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주공산성(公州公山城)
충청남도 공주시에 있는 삼국시대 포곡식으로 축조된 백제의 성곽. 산성. 사적.
개설
금강변 야산의 능선과 계곡을 둘러 쌓은 포곡식(包谷式) 산성이다. 동쪽과 서쪽에 보조산성이 있는 것이 특징이다. 원래 흙으로 쌓은 것을 임진왜란 직후에 돌로 다시 고쳐 쌓은 것으로 보인다. 진남루(鎭南樓)·공북루(拱北樓) 등의 남문·북문은 남아 있지만 동문과 서문은 터만 남았다. 적에게 보이지 않게 누각없이 만든 암문(暗門), 성벽을 돌출시켜 쌓은 치성(雉城), 고대(高臺)·장대(將臺)·수구문(水口門) 등의 방어시설도 남아 있다.
내용
백제 당시에는 웅진성(熊津城)이라고 불렀으나 고려시대 이후에는 공산성이라고 불렸으며, 조선 인조 이후에는 쌍수산성(雙樹山城)으로 불리기도 하였다.
산성을 쌓은 연대는 문주왕 이후 성왕 이전까지 수도 웅진(熊津)을 수비하기 위하여 여러 성을 쌓았던 동성왕 때로 짐작되고 있다. 하지만 웅진 천도 이전에 이미 성책(城柵) 시설이 있었다는 견해도 제기되어 있다.
성벽의 둘레는 2.2㎞ 정도인데, 돌로 쌓은 부분이 약 1.81㎞이고, 흙으로 쌓은 성벽은 약 390m이다. 성벽은 2중으로 축조되었지만, 만하루(挽河樓)터 주변에는 동성왕이 쌓았다고 전하는 무너진 성벽이 있어서 모두 3중으로 축조된 셈이다. 이것은 규모를 축소하는 과정에서 생긴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산성 북쪽의 영은사(靈隱寺) 밖에도 높이 7.4m, 길이 43m의 성벽이 2중으로 축조되어 있는데, 돌 홈통인 석루조(石漏槽) 2개가 있고, 그 위에는 너비 2m의 수구문과 문의 주춧돌 2개가 남아 있다.
흙으로 쌓은 성벽은 백제시대에 축조된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후대에 고쳐 쌓았을 가능성도 있다. 높이와 너비는 일정하지 않은데, 대체로 높이는 1m이고, 너비는 아랫부분이 8.5m, 윗부분이 3m이다. 성 안에는 깊이 약 2m의 호(壕)가 조성되어 있기도 하다. 돌로 쌓은 성벽은 가운데에 흙이나 돌을 넣고 안팎을 돌로 쌓는 협축(夾築) 방식을 사용하여 축조하였다. 다만 일부는 속을 다지고 겉을 쌓은 내탁외축(內托外築)을 한 구간도 있다. 협축으로 쌓은 성벽의 윗부분 너비는 약 0.7m 정도이며, 안쪽에는 성벽이 무너지지 않도록 백회를 발랐다. 진남루 주변에 사용된 돌은주로 긴 네모꼴이나 네면이 같은 네모꼴인데 반해, 영은사 밖에 사용된 돌은 비교적 큰 편이다. 나머지 구간은 대체로 자연석을 이용하여 축조하였다.
산성의 주문(主門)은 남문인 진남루와 북문인 공북루이다. 진남루는 정면 3칸, 측면 2칸의 초익공(初翼工) 팔작지붕 누각이며, 공북루는 1603년(선조 36)에 옛 망북루(望北樓)터에 세운 것으로 고주(高柱)를 사용한 정면 5칸, 측면 3칸의 2층 다락집이다. 서문은 1975년에 보수공사하였을 때 높이 4.4m, 너비 5,6m, 길이 17m의 크기를 확인하였지만 받침 부분만 복원되었고, 동문도 발굴 결과 길이 6.45m, 너비 2.46m였음이 확인되었다. 1859년(철종 10)에 편찬된『공산지(公山誌)』에 의하면, 동문은 서문·남문·북문처럼 2층이었으며, 동쪽 외곽의 토성에도 약 4m 크기의 문터가 남아 있었다고 한다.
1980년에 발굴조사한 결과, 만하루는 조선 후기에 건립된 건물이며, 임류각(臨流閣)은 백제 때 세운 건물이지만 파괴된 뒤 그 터에 고려시대와 조선시대에 건물을 세웠던 것으로 밝혀졌다. 한편 장대는 정면과 측면이 각각 2칸인 건물이었지만 현재는 적심석만 남은 상태로,주변에서 백제시대의 기와 조각과 토기 조각이 출토되고 있다.
그 뒤 1983년에도 조사되었는데, 길이 10.23m, 높이 1.67m, 너비 13∼0.8m의 암문이 발견되었다. 현재 성 안에는 후대에 세워진 영은사를 비롯하여 광복루(光復樓)·쌍수정(雙樹亭)·명국삼장비(明國三將碑)·쌍수산정주필사적비(雙樹山亭駐蹕事蹟碑)·주춧돌·창고터·연못터 등이 남아 있다.
의의와 평가
공산성은 백제시대는 물론 조선시대까지 지방행정의 중심지였다. 곧 백제가 멸망한 직후에는 의자왕이 잠시 거처하였고, 이곳을 거점으로 나당연합군에 대항하는 백제부흥운동이 벌어지기도 하였다. 그 뒤 822년(헌덕왕 14)에 김헌창(金憲昌)이 일으켰던 반란은 이곳에서 진압되었고, 1623년에 이괄(李适)의 난 때 인조가 잠시 피난하기도 하였다.
참고문헌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
『여지도서(輿地圖書)』
『대동지지(大東地志)』
『건축유적 발굴조서 자료집-고대궁궐Ⅰ』고구려·백제·신라(국립문화재연구소, 2010)
『충남문화재대관』(충청남도, 1985)
『문화재대관』-사적편 하-(문화재관리국, 1976)
「공주 공산성에 대하여」(안승주,『문화재』17, 1984)
「백제웅진성과 사비성연구」(성주탁,『백제연구』11, 충남대학교 백제연구소, 1980)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 유네스코 세계유산 송산리 고분군
▼공주 공산성 일원
▼공산성 금서루 아래 통로 천정의 천정그림.
공산성은 백제시대는 웅진성-고려시대에는 공산성-조선 인조 이 후엔 쌍수산성으로 불렸었다 한다
다시 느끼지만 메마른 낙엽길보다는
꽃이 피거나 신록이 우거졌을 때,단풍이 예쁜 계절 좋을 때 중점적으로 여행하는 게 더 좋겠다
우리는 성곽길 2,6km를 다 걸어보려 했는데 중간 갈림길이 있어 쌍수정쪽으로 갔다
여기는 서남쪽 방향에 있는 쌍수정.
이리보니 낙엽길도 운치있쥬? 유쾌상쾌님
여자들은 털레털레 맨 몸으로 그냥 왔는데
노상님이 베낭을 짊어지고 오더만 커피 한잔씩 내 놓는다
워따메 달고 맛나라~한창 커피가 그리울때 참 잘 먹었시요^^*
넓고 평평한 곳은 곳을 보고 영아님은 뽕하기 좋겠다는 생각이 먼저 든단다 ㅎ
기와얹은 돌담이 난 참 정겹드라
영은사 절로 내려가는 길이지만 우린 걷기좋은 오솔길로 접어들었다
그 길에서 만난 단풍나무
단풍이 다 지고 없는데 애만 유독 생김새도 독특하고 예쁜 빛을 발하고 있으니 눈에 띌 밖에..
사람이나 식물이나 예쁘면 눈에 꽂히기 마련~.
와우~전경 죽이누만~
예전부터 와보고 싶었던 성곽길인데 기대보다 더 좋았다
잠업농가에 누에씨를 보급하기 위해 만든 저장시설.
2015년 7월에 유네스코에 등록된 공산성.
2021-02-03 작성자 명사십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