에 진출하였을 때, 어떤 일을 하시게 되더라도 그 분야에서는 최고의 전문가가 되십시오. 그것이 바로 ‘성공’이라는 단어의 진정한 의미입니다. 제가 이런 글을 쓰게 되는 것 자체가 참으로 감격스럽습니다. 이 글을 마무리할 때 또 눈물이 흘러내렸습니다. 검정고시를 할 때, 정신적으로 성장할 수 있도록 격려를 많이 해주셨던 고려학원의 문상주원장님과 정경래 담임선생님, 정말 고맙습니다. 그리고 저의 곁에서 갖은 고생을 겪어가면서도 친구처럼, 때로는 비판자로서, 제가 이 정도로 성공할 수 있도록 도와준 아내에게 감사를 표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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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si0513 | : | 너무 훌륭하신 글에 답글을 달기에도 송구스럽군요...잘읽었습니다... (2005/04/11 09: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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