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란츠 요제프 하이든(Franz Joseph Haydn)은 오스트리아의 작은 마을 로라우(Rohrau)에서 궁정의 수레바퀴 제조자인 아버지의 12자녀 중 둘째로 태어났다. 어려서는 삼촌에게서 잠시 음악을 배웠고, 1740년부터 10년 동안 빈에 있는 성 슈테판(St. Stephan) 성당의 소년 성가대원으로 있었다.
여기에서 몇 가지 악기를 배우기는 했으나 정식으로 음악교육을 받지는 못했으며 변성이 되어 더 이상 성가대원으로 일할 수 없게 되자 1749년 성가대를 나왔다. 1750년부터 10년 동안은 교회의 관현악단에서 연주를 하였고 건반악기 레슨도 하였다. 이 때에 메타스타지오의 소개로 이탈리아의 작곡가이자 성악 선생이었던 포르포라(Nicola Porpora)를 알게 되었고 그에게서 잠시 작곡이론을 배우기도 하였다. 그러나 하이든은 푹스(J. J. Fux)으 l[Gradus ad parnassum]으로 대위법을 익히는 등 주로 독학으로 공부하였으며 1758년에는 포르포라으 추천으로 모르친(Karl Morzin) 백작의 궁정 음악감독이 되었고, 이곳에서 목관악기를 위한 <디베르티멘토>와 첫 교향곡 D장조를 작곡하였다.
1760년, 알로지아(Maria Anna Alosia)와 결혼하였다. 그러나 결혼생활은 행복하지 않았다고 전해진다. 1761년에는 헝가리 귀족 파울 안톤 에스테르 하지(Paul Anton Esterhagy) 후작의 궁정 집사 겸 악장으로 들어갔으며 이곳에서 30년 동안 음악에 관련된 전반적인 일을 맡아서 하였다. 이 해에 2개의 첼로 협주곡, 콘체르토 그로소와 유사한 교향곡 6~8번엔 <Le matin(아침)>, <Le midi(점심)>, <Le soir(저녁)>을 작곡하였다. 작곡하는 일 이외에도 연주가들을 채용하고 이들을 교육하는 일을 하였다. 에스테르하지 궁에서는 매일 음악회가 열렸고, 주말에는 오페라 연주가 있었으며 수시로 방문하는 손님들을 위하여 하이든은 언제나 음악을 준비하고 있어야 했다. 이러한 막중한 일을 불평 없이 충실하게 수행하였으므로 에스테르하지 후작과 관현악단원들의 사랑을 받았다.
1762년 파울 안톤 에스테르하지가 사망하고 그의 동생 니콜라우스 에스테르하지(Nikolaus Esterhagy)가 그의 자리를 계승하였다. 그는 오페라 극장과 인형 극장이 딸린 호화로운 궁정을 재건축하였다. 하이든은 이 극장들을 위해서 5개 이상의 인형극과 수 십 편의 오페라를 작곡하였고, 니콜라우스 후작이 현악기의 일종인 바리톤(Baryton)을 즐겨 연주함에 따라 그의 요청을 받고 바리톤을 위한 실내악 작품을 200여 곡 이상 작곡하였다.
1766년, 베르너(Werner)악장이 사망하자 하이든이 악장이 되었다. 이 때부터 하이든은 궁정을 위하여 더욱 열심히 일하였고, 따라서 더 많은 음악을 작곡해야 했다. 1770년대부터 하이든의 명성은 전 유럽에 퍼졌다. 1780년 초에는 모차르트와 만났으며 교향곡과 현악 4중주 분야에서 서로가 영향을 받았다.
1790년, 니콜라우스가 죽은 후 그의 아들 안톤(Anton) 제후가 계승하였는데, 안톤 제후는 궁정으 어려운 재정 때문에 오케스트라를 해체하였다. 하이든은 풍족한 연금을 받고 에스테르하지 궁정을 떠나 빈으로 이주하였으며 이 때부터 궁정의 계약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창작 활동을 하게 되었다. 1791년 런던 관현악단을 위하여 교향곡을 위촉받고 잘로몬(Johann Peter Salomon, 1745~1815)의 협조 하에 1791~1792년과 1794~1795년 두 차례에 걸쳐 런던을 방문하여 이 곳에서 12개의 교향곡을 작곡하였다. 1791년, 옥스퍼드(Oxfold) 대학에서 명예박사 학위를 받으면서 이 날 행사의 여흥시간을 위하여 교향곡 제92번을 작곡하였는데 이 곡이 <옥스포드 교향곡>이다.
1792년에는 빈에서 베토벤을 만나 그를 지도하였고, 1795년 에스테르하지가(家)를 위해 궁정 악장직을 다시 맡고 니콜라우스 2세와 그의 부인을 위하여 6편의 미사를 작곡하였다. 그밖에도 몇 편의 현악 4중주와 종교음악, 영어로 된 6편의 시편송을 작곡하였고, 1797년에는 '황제의 찬미가'로 알려진 <Gott! erhalte Franz den Kaiser (신이시여! 프란츠 황제를 보호하소서)>를 작곡하여 황제의 생일에 헌정하였다. 이 작품은 오스트리아 국가로 사용되다가 1922년에 민네징거의 시에서 채택된 새 가사가 붙여졌고, 히틀러 통치 기간에는 나치당의 파티 노래로 쓰였으며 1990년에는 또 다른 가사를 붙여서 독일 연방 공화국의 국가로 사용되고 있다. 신교도 찬송가 <시온성과 같은 교회>의 선율로도 사용되고 있다.
말년에는 주로 현악 4중주와 미사, 오라토리오와 같은 종교음악의 창작에 치중하였다. 1798년에는 <Die Schopfung(천지창조)>, 1801년에는 <Die Jahreszeiten(사계)>을 작곡하였다. 1803년에 쓰기 시작한 현악 4중주 제103번은 2악장만 완성되었으며 이 작품을 마지막으로 하이든의 창작 활동은 막을 내렸다.
하이든은 모차르트와 함께 고전 양식의 대표자로 인정 받았지만 그는 이미 전시대의 양식을 경험했고 직접 사용도 하였으므로 그의 작품에는 바로크의 모든 양식과 전고전주의의 갈랑 양식, 엠핀트자멜 양식, 질풍노도 양식의 특징들이 자주 나타난다.
하이든의 작품 수는 정확히 전해지지 않고 있다. 하이든과 그의 제자들이 만든 작품 목록이 있지만 불완전하고 믿기 어려운 부분들이 많다. 1919년에 호보켄(Anthony van Hoboken, 1887~1983)이 수집한 유명 작곡가들의 작품 5000개 중 1/5 이상이 하이든의 작품이다. 호보켄은 이를 제1주제별로 목록을 정리했으나 후에 다른 음악학자들은 장르별로 목록을 작성했다. 현악 4중주, 교향곡, 건반악기 소나타의 작품 번호는 호보켄의 목록 번호와 일치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