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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칼 호수, 중앙아시아에서 기후의 변화로 남하한 한민족의 역사
서양의 사학자들은 흉노의 오리진을 신라인으로 생각한다.
헝가리에서 출토된 토기와 경주왕릉에서 출토된 토기가 동일하기때문이다.박,석왕조후에 김씨는 금씨이며,스키타이인은 금과 여자를 좋아했지....훈족은 마상에서 몸통을 360도로 회전하며,그들 특유의 활을 쏘면화살은 로마군의 철갑을 뚫고 깊숙이 밖힌다. 훈족의 왕 아틸라는 유년시절 서로마에서 교육을 받았고,성장하여 동서,로마을 유린 했으며, 파리근교까지 공략 했다. 반도인은 저 넓은 툰두라지역을 횡단하여, 시베리아횡단 철도를 따라서 달릴 것이며,역사는 반복 할것이다? 여호와의 지시되로 갈데아우르를 떠나 가나안땅으로 이동한 아브라함 보다 더 일찍히 메스포타미아 평원을 떠난 유인원의 무리들이 코카사스 산맥을 횡단하여 흑해연안을 따라 우크라이나 대평원에 이르르 메머드 무리을 사냥하며 그가죽으로 매서운 북풍을 막으면서 한무리는 서쪽으로 이동현재 핀란드의 랩족이 된다 이무렵 네안데스탈인은 크로마뇽인에 의해서 멸족된 상태로 본다
기후 변화로 남하하가 시작한 한민족(韓民族 )
동쪽초원 지대을 횡단하여 볼가강을 넘어 우랄산맥 남부 준평원지역에서 수렵과 채집을 하던 호모사피언스의 무리들이 빙하기(약2만년전)를 맞이하여 대부분이 멸종하지만 서시베리아저지 예니세이강을 넘어 天海까지 진출한 무리들은 바이칼호 주변에서 매일 일어나는 여진 그리고 해저에서 분출하는 용암으로 따뜻해진 수온,대기 온도로 ,병풍처럼 드리워진 서쪽의 샤안산맥(3492m)의 석회동굴에서 기거하며 1만년이상 간빙기까지 종족을 유지 할수 있었고, 그 고유의 몽고리안의 모습을 유지 할수 있었다서쪽에서 의 유럽 코카시안의 혈통과 혼합되지 않는 한민족(韓民族 ),북방민족(몽고리안)이 탄생 한것이다샤안산맥은 아메리카 인디안 그리고12이( 夷)족의 고향이며 빙하기에 베링거 해협을 넘어 아메리카로... 1만오천년전 간빙기가 시작 되면서 12夷족이 남쪽으로 남하한다.
*夷(큰활을 쏘는 어진사람)
우리선조 의 고향산,샤안산맥제
4기 홍적세 최종빙기 1만오천년을 전후 하여 사얀산맥 그리고 天海(바이칼호)주변의朝蘚족 (순록의 먹이인 습지에에 자라는 이끼을 찿아 이동하는 유목민)의 인구가 증가 하면서전나무,잣, 가문비 낙엽송 푸른솔로 어우러진 타이가숲 하얀백사장,유리처럼 투명한 바이칼호를멀리하면서 서남쪽 저멀리 만년설이 아득히 보이는 한가이, 천산, 알타이산맥 북쪽 즉 천산북로로 이동서남부 靑藏고원(청해티벳트 해발 4000~5000m)에 정착 야크를 치며 한냉작물을 경작(총칭 西夷족)
*朝(아침조가 아니고 ~을 향하여가다) 蘚(이끼선)
빙하기 사얀산맥 골짜기를 떠나 바이칼호를 거쳐 야블로노비산맥 남쪽 아무르강 연안을 따라 베링거 해협을 넘어 북아메리카 남서부로 이주한 투바족(투르크계의 유목민)의 후손 아파치족의 결혼 축시
제목 : 두 사람
이제 두 사람은 비를 맞지 않으리라.
서로가 서로에게 지붕이 되어 줄 테니까.
이제 두 사람은 춥지 않으리라.
서로가 서로에게 따뜻함이 될 테니까.
이제 두 사람은 더 이상 외롭지 않으리라.
서로가 서로에게 동행이 될 테니까.
이제 두 사람은 두 개의 몸이지만두 사람 앞에는 오직하나의 인생만이 남으리라.
이제 그대들의 집으로 들어가라.함께 있는 날들 속으로 들어가라.
이 대지 위에서 그대들은오랫동안 행복하리라.
우리 선조가 도하했던 아무르(흑룡)강
한국,韓國 시대 (환국,桓國)
桓은 ‘韓’과 마찬가지로 순 우리말 ‘한’을 이두식 한자로 적은 것
날씨가 따뜻해지자 바이칼호 주변의 여러부족은 몽골초원(해발고도1600m)을 흐르는 셀렝가 강변을 따라올라 대초원을 뛰노는 야생말을 길드려 남쪽으로 올라가지만 서쪽은 불모지 고비사막, 동쪽은 톱니처럼 펼쳐진 인산산맥에 부딛쳐 약 1000m의 깍아지른 절벽 첩첩산들이 발해만으로 내려앉은 연산산맥 저 멀리 연초록의 화북평원과 유유히 흐르는 황토빛의 강으로 내려갈수 없어발길을 돌린 부족들은 강을 따라 동쪽 낮은구릉지대(550m)로 내려간다.
강가에는 붉은가지 버드나무(柳花)와 온갖 강렬한색의 크지않은 들꽃과 어울려 봄을 만끽하고 바람은 차거웠지만 햇쌀은 따갑게 피부를 자극한다.후빙기 초기 한반도의 임진강가에는 아열대동물인 물소가 노닐고 서해 바닷가에 열대 바닷거북이 알을 낳고, 반도 남쪽바다에 산호초가 자랄만큼 따뜻할 즈음 아무르강(黑龍江)을 따라 남하하든 부족들은 송화강과 만나는 지점에서 발이 푹푹 파이고,처음보는 파충류에 대부분 동쪽 연해주로 가는 길을 멈추고송화강을 따라서 남쪽으로 올라가니 끝없이 펼쳐진 둥베이평원(東北)그리고 하얀눈이 덥혀있는 신성스러운 백두(不咸)산,산,산 장백산맥이 남으로 달리고 있었다. 송화강가(하얼빈)에서 신석기인들이 운집하니 동아시아 최초의 神市가 열린다.
韓國,九黎 배달국 시대 (BC 3897 ~ 2333 1,565 년간)
신시(神市)배달국 시대가 열리고 수도는 태백산(太白山) 신시(神市)이다. 태백산은 지금의 중국 서안(西安)의 남쪽에 있는 태백산이다후에 산동성 태산근처로 옮겨 청구 배달국으로 이시대를 배달국 시대라 불림한편 아무르강 저지대를 이동하던 부족은 해안평원을 횡단하여 연해주 푸른바다를 쳐다보며해안선을 따라서 남하... 바다로 유입되는 여러줄기의 강을 보며 중간의 큰섬(鹿屯島)에서잠시 머무른다신석기후반 북반구의 온도는 급격히 냉각되고 유라시아 초원지대의 유목민은 굶주림과 추위로 살아가기 힘들어 집단으로 따뜻한 남쪽으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우크라이나 흑해연안의 인도아리안계의 힛타이트족(Hatti BC3000~1300)은 카스피해 서안을 따라 코카사스산맥을 넘어 메스포타미아평원을 침공 하려 했으나 청동기문화로 강성해진 앗시리아(BC2500~BC612)을 우회하여 타우루스산맥을 따라 소아시아,에게해 연안국을 통일, 이집트 람세스II세와 동맹하여 앗시리아를 견제한다. 힛타이트는 갑작히 사라지는데호전적인 지중해 해적(발칸반도 깊숙히 거주하든 야만족 도리아인의 후손)은 에게해의 미케네왕국을 멸망시키고 철기군으로 무장한 힛타이트군을 지구상에서 사라지게 한다암흑기 몇백년후 강력한 지중해 도시국가 트로이(Troy)가 뜨 오른다.
중앙아시아의 이란인,스키타이인,소그드인은 카스피해 동안을 따라 이란북부로 이동 하는데 이에 쫓긴 인도아리안부족은 두파로 나누어져 한부족은 서쪽,메스포타미아 북부 산악지대에 정착한다(쿠르드인)동쪽으로 이동한 부족은 아프카니스탄-인도 인더스강-간지스강으로 들어가 베다문명(BC1500~BC600)을 꽃 피운다.서아시아의 청동기문명이 유라시아 초원을 거쳐 거침없이 몽골고원 ,북만주로 들어오는데알타이 천산산맥 사이 타르바가타이산맥의 이밀강 주변에 크다란 틈새초원이 있어 가능 했든것이다. BC3000~2000경 티벳트고원- 돈황-하서주랑-서안(장안)-낙양 의 길은 신석기시대에는 개발도 되지 않았으며 목슴을 건 험난한 길 이었기에 청동-철기문화가 이쪽으로 들어올수 없었다추위와 굶주림에 지친 동아시아 몽골,북동만주지역 부족들의 대이동이 시작된다.
천산산맥
별이 떨어지다
서아시아및 인도로의 아리안족의 이동은 수럽민족의 이동이지만 신석기말 발해대륙은 온대기후에서 급작스런 홍수로인한 해수면의 상승 한냉한 기후로 농경사회를 영위한던 부족들의 대이동이 있었다신석기말 중원은 동이제족의 무대 이었으며 모계씨족사회를 영위한던 토착민인 지나족(월족)은 광동지역에서 복건,절강 지역으로 장강유역에서 쌀농사를 지으며
일부 중원으로 이동하여 동이족장들의 지배하에 있었다.
사마천의 사기에서
요동지역이 늪지대로 변하고 둥베이평야가 목초지로 변하자 동이족족장 치우 蚩尤(뿔이달린 청동투구쓴 전쟁의 신)는 부족을 거너리고 산동성 황허하류로 이동하여 토착민인 묘족(동이족의 한부류)의 족장이된다 (chiefdom) 섬서 황토고원(낙양분지)의 토착부족의 족장이 된 헌원(산동곡부가 고향인 동이족)은 황허중류의 족장인 炎帝신농씨의 부족연맹과 연합하여 하북지구 탁록전투에서 치우부족을 쳐 부슨다.
그후 사마천은 황제헌원이라 사기에 저술하며 그백성을 華夏족(만리장성 이남에 거주하는 아름답게 불타 오르는,번영하는 중원사람)이라 칭하며 漢무제이후 漢족으로 명한다三皇五帝는 모두 동이족 이지만 이들의 후손이 건국한 殷(상)나라(state)는西周 무왕(화하족)에게 멸망하고 춘추전국시대까지 그 갈등이 이어진다송화강변 둥베이평야기후변화에 의한 발해대륙의 동이족이 중원으로 대~이동후 400년이상 둥베이평야는 목초지로 버려져 있었다.
단군조선시대가 열리다
단군 王儉 조선시대 :송화강 아사달(하얼빈)시대: 초대 단군왕검∼21대 소태(蘇台) (B.C.2333∼1286 : 1048년간)
기후가 점차 회복하자 송화강변 하얼빈에 王儉조선(아사달시대)을 개국 하지만 바람기운이 냉기가 돌고 , 들판의 기세는 광활하게 트였으나 토양이 척박하여 농사짓기에 부적합하고, 강줄기가 북쪽으로 흘러 교통이 불편하여 10년후 심양(봉천)으로 천도한다.
백악산 아사달시대 : 22세 색불루(索弗婁)∼43세 물리(勿理) 색리국, 탁리국 시대 라고도 함 (22대 단군 후 색불루 단군 시대)(B.C.1285∼426 : 860년간)
왕검조선은 貊(사냥족)인 색불루의 혁명으로 단군이 되어 수도를 장춘(상춘)으로 천도한후 전성기를 맞이한다.(BC1984~1286)
황허강 상류까지 진격하여 은(상)나라를 제후국으로 만든다이때 왕검조선의 영토는 番汗(북경~요하사이) 진한(만주중북부,요동반도) 馬汗(한반도 황해도 이북)에 비왕을 두고서 통치했다殷(BC1766~1122)폭군주왕은 애첩달기와 더부러 폭정을간하는숙부을비참하게 참살하니 그동생 箕子와 주왕의 이복동생 미자는 산동반도로 은둔 한후 西周(BC1122~1027?256) 개국후 무왕이 미자를 송나라 제후로 봉한후 기자는 송나라에 은둔한다(기자는 조선에 간적이 없다
*사마천의 실수*))유목과 반농반목하던 흉노는 bc2177년 3대 단군 가륵이 단군자리를 차지하기위해 반란을 일으킨 동생 색정을 약수(흑룡강)흉노지역에 보낸 것이 최초입니다. 색정은 흉노의시조가되어 단군족을 괴롭히게 됩니다.西周가 戎(흉노족의 선조)의 공격으로 낙양에서 동쪽으로 천도후(東周) 그 통치력이 급격히 떨어지면서 중원의 소국(chiefdom)이 1000개나 우후죽순처럼 일어나고 150개로 통합되고 춘추오패(晋,초,오,월,송,秦)이 등장하나, 춘추시대(BC722~481) 晋나라가 韓,위,조나라로 분열되어 BC403~221년 사이에 전국7웅의 전국시대가 전개된다한편 발해대륙의 왕검조선은 BC425년 융안 수렵족 우화충의 반란으로 심양(백악산 아사달)에서 요하유역 장단경(開原)으로 천도하여 해성을 개축하여 평양성이 라 명명하고 국호를 대부여라 한다.
그러나 통치하에 있는 胡(유목족) 貊(사냥족)이 이탈하여 약화되자 연쇄적으로 번조선 비왕 읍차箕侯가 스스로 왕이라 하고 독립(BC296)하자(安市城근방) 대부여 단군은 스스로 왕권을 포기하고 산속으로 들어가 은둔한다
*사마천은 번조선의 기씨정권을 잘못, 은나라귀족 기자조선으로 표기 하므로서 일제 식민사관이 이를 이용한것이다*箕씨정권의 번조선은 燕(BC1027~222,선비-퉁구스)의 장군 진개의 공격으로 번조선지역 대부분(난하서쪽 5개군)을 침략 당하고 요하 동쪽으로 수도를 옮긴다진시황의 통일후 중원의 인구는 약 500만명 정도로 북쪽에서 침입하는 흉노족을 막는데만 관심이 있었지
동쪽 발해대륙에는 무관심 이였다. 진시황의 폭정으로 동이족 국가 제,조,연나라 유민이 수천명 번조선(기씨조선) 으로 들어 닥치기 시작한다.
발해만으로 뻣어내린 만리장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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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은 산을 뽑을만 하고 기운은 세상을 덥을만 하구나 때가 불리하니 오추마 마져 가지 않는구나가지 않으니 난들 어찌하리 우미인아! 우미인아! 너를 어찌하리
(해하결전에서 項羽 BC232~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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漢고조 통일후 燕왕,노관이 흉노로 달아나자 위협을 느낀 관리들중 위만이라는 자가 모양새는 상투를 틀고 만夷복장을 하구서 패수(난하)을 건너와 연,齊,조나라 유민을 규합하여 그 세를 불리매
번조선왕 箕準이 그를 외신으로 임명하여 점차 왕을 위협하는 수준에 오르자 번조선의 각료 最리라는 자가 군사 1000명을 거느리고 몰래 동쪽 한반도로 건너가 청천강(살수)이남에 낙랑(浪=國)을 건국한다. 위만은 기만술로 번조선왕 기준에게 흉노족을 친다는 명분으로 군사를 일으켜 번조선(속칭 기자조선)을 멸망 시킨다.
番조선왕 기준은 무리 수천을 거느리고 한반도 막(마)조선으로 들어갔으나그 토착 韓무리에게 전사하고 그 부하 탁장군이 한수를 넘어 홍성,금마(익산)에 정착하여 中 마한(월지,목지국)을 일으킨다.衛滿정권은(BC194~180) 漢武帝로 부터 흉노를 막는다는 조건으로 군비를 받아 주위 소읍들과 진번,임둔을 복속 시킨다.
위만은 우거라는 자에게 축출되고 자칭 우거왕이라 하며 한무제에게 반기를 드매 한무제는 누선장군 양복과 좌장군 순체로 하여금 수군 7000 육군 6만으로1년간의 전쟁으로 우거왕을 살해하고
한사군을 요서 安市근처에 주둔시킨다한사군(낙랑,진번,임둔,현토)가 요서에 들어선후 발해대륙과 한반도는 열국시대로 들어선다(북부여,동부여,북옥저 동옥저 ,낙랑 ,졸본부여,가야연맹 중마한(목지국),낙랑,금성,읍루(숙신)
번조선왕 기준의 무리가 거주했던 토성,익산금마
익산 왕궁리;마한의 도읍지 ,고구려 멸망후 많은 유민이 이주했다.
前漢14대 평제의 외척 왕망이 정권을 찬탈하여 新이라는 나라를 세우고 15년만에 멸망하고 중원은 혼란상태에서 남양호족출신 유수가 곤양전투에서 승리한후 後漢광무제로 즉위하면서 북흉노(일명 훈족)는 아랄해로 쫒겨 점차 흑해연안으로 흘러가버리고 남흉노는 대부분 선비족에 흡수되어 버린다한편 흉노가 사라진 내몽골지역과 시라무둔강유역은 대싱안령산맥 깊숙히 알선동에서 돼지를 키우거나 수렵을 하던 선비-퉁그스의영역이 되고 남하하여 요하유역으로 정착한다선비족은 점차 강성해지자 고구려와 북부여를 침략하고 그 후손은 북중국의 통일왕조 北魏(AD439)를 일으킨다.
삼국시대
고구려는 대싱안령산맥 동쪽 기름진 둥베이평야의 북부여 후국으로서 졸본부여 즉 고구려의 건국초기는 빈약한 농경지로 배고품을 채우려는 주위국가의 기습 그리고 약탈의 시작 이었다.後漢광무제는 AD22고구려3대 대무신왕11년 후한요동태수를 선봉으로 고구려군을 단단대령동쪽으로 밀어 붙친다 . 단단대령(길림에서 무순방면의 만주중앙을 길게 가로지르는 산줄기)또한 고구려의 팽창을 견제 하기위해서 AD32 낙랑국(대무신왕의 서자 호동왕자가 낙랑공주를 눈물짖게하고 뺏은나라)의 우리수 소마시를 협박하여 살수(청천강)이남에 요동에있는 낙랑군의 속현 낙랑현을 세우니 함경도의 동옥저도 고구려로 부터 이탈한다.
*퉁그스; 돌궐어로 돼지를 키우는 민족
둥베이평야와 몽골고원은 대흥안령산맥을 경계로 한다중원의 통일과 혼란에 따른 발해대륙과 한반도의 정세는 시시각각 변화했다 後漢光武帝에 의한 흉노족의 이간정책으로 북흉노는 카스피해 흑해지역으로 이동했지만 남흉노는 노예 혹은 왕실의 불모로 잡혀 세대가 흘러갔다.흉노가 떠난 공백지역(내몽골,요하강변)을 선비-퉁그스가 차지하고 고구려(5대 모본왕)와 동맹하여 북경근처 12개성을 공략 고구려성을 쌓았다.그러나 선비는 후한의 이간전술로 고구려를 여러차례 공격한다(6대 태조왕은 선비연맹및 후한군에게 단단대령서쪽을
완전히 빼앗긴다(AD53~146)AD184년 황건적의 란으로 後漢의 혼란상태는 극에 달했다.
이때 황해도 둔유현 황지 대방고지에 청명한 가을 치우기성이 각항에 나타났다즉 퉁그스-예맥족의 조상인 치우천왕의 꼬리해성처럼 뒤가 꼬부라진 깃발이 나타났다(부여군의 깃발)이는 後漢말 요동태수인 공손도(선비족)가 혼란기를 틈타 낙랑군을 흡수하고 산동반도를 공격 평주 17개군 170개 현을 차지한후 현도태수 공손탁은 그 지배영역에 있는 부여왕 위구태을 사위로 삼아 아들 공손강과 함께 한반도 대방고지를 공격 대방군을 설치하고 위구태는 부여 기마군을 이끌고 한반도 남쪽의 여러소국을 공략한다이때 대방고지에서 南夫餘(仇台백제)를 건국했다(AD191)AD205년 仇台백제는 임진강이남 溫祚백제왕조(온조의 형인 沸流는 인천지역에 비류백제를 세우지만 농사가 되지않아 백성들이 대부분 온조백제로 이주하여 결국 자살한다)의 왕통을 끊고
구태백제의 왕족을 비왕으로 임명한다(5대 초고왕때 부터)구태백제는 수도를 固麻성(웅진성,공주)에 두고 홍성,금마 마한을 정복한후 신라와 동맹한 아라가야를 제외한 7가야를 정복한후
수군은 임나가라(대마도),야마대연맹(AD97~103년에 일본열도에 세운 소국연맹)의 신공왕후를 비왕으로 복속 시킨다 .
그리고 나머지 정복지는 담로(행정구역장)을 두었다.AD208 구태백제과 야마대연맹(왜)연합군은 내해이사금13년 신라을 공격한다구태백제는 실존의 우리역사 입니다온조백제의 왕계표에서1 온조2 다루 3기루 4개婁까지 고구려 고주몽의 후처 소서노(召西努)의 2남 온조의 왕계이고 5대 초고(肖古)부터 17대 아신왕까지(AD392)는 구태백제 왕족입니다16대 진사(辰斯)왕은 AD392에 광개토대왕에게 죽고 구태백제는 금강으로 상륙한 고구려 수군에게 멸망하고 구태백재의 왕이 일본으로 도망가 응신조 倭의 응신천왕이 됩니다구태백제의 역사를 일본식민사관이 감추어버려 우리는 자세히 모릅니다AD220년 조조가 사망한후 조비는 後漢헌제로 부터 강제로 양위를 받아 魏문제로 등극한후 촉漢은 AD223년 황제유비가 관우의 패사에 격분,이릉전투에서 대패한후 병사하고 오장원에서 사마중달과의 긴전쟁으로 재갈량이 병사한후 환관 황호의 첩자질로 황제 유선은 魏군의 대공격에 멸망한다(AD263)사마예는 사마중달의 손자로 魏원제에게 촉한과의 전쟁의 책임을 물어 멸망시키고 西晋을 건국한다.(AD265~316) 吳나라는 손권의 손자 손호의 공포정치로 약화되어 西晋에 멸망한다.(AD280)
중원대륙을 통일한 西晋은 초기에는 검소한 국정관리를 했지만 귀족특권을 옹호하는 정책으로 청류파지식인의 위선적인 사치와 방탕한 생활과 외척 가씨와 양씨의 권력투쟁은 八王의 싸움으로 이어지며 급기야 노예로 팔려왔거나 왕실에서 불모로 성장한 유목민족의 민족의식을 촉발시켜 영가의 란으로 이어진다.西晋이 멸망후 北魏가 북중원을 통일(439)하기까지 130년간 오호16국시대가 전개되는데 그시작은 남흉노의 후손 유연이 西晋으로부터 오부선우로 책봉된후 흉노군 5만을 거느리고 산서지방 태원에서 北漢을 건국한다(AD308)
그 아들 유총이 낙양을 함락시키고 인구1/2을 죽이고 西晋을 멸망시키고그손자 유요가 국명을 前趙로 고치니 북방유목민족 선비.갈(흉노별종)저, 강(티벳트계)의 무대가 된다.
北漢;남흉노 유연
前趙;남흉노 유요 漢족 위주로 정책을 펴 토박이 흉노의 반감을 산다.갈족(흉노별종)인 석록에게 피살
後趙;갈족 석록의 아들 석호가 지나치게 흉노식으로 정치. 후손의 골육상쟁으로 漢인 염민에게 멸망(319~351)
염魏; 漢족 염민 제위 3년 漢족을 부추겨 흉노족 20만명을 주살하니 서쪽으로 도망가 훈족과 합류한다선비족 모용각에게 멸망(353)
前燕;선비족 모용황은 東晋의 후왕 칭호를 버리고 낙양을 점령 스스로 後燕왕 이라 함(AD364)
前晋;돌궐-몽고계의 저족 부건이 건국. 아들 부견이 前燕을 멸망시킴부견은 민족을 초월하여 하나의 왕조를 지향했으며,고구려와 동맹을 맺고불교를 전달했고,
북중국을 통일한 前晋은 100만대군으로 東晋과비수결전에서 대패 .혼란을 틈타 강족출신 요장이 부견을 모살(351~394)
後晋;강족 요장 그아들 요흥은 東晋의 명장 유유(훗날 宋건국)에게 멸망
後燕;전연의 왕족 모용수 서연을 흡수하고 동북부를 장악하고 後晋과 대립광개토대왕이 즉위하면서 고국원왕의 원수인 연나라을 침공하여 대승을 거둔다
만리장성 밖의 같은 선비족인 탁발씨가 산서성 북쪽에서 처들어와 평성에 수도를 두고 代라는 국명으로 後燕을 멸망시키고 북중원을 통일탁발규는 국명을 北魏로 바꾼다. 또 그들의 후예들은 수, 당왕조을 건립한다AD208년 구태백제와 야마대연맹왜 기마군이 가야땅을 통해서 육로로로 진격 했으나 내해이사금13년(신라10대왕)의 군사가 막았다. 조그만 소국이 남부여(구태백제)의 기마군을 막았다니?유라시아대륙 가장 변두리 푸른동해안을 끼고 작은 서라벌에서 천년의 신라가 탄생했고 현재까지 한반도의 패권을 잡고 호전적인 이유??한반도의 산맥과 강은 백두대간을 정점으로 반도에 어울리지않은 높은산맥과 큰강으로 단군이래 차단되어 삼한시대에는 진한,변한의 말과 마한의 말이 달라 소통이 힘들었다동해안을 따라 북상하면 두만강이 나타나나 하구는 여러개의 개울이있어 기마군이 충분히 녹둔도로 넘어 갈수 있으며 연해주에서 두만강변을 따라 송화강변을 따라 흑룡강(아무르강)변을 따라 몽골초원 바이칼호로 들어가는 오르콘강변에 접어들면 넓은 몽골초원에서 저멀리 눈덥인 알타이,천산산맥이 가로막아 초원을 절단한것 같지만 자세히 보면 타르바카타이의 이밀강주변에 커다란 틈새가 있어 카자흐스탄의 초원지대 나타나며 아랄해 주변으로 통해 카스피해연안 그리고 흑해연안을 따라 항가리 평원 도나우강가에 도달했다.
영남지방의 지배세력은 주로 해양세력과 북방의 기마민족에 의해서 부족을 형성하고 국가의 형태로 발전했다. 북방의 기마민족이 동해안을 따라서 영남으로 침입할수는 있으나 500m 이상의 소백산맥을 통하여 또한 천해의 방어선 낙동강을 도강하여 침입하기는 힘들었다예를 들어 번조선왕 기준이 위만에게 패하여 압록강을 넘어 막조선의 한무리에게 전사하고 그휘하 장군이 익산 금마로 배를 타고 내려 갔을 정도로 남쪽 영남으로 내려가기는 힘들었다
1.영남의 구석기인은 주로 아무르강변의 유목민(후에 숙신,읍루->말갈->여진)이 두만강을 넘어 동해안을 따라 영남지방에 들어왔다
2.진시황 만리장성 축조시 주로 산동성의 유민
3.고조선유민 박혁거세 무리가 동해안을 따라 감포읍 나정리 방면에서 서라벌로 들어와 BC57년 斯盧(사로)국 건국
4.석탈해 울릉도 동남쪽 오키제도쪽에서 도래한 아이누족 (만리장성 축조를 피하여 가야지방에 도래한 소호금천씨 후손의 무리가 구주 왜로 넘어가 왜의 본토로 침략, 건국과정에서 토종인 아이누족을 대학살로 인한 망명인)의 무리가 감포읍쪽에서 처들어와 박혁거세 패위된지 6개월만에 죽음(AD57)
5.前漢을 멸망시킨 新(AD8~23을 건국한 왕망이 김알지(경주김씨의 시조)의 이모부 김알지의 조상은 C122 한무제는 곽거병으로 하여금 감숙지방의 이치선우 휘하의 혼야왕과 휴도왕의 흉노군을 대패시키자 책임을 물어 두왕을 죽이려 하자 투항을 망서리는 휴도왕을 혼야왕이 죽이고 휴도왕의 큰아들(일제) 동생(윤) 어머니가 한무제의 포로가 되나 발탁되어 한무제에게 제천금인(김씨 성을 하사 받는다)
즉 김일제가 된다 일제는 거기장군이 되어 한무제의 경호를 맡는다김일제의 5대손 성환왕이 김알지이며 김일제의 동생 김윤의 5대손이 김수로가 된다김일제의 후손은 後漢광무제에 의해서 철저히 제거 되는데 대부분 몽골로 도망가 왕씨로 살았으나 한반도 김해 제주도에 왕망시대의 화패 五銖錢이 대량 발견.왕족이 대부분 김알지의후손이다
6.AD342 고구려 고국원왕 시기 요서있던 東晋의 후왕인 선비족 모용황의 특공대 장군 왕우,장사외 만여명의 기마병이 고구려군을 피해서 개마고원 함흥평야를 거쳐 동해안을 따라 신라에 침입 법흥왕 募泰가 그후손이다모용황은 고구려 환도성을 유린하고 고국원왕의 부인과 어머니를 인질 잡아가고 미천왕의 시신까지 파간다.
어머니는 고구려가 前燕의 후왕이 되는 조건으로 15년만에 귀국한다모용황은 내몽골의 우문씨를 복속시키고 염민魏를 멸망시키고 낙양에 도읍 前燕을 건국한다(AD364)고구려군 주력 5만 (고국원왕의 동생 고무장군)이 모용황군대 주력군(4만)이 평원지대로 침략 할것으로 예상하고 대기했으나 모용주력군은 고국원왕 경호군 1만이 경계하는 험준한 산악지대로 공격하여 환도성은 유린 당한다. 모용황 특공대 1000기는 평원의 고구려주력군(4만)을 피해서 한반도로 도망가 서라벌로 침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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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어 해석
홍적세 [洪積世, Pleistocene Epoch]
지질시대 신생대 제4기의 전반의 세를 말하며 플라이스토세, 갱신세, 최신세라고도 한다.
화산활동이 뚜렷하게 나타나고 인류의 조상이 나타난 시기가 홍적세이다.
[출처] 홍적세 [洪積世, Pleistocene Epoch ] | 네이버 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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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하의 결전 [ 垓下- ]
중국 진(秦)나라 말기 유방(劉邦)과 항우(項羽) 사이에 벌어진 결전. 해하는 현재의 안후이성[安徽省(안휘성)] 링비현[靈璧縣(영벽현)] 남동부의 지명이다.
시황제가 죽고 군웅(群雄)이 할거하자 항우와 유방이 연합하여 진나라를 멸망시킨 뒤, BC 206년 항우는 초왕(楚王)이 되어 패왕(覇王)이라고 자칭하며 유방을 한왕(漢王)에 봉하였다. 이에 불만을 품은 유방과 항우 사이에 싸움이 벌어져 한·초 전쟁이 시작되었다. BC 202년, 유방은 병력이 피폐하고 식량도 부족한 초군을 추격하여 해하에서 포위망을 구축하였다.
항우는 <사면초가(四面楚歌)>를 들은 뒤 무운(武運)이 다한 것을 깨닫고 세상을 하직하는 <해하가(垓下歌)>를 지은 다음, 일전을 벌였으나 유방에 패하였다. 이 싸움에서 승리한 유방은 한나라를 세워 황제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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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화충(于和沖)
우화충(于和沖)은 고조선의 사냥꾼이였다. 43세 단군 물리 36년-기원전426년-에 일어난 융안(隆安)의 우화충(于和沖))은 사냥꾼 출신으로 장군이라 칭하고 수만명을 이끌고 서북 36군 함락하였다. 진한은 병력을 파견했으나 이기지 못하였다. 이를 진압한 백민성 욕살 구물이 그 공으로 제44대 단군이 되었다. 물리 단제시절에 학문이 번창하기도 하였으나 임금 말년에 이르러 우화충(于和沖)의 난으로 나라가 쇠하여 장자에게 세습치 못하는(제21세 단군 소태왕검에 이어) 두 번째의 왕이 되었다. 43대 물리 단군 때 사냥꾼 우화충이 반란을 일으켜 단군이 해성으로 피난을 갔다 거기서 붕어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