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나는 고등학교에 진학하면서부터 연세대학교 법학과에 수시로 들어가겠다는 거창한 꿈을 안고 입학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나의 위치를 알게 되었고, 목표는 '성균관대, 한양대, 경희대학교 중 한 학교에 꼭 들어가자'로 바뀌었다. 사실 체 게바라도 이런 말을 하지 않았는가. "리얼리스트가 되자. 그러나 불가능한 꿈을 꾸자"라고…
1학년 2학기에 전교 부회장에 당선된 것은 정말로 크나 큰 행운이었다. 회장으로 출마하는 형이 내게 함께 일을 같이 해보자는 제의에 조금의 고민을 하고, 많은 준비를 한 끝에 나는 부회장에 당선된 것이다. 그 때부터 수시 모집에 꼭 도전을 해봐야겠다고 생각을 했고 2학년 2학기 때부터는 내가 목표하고 있는 대학교, 특히 한양대학교와 경희대학교의 전형을 시간이 날 때마다 보았다. 거의 30번은 본 것 같다. 손자에도 나와있다. 적을 알아야 이긴다고… 그 때 나는 경희대학교에 전교 부회장이 지원할 수 있는 '영예전형'이라는 것이 있다는 것을 알았고 경희대학교에 비중을 좀 더 두기 시작했다. 3학년 3,4월 달에 전국의 대학이 전형을 발표하는데 나는 정말 가슴이 떨렸다. 혹시나 영예전형이 사라지거나 혹은 영예전형의 지원 자격이 회장으로 제한되는 것이 아닐까 걱정을 했던 것이다. 그러나 발표 때는 학생회 부회장도 지원이 가능하단 것이 드러났다. '나도 지원을 할 수 있다' 라는 것 자체가 기뻤다.
3학년 1학기에 나는 선배들에게 많은 문의를 했다. 사실 우리 학교에서 수시 1학기에 서울 쪽에 진학한 선배는 한 명도 없었기 때문에 선배들은 많이 치중을 하지 마라고 했다. 가장 많이 들었던 말은 '절대로 열심히 하지 마라' , '꼭 들어가야겠다는 생각은 하지 마라'였다. 하지만 내 생각은 달랐다. 선배들이 그렇게 말하는 것은 그 들 스스로가 제대로 준비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게다가 경희대는 70%가 논술과 구술이었고 1차를 따로 뽑지 않는 일괄 합산 전형이기 때문에 이것이 '내 길'이라고 생각했다. 아무튼, 3학년에 와서 나는 수시 1학기에 지원하겠다고 결심을 하고 담임선생님께도 말씀드렸다.
논술의 준비
난 논술이라는 것을 고등학교에 와서 처음 접해보았다. 논술은 4월부터 준비했다. 학원에도 등록을 했다. 처음 두 글을 써서 국어 선생님께 보여드렸는데, 엉망이었다. 글도 아니었다. 논지를 파악하지도 못했고 내용도 좋지 않았고 맞춤법도 많이 틀렸다. 하지만 나는 적어도 일주일에 두 번 이상 써보았고 기말 고사 기간에도 써 보는 열정을 발휘했다. 거의 14번째 썼던 글에서 선생님께 칭찬을 받았다. 그것도 작년 경희대학교 정시 문제였기 때문에 기분이 더 좋았다. 글을 계속 써 나가면서 어떻게 논지를 파악하고 개요는 어떻게 쓰며 시간 관리는 어떻게 해야겠다는 것을 저절로 익힐 수 있었다.
논술의 자료는 내가 직접 책을 산 것도 있고 인터넷사이트를 뒤지면서 구한 것도 있었다. 어떤 자료는 A4용지 150장이 넘어가는 것도 있었는데 그것들을 보면서 논술의 기초를 다져나갔다. 글을 쓰는 것의 감을 잃지 않으려고 2일 혹은 3일에 한 번씩 글을 썼고, 중간고사 때는 잠시 손을 놓은 적도 있었다. 논술 시험을 앞두고서는 기말 고사가 겹친 관계로 4일에 한 번씩 글을 썼다. 논술 시험을 보기 전까지 내가 직접 써 본 글은 25편 정도가 될 것이다. 많이 쓰면서 자신이 익히는 것도 중요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논지의 파악이다. 논지를 어느 정도 파악한다면 글의 50%는 쓴 것이나 다름없다고 생각한다.
구술의 준비
구술도 논술과 함께 학원에 등록을 했다. 논술과 구술을 전문으로 하는 학원이었기 때문에(이슈투데이에 투고하는 선생님이 계신 곳 ^^;;) 아무 고민 없이 등록을 했고, 학교에서도 내가 직접 자료를 찾아 담임선생님께 출력을 부탁드렸다. 자료는 정말 많이 읽었다. A4용지 400장정도 되는 분량을 석 달간에 걸쳐서 읽었다. 물론 이슈투데이도 꼼꼼히 읽었다. 하지만 아무리 많이 안다고 하더라도 질문의 초점을 제대로 읽어내지 못하면 심층 면접에서 제대로 된 점수를 받을 수 없다. 가장 중요한 것은 질문이 요구하는 바가 무엇인지 제대로 파악하는 것이다. 난 면접 며칠 전에 질문의 초점을 찾는 훈련을 했다. 그것이 큰 도움이 된 것 같다.
시험장에서
논술 고사
시험 당일 날 나는 시험시간 30분전에 시험장에 도착했다. 논술 고사가 9시 30분부터 있었는데 이미 많은 학생들이 자리에 앉아 대기하고 있었다. 자리에 앉아 있는데 옆에 앉아있는 여학생이 말을 걸어왔다. 아무래도 긴장을 풀려고 애를 쓴 듯 보였다. 부산에서 온 학생이었는데 서로 열심히 하자는 말을 하고 시험에 임했다.
논술 고사 문제는 제시문 두 개를 주고 제시문의 논지를 요약한 후, 제시문중 한 관점을 택해서 '스크린 쿼터'를 예를 들어 논하는 문제였다. 제시문은 세계화가 문화산업에 미치는 영향에 관한 것이었다. '가'글은 세계화가 진행되더라도 문화의 정체성은 지니고 있어야 한다라는 글이었고 '나'글은 세계화가 진행되면서 자국의 산업을 보호하려는 경향이 있는데 이것이 오히려 문화의 질을 떨어뜨린다'는 글이었다.
나는 먼저 제시문의 논지를 요약한 후 요즈음 한·미 투자협정이 이루어지고 있는데 스크린쿼터가 문제가 되고 있다고 서론을 썼다. 후에 진정한 세계화와 현재 그 세계화가 잘못된 방향으로 나가고 있다는 점. 그리고 문화의 정체성이 이루어져야하는 이유를 쓰고, 스크린쿼터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해야 한다고 썼다. 결론은 열린 마음으로 세계문화를 주체적으로 수용해야한다고 썼다.
연습지가 따로 나왔는데 난 연습지를 활용하지 않고 바로 썼다. 연습지에는 개요와 글자 수를 꼭 맞춰야 할 부분만 연습으로 써 보았다. 나는 평소에 먼저 쓰고 고쳐가며 쓰는 것이 아니라 개요만 먼저 짜고 바로 쓰는 식으로 연습을 해왔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나서 퇴고하는 것이 연습이 되었기 때문에 바로 글을 써 나갔고 나중에 교정부호를 써 가며 고칠 부분만 고쳤다.
20∼30분 정도가 남았던 것으로 기억을 하는데 6인용 책상에 내가 가운데에 앉아 있었기 때문에 나가기가 좀 그랬다. 그래서 나머지 시간동안 내 제시문을 5번 정도는 본 것 같다. 그리고 침착히 끝나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어쨌든 그렇게 논술 고사는 끝마쳤다.
구술 고사
구술 고사는 1시 30분부터 진행되었다. 점심을 광주에서 같이 올라온 친구들과 함께 점심을 먹고, 고사장에 입실했다. 두 개의 조로 나누어서 면접을 보았는데 각각 다른 층에서 시험을 봤다. 그리고 운 좋게도 나와 내 친구가 수험번호가 나는 끝이 9, 그 친구는 7이라서 함께 앉아있을 수 있었다. 서로 긴장을 푸는데 많은 도움이 된 것 같다. 주위를 두리번거렸는데 잠을 자는 친구들도 있었고 자신이 가져온 자료를 보는 친구들도 있었다. 나는 아무것도 보지 않았다. 사실 가져온 자료도 없었다. 자료를 본다고 해서 잘 되는 것도 아니고 심층 면접의 관건은 질문의 의도 파악이기 때문이다. 한 시간이 조금 넘게 지나자 드디어 내 차례가 왔다. 심호흡을 한 번 하고 교수님이 계시는 곳 앞의 책상에 앉아 있었다. 7분전에 조교 누나가 문제지를 보게 하였다. 모두 네 개의 질문이었는데 그 중 두 개를 골라서 답하는 형식이었다. 내가 답했던 질문만 생각이 나는데, 나는 출산율이 저하된 원인과 그 파장에 대한 것과 석굴암은 단순한 돌덩어리에 불과한데 왜 이러한 문화재가 천문학적인 가치를 지니는지에 관한 질문을 선택했다. 드디어 내 차례가 왔다. 교수님이 계시는 곳으로 들어갔다. 교수님은 모두 세 분이 계셨다. 문을 열고 책상이 있는 곳으로 가서 큰 소리로 그리고 정중하게 인사를 했다.
"안녕하십니까."
교수님들이
"그래요" 하시면서 자리에 앉으라고 하셨다. 교수님들의 표정이 그리 밝아 보이진 않았다. 하지만 난 자신감 있고 밝은 표정으로 임했다.
"네, 감사합니다."
내가 볼 때 제일 오른 쪽에 앉아 계신 교수님이 물으셨다.
"자기 소개를 간단히 해 보세요"
그런데, 시작이 이상했다.
"네, 저는 광주에서 올라온 안갑철입니다."
학원에서 그랬다. 인적사항 같은 거 절대 하지 말라고. 너무 긴장한 아무튼 출발은 이렇게 시작했다. 하지만, (조금 머뭇거렸지만)
"네, 하지만 이런 것보다는 저 자신에 대하여 말씀드리겠습니다."
교수님들의 표정은 냉정했다. 하지만 난 두려워하지 않았다. 2초후에.
"저는 목표가 확실한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그 어느 누구보다도 목표에 대한 열정이 대단한 사람입니다. 사실 저의 목표는 사법시험을 통과하는 것인데 그 목표를 위해서 이 대학에 지원을 했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목표를 이루기 위해서 많은 노력을 할 것입니다. 중학교 3학년 때는 법전을 사서 공부한 적이 있을 정도로 목표에 대한 집착이 강한 사람입니다. 저는 어떤 목표가 있으면 그 목표를 이루기 위해서 최선을 다하는, 그런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자기 소개가 잘 된 것 같지는 않았다. 너무 긴장했던 탓이었다. 사실 나의 지원 동기에 대해서는 정말 많은 준비를 했었다. 하지만 나는 교수님의 물음이 그리 중요하다고는 생각지 않았다. 또한 그런 소개가 길면 더 악영향을 미칠 것 같아서 이런 대답을 했던 것이다.
그 교수님이 말씀하셨다.
"거기 밑에 네 가지 질문이 있죠? 그 네 가지 중 어느 것을 택했고 그것에 대해 말해보세요."
"네, 저는 2번과 4번 질문을 택했습니다.(아마도 2,4번 같다.) 먼저 2번에 대한 질문에 대하여 답하겠습니다.
사실 우리나라의 출산율은 세계 최저인 것이 현실입니다. 이러한 출산율이 낮은 것은 경제적인 관점에서 생각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나라의 경우 남녀가 결혼을 하게 되면 남편이 직장에 나가서 돈을 벌어오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하지만 이렇게 남자 혼자서 돈을 벌어오는 것이 가정에 경제적으로 안정적이지 못하기 때문이 많은 여성들이 사회에 나가는 경향을 보이게 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여성들이 사회에 진출하는 것이 많아지면서 가정에서 아이를 갖게 되는 것이 힘들어 지고 그에 따라서 출산율이 저하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렇게 출산율이 낮아지게 되면 우리나라의 노동가능인구가 줄어들기 때문에 국가 경쟁력이 약화되고, 또한 상대적으로 더 빨리 고령화사회가 되어 그로 인한 많은 문제들이 생길 수 있습니다."
가운데에 계신 인상을 쓰고 계시는 교수님이 물으셨다.
"그 대책은?"
"네. 그것은 국가적, 그리고 개인적으로 해결할 방안을 찾아야 합니다. 국가적으로는 출산장려금을 지급하는 등의 정책적이고 제도적인 차원으로 문제를 해결해 나가야 하고 개인적으로는 국민 개개인이 자신이 낳는 아이가 국가 경쟁력의 바탕이 되며, 그러한 것이 국가에 도움이 되니 국민 전체를 위해서라도 아이를 낳아야겠다는, 그런 생각을 갖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4번에 대해서 답변할까요?"
오른쪽에 계신 교수님이 고개를 끄덕이셨다.
"네. 답변하겠습니다. 사실 석굴암 같은 것이 물리적으로 볼 때 단순한 돌덩어리에 불과합니다. 하지만 이렇게 단순한 돌덩어리에 불과한 것이 천문학적인 가치를 갖는 이유는 그것이 우리 조상들의 얼과 정신이 담겨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또 그러한 것이 현재에는 과학적으로 보존이 잘 되고, 그런 식으로 증명이 되었는데 그 때 당시에 과학적으로 증명이 불가능한데도 그렇게 만든다는 것 자체가 위대한 것이기 때문에, 천문학적인 가치를 지닌다고 생각합니다."
가운데에 계신 분이 후속질문을 던지셨다.
"그렇다면, 문화재의 보존과 지역을 개발을 위해서 문화재의 훼손을 가져올 때에는 어떻게 해야하나??"
"잠시 생각할 시간을 주시겠습니까?"
3초 후에 그 교수님이 말씀하셨다.
"아니, 그냥 자네의 평소 생각을 말해보게."
"네. 답변하겠습니다. 문화재의 보존과 지역개발이 상충되었을 경우에는 문화재의 보존을 우선적으로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지역개발도 중요하지만 지역개발을 해서 이익을 내는 것보다는 문화재 자체가 가지는 가치가 더 크기 때문입니다. 저는 오히려 문화재를 지역 관광상품화 시켜서 그것을 이용해서 지역의 수입을 취하는 것이 더 나은 방법이라고 생각합니다."
제일 왼쪽에 계신 교수님이 새로운 질문을 하셨다.
"자, 다음은 자유전공문제입니다. 음, 가장 인상깊게 읽은 책이 무엇인가?"
2초간 생각하다 내 머릿속을 스치는 것이 있었다. 그것을 말했다. 사실 이 전에 준비할 때도 그것을 이야기했다.
"네. 저는 체 게바라 평전을 가장 인상깊게 읽었습니다. 체 게바라는 아르헨티나 출신의 쿠바혁명가인데, 그는 쿠바를 혁명한 혁명가일 뿐만 아니라 의사자격증도 지니고 다재다능한 면을 지닌 사람이었습니다. 저는 그러한 그의 모습이 보기 좋았습니다. 책에서 가장 인상깊었던 부분을 말해도 되겠습니까?(이 질문은 왜 했는지 모르겠다.)"
고개를 끄덕이셨다.
"네. 책의 어느 한 부분인데, 거기서 체와 동료가 함께 있었습니다. 멀리 적이 보였는데 동료가 그를 총으로 쏘려 하자 체가 말렸습니다. 적은 우리가 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다. 그런데 이 상황에서 우리가 쏘게 되면 그것은 정당한 승부가 아니다. 오히려 더 비겁한 것이라며 동료를 말렸습니다. 적까지 생각을 하는 그의 인간적인 모습은 제게 큰 감명을 주었습니다."
2초 있다가 덧붙였다.
"그리고 체가 한 말이 생각이 나는데, 리얼리스트가 되자. 그러나 불가능한 꿈을 꾸라는 그의 말은 제 인생에 큰 영향을 주었습니다. 또 그의 그런 말이 제가 추구하는 인생의 방향과도 비슷하기 때문에 더 큰 영향을 주었다고 생각합니다."
교수님들이 고개를 끄덕이셨다.
"네. 됐어요. 나가보세요."
일어나서 인사드렸다.
"네 감사합니다."
밖으로 나갈 때, 뒤로 돌아서서 문을 닫았다. 교수님들이 모르게 끝까지 지켜보신다는 말을 들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구술 고사는 끝났다.
마치면서
경희대 시험이 있고 나서 며칠 후에 성균관대 논술시험이 있어서 그 기간까지는 합격자 발표가 그리 기다려지지 않았다. 하지만 성균관대 시험 다음날 합격자를 발표했다는 소리를 듣고 확인을 해보니, 두 글자였다. 정말 믿어지지 않았다. 그 날 기숙사에서 나오고 내 세상인 것만 같았다.
내가 합격을 한 것은 나의 강력한 의지가 제일 크게 작용한 것 같다. 주위 선배들이나 친구들은 무모한 것 아니냐고 했지만 난 해냈다. 주위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내 의지로 전략적으로 수시 모집을 준비한 것이 좋은 결과를 낳게 한 것 같다.
또한 부모님의 격려와 지원, 선생님들의 격려가 내게 가장 큰 힘이었다. 그로 인해 자신감을 얻고 그 자신감을 유지하며 시험장에서 최상을 결과를 이끌어내는 과정을 보낸 것. 그것이 마지막에 '두 글자'를 보게 된 것이라고 생각한다.
난 정말 눈물나게 열심히 했다. 일주일에 세 번 정도 하루 다섯 시간 이상 투자했으며 주말에는 논술, 구술학원에 다녔다. (많은 시간을 투자했다고 해서 좋은 것은 아니지만ㅡㅡ;;) 가와이 준이치라는 선생님이 한 말이 있다. '한번도 내 노력이 배신당한 일은 없었다.' 나도 그 생각으로 수시 모집을 준비했고 그랬기 때문에 좋은 결과가 나온 것 같다. 남은 기간동안 차분히 준비해서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