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건제도의 정의>
<목차>
역사상 '봉건제도'의 개념 만큼이나 논란이 많고 복잡한 내용을 갖고있는 것도 드물 것이다. 이렇게 논란이 많은 봉건제도의 개념과 내용을 개괄적으로 파악하고 이해하는 것은 역사 연구에서 의미있는 일이라고 할 수 있다. 이 글은 이러한 봉건제도의 개념이 어떻게 발전되어 왔고, 여러 학자들의 다양한 측면에서의 제해석을 분야별로 살펴본 후 봉건제도에 대한 개념정의를 필자 나름대로 내려보고자 한다. 목차로
봉건제도라는 개념은 유럽사의 특정시기에 나타난 사회구조에만 적용하려는 입장과 세계의 여러 지역에 나타난 前자본주의 사회구조에 보편적으로 적용하려는 입장 중 어느 쪽을 택하느냐에 따라 봉건제도의 기원에 대한 접근은 달라지게 마련이다. 그러므로 이와같은 봉건제도에 대한 광의개념과 협의개념은 공간적으로나 시간적으로 많은 편차를 드러내고 있다. 오늘날 우리가 흔히 사용하고 있는 "封建的", "封建" 또는 "封建制"와 같은 말들은 그 뜻이 중국 기원의 봉건제의 뜻과는 상당히 다르며, 학문적 용어로 쓰여질 때는 더욱 다르다. 원래 동아시아에서 사용된 봉건제란 말이 특정 통치제도를 가르킨 비교적 명확한 개념의 용어였음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우리가 이처럼 다양한 뜻으로, 게다가 매우 부정확하게 이 말을 사용하고 있는 것은 어디에서 연유하는 것일까? 그것은 오늘날 통용되고 있는 봉건제라고 하는 용어가 주로 유럽적 개념으로 쓰여지고 있는데, 그 유럽적 개념이 매우 다양하고 또 모호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오늘날 주로 유럽적 개념으로 사용되고 있는 봉건제의 개념이 어떻게 발전되었는가를 살펴보기로 하자. 로베르 부트뤼쉬(Robert Boutruche)에 따르면, 13세기 이래로 主從的이며 봉건적인 규정들에 대한 해석은 정치학자와 주석가들의 관심을 끌어왔는데, 그 제도에 대한 본격적인 역사연구가 시작된 것은 르네상스 시대의 인문주의자들에 의해서 였으며, 그것은 고대의 전통인가 아니면 게르만의 관습인가? 이러한 논쟁은 근대에 이르기까지 매우 활발히 전개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유럽에서 "봉건제"나 "봉건적"이란 말이 사용되기 시작한 것은 대강 17세기 경부터의 일이라고 생각되고 있다. 이 무렵 이 말들은 주로 법학자들에 의해서 사용되었는데, 그들은 중세 서유럽에 특유한 토지보유 형태인 "封(feu)"에 주목하고, 그러한 "封에 관련된" 이란 뜻으로 "봉건적(feodal)" 이란 말을, 그리고 "봉의 속성" 또는 "봉의 보유에 따르는 여러 부담"이라는 뜻으로 "봉건제(feudalism)"란 말을 사용하였다. 그런데 封이란 한마디로 "어떤 특정한 봉사에 대한 보수로 급여(대여)되는 어떤 재산권"을 말하는 것이었다. 이와같이 17세기에 법학자들이 말한 "봉건적" 또는 "봉건제"란 말은 바로 "봉에 관련된" 또는 "봉에 관련된 제도"를 뜻하였다. 따라서 그들에게는 封建制란 주로 종신의 주군에 대한 군사적 봉사제도와 이러한 군사적 봉사에 대한 보수로서 급여(대여)된 토지(benificium: 은대지)의 보유에 관한 법제도였다. 하지만 프랑스 혁명 전까지 실제로 더 널리 쓰였던 말은 중세에 생겨난 형용사 "페오달(feodal: 봉건적)"과 합성된 표현들이었다. 17세기 법학자들의 노력 결과, 종속관계의 형성과 발전은 인류발전에서 하나의 장기적 단계로 인식되기에 이르렀다. 이러한 중요한 성과는 그후 다시 18.19세기의 여러 이론가들에 의해 보다 풍요한 결실을 맺게 되었다. 불렝빌리에(H. Boulainvilliers) 백작은 "봉건제"가 게르만의 침입 직후에 나타난 하나의 통치방식이라고 단언하였고, 몽테스키외는 "봉건법"을 일컬어서, "세상에서 오직 한번만 일어난 사건" 따라서 다시는 재현될 수 없는 사건이라고 하므로써 봉건법의 역사적 의미를 통찰하여, 그것이 보편적 법칙의 테두리 안에서 형성된 것이 아니라 무엇보다도 실제적인 여러 관습들에 의해서 형성되었음을 간파하였다. 그는 봉건제의 기본성격을 봉건제후들에 의한 지방분권적 통치양식으로 이해했다. 몽테스키외와 같은 18세기 계몽사상가였던 볼테르는 지방분권을 봉건제의 기본성격으로 이해하였으나, 봉건제를 중세 유럽에서만 볼 수 있는 특유한 사건이 아니라 북반구의 대부분 지역에 오랫동안 존속해 온 하나의 보편적 통치방식이라 하였다. 볼테르의 이러한 보편사적 파악은 유럽중심적 역사이해에 대한 비판의 소리가 높아가는 추세와 더불어 봉건제 개념의 확대해석의 경향을 더욱 두드러지게 했던 것이 틀림없다. 그리고 봉건제의 경제적 기반 연구에 진력했던 선구자들은 18세기 후반의 몇몇 학자들인데, 아담 스미스에 의해 마무리되는 이들의 견해에 따르면, 봉건제의 경제적 기반은 바로 농촌의 장원제이며 따라서 봉건제는 장원제를 의미하였다. 봉건제의 경제적 측면에 주목하여 봉건제를 장원제나 자연경제와 거의 동일시하는 이러한 견해를 우리는 일부 맑스주의 史家까지를 포함한 몇몇 유럽 經濟史家에게서 볼 수 있다. 1790년 아담 스미스가 세상을 떠나자 봉건제란 용어는 영불해협을 건너 유럽에 퍼졌는데, 그 때 이 말은 어느 한 왕국이나 공국 내부에서의 공권력의 분할을 지칭하는가 하면 하나의 정치적.사회적 체제를 지칭하기도 하였다. 그 말은 페오달리티(feodality), 퓨달리즘(fedalism), 포이달리스무스(feudalismus), 페우달리스모(feudalismo) 등으로 모방되거나 레언제(Lehnswesen) 따위로 번역되어 유럽의 여러 나라에서 널리 통용되는 말이 되었다. 르네상스 시대에서 18세기까지 선구적 업적을 쌓아왔던 학자들을 뒤를 이어, 후대의 역사학자들과 법학자들은 봉건제에 대한 과학적 연구를 발전시켜 나갔다. 그들은 기원의 문제라든가 인적 유대관계 및 봉토가 각각 차지하는 비중, 또는 각국에 있어서의 봉건제의 위치 등을 둘러싼 여러 학파들간의 수많은 논쟁을 통하여, 마침내 그 제도의 구조와 복잡성을 간파하게 되었다. 활동적인 이 시대는 거대한 종합의 시대이자, 동시에 미묘한 차이점들을 강조하면서 인간들에게 접근하는 지역적 개별연구들이 쏟아진 시대이며, 한편 봉건제라는 말이 유행되면서 학술적이고 이론적인 용어로서의 봉건제는 대중적인 용어로서의 그것과 점점 동떨어진 말이 되어갔고, 이런 현상은 18세기 후반부터 특히 프랑스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맑스와 그의 제자들에게도 이 체제는 천년 이상 지속된 人類發展의 한 段階였다. 그러나 그들은 봉건제를 하나의 통치방식으로 간주하기 보다는 로마제국의 종말과 17.18세기의 부르주아 혁명들 사이에 위치한 경제적.사회적 조직의 한 유형으로 파악하였다. 그들에 따르면, 봉건제는 생산력의 발전이라는 측면에서 하나의 진보를 나타낸 것이었으며, 그것을 붕괴시키는 데 기여한 근대 자본주의의 발생에 이르기까지 오랫동안 지속되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대분의 국민들이 이러한 단계를 통과하였는데, 그것은 그들이 처해있던 역사적 발전의 상황에 따라 다양한 양상을 띄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최근에는 봉건제가 지니는 여러 측면을 포괄하여 종합적.총체적으로 이해하려는 아날학파적 경향도 나타났는데, 아날학파의 대표적인 마르크 블로크는 봉건제가 그 자체로서 고립적으로 파악될 수 있는 하나의 제도라는 입장을 배격하고 그 대신, 전체성 속에서 파악되어야 할 하나의 社會型으로서의 봉건제 개념을 설정한다. 이렇게 봉건제도 개념이 17세기 이후 여러 학자의 주장들에 의해 다양하게 확대.발전하므로써, 현재 시점에서 사실 명확하고 일치된 개념 정의가 불가능 할지도 모른다. 나종일 교수는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이제까지 제시된 개념 규정은 제각기 하나의 作業假說로서 나름대로 쓸모있는 것이기는 하지만 그 중 어느 것도 아직은 학자들의 합의를 얻어 낼 만한 것은 못된다. 그 중 어느 것을 택하여 그것을 정설로 규정하는 것은 무모한, 어쩌면 위험하기까지 한 일로 보인다"
그러나 이러한 봉건제도 개념의 확대와 남용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다양한 주장들을 체게화하고 분류하므로써 봉건제도 개념의 정확한 사용과 이해를 도모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3장에서는 다양한 제해석을 검토할 것이다. 목차로
무엇보다도 봉건제 개념의 체계적 파악과 분류작업은 봉건제 개념의 정확한 이해를 위해 필수적이다. 본 장에서는 여러 학자들의 봉건제에 대한 주장들을 다음 5가지로 분류하여 살펴보고자 한다. 첫째 法制史的 解釋, 둘째 政治的 解釋, 셋째 맑스주의적 解釋, 넷째 社會史的 解釋, 다섯째 기타 解釋이 그것이다. 물론 이러한 분류는 필자의 임의적인 분류이고, 미하일 바르크(Michael A. Barg) 같은 학자는 맑스주의 학자들을 제외한 부르주아 학자들의 역사서술을 4가지 학파 즉 정치적-유형학파, 사회사학파, 형식적-법제사학파, 서독의 현재학파 등으로 분류하기도 한다. 목차로
이 부류에 속하는 형식법학파의 역사가들은 자기 연구를 封關係와 主從關係에 한정시킨다. 이들이 설정한 목표를 위해서는 봉건제란 용어를 개념적으로 중세시대 법학자들의 용법과 완전히 일치시켜, 이들 관계 자체와 동의어로 연구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이런 방법에서는 봉건제의 역사란 당연히 중세사회의 한 制度의 역사이고 그 제도는 그것이 성립한 실제적인 전제조건에서 완전히 분리된 채 연구되기 마련이다. 이런 입장에선 봉제도의 고유한 성격이 극단적으로까지 강조된다. 이석이 형식법학파의 관점으로 서유럽에서는 벨기에의 강쇼프(F. Ganshof), 영국의 스텐튼(F.M. Stenton), 미국에서는 스테펜슨(C. Stephenson), 호이트(R.S. Hoyt) 등에 의해서 가장 잘 대변된다. 강쇼프는 <<봉건제란 무엇인가>>라는 널리 읽히는 탁월한 저서에서 좁은 의미에서 기술적, 법적 의미의 봉건제도만을 논하고 있다. 이러한 봉건주의란 10-12세기에 르와르 강과 라인 강을 경계선으로 그 사이에 있는 지역에서 성립한 從士制度가 제도화된 것을 말한다. 따라서 그의 책에서는 레엔관계, 봉토, 국가 등이 주된 章과 節로 등장하고 있고, 반면에 봉건제도하의 지주와 농민간의 관계, 이데올로기적인 정당화의 문제, 일상생활의 물자와 의례 등은 상대적으로 소홀히 취급되고 있다. 이 점은 마르크 블로크(M. Bloch)의 연구와 상당히 대조적이다. 영국의 中世史家인 스텐튼 역시 그의 주저인 <<영국 봉건주의의 제1기, 1066-1166>>라는 책에서 순수한 의미의 從士契約으로부터 유래한 사회관계에 분석의 초점을 맞추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입장을 취하는 역사가들 가운데서도 몇몇은 봉건제 개념을 그렇게 국한시켜 파악하는 것으로는 미흡하다는 점을 느껴왔다. 현재 아날학파를 대표하는 프랑스 史家 부트뤼쉬도 기본적으로 봉건제 개념을 엄격하게 법학적으로 이해하는데 동조하고 있다. 그에 의하면, "일체의 종속관계 뿐만 아니라 봉건제와는 아무런 공통점도 없는 사회 및 제도들까지도 한묶음에 같이 부른다는 것은.....용어의 혼동으로 사실에 대한 몰이해를 은폐하려는 짓이다. 우리는 주종계약과 封 그리고 특수한 성격의 개인적 관계에 근거한 사회적.정치적 조직이 없다면 봉건체제가 아니라고 단호히 주장한다.....그리고 그것을 그 당시의 상황 속에 놓아두고, 그 당시 사람들의 관점에서 바라보지 않으면 안된다"고 설명하고 있다. 이와같은 봉건제의 법제사적 해석은 중세 서유럽 중심적인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목차로
봉건제를 주종제적 군사조직과 봉토에 관한 법제도로 이해한 이러한 법제사적 해석을 확대하여 이를 하나의 통치방식으로 파악하게 된 것은 17세기말 영국의 국제법 사가인 스펠만(H.Spelmann)에 의해서 시작되었다. 그는 "봉건적 종속조직이 서양 여러 나라에 대하여 공통적인 사회적.정치적 구조의 소재를 제공하였다"고 파악하므로써 봉건제 개념에 대한 이른바 정치적 해석을 처음으로 제시하였다. 이것은 18세기 18세기 계몽사상가들에게 계승되어 그 후 19세기를 통하여 봉건제에 관한 많은 연구와 논의를 자아내게 했다. 봉건제 개념에 대한 이러한 정치적 해석에는 그 특수성과 보편성에 관한 이러한 견해차이 이외에도 그 기원에 관한 문제 혹은 私的 종속관계 및 봉토가 국가 공권력 행사에서 차지하는 비중이나 위치에 관한 문제 등을 둘러싸고 많은 논란이 있어왔다. 그러나 그러한 견해차이나 논란에도 불구하고, 아니 그런 것들을 통해서, 봉건제에 대한 정치적 해석은 19세기 이래 오늘날까지도 서유럽 각국의 봉건제 연구의 주류를 이루어 왔다고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 부류의 학자들은 앞서 2장에서 언급했던 몽테스키외와 볼테르 외에도 독일의 막스 베버(Max Weber), 오토 힌체(Otto Hintze), 현대 미국의 比較史家들인 쿨본(Rushton Coulborn), 스트레이어(Joseph R. Strayer) 등이 있다. 막스 베버는 지배구조의 다양한 형태에 대한 보편사적, 비교사회학적 검토를 시도한 사회학자이다. 베버는 정당성의 기초위에 세워진 지배의 유형을 크게 카리스마적 지배, 전통적 지배 그리고 합리적.법적 지배로 구분하고 있다. 봉건제도는 이 세 가지 지배유형 중 전통적 지배의 범위에 든다. 편성원리에 따라 이 전통적 지배의 행정조직에는 크게 두 가지 유형이 있다. 그 하나의 유형은 家産制(Patrimonialismus)이며 다른 하나는 封建制(Feudalismus)이다. 가산제에서는 지배자가 행정권을 포함하는 지배수단을 일단 자신의 손(중앙정부)에 집중시켰다가 자신을 대리하는 행정요원들에게 그 일부분을 위임한다. 그에 반해 봉건제에서는 지배자가 행정수단의 소유 자체를 자신의 추종자들에게 일임하지 않으면 안되게 되어있다. 즉 主人(또는 지배자)과 그 추종자(또는 신하) 사이에 지배를 위한 수단이 어떻게 분배돠느냐에 따라 이 두체제는 큰 차이를 보이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지배수단이라 함은 지배권을 행사하는 데에 필요한 일체의 수단으로, 예컨대 地代의 형태로 수취된 경제적 잉여물, 폭력수단, 사법적 제재수단 등을 일컫는다. 지배수단의 소유가 하위의 추종자들에게 일임된 봉건제도는 특히 폭력수단의 분산으로 특징지어진다. 이 폭력수단의 분산을 유럽중세 봉건사회에서 전형적으로 나타나는 레엔제도(Lehenswesen)이다. 지배자(왕 또는 상급영주)를 추종하는 從士(하급영주 및 가신)는 지배자에 충성을 서약하고 지배자를 위한 무력봉사를 하는 대신 지배자는 종사를 가종의 정치적.군사적.사회적 압력과 위협으로부터 보호하고 그의 생계를 책임진다. 종사의 생계보호책으로는 보통 封土가 분급된다. 이것이 서유럽에서 정착된 레엔봉건제이다. 이러한 베버의 견해는 19세기 독일 역사학자들이 레엔관게를 봉건제의 핵심으로 보고 봉건제도를 레엔제도라는 개념으로 대치시키려 했던 경향과 맥이 이어진다고 할 수 있다. 즉 정치구조, 통치원리가 베버의 봉건제도의 핵심을 이루고 있는 것이다. 힌체는 그보다 앞선 벨로브(Georg von Below)와 막스 베버의 발상을 기초로 봉건제도를 보편사적, 비교사회학적 개념으로 정립하고 있다. 그는 봉건제에 관한 벨로브의 정의를 받아들여 그것을 국가로 제도화되지 않은 권력의 담당자들이 하나의 국가체제로 통합되는 制度的-政治的 方式으로 이해했다. 힌체는 봉건제의 군사적 측면(기사제)이나 경제적 측면(장원제)을 결코 무시하지 않고 있지만 그러나 무엇보다도 국가의 정치구조(지방분권)를 봉건제의 핵심적 요소로 보고있다. 그의 말을 빌리면, "봉건제란 말로써 우리는 군사적 기능과 함께 사회경제적 기능까지를 이해한다. 봉건제는 하나의 戰爭組織의 原理임과 동시에 經濟組織, 社會組織의 原理이다"라고 한다. 그는 봉건제도의 출현에 기여한 요인들로서 수장과 구성원들간의(왕과 지방관리들간의) 국가권력 분할, 권력의 개인적 성격(왕가의 권력) 그리고 교회와 국가의 상호관련(성직자가 국가관리이기도 한)을 들고 있다. 또한 힌체는 프랑크 왕국령의 봉건제를 근거로 삼아 봉건제의 발전을 대체로 세 단계 즉 초기 봉건적 단계(12세기 말까지), 盛期 봉건적 단계(16세기까지의 고전적 봉건제) 그리고 후기 봉건적 단계(18세기 말까지)로 구분하고 있다. 이러한 시기설정에는 다른 여러 가지 원리들 즉 귀족의 기능, 국가형태 그리고 영주들의 지위가 기준이 되고 있다. 그리고 그는 "봉건제가 어느 민족 고유의 발전의 산물이 아니라 보다 큰 문화권에서만 나타나는 세계사적 상황의 산물이다"라고 주장하므로써, 봉건제가 러시아와 이슬람 국가들 그리고 일본에도 존재했었음을 확인하고 봉건제가 게르만적 -로마적 세계의 민족들에서만 발견되는 현상은 아니라는 점을 강조했다. 그러나 힌체는 "완전한 의미의 봉건제는-엄격히 말해서- 원래 오직 카롤링 왕국의 후계국가 즉 주로 프랑스와 독일 그리고 이타리아와 스페인의 일부 지역에만 국한되어 있다는 사실"을 환기시키고 있기도 하다. 다음은 봉건제에 대한 비교연구를 통하여 세게사에서의 어떤 획일성을 찾으려한 일련의 비교사학자들 즉 <<역사에서의 봉건제>>를 펴낸 쿨본을 위시한 영미계통의 일련의 학자들도 封建制란 고도로 조직화된 정치경제가 몰락 또는 약화될 때 이에 대한 응전의 양상으로 나타나는 하나의 통치조직으로 보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정치적 유형론에 근거한 비교방법은 유럽대륙에서보다 해외에서 더 큰 성과를 거두었다. 특히 미국에서 봉건제를 보편사적으로-공간적으로 뿐만 아니라 시간적으로도-연구하려는 최초의 시도가 쿨본 등에 의해 이루어졌는데, 그 이유는 첫째, 미국의 중세사 연구에서는 "유럽중심적 전통"이 서유럽에서보다 언제나 미약했기 때문에 그 극복이 자연히 보다 철저하게 이루어질 수 있었고 둘째로, 미국에서 프랑크 왕국에만 고유한 봉건제라는 개념에서 벗어나 다양한 봉건체제가 있다는 보다생산적인 봉건제 觀을 택하기가 아무래도 용이했으며, 끝으로 금세기의 20년대와 30년대에 사회과학 방법론이 그 깊이와 폭에서 크게 발전했고(역사연구에서의 발전도 포함해서) 이는 서유럽 역사학에도 영향을 미쳐 그와 비견할 만한 발전을 북돋아 주었기 때문이라고 바르크는 설명하고 있다. 쿨본과 스트레이어의 주장을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봉건제란 개념은 초기 유럽사의 어느 사실로부터 추출된 개념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개념 자체가 그러한 사실들 중의 어느 하나인 것은 아니라고 설명하면서 "봉건제 개념은 바로 처음부터 고도의 추상이었으며, 그것은 하나의 특정한 통치제도를 기술했던 말이라기보다는 여러 제도에 관한 하나의 일반적 범주를 기술했던 말이었다"고 한다. 그들은 <<역사에서의 봉건제>>의 저술목적을 봉건제에 관해 새로운 정의를 내리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봉건제의 연구가 역사의 균일성(uniformity)이라는 문제를 해명해 줄 수 있는지를 검토하는데 있다고 하면서, 곧 봉건제는 이 균일성이라는 문제를 탐구하는 데 사용될 수 있는 좋은 표본이라고 간주한다. 그들은 만일 봉건제가 하나의 반복되는 조건, 곧 하나의 균일성이라면 그 균일성은 인종과 문명의 차이를 이겨낼 것이라고 주장하면서 봉건제에 대한 定義를 다음과 같이 내리고 있다.
"봉건제는 일차적으로 하나의 통치방식이지 경제적 혹은 사회적 제도는 아니다. 비록 그 통치방식이 사회적.경제적 환경을 변화시키고 또한 그것에 의해 변화되는 것이 분명하다 하더라도 말이다. 봉건제는 지배자와 신민, 국가와 시민 사이의 관계가 아니라 주군과 종신의 관계를 기본적인 관계로 하는 統治方式이다"
이상과 같이 봉건제에 대한 이러한 정치적 해석은 동아시아에서의 봉건제의 개념과 가장 유사한 것으로 보인다. 봉건제에 대한 법제사적 해석이 대체로 유럽중심적인 경향을 나타내는데 비하여 정치적 해석은 세계사적 관점을 중시하는 경향을 보이는 것도 전자가 주종제와 봉제도를 유럽특유의 현상으로 보려는데 대해서 후자는 동서양에서의 지방분권적 통치방식을 유사한 것으로 보기 때문이라 하겠다. 목차로
봉건제의 경제적 측면을 중시하되 그 개념을 극단적으로 확대한 것이 맑스주의적 해석이다. 봉건제에 대한 개념규정이나 논의는 맑스 이후 이른바 맑스주의자들에 의해서 여러모로 행해져 오고 있다. 그들이 봉건제의 기본성격을 그 상부구조인 군사제도나 법제도 또는 지방분권적 통치체제의 측면에서 파악하기 보다는 이들의 하부구조로서 경제적.사회적 기반의 측면에서 파악하는 것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봉건제 개념에 대한 맑스주의적 해석이 지니고 있는 다른 중요한 특징은 그것이 封建制를 人類歷史 發展의 한 段階로 보고 있다는 점이다. 이래서 그들은 봉건제를 세계 대부분의 국민이 통과해 온 하나의 단계로 본다. 본 절에서는 맑스주의적 해석을 파악하기 위해 봉건제에 관한 맑스 및 엥겔스, 레닌, 스탈린의 언급과 돕(M. Dobb), 스위지(P. Sweezy), 바르크(M.A. Barg)와 파랭(C. Parain)의 정의 그리고 소련 역사학회에서의 1950년대 "봉건사회의 기본법칙" 논쟁의 결론을 중심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맑스와 엥겔스의 연구의 주된 관심은 서구 자본주의의 발생.발전과정을 과학적으로 해명하는 데 있었다. 따라서 자본주의 이전 사회에 대한 그들의 연구는 어디까지나 이 주된 연구과제를 수행해 나가기 위한 부수적인 자료수집과 그에 대한 분석에 국한되었다. 사실 맑스는 봉건제도에 대한 체계적인 서술을 하지 않고 있다. 맑스에 의하면 봉건제는 이 資本主義 生産樣式에 대한 대극으로 이해되고 있다. <<자본론>>에서 봉건제와 관련된 중요한 기술은 대체로 다음과 같다.
a. 자본제적 地代의 기원에 관한 章 b. 상인자본에 대한 역사적 고찰의 章 c. 고리대 자본의 前 자본주의적인 형태에 관한 章 d. 이른바 자본의 본원적 축적에 관한 章 e. 쭌프트에서의 장인-도제간의 관계에 대한 언급, 수공업 장인의 자본가 또는 임노동자로의 분해에 관한 언급 f. 일반화된 상품관계가 사회관계에 끼친 영향을 분석한 후 중세의 인신적 의존관계에 대한 언급
이러한 章節들은 봉건제 생산양식에서 자본제 생산양식으로의 이행이 어떠한 조건 아래서 진행되어 왔는지를 다루기 위해 집필된 것이다. <<자본론>> 제3권의 <자본제적 지대의 기원>에 관한 장절에서 맑스는 노동지대-현물지대로의 지대의 변천을 추적하고 있다. 이와같은 地代의 變化는 두말할 여지없이 西歐 封建主義의 發展, 解體의 歷史이다. 맑스는 생산수단의 소유 여부를 중심으로 하여 정치제도, 이데올로기적 분석 등을 해명해 나가는 그의 경제 우선적 발상에 의해 봉건제도하의 토지를 중심으로 한 階級的 對立關係에 분석의 주안점을 두고 있다. 토지를 둘러싼 양대 계급간의 투쟁에 초점을 둔 그의 분석은 뒤에 지구상의 거의 모든 영역에서 봉건제를 발견하려는 그의 후계자들을 고무한 점도 있다. 그러나 맑스 자신은 의문의 여지가 큰 "아시아적 생산양식" 개념에서 보듯이 봉건제 생산양식의 존재를 서유럽 이외의 지역에서 인정하려고 하지는 않은 것 같다. 엥겔스 역시 유럽의 경험을 토대로 중세-근대, 봉건제-자본제라는 연결도식을 그려내고 있다. 중세사회의 자급자족적 경제, 지역적 폐쇄성, 농촌과 도시의 구분 등은 그가 본 중세상을 특징지워 준다. 엥겔스는 게르만 공동체의 원류로부터 봉건사회가 형성되는 과정을 역사적으로 추적하여, 이미 메로빙 시대에 잦은 내외 전란으로 인해 수많은 자유민들이 토지를 상실했고, 그 대신 힘셍 지주들이 등장하기 시작했으며, 농민들은 이들 지주아래 예속되어 예농화했음을 보여주었다. 그리하여 중세 봉건제도를 특징짓는 영주-농노간의 계급적 대립이 일반화하였다는 것이다. 이러한 서술을 통하여 엥겔스는 봉건제를 유럽에 국한된 현상으로 규정한 것으로 보인다. 이 점에서 엥겔스의 시각은 맑스의 그것과 다름없다. 두 사람이 모두 유럽역사를 토대로 해서만 이 개념을 사용하고 있었던 것이다. 레닌은 맑스의 노동지대론 및 엥겔스의 <<국가, 사유재산 및 가족의 기원>>에 크게 의존하여 러시아의 농노제에 대해 비교적 상세히 서술하고 있는데, 레닌이 자본주의 이전 단계의 러시아 사회를 일컫는 데서 "봉건제도"라는 용어보다 "농노제"라는 용어를 선택하고 있음은 주목할 만하다. 러시아의 전 자본주의에 "봉건적" 이라는 형용사를 붙이는 일에는 레닌도 주저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레닌에 의하면 세계사로 통용되는 시대구분법은 원시공동체-노예제-농노제-자본제라는 것이다. 스탈린은 1939년 소련공산당 중앙위원회가 펴낸 <<소련공산당 역사>> 중에 <사적유물론과 법증법적 유물론>에서 거의 모든 민족과 국가의 역사에서 사회구성체의 5단계 발전이 이루어져 왔다고 주장하였는데, 그것은 곧 원시공동체-노예제-봉건제-자본주의-사회주의 이라는 것이다. 비유럽 세계의 많은 지역에 존재하였던 전 자본주의 사회에 대해 봉건제라는 용어를 널리 적용하려는 시도가 이루어진 것은 스탈린 이후의 일이다. 스탈린의 이 논문은 광의의 봉건제를 보편사적 개념으로 격상시킨 셈이다. 이 점에서 스탈린시대의 소비에트 관변사학은 맑스, 엥겔스의 원래 의도에서 이탈하고 있다. 그 대신 "아시아적 생산양식" 개념이 갖는 궁색한 설명능력을 극복하고, 많은 비유럽 전 자본주의 사회안에서 계급투쟁의 동태를 설명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러나 봉건제 개념의 의미내용을 지나치게 단순화하고 그 외연을 넓힘으로써 그 이후 맑스사학이 갖는 교조적 성격을 더 짙게 만든 책임 또한 이 논문에 씌울 수 밖에 없을 것이다. 또 유럽 역사가 걸어온 길을 생산관게의 단선적, 필연적 진보로 보고 이를 비유럽 세계 전반에 억지로 적용하려 하였다는 점에서 노골적인 유럽중심주의 사관에 뿌리를 두었다는 비판을 피하기 어렵다. 모리스 돕은 봉건제의 본질을 자본주의의 그것과 마찬가지로 하나의 生産樣式이라 규정하면서, 봉건제를 사실상 農奴制와 동일시 한다. 이에 대해서 포크로프스키나 스위지 같은 사람들은 봉건제를 交換經濟와 대비되는 자급자족적 "自然經濟" 즉 "소비를 목저으로 하는 경제"로 파악한다. 봉건제의 붕괴원인 그리고 봉건제에서 자본주의로의 이행에 관한 맑스주의 학자들 사이의 논쟁이 이러한 대립된 주장과 결부되어 있음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바르크는 <<오늘날 부르주아 역사서술에서의 봉건제 개념>>에서, 봉건제의 본질적 특징들을 규정하는 데 따르는 난점은 봉건질서가 어떤 것은 정태적 성격(법제도)을 띠고 또 어떤 것은 동태적 성격(유대와 관계 등)을 띠어 그 개별적인 구체적-역사적 형태가 엄청나게 다양하다는 점에서 비롯된다고 지적하고, 구체적 형태들이 각기 다른 것은 다음과 같은 3가지 조건 즉 첫째, 봉건제에 이르는 이행경로가 민족에 따라 달랐다는 점이다. 둘째, 봉건적 소유체제의 형태가 극히 다양했다는 것이다. 세째, 정치조직의 형태가 다양?다는 것 등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그러나 결국 문제의 핵심은 토대가 되는 그런 측면이 과연 무엇인가를 찾아내는 데 있을 따름이며, 봉건제에 대한 진정으로 보편사적인 개념은 맑스주의 방법론의 견고한 토대 위에서만 확보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바르크에 따르면, 봉건제의 개념 정의와 관계하여 맑스주의적인 중세사학은 봉건제를 대토지 소유와 농민의 소토지 경작이 견고하게 결합된 하나의 생산양식으로 본다. 여기서 농민계급에 대한 명목적 토지소유자들의 착취는 통상적으로 경제외적 강제수단에 의거하고 있으며, 동시에 그것은 가산제적 국가형태에 완전히 의지할 수도 있다.고 보는 것이다. 샤를르 파랭은 "봉건적" 이라는 용어의 맑스주의적 일반화의 의미를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토지의 소유자가 더 이상 노예신분은 아니지만 자신의 자유와 개인재산을 제한하는 온갖 종류의 경제외적 강제에 종속되어 있어서 그 자신의 노동력도 그 자신의 노동 생산물도 자유로운 교환의 대상 즉 참된 의미의 '商品'이 될 수 없었던 체제 전반을, 18세기 사람들이 그렇게 불렀듯이, '봉건적' 이라고 칭하여도 아무런 지장이 없을 것이다. 이렇게 볼 때 4세기 로마의 '콜로누스'는 '봉건제'를 예고하고 있었으며 1930년의 헝가리와 시칠리아의 농민들도 역시 동일한 성격의 강제하에 놓여있었던 것으로 파악된다"
계속해서 파랭은 봉건적 생산양식이라는 엄밀한 개념과 봉건사회라는 보다 크고 느슨한 개념을 구별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하고 이렇게 해야 (역사발전의 전체과정 속에서) 봉건적 생산양식이 고대적 생산양식에 비하여 진일보한 단계를 표시하고 있음을 보다 쉽게 파악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봉건체제의 성립은 새로운 필요에 직면하여 이루어진 자생적이고 무의식적인 적응의 결과였는데, 비록 지방적 조건에 따라 그 리듬과 형태를 크게 달리 하기는 했지만 그 성격이나 귀결은 전적으로 동일하였다고 밝히고 있다. 시대구분에 관하여, 파랭은 봉건체제가 매우 완만하게 형성되었기 때문에 시대구분이 가능하다고 설명하고, 카롤링 제국의 혁신이 좌절되고 난 9세기부터 서유럽의 봉건제도가 절정에 달한 13세기 사이에 우리는 뚜렷한 단계들을 구획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의 시대구분에 따르면, (1) 10세기경에 봉건제는 여전히 형성기에 있었다. (2) 1000년과 1150년까지의 시기에 우리는 봉건제의 상승을 이야기 할 수 있다. (3) 12세기 중엽에서 14세기 초엽에 유럽의 봉건제도는 어떤 의미에서 그 개화 및 전성기를 경험하게 된다. 그러나 14세기와 15세기에 봉건사회의일반적 위기가 나타나 지속되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위기의 원인은 역병과 기근 등 재앙의 반복과 그 결과, 의심할 의지없이 생산력의 발전이라는 반대급부를 더 이상 제공해 줄 수 없을 정도로 농민대중에 대한 영주의 착취가 가중된 데 있었다. 게다가 국왕의 조세가 봉건적 조세에 첨가되고, 농민층의 내부에서도 사회적 분화가 시작되어 촌락공동체 내에서 부자와 빈자 사이의 대립 등이 나타났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이 마지막 위기는 아니었다. 왜냐하면 봉건세계의 쇠퇴가 고대세게의 쇠퇴보다는 비교적 덜 오래 끌었다고 할지라도 신흥계급인 부르주아지가봉건세계를 의식적으로 타파하고 이를 대체할 때 까지는 수세기(15-18세기)가 소요되었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소련역사학회의 봉건제의 기본 경제법칙에 대한 토론 내용이 게재되어 있는 <<역사의 제문제>>誌, 1955년 제5호에서 토론의 결론으로 봉건제에 대한 定義를 다음과 같이 내리고 있다. "봉건제의 기본 경제법칙은 대체로 다음과 같은 正式으로 압축될 수 있을 것이다. 경제외적 강제의 적용을 수반한 봉건적 토지소유를 기초로 농민을 착취하므로써, 봉건지대라는 형태로 잉여생산물을 확보하는 체제" 이상과 같은 봉건제에 대한 맑스주의적 해석은 봉건제의 개념을 사회경제적 기반위에 세움으로써, 이전의 오직 법제사적 측면이나 정치적 측면에서 만의 불충분한 이해를 보완하여 보다 유용하고 바람직한 봉건제의 기본성격을 파악할 수 있도록 했다. 특히 유럽사의 발전과정을 설명하는 데 그것은 매우 유력한 작업가설임에 틀림없으며, 중세 유럽사회의 특징을 이해하는 데 맑스주의적 봉건제 해석은 매우 유용한 개념들임이 사실이다. 그러나 문제는 이처럼 유용하고 유력한 작업가설을 세계사의 보편적 발전법칙으로 확대해석 할 뿐만 아니라, 심지어 이를 교조화하고 도식화하여 그 유연성을 잃게 하므로써 이를 무용화하고 무력화하는데 있다고 나종일 교수는 지적한다. 목차로
봉건제가 지니는 법제사적 측면, 정치적 측면 또는 사회경제적 측면 등 여러 측면을 포괄하여 한 사회의 특성을 종합적.총체적으로 파악하려는 해석이 마르크 블로크(Marc Bloch)로 대표되는 이른바 사회사적 해석이다. 이 부류의 학자들은 조르쥬 뒤비(Georges Duby), 자끄 르고프(Jacques LeGoff), 오토 브루너(Otto Brunner) 등이 있다. 봉건제에 관한 연구업적으로서는 아직까지도 이를 능가할 업적이 없는 그의 역저 <<봉건사회>>에서, 블로크는 봉건제가 그 자체로서 고립적으로 파악될 수 있는 하나의 제도라는 입장을 배격하고 그 대신, 전체성 속에서 파악되어야 할 하나의 사회형으로서의 봉건제 개념을 설정한다. <<봉건사회>>는 이같은 강력한 사회사 지향성을 바탕에 깔면서 봉건사회의 綜合史를 구축하려는 구상에서 태어난 저작이다. 그에 의하면, 봉건제라 불리는 사회유형은 그것이 자라나온 사회 특유의 조건을 가진 유럽에서 탄생한 것이다. 봉건사회는 고대사회가 야만인들의 침입에 의하여 무참히 교란된 끝에 형성된 사회이다. 유럽의 경제적.지리적 조건과 이민족 침입에 따른 사회불안이 당시 사람들의 독특한 심리상태를 유발시켰고, 이 심리상태가 봉건제도의 인간관계를 요구하게 되었다. 본질상 계서적이고 쌍무적인 이 인신적 유대의 개념이 유럽 봉건제를 지배했다. 완성된 형태로 발달한 봉건제의 주된 특징은 주종제와 봉제도에 있다. 여기서 봉건제도의 가장 큰 특징인 종속계약이 나타난 것이다. 주군과 종신의 상호의무는, 주군은 종신에 대한 보호의무와 종신은 주군에 대해 군사적 봉사의무를 진다는 원칙에 기초를 두었다. 그리고 장원은 봉건체제의 기본 단위였고, 교회는 장원의 주된 소유자의 하나였으며, 프랑크 시대의 모든 자유민은 군역의 의무를 지고 있었다. 사회경제적 상황은 지방분권의 방향으로 나아갔고 재판권, 화폐주조권, 징세권 따위의 모든 국가권력의 실질적 분산을 가져왔다.
封은 세습이 됨과 동시에 그 양도도 가능해지는 추세였으며, 세습은 봉건제도를 완결지음과 동시에 확실히 바로 그 기초를 문란케 했다. 봉건체제의 두드러진 특징들은 서유럽 모든 나라에서 비슷비슷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민족적 차이와 특수성은 있다. 12세기 말이 되면 유럽사회에는 여러 계급의 형성, 경제적 변화, 국가의 발전 등으로 특징지어지는 심층적 변화가 일어났다. 나아가 교환과 화폐지불에 입각한 새로운 경제체제의 출현은 封給者 계층의 확대를 가능케 했고 사회조직의 어느 단층에서든 封과 受封은 그 기능의 존재 이유를 잃었다. 이러한 경제적 변화는 다시 국가의 재탄생에 이바지했다. 마지막으로 봉건제가 근대사회에 남긴 가장 뚜렷한 유산은 政治的 契約觀念에 대한 강조에 있다. 이상과 같은 블로크의 봉건제도에 대한 설명은 다음과 같은 그의 요약으로 결론맺을 수 있다.
"농민층의 종속, 일반적으로 불가능하게 되어있던 封給制 대신에 봉사보유지, 다시말해 정확한 의미에서의 封土制度가 널리 채택되고 있었던 점, 전문적 전사계급이 차지하고 있던 우월한 위치, 인간과 인간을 서로 결속시켜 주었으며 또 위에서 말한 전사계급에 있어서는 家臣制라고 하는 유달리 순수한 형태를 띄고 나타났던 복종과 보호의 유대관계, 무질서를 발생케한 장본인이었던 권력의 세분화, 그러나 이런 모든 것의 와중에서도 또다른 양식의 인간집단, 곧 親族集團과 國家가 계속 살아 남았으며, 그 중에서도 국가는 봉건시대 제2기 동안 새로운 활력을 되찾게 되었다고 하는 점-그러니까 이상과 같은것이 유럽 봉건제의 기본적 특징들이라고 생각된다"
블로크의 연구는 경제적.군사적.지리적.심리적인 요인들을 포괄적으로 검토하고 있다는 점과 비교사회학적 고찰방법이 특징과 장점이다. 그러나 바르크의 비판에 따르면, 봉건제 발생의 기본 전제조건을 외부로부터의 침입과 같은 우연한 요인에서 찾게 되면 그것의 근본적인 법칙성은 간과될 수 밖에 없으며, 블로크는 봉건제가 성립할 때 지배적이었던 상황의 분석에 몰두하는 나머지 그것을 성립시킨 원인들을 탐구하는 데는 소홀히 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블로크의 영향을 많이 받은 봉건제도 연구자로는 조르쥬 뒤비를 들 수 있을 것이다. 그는 기사와 농민의 사회경제적 기반, 기사.성직자.농민 세 신분간의 관계 등을 중심으로 당시 사회를 포괄적으로 설명하려 시도하고 있다. 프랑스 中世史家로 손꼽히는 자끄 르고프, 장 동(Jean Dhondt) 등에게도 블로크의 영향은 완연히 보인다. 이들 社會史家들은 봉건사회의 특정한 측면에만 집중적인 분석을 가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당시 사회를 경제, 지배구조, 이데올로기 등 여러 방면에서 종합적.전체적으로 재구성하려는 시도를 하여 오늘날 널리 유포되고 있는 사회사적 접근방법의 전형을 보이고 있다. 비교적 최근의 사회사적 연구로는 알랭 게로(Alain Guerreau)의 <<봉건주의-그 이론적 비평>>을 들 수 있다. 그는 이 책에서 봉건주의를 역사적으로 분석하기 위한 네 가지 축으로 영주와 농민 사이의 지배관계, 인신적 의존 및 보호의 관계, 경제체계, 교회의 지배 등을 들고 있다. 어라한 접근방식 역시 봉건제도를 유럽사에 나타났던 독특한 사회형의 하나로서 포괄적으로 이해하려는 사회사가의 그것이라 할 수 있다. 오토 브루너의 사회사적 접근은 무엇보다도 지배현상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그는 "집(Haus)"을 지배관계의 기초단위로 설정하여 이로부터 토지지배, 도시내의 지배관계, 구가내의 지배관계로 시야를 넓혀간다. "집'은 자급자족적, 가부장적, 상호교환적 관계로 규정된다. 주인은 보호의 우산을 제공하며, 농민은 그 대신 조언과 조력으로 대가를 치른다. 그리하여 양자 사이에 신뢰와 충성의 관계가 성립하는데, 이 관계는 본질적으로 게르만적인 근원을 갖는 것으로 브루너는 이해하고 있다. 그는 이와같이 게르만 공동체의 지배구조에서 중세 유럽 봉건사회의 內部構成을 발견한 것으로 생각하며, 이 내부구성은 1930-40년대 파시즘 집권기에는 국민적 질서로 원용되었다가 전후에는 사회사의 구조개념으로 전환된다. 1939년에 나온 그의 저서 <<토지와 지배>>는 오늘날까지도 구조사의 선구적 업적으로 칭송되고 있다. 그는 또한 봉건제도에 대한 개념사적 접근으로도 유명하다. 몽테스키외, 헤겔, 맑스, 막스 베버, 오토 힌체로부터 쿨본에 이르는 다양한 봉건제도 개념에 대한 지식사회학적 비판위에 브루너는 후기에 이르러 보편사적 개념으로서의 봉건제도를 강조하기에 이른다. 그러나 그는 한편에서 봉건제도를 좁은 의미의 레엔관계로 규정하는, 일관되지못하는 입장도 보이고 있다. 그의 개념사적 접근이 유용하기는 하나 견해의 불철저함, 파시즘에의 동조 등으로 인해 브루너의 낭만적 경향은 비판을 받고 있다. 이상과 같이 봉건제의 사회사적 해석은 단연 마르크 블로크의 설명이 탁월한데, 그는 역사가 인간들을 대상으로 하고 있고, 인간행위는 종합적.복합적.집단적 관련 속에서 파악 가능하기 때문에, 따라서 인간에 대한 탐구인 역사란 다양한 인간적 삶의 전체에 대한 탐구이자 복합적인 사회 전체에 대한, 그리고 상당히 장기간에 걸치는 시대 전체에 대한 탐구일 수 밖에 없다고 주장한다. 그러므로 블로크는 인간에 관한 것이라면 지리학, 경제학, 인류학, 심리학, 사회학, 지형학, 농학, 고고학 등등 모든 학문분과의 성과를 샅샅이 이용하려 하였다. 다시 말하면 블로크는 오히려 잡다한 지식을 꿰뚫는 "거대한 생명의 움직임"을 포착하려 하고 있었다고 말할 수 있다. 목차로
본 절에서는 앞서 제해석에서 언급하지 않은 몇 명의 포괄적인 학자들을 언급하고자 한다. 먼저 봉건제도를 정치적 봉건제도(봉제도)와 경제적 봉건제도(장원제도)로 구분하여 파악했던 슬리허 반 바스(B.H. Slichher van Bath)는 봉건제도가 자연경제의 한 결과로 이해한다. 그리고 그는 정치적 봉건제도가 르와르 강과 라인 강 사이의 국가내에서 가장 완전한 형태를 갖추는 한편, 장원제도 역시 북부 프랑스와 독일의 라인란트에서 가장 크게 발달하였음을 볼 때, 경제적인 조건들과 사회구조 사이의 관계는 명백하다. 자연경제와 장원조직-때로는 경제적 봉건제도로 불림-과의 연관은 생산물과 부역을 제공해야 하는 의무에서 분명하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그는 封 및 농노신분과 자연경제와의 관계에 대한 문제를 우리들 연구의 중심문제로 삼는다면, 봉건제도가 얼마나 전형적으로 유럽적인 것인가 또는 얼마나 보편적인 것인가 하는 문제에 대한 답은 다음과같이 될 것 같다고 설명한다.
"만약 농노신분 이란 것이 자기의 생산물과 화폐를 공납해야만 하는 지배계급에 종속된 농민들을 의미한다면, 그것은 거의 모든 곳에서 발견될 수 있는 제도이다. 그렇지만 그것이 농노들이 장원영주로부터 유래되었거나 또는 농노들과 더불어 영주로부터 유래된 莊園裁判權 하에서 살아가는 制度라고 간주한다면, 그리고 그 안에서 그들이 재판의 결정에 다같이 참여하고 토지보유인의 사망이나 새로운 보유지의 인계 또는 장원의 이탈시에 지불할 수 있는 부과금들 같은 재판이 부과한 법적 의무들에 의하여 구속되는 制度라고 간주한다면, 그 제도는 순수하게 유럽적인 것이다. 만약 우리가 정치적 봉건제도, 군사적 봉사에 대하여 토지수여로 보상해 주는 戰士的 신분질서로 이해한다면, 이와 비슷한 조직은 여러 시대, 여러 장소, 예컨대 로마, 중국, 페르시아, 비잔티움, 이슬람화된 이집트 등에서 발견될 수 있다. 반면 그것을 종신이 동등한 입장에서 그의 주군에게 충성의 맹세를 서약하고 그에게-군사적인 원조뿐만 아니라-부조와 조언으로 보좌하며 그리고 그렇게 하는 데에서 저항권을 가지는 제도라고 한다면, 그것은 오로지 서유럽에서만 발견되는 제도이다. 자연경제 시대는-홀로 또는 화폐경제와 섞여-역사에서 자주 나타났다. 서유럽 자연경제 시대가 통상적인 것을 벗어났던 것은 적어도 서유럽의 한 부분이 전에 속했었던 지역들과 교역할 수 없게된 데서 연유한 것이다. 이에 더하여 그 영토는 귀금속이 매우 빈약 하였다. 이와 같은 "섬" 공동체 속에서 그들은 그들이 직면했었던 어려움들의 해결책을 그들 자신의 독특한 정치적.경제적 봉건제도라는 유럽적인 형태에서 찾았다"
다음은 신맑스주의 역사학자들로 분류될 수 있는 끌로드 까엥(Claude Cahen), 에티엔느 발리바(Etienne Balibar), 기 도꾸아(Guy Dhoquois)를 차례로 살펴보고자 한다. 끌로드 까엥은 봉건제도가 이 세계의 다른 지역에도 폭넓게 적용될 수 있는 편리한 개념임을 발견하고, 그 전체 발전과정에 관한 논의는 뒤로 물린채 개념 자체의 조작적 정의에 치중하고 있다. 까엥에게는 한 사회가 봉건적인가 아닌가의 문제가 제기되는게 아니라 얼마나 봉건적인가 하는 정도의 문제가 중요시 된다. 이러한 접근방법은 이년형적 방법이다. 에띠엔느 발리바의 구조주의적 맑스 해석은 정치와 경제 그리고 이데올로기 간의 상호관계 분석에 새로이 시야를 열어준 바 있다. 그는 <<자본론>>에 대한 집중적 연구 끝에 경제가 정치 및 이데올로기를 결정한다는 교조적 맑스주의 입장을 벗어나 삼자간의 상호 규정관계를 규명해냈다. 물론 경제적 요인은 궁극적 결정으로 부상하지만 결정의 성격 자체는 상황에 따라 다르게 판단된다. 그는 봉건주의 분석에서도 마차나지로 접근하여 경제적 요인과 정치적 요인이 서로 얽혀 봉건사회의 지배구조를 형성하고 있음을 밝혀내고 있다. 기 도꾸아는 교조적 해석을 벗어난 맑스주의 역사학과 비맑스주의의 실증적.비교적 연구를 모두 수용하여 종합화하려는 시도를 보이고 있다. 그는 "봉건성"과 "봉건제도'를 구분하여 설명하고 있다. 封建性이란 한무리를 지어 자체내에 위계서열을 갖고있는, 지배적인 전사집단이란 의미이고, 封建制度란 농민이 생산한 잉여물을 개인적으로 수탈.점유하는 생산양식을 뜻한다. 이러한 개념구분을 기초로 그는 유럽에 있었던 봉건적 생산양식과 다른 지역에 이따금 나타났던 봉건성을 지닌 사회구성을 구분지으려 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봉건제를 구조적.총체적으로 이해하기 위해 하부구조와 상부구조의 종합을 시도하여 서유럽 봉건사회의 기본적 특징을 제시한 이기영 교수를 언급하고자 한다. 이기영 교수에 따르면, 중세사회가 봉건제 사회라는 것은 모두가 인정하고 있지만 봉건제가 무엇이냐에 대해서는 유럽학계에서도 의견이 일치되어 있지 않다고 설명하고, 지금까지 봉건제에 대한 개념 정의는 봉건제를 어느 측면에서 보느냐에 따라 달라지는 시각의 문제로 되어왔다고 지적한다. 그리고 봉건제의 정의는 크게 두 가지가 있는데, 하나느 정치적.군사적.법제적 측면에서 봉건사회의 지배계급인 기사계급 내의 상호관계와 조직을 규정했던 봉건적 주종제도를 봉건제로 보는 것이고, 다른 하나의 정의는 봉건제를 사회경제적 측면에서 고대 노에제와 근대 자본제 사이에 존재했던 하나의 생산양식으로 파악하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그러나 오늘날의 학계에서는 봉건사회의 특정 측면만을 봉건제로 보기보다 사회경제적 측면을 중시하면서도 정치적 측면을 동시에 고려하는 경향이 강하다고 지적하고, 봉건사회를 구조적.총체적으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경제적.사회적 기초와 구조, 그리고 그 변동을 당연히 중심에 놓고 파악해야 할 것이며, 이러한 사회적 토대와 관련하여 상부구조적 측면도 무시되어서는 안된다고 강조한다. 이런 관점에서 파악한 서유럽 봉건사회의 基本的 特徵을 다음과 같이 제시하고 있다.
"주경제가 농업이라는 것, 농업에서 가장 중요한 생산수단인 토지가 영주적 대토지소유제로 되어있다는 것, 그러면서도 실제의 농업경영은 토지를 소유하지 못한 농민에 의해 소농적으로 경영되며, 토지소유자는 농민의 잉여노동을 노동 그 자체나 생산물.화폐 형태의 지대로 수취한다는 것, 독립된 가족생활을 영위하고 자율적으로 농업을 경영하는 농민의 잉여노동을 토지소유자가 수탈함에 따라 영주와 농민 사이에는 경제외적 강제관계, 즉 인신적 지배와 예속의 계급관계가 존재한다는 것, 그러나 토지를 소유하지 못하고 인신적 지배를 받으면서도 농민들의 촌락공동체가 존재했다는 것, 자연경제적 조건 속에서 대토지소유자를 위한 자급자족적 경제체제 유지가 장원적 또는 영지적 경영의 일반적 목표로 되어 있다는 것, 기사라는 전문적.직업적 무사층이 사회의 지배계급을 형성한다는 것, 기사로서의 군사봉사와 그 수행을 조건부로 하고 토지보유를 축으로 하는 주종제가 지배계급 내의 관계와 조직을 규정한다는 것, 대토짓유자들인 영주들에 의해 지방분권적으로 통치가 이루어진다는 것, 봉건적 사회체제의 이데올로기로서 로마카톨릭적 그리스도교가 지배했다는 것 등을 들 수 있다"
봉건제 제해석의 마지막으로 기타 포괄적인 봉건제 해석을 살펴보았는데, 현대의 봉건제 해석은 한 가지 측면만으로는 부족하고 여러 측면을 종합하여 총체적으로 이해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봉건제의 개념에 관한 여러 해석에는 서로 대립되고 엇갈리는 데가 많다. 이를 주장하는 학자들 사이에 좀처럼 의견일치를 보기가 어렵고 그래서 심지어는 피차간에 전혀 말이 통하지 않으 정도에까지 이르고 있는 형편이다. 그러나 법제사적 해석, 정치적 해석 도는 맑스주의적 해석, 사회사적 해석을 막론하고 이들 여러 해석들이 유럽 봉건제의 본성을 규정하는 데는 제각기 상당한 구실을 하고있는 것이 사실이다. 문제는 이들을 세계사에 확대 적용할 때 얼마나 타당하고 유용할 것인가 하는 데 있다. 가령 주종제와 봉제도에 법제사적 해석은 유럽사를 설명하는 데에는 명확하고 엄밀하지만 세계사에 적용하기에는 너무 편협하다. 지방분권을 중시하는 정치사적 해석은 세계사에 적용하기가 가장 쉽고 유용하지만 그 중 어느 시대의 특성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너무나 초시대적이다. 한편 맑스주의적 해석은 봉건제의 개념을 사회경제적 기반위에 확립한 점에서 탁월하지만, 봉건제를 인류역사의 보편적 발전단계의 하나로 규정한다는 점에서 너무 도식적이라는 비판을 면하기 어렵다. 사회사적 해석 또한 유럽 봉건제의 특징을 사회 전체의 안목에서 소위 총체적으로 다루려 하고 있다는 점에서 의욕적이며 고무적이지만, 그만큼 이를 세계사에 확대 적용하기에는 더욱 난점이 많다. 인간사회의 일반적 법칙을 정립하는 데 보다 주력하는 사회과학자들에 비해서 한 사회나 한 시대의 특징을 설명하는 일을 주임무로 삼는 역사가들은 전문용어에 대해서 정확한 정의를 내리는 일을 자칫 대수롭게 생각하지 않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비록 잠정적으로나마 용어에 대한 정의없이, 적어도 그것에 대한 자기 나름대로의 자각된 견해없이 제대로의 역사적 설명은 불가능하다. 학문적 용어로서의 봉건제의 개념에 대한 견해대립이 심한데다 통속적 의미로서의 남용까지 겹쳐 혼란은 더욱 가중되고 있다. 그러나 봉건제 또는 봉건적 이라는 말은 학문적 용어로서 뿐만 아니라 일상적 용어로서 이미 통용되고 있다. 봉건제의 개념에 대한 어떤 이해없이 역사상의 중요 주제, 가령 봉건제에서 자본주의로의 이행 또는 근대 시민사회의 성립 등과 같은 문제들을 논의할 수 없을 것이다. 목차로
봉건제에 대한 일면적 고찰은 봉건제의 복잡성을 해결할 수 없기 때문에 오늘날의 봉건제연구는 종합적, 포괄적, 총체적으로 나아가고 있다. 봉건제에 대한 올바른 이해와 봉건제 개념의 각 사용자마다의 차이와 애매모호성을 불식시키기 위해서는 구체적인 수식어가 필요하다고 생각된다. 예를들면, 지역적 수식어를 사용하면 서유럽 봉건제도, 중국의 봉건제도, 일본의 봉건제도, 러시아의 봉건제도 등으로 구분할 수 있고, 다음으로 분야별 수식어를 쓸 경우는 법제사적 봉건제도, 정치적 봉건제도, 사회경제사적 봉건제도, 사회사적 봉건제도 등으로 표현할 수 있으며, 중세 서유럽에만 적용시키는 개념으로 고전적 봉건제도 또는 협의의 봉건제도 그리고 18세기 시민혁명과 산업혁명 이전의 전근대적 사회 전체에 적용시키는 개념으로 광의의 봉건제도 등도 사용될 수 있을 것이다. 이와같은 구체적인 수식어 사용을 통한 봉건제 개념의 애매모호성을 해소하는 방법뿐만 아니라 봉건제의 시기설정 문제도 고려해야 한다. 봉건제의 시기설정 문제는 학자들마다 커다란 차이를 보여주고 있다. 먼저 우리는 봉건제가 중세 서유럽 사회에서 단순한 하나의 제도가 아니라 사회체제 그 자체였다는 것을 인정한다면, 따라서 봉건제의 성립이 중세사회의 성립이고 봉건체제의 붕괴가 중세사회의 종말을 뜻한다고 할 수 있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서유럽의 중세 봉건사회는 로마제국 말기부터 형성되기 시작해서 9세기경에 성립하고, 14-5세기에 해체된다는 것이 일반적인 정설이다. 그러나 강쇼프나 칼 보슬 같은 학자들은 엄밀한 의미에서 봉건사회라 할 수 있는 시기는 10-12세기로 설정하고 있고, 마르크 블로크도 9-13세기까지를 봉건시대로 잡고 있으며, 그리고 대부분의 맑스주의적 해석과 정치적 해석 학자들은 봉건시대의 하한선을 18세기 시민혁명 전까지를 잡고 있다. 여기에서 봉건제의 시기문제와 관게한 하나의 종합을 시도한다면, 중세 서유럽 봉건제도의 출발과 형성은 로마제국 말기 또는 게르만 사회 해체부터 시작되고, 전형적인 봉건제도의 특징을 보여주고 있는 봉건제도의 성립과 발전의 시기는 9-12세기이며, 12세기 이후부터 15세기까지는 봉건제도가 변화를 겪고 쇠퇴하는 시기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맑스주의 학자들과 일부 정치적 해석학자들의 18세기까지의 확대적용 문제는 중세 서유럽사회가 아닌 다른 여타 지역에서의 봉건제도 즉 광의의 봉건제도 개념으로 이해할 수 있다고 본다. 우리는 이렇게 봉건제도 개념을 협의와 광의로 구분하고 또한 구체적인 수식어를 사용하므로써 봉건제도 개념에 대한 정확한 이해를 도모할 수 있을 것이다. 이와같은 관점에서 봉건제도를 이해할 때, 우리는 봉건제도를 다음과 같이 정의할 수 있다고 본다. 봉건제도는 지구상의 전근대적 사회에서 흔히 발견될 수 있지만, 법제사적 특징으로 로마적 전통과 게르만적 전통을 가진 주종제적 군사조직과 봉토에 관한 법제도를 갖고 주군과 신하는 봉토를 매개로 쌍무적인 계약관계로 맺어져 있으며, 정치적 특징으로 영주가 불수불입권을 갖는 지방분권적 통치제도이며, 경제적 특징으로는 폐쇄적인 자연경제인 장원을 중심으로 중세 농민인 농노들은 영주의 경제외적 강제와 봉건지대를 수취당하는 지배.예속관계에 있었다. 이러한 봉건제도의 특징은 서유럽 봉건제도 고유의 특징이다. 목차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