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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고향 마을의 전설과유래
(1,예안면 2,도산면 3,녹전면 4,와룡면)
1,예안면
계곡리는 안동군 임북면에 속하였으며 계일, 또는 계곡이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갈마곡, 전시곡, 장성백리를 병합하여 계곡동(리)를 이 되고, 193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월곡면에 편입되었다가 1974년 안동댐 건설에 따라 월곡면이 폐지됨으로서 예안면에 속하였으며, 1995년에는 안동군을 안동시에 통합함에 따라 안동시에 속하게 되었다. 현재 계곡리는 압시골, 찰앞시골, 웃게일, 장성백이 등의 마을로 구성되어 있으며, 가구수는 30여호이다.
이 마을은 구한말 예안군 동하면의 지역으로서 구다니 또는 구단이라 하였는데, 왜정초인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지갈동을 병합하여 귀단동(리)이라 하여 안동군 예안면에 편입되었는데, 1973년 안동댐이 생기면서 수몰지구가 되었으며, 1995년 안동시와 안동군이 통합되면서 안동시에 속하게 되었다. 귀단리는 행정구역상 1리와 2리로 나누어지며 가구수는 60여호를 헤아린다. 귀단 1리는 고통, 와운데, 지촌으로 이루어지며, 2리는 가래실, 인겔, 금곡, 한자골, 새마을 등의 마을로 구성되었다.
옛날 안동군 임북면에 속한 지역이었으며 구렁이 있으므로 구렁, 또는 구룡방이라 하였다.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동달리, 양옥동을 병합하여 구룡동(리)이 되고, 1934년 행정구역 변경에 따라 월곡면에 편입되었다가, 1974년 월곡면이 폐지됨에 따라 예안면에 편입되었으며 1995년에는 안동군을 안동시에 통합함에 따라 안동시에 속하게 되었다. 현재 구룡리는 동다리, 원구룡, 소월, 양옥, 원심이, 한바우 마을로 구성되었으며, 가구수는 약 100호이다.
아마리 아마리골 아휴리(阿休里) 조선 숙종 15년 昌寧人 曺圭承이 개척했다고 전해지며, 연대 미상이나 채정승이라는 분이 벼슬을 하여 이 곳을 지나다가 경치가 좋아 쉬어갔다 하여 아휴리로 불리어졌다고 하며 지금은 아마리로 부른다. 선암골 선암동(仙岩洞) 永川 李氏인 李公이 전사했는데 그가 탓던 말과 말방울이 이 곳에 돌아 왔다. 이에 仙岩堂을 지어 그의 영혼을 모셨으므로 동명을 선암골로 부르게 되었다.
수몰전 이 마을은 원래 영양남씨(英陽南氏)와 흥해배씨(興海裵氏)의 세거지(世居地)로 조선조에 학행으로 군위훈도(軍威訓導)에 천거된 영양인(英陽人) 남첨(南 ) 선생이 이곳 산수의 아름다움을 취택(取擇)하여 와룡면 주촌(周村)에서 이거하여 정착하였다고 전해진다. 이 마을은 산천의 그윽하고 아름다움이 마치 무릉도원(武陵桃源) 같고, 복숭아나무가 많은 곳이라 하여 도목(桃睦) 또는 도목촌(桃睦村)이라 불렀다고 한다. 전하는 말에 따르면 어떤 점장이가 와서 마을 주위에 복숭아나무가 있으면 해롭다고 하여 도목촌(道木村)으로 개칭했다고 한다. 또 도목(道睦)이라고도 하는데 이는 남첨 선생이 강학하던 장소를 기려 후손들이 8칸의 정사(精舍)를 지은 뒤 편액을 '도목정사(道睦精舍)'라 한데서 유래한 것으로 '도(道)로서 일족을 돈목(敦睦)하게 한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또 영가지의 부북(府北) 임하현(臨河縣)에 실린 도목촌 부분을 보면 '도목촌은 현(縣)의 북쪽 35리에 있으며 본부(本府)에서 35리 떨어진 곳에 있는 동네인데, 이 곳에는 100여자 되는 석벽(石壁)이 있어 이를 '검암(儉巖)'이라 불렀으며, 그 바위 위가 평평한데 대(臺)를 지어 이름하기를 '임연(臨淵)'이라 불렀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관찰사 배삼익(裵三益) 공이 여기에다 대를 짓고서 임연이라 자호하였는데 관찰사의 선군(先君) 증참판(增參判) 배천석(裵天錫, 1523∼1573) 공이 처음 와서 살았다'고 기록되어있다. 또 배천석 공이 서후면 금계(金溪)로부터 도목촌으로 이거한 이래 공의 아들인 임연재(臨淵齋)가 퇴계 선생의 문인으로 문장과 글씨가 뛰어나고 벼슬이 황해관찰사에 이르렀으므로 그 친우인 백담(栢潭) 구봉령(具鳳齡) 선생이 이 마을의 이름을 '도맥(道脈)'으로 부르기를 권했으나, 공은 과분하다고 하여 '도목(桃木)'으로 정하였다고 하는 이야기도 전한다. 도목리는 행정구역상 안동군 임북면의 지역에 속해있었으나 왜정초인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신기리와 동후면의 구미동, 신기동의 각 일부를 병합하여 도목동(리)이 되고, 1934년 행정구역 변경에 의하여 월곡면에 편입되었는데, 1973년 안동댐 건설로 말미암아 도목촌의 일부가 수몰되고, 나머지 일부는 1974년 월곡면이 폐지됨에 따라 예안면에 편입되었으며, 1995년 안동시와 안동군이 통합되면서 안동시에 속하게 되었다. 현재 도목리의 가구수는 3개 반에 약 30호로 가래골, 구미, 오미골 등의 마을에 나누어져 있다.
도촌리는 예안군 동상면의 지역에 속했으며 길골, 또는 질골, 길곡(吉谷), 도곡(道谷)으로 불렀는데 그 유래는 옛날에 물편 사람들이 영해에서 소금이나 해산물을 지고 영양을 거처서 장갈령(長葛嶺)을 넘어 이 마을을 지나 예안까지 내왕하였는데, 장갈령에서 이 마을로 뻗어 내려오는 길을 길골이라 하였으며, 한창 때는 3, 40명이 이 길을 이용하였다고 한다.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지통마, 톳골, 오미골, 수락골, 고사리골, 평지마, 사래실을 병합하여 도촌동(리)라 하여 안동군 예안면에 편입되었는데 마을 사람들은 피박 혹은 피박골로도 부른다. 피박골로 부르는 이유는 사래실 앞산에 고지박을 닮은 명당이 있는데 그곳을 껍박이라 하며 한자로 쓰면 피박(皮朴)이 되기 때문이다. 현재 이 마을은 사례실, 평지마, 지통마 등의 작은 마을로 이루어져 있으며 가구수는 약 40호이다.
이 마을은 예안군 동상면의 지역에 속했으나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원학리, 부모리, 장갈리를 병합하여, 동쪽에서 서쪽으로 흐르는 내(川)의 뜻을 따서 동천동(리)이라 하여 안동군 예안면에 편입되었으며, 1995년에는 안동군을 안동시에 통합함에 따라 안동시에 속하게 되었으며 가구수는 28호이다
미질리는 구한말 안동군 임북면의 지역으로서 미지리, 또는 미질촌이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구계, 벌탄, 벽지곡, 동파를 병합하여 미질동(리)이 되고 1934년 행정구역 변경에 의하여 월곡면에 편입되었다. 월곡면의 중심지가 되어 면사무소, 지서, 우체국, 국민학교, 고등공민학교, 시장 등이 있었으나 1973년 안동댐 건설로 말미암아 일부가 수몰되고, 나머지 일부는 1974년 7월 1일 월곡면이 폐지됨에 따라 예안면에 편입되었으며 1995년 안동시와 안동군이 통합되면서 안동시에 속하게 되었다. 미질리에 속한 마을은 현재 움터 마을 하나 만 있으며, 가구 수는 9가구로 와룡면 절강리와 더불어 안동시에서 가장 적은 가구수가 살아간다.
이 마을은 고려 중기부터 조선말기까지 시행해 온 역원공영제도(驛院公營制度)에 의하여 예안현(禮安縣)에 속했던 부라원(浮羅院)이 있었으므로 부라원, 부라리라 하였다. 행정구역상 예안군 동하동 지역에 속해 있었으나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청천동과 의동면의 분천동 일부를 병합하여 부포동(리)이라 해서 안동군 예안면에 편입되었으며, 1974년 안동댐이 건설되면서 수몰지구가 되었으며, 1995년 안동시와 안동군이 통합되면서 안동시에 속하게 되었다. 부포에 오래 전부터 살았던 성씨로는 호군(護軍)으로 있던 안동권씨(安東權氏) 경력(經歷) 권간(權簡)의 상세(上世)로부터 살았다고 하며, 그 후 금숙(琴淑)이 권간의 사위가 되어 이 마을에 살기 시작하였으며 조금 뒤에는 진성이씨(眞城李氏)들이 입향하였다고 한다. 수몰전 부포리는 넓은 들이 기름진 100여호의 큰 동리로 산천이 아름답고 들이 넓어 비교적 생계가 넉넉해서인지 예부터 수(壽)를 누리는 사람이 많아 수향(壽鄕)이라 부를 만큼 장수를 누리는 사람이 많았다. 현재 부포리에는 역동, 가늠골, 호사골, 햇골 등의 마을이 남아 있으며 가구수는 30여 가구로 예안면에서 적은 수에 속한다.
예안군 동상면에 속하였으나 왜정초인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수늣골, 성황리, 오도락, 원음, 고감을 병합하여, 성황리 앞에 세 내가 합하여 흘러가므로 그 뜻을 따서 삼계동(리)이라 하여 안동군 예안면에 편입되었으며 최근에는 안동시와 안동군이 통합되면서 안동시에 속하게 되었다. 삼계리는 현재 수능골, 성황, 오평, 원음, 고감, 이들리의 작은 마을로 이루어져 있으며 가구수는 약 100가구이다.
예안면에서 가장 북쪽에 있으며 봉화군과 닿아 있다. 예안군 동상면의 지역에 속했으나, 왜정초인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고죽, 정자곡, 구통, 두곡, 산양평, 점곡과 봉화군 재산면의 남면리 일부를 병합하여, 산성(山城) 남쪽이 되므로, 그 뜻을 따서 신남동(리)이라 하여 안동군 예안면에 편입되었으며, 1995년에는 안동시와 안동군이 통합되면서 안동시에 속하게 되었다. 신남리는 현재 정자골, 선양바들, 자운, 높은데, 구티미, 점곡 등 6개의 자연마을로 이루어져 있으며 가구수는 70여호를 헤아린다.
예안면의 동북쪽에 위치한 마을로 안동군 동상면에 속해있었으나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청구리, 도동리, 전두리, 건천리, 송곡을 병합하여 동계천(東溪川)의 뜻을 따서 인계동(리)이라 하여 안동군 예안면에 편입되었으며 근래에는 안동시와 안동군이 통합되면서 안동시에 속하게 되었다. 인계리는 현재 청구, 독실, 상전두, 하전두, 건천, 솔골 등의 마을이 있으며 가구수는 약 100호이다.
정산리는 구한말 안동군 임북면에 속해 있었으나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상정정리(上鼎井里), 하정정리(下鼎井里), 등산리(登山里), 계곡리(桂谷里) 일부를 병합하여 정정(鼎井)과 등산(登山)의 이름을 따서 정산동(리)가 되었고, 1934년에 다시 행정구역이 변경됨에 따라 월곡면에 편입되었다가 1974년 7월 1일 월곡면이 폐지되면서 예안면에 편입되었다. 현재 정산리는 1리와 2리로 나누어지며 전체 가구수는 190여 가구로 예안면에서 가장 많은 주민이 산다. 정산 1리는 시장, 등재, 상활지, 하활지, 마골 등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정산 2리는 샛터, 오리실, 중마, 솥우물로 이루어져 있다.
주진리는 낙동강 가의 나루터가 되므로 배나드리, 배나들, 또는 주진(舟津)이라 하였다. 행정구역상 안동군 동후면에 속한 지역이었으나 왜정초인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노천리와 임북면의 박곡리와 예안군 읍내면의 천전동 일부를 병합하여 주진동(리)이 되고, 1934년 행정구역 변경에 의하여 월곡면에 편입되었는데, 1937년 안동댐의 시설로 인하여 일부가 수몰되고, 나머지 일부는 1974년 월곡면이 폐지됨에 따라 예안면에 편입되었다. 1995년 안동시와 안동군이 통합되면서 안동시에 속하게 되었다. 주진리는 현재 행정구역상 1리와 2리로 나누어져 있으며 가구수는 70여호이다. 주진 1리에 속한 마을로는 배나들이 있으며, 주진 2리에는 삼산, 오른데, 노천 등의 마을이 있다
이 마을은 고려 공민왕 때 광산김씨(光山金氏)가 최초로 마을을 개척하였다고 전해지며, 임하면의 내앞[川前]마을처럼 마을 앞에 낙동강이 흐르고 있으므로 내앞 또는 천전(川前), 천전동이라 하였다. 행정구역상 예안군 읍내면 지역에 속하였으나 왜정초인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상천(上川), 중천(中川), 하천(下川)을 병합하여 천전리라 해서 안동군 예안면에 편입되었다. 1973년 안동댐이 시설되면서 수몰지구가 되었으며, 1995년 안동시와 안동군이 통합되면서 안동시에 속하게 되었다. 현재 천천리는 미질리와 더불어 예안면에서 가장 적은 가구수가 살아가는 동네로 상천, 중천, 하천 마을에 약 10가구가 살아간다.
예안면의 북쪽에 위치한 마을로 마을 뒤에 태봉(胎峯)이 있으므로 이름을 탯골, 또는 태곡(台谷), 태동(台洞)이라 부른다. 예안읍지인 선성지(宣城誌) 서문에서 '...송(宋)나라 대중(大中), 천성(天聖) 연간인 현종대(顯宗代)에는 길주(吉州; 옛 안동)에 속했는데 신우(辛禑:고려 우왕)의 태(胎)를 현 동쪽에다 묻었다하여 다시 군으로 만들었다가 조금 뒤에 주로 승격했다...' 라는 구절이 나오는데, 여기서 말한 현 동쪽이 지금의 태곡이며 그 뒷산에 태를 묻었음으로 그 산을 지금도 태봉이라고 한다. 태곡리는 예안군 동하면의 지역으로서 왜정초인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외촌, 곡촌, 퇴산, 남산, 덕현과 동상면 인제동 일부를 병합하여 태곡동(리)이라 하여 안동군 예안면에 편입되으며, 1995년에는 안동시와 안동군이 통합되면서 안동시에 속하게 되었다. 현재 태곡리는 덧재, 물미, 골마, 밭마, 남산, 탯골 등의 마을로 이루어져 있으며 가구수는 약 80가구이다.
2,도산면
가송리는 풍수적으로 천옥(天獄)이라 불리울 만큼 매우 폐쇄적인 지형세를 띄고 있는 마을로 청송 주왕산(周王山)과 더불어 영남의 소금강(小金剛)으로 일컬어지는 청량산(淸凉山) 줄기가 마을을 에워싸고, 한복판으로는 낙동강의 원줄기가 흘러간다. 특히 청량산의 대(臺) 밑에 형성된 가송협(佳松峽)은 안동 땅의 수많은 경승 가운데서 산수미(山水美)의 첫째를 곱을 만큼 안동산수의 압권이라 일컬을 만하다. 마을은 강을 중심으로 하여 동쪽에 가사리, 서쪽에 소두들, 그리고 소두들에서 남서쪽으로 고개를 넘어가면 올미재가 있다. 가송리는 구한말 예안군 의동면에 속한 지역인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가사리, 송오리, 고리, 광석동 일부, 운천동 일부와 봉화군 하남면의 여을며리 일부를 병합하여, 가사리와 송오리의 이름을 따서 가송동(리)이라 하여 안동군 도산면에 편입되었으며 1995년 시군 통합에 따라 안동시에 속하게 되었다. 가송리는 현재 고리재, 소두들, 가사리, 올미재 마을 등의 작은 마을로 이루어져 있으며 가구수는 약 70호를 헤아린다.
단천리는 구한말 예안군 의동면 지역인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면천리, 백운리, 항곡리, 단사리, 원촌동 일부를 병합하여, 단사와 면천의 이름을 따서 단천동(리)이라 하여 안동군 도산면에 편입되었다. 1976년 안동댐 건설로 마을의 일부가 수몰되었으며, 1995년 시군 통합에 따라 안동시에 속하게 되었다. 현재 이 마을은 단사, 항곡, 백운지, 면천 등 4개의 작은 마을로 구성되었으며 가구수는 약 30호를 헤아린다.
동부리는 구한말 예안군 읍내면에 속한 지역인대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만촌동, 관저동, 교촌동의 각 일부를 병합하여 예안읍의 동쪽이 되므로 동부동(리)이라 하여 안동군 예안면에 편입되었다. 그후 1973년에 안동댐이 건설됨에 따라 일부가 수몰되고 나머지 일부는 1974년에 도산면에 편입되었으며, 1995년 안동시·군이 통폐합됨에 따라 안동시에 속하게 되었다. 동부리는 현재 동부 1리와 동부 2리로 나누어 40여 호가 살고있는데 새터, 괴네, 송티 마을은 동부 1리에 속하며, 월천 마을은 동부 2리에 속해있다.
분천리는 구한말 예안군 의동면 지역으로서 부내, 또는 분천(汾川), 분강촌(汾江村)이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분천동(리)라 하여 안동군 도산면에 편입되었으며 1995년 시군 통합에 따라 안동시에 속하게 되었다. 부내는 원래 영천 이씨(永川李氏)의 집성촌으로, 입향 시조는 고려말엽에 군기시소윤(軍器寺小尹)을 지낸 이헌(李軒) 공이다. 공은 어지러워 가는 세상일을 염려하여 벼슬을 버리고 고향 영천을 떠나, 천석(泉石)이 아름다운 분강(汾江) 굽이에 안주(安住)의 터전을 마련하였다고 한다. 소윤공(少尹公)이 동네를 둘러보니 낙동강 물이 밝게 흐르므로 부내라 불렀다고 하며, 한자로는 분천(汾川)이라 한다. 이 마을은 소윤공이 약 600년 전에 입향한 이후로 농암(聾巖) 이현보(李賢輔, 1467∼1555) 선생을 비롯하여 수많은 인물이 대를 이어 배출된 유서 깊은 마을이었으나 1976년 안동댐 건설로 인해 수몰지구가 되어 현재 송티와 넘티 등 2개의 마을만 남아있으며 가구수는 20여호가 살고있다.
서부리는 원래 예안군 읍내면에 속한 지역이었으나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관저동, 교촌동, 만촌동의 각 일부를 병합하여 예안읍의 서쪽이 되므로 서부동(리)이라 하여 안동군 예안면에 편입되었다. 그러나 1973년 안동댐 건설로 인해 일부가 수몰되고, 나머지 일부는 그 이듬해 도산면에 편입되었으며, 1995년 안동군이 안동시에 통합됨에 따라 안동시에 속하게 되었다.
선양리는 구한말 예안군 읍내면에 속하였으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선안동, 무양동, 교촌동, 천전동의 각 일부와 서면의 구송동 일부를 병합하여 선안과 무양의 이름을 따서 선양동(리)이라 하여 안동군 예안면에 편입되었다. 1973년 안동댐 건설로 마을의 일부가 수몰되고, 나머지 일부는 그 이듬해 도산면에 편입되었는데, 1995년 시군 통합에 따라 안동시에 속하게 되었다. 현재 선양리에는 독작골, 송라, 뒷송, 영양계 마을 등이 포함되며, 가구수는 30여 호이다.
온혜는 안동에서 북쪽으로 청량산으로 가는 35번 국도를 따라 30km 정도 떨어진 곳에 있는 동네로 예부터 온천(溫泉)이 있어서 여러 사람에게 은혜를 베풀게 되었다하는 뜻으로 온혜(溫惠)라 하였다한다. 온혜는 주자학(朱子學)을 집대성한 대유학자(大儒學者)로 후세의 추앙을 받는 퇴계(退溪) 이황(李滉, 1501∼1570) 선생이 태어난 유서 깊은 곳으로 구한말에는 예안군 의서면에 속했으며, 왜정초인 1914년에는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사곡리, 고산리를 병합하여 온혜동(리)이라 하여 안동군 도산면에 편입되었다가 1995년에는 시군 통합에 따라 안동시에 속하게 되었다. 이 마을은 가구수가 약 190호로 온혜 1리와 온혜 2리, 온혜 3리로 나누어지는데 논실, 건지골, 동작골, 고산, 삐끼실은 온혜 1리에 속하고, 중마, 합강, 청계 마을은 온혜 2리에, 그리고 배미골과 평지, 상촌은 온혜 3리에 속한다. 마을 앞에는 온혜천(溫惠川)이 흐르는데 이 물은 도산면 용두산에서 발원하여 남으로 흘러 온혜에 이르는데, 온천이 있어서 겨울에도 얼지 않으므로 온계(溫溪)라고도 부른다. 이 물은 북쪽에서 오는 태자리의 물을 합하여 큰 내를 이루어 꺾이어 동남쪽으로 흘러 토계리에 이르러 퇴계(退溪)가 되고, 토계리의 남쪽에서 낙동강으로 들어간다.
운곡리는 원래 예안군 의서면의 지역으로서 구레실, 또는 운곡이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갈곡, 도곡, 황정을 병합하여 운곡동(리)이라 하여 안동군 도산면에 편입되었으며, 1995년 시군 통합에 따라 안동시에 속하게 되었다. 이 마을은 도산면 서북쪽에 위치하는 해발 661m의 용두산(龍頭山) 서쪽 지맥으로 도산면 온계에서 수백 보 거리에 솟은 해발 480m의 국망봉(國望峯) 사이의 골짜기에 자리잡고 있는 마을이다. 용두산에서 발원하는 상계천(上溪川)이 마을을 감싸 흐르고 도곡, 구래실, 황정, 갈골, 서암 등의 작은 마을들이 그 주변 산간지대에 옹기종기 모여있으며 가구 수는 30여 호이다.
원천리는 1895년(고종 32)년 지방관제 개편에 의해 예안군 의동면의 지역이었으나 왜정초인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원촌동, 천곡동, 이곡리를 병합하여 원촌과 천곡의 이름을 따서 원천동(리)라 하여 안동군 도산면에 편입되었다. 1976년 안동댐으로 인해 수몰지구가 되었으며 1995년 시군 통합에 따라 안동시에 속하게 되었다. 현재 원천리에는 원원천 마을인 원촌 마을과 내살미 마을이 있으며 50여가구가 살고 있다.
1895년(고종 32)년 지방관제 개편에 의해 예안군(禮安郡) 의동면에 편입되었으며, 왜정초인 1914년에는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의인리와 섬촌을 병합하여 의촌동(리)이라 하여 안동군 도산면에 편입되었다. 선성지를 보면 의인(宜仁)은 '현 동쪽 9리에 있으며 고려 공민왕이 승격시켜 현으로 만들어 지금의 명칭으로 고치고 안동에 복속시켰으며 공양왕때 다시 예안현에 복속 되었다고 하였다.' 1973년 안동댐이 시설됨에 따라 수몰 지구가 되었으며 1995년 시군 통합에 따라 안동시에 속하게 되었다. 현재 대부분의 마을이 수몰되고 의인 마을과 섬촌 마을에 20여 가구가 농사를 지으며 살아가고 있다.
태자리는 원래 봉화군 하남면의 지역으로서 태자산(太子山; 도 산천)이 있어서 태자산, 태자산리 또는 줄여서 자산이라 불렀다. 1914년 행정구역 폐합으로 하곡, 반정리, 여울며리와 예안군 의동면의 가송동 일부와 의서면 고산의 일부를 병합하여 태자동(리)이라 하여 안동군 도산면에 편입되었으나 1995년 시군 통합에 따라 안동시에 속하게 되었다. 현재 태자리는 태자 1리와 태자 2리로 구분하는데 가구수는 120가구를 헤아린다. 이 중 태자 1에 소속된 마을이 지경, 널매, 고리재이며, 태자 2리에 속한 마을이 장선, 소정, 원태자, 머골, 다랫재이다.
토계리는 구한말에 예안군 의동면의 지역으로 왜정초인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양평, 상계, 하계, 계남, 섬촌 일부와 의서면의 온혜동 일부를 병합하여 토계동(리)라 하여 안동군 도산면에 편입되었으며, 1976년 안동댐으로 인하여 수몰지구가 되었으며 1995년 시군 통합에 따라 안동시에 속하게 되었다. 태백산(太白山)의 지맥인 용두산(龍頭山)과 도산면 태자리에서 근원하여 온혜(溫惠)를 거쳐 흐르는 냇물이 상계(上溪) 마을의 퇴계종택 앞을 지나 낙동강에 흘러드는데, 종택 앞으로 흘러가는 냇물을 퇴계(退溪)라 한다. 원래 냇물의 이름은 토계(兎溪)였으나 명종 원년에 퇴계(退溪) 이황(李滉) 선생이 이 냇가 동암(東巖)에 양진암(養眞菴)을 짓고, 냇물의 이름을 퇴계(退溪)로 고친 후 선생의 아호(雅號)로 삼았는데, 후에 토(兎)자를 음(音)이 같은 토(土)자로 고쳐 마을 이름을 토계(土溪)로 불렀다고 한다. 토계 마을은 원래 퇴계천의 상류에 위치한 상계와 그 하류인 하계(下溪), 퇴계천 건너 남쪽에 자리 잡은 계남(溪南), 하계를 지나 고개 너머에 있는 원촌(遠村) 등의 4개의 자연마을로 이루어져 있었으나 안동댐 수몰로 마을이 재편되어 지금은 양평, 상계, 하계가 토계리에 속해 있으며, 계남 마을은 완전히 수몰되었으며, 원촌 마을은 도산면 원천리(遠川里)에 편입되었다. 현재 토계리는 2개 반으로 나누어지며 가구수는 50집이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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