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색다른 신비가 살아있는 곳 만만디 中 國
여름의 끝자락인 9월 하순. 새로운 중국문화를 경험한다는 생각으로 다시 찾은 중국역사속의 북경. 여행은 다양한 견문과 경험을 얻게하고 다른 문화와 풍물을 이해하게 하여 인간을 성숙시키는 가장 좋은 길잡이라고 생각된다.
일찍이 괴테는 말하기를 "젊어서는 여행을 하며 살고, 늙어서는 추억에 산다"하였다. 일상을 벗어난 여행은 우리를 한없이 자유롭게하고 새로운 각오를 다지게 한다. 이번에 떠남은 그러한 기대에 재충전과 '새로운 중국을 경험한다'는 상념에서였다. 먼저 찾은 곳은 명 13릉.
明 十三陵 풍수속에 새로움이 가득한 진짜 중국역사
풍수를 알면 광활한 대륙중국의 색다른 신비의 문화적 향기를 가득 안을 수 있다. 북경시 중심으로부터 북서쪽으로 50km 떨어진 곳에 자리한 명나라 제왕들의 능묘. 그곳이 바로 명 13릉이다. 명대의 풍수는 산천의 지세가 뛰어난 형법을 중요시했지만 궁중에서는 후손의 번청과 왕권계승을 염원했기 때문에 높은 예술성을 함께 강조했다. 명 13릉은 1409년 장릉을 건설하기 시작하여 1644년 명조의 멸망에 이르기까지 2백여년동안 끊임없이 건설하였던 옛 봉건체제의 가혹함을 온몸으로 느낄 수 있는 곳이다. 역사란 어느나라를 막론하고 인민위에 군림하는 전제권력에 의한 희생과 고통의 산물이 아닐까 생각되어 진다.
명조 3대 영락제부터 마지막 승정제까지 13명의 황제능묘가 이 속에 있다. 자고이래 황제는 능지를 선택함에 있어 자신이 묻힐 땅의 선택은 특별히 중시하여 황제가 친히 왕림하여 검토한 후 定穴하였다. 그래서 영락 7년에 친히 결정한 곳이 현재의 천수산 일대이다. 이곳의 산세는 곤륜산에서 이어져 만리장성을 쌓고 주산인 천수산을 정점으로 남쪽의 용산(청룡)과 호산(백호)이 좌우로 나뉘어져 기세가 풍만하고 능지로서 절묘한 배경을 이루어 만세 복락지이다. 기록에 의하면 용두와 호미가 조화를 이루고 혈장에는 기와 바람이 모여있고 용호귀사, 일월성신과 더불어 모든 신령이 이쪽에 등지를 트는 것이라고했다. 사후에도 황제로 살고 싶었던 비뚤어진 욕망의 그들은 1409년 천수산 일대 80리를 통행금지구역으로 선포하였다 한다. 이곳은 풍경이 아름답고 산세가 숨을 죽이고 있는 곳 같아 난공불락의 요새지로써 왕능을 보호하고 자금성을 보호하는데 금상첨화로 여겨왔던 것이다. 현재 이곳에는 장릉과 정릉이 발굴돼 개방되어 있다. 일반 관광객에는 정릉만이 개방되어 있다. 이 정릉은 명나라 13대 황제 만역제와 그 황후를 모신 능이다. 萬歷帝는 22세에 황제가 되자 정치에는 관심이 없고 유흥을 즐기다 당시 명나라 국가예산 2년분을 갖고 6년에 걸쳐 이 묘를 만들었다고 한다. 주색에 빠진 황제는 생전에도 자신이 만든 지하궁전 능묘에서 연회를 베풀었다고 한다. 지하궁전은 향나무로 둘러싸인 언덕위에 입구로 들어가 관람하게되어 있는데 지하 20m 지점을 9계단을 따라 내려가야 한다. 지하궁전을 둘러보고 나오면 비석이 하나 서 있다. 이것에 특이한 것은 돌비석이 위풍 당당하게 서 있지만 전혀 문자가 없다는 것이다. 이를 無字碑라고 한다. 생전에 주색에만 빠진 황제라 사후에도 기록할 치적이 없어 글자 하나 새겨 넣지 않은 無字碑 비석으로만 세우게 되었다고 한다. 사후세계 보장을 위한 삐뚤어진 욕망이 후세에남긴 교훈이구나 생각하니 흥미가 가득하다. 명나라 제3대 황제 영락제의 능인 장릉은 13능중에서 제일 크고 오래된 것이지만 현재 지하궁전을 발굴만 했지만 아직 예산 관계로 손을 못대고 있어 신비로 가득찬, 기대되는 능으로 있다. 풍수속에 새로움이 가득한 중국역사 속으로 여행을 위해 발길을 고궁으로 돌렸다.
천년 王城의 문화박물관 - 紫禁城 북경의 상징 - 天安門
북경의 중심지이며 현대중국의 상징이기도 한 천안문은 명나라 초기에 지은 것으로(영락 15년 1417년) 당시에는 승천문이라고 했으나 1651년 전화로 소실된 것을 새로 지으면서 천안문이라고 했다. 고궁의 남문에 해당되는데 문이라기보다는 하나의 궁전이라고 할만큼 웅장하다. 명, 청대에는 황제가 조서를 발표할 때 여기서 의식을 행했고 1949년 10월 1일 장개석 총통이 대만으로 쫓겨가도, 모택동이 중화인민공화국 건국을 선포한 곳도 이곳이다. 천안문은 황궁의 남대문(정문)으로 건축은 歇山式으로 가옥정상 중앙에 하나의 등마루가 있고 서쪽으로 네 개의 등마루가 있으며 전후 네 귀퉁이가 기울어져 정상에 가까울수록 평평해지는 아름다운 곡선을 이루고 있다. 천안문 앞은 5개의 다리가 있고 중산공원앞의 다리는 모두 7개이며 명, 청대에는 가운데 것을 어교라고 했는데 황제만이 사용할 수 있었다. 어교 좌우에는 왕공교로 천왕들이 통행했다. 왕공교 좌우에는 3품이상 문무백관만이 통행했다. 4품이하 관원은 우화하여 태모(인민문화궁)의 공생교로 통했다고 한다. 현재의 자금성은 주체가 연왕이 되었을때(1409년) 남경에서 북평으로(1420년) 천도 정식으로 개칭 북경으로 개칭하였다 한다. 11년동안 궁전을 건축 후 이주한 봉건시대의 황제가 거주하는 곳은 일반 백성의 출입이나 접근을 금지시켰으며 주위는 높은 성벽을 둘러쌓았다가 또한 경계가 삼엄하여 당시 황제 및 황후, 비, 황족과 태감만이 그 안에서 생활할 수 있었기에 금성(禁城)이라 한 것이라고 한다.
자금성 입성은 대개 천안문광장을 둘러보고 金水橋를 넘어 천안문, 서문, 오문을 거쳐야 성내부로 비로소 들어갈 수 있다. 자금성은 일반적으로 中축선 평면배치를 채택했는데 가령 오문은 삼대전에서 후삼궁에 이르러 화안전을 거쳐 마지막 신무문에 이른다. 이러한 궁전의 한가운데는 모두 남북방향이 직선 하나로 관통하며 이것 또한 북경의 모든 성이 영안문, 정문에서 지안문 능루에 이르는 8km 긴 증축선상에 놓여져 있다. 황권통치의 중심을 상징하는 명조 3태전 용의 옥좌는 바로 중측선상에 놓여져 있다. 증축선 양측 건축은 대칭구조로 되어 있는데 주요목적은 봉건 통치계급의 위엄을 한껏 나타내기 위함이었다. 궁중배치의 기본원리는 상징적인 것으로 나타내어 건정궁, 곤녕궁은 명조 2대 황후가 기거하던 곳으로 궁전의 이름을 天, 地, 乾, 坤을 상징하고 궁 양측 일정문, 월하문은 해와 달을 상징하고 본궁의 동서 6궁은 12성진을 상징하며 동서 6궁은 별들을 상징한다고 한다. 건축재료는 모두 사천귀주, 운남 등의 큰 산에서 채취해온 목재로 큰 나무를 쪼갠후 비가 많이 오는 계절을 기다리고 있다가 산의 홍수를 이용해 끌어내려 양자강과 황하의 수로를 통해 북경으로 옮겨 왔다고 한다. 또한 석재는 대부분 북경 부근 방산, 반산 등에서 채취해온 것이다. 그런데 그런 200톤이 넘는 대리석을 어떻게 옮겼을까? 궁내에서 가장 큰 석조는 보화전 석각계단으로 돌위에 용문양이 꿈틀거리는 양 새겨져 있다. 돌의 길이는 16.7m, 폭 3.07m, 두께 1.7m, 중량은 약 200톤이다. 이 돌은 북경 서쪽 방산에서 채취한 것인데 겨울에 길을 따라 1리마다 우물을 파고 길에 물을 뿌려 빙판길을 만든다음 운반했고 기타 계절에는 둥근나무를 길에 깔아 도로를 만들어 운반했다고 한다. 기록에 의하면 명조 고궁 건축에 동원된 사람은 10만 공인과 100만 잡역부가 참여했다고 한다.
몇일전 어두운 밤 중국역대황제들의 위패가 모셔진 태묘(太廟) 앞에서 세계적 음악가들의 노래가 울려 퍼져 동서양의 조화를 이루었다는 오페라 '투란도트' 자금성공연 장소를 지나 봉견통치의 핵심장소 太和殿으로 향했다. 태화전은 명대황제가 정치를 하던 곳으로 자금성 중에서 가장 귀하게 여겨지는 곳이다. 붉은 벽과 황금기와로 덮혀있다. 고궁건축에 사용된 색을 외관상에 아름다움을 추구하기 위한 것외에 더욱 두드러진 것은 봉건 통치의 권위를 나타내기 위한 것이다. 황색은 통치계급의 존귀함을 상징한 색깔이며 오행학설상에 중앙에 방위를 나타낸다. 붉은색은 중국에서 아름답고 원만하며 경사롭게 여겨지는 색으로 장엄과 행복을 의미한다. 고궁은 황제가 거주하는 궁전으로 대체로 황색기와와 붉은벽을 채택하여 위엄을 한껏 높이고 또한 능묘와 황제가 건축을 명령한 건축만이 황색유리와 기와를 사용할 수 있었으며 이 규정을 어기면 극형에 처했다고 한다.
9천명의 궁녀를 거느린 황궁..... 청대에는 궁녀가 두 종류로 나뉘었는데 하나는 수녀이고 하나는 궁녀이다. 수녀는 궁중의 궁녀이고 궁녀는 후비들을 모시는 시종으로 모두 팔기급 가정에서 출생된 여자로 선택되어 궁중에 들어온 것으로 종종 임금님의 소실자리에 오를 수 있었다. 바로 자희 서태후가 이렇게 수녀 출신으로 간택되어 영화를 누렸다. 수녀는 3년에 한번씩 차출하는데 팔기급관원의 여식은 그 행사에 보내져야하며 궁녀는 매년 한차례씩 채용했다. 수녀가 궁에 들어와 25세 전후까지 황제의 마음에 들어 소실이나 귀인 등이 됮 않는다면 궁을 나갈 수가 있으며 궁녀는 일정기간 복무하면 출궁할 수 있었다. 명대말기에는 황궁의 궁녀수는 9,000명이었고 태감은 10만명에 이르렀다고 한다.
이화원 부패통치의 대명사 자희 서태후 별장
자희 서태후의 욕망이 아직도 느껴지는 이화원은 황제의 여름별장으로 알려져 있다. 이화원의 이는 휴식과 요양의 의미이며 화는 화해롭고 평안하다는 뜻으로 통치에 반항하는 사람이 없으므로 매우 편안하게 즐길 수 있다는 뜻이다. 이화원은 약 800년전 금나라때부터 황실의 주목을 받은 옥천산의 천수를 만수산 아래로 끌어들이면서 금수하(錦水河)라고 불렀다. 1949년 명 효종때 원정사를 건립하고 금해로 개명하였다. 그후 1750년 청나라 건륭 15년 고종황제는 자기 모친의 60회 생일을 기념하여 원정사 원터를 대보수하여 대보은 여수사로 건축하였으며 산의 이름도 만수산으로 고쳐 불렀다. 대보은 연수사를 건축하면서 동시에 신하에게 명령하여 풀을 베고 물길을 뚫어 옥천수가 막힘없이 흐르도록 산아래 호박(湖泊)을 철저히 개조하여 맑은물이 고이도록 했다. 이것이 바로 곤명호 호수이다. 1764년부터 15년간 역사 끝에 완공을 본 후 대보은사와 곤명호의 뜻을 합쳐 청가원(淸佳園)이라 불렀다. 1860년 영, 불 연합군의 공격으로 북경이 함락되면서 모두다 보물이 약탈당하고 불태워 버렸는데 이때 불에 타지 않은 건물은 동정, 지혜해 다보탑뿐이다. 그 후 1866년 자희 서태후는 자신의 향수를 위해 광성황제가 해군을 창설하려던 예산, 8,000만량의 은을 남용하여 만수산 앞산에 재건축을 한후 이화원으로 고쳤다.
1900년 광서황제때 8개국 연합국이 재침략으로 북경이 또다시 함락되었을 때 두 번째 피해로 전부다 소실되다시피 했다. 자희 서태후는 서안으로 피신했다가 돌아온후 백성들의 고난과 고통은 아랑곳하지 않고 이화원을 재건축하였다. 이화원에 처음 들어서면 왼쪽으로 시원하게 전개되는 곤명호가 유람선을 띄우고 있다. 유람선을 타고 멀리서 보는 이화원의 전경도 매우 아름답다. 바른쪽으로 만수산위에 여수사가 황제의 원림답게 자리잡고 있다. 이곳은 주로 정치활동구, 생활거주구, 풍경유람구 지역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풍경유람구는 만수산의 앞산, 뒷산, 곤명호로 구분할 수 있다. 이화원중에서 가장 훌륭한 원은 비취원이며 그 다음이 꼬불꼬불한 장랑(長郞)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특이한 것은 장랑의 그림이 하나도 같은 것이 없다. 이 그림은 서태후가 소설을 읽은 다음 산책을 할 때 기억하기 위해서 한 장면 한 장면 그림으로 표현한 것인데 당대의 유명한 화가로 하여금 그리게 하였다고 한다. 자희 서태후가 수렴청정했던 인수전을 돌아 욕망의 궁전, 낙수당에서 시중을 들던 궁녀 수만도 1천명이 넘었다는 바을 들여다보니 호화로운 침실답게 잘 보존돼 있었다.
낙수당은 자희 서태후가 기거하던 곳일뿐 아니라 식사도 이곳에서 했는데 한가운데 보좌에 앉고 이때 앞에는 3개의 상을 차리게 했고 이 3개의 상에는 128종의 음식을 차려 금으로 만든 그릇에 담았다. 매식사때마다 백을 2.7㎏ 상당하는 음식을 소배했는데 이것은 좁쌀 5,000근에 해당하며 농민 500명의 하루 식사량에 맞먹는다고 한다. 당시 백성들 사이에는 제후일석반, 농민반년량(帝后一碩飯, 農民半年糧 : 황제 한끼 식사는 농민 반년 양식이다.)이라는 말이 또돌았다고 한다. 지금도 낙수당 내에는 자희가 간식을 들던 상이 있으며 유리판 아래에는 서호의 풍경이 조각되어 있으며 유리판 아래에는 서호의 풍경이 조각되어 있으며 금붕어를 길렀던 장치도 있어 배불리 먹으면서 눈으로 즐겼던 흔적이 있다.
낙수당을 나와 좌측으로 담을 돌아나오면 의운관이 있다. 의운관은 광서의 황후 융유가 거주하던 곳으로 옥란당의 후원이다. 용유가 자희 서태후의 친정집 질녀이다. 자희 친정집 질녀를 황후로 선택한 이유는 광서를 꼭두각시로 만들어 황권을 그의 손에 틀어쥐기 위한 하나의 술책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술책이 먹혀들지 않자 그는 옥란당에서 후원으로 통하는 후문마저 담을 쌓아 막아버렸다. 이것을 보면 자희 서태후의 계략이 얼마나 악랄했는지 알 수 있다.
자희 태후(1835 ~ 1908) 일명 서태후라고 우리에게 잘 알려진 자희는 성은 엽혁나랍(葉赫那拉)이고 1835년 10월초에 태어난 1908년 10월 22일에 세상을 떠났다. 만주족 중등 관료의 딸로 태어나 1851년 17세때 수녀로 선발되어 입궁하였다. 황제의 총애를 받아 다음해에 귀인으로 승격되었고 그후 다시 빈에 올랐다가 1856년 남자아이를 낳고 비로 승격되었다. 1861년 함풍이 열하에서 죽자 유일한 아들인 재순이 황제의 자리를 잇게 되었다. 자희는 모이자귀(母以子貴 : 어미는 자식으로 인해 귀하게 된다.)격으로 자신을 서태후라고 봉했다. 그가 자신에게 붙인 이름은 자(慈) 희(禧)등 열여석글자나 되며 줄여서 자희 황태후라고 하였다. 당시 아들 황제가 등극할 때 불과 6살밖에 되지않아 자희는 수렴청정발을 드리우고 그 뒤에서 황제의 권한을 대행하여 청왕조의 군정대권을 장악했다. 1873년 동치황제가 친정을 시작하였으나 1년만에 동치황제가 급거하자 동치부인까지 핍박하여 죽게하고 동치황제가 자손이 없자 계속 대권을 장악하기위해 자신의 조카인 재첨을 강제로 황위에 등극시켰다. 그가 바로 광서황제이다. 이때부터 제2차 수렴청정을 시작하였다. 그러나 1898년 무술변법이 실패한 후 자희는 광서를 남해의 영대에 감금한후 수렴청정이 아니라 철렴청정(발을 걷고 정치를 한다)을 시행하다 자신이 죽기 하루전 광서를 죽였다고 한다. 자희는 동치의 생모이고 광서의 이모이자 숙모이고 후에는 사모로 되었으며 우리가 영화에서 보고 잘아는 마지막황제 부의의 이모할머니다. 자희는 중국을 통치한(1861 ~ 1908) 48년동안 그야말로 중국 근대사의 있어서 봉건통치의 극치를 보인 황태후였다. 파노라마처럼 전개되는 장랑의 그림을 보면서 이야기속에 역사를 빠져 나온 것은 늦가을 오후.
완리창청 역사속에 만남을 이룬 여정 속에 그래도 다시 찾아서 다다른 곳은 우주인이 달에서도 불 수 있다는 만리장성. 고즈넉한 저녁나절 석양에 만리장성이 더욱 웅장하게 전적비처럼 스카이라인을 이루고 꽉버티고 있다. 만리장성 중에서도 八達嶺은 사통팔달 하는 곳으로 가장 많은 힘을 들여 구축한 성벽이라고 한다. 성벽위에는 용도라는 통로가 있고 약 110m마다 돈대가 있다. 전장 6,000km 중국이수로는 1만 2천리다. 진나라때부터 명나라에 이르기까지 2,000년동안 중국인들이 북방 유목민을 방어하기위해 계속 쌓아온 성벽이다. 만리장성 밑에서 하룻밤을 자고 일몰, 일출경관을 볼 수 있으면 더욱 장관이다.
용경협 요즈음 일반인에게 각광받는 용경협 맑고 청아한 새소리 천만년 흘러내려온 기암괴석으로 협곡을 이룬 용경협. 그위에서 우리는 유람을 시작했다. 구비구비 협곡을 지날때만다 기암절벽이 우뚝 솟아 나그네 가슴을 끌어당긴다. 아슬하게 괴석에 매달린 노송 그리고 암자, 천태만상의 아름다움으로 비길데 없다는 계림의 자연미와는 비길데 없지만 작은 계림으로는 손색이 없다. "하늘밖에 기이한 봉우리가 옥석인 양 늘어섰다"라는 시문을 뒤로하고 다음 계곡에 다다르니 수백m 상공의 봉우리와 봉우리를 연결한 외줄타기 자전거묘기가 나그네를 위해 연출되고 있었다. 안전장치없이 수백m 위에서 그리고 밑에는 60m도 넘는 시퍼런 수심, 협곡 유람중에 보고 있노라니 나그네 마음마저 현기증이 난다. 산은 산마다 황홀하고 물은 물대로 넋을 잃게 하니 이것이 용경협의 매력인가 보다. 뜨거운 가슴을 붉게 물들이는 용경협의 일몰 광경을 누가 한줄의 글로 표현할수 있으랴!
지금도 중국에서는 자동차를 타면 모택동사진을 쉽게 볼 수 있다. 모택동에 대한 중국인들의 믿음은 거의 신적이다. 택시안에서 운전기사 머리위에 걸려있는 모택동 사진을 보고 그 이유를 물었더니 기사는 다음과 같이 대답하는 것이 아닌가? "모택동 사진을 걸고 다니면 택시강도에 대해서 안심이 된다. 왜냐하면 강도가 택시를 털려고 하다가도 이 사진을 보면 숙연한 마음으로 돌아와 강도짓을 포기하게 된다."고..... 이처럼 아지곧 중국인들이 모택동을 신격화하느데 주저하지 않는 것은 개혁 개방이 몰고온 혼돈의 막연으로 인한 모택동 시절의 향수가 아닐까 생각해 본다.
자주 그리고 가끔은 나를 불러 일으킬수 있는 역사속의 여행을 통해 내 인생의 새로운 여행 출발지임을 말하고 싶어 오랜 망설임 끝에 다시 중국의 남단, 작은 중국 타이페이로 향하면서 오늘은 접는다.
|